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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속담(겔16;44-47)이근호130626

아빠와 함께 2013. 6. 26. 21:46

 

2013-06-26 21:02:52 조회 : 3         
   불길한 속담 130626 이름 : 이근호   

불길한 속담 (에스겔 16: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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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6-26 21:03 


                              불길한 속담

2013년 6월 26일                                본문 말씀: 에스겔  16:44-47

(16:44) 무릇 속담하는 자가 네게 대하여 속담하기를 어미가 어떠하면 딸도 그렇다 하리라
(16:45)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미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미는 헷 사람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며
(16:46) 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좌편에 거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우편에 거하는 소돔이라
(16:47)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치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치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를 비난하고 나섭니다. 사람이란 누구에게 비난받게 되면 과연 내가 비난받을 만한 짓은 했는지 아니면 괜히 억울하게 공격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자기 자신에 대한 점검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그러한 인간들의 자기 반성조차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타락마저 체험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정도 타락해야ㅐ 타락인지를 인간의 능력으로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뭔가를 안다는 것은 반성할 기회도 나란히 붙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내가 뭔가를 안다는 것은 오류가 나타날 때 반성할 기회마저 얻었다는 바가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유다 나라의 멸망은 필연적입니다. 안 망하고서는 아니되는 나라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그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과 체험을 능가합니다.

사람이란 뭔가를 반성하려면 그 죄에 대해서 필히 체험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는 죄지적은 인간들이 아무리 체험하려도 그 지경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이해하는 그 타락의 수준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타락해도 원래 인간이 타락한 그 죄는 인간의 체험보다 더 큽니다.

유다 나라의 멸망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가 아무리 노력해도 체험될 수 없는 언급을 길게 남기십니다. 즉 “너희들은 음부다. 이는 다른 나라의 멸망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특이점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대상인 아모리라는 이방민족과 헷 족속이라는 이방민족의 부모로 모시고 사는 그런 자손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 민족이라는 겁니다.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을 겁니다. 저주를 하기 위한 저주같습니다. 이러한 지적에 반성하고 유다나라가 정신 차리면 결코 망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따라서 유다 나라가 멸망하는 이유는, 멸망 당사자인 유다 나라도 미처 알지 못하는 이유에 준해서 실시되는 겁니다.

에스겔 16장 전체 이야기는 그동안 이스라엘이 흘러온 역사는 ‘음부’라는 한 인격체가 자기 내부에서 끌어오르는 욕정을 못내 이겨내지 못하고 주변 질 나쁜 남자들과 적극적으로 정사를 버린 역사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새삼스럽게 나쁜 짓을 고안해서 한 것이 아니라 원래 태생이 저의 아비, 어미를 닮았기에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고 단정짓습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의 차이성을 없애버리고 더 나아가서 도리어 “더 심했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나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은 하나님의 택한 나라가 실은 음부에 불과했다는 결론으로 마감될 조짐이 보입니다. 이런 예언을 하신 이유는 그 해답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 정신의 상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인간들은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정신을 갖추면 될게 아니겠는가”라고 나오면 하나님의 지적을 좋은 쪽으로 변경 가능한 것으로 조정이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의 취지는 그런게 아닙니다. 출애굽 정신을 담는 능력은 아예 이스라엘에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20-24에 보면, “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 정신이 유지되지 아니하면 그 나라를 이스라엘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아와 과부의 입장에서 자체적인 선행이나 업적이나 착함 덕분에 보호자로부터 구원된 자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자신을 자신의 관리대상으로 삼아서는 아니된다 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음부로 그리고 소돔으로 규정하시는 이유는 에스겔 16:49에 나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면 소돔에서 면제될 기회를 갖는다는 말일까요?

그렇게 되면 속담의 규정성이 무의미해집니다. 속담에 의해서라면 유다는 무조건 소돔이 되어야 합니다. 이 무조건성은 인간들이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일은 결코 반성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근거합니다. 아무리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아무리 나름대로 교만하지 않는 소박한 삶을 살아도 인간의 육적 한계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지적 사항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경우를 봅시다. 다윗은 말합니다. “나는 주께만 범죄했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자기 관리만 잘 했으면 죄인이 안될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혹은 하다보니 나중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고 어쩔 수 없이 고백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상한 심령이었고 처음부터 주께만 범죄한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본인이 이러한 말씀 규정에 체험화 되지를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성신이 그에게 임하므로서는 그는 애초부터 주께서만 범죄한 사람으로 자신을 규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자기를 손을 뗍니다.

밧세바와 정을 통한 후 태어난 자식이 시름시름 죽게 되었을 때에 그는 혼신을 다하여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막상 그 아이가 죽고 난 뒤에는 비로소 자신이 자신 운명이나 일생에 대해서 관리하거나 관여할 입장이 있지 않음을 압니다. 바로 이런 정신으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고 그 전에 유다 나라의 멸망을 자아내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변명해도 에스겔이 규정한 ‘음부’라는 규정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음부답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생존의지로 무장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겠습니까! 그 정도로 우리의 죄는 우리가 생각할 이상으로 심각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손을 떼게 하옵소서. 그냥 하나님의 말씀에 맡기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6강-에스겔16장 44-47(불길한 속담)13062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6장 44절에서 4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6:44-47

 

“무릇 속담하는 자가 네게 대하여 속담하기를 어미가 어떠하면 딸도 그렇다 하리라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미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미는 헷 사람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며 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좌편에 거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우편에 거하는 소돔이라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치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치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지금 에스겔이 오늘 본문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언급하는 요지가 뭐냐 하면, ‘너희들은 음부다.’라는 것입니다. 엄연히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를 찾아다니면서 음행하는 음부라고 할 때 여기에 대해서 그 백성들이 수긍을 할 수가 없었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존속하기 위해서 노력을 다 한 겁니다. 그런데도 에스겔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때 그들은 에스겔이 말하는 그 내용과 자기가 자신에 대해서 이런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의 그 사이를 결합하고자 어떤 노력을 했을 겁니다.

 

했지만 에스겔이 지적하고 있는 이점에 대해서는 도저히 타협점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진정한 타락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이 타락한 것을 본인이 느낄 때 그것은 진정한 타락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너는 이렇게 범죄 했다. 너는 타락했고 음부다.”라고 했을 때에 그것을 우리가 “예, 맞습니다.” 하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능력 밖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성경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아멘이라고 화답하고 동의하려면 이 말씀이 진정으로 우리속에 체험이 되어야 되는데 “너는 음부다. 너는 타락한 여인이다.” 할 때 그 취지가 무엇을 말씀하는지 그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얼른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연결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서 음부가 하는 작태, 행세를 통해서 어떻게든 연결시켜보고 ‘이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음부가 맞구나.’하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보려고 노력을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증거가 드러나는데 그게 뭐냐, “너희가 흠모하고 있는 나라, 그 나라의 신을 너희가 좋다고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다.”라고 16장 초반에 되어 있지요.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거두어서 오히려 외부의 민족들이 유다나 이스라엘을 부러워할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데 너희들이 은총과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오히려 너희들이 갖고 있던 막대한 축복의 증거들을 이방나라한테 뇌물로 바쳐서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뇌물 바치는 것을 가지고 에스겔에서는 창기가 자기와 자 달라고 미리 선물을 주는 행위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33절과 34절에 보면 “사람들은 모든 창기에게 선물을 주거늘 오직 너는 네 모든 정든 자에게 선물을 주며 값을 주어서 사방에서 와서 너와 행음하게 하니 너의 음란함이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함은 행음하려고 너를 따르는 자가 없음이며 또 네가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 그런즉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니라.” 무슨 창녀가 값을 치르기까지 하면서 나와 관계하자고 나서겠습니까?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그 당시 백성에게 했거든요. 그 당시 사람이나 오늘날 우리나 마찬가지에요. 에스겔 선지자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해도 심해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급박하게 모든 것을 막다른 길로 몰아세우려고 하는 그 이유가 뭔가?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범죄 했습니다, 타락했습니다, 해도 아직도 하나님이 원하는 그 타락과 범죄의 수준을 본인이 수긍할 수가 없어요. 사람은 비록 천사같이 살지는 못하더라도 저것은 나쁜 짓이다, 저것은 옳은 짓이다, 이런 감이 오기 마련이거든요. 그런 정도는 충분히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판단능력이 있다는 말은 사람이 아무리 급해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네가 창녀다, 음부다.” 하는 이 정도까지 막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그들은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관점에서는 이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신부가 되려면 ‘이 정도 하면 하나님의 신부가 되겠지.’라고 미리 우리가 짐작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안돼요. 그렇게 되면 본인이 하나님의 신부가 되려는 노력을 추가해서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남자가 결혼하려고 애쓰는 모양새에 지나지 않아요. ‘남자친구가 나한테 섭섭한 것이 있구나. 달래줘서 마음을 풀어줘야지. 이렇게 하면 마음이 풀리겠지. 그러면 난 저 사람의 신부가 되겠지. 그리고 난 저 사람과 행복하게 살겠지.’ 이것은 인간들이 예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하는 말은 도저히 인간들로서는 예상이 되지를 않아요. 어지간해야지요. 너는 타락했다, 범죄 했다는 그 정도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체험하고자 해도 체험될 수 없는 지경으로 너는 타락했다고 해놓고 추가적으로 우리를 보고 “네가 범죄 했잖아.”라고 추궁해 들어가니까 우리는 어처구니가 없는 겁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지독스럽게 범죄 했는가, 우리가 아무리 나빠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올시다, 이렇게 반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요. 다윗이 평소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은 생각했을 거예요. 율법대로 살 사람은 없다는 것을 다윗도 알고 그 당시 사람들도 다 알지요.

 

그런데 다윗이 밧세바라는 여인과 간통하기 이전까지는 ‘나도 나쁜 구석이 있어. 내가 천사가 될 수는 없잖아.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기 마련이야.’라고 분명히 자기가 생각했던 타락의 느낌 같은 것이 있을 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남의 아내와 정을 통하고 급작스레 일이 돌아가면서 그 살아있는 남자, 그것도 하나님의 전쟁터에 희생하러 나갔던 그 밧세바의 남편인 장군을 불러서 회유를 하고 안 통하니까 고의가 아닌듯한 인상을 줘서 위험한 적지에서 할례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 의해서 처참하게 죽게 만든 주모자가 바로 다윗 본인이거든요.

 

이때 다윗은 뭘 생각했느냐, ‘내가 나쁜 것을 경험해야지.’라는 것을 아예 놔버렸어요. 신앙생활은 ‘내가 바르게 해야 되고 잘 해야 돼.’라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성도 만드는 작업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거예요. ‘말씀만 주시면 알아서 지킬 것은 지키고 금지할 것은 금지하겠습니다. 양심도 있고 성령이 있으니까 주의해서 잘 하겠습니다.’ 얼마든지 나름대로의 자기성의를 표시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의 문제였던 겁니다. 범죄에 대해서 다윗은 아직도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일수가 없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서 그것이 계속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려는 그 작업에 방해되는 요소로서 내부에서 자꾸 작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남의 아내와 정을 통하고 그 아내의 남편을 죽일 때 도대체 그게 제정신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다윗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손을 완전히 놓았다는 것이 어느 대목에 나오는가 하면 밧세바와 관계 맺은 증거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였어요. 이름도 없는 그 아기가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그 애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그래서 다윗은 최선을 다해서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죄 때문에 저 애를 죽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죽여도 나를 죽여야지 왜 저 애를 죽입니까?”라고 간곡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는 정말 죽었어요.

 

이것은 곧 그 애가 죽을 때 본인도 죽어 마땅함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죽어 마땅함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다윗은 자기로부터 자기가 떨어져 나가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 속에 있으면서 죄를 이겨보려고 하는 그 다윗이 이제는 내가 죄를 이길 수 없는 입장임을 아는 순간 비로소 자기 자신은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이 나를 성도되게 한 작업의 일환으로 벌어진 현장에 자기가 놀아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 사실을 다윗은 미처 몰랐던 거예요.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죄를 극단적으로 밀어 부칩니다.

 

다윗이 그것을 나중에 알고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했습니다.” 다윗이 체험한 것은 “내가 이 정도로 죄인입니다.”가 아니라 “내가 주께만 범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께만 범죄 한 것을 내가 체험했다는 것이 아니고 “체험 하나 안하나 주께만 범죄 한 인간으로 처음부터 나를 지켜보고 왔었습니다, 라는 사실을 내가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주께서는 원하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예배도 아니고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하면 상한심령이 됩니까, 라는 말이 아니고 처음부터 나는 상한심령이었었어요. 처음부터 상한심령이었던 거예요.

 

상한심령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쓰면 그것은 처음부터 주께만 범죄 한 것이 아닙니다. “주여, 제가 상한심령 되었으니 이제는 알아서 기겠습니다.”라고 또 다른 자기결심을 보태면 안돼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두고 음부라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는 작업과 동일하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구원하는 일환으로서 그들이 동의하지 못한 깊은 죄악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 증거가 46절 끝에 보면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우편에 거하는 소돔이라.”라고 했습니다. 소돔, 유다나라보고 소돔이라고 하고 북쪽나라를 사마리아라고 합니다.

 

소돔과 사마리아 이야기를 할 때 “네가 이 에스겔을 말을 듣고 제발 좀 고쳐라.”가 아니라 뭐라고 되어 있는가? 본문에 보면 44절에 “무릇 속담 하는 자가 네게 대하여 속담하기를 어미가 어떠하면 딸도 그렇다 하리라.”라고 했듯이 이미 이것은 결정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돼야 되는 것이 팔자고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어미가 그러면 딸도 그런 것이 당연한 것이지 거기 별 다른 것이 나올 리가 없고 확정적이라는 겁니다. 45절에 보면 “네 어미는 헷 사람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을 당연하게 저주할 때 그 모습을 누가 지켜보았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역사 내내 그 이야기를 들어왔던 겁니다.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들은 저주받아야 되고 그들은 버린 자식을 낳는다는 이야기를 누가 들었느냐,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는 거예요.

 

들으면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래, 이방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저주받아 마땅해. 하지만 우리는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한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했었어.’라는 생각을 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우리가 아무리 망가졌다 한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저렇게 저주받을 민족과 우리를 어떻게 동급으로 보십니까?”라고 안심하고 있는 그 이스라엘을 향하여 에스겔한테 극단적으로 막장으로 몰아세웁니다. “네 어미가 헷 사람이라면 네가 바로 헷사람이고 네 아비가 아모리 사람이라면 너도 맨 그 아비의 그 자식이고 동급이고 똑같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자기들의 이야기로 수긍할 수가 없고 동의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오늘 설교의 초점입니다. 도저히 동의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지자가 어떤 말을 전할 때 우리가 그 말을 들었다고 칩시다. “하나님, 듣고 보니 우리가 정말 이정도 밖에 안 되네요. 내가 알아서 기고 정신 차려서 바로 살겠습니다.”라는 소리를 할지라도 그 소리에 대해서 주님께서 화답하듯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좋은 반응과 좋은 감정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작업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은 아예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지 갈 때까지 가시는 거예요. 그 가는 자리가 뭐냐, 그 가는 자리가 소돔의 자리요 사마리아의 자리입니다. 비유적으로 했는데 실제적으로 해 봅시다. 실제로 이스라엘과 유다는 그들이 다른 나라와 관계하고 싶어서 화대까지 줘가면서 다른 나라와 관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빼앗겼지요. 참 어려운데요. 본문에서는 34절에 “또 네가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라고 했잖아요.

 

선물 주면서 “나와 같이 놀아주세요. 내가 음욕이 급하니 그걸 채우도록 당신이 좀 도와주세요.”라고 적극적으로 매달린 것이 아니고 실제 역사적으로 보면 그 강대국 남정네들이 하나님이 복을 준 이스라엘의 것들을 빼앗아가고 강탈한 겁니다. 물론 그럴 때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매달렸지요. 강대국들의 강탈이 너무 심하니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보지 않고 반대로 보신다는 거예요. “네가 음욕을 품어서 네가 그쪽이 섬기는 가짜 신을 못내 그리워하면서 네 본성상 그쪽 신에게 매달려서 그쪽 나라처럼 되려고 적극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지내왔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 체험을 그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가 어떤 식으로 했겠습니까? 그것을 체험해 왔다는 것에 동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그들은 빼앗겼으니까. 그들은 침략 당했고 하나님의 귀한 것을 지키려고 했지만 저쪽이 힘이 너무 강했기에 빼앗겼기에 그렇습니다. 이제 해답을 제시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경험하고자 해도 경험될 수 없는 말로 윽박지르듯이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그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불러요? 그것은 다른 우상 신을 부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해답에 직접 다가가는 것이 너무 어렵기에 그 중간과정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광야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식 없다고 원망하고 물 없다고 원망했지요. 그 원망의 취지는 간단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한다면 기본적으로 의식주는 해결해줘야 그것이 하나님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의식주, 기본적으로 입을 것과 먹을 것과 살 곳을 제공해줘야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든 감사하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제공되지 않으면 마땅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애굽에서 탈출했던 대부분 사람들이 갖고 있던 기본 양식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그들이 문제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 마음자체가 우상숭배의 씨앗이 된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지자가 아무리 음부니 창녀니 이야기해도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하는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생존의지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지금 내 육체주변에 생존의지가 둘둘 감겨 있는데 제발 생존의지만큼은 하자가 없는 것, 문제없는 것으로 쳐주세요. 내가 일단 살고 봐야 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야 주 앞에 찬양이라도 하지 내가 죽는 마당에 찬양이 나올라야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압니다. “너는 처음부터 나에게 찬양할 마음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하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범죄 한 그릇입니다. 에스겔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고치라는 것이 아니고 너는 너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빼앗겼다, 약탈을 당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저 이방인들이 강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신 모든 것을 다 빼앗겼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하지만 근본적인 우상숭배의 씨앗은 오히려 네 쪽이 더욱 더 심하게 보인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16장 49절에 나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이게 바로 핵심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 22절을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이 말은 너희도 애굽 땅에서 고아와 과부였다고 하는 거예요. 고아와 과부의 특징은 그들의 행실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를 지켜주는 분이 하는 말이 “고아야!” “예” “똑바로 살아. 똑바로 살아야 보호해주지 똑바로 안 살면 보호 안 해.”라고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과부 아줌마! 당신이 행동 똑바로 안하면 보호 안 해줄 거야.” 이런 식으로 조건을 달아서 과부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로 삼으신 것은 일체 그들의 잘못을 묻지 않는 하나님으로서 그들에게 찾아온 거예요. 그렇다면 그 묻지 않는다는 말이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거든요. 나중에 그것이 좀 더 발전이 되면 ‘왜 내 죄를 묻지 않을까? 나는 착해질 수 있는 인간인데.’

 

하나님께서는 유다나라에서 가난한 자들이 학대받고 가진 자들이 여유 있게 살아가는 그 모습을 유발시켜놓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원하는 진정 고아와 과부로 인정하시고 일방적으로 너희에게 일방적으로 자비를 베푼 출애굽정신에 대해서 우상숭배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보통 국의 맛을 볼 때 그냥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어 보면 되는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그릇을 휘휘 저어요. 그래놓고는 한 숟가락을 뜨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정신을 알기 위해서 이방나라를 곁에 붙여 놓았습니다.

 

이방나라를 붙여놓고 그 이방나라를 저주하신다는 말씀을 하셨고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여호와 섬긴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꾸 이방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공격케 했고 공격하면서 뭐라고 했느냐하면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기에 공격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에스겔 16장에서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았다.’ 하는 것, 그렇다면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고 절기와 안식일 지키는 것이 과연 출애굽정신을 대체할 수 있는 일이냐는 겁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그들이 나름대로 도와줬다고 했지만 어느 정도 도와줘야 제대로 도와 준겁니까?

 

49절에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다고 했는데 식물이 풍족하고 태평한 사람이 스스로 ‘나는 지금 태평하고 풍족하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전혀 생각 못하지요. 그러니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온천수처럼 계속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출애굽정신과 전혀 다른 사상들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계속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 가난해서 누군가 도와줄 지경인지의 판정을 우리가 내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 수준에 대해서 우리가 감 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내가 지금 밥 먹고 산다는 이것이 자기로서는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나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안 도와주는 그 결과로서 내가 태평함과 풍부함을 즐기고 있다는 것으로 판정받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역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제가 정답으로 내리고 싶은 것은 그 출애굽의 핵심 되는 것까지 파 들어가는 작업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듣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할 뿐 아니라 드릴 가지고 우리의 구멍을 팔 때 다윗처럼 우리는 아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손을 놔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지적은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할 말을 잃을 정도예요. 이렇게 심하게 다그치지 않아도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몰아넣는가? 그만큼 핵심부분이 나올 시점이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 멸망한 이유에 대해서 그들은 체험하지 못한 이유를 가지고 그들을 결국 멸망시켜버립니다. 남는 것은 뭐냐, 에스겔이 그들에 주었던 이 말씀이에요. ‘너는 음부가 되었기에,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었기에 망해도 싸다.’ 하는 그 말씀만 달랑 남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도 우리는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그 주어진 말씀을 어디로 가져가느냐하면 예수님이 중간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거두어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하고 저주를 받아버려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가 평소에 이렇게 소박하게 살아가는데 이 소박하게 살아감이 뭐가 그리도 영원히 저주받아 지옥 갈 죄가 된다는 말인가? 얼마나 우리가 저주받을 대상이기에 예수님이 귀한 자기 목숨을 바쳐야 될 정도인가? 우리가 평소에 하루하루 땀 흘리면서 살아가는 이 모습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비쳤기에 이게 주님이 십자가에 저주받을 짓인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라는 식으로 우리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이 에스겔의 말씀을 가지고 이제 우리한테 심지를 뚫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 이렇게 나쁘니까 주께서 십자가 졌구나.’가 아니라 바로 내가 나를 쥐고 있다는 그 자체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과 달라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저도 양심이 있고 인간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처럼 나쁜 짓도 안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돕고 착하게 살겠습니다.”라는 사고방식이 십자가 피 흘림을 모독하는 발언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하시는 일에 그냥 맡기면 되는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꾸 근사한 존재로서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아주 심하게 우리를 모독하지요. 그 때 우리의 숨어 있는 우리의 악마성이 드러납니다. “제가 어쨌다고 이러십니까? 왜 자꾸 나만 가지고 그래요? 정말 납득이 안 됩니다.” 이것은 성령이 십자가를 언급할 때 비로소 발견되지요. 그 납득이 안 되는 것, ‘제가 어째서 그렇습니까? 제가 노력을 다 합니다.’ 그런 말 하는 자체가 다윗처럼 ‘주께만 범죄 했다.’는 그 고백과 다른 고백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내가 주께만 범죄 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저는 제 인생에 대해서 손을 놓겠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께서는 합력해서 선을 이룹니다.”라는 식으로 고백해야 되는데 우리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서 착해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왜 그런 식으로 아직도 자기 자신에 미련을 갖느냐는 말이지요. 그게 바로 음부라는 겁니다. 참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했을 때 다들 울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들 낭패에 빠졌습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이 화내실 줄 몰랐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할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오죽 더러운 죄인이었으면 주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기까지 했는지를, 다시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관리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46강-에스겔16장 44-47(불길한 속담)130626-이 근호목사.hwp (29.5K), Down: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