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 의지함
2013년 7월 17일 본문 말씀: 에스겔 17:11-16
(겔 17:1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7:12, 개역) 『너는 패역한 족속에게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고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방백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가고』
(겔 17:13, 개역) 『그 왕족 중에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로 맹세케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
(겔 17:14, 개역) 『이는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 언약을 지켜야 능히 서게 하려 하였음이어늘』
(겔 17:15, 개역) 『그가 사자를 애굽에 보내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겔 17:16,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의 거하는 곳 바벨론 중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겔 17:17, 개역) 『대적이 토성을 쌓으며 운제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주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구원이 대단히 요란스러워 보입니다. 신약에 와서 그냥 간단하게 “예수 믿으면 천국이다”고 알면 되는데 왜 구약 때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상황처럼 분주할까요? 그것은 일단 ‘닫힌 상황’에서는 그 담힌 상황 밖을 알 수가 없기에 그 자체적으로 제한한 현실 이해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적 상황’입니다. 흔히들 종교를 통해서 신의 나라로 접촉이 가능하다고 알 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니 소위 신성하다는 종교의 궁극적 모양새는 권력형으로 갖추어집니다. 정치적 사안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홍해바다까지 오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는 ‘홍해 이후’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홍해에 빠져죽든지 아니면 뒤쫓아온 애굽 군대에 몰살당하든지 하는 절망적 상황 뿐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그려지는 현실상이란 곧 정치적 상황 뿐입니다. 즉 ‘지도자를 잘 만나야 우리가 산다’는 겁니다.
바다 자체가 둘로 나뉘어져 그 가운데 통과하는 길이 나올 줄이야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소위 ‘현실 그 자체’라고 알고 있는 그 상황이 자신들의 인식을 제한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 뒤 요단강 가에서 다달았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지팡이들고 요단강을 물을 갈라놓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역시 난감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은 그 뒤 여리고성 함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난공불락의 성채를 무기없이 무너뜨린다는 아이디어는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닫혀 있는 상황’에서는 그 다음의 상황을 짐작조차 못합니다. 구약에서 볼 때, 신약의 상황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이 곧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능력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이점은 12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스승을 지키기위해 무력을 사룡했는데 단도로 말고라는 종의 귀를 베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시면서 그 떨어진 말고의 귀를 제자리로 도로 붙여놓았습니다.
이 정도의 대단한 능력의 소지자라면 십자가 죽음이라는 처참하고 치욕스러운 죽음을 저항없이 맞이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그당시 집권자들이나 백성들도 모두 ‘정치적 상황’을 최종적인 현실상으로 간주하는데는 이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현실 그 자체로 보는 안목이 곧 죄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고 나라 지키기 위해 애굽에 도움을 청하려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왕은 곧 나의 종이다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왕의 굴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앙을 내세우는 나라 백성이나 왕으로는 모멸감을 갖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언약의 진수라는 겁니다. 언약이란 기존의 힘으로 버티는 정치적 상황에서 도리어 약한 자로 희생당하는 식으로 이 현실 세계에 펼친다는 겁니다.
애굽이라는 나라는 언약 구성에 있어 필수 요소입니다. 로마서 9:16-18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정치적 상황’으로서 현실이 최종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있어 대변자적인 인물입니다. 힘으로는 최종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강퍅’을 제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보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달성에 있어 필히 ‘강퍅’과 ‘긍휼’이라는 상반된 결과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퍅이란 바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힘을 그리워하는 태도를 말하고 긍휼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을 알게 하기 위해 울게 되는 상황입니다. 창세기 37:32-35에 보면,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언약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 죽음의 소식을 전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 안 울 아버지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긍휼이 전달되는 참된 현실입니다.
모든 것들이 정치적인 힘의 논리를 사랑하고 전개되는 마당에 단순히 자신의 힘을 잃었다고 해서는 슬퍼하거나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은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슬퍼서 우는 자들이 바로 ‘갇힌 상황’ 너머를 읽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오늘날 언약을 소개합니다.
유대나라가 바벨론에 망하는 것은 실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언약 안에 담긴 내용이 전달되는 모양새입니다. 망해야 산다는 경로를 타고 있는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현실로 자족하거나 만족하거나 만끽하는 재미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한시로 잊지 않고 사는 성도가 여전히 이 세상에 출현됩니다.
바로 언약적인 모임이란 이런 예수님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교류를 나누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씀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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