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강-에스겔16장 60-63(어릴 때 언약)1307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6장 60절에서 6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6:60-63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유다 백성에게 언약을 주신 것은 그 모든 것이 용서거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이 용서해야만 되는 죄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음녀라고 했습니다. 그냥 표현만 음녀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음녀이도록 강제로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다른 이방민족은 우상을 섬기던 뭘 하던 음녀라고 하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서는 우상을 섬기는 것을 가지고 음녀라고 규정을 하신 이유는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언약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하면 죄인을 용서한다는 하나님의 특별조치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백성, 구원받은 백성에게 다가올 때는 용서라는 것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용서를 가지고 다가오기에 “너는 나를 용서한다.”는 그 선언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 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우쳐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누구입니다. 저 사람은 누구입니다.’ 이렇게 나는 직업이 뭡니다, 키는 몇 센티입니다, 나는 ~입니다, 할 때 붙는 그 술어의 내용을 그렇게 붙이면 안 되고 주님 보시기에 용서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일정도로 주님 보식에 죄인입니다, 라는 것으로 갖추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남의 백성이 아니고 내 백성이기에 음녀 쪽으로 몰아세우신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방 나라에게는 같은 우상을 섬겨도 음녀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음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언약 속에 있기 때문에 붙여주는 이름이 음녀인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상을 섬겼던 그 이스라엘과 유다는 음녀라는 말에 대해서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던 겁니다. 에스겔이 이런 말을 했을 때 그들이 듣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오히려 이상히 어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고 너희는 죄에 갇혀 있는 독사의 자식이다.” 할 때 유대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왜 그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몰아붙이는지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말씀에 음녀라고 나왔을 때 “음녀 맞습니다.”라고 나올 위인들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음녀라는 것을 모른다는 말은 이런 말이 됩니다. 음행한 여인이 되어야 그것이 언약이 이 땅에 실시되는 진면목인데 자신들이 음녀라는 말을 모르니까 그 말은 뭘 모르는 것이 되느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으로 구원한다면 그 언약이 뭔지를 몰라요. 그냥 십계명 나름대로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십계명 지키는 것인 줄로 알고 있다고요.
주님께서는 “네가 음녀로서 한 번 지켜보라.” 이런 식인데 우리는 “우리는 멀쩡합니다.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 이지요. 자기를 보고 멀쩡하대요. 정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많은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호세아 보내고, 아모스 보내고, 미가 보내고, 예레미야 보내고, 에스겔과 다니엘을 보냈잖아요. 예레미야가 예언을 하니까 그들이 이런 평을 했습니다. “왜 자꾸 우리보고 욕을 하느냐?” 우리보기에는 참 기가 찬다. 하나님의 귀한 말을 전하는데 욕하는 소리로 들렸다는 것이 기가 찰 일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듣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보세요.
사람이 무슨 좋은 일로 잔소리를 해도 일단 그 사람의 자유의지나 태도나 행동이나 인격에 대해서 일단 인정을 해 줘야 합니다. “네가 참 착하다는 것을 내가 아는데 이것만 좀 고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겠다.” 이렇게 나온다면 누가 거기에 대해서 욕하고 나서겠습니까? “사람인데 내가 완전할 수가 없겠지요. 선지자님 하신 말씀의 그 대목에서 내가 문제 있어요. 다른 것은 괜찮은데 그 대목만 고치면 제가 온전해진다는 말씀으로 믿겠습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것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정해줄 때 소통과 대화가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아모스 같은 선지자들을 보세요. 인간취급을 안 해요. 그 이야기를 제가 여기서 또 하려고 하니까 제가 인간취급 안 당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인간취급 안하면 그 상대방이 “내가 말하기를 내가 너부터 인간취급 안 할 거야.”라고 되받아 나온다는 것이 뻔한 이치거든요.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취급 안합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왜요? “여러분은 착한 사람인데 지금보다 더 착해지기 위해서.”그것 아니거든요.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너무 미화하고 아름답게 포장해놓았어요. 뭔가 순수를 지향한다는 차원, 순수하지는 않아도 순수를 향해가니 방향성을 제대로 잡았다고 간주하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선지자가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음행한 여자인데 음행한 여자 정도가 그냥 돈 받고 몸 파는 정도가 아니고 네가 먼저 값을 치르고서라도 음행 못해서 환장한 희한한 창기, 음녀로서 살아간다.”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약간 그것에 더 보태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살아간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으로 조치를 하셨다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서 구원시켜 볼까, 라는 것은 우리 생각이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악한 음녀로 만드는 작업이 이미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작업이 개시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개시할 때 우리의 가능성, 우리의 진실함, 우리의 경건성,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순종할 어떤 가능성, 이런 것을 기대해서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 반대로 음녀인데 그냥 보통 음녀가 아니고 지독한 음녀로 이스라엘과 유대를 규정했다고 지난 시간에 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못 알아듣는다고 했지요?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상관없어요. 무조건 그런 식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왜요?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6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영원한 언약 속에 음녀라는 내용, 음녀가 되어야 할 내용이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이 약속을 할 때 우리가 어느 시 어느 장소에서 만나자는 것이 약속이잖아요. 그런 약속을 할 때 우리 인격이 무너진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그 시간과 장소에 참석하면 그만이니까. 좀 늦는다든지 그 시간에 엉뚱한 장소에 가 있으면 당신이 좀 이상하다, 하는데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버리면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약속이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약속하시는 분과 약속 받는 분이 둘 다 정상적인 인격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약속을 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바탕이나 여지를 완전히 말소해 버리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는 겁니다. 음녀가 되지 아니하면 영원한 언약이 세워지지 않아요. 영원한 언약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반드시 음녀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음녀가 아닙니다. 주님만 알고 있는 음녀의 깊은 개념이 있어요. 60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렸을 때 세운 언약, 그러니까 언약의 깊이와 넓이가 뭔지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뭔지를 아무것도 모르지요. 그래서 이 언약은 일방적인 겁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예수 믿겠다고 나올 때에 목사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예수를 전해요. “예수님은 이렇게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 알지요? 아시면 믿으시고 아멘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약속이라고 “여러분 속에 이 목사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고 그 내용을 이 목사가 구체화시키면 그것이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약속입니다.” 하잖아요. 그런데 구약에는 그런 식의 전도가 그런 식의 언약은 없어요.
구약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죽었다 깨어나도 몰라요. 왜 모르냐, 사람은 이미 날 때부터 죽어 있었으니까요. 죽은 자가 납득이 되는 언약을 하나님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죽은 자로 하여금 더욱더 너는 죽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을 분명히 해주는 하나님이 약속과 언약을 주신 거지요. 그러니까 제대로 언약을 들은 사람들은 “많이 당황하셨어요?” 많이 당황하게 돼요. 뭔가 하나님께서 이만한 사랑을 주셨으니 내가 보답차원에서 이 정도는 해 드려야지, 이런 만반의 준비를 하는데 인간 같지도 않게 만들어버린다면, “너는 뭘 해도 음행한 여인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더 이상 대화가 성립이 안 되지요.
정말 여러분이 언약을 아신다면 “나는 이런 내용은 상상도 못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이 이럴 줄은 제가 상상도 못했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하면 어릴 때 아무 철없는 나에게 어른들이 알아서 일을 다 저질러 놓으면 어린아이는 그저 덩달아 따라갔는데 나중에 커서 보니 어렸을 때의 그 인식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을 어른들이 다 처리해 놓았더라, 그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이 나오는데 그런 겁니다. 너무 어리기에, 자기 엄마가 자기를 낳아준 엄마라고 어겼는데 나중에 보면 그냥 길러준 엄마라는 내용들이 많잖아요.
마찬가지로 어렸기에, 너무 어려서 납득이 안 되는 내용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어렸을 때 체결한 겁니다. 어린애가 뭘 알겠습니까? 자기는 훌륭한 사람인줄 알고 자기는 똑똑한 사람인줄 알고 자기는 경건한 사람인줄 알았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성령을 주셔서 성경 내막을 알고 보니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내가 납득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우리의 후견인, 우리를 대신하실 분, 그 분과 아버지사이에 처리되어야 될 언약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언약이 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인생에 대해서 손 떼라고 했지요. 한 주 지났으니 잊었겠지요. 우리 인생에서 손 떼라고 했잖아요. 예수도 안 믿고 손 떼라고 하면 손 뗄 수가 없어요. 예수도 안 믿고 손 떼면 자살 외에는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손 떼라 하는 것은 괜히 우리가 손 안 떼면 내 인생에 우리 손 떼만 묻어요. 괜히 주께서 영광 받을 인생을 가지고 자기 욕망으로 훼방하는 짓들을 우리가 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어린아이와 하나님께서 약속을 맺었습니다.
그럴 때 어린아이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알 수가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키우십니다. 조금씩 커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값비싼 명품 옷을 입혀주는데 그 신체의 성장에 맞추어서 그렇게 하십니다. 다른 나라들이 놀랄 정도입니다. ‘저 나라는 행한 것도 별로 없는데 입고 있는 옷 좀 봐라.’ 이런 식으로 시기 나게 많은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이기에 그것이 마땅하고 당연하다 생각하고 그 옷을 입고 그 시선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면, 자기를 언약대로 키우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고 (버릴 수밖에 없지요. 언약이 중요한지를 모르니까) 자기 주변에 있는 세상 나라, 큰 나라가 좋아서 그 나라를 부러워하기 시작하고 그 나라를 흠모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다 벗겨가는 겁니다. 마치 솔로몬에게 주신 하님의 복을 그 뒤의 모든 왕들에게서 다른 나라가 다 껍데기 벗기듯이 다 벗겨가고, 살 발라 먹듯이 다 발라 먹은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가 음행을 하면서 다른 남자에게 있는 것까지 다 값으로 줬구나.” 이렇게 표현을 한 겁니다. 이것은 동생 되는 사마리아 북쪽보다 언니가 더 심하게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일이 뭐가 부끄러운 짓인지, 뭐가 수치스러운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음행을 하는 그것조차도 영원한 언약의 내용에 담겨 있는 대로 시나리오가 진행된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그 담겨서 진행된 내용이 뭐냐, 아주 심하게 놀랄만한 벌을 주시는데 그 벌을 내릴 때 이 벌은 어떤 벌인가, 음행한 여인에게 벌을 내린다는 그 벌을 주게 되는 겁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지점에 와 있습니다. 말로 “네가 음녀다. 음행했다.” 이렇게 말로만이 아니고 “네가 음행하고 더러운 짓을 했다.” 하는 여기에 합당한 징벌을 다른 나라한테는 일체 안주고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그 이스라엘과 유다나라에게 집중포화를 쏟아 붓는 식으로 옴팍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그럴 때 어느 나라가 놀랬는가 하면 물론 이스라엘이 놀란 것은 당연하고 주변 나라들도 깜짝 놀라는 겁니다. ‘저 나라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저렇게 황폐해지고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모든 백성이 산산조각 나서 다른 나라에 다 포로 잡혀가고, 어떻게 저렇게 망가졌을까?’ 다른 나라에서 더 놀라버리죠. 그것을 다른 나라가 부끄러워한다는 표현으로 한 거예요. 쉽게 말씀드려서 이런 겁니다. 사람은 말로 하면 안돼요. 말로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냥 심판 받으면 안 되고 언약 안에 담긴 그 진행과정에 삽입되어 있는 심판에 접촉이 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사람은 피부세포가 온 몸에 덮여 있어서 방수가 돼요. 비가 내려도 빗물이 피부 안으로 스미지 않는 것은 이 피부가 방수효과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피부가 방수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병균도 막아줍니다. 그런데 우연히 칼로 연필 깎다가 피부를 베었습니다. 그 순간 그 부분의 피부가 열리겠지요. 열리면 외부의 병균들이 그 안에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장미의 가시에 찔려서 죽은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지금 얼른 기억은 안 나는데. 평소에 닫혀 있는 피부가 뭔가 가시에 의해서 열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병균이 들어가서 온 몸에 퍼져버리니까 그 사람이 죽고 말았어요.
이스라엘은 곧 죽어도 음부나 음녀가 아니에요. 왜, 자기들은 다른 나라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음녀 같으면 분명히 다른 나라도 같이 음녀라고 욕을 들어먹어야 돼요. 왜, 다른 나라도 바알을 비롯해서 다른 신을 섬기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자기보고 음녀라고 한 그 이유를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알지요. 이스라엘이 음녀라고 규정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언약을 이룹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깨져서 온 나라에 흩어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온 나라가 다 하나님 앞에 음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온 천지가 하나님 보시기에 음녀가 되어서 음녀가 되면 그냥 음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음녀에 합당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게 되거든요. 그 진노와 심판을 앞당겨서 이스라엘을 음녀라고 규정하시면서 거기에 합당한 징벌을 준 거예요. 이제 언약의 내막을 아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 일종의 대속의 역사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행운인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언약 적 징벌을 미리 받은 것을 그들이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나라가 처참하게 망했을 때 감사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니까 음녀라고 해주는 거예요. 다른 나라가 음녀생활을 하고 개나 소나 다 음녀지만.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하지만 언약이 와 닿으면 알아요. 언약이 뭐냐, 면도칼이거든요. 인간은 마귀의 악한 영에 의해서 피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슨 소리를 해도 다 튕겨버려요. 선지자 예레미야, 이사야, 다니엘……, 그리고 오늘날 복음 아는 목사가 성도들이 이야기해도 다 튕겨버려요. 그런데 이 웬 행운인지, 진짜 로또보다 더 행운이 뭐냐 하면 이 가시라는 면도칼이 그 악마의 두꺼운 피부 층, 돼지비계보다 더 두꺼운 그 피부를 쫙 째버리고 그 안에 언약이 들어가 버리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언약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친구야, 너는 그만한 일 당했다고 교회 다니나. 그 정도면 네가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데 뭐 했다고 ‘하나님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빵 얻어먹으려고 교회 갔다가 발 끊었는데 이제부터 교회 다니겠습니다.’ 하는데 네가 왜 갑자기 그렇게 나약한 남자가 되었느냐? 지금까지 지내온 것처럼 네가 의지로 이길 수가 있는데 왜 네가 그처럼 나약해지느냐?”라고 주변에 구시렁거릴 수가 있어요.
하지만 진짜 성령 받고 진짜 주님의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자기 피부에 주님의 면도칼이 그 두꺼운 피부 층을 째고 언약이 들어오거든요. 언약이라는 것이 들어오면 졸지에 자기가 음녀라는 것, 에스겔 16장의 음녀가 남이 아니고 바로 나라는 것, 그리고 그 음녀에 부합되는 합당한 저주와 진노를 내가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나마 숨 쉬는 것은 봐줘서 숨도 쉬는 것이지 사실은 내 주제에 합당하다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상으로 멸망당해야 합당한 겁니다. “맞습니다. 제가 음녀 맞습니다.”라고 할 때 그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주님한테 가시 찔린 사람입니다.
면도칼로 피부가 절개된 사람이에요. 일생이 자기 것이라고 마귀가 준 피부에 고정되어서 ‘내 것 손대만 나는 하나님을 미워할 거야.’ 할 정도로 너무나 단단했던 나,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일환으로서 우리에게 심판이 주어져서 두꺼운 비계 덩어리 같은 내 피부가 열리면서 그 안의 속살, 용서 받아 마땅한 죄와 주님이 주시는 심판과 그 심판 뒤에 있는 용서, 이것이 같이 만나는 놀라운 기적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소급하는 겁니다. 그 동안 나는 내 인생 내가 지키고 사수한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소급당합니다. 가시 찔리고 면도칼에 베일 때 지금까지 내가 나라고 여긴 것을 다 없애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입각해서, 죄인을 용서하는 하나님의 용서시나리오에 죄인의 역할로서 말려들었기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소급해서 우리가 알던 모든 짓거리는 음녀가 하는 짓거리와 동일한 겁니다.
그렇다면 어릴 때의 그 언약의 내막이 뭐냐, 호세아 2장에 보면 나옵니다. 호세아 2장 15절,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이 이스라엘이 원래는 없는 나라입니다. 본래 애굽이 있었고 애굽외에는 다른 나라가 없었는데 그 안에 히브리인이 섞여 살았지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어요. 누군가 후견자가 되지 않으면 아무도 돌봐줄 이 없는, 그저 강한 힘에 의해서 밀리고 눌리고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아무도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그런 노예 민족이 히브리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애굽에서 고생하는 것은 창세기 15, 16,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가운데 “네가 함 땅에서 사대 만에 올라온다.”는 것이 있어요. 함 땅에서 사대 만에 올라온다고 하니까 그게 400년이거든요. 함 땅에서 지내다가 400년 만에 나라가 되어야 된다는 그 취지를 그들은 몰랐지요. 전 아브라함언약을 이루는 환경으로서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어야 되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천국백성이면서도 이 세상에서 70이고 80이고 90이고 아직도 살아야 되는 이유는 애굽 땅에서 사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애굽 땅의 사람들과의 분리죠, 분리될 때 이런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네가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구분하라.” 정말 이것은 오늘날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저 자신에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이고도 합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라는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뭐가 되었든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자꾸 애굽 식이기에. 애굽에서 내 것 사수하기 위해서, 내 인생 내가 지키기 위해서 분투노력해야 되고 그래야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이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한 일로 보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 어린양의 피, 언약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예수님 당시의 그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은 일과 메시아를 결부시켰어요. 중요하지 않은 자기 일과 여호와 하나님을 엮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신을, 하나님을 없애려 오신 겁니다. 하나님을 부르는데 그 하나님이 진짜 중요한 것과 엮인 것이 아니고 중요하지 않은 것과 엮여 있어요. 정작 하나님에게 합당하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새롭게 생산해 냅니다. 자신의 피로, 자신의 말씀으로, 자신의 행동으로.
진짜 중요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만들어내시는 작업을 해 온 거예요. 그 만들어내시는 작업은 에스겔 16장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바로 음녀라는 것을 알려주고 네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나는 죄인 맞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짜 중요하고 참된 이스라엘을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께서 에스겔 16장의 그 언약대로 우리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어릴 때 맺은 언약은 뭐냐, 우리는 애굽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호세아 2장 16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를 키워서 자기 아내 삼기 위해서 애굽에서 건져내서 광야로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거예요. 하나님의 신부를 만들기 위해서. 그 신부는 과거에 지독한 음녀였다는 것이 확실해져야 그게 신부가 돼요. 왜, 음녀인데 어떻게 신부가 되었는가? 남편의 용서하심, 피 흘리심 때문에 신부가 되었다는 이것이 창세전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영원한 언약입니다.
이 언약에 의해서 우리의 영혼들이, 우리의 심령들이 오늘부터 영원토록 마음껏 베이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언약, 그것이 소중한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는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어서 저희들이 얼마나 세상을 좋아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몸을 바치며 사는지를, 창녀같이 엉뚱한 것에 몸 바치고 값을 원하고 사는지를 저희들이 깨닫게 해 주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주님의 피, 용서만이 소중한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