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강-에스겔16장 35-41(우상의 정체)1306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6장 35절에서 4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6:35-41
“그러므로 너 음부야 여호와의 말을 들을찌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며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내가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던 모든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으되 사방에서 모아 너를 대적하게 할 것이요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어 그들로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국문함 같이 너를 국문하여 진노의 피와 투기의 피를 네게 돌리고 내가 또 너를 그들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네 누를 헐며 네 높은 대를 훼파하며 네 의복을 벗기고 네 장식품을 빼앗고 네 몸을 벌거벗겨 버려두며 무리를 데리고 와서 너를 돌로 치며 칼로 찌르며 불로 너의 집들을 사르고 여러 여인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찌라 내가 너로 곧 음행을 그치게 하리니 네가 다시는 값을 주지 아니하리라.”
선지자의 말씀을 보통 일반사람들이 대화하는 가운데 나오는 말로 들어버리면 도대체 앞뒤가 맞지를 않아요. 분명히 앞에는 음부, 간음한 여인이라고 해서 간통한 아줌마를 앞에 세워두고 이야기하듯이 하거든요. 이것은 사람한테 하듯이 해놓고 뒷부분에 가면 “너의 집들을 사르고 여러 여인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찌라.”라고 해서 어떤 집단이나 국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유다나 이스라엘 나라를 통째로 간음한 여인, 창기, 음행한 여인으로 묘사를 하는데 논리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한 겁니다.
누군가 상대방이 나에게 욕을 해도 자연스럽고 논리적이게 욕을 하면 알아먹겠는데 욕을 해도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먹으면 어느 대목에서 내가 화를 내야 할지도 잘 구분을 못하는 거지요. 에스겔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유다나라와 이스라엘을 두고 음부, 창기라고 했을 때 듣는 사람들이 경상도 말로 “니 지금 뭐라카노?” 나라의 이모저모가 문제이니 이렇게 고치라고 하면 알아듣겠는데 “이 음부야, 창녀야!”라고 하면 그 음부나 창녀라는 것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거지요. 사창가의 창녀에 국가를 비유할 때는 연결성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에스겔, 또는 하나님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겁니까?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여자를 밝혀는 통에 이웃나라의 사창가나 여인들과 합궁하면서 돌아다닌다면 그 때 선지자들이 “이 이스라엘 남자들아, 왜 창녀하고 놀아나느냐?” 하든지 아니면 이스라엘 여인들이 다른 나라 남자들이 그리워서 이웃나라의 남자들과 광란의 파티를 벌이면서 음란한 짓을 했을 그 때 선지자들이 “왜 음행을 하느냐?” 하면 그때는 납득이 된다고요. ‘우리가 참 성적으로 문란한 일을 하다가 하나님에게 들켰네. 회개해야지.’ 이러면 납득이 되는데 그런 아무런 일이 없는데 난데없이 창녀취급을 해서 이런 지적을 하니 이런 경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본문 36절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며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벗은 몸이라고 할 때 그 당시 유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민족의 우상, 요새 같으면 절에 가듯이 그렇게 우상을 섬길 때 홀라당 벗고 가서 절했다는 말입니까? 아니잖아요. 갓 바위 올라갈 때 벌거벗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절에 가서도 옷 다 차려 입고 절하잖아요. 옷 벗고 절하는 절간 없잖아요. 납득이 되도록 해야 되는데 벌거벗고 뭘 했다고 하니 언제 벗었냐고요? 양복 다 차려 입었는데 언제 벌거벗어요. 알아듣게 지적을 해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벌거벗었다 하면 하나님 믿고 구원받으라는 이야기인지 말라는 것인지 이게 무슨 이야기냐는 말입니다.
아무리 선지자지만 너무 오버해서 이야기하고 논리가 비약적이 되면 듣는데 있어서 능률이 안 오르지 않습니까? 너무 앞서가면 그렇잖아요. 찬찬히 설명을 해도 들을까 말까 하는데 “네가 벌거벗었다.” 하면 “우리가 목욕탕에서나 벌거벗었지 언제 그랬습니까?” 하게 되는 거지요.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어디서 풀리는가,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소에 미친 인간 아닌 이상 옷을 다 입고 다니는데 선지자는 벌거벗었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벌거벗은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 분이 딱 한 분 있습니다.
물론 이사야도 애굽에서 그런 적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벌거벗은 채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그 벌거벗은 몸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때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지금 이 이야기를 듣는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들이 “제가 언제 사람 앞에서 이렇게 옷을 벗었습니까?”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옷을 다 갖춰 입고 교양을 지킨다고 했어도 주의 말씀 앞에서는 우리가 옷 잘 차려입고 잘난 체 한 것은 아예 보지도 않고 세상의 음란한 여인으로 입어야 할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은 몸을 가지고 그들과 몸을 섞었다고 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너는 네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으니까 에스겔이 전하는 이 음란한 여인이란 말도 못 알아듣는다.”하는 겁니다. 네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기에, 너의 무슨 행동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벌거벗고 간음한 여인이 되는가, 왜 꼭 그런 식의 표현이어야 하며 다르게는 표현이 안 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납득이 안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설명이 되어야 할 텐데 그 설명이란, 하나님께서 유다나 이스라엘을 평소에 그들이 우상을 섬기지 않을 때는 벌거벗었다는 말을 안 해요. 그러나 본문 안에서 이야기하면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때 벌거벗은 것으로 간주해서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말은 옷 입은 채로 우상 섬길 수 없는 구조, 체제가 유다와 이스라엘체제라는 겁니다. 다른 민족은 놔두고요, 생각할 것도 없고요. 좀 어렵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그동안 하나님 섬기고 율법 지키는 이 모든 것이 진정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저 우상 섬기기에 급급해서 어떤 경우라도 우상을 좆는 육신을 여호와 이름으로 감추는 식으로 옷을 걸치고 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우상 섬기니까 좋다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채로 그들에게 나간 셈이 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마디로 하면, 인간은 육신이 결정하지 뭘 걸쳤는가가 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의 그 육신이라는 문제. 하나님께서 “네 육신은 벌거벗은 모습이다.”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고요, 우상이 뭐냐는 겁니다. 우상의 정체, 우상을 우상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유다나 이스라엘은 간음하고 창기 짓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우상에게서 필히 나오고,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우상이 나오는 창녀 짓에 대해서 이 유다와 이스라엘과 모든 인간들은 얼씨구나, 하고 벌거벗은 것도 모르고 간음하는 본성을 폭로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간음이란 것, 창녀 짓을 한다는 것으로 우상숭배를 단적으로 말씀하는 증거가 41절에 나옵니다. “불로 너의 집들을 사르고 여러 여인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찌라 내가 너로 곧 음행을 그치게 하리니 네가 다시는 값을 주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러니까 상대방을 말하지요. 지금 창녀짓을 하는 것이 유다민족이고 하나님의 백성인데 창녀 짓을 할 때 “너와 관계한 그 남정네가 너에게 화대를 주지 아니한다.”는겁니다. 그렇다면 유다나 이스라엘이 그동안 우상을 섬긴 것은 어디에 적합한 비유가 되느냐, 돈 벌기 위해서, 자기 먹고 살기 위해서 다른 것은 일체 없고 자기 몸 하나 굴려서 생계비를 얻고자 하는 창녀가 현재 유다의 행태에 딱 적합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기 위해서 몸을 팔 때 자기 몸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 몸 하나 밥 먹고 살면 무슨 짓을 해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 유다가 보여주고 있는 육신의 근원적인 본 모습이라는 겁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그저 밥만 먹고 살면 이 몸을 어떻게 굴리면 상관없다는 식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인가, 그것은 아니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는 말은 주변에 있는 우상 섬기는 민족도 똑같이 현재 유다와 이스라엘이 지적받는 그 지적을 받아도 마땅한 존재인 겁니다. 그런데 유독 유다나라와 이스라엘에게만 그것이 바로 창녀짓이라고 에스겔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이게 축복이에요.
“유다야? 네가 주제파악 못하지?” “제가 어때서요.” “너 창녀거든.” “제가 왜 창녀입니까?” “네가 세상에서 밥 먹고 살려고 네 몸 가지고 뭔 짓이든 하는 인간이다.” 그러면 유다가 “왜 나만 갖고 그럽니까?” 하나님께서 유다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른 민족은 놔두고 자기 민족이기에 갈구시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 수 있지요. 품위 있고 뼈대 있는 집안, 유교의 전통을 중시하는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이 학교에서 귀가하다 빵 집 들른다고 늦게 오니까 애를 옥상 위에 데려가서 매를 칩니다. 확성기로 “내가 나쁜 친구들과 놀지 말라고 했잖아. 이 못된 자식아!” 하면서 매를 때리거든요.
이렇게 해버리면 자기 애 맞는 그 광경으로 인해서 주변의 모든 그 애의 친구들은 나쁜 친구가 되어버려요.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이에요. 때리기는 자기자식을 때리지만 “내가 저런 나쁜 친구들과는 놀지 말라고 했지.” 하고 그 주변을 겨냥해서 막 패버리는 거예요. 사람은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어느 민족이든 어느 국가든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겨요. 그런데 어떤 집 옥상에서 그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데 들리는 소리가 “그러니까 나쁜 친구들과 놀지 말라고 했잖아.” 하니까 평소에 살아계신 하나님 섬긴다고 같이 생활했던 친구가 자기 아버지한테 매를 맞고 있어요. 제가 예를 든 이 취지를 잘 아셔야 돼요.
예수님께서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죽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뭐라고 하느냐,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다고요.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왜 저러지? 버리기는 우리가 버렸는데 왜 아버지가 버렸다고 하지? 그러면 내가 믿는 하나님과 저렇게 십자가에 달려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저 분의 아버지와 같은 신이 아니라는 말인가?” 아니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떠벌이기 위해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되어버리면 저 분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한 우리는 졸지에 지옥을 천번 만번 가도 할 말이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겁니다.
본격적으로 설교 시작하겠습니다. 기독교가 뭐냐 하는 겁니다. 이 기독교가 수상해요.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기독교를 세운 적이 없고 사도바울도 기독교를 세운 적이 없습니다. 이게 창녀고 간음이 돼요. 예수님은 뭘 세우지를 않았어요. 세우기는 하나님께서 세우셨거든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머리 되게 해서 교회를 세웠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을 세웠어요. 에베소서에서 예수님은 머리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머리로 만든 교회란 어떤 식인가 하면, 단 하나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피,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라고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한 것은 뭐냐,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것뿐이에요. 세례는 이렇게 주고, 성찬식은 이렇게 하고, 장로 세울 때는 이렇게, 집사 세울 때는 이렇게 한다, 이런 것이 일체 없습니다.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장로나 감독들 이야기는 다 복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떤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체 그런 것이 없어요. 왜 그런가, 성령께서 오실 때는 오직 뭐만 내세우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내세우는가하면,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지 못하는 죄악이라는 그 증거를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성령은 쳐들어오십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사실은 다 같은 이야기에요. 재판할 때는 죄와 의를 분별해서 하기에.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시면서 오시는데 그 근거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똑바로 교회 세워라,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것도 아니었어요. 기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정육점 쇠고리에 매달려 있는 고기처럼 축 십자가에 늘어져 있는 그 사건 하나,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사건, 이 순신 죽은 것보다 덜 유명한 사건, 그러나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 뭔가 사소하게 보이지만.
어떤 청년에 십자가에 죽었어요. 그것도 지나간 어느 시점, 2천 년 전에 죽었어요. 그 사건 외에 아무것도 우리에게 앞장세운 것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달리 우리에게 아무것도 앞장세우지 않았어요. 그게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 36, 37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지금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다른 것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만 이야기해요. 이 소식을 가지고 어떻게 교회를 세웁니까, 라는 생각은 하나님 생각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예수, 이것을 두 글자로 축소하면 ‘육신’이에요.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육신입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뭘 걸치고 있으면서 나는 뭐다, 나는 어느 학교 나왔다, 이런 모든 것은 다 벌거벗으면 뭐가 되는가, 우리가 육신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육신대 육신으로 만나라는 말이지요. 주님이 십자가에 정육점 고기처럼 처참하게 매달려서 피를 쏟은 그 육신을 만나려면 너도 거기에 합당한 육신으로서만 그 앞에 서야 돼요. 그런데 주님은 억울하게 죽은 육신이라면 우리는 온갖 세상 것을 걸치고 있는, 세상 것을 좋아하고 있는 그 육신으로서 그 앞에 서게 되는 겁니다.
온갖 세상 것에 대한 기대와 욕망으로 가득 찬 그것을 에스겔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한참 간음하는 육신이라고 보는 겁니다. 누구와? 지옥 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택하지도 않는 백성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좋다고 벌거벗고 방금 간통하다 방금 호출당한 그 육신이 십자가 앞에서 섰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세상 것 안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들 세상 것 좋아하는데 예수님 십자가에 달린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라고 할 거예요. 그렇게 질문한다면 진짜 멋진 질문하신 거예요.
왜냐,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없어요. 모든 인간은 간통한 육신이기에 괜찮은 육신은 없습니다. 괜찮은 육신이 있을 것 같으면 주님께서 십자가 지지도 않았어요.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서 간음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괜찮은 사람들이기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꽂혀 있고 그 언약대로 예수님의 희생으로 구원받을 자가 따로 있기에 그 따로 있는 사람에게는 “이 간음한 자야, 이 간통한 창녀야.”라고 해주시는 그 방식이 바로 구원하시는 방식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에스겔 당시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에이, 이 간통한 여인아.”라고 부르시는 것은 “너는 뭘 해도 세상 것 그리워서 옷을 벗었는지 입었는지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그냥 세상 사람들과 같은 통속으로 돌아가고 있으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들에게만 이야기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유다를 새롭게 만들려고 하시는 거예요. 없는 이스라엘, 아무도 알아서 이스라엘 될 수 없는 그 이스라엘을 무에서 새로 만드시는 겁니다. 어떻게? 에스겔의 이 말씀을 가지고 “이 간음한 자여.” 다른 말로 하면 “이 벌거벗은 육신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왜 내가 벌거벗었어요? 저는 교양 있는데. 저는 함부로 옷 벗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남자입니다. 왜 남자를 보고 여인아, 라고 합니다. 남자답게 남자로 대우해주세요.” 뭔가 자신이 벌거벗지 않았다는 것, 육신으로 대하지 말고 정신으로 대해달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사실은 그것이 바로 지옥 가는 이방인에 해당되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유대인이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그 취지를 도통 알아먹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 때 그 당시의 자기 조상들에게만 국한되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인 점잖은 자기들에게 해당된다는 생각을 하지를 못했어요.
뿐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에 자신은 깨끗하다고 여겼고 하나님의 말씀에 완벽하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어요. 성경에 나오는 그 모든 죄, 자기는 여호와를 섬긴다고 했지만 사실은 우상이었습니다. 이유가 뭐냐, 여호와가 아니기 때문에 아니라 본인이 육신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육신은 그냥 육신으로 살면 되는데 그 육신에 너무 많이 꾸몄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 할아버지의 환갑 때 집에서 잔치를 했는데 국수가 너무 맛있어서 일곱 그릇이나 먹고 배탈이 난적이 있어요.
국수가 면도 맛있지만 고명이라고 하죠, 계란 썬 것도 올리고 파도 올려놓은 그 국물이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는 벌거벗은 맛없는 육신에다 고명을 너무 예쁘게 올려놓았어요. 기독교를 만들어놓은 거예요. 육신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자로 나가는 거예요. 교회 나가서 직분 가지고 경건한 생활을 하고 새벽기도도 나가고 꼬박꼬박 헌금하면서 고명을 너무 많이 올려놓았어요. 소고기 다진 것, 노란색 계란지단, 달착지근한 멸치국물, 너무 멋있고 너무 대견해요. 그러니 십자가를 자꾸 밀치는 거예요. “십자가 이미 알고 있어요. 이미 통과했는데 자꾸 뭐하려고 십자가를 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런 것은 그만하세요. 이미 나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하고 자꾸 밀쳐내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꾸며내는 방법이 뭐냐,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 관계의 성립이 안 되니까 벌거벗은 육신이지만 신이 나와 교류를 하고 관계를 가질 수 있고 신과 내가 통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주변의 인간의 육신적 본성들이 그것을 가르쳐 온 거예요. 인간의 육신은 그냥 벌거벗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내가 통하는 방법, 관계하는 방법, 구원받는 방법, 이런 것을 창안해 내서 국수위에 얹은 고명처럼 뒤집어 써주니까 우리는 그 요령들을 배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바로 그것이 우상 섬기는 자들……,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를 우상숭배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을 섬기는 그 방법들에 소위 모든 인간이 말려들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한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십자가에서 나온 말씀이 뭐냐, “이 벌거벗은 간통한 여인아, 네가 벌거벗은 것을 왜 모르는가?”라고 지적할 때 “우리가 어째서 벌거벗었습니까?” “십자가 앞에 나와 봐! 교회 세워서 예배당 채우고 세례주고 헌금하라, 는 이런 것을 언제 하라고 했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저 피 흘리는 고깃덩어리, 그것이 전부입니다. 고깃덩어리가 피 흘리고 있는데 거기에 무슨 고상한 도덕이 나오고 윤리가 나옵니까? 거기서 무슨 경건함이 나와요?
율법에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은 육신에 있을 때의 법은 율법이 적용되지만 사람이 육신이 아니고 종교적으로 너무 꾸미다 보니 꾸며진 몸을 가지고서는 윤리 도덕으로 하나님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차원의 육신은 네가 우상숭배자라고 지적하면서 나오거든요. 신명기 13장에 보면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신 13:13-15)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아니하면 이 신명기 13장 14절의 말씀의 경우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할 수가 없어요. 왜, 너무 과격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심하게 나올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라고 동정을 하게 되어 있어요. 구약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상숭배하면 가증하게 여기라고 했고 다른 신을 섬기게 했기에 그 마을 사람들을 다 몰살시키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예, 잘 되었습니다.” 라고 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들이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습니까? 사람이 우상 섬길 수도 있는 문제지요. 못 배워서 다른 신을 섬길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못살게 굴고 진멸하고 애들까지 다 죽이라고 하는 이것은 “하나님이 해도 해도 너무 심합니다.”라고 우상 숭배자를 두둔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어요.
왜, 우리는 자신이 잘났으니까, 자기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니까. 바로 그 마음가짐이 창녀의 마음가짐이에요. 그들과 같은 육신, 벌거벗은 육신, 세상 좋아하는 육신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 안다. 우리는 경건하게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도 알고 있다. 십자가도 안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멋있나.’ 이런 식으로 너무 장식을 많이 하니까 주님께서는 “이 벌거벗은 창기야. 네가 외치고 있는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기껏 하는 짓인 종교적이고 경건스런 짓들을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거예요.
교회 오래 다니고 목사가 되면 본인이 생각해도 본인이 너무 경건하고 착해요. 감히 나는 세상에 듬뿍 빠진 창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한 번 육신은 영원한 육신입니다. 죽을 때 까지 육신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미쳤고 주님하고는 대화가 안 되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대화가 너무나 잘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와 하는 대화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피로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네가 죄를 지었기에, 네 육신을 위해서 내 육신이 죽었다.” 하는 그 하나, 그 피 범벅된 육신, 그 육신만이 우리를 살리시고 그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상상하지 않고 꾸미지 않고 전통과 역사 자랑하지 않고 관례니 율법이니 관습이니 그런 것을 걷어내면 남는 것은 십자가 죽음인 피 밖에 없는데, 피로 사신 것이 교회인데 주여, 형식만 남았습니다. 건물만 남았고 제도만 남았고 반복되는 인간의 행위들만 남았습니다. 주여, 더러운 것 다 걷어내고 육신으로서 십자가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