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자, 낮은 자
2013년 7월 24일 본문 말씀: 에스겔 17:22-24
(겔 17:22,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겔 17:23, 개역)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겔 17:24, 개역)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는 반드시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시면서 찾아오시는데 그 이유가 십자가를 앞장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앞장 세우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영웅적인 하나님상을 기대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꿈과 포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낮은 나무에 해당되는 나무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높은 나무라고 행세하던 그 나무를 말합니다. 높은 나무를 낮은 나무 되게 하신 그 하나님에 의해서 그 낮은 나무는 높게 됩니다.
푸른 나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인간치고 스스로 자신을 바짝 마른 나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위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푸르고 푸른 나무로 탈바꿈하고 싶은 희망은 누구나 다 같고 있습니다. 자신만 갖는게 아니라 자신과 관련 있는 식구나 가족들도 다 푸른 나무와 높은 나무가 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 포부로 인하여 사람들은 가짜 하나님, 사단을 부르는 셈이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사단을 불러들이는 꼴입니다. 왜 사람들은 참된 하나님을 부르지 못할까요? 그것은 이 세상은 다 다녀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인간도 아직 살아있다는 그 점 때문에 세상을 온전히 빠져 나갔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한 도시 근교에 있는 포진되어 있는 높은 산에 등산하게 되면, 그동안 일상 속에서 골목을 누비면서 살았던 그런 흔적들이 무척 허무해보이게 됩니다. 높은 산 위에서 내려다 도시는 그저 부질없는 일과들을 번잡스럽게 보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도로 살던 지역으로 돌아오면 산 위에서 느낀 감정은 잊고 일상의 일에 매진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벌써 이 땅을 다녀갔습니다. 그리고 곱다 사라지신 것이 아닙니다. 홀연히 사라지신 것도 아닙니다. 요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달려들며 “죽어라. 죽어야될 자!”라고 지목했습니다. 강도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세상이란 그냥 고요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악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악마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악마를 경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현실상에 대해서 예수님 외의 인간들은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모두들 친절하고 착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책에 대해서 과민 반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곧 심판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흔히들 세상에서는 ‘꿈을 품고 사는 자가 아름답다’고 말들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녀가신 바에 의하면 ‘심판을 품고 사는 자가 아름답습니다’. 마치 노아와 같이 말입니다. 노아는 홍수날 기색이 전혀 없는 지경 속에서 큰 배를 만든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판을 품지 않고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기존의 환경에 지속적으로 유지시켜주고 안정되게 하시는 하나님인 줄 알았습니다. 즉 커고자 하는 나무를 키워주고 푸르고자 하는 나무를 푸르게 하시는 하나님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여망에 호응하시지 않습니다. 인간 독자적으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인간이란, 예수님이 주님이 되는 작품에 과정으로 포함시키는 대상입니다. 인간 세상이란 하나님을 어떤 점에서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사사기 9:1-5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건이 나옵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그 어미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온 세겜 사람들의 귀에 고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바알브릿 묘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유를 사서 자기를 좇게 하고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오직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70명과 1명의 차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의미없습니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궁극적인 의미를 담게 됩니다. 권력은 하나로 모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은 곧 본인이 여망하는 바를 타인을 통해서 대리 만족하려고 합니다. 즉 이 인간 세계에서는 자신의 야심과 야망을 각자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권력 잡은 자를 욕하는 그들도 실은 질투심의 발로에서 욕하는 겁니다. 자신이 잡고 싶은 권력이 남이 선점했다는 이유 때문에 미워하고 싶은 겁니다. 바로 이것이 높은 나무요 푸른 나무입니다. 이런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은 오로지 사단뿐입니다. 즉 자신들이 원하는 바로 그냥 충족하는 그런 신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권력 투쟁에 대해서 요담이라는 왕자는 혼자 살아남아서 근거 그리심 산에 올라 세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너희의 왕이라고 자처하는 그 아비멜렉이 너희들을 불살라 버릴 것이다”고 합니다. 숲은 나무들이 감람나무보고 왕이 되라고 요청했지만 고귀한 기름 때문에 거절하고, 무화과 나무보가 왕이 되어달라고 권해보지만 고귀한 기름 때문에 거절하고, 포도나무보다 왕이 되라고 권해보지만 고귀한 술 때문에 거절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무 쓸모 짝도 없는 나무인 가시나무보고 왕이 되어달라고 하자 그 가시나무는 결국 숲을 불사르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권력 행사 이외에 아무 것도 봉사할 것도 없는 위인들이 설쳐대는 세상, 그 세상에서 요청하는 하나님은 도무지 십자가하고 거리가 먼 하나님입니다. 바로 지창 푸른나무와 높은 나무로 자처하는 자들을 낮추시려 들이닥치는 분이 참 하나님의 작업이고 그 와중에서 성도는 십자가만을 참 완성으로 이해하는 자로 생산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른 하나님상과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지 늘 분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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