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비유
2013년 7월 10월 본문 말씀: 에스겔 17:1-6
(겔 17: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7:2, 개역) 『인자야 너는 수수께끼와 비유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풀어』
(겔 17:3, 개역)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채색이 구비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취하되』
(겔 17:4, 개역)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고의 성읍에 두고』
(겔 17:5, 개역) 『또 그 땅의 종자를 취하여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가에 심더니』 (겔 17:6, 개역)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의 아래 있었더라』
좋은 신앙을 가진 왕으로 알려진 요시야와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엘리야김(=여호야김)이요 둘째는 여호아하스요 셋째는 시드기야입니다. 둘째인 여호와하스부터 먼저 왕이 되었고 그 다음으로 맏이인 엘리야김(여호야김)이 왕이 되었고 막내 아들인 시드기야 때에 드디어 유다 나라는 최종적으로 멸망합니다.
그런데 시드기야 왕 이전에 잠시 왕이 되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비유 가운데서 독수리와 레바논의 백향목, 연한가지 끝, 종자가 나오는데 독수리는 침략자 바벨론을 뜻하고 레바논의 백향목은 여호야김 왕을 의미하고 여한가지의 끝은 여호야긴을 뜻하고 종자는 시드기야 왕을 뜻합니다.
여호야김은 예레미야의 계시책마저 불태워버리고 노골적으로 바벨론에 반대하는 정책을 폈고 애굽에게 국운을 맡긴 나쁜 왕인 반면에, 그 아들 여호야긴은 비록 짧은 3개월 10일이라는 재위기간을 끝내고 바벨론 왕에 의해서 포로 잡혀 갔지만 나중에 여생이 폈고 자유로웠습니다. 그의 삼촌인 시드기야왕 같은 사람은 눈알이 빼인채 혹독한 대우를 받으면서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유다 멸망이 이스라엘 구원에 있어 필수 코스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체를 아십니다. 마치 큰 산을 볼 때에 산의 뿌리부터 끝까지 한 눈에 다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인간이란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분을 보며 삽니다. 더욱 나쁜 점은 이 부분을 전체라고 착각하고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멸망이 실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의 계획 속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이는 구원이란 멸망이나 혹독한 심판 안에 담겨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런 점을 헤아리지 못하기에 극렬하게 하나님의 세워놓으신 전체에 반대하고 나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수수께끼, 비유’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수수께끼나 비유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그 내막을 풀어서 미리 대처하고 대비하라는 그런 취지가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들이 아무리 알려고 애쓰고 그 수수께끼에 담긴 내막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부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인생이란 아무리 분주하게 세상을 누비고 다녀도 실은 한 자리에 계속 제자리 뛰기 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하나님께서 손에 시간을 재는 시계를 누려면 그 자리에서 인간은 매초 늙어가고 있고 허물어지고 있는 겁니다. 성공했다고 해서 안 허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망가지게 하십니다. 바로 이런 내용이 수수께끼와 비유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독수리 비유’입니다. ‘독수리’라는 표현 자체가 그만큼 인간들이 하나님의 전체 계획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독수리가 먹잇감을 하늘에서 노려보다가 주저없이 덮쳐서 쪼아먹는 식으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보면서 좋은 사이를 맺을 하늘의 짐승으로 보지않고 도리어 공격하는 짐승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수리처럼 행동에 나서는 것이 곧 구원에 임하는 감정이라는 겁니다. 멸망을 품지 않고서는 구원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독수리’라는 표현을 통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적군에게 사정없이 쪼아먹히는 식으로 구원작업을 수행하시겠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전체 뜻에 대해서 극렬히 반대하는 성향을 보여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8:49-50에 보면,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유치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잔인한 민족에게 언약 나라인 이스라엘이 잡아 먹히도록 이미 사전에 조치해 두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전체적인 안목에서 나온 이해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이방민족에서 애초부터 잡아 먹히고 당하도록 이끄시는 걸까요? 그 내막은 신명기 28:54-57에 나옵니다.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를 질시하여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연고일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그 자녀를 질시하여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 한없이 어질고 착하고 배려하는 성품의 소유자로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조치하신 멸망이나 심판의 순간이 오게 되면 자기 자식마저 아낌없이 몰래 잡아먹는 그런 자기 밖에 모르는 잔인한 아버지로 돌변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작업이 진행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남자 뿐만 아니라 여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랍니다. 하나님의 숨겨놓은 독수리 수수께끼 상황이 유다 나라에 닥치게 되면 착하디착하다고 소문난 그 어느 여인이라도 궁극적으로 자기 살고보자는 식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는 겁니다. 이 독수리 비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그 확정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지는 죄성에 대해서 인간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들인 자신들이 이해할 수준에서 느껴지는 징벌을 통해서 그 분량에 부합되는 식으로 자기 죄를 규정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버림받으심의 징벌은 인간들이 아무리 깨내도 모자라는 깊은 죄성 때문입니다.
성도란 바로 이 사실이 믿어지는 겁니다. 자신이 예수님이 주어진 그 징벌을 못다 체험한다 할지라도 그 피가 하나님만이 아시는 죄까지로도 해결해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손을 놓고 이미 우리가 심판과 멸망 속에 놓였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그 속에서 피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