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죽은 자에게 말 걸기

아빠와 함께 2021. 9. 28. 11:39

강남-누가복음 7장 14절 (죽은 자에게 말걸기) 210907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7장 11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방금 읽었던 본문 가운데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죽은 자와 우는 자. 우는 자 입장에서 죽은 자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죽은 자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거에요.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청년이 죽었어요. 왜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일이 잘못되게 진행되는가. 이런 생각이 후딱 들게 마련입니다.


죽는 일이 무슨 일이냐 하면은 죽는 일, 이걸 잘못된 일로 간주하는 거에요. 누가? 우는 자들이. 죽었다고 좋다고 웃지는 않잖아요. 운다는 말은 죽음 자체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간주하는 겁니다.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기도 하고.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기도 하고.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우는 자 입장에서 본인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산 자로 간주하죠. 자기는 살아있다고 본거에요. 죽은 자가 생각하면서 누가 죽게 되게 되면 죽은 자의 그 공간과 살아있는 나머지 살아있는 우리들과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차이가 나고 죽은 자와 산자는 따로다. 따로국밥 알지요. 따로다.


두 번째는 죽음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거에요. 98세에 노환으로 돌아가셔도 일이 뭔가 잘못된 거 같아요. 그럼 98세에 돌아가는 게 잘못됐다면 뭐 어쩌란 말인가. 99세는 살아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99세 연말에 크리스마스에 돌아가셨다. 또 뭔가 일이 잘못됐어요. 100세는 채워야지.


자꾸 이 죽음을 일어나서는 안 될 일로 간주하는 그게 소위 산 자들의 특징입니다. 죽음을 애석해 하면서 죽은 자를 애석해 하면서 따로 처리하려고 하는 거에요. 따로. 죽은 자를 자기 안방에 모시고 같이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죽은 자 같으면 장례식장에 빨리 처리해야 돼요. 보람상조 있죠. 보람상조. 빨리 맡겨가지고 처리해야 돼요.


어떤 인상이냐 하면은 죽은 자는 산 자와 더불어 있으면 이것은 기분이 찝찝하다. 귀신 나올 수가 있어요 자칫하면. 그래서 멀리해야 될 사태로서 죽음 사건을 밀치는 거에요. 울면서 밀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차이점이 이렇습니다.


살아있는 자의 특징은 뭐냐? 말은 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죽은 자의 특징은 뻔하지요. 산 자가 말을 한다면 죽은 자는 뭘 못한다? 입을 다물고 있다. 다문다. 더 이상 말을 못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산 자는 살아있다. 인간이 말하는 살아있다의 특징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이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살아있는 사람은 계속 말을 해요. 왜 자꾸 말을 하느냐 하면은 누굴 만나고 싶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아무도 안 만나주고 찾아갈 때도 없을 때 그것은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 아이는 엄마와 함께 살았지요. 과부인 엄마와 살았지요.


가족이라는 것은 가족 제도,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피하고 싶은 하나의 방법입니다. 내가 평생토록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을 내가 만들고 싶다는 거에요. 내가 갖고 싶다는 겁니다. 내 곁에 두고 싶다는 거에요. 그래서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거에요. 옆에 누구와.


그 이러한 규정이요.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는 과학적으로 숨을 쉬는 것을 살아있다고 보잖아요. 그러나 사회적으로 숨을 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숨을 쉬고 있기 때문에 자꾸 근질근질해서 끊임없이 뭐가 내뱉어지느냐 하면은 누굴 향하여 계속 내 속의 말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계속해서 말을 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니까 누가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나 호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비로소 우리는 숨 쉬는 느낌을 받습니다. 야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거구나. 가족 좋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심심하고 외로울 때 우리 한번 만날까? 만나주는 것. 그 때 살맛이 나는 거에요. 중년 남자들이 퇴직하고 난 뒤에 친구 찾는 이유는 술 먹고 싶어서 친구 만나요.


왜 집에서 혼자 아침 이슬 먹으면 안 되느냐. 맛이 없어요. 왜냐 하면은 술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한테 에너지를 충전하는 거거든요. 기름 넣듯이. 술이 들어가야 술술술 말이 나와요. 술이 들어가야.


복음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아무것도 신학도 모르면서도 교회에서 새벽제단 꼬박꼬박 안 빠지고 나오고 앞자리에 앉는 이유는 뭡니까? 새벽제단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속에 있는 모든 말을 말릴 새도 없이 룰루랄라 룰루랄라 막 터져나와요. “주여 주여 주여” 삼창하고 난 뒤에 막 쏟아내요.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이 새벽제단을 쌓아야 그것도 고요한 시간에 새벽제단을 쌓아야 돼요.


왜 시장통에서는 안 되는가. 내가 말할 때는 입을 다물어야 돼 너는. 너는 입을 다물고 내 말만 해야 돼. 그래야 내 말이 먹혀요. 내가 살아있는 게 먹혀요. 내가 말하는데 큰소리 더 쳐버리면 이거는 나는 살아있는 기분이 못 들어요.


그래서 부부 싸움할 때 어떻게 합니까? 둘 다 큰소리하잖아요. 한쪽은 말할 때 좀 들어줘야 하는데 한쪽 말할 때 “안다 안다” 하면서 이야기해버리면 그때는 속으로 표현을 못하지만 너라는 존재는 나의 삶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가지고 “에이 죽어버려라” 후라이팬들고. 말로 안 되니까 그냥 후라이팬들고 설치는 거에요.


내가 말할 때 입 좀 다물면 안 되겠느냐. 상대방이 있다가 들어봤자 내가 한두번 듣나. 그 잔소리를. 뻔한 이야기 왜 하느냐. 지금 뻔한 이야기라도 지금 누가 옳고 그르다가 아닙니다. 내가 너로 인하여 내가 살아있다는 티를 좀 내자. 티를 좀 내자.


그렇게 싸워놓고 그 다음날 되가지고 남편이 사고 나서 죽어버리면 울기는 또 혼자 다 울어요. 아이고 이 나쁜 사람. 죽은 사람보고 나쁘대. 날 두고 그냥 가다니. 내 잔소리 들어줄 사람이 너 밖에 없었는데 네가 죽어버리면 나는 무슨 재미로 사나 이런 식이에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을 죽은 자에서 낫게 했을 때 뭘 했습니까? 앉아서 뭘 했다 했습니까? 말을 시작한 거에요. 그리고 산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애도하고 울면서 말했지요. 이 모든 사람들 주위에 있는 모든 청년들 빼고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오해했습니다. 본인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죽은 자와 산 자 따로 다른 공간에 있다고 생각한 거에요.


이 사람들이 옆에 있던 과부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죽은 청년을 우리들처럼 살아있는 산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는데 죽은 청년은 산 사람은 죽은 자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죽은 청년을 살리는 것은 죽은 예수님만이 죽은 청년을 살릴 수 있어요.


왜냐 하면은 이 청년은 이미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기존에 살아있다고 오해하는 그 공간에서 벌써 빠져나왔어요. 죽은 자를 다시 가가지고 죽은 자를 이쪽 인간세계로 끄집어내는 것은 여기 산 사람이 하지를 못해요. 예수님이 죽어서 합류해줘야 돼요. 예수님이 합류해서 끄집어 낼 때 죽은 자에서 산 자로 오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인간들 보기에 예수님도 살아있고 본인도 살아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오해. 산 사람들의 오해에요. 예수님은 살아있어 보여도 실은 산 인간들 속에 포함되지 않는 존재에요. 왜 이유가 뭐냐? 아까 강의 처음부터 했지요.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이 인간들의 말이 전혀 먹히지 않고 통하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은 것은 죽은 청년만 말 들었어요. “일어나라” 했을 때 일어났어요. 이걸 산 사람한테 해볼까요? 귀싸대기 맞습니다. “죽은 자여 일어나라!” 왜 나한테 그런 소리 하지? 목사님 저 살아있어요. 그건 죽은 자한테 이야기하지 살아있는 나한테 그런 소리 하면 안돼요 하잖아요. 주님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일단 죽은 자로 간주하고 내뱉는 모든 말씀이에요. 모든 기적과 말씀이.


그러니까 살아있다고 여기는 사람한테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는 거에요. 알아듣지를 못해요. 살아있다고 새벽제단 해가지고 목사님도 새벽에 퇴근해야 되는데 두시간 동안 새벽기도 하면 교회 문은 누가 잠그나. 사찰 있는 데는 사찰이 잠그겠지만. 새벽마다 울면서 무슨 기도하겠어요. 한 맺힌 게 많아가지고 “주여 주여 그저 우리 남편 그 고집 센 우리 남편 교회 오게 하옵소서.” 교회 안다니는 남편이 교회 와서 뭐 할라고. 뭘 얻기 위해서?


교회 나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아내하고 남편하고 교회 이야기하고 말이 통하잖아요. 말이 통하면 아내에게 어떤 일이 주어집니까? 아내 자신의 인생 영역에 남편이 보조적으로 들어올 수 있지요. 그러면 먼저 선배 격인 교회 선배 격인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자, 말은 살아있다는 증거죠. 그러니까 남편이 살아있는 것보다 더 우세해서 더 월등하게 더 제대로 쌩쌩하게 살아있는 것은 바로 말의 주도권을 쥔 내가 남편보다 더 살아있는 존재가 되고 더 살아있는 존재란 말은, 남편의 가치보다 내 가치가 더 우세하다 이 말입니다. 우세. 부등식 알지요? 5<7 이 갈매기 표시.


왜? 내가 말빨이 세니까. 남편 돈 못 번다. 나 더 번다. 부등식이 성립되지요. 더 쎄지요. 그런데 말이 안 통할 때는 결정적인 말 한마디만 하면 돼요. 돈도 못 버는 게. 이렇게 하면 게임 끝. 게임 끝났어. 더 이상 말하지 마. 그러면 남편이 “에이씨” 하면서 편의점 가서 소주 하나 사가지고 아이고 내가 참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 말이 맞아요. 본인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맞아요. 이 대중가요 노래 가사에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잘 표현한 가사가 있어서 제가 한번 적어와 봤습니다. 정확하게 적어 볼게요.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김광석 노래 아닙니까. 김광석 노래 서른 즈음에. 청승 중에 청승적인 노래지요. 최고의 청승맞은 노래지요.


김광석이 바로 33살 때 죽었잖아요.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니고 떠난 것도 아닌데. 왜 그 여자는 왜 나를 떠났냐 이 말이죠. 자기한테 물어야지. 내가 그 여자가 왜 필요하냐? 그 여자가 필요한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누구를 찾고자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은 말로는 뭐 사랑한다 좋아한다 그리워한다 하지만 본인이 본인이 그립지요. 내가 살아있는 내가 그립고 내가 살아 있는 보람이 그리운 거에요. 네가 없으면 내가 살아있다는 보람이 없다는 거에요. 난 너 때문에 산다는 거에요. 이런 노래가사 256000개지. 그 노래가 전부 다 그 노래에요.


특히 자기가 살아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죽은 것을 뭐로 보느냐? 창피한 짓으로 보는 거에요. 창피한 짓으로. 창피스러운 거죠. 죽는다는 게. 죽음이라는 것은 뭐가 잘못되었다 일이 잘못됐다는 거에요. 그 다음에 이게 창피스럽다 이거에요. 그런 바로 이러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인간들의 이 세계, 이 더러운 세계, 자기가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 세계에 주께서 하늘에서 뛰어내려왔지요.


죽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게 아니고 네가 죽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지극이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이게 봉준호 감독이 했던 유명한 대사가 있어요 기생충 영화에 유명한 대사를 제가 패러디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느니라.” 이게 믿음이거든요. 주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는 거에요. 누굴 죽일 때도 죽기 전에 계획도 있지만 죽고 난 뒤에 계획도 주님 다 알아서 하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죽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란 이 말은 모든 생명은 지상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어요. 연결되어 있다 이 말이죠. 죽어야 사는 거에요. 복음을 이렇게 전해보고 그 수십 년 전해 봐도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면서 여전히 마지막에 가서 결국은 복음을 거부할 수밖에 없고 차버릴 수밖에 없고 외면할 수밖에 없는 그 한 복음의 내용이 뭐냐 하면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나는 이미 죽었고” 이게 안 믿어지는 거에요.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죽었느냐 이 말이죠. 그건 교회 교인들이나 목사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 그게 먼저 오다 보니까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말씀이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차단되어 있어요. 세상에서 사람들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 그 막이 주님의 복음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다에 대해서 전혀 감이 없는 거에요. 암 걸려야 좀 느낄까. 암 걸려도 말빨이 살아있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게 주님의 말씀은 인간들이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 듣는 이야기만 한 겁니다. 그래서 그 말은 믿는다고 하면 믿지 마세요. 못 알아듣는데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어요. 뭐 신학을 했습니다. 그건 완전히 거짓말이고요.


이걸 알아야 돼요. 진짜 주님 말씀을 복음을 알아들었으면 이런 느낌 가져야 돼요. 사는 게 화근이다. 내가 살아있는 게 골칫거리에요. 누구한테? 주님한테는 골치가 아닌데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주님의 뜻을 계속 훼방질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내가 골칫거리에요.


살아있다는 것은 뭐한다? 사람을 만나고 싶고 나의 속의 있는 말을 그 사람한테 전달하고 싶다. 그러면 남들은 뭐냐?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네가 호응 좀 해주고 쫌 증명 좀 해줘. 그러면 내가 너한테 맛있는 것 사주고 돈 도 주고 할테니까.


제발 내가 나는 내가 죽은 것은 내가 죽었다는 것은 뭔가 일이 잘못된 것이고 죽었다는 것은 이것은 내 뜻도 아니고 따라서 죽은 것은 재수 더러운 것인데 재수 더러운 그것에 내가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 나는 살아 있어야 되고 살아있다는 것을 호응해줄 누가 필요한 거에요. 나는 그렇게 느끼는데 너도 그렇게 느끼느냐고 누가 호응을 해줘야 해요.


나이 들어서 나이 70,80 같이 살 때 연세 많은 두 부부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뭐냐 하면은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거에요. 영감 오늘도 혈색이 좋네. 그러면 남편이 있다가 당신은 갈수록 예뻐. 둘 다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어. 둘이 콤비에요. 죽이 맞아요. 중간에 죽은 자가 개입이 안 되어있고 둘 다 멀쩡히 살아있는 게 이게 화근이에요. 화근. 이게 화근이에요.


회사에서 사장이 직원들에게 닦달하고 엉터리같은 말도 안 되는 업무를 시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자기가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너는 군소리 말고 따르라. 왜? 그럴 때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그 살맛을 네가 좀 호응하라고 그래서 네가 돈 받아먹는 거야. 사장이 사장답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직원들에게 월급 주는 거에요. 세상이 다 그런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사는 것이 쉬워요? 죽는 것이 쉬워요? 질문입니다. 사는 것이 쉽습니까? 죽는 것이 쉽습니까? 문제가 너무 어렵지요? 말하는 게 쉬워요? 입을 닫는 게 쉽습니까? 말하는 게 쉽지요. 그래서 죽는 게 쉬운 거에요. 계속 죽은 자가 죽은 티를 내는 게 쉬운 거에요.


진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없어줘야 생명의 연결된 그 선, 생명에 연결된 선이 그 때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내가 사는 게 화근이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죽는 거지. 그럴 때 일단 자기를 더 살고자 하는 기대와 소망과 욕심에서 자기가 포기 못했다는 뜻이거든요.


기도해서 살려보련다. 암 낫게 해보련다 라든지 기도해서 가정이 화목해보련다. 이런 것을 아예 나는 완전히 포기해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동안 새벽제단해가지고 뭐 한 맺혀가지고 두 시간 세 시간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저도 새벽기도를 20년 이상 계속 했거든요. 결석도 안하고 새벽기도 했어요. 궁금해서 무슨 내용 말하는지 들어보니까 같은 말을 반복해요. 신선하지가 않아. 같은 말을 반복해요.


왜 반복하느냐? 중언부언해야 효과가 더 있다고 보는 거에요. 간절함이거든요. 간절함. 절실함, 간절함. 그 사람들은 하여튼 마태복음 6장 예수님 말씀 안 들어본 거 같아.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특징이 뭐다? 그냥 중언부언 같은 말 또 하는 거에요.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계속 주시옵소서. 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여 제 이 답답함과 컬컬함을 아시겠지요?


컬컬하다는 단어가 교회에서는 컬컬함을 쓰더라고요. 내가 아는 컬컬함은 막걸리 마실 때 컬컬함인데. 그 때 단어가 컬컬함이에요. 컬컬하게 속 시원하게 내려간다. 기도할 때 컬컬함. 내가 들을 때는 뭐냐? 막걸리 대신 기도. 아 그렇게 해서 화풀이하는구나.


기도를 한다는 것은 결국 뭡니까? 내 사는 게 이게 창피하다 이 말이죠. 내 인생이 실패자 같애. 실패자 같아. 아무리 봐도 실패 같아 이건. 그게 부끄러워 죽겠어. 내가 부끄러워 죽겠어. 사는 게 부끄러워 미치겠어. 그런데 옆에 와가지고 돈 내놔라 죽인다 하면 여기 가져가세요. 그렇게 본인이 죽고 싶어 하면서 막상 누가 죽일려고 하면요 코로나 마스크 제일 먼저 해요. 살려고.


이 세상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 심리, 인간의 심리 상태를 그리고 주님의 뜻과 심리 상태를 한꺼번에 아는 그런 문장을 적어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모든 관계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게 이겁니다. ‘예의 바르다. 예의 바르지 않다.’ 이게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예의 바르면 네가 나를 살아 있는 산 사람 대우해주는 것이고 예의 바르지 않다면 나를 개무시하는 거에요. 인간은 돈이 중요하고 뭐라 하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해가지고 진짜 한끼 밥 먹을 데도 없고 이래가지고 한 두시간 짜리 아르바이트 해가지고 돈 2만원 받는 그런 직장을 어떻게 구했다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이 더러운 짓을 하는 것도 일단은 밥 먹고 살아야 돼. 나와 내 새끼는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돈이 궁한 사람이 돈 안 받고 가는 경우 딱 한 경우 있습니다. 봉투에 돈 넣어가지고 아줌마 오늘 수고했어요 라고 이렇게 주게 되면 아이고 다음에 또 써주세요 이렇게 하는데 돈 2만원 던져보세요.


더러워서 안 받는다!! 방금 전까지 곧 죽겠다 해놓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더러워서 그 돈 안 받는다 더러워서. 인간 세계에서는 전부 다 아무리 내가 가난하고 가난이 창피스럽고 몸 아프고 추접스럽게 살아도 더럽게 살아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경계선에 있더라도 노골적으로 더럽다는 소리는 하지 말란 말이죠. 나를 인간 개무시를 하지 말아라. 결국 인간은 자기의, 자기 잘남 때문에 버티고 있는 거에요. 이거 무너지면 자살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옛날에 1960년대 70년대 저의 20대 그때에 집에서 촌에 못사는 사람들이 도시에 잘 사는 좋은 집에 일하잖아요. 아는 친척에 이런 사람 집에. 그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식모라고 불렀습니다. 식모. 지금 누구보고 식모라고 하면은요. 진짜 돈 안 받고 오히려 던지면서 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더러운 뭐라고 욕할 거에요.


식모가 말이 이상하다 해가지고 저는 도대체 식모라는 말이 왜 이상한지 모르겠는데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은 파출부로 바뀌었습니다. 파출부 좀 쓰시다가 이것도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든다 해가지고 이걸 뭐로 바꿨느냐. 도우미로 바뀌었어요. 도우미. 도우미 이것도 기분 나쁘다 해가지고 대리주부로 바뀌었어요. 대리주부. 이것도 바뀌었어요. 대리주부에서 유식하게 영어로 바뀌었습니다. 파트너 매니저.


한번 분석에 들어가 봅니다. 식모는 ㅅ+ㅣ+ㄱ+ㅁ+ㅗ입니다. 이게 왜 기분 나쁩니까? 이게 왜 기분나빠요? 사회는 호명하면서 누가? 사회가. 사회 이데올로기가 이념이 그 시대 사상이 나를 호명해줄 때 내가 뭐가 되느냐? 비로소 나는 나 다움이 돼요. ‘주체’가 되는 겁니다. 사회가 나를, 글자가 문제가 아니고 ㅅ,ㄱ,ㄴ이 문제가 아니고 사회가 나를 부를 때는 그냥 부르지 않고 계급화 된 그 체제를 구조를 전제로 해서 나를 불러줘요.


따라서 그 부르는 순간 나는 뭘 느끼느냐 하면은 전체 이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떤 위치인가를 본인이 스스로 그걸 시늉을 하는 그 주체의 내용을 그런 식으로 사회가 채워주는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 있는 인간이 된 겁니다. 가난하다고 다 자살합니까? 자살 왜 해요? 가난하다고 자살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주체의 내용을 내 사람들이 그걸 인정을 안 해줄 때 또는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내가 스스로 뭔가 내가 실수 잘못해가지고 그걸 훼손했을 때 내가 이 꼴로 남한테 못 나서니까 차라리 장렬하게 내가 나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런 현상을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망상이라고 하고요 이 망상에 있는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정신분열자. 환자. 정신병자에요.


고로 모든 인간은 뭐다?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에요. 왜? 사회가, 남들이 불러주는 그것이 나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망상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집사로 불러주게 되면 그 순간 집사가 될려는 이상한 짓거리를 합니다. 교회가 장로 시켜주면 장로 되는, 목사 시켜주면 목사라는 이상한 짓거리를 해요.


그 목사라는 이상한 짓거리 내용은 어디서 주워 모읍니까? 기존에 있는 목사, 장로, 집사에서 끄집어 와가지고 그게 ‘나’라고 조작에 나섭니다. 그 현상이 무슨 현상이냐? 정신병 현상이에요. 인간은 정신병자에요. 성경적으로 말해서 전부다 마귀 들린 자에요.


주님의 뜻은 뭐냐? 차라리 죽어버려라. 죽어 있으면서 죽음을 모르니까 차라리 네가 죽임으로 말미암아 산 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상관없다는 그 이유 때문에 살아도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될 게 아니냐. 기회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의 바르다 안 바르다 그걸 묻는 게 아니고 그럼 주님은 어떻게 보느냐?


예의 바르다 안 바르다 이건 인간 세계에서 통하는 거죠. 인간의 주체입니다. 호명할 때. 누가 나를 호명해 줄 때 거기에 맞추어서 갑자기 자기 옷 가짐, 몸 가짐, 행동, 태도 돌변하지요. 돌변하지요. 특히 의사들, 가운 입은 의사와 가운 벗은 의사 다르잖아요. 다르지요. 가운이라는 그 얇은 천 안에 있는 나는 똑같은데 뭐 하나 걸치게 되면. 그 판사들 법 복 입게 되면 다르잖아요. 그래서 목사들 가운 좀 입지마라.


어떤 사람은 가운 입자하고 어떤 사람은 남방 입자고 하는데 남방 입는 건 그거는 예의가 아니지요. 자기 맘대로 살란 뜻은 아니잖아요 그게. 왜냐 하면은 나 내 마음대로 산다 건들지 말아라 이것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희생하기 위해 봉사하기 위해 살아야지요. 자기 나 이 정도야 과시하면서 사는 게 아니잖아요. 왜 자기만 생각해. 주님 뜻은 뭔데? 간단합니다. 너무 간단해요.


모른다, 안다에요. 이겁니다. “주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니라.” 끝.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주 예수 나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말은 너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아느냐? 죽어야지. 죽어서 죽은 자가 죽는 거에요. 뭐 억울해할 필요 없어요. 죽은 자가 죽는 거에요.


죽은 자가 죽어 놓고 그 다음부터는 뭐냐? 영생에 쓸데 있다 없다는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은 주님이 결정하는 거에요. 죽었으니까 나를 건져달라고 죽었는데 눈 반 떠가지고 시간 벌써 두 시간 반 지났는데 지금 똑똑 할 때 됐는데 이거는 지금 죽은 게 아니에요 그거는요. 죽은 척하고 있는 거지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그건 죽은 척 하고 있는 거에요.


부족한 게 아니고 부족합니다를 그걸 무기로 삼아서 대단한 주의 종으로 착각 자기를 꾸미고 있는 거에요. 부족합니다. 갑자기 목소리 이상하게 되가지고 할렐루야 믿습니다. 부족합니다.어제 기도 너무 해서 목 쉬었다 이겁니다. 왜 목사가 그런 짓 하느냐 하면은 이 사회가 능력있는 목사, 카리스마 있는 목사가 외형적으로 나타나야 된다고 이미 기존의 교회가 완전히 교회를 망쳐놓은 거에요.


그게 하나의 전통이 되었고 뭐 성경을 아나 복음을 아나 아는 것은 뭐냐? 흉내 내기의 연속. 이거 흉내 내고 저거 흉내 내가지고 비스무리하면 다 먹히거든요. 먹힌다는 건 돈 생긴다는 뜻이거든요. 먹히면. 제가 강의 때 그런 이야기 얼마 전에 했어요. 인격적으로 학식적으로 인격 있고 학식 있는 덕망 있는 목사를 대형교회, 전통 있는 교회에서는 그걸 당회장으로 모신다. 그런 이야기했지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덕망 있고 인품 있는 목사가 없어요 이 세상에. 전부 다 정신병자들인데. 정신병자들인데 무슨 덕망 있고 덕망 있는 척을 하고 인품 있는 척을 하지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네가 그 사람의 비밀을 알아? 이 세상 사람들의 오해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어떤 아주머니가 뜨개질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얼마나 남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지 뜨개질을 이렇게 하니까 옆에 지나가는 아줌마가 나도 뜨개질 한 20년 했는데 그 뜨개질을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면 쉽게 됩니다 라고 가시는 길 가면 되는데 간섭질을 한 거에요. 그 사람이 뭘 모르느냐 하면은 이 사람이 뜨개질하는 게 아니고 속에 열불 나서 하는 거에요.


그 열불을 모르는 거에요. 열불을. 뜨개질 연구한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딸이 학교 끝나고 와서 피아노치는 거 피아노 연습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열불 나서 치는 거에요 지금. 네가 나를 알아? 몰라요. 아무도 모른다고요. 뭘 알아요. 상담을 해. 뭘 상담을 해요. 자기도 모르면서. 남을 뭘 상담을 해요. 인간은 모릅니다.


그러면 알아야 됩니까? 아니요. 몰라야 돼요. 몰라야 죽은 사람이 되는 거에요 우리가. 몰라야. 뭐 십자가 알고 언약, 신학 성경 100독하고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게. 저 성경 100독 한건 맞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십자가도 모르겠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른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내가 아는 것은 모른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야 돼요. 내가 모르는 것도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아요.


이게 왜 그러느냐?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내 계획 플러스 주님의 계획이 아니고 그냥 주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주님의 계획만 있으면 돼요. 그 앞에서 나의 계획은 매일같이 접어야 돼요. 나의 계획은. 세상 어느 한순간도 내 계획대로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귀에 의해서 죽은 인간이면서도 마귀가 살았다고 우기면서 계속 살게 하는 게 이거는 창세기 3장에 나와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뭘 보느냐 하면은 네가 살아있다고 보지 않고 네 안에 선과 악의 지식이 살아있으니까 그걸 버리면 안 되잖아. 이게 악마의 이야기에요. 선과 악의 지식. 윤리 도덕이죠.


네가 윤리적으로 양심이 살아있으니까 그 양심이 아까워서 포기하면 안 되지. 이걸 계속해서 지나가는 귀신들 마귀들이 계속해서 지나가면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계속해서 나를 쑤시는 거에요. 여러분 자신을 계속 쑤시는 거에요. 똑바로 살아 인간아. 이런 식으로. 누가 누구 보고? 내가 나보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 보고. 주부라면 주부답게 해야지. 가장이면 가장답게 해야지. 계속 지나가는 마귀가 이야기해요.


그 마귀 짓을 교회에서 누가하느냐? 목사가 해대는 거에요. 가정의 날 때. 가정 주간. 아 진짜 못 듣습니다. “어어어어어~~~” 이러고 싶어요. 이게 윤리 도덕인지 교양시간인지. 다 뻔히 아는 이야기. 평소에 교회 안 나와요 매일같이 내가 나를 닦달내던 그 말이에요. 닦달내던 그 말이잖아요. 내가 나를 평하고 거기에다 벌칙까지 주고요.


내가 나한테 지시해요. 너 오늘 밥 먹지 마. 그 따위 짓 하고 입에 밥이 들어가? 양심이 있어? 인간아. 그럼 밥을 안 먹으면 좀 좋아지는 것 같아요. 왜? 자기가 알아서 자진해서 손 들었기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이라고요? 선악이에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그대로 유지하라고 지나가는 마귀는 매일같이 와서 이걸 자꾸 우리에게 들이대는 겁니다.


70을 살면 70년 동안 시달리고요. 80을 살면 80년 동안 시달리고 90살면 90년 동안 시달립니다. 나이 한 90되어보지요. 젊은 것들이 와가지고 연배가 그만큼 됐으면 행동 똑바로 해야지요. 어른 대우받을려면 어른답게 행동해야 대우받지요. 이런 소리 들어봤습니까? 남들도 이야기하지만 본인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본인도. 본인이 본인보고 이야기한다고요.


주님께서는 이 선악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이 선악을 가지고 이걸 가지고 모른다에요. 모른다. 내가 모르는 이유는 꼴에 안다는 게 있기 때문에 모르는 거에요. 주님에게 안다가 막혀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온 것은 죽음과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 연결성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의 계획에 맞게 주님의 계획이 뭐냐? 죽이는 거에요.


자, 주님의 계획은 이겁니다. 예수님 자기의 죽음을 단발성으로 끝내는 게 아니고 이걸 총체적 사건으로 퍼트려나가는 거에요. 성령을 통해서. 퍼트려나가죠.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이 왔을 때 그 제자들 한번 보세요. 누가 뭐래도 구원받은 자의 확장이잖아요. 확장이죠. 제자들, 사도들. 그 사람들의 사도 된 특징은 뭐냐? 예수님의 부활을 만난 사람이고 성령 받은 사람이죠.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더 이상 살고자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기 가치 의미를 본인의 행함에서 찾지 않는다는 거에요. 이걸 제가 대구 강의에서 자기가 자기를 평하지 않는다. 평가하지 않는다.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 나왔지요.


간음한 여인인데 간음한 여인의 협박 공갈 죽인다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이었지요. 바리새인 보낼 때 그 간음한 아줌마 뭐라고 했습니까? 아저씨들 가세요 가세요!!자기도 죄가 있으면서. 이랬습니까? 그 간음한 여인은요 자기가 죽은 자에요.


자, 죽은 자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 주님이 다 계획이 있구나’ 이 말을 해야 돼요. 그냥 말 안하면 안 되고. 주님은 다 계획이 있구나. 그 계획이 뭐냐? 주님께서 다 흩어보내시고 주님께서 무슨 생각을 여자에게 강요했느냐 하면은 ‘전에 네 주변에 많았잖아. 너를 죽이겠다고 한 사람이 많았지’ 라는 것을 그 상황을 분명히 해줍니다.


전에 너 죽이겠다는 사람이 그것도 율법 들고 율법으로 너 죽이겠다 많았지. 그 다음에 앞에건 생략하고 뒷말만 해요. “다 어디 갔지?” 라고 물어요. “다 어디 갔지? 너를 정죄하는 자가 다 어디 갔지?” 물었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고 복음 안다면 평생토록 내가 나에게 할 말과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가 남한테 이야기할 수 있는 말은 뭐냐?


나를 정죄하는 사람은 다 어디 갔지? 그 이야기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다 할 수 있어야 돼지요. 다 어디 갔지? 그동안 나를 정죄한 사람이 누구지요? 누구지요? 야 이거 정답 딱 나와야 되는데. 누굽니까? 본인이. 나잖아요. 정죄하는 내가 어디 갔는지 없어요. 왜? 전에는 내 이름으로 살았잖아요. 이제는 누구 이름으로 산다?


주님의 이름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아니고 이야기한다고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죠. 그러면 너를 정죄하는 사람 다 어디 갔지? 라는 말을 주께서 그런 말이 계속 들어있으면 내 안에 주님 사는 게 돼요.


주님 막 모셔가지고 맛있는 거 해줄테니까 피자 사줄테니까 여기 계시라고 우겨서 되는 게 아니고 그냥 말씀이 그냥 나오면 그거는 그냥 좀 미안하고 부끄럽고 염치없지만 계속해서 그 말이 계속 뭔가 이상스럽게 흘러나오면 그 내 중심부에 다른 분이 살고 있는 거에요. 주님이 살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말씀이 나오면 그거는 말씀이 살아있고 말씀이 안 나오면 억지고요. 그거는 억지죠. 천당도 못가면서 천국 간다고 교회 충성 봉사하는 그거는 억지죠.


성도는 어떻게 살던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요. 내 안에 누가 살아있어요? 주님이 살아 있잖아요. 그럼 나를 창피하게 본다는 것은 누구에 대한 모독입니까? 모욕입니까? 주님의 계획대로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주님의 그 심오하고 오묘함, 아주 섬세한 그 모든 계획 거기에 대해서 내가 침을 뱉는 것밖에 더 됩니까.


제가 강의할 때 모든 사람 죄인이라고 하니까 죄인이라고 하지 말래요 어떤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길길이 날뛰어서 아주 발작을 일으켜요. 그럼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지 말고 뭐라고 하느냐? “죄 지었던 사람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자” 이러는 거에요. 자기는 죄인 아니라는 거에요. 이건 아까 이야기한 식모나 파출부나 도우미나 대리주부나 파트너 매니저나 그게 그거잖아요.


하이클라스 라는 tvn에서 새로 시작한 드라마 1회 봤습니다. 거기 나오는 대사에요. 끝으로 이 말씀 적고 10분 쉬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되게 순조로워요 인생이. 뭔가 되게 순조로우니까 획기적인 어떤 신앙이라는 것을 찾아내기가 상당히 난처하고 곤란해요.


뭐 간증집회 들어보면 암도 여러 번 걸리고 이렇게 기도해서 다 낫고 뭔가 이런 거 있어야 되는데 우리의 인생이 뭔가 되게 순조롭다 이 말이에요. 순조로운 거에요. 사건이 있지만 사건이 지나가면 그 다음엔 또 순조로워요. 순조롭잖아요. 이것은 왜 이런 현상이 왜 잘못된 느낌 드느냐 하면은 어떤 어려울 때는 주님 쳐다보다가 그 다음에 지나고 난 뒤에는 자기 단도리 하는 거에요. 자기 관리하는 거에요.


이만하면 선방했지. 인생 선방했지. 이걸 어떤 자부심으로 자기가 그걸 소지를 하려고 합니다. 소유, 소지. 두 번째 시간에는 이 소유, 소지하는 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10분 쉬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강남-누가복음 7장 14절 (죽은 자에게 말걸기) 21090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해야 될 사항은 죽은 자에 대해서 주님께서 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이 잘못을 따져서 인간이 개과천선할 인간 같으면 나무라겠는데 인간은 아예 누가 중심을 갖고 있느냐? 선악 지식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악 지식을 뽑아낼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은 악마는 세상 신이기 때문에 세상 신은 세상보다 더 쎄기 때문에 악마가 집어넣어 준 것은 그 인간이 거기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이런 비유했거든요. 하나님의 나라는 뭐냐? 자기가 알아서 그 집에서 인질범이 알아서 탈출하는 게 하나님의 나라 아니에요.


오히려 바깥에서 도둑처럼 담 타서 들어와가지고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그리고 그 집의 가재도구를 가져가는 식으로 그 동안 주인집에서 농락당한 그 인간을 강제납치 빼낼 때 주님은 그걸 가지고 성령이 임한 사람의 구원되는 절차로 본거에요. 과정으로 본거에요.


성령이 임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제가 한 게 아무것도 없었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나를 보쌈했잖아요. 납치했잖아요. 그러면 납치할 때 선악과 버리고 납치했습니까? 그냥 그걸 유지한 채 납치당했습니까? 선악 지식이 유지된 채 납치를 당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비교할게 있지요. 내가 바르게 사는 것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가 이게 동질인가? 연결되는가 안 되는가? 연결될 리가 없지요. 내가 바르게 살면 살수록 점점 더 가리워지고 무시당하는 것은 뭐냐? 일방적으로 제공해주신 주의 의가 밟히죠. 발에 밟히는 거에요. 나의 착함에 밟혀버리는 거에요. 나의 성화론에 밟히는 거에요.


거룩을 추구하는 이 선악적인 본성에 주님의 십자가 피가 모독 받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잘못을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그럼 잘못을 이야기하는 건 뭐냐? 너 잘못했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확인케 하십니다. 확인케 하십니다.


네 안에는 선악 지식으로 말미암아 정녕 뭡니까? “죽으리라” 잖아요.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의가 선악 지식을 따먹은 이 죄를 이겼다에 대해서 확인 작업을 하는 대상으로서의 성도를 다루십니다. 그러면 확인 작업하는 게 굉장히 우리는 편하게 느끼지요. 그렇잖아요. 편하게 느낀다고요.


미나리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80년대 미국에 이민 간 그 사람들의 직업이 뭐냐 하면은 병아리 감별하는 거죠. 병아리가 손들고 저 암컷이요 이럽니까? 가만 있으면 수컷 암컷 확인해주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식으로 확인해주는 거에요. 우리는 굉장히 하는 대로 살면 돼요. 확인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시니까.


확인을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하십니다. 내 뜻대로 안되게 하셔요. 확인한다고 하니까 인생 뭐 수월하게 사는 줄 아셨지요. 아무리 트릭을 써도 내 뜻대로 안되게 해줘요. 내 뜻대로 안되게 해줍니다. 하나 예를 들어 볼게요.


주께서 내 뜻대로 안되게 해줄 줄 알고 기도를 할 때 주의 뜻대로 되는 것만 하는 거에요. 주님이여 이번에 우리 애가 고3인데 시험 잘 치라고 나는 기도 안하겠습니다. 그런 것은 기복신앙이고 그건 세속교회들이나 하는 거지 저는 그런 거 안합니다. 애가 어떻게 하든지 그것이 주께 영광이 되도록 모든 것이 주님의 뜻만 되면 저는 족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럼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그 뻔한 거 기도하는 너의 저의가 뭐냐? 그렇게 뻔한 거 다 주님 계획인데 뻔한 거 그렇게 기도하는 저의가 뭐냐? 그렇게 잘 보이면 숨어있는 내 뜻을 그래도 잠깐 봐줘가지고 우회로 못 본 척해가지고 그래! 네가 금도끼도 네 것도 아니고 은도끼도 네 것이 아니니까 보너스해서 다 줄게. 그럴 줄 알았지?!


그런 트릭은요 기본적으로 주의 뜻을 몰라서 그래요. 여러분 가운데 창세기 19장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창세기 19장이 뭐냐 하면은 소돔과 고모라 안에서 유황불 떨어져서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 잘 아시지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 사회에 이데올로기 있고 잘난 사람 있지만 주님께서 딱 보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오면 돼요. 나오면 된다고요. 다음 것을 다 포기하고요. 부동산 포기고 펀드 넣어놓은 것 다 포기하고 그냥 나오면 돼요. 참 쉽죠 잉?


소돔과 고모라에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에요. 영광이고 뭐고 네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바르게 사는 것 필요 없어요. 그냥 나오면 돼요. 나오는 게 주의 뜻입니다. 그것도 뒤돌아보지 말고. 미련 없이.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하는 것이 그겁니다. 그냥 죽어. 살리는 것은 내 몫이다. 내 몫. 네가 왜 자꾸 살려고 해. 예수 믿습니다. 피 믿습니다. 자꾸 십자가 믿습니다. 자꾸 이래서 살려고 떼를 쓰지 말고 애쓰지 마. 그냥 죽어. “저 예수 믿고 천당 갈렵니다.” “그것도 또 네 뜻대로 안해줄거야.” “방언하면 뭐 됩니까? 주여 방언해드리겠습니다.” 아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그냥 살다 죽어. 그냥 죽어.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너 잘하는 거.


아까 잘하는 거 첫째 시간에 배웠습니다. 뭐냐 하면은 대접받고 싶은 것. 자기 자존심이 있잖아요. 자존심 챙기는 것. 누가 안 가르쳐도 잘해요 이건. 엄마 아빠 말하기 이전에 있어요 이건. 타고 났어 타고 났어요 이 자존심은. 자기 중심은.


생각해보세요. 선악 지식을 누가 따 먹었습니까? 아담이 따먹었지요. 그러면 아담 때에 선악 지식을 아는 주인공이 누굽니까? 선악 지식이 살아있다는 말은 곧 누가 살아있다? 그 지식이 살아있는 누가 살아있어야 된다? 자아. ‘나’가 살아있는 거에요. 나. ‘나’ 가 살아있고 이 ‘나’라는 것과 ‘주체’ 자 구분해봅시다.


‘나’는 타고난 것이고요. 아까 주체, 주체는 뭐냐? 사회에서 나를 어떻게 인정해줄 때 그 때 주체에요. 나는 ‘나’다. 깡패들도 그런 소리하겠다. 그런데 남이 안 알아주잖아요. 그러니까 고개 좀 숙이는 척 해야죠 뭐. 밥 먹고 살려면 취직할려면. 해야지요. 자기 자존심대로 대접 못 받더라도 좀 견뎌야죠.


나중에 집에 가서 엉엉 울던지 말던지 이 직장 아니면 내가 다닐 데가 없나. 아이고. 어머니 어머니 왜 날 낳았습니까. 그렇게 워워~~개 부르짖듯이 그렇게 하더라도 일단은 돈은 벌어야 될게 아닙니까. 돈은. 하나님과 인간의 특징이 둘 다 있어요. 둘 다 놀지 않는다는 거에요. 둘 다 쉬지를 않아요. 쉬는 것도 싫어요. 머리가 자꾸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어디 가면 인간 대우받을까. 어디 가서 사람 대우받을까. 어디가면 내가 위로받을까. 쉬지도 않고 작동을 해요. 머리가. 왜? 왜 인정받아야 돼? 왜 나는 사랑받아야 돼. 나는 선악을 아는 자체가 착하니까. 나는 착하니까 에요. 착한 대우를 제대로 못 받아서 나는 지금 한 맺혀있고 억울하다고 보는 거에요. 나는 착한데 사회가 인정을 안 해주니까 나의 주체, 나의 원함을 안 해주니까 나는 창피스럽다는 겁니다.


에이 직장 때려치고 저 산속에 가가지고 자연인 될래. 뭐 자연인은 쉽습니까? 자연인은 쉬운 줄 알아요? 5일장 나가가지고 약초 가지고 흥정할 때 쉬운 줄 압니까. 중국사람 들어오는데 약초값 내려가는데 자연인도 못할 노릇입니다. 전에 약초 한 근에 오만원 쳐주더니 중국산 확 들어와가지고 2만원 쳐줄 때 아이고 이 짓도 못하겠다.


뱀 껍데기 잡아가지고 10마리 잡아가지고 한 10만원 쳐주더만 중국산 들어와가지고 2만원 3만원 쳐줄 때 자기는 산속에 있다고 세상 초월했다고 했는데 초월한 게 아닙니다. 산속에 전기세 오지요. 오랜만에 장날에 차타고 가가지고 범칙금 걸리면 한 달 생활비 다 나갑니다. 12만원.


사람이 죽을 때 여기 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뭐가 잘못됐다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은 네가 잘못됐다. 살아있는 네가 잘못됐다. 네가 잘못. 네 잘못은 모르고 죽었을 때마다 아이고 잘못됐구나. 죽었을 때 잘못된 게 아니고 살아있을 때 잘못된 거에요.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은 주님은 죽음을 어떻게 생명으로 바꾸느냐? 궁금해요? 이게 진짜 궁금하지요. 성도에게만 해당돼요. 성도 아닌 사람에게는 해당 안돼요. 성도에게 이 죽어가는 자를 지옥 가는 자를 어떻게 천국 보내느냐? 감사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죽음은 나의 죽음의 주도권을 주님이 일방적으로 가져가셨습니다. 죄 지었으니까 내가 죽어야지 이럴 경우는 내 죄진 것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의식이 강해요. “그래. 내가 나쁜 짓 했으니까 벌 받아야지. 못 된 건 나야.” 때리지 마세요. 이미 주도권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책망할 권한도 자격도 없습니다. 일체 없어요. 없습니다.


롯의 가족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온 것은 사전에 그들이 심판을 알아서가 아니에요. 이쯤해서 천사 올 때 됐는데 이거 아니었습니다. 천사는 롯의 가족이 초대한 게 아니에요. 그냥 난데없이 방문하는 겁니다. 오늘날 성령이 난데없이 방문하듯이요. 누가 보냈어요? 누가 보내긴 아브라함이 보냈지요. 삼촌의 기도빨로 보내진 거에요. 그게.


그래서 창세기 19장에 보면 롯을 건질 때 롯의 의로움으로 건졌다고 하지 않고 뭐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졌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브라함을 생각해가지고. 그러니까 롯의 운명을 누가 책임지느냐 하면은 그 삼촌 되는 아브라함이 책임진 거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운명은 누가 책임졌냐?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그 주님이 책임졌지요. 그러면 주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것인가? 아브라함이 이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자기 약속을 아브라함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거기에 담기 위해서 하신 거에요. 그걸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을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의 언약, 나 야곱의 언약이다 하신 이유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네가 상상하지 말고 구체적인 인물에게 내가 그 인물들을 어떻게 약속으로 다루는지를 보라 이 말입니다. 그럼 마지막 언약은 뭐에요? 마지막에 누굴 다룹니까? 하나님께서 마지막 언약 누구지요? 예수님을 다루지요. 다뤘더니만 예수님 죽잖아요. 죽어버리죠. 죽었는데 끝입니까? 예수님의 영혼을 아버지께 바쳤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예수님의 영혼을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려냈잖아요. 그것도 영광스럽게 살려냈잖아요. 그 목숨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목숨으로 살려냈잖아요. 그게 일관된 하나님의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이 거기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예수님께 일어난 그 능력, 죽은 데서 살아난 그 능력이 죽음의 단발성이 아니고 자기 죽음을 개입시키는 예수님의 자기 죽음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자기 죽음의 취지와 의의를 더 확대시키기 위해서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들이밀지요.


그러면 십자가 배후에 뭐가 있습니까? 죽어도 살리라가 그 능력이 포함된 것이 들이미는 거에요. 부활로 들이미는 게 아닙니다. 뭐로 들이밉니까? 십자가로 들이밀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해요.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나는 너희가 십자가 외에는 일체 알기를 원치 않는다”고 되어 있고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나는 오직 뭐만 자랑한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해요.


재림을 자랑하고 성령 오심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그냥 “십자가”만 자랑해요. 왜 십자가만 자랑해야 됩니까? 십자가만 들이댈 때에 바로 뭐냐 하면은 나의 죽음과 생명은 이미 모든 주도권이 내 손에 있지 않고 이미 넘겨졌습니다를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고백하는 거에요.


십자가를 안다는 말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도권은 주님 손에 넘어갔습니다라는 고백. 그게 십자가 믿는 거에요. 내 구원을 해주세요가 아니라 그냥 십자가의 효과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가 되든. 내가 집이 3채가 있고 땅이 15만평이 있더라도 남들 보기에 거부, 재벌이라 할지라도 나는 오직 십자가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밥그릇 숟가락이 솔로몬처럼 다 금덩어리라도 거기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그냥 십자가보다 더 큰 것이 없음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구약에 사무엘하에 보면 암논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암논. 그리고 배 다른 여동생이 있지요. 다말. 다윗의 아들입니다. 암논은 첫 번째 낳은 아들. 다말은 딸이고, 배 다른 딸이고요. 다윗이 아내가 10명이나 되니까. 암논이 자기 배 다른 여동생이 너무 예뻤어요.


하여튼 이쁜 게 화근. 그냥 사는 것도 화근인데 이쁘게 사는 것도 화근이에요. 주위에서 가만히 놔두지를 않아요. 이쁜 것들은 가만히 놔두지를 않아요. 여러분은 조용하지요. 뭔가 이상하게 순조롭지요. 아무 문제없이. 자, 이걸 암논이 이뻐서 좋아한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공감을 해요.


그러나 뭐냐 하면은 이뻐서 강제로 강간을 해놓고는 다말을 버렸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그가 처음에 좋아할 때 보다 더욱 더 오히려 배나 미워했다”는 거에요. 남자는 다 그래 뭐 이런 겁니까? 남자라고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왜 그랬을까?


뭔가 이것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같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이러한 속성이 우리 안에 다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이걸 언급을 하시기 위해서 이 사례를 끄집어냈거든요. 한번 적어볼게요. 인간의 본성을. 인간은 좋은 것이 있으면 갖고 싶다. 이게 소지성 또는 소유성. 인간은 아무나 소유하지 않습니다. 좋아 보이는 것을 갖고 싶어요. 좋아 보이는 것을.


좋아 보이는 것을 가졌으면 계속 좋아야 하지 않습니까? 왜 배나 미워합니까? 그게 뭐냐 하면은 암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좋은 것을 갖고 싶은데 일단 갖고 보니까 기존의 좋은 것, 기존의 이미 소유된 것과의 조화와 품격이 갖고 있는 그것이 맞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좋아 보이는 것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좋은 건 아니네 이래가지고 가차 없이 버리는 거에요.


인간의 이런 본능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초등학교 때 그림 그릴 때 나무를 그린다든지 초가집을 그린다든지 뭐 이런 거 그릴 때 이 색깔이 맞는가 싶어서 왕자표 크레파스알지요? 왕자표 크레파스 해가지고 그리고 보니까 이게 내가 원한 색깔이 아니에요. 분명히 좋아보였는데 가져왔는데 가차 없이 바꿔서 딴 걸 해가지고 이것도 아니네. 가차 없이 이렇게 해가지고 적절한 색깔을 찾잖아요. 결정은 누가 합니까? 좋고 나쁘고 결정을 누가 합니까? 내가 결정하지요.


그러니까 악마가 심어준 선악이라고 하는 것이 윤리 도덕만이 아니고요 모든 미학적으로 나한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선, 나에게 추하게 보이는 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 못생겼다. 내가 그 사람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갑자기 욕이 막 나와. 죽어라. 저렇게 못생겨가지고 그것도 살 마음이나 가졌냐?


드라마나 TV에 나오는 사람들 아무 돈 관계나 금융관계 없는데도 대번 채널 막 넘어가잖아요. 꼴 보기 싫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와가지고 만약에 그 사람 나중에 연줄로 해가지고 자기 딸 결혼할 때 부주 50만원 하게 되면 막 안 돌릴걸요.


그걸 가지고 나한테 플러스가 되고 나 대접받음, 나의 의로운 가치 나의 가치를 증강시키면 선이 되고 나의 가치를 추락시키면 악이 되는데 길가에 못난 사람은 아이고 내가 저 사람 알고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나는 저 사람보다는 안 못났기 때문에. 이쁜 나에게 약간이라도 추한 게 섞여버리면 상대적으로 못남의 가치가 약간 손상을 받는다고요. 손상을. 손상 당하거든요.


친구라도 끼리끼리 해야지. 공부 못하는 친구는 괜히 오해 받아요. 나도 공부 못하는 것처럼. 지금 여러분들은 지금 아니라고 애를 쓰는데요 여러분들이 교회 50명 100명 교인들 한번 살펴보세요. 누구끼리 노는 줄 알아요? 돈은 돈 있는 끼리 놀아요. 배운 사람들은 배운 사람끼리 놉니다. 무식한 게 우리 이야기에 끼다니. 성경도 모르는 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자신의 가치, 자신의 고귀한 품격을 한시라도 잊어버린적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 아들 공부 못하는 친구 데려오면 혼나는 거에요. 아들 아들 이러다가 나는 너한테 실망했다. 친구 아버지 뭐하시노? 걔 아버지 죽었는데요. 만나지마! 이게 감출수도 없고 감춘다고 숨지도 못해요.


암논이 다말을 강간을 해놓고 남들이 왜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놓고 왜 미워하느냐? 암논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 따져보게 되면 암논은 권력 1순위에요. 0순위. 왜? 다윗 다음에 왕 될 사람은 누가 봐도 암논이에요. 왜냐? 장남에게 아버지의 기력을 주기 때문에.


따라서 암논은 다말이 이뻐서 본능적으로 차지했지만 다말을 계속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디에 저해될 가능성이 많느냐? 나의 인수인계에 상당한 장애 요소로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단도리에요. 타고났어 인간은. 내가 왜 죽어. 내가 왜 사람 대우 못 받아. 말도 안돼.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죽여버릴거야. 나는 나니까. 나 다움이 전부에요. 나 다움이 전부에요.


이게 바로 악마한테 사로잡혀 있는 가재도구. 악마 하우스의 가재도구. 아무리 교회 다니고 아무리 신학을 하고 성경을 백독 천독 기도해도 악마의 품성은 악마의 품성 그대로 있어요. 자기 손을 집어넣어서 수술 이거 못 끄집어내요.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귀는 뭐라고 하느냐? 이제 새 사람 되야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지. 에베소서 어쩌고 저쩌고 너는 새롭게 하심을 본받아 알기는 또 어디서 들은 구석은 있어 가지고 모든 것은 말씀을 집어넣어서 계속 우리한테 되지도 않는 할 줄도 모르는 우리의 위선만 조작해내는 그런 짓거리를 계속 하게 만들어요.


주님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네 뜻대로 안 되게 해줄게. 됐냐? 그걸로 족해요. 그냥 죽어. 그냥 죽어. 못난 자로 그냥 죽어 버려 그냥. 원래 죽게 되어 있는 게 죽는 거에요.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인간은 소유가 본능이고 이 소유는 소유자 나, ‘나’지요. 나의 품격을 높이고 나의 가치가 절대적 가치에요. 나의 의는.


나의 나 됨은요 하늘의 임금이고 대통령이고 누구도 나를 못 건드려요. 물론 돈 때문에 고개 숙이지만 그 본연의 나의 가치 건드리면 사표 내요. 너 죽고 나 죽자. 네가 대통령이면 다냐. 너 죽고 나 죽자 막 달려들어요. 그때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인간은 자기의 본질, 본질 같은 것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마귀적 본질이죠. 나는 나로 산다는 본질. 한번 적어볼게요. 나는 나로 산다.


신앙생활 한 50년 했습니까? 바람 부는 날 낙엽 떨어지는 날 툭툭 털어버리고 남는 것은 이것 신앙 같은 것 그것은 하나의 껍데기 날라갈, 덮힌 때, 먼지 같은 것이라서 무슨 계기이나 사건 터져버리면 50년 공들여서 새벽 기도한 것 성화론 그거 다 날라가 버리고 남는 것은 역시 나는 나야. 친구야 술 한잔 하자.


50년 끊은 술을 또 다시 마시고 60년 끊은 담배 또 피우고. 아휴 너 교회 다니잖아. 오늘은 먹고 싶다. 오늘만 먹겠습니까? 다른 사건 나오면 또 먹지. 그동안 술 먹고 싶어서 참는다고 얼마나 참았습니까.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해가지고.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신자이기 때문에 참아야 하느니라. 은장도 가지고 참아야 하느니라. 왜 참아요 그거.


인간은 좋은 것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그걸 갖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 주위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리고 이 악마가 설치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여기에다가 포위시켜놨습니다. 네 뜻이 결국은 나의 계획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알려줄 때 이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내 뜻은 말로 기도 멋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나는 나 뿐이며 나는 나 좋은 것은 안 놓친다는 집요하게 안 놓친다는 것. 나는 더럽게 살지 않는다는 거에요. 죽은 고기나 먹는 어슬렁 거리면서 죽은 고기나 먹는 킬리만자로의 그런 산기슭의 그런 짐승이 아니고 나는 외롭게 산성에 올라가서 죽는 표범이 되고 싶다.


밑에 지저분한 인간은 뭡니까. 하이에나. 나는 표범이 되고 싶고. 양인자씨가 작사한. 이런 건 몰라도 돼요. 권력이라는 것, 이미 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아니 말 바꿉시다. 나의 나 다움을 더욱 확고한 힘이 있다면 다른 것은 장난감 노리개 감입니다.


이 자체가 잘못 되도 너무 잘못됐기 때문에 주님은 거기에 대해서 일체 함부로 닦달 안 내십니다. 그냥 지켜봐요. 그래 그게 너의 전부야. 그냥 살아. 그러나 나는 네 뜻대로 뭐든지 안 해줄 때 이게 뜻대로 안 되는걸 이걸 주의 은혜인줄 알아.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지요. “너를 정죄한 자는 어디 있느냐”라고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가 정죄를 백번 천번 받아도 마땅하다는 대상으로 주께서 그렇게 보고 있어요. 내가 아니면 너는 천국 끝났어. 이런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걸 새롭게 새롭게 느끼면서 새롭게 느낄 수밖에 없지요. 새로운 사항이 계속 주어지니까.


인간 세계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항을 계속 맞닥뜨리니까. 그 가운데서 신앙이고 뭐고 말짱 소용없고 또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미친 듯이 거기서 달려드는 그 짐승 같은 속성을 내가 나를 말릴 수가 없어요. 말릴 수가 없어요. 그걸 어떻게 정지시킵니까.


실컷 죄는 죄대로 되게 하시고 그 다음에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않지 하고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은 네가 반성한다고 회개한다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안 한다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똑같은 속성이 다른 사항의 다른 사건을 네가 맞닥뜨리면 또 그 상황, 그 사건 속에서 또 숨기지 않는 본성이 또 튕겨져 나오죠.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은 이렇게 이걸 고상하게 하면 ‘나의 고유성은 없다’에요. 나의 고유성은 없어요. 이게 육면체니까 육면체 주사위가 있다. 1,2,3,4,5, 밑에 6. 주사위 있잖아요. 주사위에서 1이라는 의미는 무슨 뜻이냐 하면 2가 아니고 3이 아니고 4가 아니고 5가 아니고 6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반드시 ‘나’라는 자체의 고유성은 없고 2와 비교하고 3과 비교하는 거에요. 인생, 인간 사는 것은 나는 이렇다고 말하지 마세요.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의 표현의 한계입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게 바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이 하는 이야기에요.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그 이야기하는 거에요.


연애하는 남녀 사이에 묻지요. 여자가 묻습니다. 여자가 남자보고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해.” “어떻게 사랑해?” “많이 사랑해.” “에게 그거야?” “많이 많이 사랑해.” 이거 소용없어요. 그 때 여자가 정답을 알려줍니다. “너 엄마 물에 빠지고 나 물에 빠지면 누구 건질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 둘 중에 한 사람만 살린다면 누구 살릴래? 철없는 남자는 엄마 살릴래. 연애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사람은 “너 살릴래. 너 살릴래” 해 놓고 속으로는 너 한번 두고 보자 지금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 되고 난 후에 넌 죽었어. 너 살릴래. 여자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지금 말이 중요한 거니까. 오빤 너무 좋은 거 같애.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자, 그러면 죽음의 주도권 이야기했지요. 죽음의 주도권을 주님께서 가져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뜻이라는 말은 내 기도한대로 안 된다는 뜻이 아니고 기도하는 그 이면에 있는 내 본성,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그 답답함에 몰래 감추고 싶은 나의 본성, 그 뜻대로 안 해주시는 거에요.


왜냐하면 나의 기도는 무엇에 전제를 하느냐 하면은 결핍이거든요. 결핍. 모자람. 불만족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의 뜻은 뭐냐? 그냥 감사에요.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요. 그래서 결핍에서 뭐로 바꾼다? 감사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지금 이만큼 있는데 지금 이 점선, 이것만 채워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데 있다는 이 자체가 유도하거든요.


자체를 이걸 부정해버리죠. 주님의 은혜가 이 전체를 복음이 전체를 다 덮어버립니다. 이 없는 부분을 도와주는 게 아니고 전체를 다 덮어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은 너 새로 시작하자. 매일같이. 매일같이. 새로 시작할려면 뭐냐 하면은 내일을 없애 버리는 거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내일로부터의 탈출이죠. 내일로부터의 탈출.


내일이 있다는 말은 오늘은 불만족스럽고 오늘은 결핍됐다 이런 의미가 있거든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했지요. 그 이방인들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그 말씀에 의하면 무엇을 염두 해두고 자꾸 입을까 먹을까 생각하는 겁니까? 참새 이야기할 때 창고 이야기를 주님이 하시잖아요.


창고도 안 지었지만 창고도 짓지도 않았지만 내가 먹이고 그 들풀이 자기 치장 안 해도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내가 더 이쁘다고 하는 이유가 뭣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은 내일은 내 몫이다. 주님의 몫이에요. 그러니까 뭘 중요시하느냐. 현장감을 중요시해요. 현장감. 현장감을 중요시해요.


현장에서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그 현장에서 주님의 계획이 지금 ‘나’라는 실존을 만들었다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주의 뜻에 의해서 내가 된 것을 인정한다면 그게 그 나라 의에 속한 사람의 사는 방식입니다.


자, 방금 한 것은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에요. 한 두번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다 아는 이야기에요. 아는 이야기는 알기는 알지만 그만큼 실천은 어렵다가 아니라 실천은 불가능하다는거죠. 그래서 이 방금 아는 이야기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제가 성경 구절 하나 찾아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죽음하고 관련 있습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자, 이 세상사 모든 사람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성격과 취미 다 다양하지요. 다양한 이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 사건은 주님이 보는 관점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타인과 비교해서 그래요. 타인과 비교하고 비교하면 경쟁이 되고. 장사하는데 경쟁 없는 장사가 어디 있어요. 취업도 마찬가지고 회사 되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아 나도 감사 좀 했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은 그래요. 이근호 목사가 맨날 죄인이라고 그래서 짜증난다고 하는데 제가 죄인이라는 말만 한 게 아니고 감사까지 이야기했는데 왜 감사는 다 빼먹고 죄인 그것만 추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관심사가 그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감사까지 될려면 감사가 될려면 이 세상을 한꺼번에 모든 한 묶음으로 묶을 수 있는 어떤 질적인 것이 느껴져야 되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취미가 다르고 학식이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돈도 차이가 난다 할지라도 미국사람 아프리카 사람 북한 사람 있더라도 하나같이 동일하게 그 때 누굴 쳐다본다?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거에요 .바라볼 때 그 때 그들이 어떻게 됩니까? 7절 끝에 바라보고 뭐한다? 바라보고 기뻐한다 했습니까? 애곡한다 했습니까? 애곡하는 거에요. 산 것이 헛 살았어요. 산 것이. 그렇게 자기가 자기됨을 위해서 그렇게 살았는데 죽음이란 뭡니까? 죽음이라는 뜻은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라는 뜻이에요.


죽음의 주도권을 열심히 살았던 나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적이 없어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죽는 순간 그 열심히 산 것이 없어졌어요. 얼마나 헛되게 살았습니까.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착실 곱하기 착실, 착실 제곱 착실해도 그건 착실한 것이 아니고 헛수고한 거에요.


그 내가 모아놨던 그 많은 재산과 그 모든 건강도 다 죽는 순간 사라집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요한계시록 1장 7절 한 것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고 애곡한다 이 말입니다. 애곡. 가슴치고 우는 거에요. 그런 인간들 속에 성도를 집어넣는 거에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부럽냐? 각자 자기만 쳐다보고 사는 인간들이 그렇게 부럽더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이게 언제적 멘트인지 모르겠습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부럽더냐. 심순애야. 신파극에 나오지요. 온 TV에 예능프로에 나오면 전부 다 잘된 것 성공한 것 결혼식을 하는데 수억 들어서 결혼식한 것 저택에 사는 것. 시시한 저택은 저택도 아니지요.


그런 거 해가지고 사람들 부러워하는데 결국 그들은 뭐냐? 애곡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또 오늘 이 강의 들었다고 개뿔 돈도 한 푼 없으면서 위로한다고 니들 애곡이나 해라. 이런 식으로 남하고 비교하지 마. 너나 잘해. 너나. 너는 울거야 안 울거야? 그거 묻는 거에요.


평소의 관점이 나하고 남하고 왜 나는 부족합니까 이러지 마시고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애곡할 인간들 속에 집어넣은 거에요. 애곡할 인간들 속에. 저는 여기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오늘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이건 잊지 마세요.


하나님보다 더 잔인한 분은 없다. 사람이 감히 흉내를 못 냅니다. 하나님의 잔인함에 대해서 사람이 흉내를 못내요. 애곡 안 할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그동안 눈에 보이는 세상을 향하여 자기가 살아 있게 하는 그 세상을 향하여 그 에너지, 돈의 에너지, 권력 에너지 그게 자기의 목숨줄인 줄 알고 어쨌든 간에 그거 하나 붙들어가지고 자기하고 자식이나 먹고 살라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자기가 이건 착실한 것이라고 보고 자기는 성실의 성실로 봤지. 이건 울 일이라고 상상도 못했지요. 교회 와서 예수 믿고 기도하는 이유는 뭡니까? 따지고 보면 뭐였어요? 자기 밥이나 먹고 사는데 하나님이 도움 필요해서 그 짓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뭐 복음 듣고 성경공부 나오면 하나님이 밥이나 더 줄 줄 알고.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너 밥 먹어서 뭐하는데? 밥 먹으면 더 배고파. 그럼 밥 먹지 말까요? 주는 거나 먹어 그냥. 내가 줄 때 먹어. 한 달 수입 2500주면 2500 적다 하지 말고 그냥 써. 우리하고 해당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차 벤츠 사주거든 그냥 잘 타고 다녀. 뭐 겸손하다고 티코 타지 말고. 그냥 주는대로 벤츠가 되든 뭐가 되든 그냥 타고 다녀. 다 헛되고 헛된거야. 뭐 겸손 떤다고 이거 팔아서 가난한 사람 준다고 그 짓하지 마. 그 짓하지 마.


내가 이건 감사할 것 이건 감사할 것 네가 정하지마. 그것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만 생각해도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자기 성령을 영을 뿌려놓은 그걸 회수하거든요. 아까 생명과 죽음은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 선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 선은 우리 쪽에서 가위로 안 잘라져요. 악마? 아니에요.


로마서 8장에 나오지요. “권세나 뭐나 가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어떤 세상의 권세자라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 저한테 따질 거에요. 그러니까 목사님, 그 해당 혜택 받는 자가 ‘나’이냐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 이 말입니까? 또 이렇게 이야기 나올 거에요. 그 혜택을 어떻게 압니까?


제가 이야기해드렸잖아요. 그 혜택을. 사는 게 화근이라고. 뭐냐 하면은 주께서 내 속성을 다 드러내는 거에요. 암몬이 너고, 바리새인이 너고, 가룟 유다가 바로 너고, 배신한 베드로가 너고, 성경에 나온 모든 인물들이 바로 뒤돌아봤던 롯의 처가 바로 너고, 간음한 여인이 너고, 바리새인이 너다.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그걸 보게 하시는 거에요.


아 이게 바로 내가 나답다는 내용이 바로 우르르 쏟아내니까 내장이 흘러나오니까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같은 아담의 족속이니까 그 나물에 그 밥이죠. 똑같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문제는 그들은 그렇게 나하고 똑같이 살면서도 주님을 몰라요. 왜냐하면 대접받는 것에 너무 급해서. 그러나 우리는 주님 알게 되었습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을 아는 게 아니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 아는 거에요. 앞으로도 모를 것이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아는 거에요. 말 너무 어렵다 이거. 내가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또 알게 되면 또 자기 잘난 체 하기 때문에. 다만 주시는 어미가 둥지에 있는 모이 주듯이 그냥 주시는 거에요. 월 2500씩. 상가 임대료만 해도 1500씩. 상가가 6층. 아버지 재산 상속. 그것도 세금 어떻게 해가지고 상속비도 안냈어.


사회 정의 논하지 말고 그냥 받아 챙겨 누리세요. 그냥. 주시는 것 받으시고 그냥 ‘나는 이렇게 죄인입니다’ 라고 사세요. 오늘 너무 좋은 핑계를 줘가지고. 주님께서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도 쉬지 않는 주님의 일입니다. 내 일은 없어요. 다 주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주님의 계획대로 하는 거에요. 그리고 이 세상의 사람들하고 비교 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이 너무 잔인하니까요. 어떤 분이 저한테 동영상을 보내주셨는데 그 동영상 내용이 너무 잔인했어요. 뻐꾸기가 나무둥지에다가 자기 새끼를 놔둬가지고 다른 새의 어미를 자기 새끼 키우는 도우미로 사용해가지고 먹이 주는 이런 짓을 다 한답니다.


자기 새끼를 안보일 때 딱 집어넣으니까 걔가 먼저 부화 되서 진짜 자기 자식인줄 알고 동그랗게 있으니까 품으니까 뻐꾸기가 온 뒤에는 사랑받기 위해서 남의 애, 원래 있던 새끼를 둥지에서 밀어내서 다 터트려 죽여버렸어요. 터트려 죽이는데 여기 먼저 부화한 새끼 뻐꾸기한테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구렁이가 와가지고 뱀이 와가지고 그것부터 돌돌 감아서 죽여서 그걸 카메라로 생중계 다했습니다. 이 세상의 자연 세계의 잔인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잔인해요. 왜냐하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은 없어요. 내 목숨이고 내것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돌돌 감던 두리두리 감던 교통사고로 죽던 연탄가스로 죽던 배타서 세월호에 빠져 죽던 그것은 내 것 내가 죽이는데 네가 왜?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는 할 말 없어요. 암에 걸려 죽던 뭐 코로나 걸려서 죽던 그건 네가 걱정할 문제 아니고 네가 애곡 안 한 그것만 고마워할 줄 알어.


주께서 곧 들이닥치니까. 모든 세계가 바로 이렇게 무지한 가운데 있다는 그것을 알아주시면 여러분 성도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지한지 돈만 알고 권력만 알았지 이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거에요. 주께서 우리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모르는 거에요. 그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을 미리 선행한 죽음임을 몰라요. 그분의 부활이 나의 영원한 부활인 것을 사람들은 들어도 몰라요. 왜? 자기 나름대로 살만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 끝으로 한마디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도가 누구냐? 바로 성도의 특징은 나 구원해달라고 하지 말고 본인이 사랑의 대상이 바뀌게 돼요. 사랑의 대상이. 이것은 아까 암논이 다말을 말릴 수가 없잖아요.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미치듯이 사랑하듯이 주님에 대한 그 사랑을,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 받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말씀처럼 주님이라는 사랑이 이걸 내 힘으로 지울 수가 없어요.


주님보고 뭐 돈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봉사하고 선교하란 말이 아닙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정답을 이야기했지요. 제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해서 또 찾아왔다는 것이 이게 내가 빼도 박도 못하는 운명이 됐다는 게 이게 바로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은 은사, 선물이라고 되어 있어요. 선물. 사랑이 선물이에요. 내가 쪼다라는 것을 아는 게 선물이고 내가 뭘 해도 성경 못 지키는 죄인인 것을 아는 게 그게 사랑으로 사랑 랩으로 둘둘 감긴 상태에요. 사랑의 둥지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거에요.


이거 오래 갈려고 하지 마세요. 오래 가겠다는 것은 나의 또 성도다운 나 다움을 찾는 거니까. 그냥 사시면 내일분의 또 사랑을 또 주실 것이고 내일 안 주시면 모레 주시겠죠. 그 다음은 제가 강의할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 맡길 문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죽은 자에게 책임을 묻지 아니하시고 아예 죽은 자를 일방적으로 살리시고 다시 말하게 하시는 주님. 살아난 자로서 주님이 살렸다는 말을 주저 없이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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