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평안 속에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환상적인 삶이 아니다. 오히려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같이 심령으로 평온한 것은 이제 어떤 전쟁같은 순간도 ‘괜찮아요’를 연발할 준비가 된 상태이다. 겉과 속이 다른 가식이나 위선이라고 한들 이미 속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이 내가 아니요, 겉으로 의연하게 표현되는 것 또한 내 의도가 아닌 것이 되니 어떤 상황을 단속하되 단속되지 않고 통제해보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더이상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 삶이다.
매 순간 이미 심판 속에 있고 심판을 삼키고 있는 자인 것을 잊지 않도록 닭 우는 소리를 수시로 보내어 주님의 품인 십자가로 달려가게 하시지 않고 예수님도 잃어버리고 믿음도 잃어버리고 아무 의지할 것이 없는 허탈감과 무력함을 가득 담은 육을 스스로 지고 처음 지점, 철저히 불신자의 모습으로 되돌려보내신다.
닭 소리가 총알처럼 사건을 유발하며 마음에 박힐 때 어떤 상황에도 정말 복음의 품에 안겨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만 바라보는 아이처럼 고요한지, 정말 죽은 자가 맞는지 확인사살을 당하며 여지없이 속에서 올라오는 더러운 것을 누르지 못하고 포장하지 못하고 분출하고 쌩쇼를 벌이는데 이 괴수를 내려다보시며 주님이 흐뭇하게 말씀하신다. “이처럼 흠이 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느니라”
마귀는 정죄 못 해서 안달 난 죄인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순서를 바꿔주신다. “내가 형님이다. 내가 처음이고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다. 마지막까지 너와 함께하는 최종 마침이 바로 나다”라는 주의 말씀 앞에 내 존재 이유, 행동의 원인 그리고 내 운명, 이 모든 주도권이 주께 넘어간 것이 믿어지고 나의 움직임의 먼저가 주님이 되고 마지막도 주님이라는 낯선 소리가 꺼질 듯 꺼지지 않는 희미하지만 유일한 등불이 되어 발걸음을 인도한다.
후회나 책임을 찾아보고자 해도 찾을 수가 없고 양심이 발동되어 찾고자 시도하는 나를 더이상 믿지 못한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는, ‘너는 너의 것이기에 네가 책임져야 한다. 누가 너를 지켜주지 않아. 그러니 힘을 길러서 너를 지켜라’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참으로 잘도 속았다. 속았기에 정죄함이 없다는 말이 빛날 수 있는 죄인으로 창세 전에 유일하게 있었던 없음의 세계를 되찾으시는 주님을 위한 있음으로 잠시 나타났다가 소멸하는 역할을 기꺼이 담당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순탄히 건넌 것이 아니라 진짜 죽음으로 들어가기까지 사탄에 장악된 세상이 주는 가짜 죽음의 위협을 뼈저리게 느끼며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죽음 안으로 진입했다. 바다가 저만치 떨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통로 양편에 덮칠 기세로 서 있을 때 그 사이를 건너는 이스라엘이 룰루랄라 신나고 신기하게 건넌 것이 아니다.
뒤에서 추격해 오는 사망에 붙잡히든지 하나님이 바다를 명해서 이스라엘을 덮쳐 죽이시든지 이미 그들은 선택에 여지없이 죽음에 포위된 상태임을 실감했다. 믿음 따위는 애초에 없었고 몰아세우는 사건 속에서 계속 떠밀리며 난데없이 갈라지며 나온 길을 따라 걸으며 없음에서 생긴 그 길을 드러내는 표시 선이 되고 있음을 자기 살기 급급한 그들은 볼 수 없었다.
그들이 애굽군사의 시체가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고도 자신들이 그 시체와 다를 게 없음을 생각지 못했던 것은 이스라엘과 애굽군사와의 차이가 오직 피 발림의 유무뿐이었음을 잊은 까닭이고 어린양의 피에 삼켜져 희생이 만들어낸 생명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한계는 십자가 안이 아직 부재의 상태라 그들이 잠시 맛보았던 홍해의 죽음이라는 현실에 머무르지 못하고 지나치기에 다시 내가 살아있다는 가상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살 궁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죽음의 연장 선상에 있음을 자각하고 믿음 없음을 본격적으로 털리기 위해 광야로 보내졌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부스러기 은혜를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 광야의 축복을 알지 못한 채 원망과 탐심이라는 죄로 범벅되어 죄와 함께 망해야 하는 모습을 그대로 노출해 주었다.
이스라엘이 본보기가 되어 인간이 육의 한계에 도달할 때 진짜 하나님 앞에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하나님은 결코 인간과 함께하실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이로 인해 광야같은 이 세상이 바로 불뱀이 우글대며 인간을 유린하는 지옥임을 알게 되고 철저히 육체인 인간은 뱀에 물려 중독된 채로 나에게 매료되고 땅에 매어 망하는 운명만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죄인을 대신해 저주받으신 분의 저주를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에 역으로 강간당하고 예수님이 땅에 자신의 몸으로 꽂으신 십자가의 방향성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게 되었을 때, 결국 내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음을, 오히려 내 뜻을 꺾으려는 힘에 반항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자인하게 된다.
이스라엘이라는 살아있는 이름이 야곱이라는 죽은 이름을 감싸며 죽은 자 안이 하나님이 살아 움직이시는 공간이 되는 것처럼, 성전의 모습은 죽음을 내뿜는 몸이고 그렇기에 진정 살아있는 주님이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이다.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진짜 죽음의 세계는 성전 안에만 있고 유일한 생명도 그곳에만 있기에 성전에서 나와서 성전으로 말미암아 성전으로 통하는 여정에서 보이지 않는 주의 사역만이 성령을 통해 펼쳐질 성전들이 시체를 감싸는 생명싸개를 통해 생산된다.
주님이 육체와 함께하실 때 어떤 모습으로 인간을 만나게 되시는지 생생하게 실상이 드러나는 장소가 바로 성전인 것이다. 주의 교회가 된 자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은 육체를 장악한 죄의 힘보다 더 센 용서의 힘이 나오는 원천이 중심부에 박혀 그곳에서 나오는 능력이 희생의 모습으로 점차 확장되기에, 원래 중앙에 숨어있던 악마의 죄악상이 외곽으로 밀려 나가며 성도는 철저히 주의 원수가 자신임을 보게 된다.
우리 안에 죄의 본능이 난리부르스를 출 때 이런저런 핑계 찾지 말고 육이 육으로 남도록 제발 철저히 망하는 쪽으로 가게 하시기를 구하게 되고 ‘내가 바로 주님의 웬수입니다’라고 외치며 십자가를 유발하는 사건 속에서 던져져 제물과 함께 소각되기를 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은혜이다.
도마가 내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 믿는다고 하지 않고 왜 그분의 못자국에, 그분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본 후에야 믿겠다고 했을까. 보면 믿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오해인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도마의 고백을 통해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고, 아담의 육을 입은 인간의 마땅한 최후를 보여주시고 저주를 담당하신 하나님이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이 결코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그래서 한 사람도 자의로 구원될 수 없음을 확실히 하시며 자신을 내어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불신자에게 친히 찾아오시어 이 세상이 일심동체로 예수님 몸에 만든 창 자국과 못 자국에 접촉을 허락하시며 영원히 잊지 못할 죄를 보게 하신다. 하나님을 죽인 죄. 있음은 결코 없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음이 지당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내주신 성령이 택한 자들에게 임했을 때, 마귀의 정죄와 양심의 가책에 갇힌 자들을 해방하시는 주님의 선물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믿게 된 믿음이다. 이는 그들을 위로하려고 주신 믿음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믿음이 스스로 작동되며 하나님 오른편의 능력을 펼치실 도구로 철저히 이용하시겠다는 주님의 선전포고이다.
성도와의 교제가 아름다운 이유는 육체가 투명한 유리막 같아서 내부에 우글거리는 귀신들이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가리는 훼방 짓거리를 서로 그대로 보이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마귀에게 눌린 채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고, 견고한 자기 의가 기적같이 무너지며 주님의 용서의 능력이 껍데기를 투과해서 비추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죄 없는 자도 없고 그 죄를 정죄치 않는 분의 의가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음을 믿을 수 있는 자도 없다. 나조차도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나를 규정하는 것에서 더 나가 남을 규정하고 나 또한 남의 규정을 받으며 어떻게든 내가 누구이고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찾고 있을 때, 너 와 나를 뭉게고 나도 어쩔 수 없고 너도 어쩔 수 없는 그러나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럴 수밖에 없는 힘의 원천을 고백하는 자리에서,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 있을 때 주와 함께 있음이 느껴지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주님만 거기 계시는 기적을 체험한다.
이때 우리는 찔찔 짜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펑펑 울 수 있다. 아픔이 합당함을 알게 해주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버려지고 심판받아야 함을 알게 해주신 그분에게 너무 고마워서 울 수 있고, 그분이 친히 담당하신 심판을 삽입시키심을 기뻐하며 죽은 자를 통해 철저히 주님의 지시만 표현되는 사건으로 감격스러워서 울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이 그런 주님 자신의 모습에 기뻐하시기에 영문도 모르고 같이 웃을 수 있다. 이 미친 모습을 세상이 어찌 감당하기를 바랄까. 비밀스러운 은사가 작동하는 몸끼리 서로 마주치고 부딪치는 현장이 신기해서 그냥 웃는다.
이근호
속지 않으려니 속는다. 왜 속으면 안되고 왜 버림받으면 안되는가? 악마가 인간 대신 답변해준다. “나는 절대이니까!” 주님을 만남으로서 내가 곧 신으로 행세하며 살아온 것이 들통난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주’님이 따로 계신 줄을 몰랐다. 세상은 ‘주님’ 이야기이지 결코 ‘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악마는 ‘나’의 이야기에만 몰입토록 한다. 이런 식으로 맨날 악마에게 속아 넘어 간다. 그래서 차라리 속자. 그래서 내가 신이 아님을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