송민선

주님의 보물찾기

아빠와 함께 2021. 9. 24. 10:23

눈을 뜨고, 오늘 주어진 일들에 대해 계획들을 되뇌며 원래부터 있던 반복되는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바로 ‘나’인데, 피로 범벅된 양피가 모세의 발 앞에 던져지고 땅에 속하지 않은 요소가 모세를 이용해 스스로 움직이듯이 손발이 척척 맞던 최고의 파트너인 나를 내가 주장하지 못하고, 내 의미도 내 목적도 할례받은 하루하루를 만난다.

말씀을 듣고 앵무새처럼 똑같이 말하고 행하려고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말씀이 죄라는 동일한 본질 속에서 작동해도 각자의 죄를 악기 삼아 연주하실 때 다양한 소리로 주의 의를 증거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제는 추가적인 계시가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 계시의 반복 속에서 매 순간 죄의 깊이가 달라지면서 같은 말씀인 듯 이전과 다른 낯선 음악이 연주 되기에 그 새로움이 과거의 나를 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로 규정하고 제거하는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자아 중심은 없음으로 말씀 중심만 있음으로 남는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는 원리가 끝날까지 쉬지 않고 작동하며 아무도 자신의 높고 낮음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평평하다 못해 납작하게 납작하다 못해 있는지 없는지 분간 안 되는 상태가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 언약완성에서 온 율법 외에 한 의가 만든 새로운 세계에서 내가 사는 법은 피에 묻히고 주님의 사는 법을 표현하고 주의 향기만 드리우다가 시드는 꽃이 되는 것이 영광인 것을 알아간다.

야곱이 자신의 원천에서 나오는 야곱의 요소를 보게 된 것은 기어이 하나님을 이김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야곱의 이름이 잘리고 육적 몸을 벗었을 때이다. 자신이 죽은 자인 것을 믿는 믿음이 작동할 때 비로소 의미도 없는 세상 의미를 덕지덕지 챙기고 귀히 여겨 간수하면서 어떤 난처한 곤경에서도 깨지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것이 결국 하나님과 단절된 자신만의 세계인 것을, 그곳에 고이고이 모셔둔 것이 마귀인지도 모르고 끝까지 나밖에 없는 그물에 걸려 헤어나지 못할 육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릴 때 학교에서 소풍을 가면 빠지지 않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바로 ‘보물찾기’이다. 한 번도 보물이 적힌 쪽지를 찾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 보물찾기는 그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잠시 생각 없이 걸어야 하는 시간에 불과했다. 찾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대를 했다가 실망하는 좌절감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나름의 방어 자세였고 그냥 걷다가 혹시 하나 찾게 되는 뜻밖의 기쁨을 더 크게 누리기 위한 얄팍한 계산이었다. 그런데 보물찾기가 숨기는 선생님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감을 잡고 움직여서 의도한 대로 쟁취할 수 있는 요령이나 비법이 있는 게임인 것을 안 순간부터 그나마 가졌던 기대감이나 설렘조차 사라졌다. 새로움과 기쁨을 주는 보물찾기라도 사람의 손이 닿으면 자신을 위해 온 힘을 모아 투쟁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의 일부가 된다.

교회를 다니며 직접적 간접적으로 배운 것은 천국의 보물이 담겨있는 비밀이 무엇인지를 인간이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 힌트와 방법들을 적은 지침서를 인간에게 주셨고 더 나아가 믿음의 선진들을 배치시켜 그들의 움직임에 주시해서 열심히 찾으면 찾을 수 있기에 지혜롭고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보물을 찾아서 천국에 골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비밀을 몸에 담고 말씀대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이 바로 생명으로 안내하는 길이라고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뒤를 추적했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측근들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졌다. 비밀스럽다고 하기에는 보여주신 기적이나 놀라운 말씀을 능가할 정도로 예수님은 너무 초라했고 사회를 통솔하고 아우르기엔 오히려 평범 이하라는 생각만 선명해졌기에 계속 그분을 따라가더라도 결국 그곳에 보물은 없을 것만 같은 불신이 저절로 생기게 하는 분이었다.

제자들이 풍랑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흔들린다고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깨웠다는 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다는 자들이 그분이 배에 함께 있는데 도대체 뭐가 무서웠을지 한심스럽고 궁금한 적이 있었다.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특별하고 좀 독특한 부분이 있긴 했을지라도 막상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타인은 다 그렇고 그런 인간일 뿐이라는 육적인 속내를 들켰고, 풍랑에 뒤집어질 듯한 배 위에서 아무 대책없이 잠만 자는 사회성 하나 없는 예수님이 무척 미덥지 못했을 것이다. 풍랑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예측 밖에 있기에 보여도 보이지 않는 분이고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너무 못나보이고 쉽게 무시받을 수 있는 자리에 계신 분이었다.

‘엄마같은 사람이 밖에서 어떻게 사회생활 하는지 정말 신기하네요’라는 딸의 말을 들으며 이런 싸가지없는 딸을 주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이런 내가 사회 나가서 이삭 줍듯 돈을, 생활할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 얼마가 고마운 일이니. 일용할 돈 안 주셔서 굶어 죽어도 할 말 없는 자인데’라는 생각을 잠시라도 떠오르게 하셨다면 딸과의 분위기가 그렇게 험악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 먹여놓고 입혀놨더니 입만 살아서. 너나 똑바로 해’

‘나’라는 오물 속에서 타인을 향해 나오는 말같지 않은 말이 주께서 ‘나’라는 고체자아를 쪼개시는데 쓰시는 정이 되어 다시 나를 때린다. ‘그러니까 네가 문제라고. 네가. 너나 그 말 듣고 잘 죽으라고. 골골하는 거 좀 움직이게 만들어놨더니 존재감만 펄펄 살아서 나대느냐’

야곱이 에서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절을 할 때 그는 교체되기 전의 몸은 버려지고 쏟아져 허비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 말씀에 의지해서 딸에게 지려고 했다면 그건 결국 내가 이긴 것이고 말씀을 지키려는 수작이나 의도가 더럽다고 생각하며 딸에게 막말을 한들 이것 또한 내가 이긴 것이다. 어느 쪽이든 사건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못하고 나온 모든 것은 내가 이긴 것이고 조작이다. 야곱에게 지시는 하나님, 죽음에 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시고 그분만이 나를 죄와 대면케 만들어 주시고 죄를 능가하는 용서가 감히 내가 구하고 바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실 수 있다.

보물은 땅에서 우리가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숨겨놓으신 것을 친히 찾으러 오시기에 보물이 주님에게 찾아지기까지 아무도 알 수 없고 심지어 그 보물조차도 모른다. 주께서 없는 것을 숨겨놓으셨고, 주께 발견될 때 있음이 되는 순간, 자신의 근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상성을 그제야 보면서, 나 있음에서 나를 제거하시며 함께 죽어주시는 현장에 고마움만 남고, 다시 있음이 십자가 안에 감춰지는 반복된 과정만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보물은 누구이냐가 아니라 십자가의 경로에 놓여 비춰지는 주님의 공로와 의의 불꽃같은 것이다.

끝까지 믿지 못하게 하셔서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비밀이 견지되도록 택함을 받는 자들이 철저히 잃어버림의 상태로 있게 하시니 스스로 주께 나오지 못하고 주님이 찾아오시어 들쳐메고 가시는 사건으로만 찾아짐을 당한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이 결국 그 말씀을 행위로 보이며 내가 예수님을 믿어주는 오류가 들통나게 하시고 똑똑하게 나만 믿어온 믿음으로 하나님을 잔인하게 죽이는 십자가 앞에서 얼토당토 않게 받게 되는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멍청해지고 먹먹해지며 나를 상실하는 순간에 우리는 잠시 주님의 보물이 되고 사랑 그 자체가 되나 머무르지 않는다.

모든 노력을 다 해보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아무것도 변변히 해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하늘과 땅 차이라고 여기고 살았고 다른 사람이 겪은 것이 겪지도 않은 나에게 동일한 경험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분명했다. 내가 하지 않았어도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모든 죄에 적용되는 것을 믿지 못하기에 한 것도 없이 누군가의 공로 덕분에 의로워진다는 것 또한 믿지 못한다. 믿음은 단지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뿐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뭐라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차이의 간격이 동전 양면처럼 붙어 있는 거리든지 지구에서 태양까지 떨어져 있는 거리든지 사람의 능력으로 건널 수 있는 간격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십자가를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의 믿음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근거가 거저 주심의 긍휼과 사랑에 있기에 밀려오는 동일한 속성의 다양한 사건들 안에서 질투가 올라오고 삐지게 되는 현상으로 나는 약속에서 외인이고, 그저 이방인의 자리에서 발견된다. 이 과정이 단일성으로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며 사건의 원인이 되시는 분이 질문을 한다. 테이블에 앉아서 예수님의 피같은 포도주를 받아 마시며 신기하고 놀라기만 했는지 아니면 절대로 포도주일 리가 없는 물 담긴 주전자를 주께서 상관하시는 경로를 따라 나르고 또 나르며 믿음 없음의 흔적을 그리다가 예수님이 미리 도착하셔서 만드신 처소 안에 감싸 있음을 포착했는지를 묻는다. 답은 답 자체로 보여지면 되지 답을 말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도 피도 목적지에 앉아서 답으로만 챙겼다면 내가 주를 선택한 것이 되고 나의 선택에는 아무리 최상의 결과를 맛보더라도 곧 미흡함으로 이어지기에 고마움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시 새로운 선택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나의 이름이 삭제되고 다른 이름의 몸으로 교체되지 않은 채로 있다면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그저 세상 속의 일부이다. 자아들의 세계에서 플러스 남자와 마이너스 남자가 이벤트 도우미의 다리만 쳐다보는 식으로 내 쾌감을 좀 더 만족 시켜보라는, 새로운 것으로 내 권태로움을 깨보라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던지며 말씀을 들을 뿐이다.

주께서 ‘내 다리만 쳐다보지 말고 내 몸에 같이 합류하자’라고 하시며 세상에서 찢긴 예수님 몸에서 물과 피가 쏟아진 증거인 살 조각을 먹이실 때 더이상 욕망을 담을 나의 몸은 없어지고 주님의 거룩이 흘러나올 기호의 운명에 합류한다. 주님의 욕망은 내 욕망과 합치되지 못하니 늘 내가 원치 않는 것이고 그렇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작업이 잘 되는 모습이 고요하고 잔잔한 사랑으로 오지 않고 전쟁같은 사랑으로 다가오기에 세상은 이 사랑을 이해할 수 없으나 기호들은 이런 환란 속에서 비로소 주님이 주신 자유를 배운다.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주신 기호의 운명을 따라가며 나의 시간도 장소도 목적도 모두 주님의 기호인 십자가로 빨려 들어가도록 죄에 씹어 먹히며 주님을 삼킨 운명속에 함께 감춰지고 주의 품 안에서 나를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이 기쁨의 순간이 언젠가는 영원으로 바뀌도록 이 세상에서 자취도 남지 않게 밟히고 진멸되어 결국 내가 가리고 있던 주의 온전함만 보이도록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근호

“교회를 다니며 직접적 간접적으로 배운 것은 천국의 보물이 담겨있는 비밀이 무엇인지를 인간이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 힌트와 방법들을 적은 지침서를 인간에게 주셨고 더 나아가 믿음의 선진들(선수들?)을 배치시켜 그들의 움직임에 주시해서 열심히 찾으면 찾을 수 있기에 지혜롭고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보물을 찾아서 천국에 골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속지 않으려니 속는 것이다. 없는 보물이라도 만들어서라도 주겠다는 우상숭배자들의 속임수에 대해서 안 속겠다고, 안 속겠다고 버티고 버티면서도 기어이 속아 넘어 간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은연 중에 우리 자신이 보물을 가질 자격이 있는 것처럼 자부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 껴 안고 보물 포기자가 된 바로 그 자가 천국의 보화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천국 보물을 찾고 있는 이 땅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죽게 될 것이다”(마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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