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여름수련회 사무엘하강해 제 7강 : 율법의 세계 - 이 근호목사
일곱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시편 51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51편에서 앞에 표제가 붙어있습니다. 표제가 뭐냐 하면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선지자가 찾아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식을 전해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소식은 다윗에게 일어난 그 사건, 그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서 평하는 내용을 전달하려고 나단선지자가 온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윗을 찾아왔다는 것, 그 자체로서는 다 이야기를 할 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감히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요소 속에 하나님이 뭔가 발생시킬 것이 있다고 여겨서 찾아 온 거예요. 잘했나, 못했나를 따지는 것은요, 그거는 하나님 앞에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다 죽고 난 뒤에 심판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따지는 것이 아니고, 미리 오는 거예요. 미리. 나중에 죽고 난 뒤에 일괄심판 말고 미리 찾아온다는 자체가 나는 너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고 너의 속에 내가 집어넣어준 게 있다는 거예요.
그 집어넣은 게 뭐냐 하면은 기름부음이에요. 기름부음이 자체적으로 작동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름부음이 다윗 안에 있으면, 기름부음이 뭐로 되느냐 하면은 왕과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으로, 이렇게 안에 이런 왕의 기능, 선지자 기능, 제사장의 기능이 기름부음에 있다는 것을 다윗 속에 이미 기름 부을 때 집어넣었고, 다윗으로 하여금 어떤 사건 속에 휘말리게 하셔가지고 그 사건을 통해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이런 기능을 뽑아내는 겁니다.
이런 왕과 선지자, 제사장의 기능이 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그러면 다윗이 오기 전까지는 사울 왕이 있지만, 뭐 사실 사울은 왕이 아니고 그냥 사사라고 보면 돼요. 사사와 왕의 차이점은 사사는 그냥 일회성이에요. 일회성. 일회성인 반면에 다윗 왕은 영구합니다. 영원성을 갖고 있어요. 영원히. 한번 나오면 영원한 왕이에요. 사울은 일회성이고. 썼다 버리는 거예요. 썼다 버리는 쪽은 어느 쪽이냐 하면은 바로 세상나라, 언약이 없는 이방나라에서의 왕은 사울 같은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이 왕, 다윗 왕이 영구적인 왕이 돼버리면, 이 영구적인 왕은 어떤 왕이냐 하면은 형제들 속에서 나온 왕이기 때문에, 만약에 형제들 속에서 다윗이 왕이 되면 그 형제라고 불렸던 모든 사람은 왕이 되는 그 영광과 그 혜택을 같이 공유하게 돼버리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이 단순히 구원자가 아니라 왕이 될 이유가, 왕이 된다는 것은 그 형제가 같이 형성되어 있다는 거예요. 형제들이. 형제가 형성되어 있어요. 형님 한번 잘 만나가지고 영원히 팔자가 피는 겁니다. 형님. 형님 한번 잘 만나가지고 영원히 팔자가 피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그 이스라엘에서는 형님이 살아있어야 돼요. 형님의 자리가 유지되어야 하는 겁니다. 형님이 자식이 없다, 그러면 동생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거기다가 상납해서 기어이 살아있는 형수로부터 자기 자식이 아니고 형의 자식을 낳아서, 어쨌든 저쨌든 간에 맏이가 살아야 집안이 산다. 맏이가 살아야 집안이 살아. 이거는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멘트처럼. 맏이를 살려서 맏이 계통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전달, 전달되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나올 때까지 그 노선이 이어져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나오는 그것이 기적인 것처럼. 이삭 이후에 야곱이, 동생이 맏이가 되는 것도 기적이고. 그 야곱이 열두 자녀를 낳은 것도 기적이고. 어쨌든 간에 맏이가 계속 이어져가게 되면 이거는 복 받은 걸로 보는 거예요. 그 맏이가 딸 말고 아들이요. 아들로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계속 아들로 이어지는데, 나중에는 하다하다가 이 인간들 아들이 전혀 쓸 만한 것이 없으면 아예 처녀에게서 아들을 낳아버리죠. 처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인간의 모든 남성들은 전부 다 폐기처분되어야 해요. 인간에게서 낳은 자식을 나는 아들로 인정하지 않겠다. 이런 거예요. 전체 아들의 대체적 아들, 바꿔치기 아들, 그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낮 설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기도는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왜? 예수님과 아버지가 통하거든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폐쇄적이에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바깥에는 뭐가 난무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난무해요. 신이 난무합니다. 전부 다 가짜죠. 모든 관계에서 바깥 하나님의 이것은 인위적인 가짜예요. 하나님의 언약관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종교행위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간주해버리는 겁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사울이 여호와를 섬기는데 그 여호와가 우상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서 아들을 만나게 해서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께 가는 이 폐쇄적 구조를 성령 안에서 실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은 뭐냐,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바로 이 안, 아버지와 예수님, 성령 안에서 사랑과 희락과 기쁨이라. 바로 이래 되죠. 사랑과 희락, 기쁨, 의.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이 성령 안에 있는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가까이와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허락이 없으면 못 들어갑니다. 가까이와도. 막 피부에 맞대서, 맞대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꼭 풍성 같아요. 분명히 있는데 눈에 보이지는 않죠.
그리고 또 하나님 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보여줘야 믿지요?”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 쪽에서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그게 제대로야.” 이러거든요. “보이지 않는데 내가 있다, 없다는 내가 어떻게 결정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결정은 네가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하지.” “그런데 주님이 결정했다는 것을 착각할 수 있잖아요? 결정도 안 했는데 천국가고 싶어 환장해서 주님이 보이지 않게 결정했다고, 이렇게 내 마음을 굳히기 들어가면 이거는 분명히 가짜인데, 그 가짜를 진짜로 바꿀 수 있는 방안이 없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안 믿는구나!”하고 끝나버리죠.
근본적으로 말해서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이제부터 너의 심각함, 너의 심각함과 이 하나님의 심각함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보라 이 말이죠. 인간은 자기 일 때문에 심각하거든요. 자기 일 때문에 심각한 것. 자기 일에 심각한 경우에서 벗어나고 여기서 탈출하고 해방하는 방법을 알려드려요? 자기에게 심각한 것, 자기 문제에 심각한 것, 자기를 지키는 것, 자기가 지킬 것을 못 지켜서 아등바등 애를 쓰는 것, 이것을 다 허물어버리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가 감당 못할 큰 죄에 빠지면 돼요. 그러면 그 전에 있던 내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돼요. ‘아, 이건 문제도 아니구나!’
그 큰 죄가 뭐냐 하면은 네가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렸다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된 이 일, 그 일에 와 닿게 하죠. 어떤 불교신자가 모기 하나, 생명 하나를 죽여가지고 가슴 아파하면서 내가 살아있는 생명을 죽였구나. 생명을 죽였구나, 하고 이렇게 탄식할 때. 그 고통에서 면제되는 방법은 그 사람이 우연히 던져버린 꽁초가 화재를 일으켜서 쿠팡창고를 다 태웠을 때, 모기 하나 죽인 것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세상 심각한 것, 자기 일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한 것을 하나님이 진짜 심각한 쪽으로 전환시켜버리는 방법은 매끈한 밧세바의 뒤태와 그리고 또 그 여자를 임신하게 만들었어요. 임신이 그렇게 안 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이건 뭐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이 있듯이 탁 치니 턱하고 임신이 되고 말았어요. 임신했고 그리고 그 남편이 있어가지고, 그 대중들의 왕에 대한 존경과 흠모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요압 앞에 부탁을 해가지고 우리아 장군을 그냥 생매장하듯이,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는 우리아 장군을 적군들 속에서 화살을 맞아서 죽게 만드는 그런 일을 벌이는데.
이것은 천하 심각한 너의 간음죄와 살인죄가 사실은 하나님의 심각한 것보다 덜 심각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각한 것은 뭐냐 하면은 내 자신의 기름부음, 이 기름부음의 취지를 네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이 기름부음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모든 율법의 완성을 위하여 자기 심각함에서 주님의 심각함으로 집어넣게 됩니다.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그 세계를 지금 쓰겠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세계, 시편 51편, “드디어 율법의 세계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 환영합니다.” 나단선지자가 다윗에게 “당신이 율법의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 율법의 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면은 일단 죽자, 일단 맞자, 하는 거 있잖아요. 일단 죽어야 들어올 수 있는 세계, 오는 세계.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락카룸. 선수가 홈런치고 한 바퀴 돌고 그 다음에 어디에 갑니까? 자기 집에 갑니까? 아니죠. 같은 선수들이 쓰는 락카룸에 들어가면 선수들끼리 하이파이브하고 홈런 잘 쳤다고 막 하죠. 그 락카룸이 있어요. 야구선수들이 대기하고 있는 그 락카룸. 일단 죽여야, 나를, 자아를 죽여야 들어올 수 있는 이 집단에 온 것을 웰컴welcome, 환영합니다. 환영하는 거예요.
이 율법의 세계가 뭐냐 하면은 주님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주님의 모든 관심사가 집중되어 있는 그러한 본부에요. 사령부에요. 사령부.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율법에 세계에서. 율법의 세계에서 모든 인간은 알든 모르든 다 갇혀있습니다. 율법세계 안에 갇혀있어요. 그러면 다윗이 드디어 이 핵심본부에 찾아들게 되었습니다. 찾아들면서 여기서 일단 죽어 들어오죠. 그래서 다윗은 그의 처벌에 대해서, 그의 행위에 대해서 어떤 율법의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니라 율법이라는 것을 네가 충분히 드러냈다고 보는 거예요. 네가.
네가 범죄함으로 율법을 충분히 드러냈다는 거예요. 뭐 이런 이상한 아이러니! 네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죄 짓는 그러한 모습은 율법이 살아나기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매 네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너는 인간이 아니므니다. 너는 죄 그 자체였다는 거예요. 인간은 그냥. 그걸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인간은 자아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육이라고 했죠. 육. 육이라고 규정한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육이라고 했으면 인간이 아무리 착해도 육이어야 돼요. 아무리 악해도 육이어야 돼요.
왜? 주님의 규정이 본부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규정이기 때문에 착하고 착하지 않다가 아니라 그냥 육이어야 돼요. 영의 대비개념, 반대개념, 영은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의 반대개념.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 이 육은 뭐냐 하면은 기존에 있는 기존의 아담, 첫 번째 아담.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 이걸 이미 규정을 했어요. 이 규정을, 육의 규정을 임의로 바꿀 수가 없는 동기가 뭐냐 하면은 율법의 세계입니다. 율법의 세계는 자기 의를 지키거나 자기 일에 심각한 그런 세계는 율법의 세계에서는 그거는 엉뚱한 짓이 되는 거예요.
뭐 “회개합니다, 조금 더 그런 실수를 안 했어야 하는데...,” 그러면 락카룸에서 같은 동료들이 “너 지금 무슨 짓하고 있느냐? 여기서 지금 네가 잘할 수 있었는데, 착할 수 있었는데, 그걸 증거 하는 동네가 아니야. 여기는 율법이 너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 작동하느냐.” 그거만 내비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관심사에 대한 정지. 중지. 중지가 돼버리는 겁니다. 나의 관심사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도바울 같은 경우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만남’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에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모든 자기 심각한 것, 자기 관심사는 여기서 스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놀이로 하면 얼음땡이죠. 얼음땡. 탁 건드리면 같은 행동으로 딱 서요. 일종의 조각. 딱딱한 조각의 순간이 돼버려요. 우리의 정신이고 뭐고 간에 순간이 돼버려요. 우리가 물체가 되고 우리는 죄덩어리가 되죠. 그래서 율법의 세계에서는 그 모든 가동되는 것을 다 주님 쪽에다가 넘겨야 돼요. 그래서 율법의 세계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은 수면내시경세계. 그냥 내시경이 아니고 수면내시경. 마취제 안 하는 내시경도 있고 하는 내시경도 있는데. 저는 둘 다 다해봤어요. 마취제 안 하고 한 내시경은 진짜 저 죽는 줄 알았어요. 왜? 의식이 살아있으니까. 근데 수면내시경은 의사가 움직인다, 움직인다, 저 의사가 몇 분 동안 하겠느냐, 이러다보니까 벌써 다른 방에 가서 깨어있어요. 아, 그때 보는 건데, 못 봐요. 마취 들어가서.
수면내시경, 자아가 마취 들린 자아예요. 수면내시경. 내가 물체처럼, 마치 사물처럼 죽어있을 때 다른 분의 활동이 나에게 그대로 결과를, 나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려요. 다른 분의 활동이. 이 율법의 활동이 결정지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수면내시경은 뭐냐 하면은 다른 분이 다른 자기의 활동을 집어넣어놓고, 그분의 활동의 결과로서 우리가 율법완성의 사람으로, 영적사람으로, 율법완성으로부터 새롭게 여기에서 거듭나게 만드는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세계가 율법의 세계예요. 왜냐하면 이게 구약이니까. 율법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어요. 신약에는 성령의 세계라 하고. 율법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다윗의 변화가 그 다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국가적인 내란과 반란. 반란이 두 가지가 일어나요. 하나는 세바의 반란 또 하나는 압살롬의 반란이 있는데, 반란이 있을 때에 다윗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주목해야 되죠. 그러면 그걸 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수면내시경의 세계, 율법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다윗은 어떤 태도, 율법의 세계가 오기 전에 다윗은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 그것을 잠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세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민족을 아주 철저하게 차별했고, 이 차별한 것이 골리앗과의 전쟁에서도 차별했지만, ★철저하게 차별했고 이것이 내 손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율법의 실행방식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철저히 구분하는 거예요. 이방인에 대해서는 사무엘하 1장에서 10장까지, 밧세바 만나기 전에 다윗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철저히 구분했습니다. 이 밧세바라는 여자가 다윗을 이 땅에서 제대로 이땅에서 제대로 살게 한 유일한 여자입니다. 밧세바 안 만났으면 다윗은 인간되지도 않았어요. 고맙다 밧세바. 뭐 이런 거예요.
그러면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하기 위해서 그 당시에 사울이 못다 한 업적이 있어요. 그거는 블레셋이 이스라엘 땅에 침범하도록 그냥 방치하고 있었거든요. 그걸 어떻게 다 블레셋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면서 여기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은 도장 깨기. 중국 영화에 보면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고,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서 도를 닦고 다시 중림의, 무림의 고수들이 우글거리는 거기에 가가지고, 강호에 나가가지고 소위 도장에서 좀 논다, 긴다, 난다하는 인간들을 가서 전부 다, 정무문부터 해가지고 도장마다 다 때려 부수는 거예요. 도장마다. 여기 제일 고수 나와! 비키고 그 다음 고수 나와! 이게 도장 깨기거든요. 도장 깨기라고 해서 망치로 하는 이것이 도장 깨는 것이 아니고. 무술도장을 깨는 거예요. 무술도장을.
도장을 깸으로서 이방민족에 대해서 일체 자비가 없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 언약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새겨 넣는 거예요. 마음속으로. 이거는 외부적으로 이렇게 도장 깨기 해가지고 정복하는 그것이 바로 사무엘하 10장 1절에 보면 나옵니다. 사무엘하 10장 1절, “그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래서 다윗이 좋은 호감을 가지고 이렇게 너 까불지 말라는 식으로 문상을 갔는데, 다윗이 보낸 그 종을, 4절에 보면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5절, “혹이 이 일을 다윗에게 고하니라”
그러니까 이거는 먼저 도발을 한 거예요. 그래서 6절에 보면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그래서 이 전쟁이 우리아 장군이 투입된 전쟁이 암몬 자손에게 시작이 된 겁니다. 이방민족에 대해서는 사정없죠. 그리고 사무엘하 4장 5절에 보게 되면 여기 암살자가 나오게 되는데, 그 암살자가, 이스보셋을 암살한 자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이방용병들이었습니다.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행하여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저가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척하면서 침실에서 상 위에 누워있는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 이 말이죠.
이것은 사무엘하 입장에서 아말렉 용병이 사울 왕을 죽이고 난 뒤에 자기가 무슨 큰 공로를, 공적을 세운 것처럼 다윗에게 왔을 때에 그 아말렉 용병을 사정없이 죽여 버렸잖아요. 이방인에 대해서는 일체 용서가 없이 사정없이 그냥 죽여 버립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방인도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와서 그렇게 했는데, “다윗임금이 왕이 되는데 제가 이렇게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이렇게 등용시켜가지고 살길을 마련해주세요. 전에는 뭐 이스보셋에게 충성했지만 저는 이제 이스보셋이 아니고 이제 다윗만을 섬기겠습니다.”라고 하면, “그래, 내가 네 생명을 살려줄 줄 알았지? 이 암살자야! 이 킬러야!” 그래가지고 12절에 보면 “소년들을 명하여 곧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장차 이스라엘이 정권을 인수인계 받을 때에 철저하게 나는 이스라엘 편입니다. 우리 같은 민족 편입니다. 왜? 신명기 17장에 왕이 된다는 것은 형제 중에 하나가 왕이 된다는 그 율법을 저는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걸 준수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밧세바 만나기 전에 다윗이 흩어진 이스라엘의 민심을, 자기 쪽으로 민심의 표를 얻기 위해서 이방인 하나를 적폐세력으로 잡는 거예요. 인간의 자기 정당성은 어떤 식으로 확보가 되느냐 하면은 일부러 적을 만들어요. 적을 만들어서 적을 공격하면서 같이 공격하는 쪽을 하나의 새로운 동지로 영입하는 식으로 이렇게 힘은 모아지게 되어 있어요.
정치라는 게 그렇잖아요. 정치라는 게 누구하나 제일 약한 사람을 와르르 달려들어서 밟아요. 밟는 동시에 같이 밟았다고 해서 그걸 계기로 하나의 힘을 규합할 수 있는 동기로 작동하고 싶은 겁니다. 마치 나치가 유대인들을 잡아서 독일민족을 하나로 뭉친 것처럼요. 그래서 모임이라든지 조직이 뭔가 잘 형성이 안 된다 싶을 때는 누굴 하나 잡으세요. 누굴 하나 잡아서 공동의 적을 만들어 가지고 우르르 조져버리면 어떤 조직이든, 교회든, 기업이든, 회사든, 국가든, 적폐세력을 만들어서 우르르 조질 때는 마치 동지가 생기는 겁니다. 입자는 에너지를 전달하고 좁은 장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생겨버리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블랙홀이 생긴다는 것이 블랙홀의 이론이에요.
한 장소에 입자가 에너지를 너무 많이 품고 있으면 그거는 스스로의 힘의 무게를 못 이겨서 빵꾸가 난다. 블랙홀이 돼버립니다. 따라서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블랙홀을 만들어서 그것을 전부 다 거기다가 돌을 던지는 거예요. 이게 정치적 방법인데, 이 정치적 방법에 누가 말려드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말려들었습니다. 말려든 게 아니라 예수님이 그걸, 말려드는 것을 의도하셨죠. 요한복음 11장 50절에 한 사람을 죽여서 우리 민족이 사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그 당시 대제사장의 결정에 의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결정을 했을 때에 놀라운 사실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 동의를 했다는 사실이에요.
동의는 안 했지만 그런 권세의 실질성에 대해서 베드로부터 해서 열두 제자도 거기에 이미 위협을 느끼고 압박을 가졌다는 겁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했죠. 인간은 환상적인 존재다. 인간은 환상에 기가 죽어버리는 존재에요. 인간은 환상에. 이 현실에 있는 모든 권력은 환상입니다. 왜 환상이냐 하면은 율법세계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인간의 힘으로 인간이 살아보려고 하는 그 자체가 율법세계를 도외시한, 이 율법세계의 엄연한 그 중심성을 배제한, 인간은 그냥 애써야 산다는, 기껏 아는 그 범위 안에서 모든 변화를 해석하려고 하는 이 자체가, 인간은 아는 것만큼 행동한다는 이 환상이죠.
그래서 베드로도 알아서 기었고. 나 저 사람 모른다고 했고. 베드로의 그 배신은, 그 배반은, 또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이미, 율법의 세계의 주인공인 예수님께서 이미 눈치 챘다는 거예요. 네가 나를 따라오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일단 네 주제파악을 하고 난 뒤에, 아, 내가 이제 와서 주님을 믿겠다고 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라는 것을 충분히 네가 네 자아를 율법에 의해서 조각처럼 굳어져버려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수면내시경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수면내시경을 의사가 하는데 자기가 뺏어가지고 멀쩡하게 내가 조사한다고 이렇게 나서지 말고. 이거 죽여 버려? 죽이자! 마취제로 죽여 놓고 일을 무사히 끝내주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를 죽여 놓고. 율법으로 죽여 놓고. 율법으로 죽여 놓고 율법으로 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성도한테는 율법과 관련이 없는 것이 없어요. 남자가 여자하고 결혼을 하고 난 뒤에 에베소서를 보니까, 아내 사랑하기를 네 목숨을 바쳐라. 이거 뭐 목숨 바치려고 결혼했어요? 결혼을 안 했으면 이러한 경고조치를 안 받을 건데. 결혼을 딱 하니까, 네가 아내가 있어? 예. 그러면 목숨을 바쳐라.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팔자가 돈 안 벌어도 되겠다 싶어서 이제 쇼핑이나 하자. 이런 마음으로 내심 환상을 꿈꾸면서 결혼을 했는데, 너는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라. 이 순종이 언제적 개념인지.
지금 세대가 무슨 세대인지 순종이라는 개념이냐고 이렇게 나온다고요. 순종하려고 결혼했냐 이 말이죠. 지금까지 나이 서른이 넘도록 순종이라는 개념을 배워본 적도 없어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순종이라는 개념이 뭔지 몰라요. 내가 해달라고 하는 대로 다 해주는, 뭐해주꼬? 뭐 해주꼬? 뭐해주꼬? 다 해줬는데요. 책 사줄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줬는데요. 휴대폰 사주고 다 해줬는데 거기에 무슨 순종이 있습니까? 부모를 종으로 여기는데 거기에 무슨 순종이 있어요. 부모에게도 순종 안 했는데 남편에게 무슨 순종을..., 아이고 참 순종 잘 하겠다.
그러니까 모든 행동, 모든 어떤 사태 속에 일어난 것은 율법의 개입을 받습니다. 그러면 이제 율법 자체의 가동, 율법 자체가 가동이 되죠. 밧세바 만나기 전에 다윗은 율법에 대해서 자기가 안다고 여기고 내가 율법의 주체자로서 실행에 옮기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가 된다고 그렇게 자부했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율법에 포착이 되어서 율법세계 속에 들어갔을 때에 이제는 그냥 다윗은 뭐냐 하면은 다윗은 죄인이에요. 죄인이고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냥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다윗이 보는 앞에서 누가 죽느냐 하면은, 여기 시편 51편을 한번 봅시다. 시편 51편을 읽어본 사람들의 극히 인간적인 소감은 다윗이 참 뻔뻔하다. 뻔뻔의 대가. 아예 뻔뻔을 끝장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에요. 어떤 대목에서 뻔뻔 하느냐 하면은, 이거는 이번 수련회에서 처음인데요. 이 대목을 다 같이 읽어봐야 해요. 시편 51편 4절, 다 같이, 지금 녹음이 됩니다. 생중계됩니다. 빠진 분이 없이 합쳐서 시작!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스톱! 스톱! 거기까지! 더 나가면 골치 아파. 골치 아프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 안 돼요.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는 거예요.
밧세바도 아니고 우리아도 아니고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는 거예요. 이 말을 해석하면 뭐냐 하면은 나는 어떤 행동, 타인에 대한 행동조차도 주님께 범죄한 행동만 내놓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났다는 겁니다. 뻔뻔함의 극치도 이런 극치가 없죠. 근데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게 복음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복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할게요. 복음이라는 것은 성령이 필요함을 알리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복음이에요. 인간의 육은 절대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택된 자에게 이 복음이 전해집니다. 오직 주께만 범죄 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사람에게, 사람 앞에서 죄지은 적이 없다가 아니라 내가 사람 앞에서 내가 나서서 죄지은 적이 없다. 뭐 그 말이나 그 말이나 뻔뻔함이죠. 내가 나서서 의도적으로 죄지은 적은 없고 주께서 나를 앞장세워서 나에게 죄짓게 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이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인가? 미안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너한테 일체 미안한 거 없다. 그래서 이제 오른뺨이 터지는 거예요. 그때 왼뺨 한 번 더 대는 겁니다. 죽여! 죽여! 죽여도 나는 너한테 미안해하지 않겠다. 왜? 나는 너한테 미안한 거 없고 네가 나를 때려죽여도 너는 나한테 죄짓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거 뭐 완전히 세상이 개판돼버려요. 이건 뭐 복음의 세계가 아니고 도대체 납득이 안 되는 세계예요.
그런 세계를 이스라엘은 거쳐 왔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전쟁이에요. 전쟁.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에 185,000명이 한꺼번에 다 죽었어요. 히스기야 때에. 근데 185,000명을 분석해보세요. 여기에 다들 자기 집안에서는 잘난 아들이었고 잘난 남편이었다 이 말이죠. 근데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민족인 이스라엘을 포위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천사가 와서 한꺼번에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들에게 미안해해야 합니까? 어디 추모제라도 드릴까요? 율법의 세계는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짓을 하든, 어떤 피해를 당하든, 죄냐, 죄 아니냐를 인간 네가 결정할 권한이 없고 전부 다 율법이 결정하는 거예요. 율법이.
그래서 이스라엘이 개입하는 모든 사건은 바로 최후의 사건이에요. 왜? 그게 마지막 최후의 심판의 근거가 거기에 작동하기 때문에. 그게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모든 행함을 심판하기 때문에, 그 최후의 심판을 이스라엘이 먼저 맞닥뜨렸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복 받은 거예요. 죽어서 받을 심판을 앞당겨서 이스라엘은 그들 역사 속에서 경험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우리 주님을 만났다는 것은 자기 최후의 운명이 결정 나는 그 마지막 심판을, 심판주가 되시고 심판을 행사할 권한자가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먼저 찾아와서 나는 너와 관계하겠다. 너와 관계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네 안에 내 요소를 집어넣은 게 있는데 그걸 찾으러 왔다. 그게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 집어넣고 성령 회수하면 덩달아 구원되는 방식. 이것이 바로 복음의 방식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죽은 예수를 살리심같이 그 성령이 너희 안에 있으면 죽은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그 앞에 한글로 집어넣으세요. 덩달아. 덩달아 구원받는 거예요. 값없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값은 있어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 예수님의 피로 값은 있어요. 값은 있는데 값없이 구원받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덩달아’에요. 천국은 뭐냐 하면은 포도원에 일하러 왔는데 아침 10시, 12시, 오후 4시, 5시에 온 사람이 있어요.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한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인터뷰 마이크, 지금 이게 인터뷰 마이크 같아요. “오늘 일한 품삯을 받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덩달아! 덩달아 구원받아서 기쁩니다.” 아침 아홉 시에 온 사람한테 “오늘 일한 소감을 말해주세요.” “오늘 기분 더럽습니다. 내 노동의 대가를 얻지 못했습니다.” 천국은 이런 게 천국이에요. 계속해서 천국 아닌 자를 내밀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51편이 끝나고 난 뒤에 다윗의 전략은 뭐냐, 요압을 밀어내요. 요압을 어디서 밀어내느냐 하면은 자기에게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에게서 밀어내요. 솔로몬이 다치지 않도록 전략이 바꾸어집니다. 그런데 요압이 자꾸 공을 세우면 공대로 받아요. 받고 난 뒤에 ‘너는 아니야, 너는 아니야.’ 틈만 나면 요압대신 아마샤를 내세우고. 아까 했죠. 아마샤를 내세우니까 요압이, 그러니까 율법의 세계를 다녀온 사람의 정책은, 그 정책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예상치 못한 쪽으로 간다는 그 정책으로 말미암아 요압의 욕망을 더욱더 뚜렷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아, 요압이 서서히 갈아타기를 시작 하는구나’ 솔로몬이 딱 뜨니까 솔로몬 말고 다른 아들한테 자기가 이미 해바라기성을 정도를 딱 바꾸잖아요. 국민당으로 민주당에서 바꾸든지. 이게 당을 바꿔치기 하는 거죠.
정권 갈아타기. 권력은 에너지거든요. 에너지가 집중되고 많은 곳에 자기가 살 가능성이 더 넓혀지는 거예요. 집을 이사 왔는데 온 교회가 개척교인데 열 군데가 있더라. 근데 한번 물어서 한 500미터 가니까 큰 교회가 있더라. 큰 교회에 등록해야죠. 왜? 거기에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으니까. 내가 푼돈을 내도 아무도 모르니까. 헌금 천원내고 이천 원짜리 밥 먹고 오고. 이게 남는 장사거든요. 설교는 뭐 비슷비슷하게 하니까. 여기가나 저기가나 같은데. 어느 교회 가니까 교인이 한 다섯 명이 있는데, 그 다섯 명 앞에서 설교하나 큰 교회에서 설교하나 전부 다 총신 나와 가지고 전부 다 비슷해. 개혁주의 신학 비슷해. 뭐 다섯 명 교회에 가서 충성할 일이 없죠. 그러니까 교회도요. 목돈 낸 사람이 충성하게 되어 있어요. 목돈 낸 사람. 참 에너지의 힘이, 권력의 힘이 그렇게 센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율법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돈 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나는 왕이야, 나는 왕이야, 자기가 왕이 됐다는 그 심각함에서 그것을 해방시킨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흔히 아는 단어가 뭐냐, 그것이 경배요 이게 예배예요. 경배, 예배는 무슨 원칙이 작용이 되는가 하면은 바로 출애굽 원칙이 작동되면서 경배, 예배가 나오는 겁니다. 여기 출애굽 10장 24절, 2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지금 누구이야기냐 하면은 모세하고 바로 왕 이야기입니다. 바로 왕은 이방민족이죠. 모세는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고.
자, 택하지 못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 대화, 담화, 거기에서 나오는 내용과 그리고 여기 모세에게서 나오는 내용을 한번 비교해보고, 그것이 어떻게 인위적으로 분리가 될 수가 있느냐, 아니면 출애굽이라는 유월절 어린양의 개입이 되어야, 하나님이 개입이 되어야 분리할 수 있는가를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10장 24, 25절에서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이런 제안이 여호와를 안 만난 사람은 누구나 이런 제안을 해요. 이런 제안을 한다 이 말이죠. 회사에 취직했는데 안 믿는 회사 사장이 말하기를 “주일날 교회가는 것은 인정해주겠는데 수련회는 가지 마” 이런 것 있잖아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종교라는 것이 취미생활이거든요. 문제는 그들에게 종교가 취미생활인데, ‘그들에게’에요. 그들에게. 출애굽 될 대상이 아닌, 구원될 대상이 아닌 그들에게 종교가 취미생활이라고 규정을 짓는다면, 그 규정을 교회에다가 그대로 적용시켜봐야 돼요. 그러면 교회 교인들 대부분은 모세가 아니고 바로입니다. 지금 교회 놀러 다녀요. 내 몸 챙기는 것이 급하지 뭐. 교회 나 하나 없어도 교회 잘 돌아간다. 특히 큰 교회는 그렇겠죠.
그래서 큰 교회 목회자들이 의도적으로 돈 지출할 구석을 개발해냅니다. 되도 않은 게 자기가 놀러가서 선교사관계를 맺어가지고 선교비라도 자꾸 호소를 해서, “당신들이 선교비를 내지 않으면 지금 파키스탄 누구는 굶어죽습니다.”해가지고. 사람이 돈을 내는 곳에 마음이 내거든요. 돈을 내면서 아이고, 이 교회 내가 좀 신경 써야 되겠네. 이렇게 신경 쓰는 그 타이밍, 관계성을 목사는 목회프로젝트로 놀리는 거예요. 우리교회같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뭐 잘 돌아가겠지. 돌긴 뭐 잘 돌아가요. 안 돌아가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쓸데없는 소리하는 거 보니까 끝날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출애굽에서 바로 이방민족이 원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우리 몸뚱아리가 중요하고 우리 생존이 중요하고 내 60조 세포 입자가 갖고 있는 그 에너지를 어떻게 긴장도를 유지하는가. 유기체가 살아있으면 긴장돕니다. 긴장이 돌 때 유기체는 살아있어요. 모든 세포의 유기체는 긴장도, 균형, PH의 농도를 어떻게 균형 있게, 평평하게 유지하느냐. 그거 놓쳐버리면 죽어버리거든요. 내 몸이 편안하게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지. 하나님은 나중이에요. 아쉬울 때 몸이 아프거든 그때 기억하라 이 말이거든요.
그러나 예배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율법이 와서 나에 대해서 어떤 심각한 것이 남아있을 때 오직 경배할 분은 누구밖에 없다? 나를 율법세계에 집어넣고 죄인 되게 하신 그분만이 경배의 대상이에요. 십자가 알 때, 우리가 십자가를 아는 자체가 이미 경배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 원칙이에요. 그 출애굽 원칙을 시편 51편 다윗 사건 속에 그게 들어가 있어요.
다시 말해서 구원받으라가 아니라 이미 구원문제는 너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 내 문제로 떠안았다는 겁니다. 너는 그냥 그 구원의 결과물일 뿐이에요. 이미 율법의 세계에 들어와서 나는, 아까 다 같이 했죠. 잊어버렸습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누구한테 범죄 했다? 나는 주께만 범죄 했다. 네가 따로 단독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거예요. 네가 스스로 너보고 “주여, 죄 지었습니다.”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함부로 하지 마라.
죄는 율법이 살아날 때 죄가 되는 거예요. 네 죄가 살아나는 게 죄가 아니에요. 율법이 살아나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율법이 살아나는 것이 죄라면 죄의 해결자도 율법 안에 이미 마련되어 있어요. 너로 인하여 이미 꺾으신 뼈가 있어요. 대속하기 위해서. 바로 모세는 그것을 관찰하면 되는 거예요. 시편 51편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바로의 권세에서 유월절을 통해서 빼내었을 때에 이제는 너는 구원받았다, 룰루랄라가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과 함께 살아라.
이것이 바로 출애굽의 정신이라면, 시편 51편에서는 너는 이제 너로 인하여 꺾어진 뼈로 인하여 살아라. 그게 누구냐 하면은 밧세바와 함께 사는 겁니다. 밧세바가 있어줘야 내가 율법 세계에 다녀왔다는 것을, 나는 이미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