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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무조건

아빠와 함께 2021. 8. 7. 09:45

2021여름수련회 사무엘하강해 제 8강 : 무조건 - 이 근호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개의 반란이 있었죠. 하나는 압살롬의 반란이고 뒤에는 세바의 반란이 있었는데요. 세바의 반란은, 이스라엘나라의 그 성격은 열두 지파로 했는데 이제 열두 지파의 시대는 사실은 세바의 반란을 통해서 끝났습니다. 이는 열두 지파가 균등 되게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했기 때문에 유다지파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의미합니다. 이런 재편에 있어서 다른 지파한테 동의를 구할 수는 없어요. 강제적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출애굽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발생됩니다. 발생되면서 권력층이 두 조각이 나죠.

하나는 뭐냐 하면은 처음에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열두 지파가 동등한 자격으로 출애굽 했다. 그 원칙은 지금도 유효하게 유지되어야 된다는 쪽과, 다시 말해서 왕을 굳이 유다지파에서만 왕을 선출하지 말고 다른 지파에서도 왕이 나올 수가 있잖아, 라고 다른 지파에서 이야기할 때 율법의 세계에 갖다 온 뒤에 다윗이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끝났다, 에요. 이미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를 통해서 재편되기로 확정지었다. 그렇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유다지파의 이 중심성을 인정하지 않거든 이스라엘이라고 나는 간주하지 못하겠다. 쳐내야 되겠다. 어떤 새로운 변화가 주어집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그런 변화가 주어지거든요.

그래서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내가 유다지파를 선택했고 요셉지파를 버렸다고 되어 있어요. 선택의 내용이 한번 선택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선택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분이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가선택이에요. 임시적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을 때 이런 말씀이 나왔죠. “이는 나의 택하신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면서 모든 의미의 시작을 예수님부터 출발시켰습니다. 나를 공경한 자가 아버지를 본다. 그러면 나를 공경 못한다면 너희들이 그렇게 찾던 하나님도 없다. 요한복음에 나온 이야기죠. 예수님부터 출발하자. 예수님부터.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면 되잖아.” 이거하고 같은 뜻으로 “다윗을 믿으면 되잖아.” 이렇게 하는데, 이미 다윗은 율법의 세계에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거든요. 율법의 세계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이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죄 씻음 받았다 이 말입니다. 다윗이 있는데 다윗의 죄가 찾아왔고 그 죄가 죄 씻음의 세계로 이끈 거예요. 이 죄가. 다윗의 죄를 이끌어서 찾아온 죄, 그리고 이 안에서는 죄 씻음이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죄 씻어진 다윗이 아니고 율법의 완성으로서 다윗이 돼버린 겁니다. 율법을 드러내는 자로 다윗이 된 거예요.

다윗은 자기가 주체였다. 주인공이었다. 그 다음에 누가 찾아오는가, 여기 죄가 옴으로서 죄가 주인공이었다. 그 다음에 죄가 주인공인데 죄가 사라졌다. 누가 사라졌는가, 율법의 자체적인 작동, 메커니즘, 작동원리에 의해서 사라졌다. 피의 복수자를 대신해서, 누가 자진해서 피의 복수자의 희생물이 됨으로서 작동되어 죄가 사라졌다. 따라서 다윗은 죄가 없다가 아니라 애제는 율법의 사람이 되었다. 율법완성의 사람이 되었다. 이래 되는 겁니다.

다윗은 자기가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죄가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그 주인공 되는 죄가 사라지고 뭐냐 하면은 죄 씻음이 주인공이 되면서 다윗을 세상에 내보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코스가.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든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게 믿기 전에 주인공이었던 내가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것을 굉장히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 인생의 책임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영의 세계를 감히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의 세계는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거든요. 자기 자신이 아무리 예수 믿고 뭐 성경신학하고 신학박사를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자기가 주인공인 이상은 이거는 천국에서 받아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달라진 것은 다윗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정했다는 다른 긍정적인 모습의 요소가 있어야 부정이 되죠. 그냥 반복적인 자기 부정은 이건 뭡니까? 이거는 중이죠. 중. 계속 나를 부인하자. 나를 부인하고 나를 부인하고 부인하자. 부인이 너무 많이 생겼어. 60대 개그입니다. 그냥.

자기 부정은 긍정이 있죠. 긍정이 시편 51편에 보면 뭐냐 하면은 예루살렘 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예루살렘 성 이것의 은택을 입히옵소서. 내가 할 역할은 상한심령 밖에 없습니다. 상한심령을 제키시고 모든 주의 은총을 예루살렘 성에 집어넣어 주세요. 나는 예루살렘이 잘 되면 그걸로 끝납니다. 이러한 시편 51편의 내용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다윗언약의 실천방식이에요. 실천방식. 다윗에게 일어난 방식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속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똑같이 적용시켜버립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건에 휘말리게 해서, 그 사건에 유인되어서 가보니까 거기는 락카룸이에요. “어?! 나 같은 사람이 또 붙들려왔네.” 거기에서 주께서 꺾으신 뼈, 십자가를 발견케 하고 그 십자가로 인하여 바깥으로 파견되었을 때는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나서게 되는 겁니다. 참 쉽죠. 굉장히 간단합니다. 이렇게 변화된 그 다윗과 누구와의 만남이 있느냐 하면은 권력에 미쳐서 환장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만나기 위해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밧세바, 우리아 살인사건 이후에 등장한 것이 압살롬의 내란입니다. 압살롬의 내란의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란이 벌어지면서 다윗이 겪었던 자기의 사적인 일이 이스라엘 전체의 공적인 일로 이게 번지게 돼요. 뭐냐 하면은 잘난 내가 못난 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그 절차가 왕이 되는 다윗이 아들에게 밀려서 권력을 다 빼앗기고 도망자 신세가 되는 그 과정이죠. 과정이 쫓겨 갔다가 다시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다시 돌아오면서 다윗과 함께한 모든 사람은 다윗이 겪었던 사적인 변화에 참여의 혜택을 입습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사무엘하 19장 16절로 23절에 나옵니다. 이제 압살롬의 그 반란이 종결되고 쫓겨났던 다윗이 다시 요단강 건너서 들어오게 됩니다.

16절에 보면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여러분 바후림에 있던 사람 기억나죠? 찔찔 울면서 아내 빼앗긴 사람. 그때 다윗은 한 가정을 파탄내면서도 왕의 더 큰일을 위해서 작은 것은 희생해도 마땅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17절, “베냐민 사람 일천 명이 저와 함께 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 하여 요단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게 종인데 이렇게 종이 많아요. 종인데도. 므비보셋의 종이거든요. 종인데 열다섯 명이나 낳았어요. 식구가 많다 이 말입니다.

쭉 내려오는데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18절,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 19절,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주지 마옵소서” 이 시므이라는 사람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은 다윗이 아들에게 쫓겨서 보잘것없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쫓겨나갈 때, 피신해서 나갈 때에 시므이가 어떻게 그 당시의 정세를 판단했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벌을 내렸다. 감히 신하 주제에 어떻게 사울 왕에게 대들었느냐,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걸 용서치 않고 하나님께서 사필귀정, 결국은 정의는 정의답게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다윗에게 노골적으로 저주를 퍼부었어요.

퍼부었는데, 자기가 뭔가 세상을 잘못 읽었어요. 읽어가지고 다시 이제 압살롬이 패배하고 다시 돌아오니까, 19절에 보면 “원컨대 내게 죄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절,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 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자, 이렇게 했죠. 그 다음에 여러분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것은 21절입니다. 요압의 동생이자 아사헬은, 발빠른 육상선수 아사헬은 뒤에 아브넬 김종인한테 죽었다고 했죠. 아브넬에 의해서 칼에 죽고 동생이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그 동생이 아비새에요.

사무엘하 19장 21절,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가로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라고 할 때에 다윗의 대답이 뭐냐 하면은 22절, “다윗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23절,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저에게 맹세하니라”

그러니까 지금 다윗은 자기 신하잖아요. 공로를 세웠잖아요. 압살롬 반란에서 요압과 더불어서 공로를 세웠다 이 말이죠. 요압과 아비새 형제에 대해서 나는 너희들과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를 해버려요. 죄를 지은 자가 다윗 앞에 나와서 용서를 구할 때 아비새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냥 죽여 버리옵소서. 죽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근거가 뭐냐 하면은 다윗 왕은 기름 부은 받은 자라는 거예요.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했으니까 이거는 죽어 마땅하다고 한 거예요.

아비새가 누구한테 배웠는가 하면은 전에 사무엘상에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들 때, 사울 왕이 잠자고 있을 때 다윗이 그냥 살려줬거든요. 그래서 살려준 이유가 기름 부었기 때문에 살려준다는 것을 옆에서 누가 들었는가 하면은 아비새가 들었어요. 아비새는 그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찬스입니다. 지금 죽여 버려서 임금님을 추격하는 자가 없어야 됩니다. 이참에 정권을 빼앗아야 합니다.”라고 했는데, 그때 다윗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기름 부음 받았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아비새가 그걸 그대로 써먹는 거예요. 기름 부은 자를 저주했으니까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한 거예요.

사무엘하 1장에도 사울을 죽인 자를 용서하지 않았어요. 왜? 기름 부은 자를 건드렸기 때문에. 무고한 자와 기름 부은 자를 다윗이 구분 짓고 있습니다. 이스보셋은 무고한 자고 사울 왕은 기름 부은 자고. 이걸 다윗이 구분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구분한 것을 옆에서 지켜본 아비새가 이렇게 하면 다윗도 내 의견을 들을 거라 해서 “죽이세요!”라고 하니까, “그러지 않겠다. 너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래 나온다고요.

그러니 지금 세상 사람들이 봤으면 어떤 일관된 원칙 같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어떤 원칙. 그리고 그 뒤에 나온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다 알아요. 소설 같아서 다 아는데. 거기 므비보셋 이야기 나오고 뭐 쭉쭉 그 다음에 바르실래라는 게 쭉 나오는데. 이 19장 이야기에서 핵심을 찾는다면 바로 아마샤라는 새로운, 요압을 대신해서 아마샤를 군대장관으로 다윗이 특채합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죠. 그거 때문에 요압이 죽여 버렸다고 했는데. 아마샤는 유대사람이에요. 그 유대사람을 일부러 등용을 시켜가지고 요압을 견제하려고 했었습니다.

근데 요압은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고 그를 살해하고 맙니다. 따라서 율법의 정신으로 봐서는 다윗은 현 이스라엘 나라 이 자체를 포기합니다. 내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내 후손으로 온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유지되기를 원하면서 그 전에 자기가 할 일은 뭐냐 하면은 요압을 끊어내는 거예요. 예루살렘에 은총을 입히는 이런 식으로의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들을 계속해서 밀어내고 잘라버리고 끊어내는 그 작업이 다윗의 남은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20장에 보게 되면 “마침 거기에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그 세바라고 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 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자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여기에서 다윗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새의 아들이라고 한 거예요. 벌써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거론합니다. 이새는 사울 왕과 쫓겨 다닐 때에 모압 땅에서 죽어요. 모압 땅에서 죽게 됩니다. 죽는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그때 아버지는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새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유다지파를 의도적으로 높일 이유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세바는. 그래서 우리가 다윗과 함께, 유다지파와 함께 할 이유가 없다. 1절,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2절,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이래 되어 있어요.

이미 이스라엘 내부에서 출애굽처럼, 새로운 언약이니까. 다윗의 언약은 새롭게 주어진 언약이니까. 이 언약기준에 의해서, 모세기준이 아니고 언약기준에 의해서 나중에 나온 언약이 처음 언약보다 더 메시야적이고 더 세밀한 내용을 갖추었기 때문에, 더 확실한 내용을 주었기 때문에, 다윗언약 기준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한쪽은 유다지파 중심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머지기는 요셉지파 중심입니다. 유다 대 요셉. 이 유다는 한 지파지만 나중에 베냐민 지파를 포함해서 두 지파. 두 지파지만 한 지파. 나머지기는 열한 지파. 1대 11로 붙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다윗에게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 당시에 그 사회가 무슨 사회냐 하면은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않고 유대사회라고 하죠. 유대인, 유다지파 사람이에요. 유다지파로 끝난 그들은 이제 메시야가 오기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유다지파 안에서 내분되어 버려요. 누구를 위하여? 마지막 언약에 의해서.

그러니까 언약은 무조건 들어가면 다 쪼개져요. 언약이 오게 되면. 복음이 오게 되면, 십자가 복음이 오게 되면 십자가 중심으로 한쪽은 천국, 한쪽은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 전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를 전한 거예요. 십자가. 여호와를 믿읍시다. 뭐 이게 아니고 그냥 메시야가 오셔서 하신 일이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 기준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 하신 일이 그게 마지막 언약으로서, 살과 피로 마지막 언약으로서 이미 마지막 심판이 되기 전에 건질 자를 미리 빼돌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빼돌리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 기준에 들어왔을 때에, 거기서 기준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어떤 차이가 나느냐, 보게 되면 요압의 그 집단의 권력욕심이 더 뚜렷하게 노골적으로 등장하면서 더 이상 다윗에 대해서 점점 차이가, 격차가 많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바의 난에 있어서 누가 이 세바의 난을 평정하느냐. 여기 20장 23절에 보면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장관이 되고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이 되고” 쭉 나오는데, 이걸 하기 전에 세바의 난을 누가 처리하느냐. 세바의 난을 요압이 처리하죠.

처리하고 난 뒤에 사무엘하 20장 9절에 보게 되면 아마사가 등장해서 세바의 난을 평정합니다. 7절에 보면 요압도 거기에 나서서 가담이 되고요. 그렇게 평정이 되고 난 뒤에 9절에 보게 되면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형은 평안하뇨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샤의 수염을 잡고” 수염을 잡는다는 것은 허물없는 사이인 것을 과시하는 겁니다. 우리 사이에는 긴장할 필요가 없고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잖아요. 먼저 친절을 베푸는 척하면서 오른손으로 수염을 잡고 입 맞추는 척하죠. 10절에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을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고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그러니까 사무엘하를 보면 땅이 질퍽질퍽한 것 같아요. 전부 다 죽는 이야기예요. 전부 다 죽는 이야기. 죽이고, 죽고, 죽고, 죽고..., 이 권력의 현장에서 내 권력의 앞길을 막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죽여 버리는 거예요. 죽이는데, 문제는 그렇게 죽였던 요압이 다윗의 권세의 공로자라는 뜻이에요. 공로자가 되는 겁니다. 다윗 입장에서는 혜택은 입으면서도 제거대상이 되고. 너무나 미운데 그 사람이 없이는 일이 안 되고. 대략난감. 대략난감 하죠. 그래서 그 뒤에, 아직까지는 세바는 처리가 안 됐는데 아마사를 제거해버리고 요압이 가서 세바의 난을 처리합니다. 처리하는데, 이 요압에 대해서, 요압의 이러한 태도가 왜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지는 사사기 9장 9절을 우리가 한번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사사기 9장 7절, 거기에 보면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자기가 왕이 되고 싶어 해요.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까 요담이 그걸 보고 “혹이 요담에게 그 일을 고하매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소리를 높이 외쳐 그들에게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나를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를 들으시리라”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세겜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나무들아 네가 왕이 될래, 말래? 하니까 나는 그런 왕 안 한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자들이 왕이 되고자 하느냐 하면은 쓸데없이 할 일이 없는 인간들만 왕이 되고자 한다. 그것을 나무에 비교해서 이야기합니다. 이걸 오늘날로 하면 쓸데없이 놀기는 뭐하고 뭘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대선에 출마한다. 그냥 연금이나 받고 있지 자꾸 나와서 뭐 하는지.

그러니까 이 말은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의 세계에서는 굳이 왕이 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왜 왕이 될 필요가 없는데 억지를 부릴 때에 그 왕은 무엇이 누락되느냐 하면은 제사장직 누락되고 선지자직 누락돼요. 형식적으로 남 보기에 왕이지만 이거는 완전히 폭력자입니다. 폭력자고 율법에 의하면 그거는 왕이 될 수 없어요. 반드시 왕이 되려면 어디를 다녀와야 합니까? 율법의 세계를 다녀와야 돼요. 율법의 세계를 다녀와야 죄인의 괴수만이 왕이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죄인의 괴수는 자신을 왕이라고 절대로 이야기 안 하기 때문에 그래요. 할 수가 없어요.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혜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는 새로운 예루살렘이 형성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다윗중심의 새로운 제사장들이 모집이 되면서 제사장의 계열이 다윗에게 모든 게 종결되고 말아요. 엘리제사장의 계열은 저주받아가지고 결국 끝입니다. 아비아달이 마지막으로 끝나버리죠. 아비아달. 어쨌든 끝나버려요. 끝나고 아비아달은 나중에 솔로몬 반대편에 서서 잘려버립니다. 다윗 자체가 제사장을 지명하게 됩니다. 이게 사무엘하 20장 25절에 나오죠. 아비아달은 다윗편인데 나중에 열왕기상 2장에 들어와서 아비아달이 솔로몬 편이 되지 못하고 요압과 같이 묶어가지고 아도니야, 다윗의 네 번째 아들 편에 서서 죽게 됩니다.

다윗 때에는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이었는데 그 제사장은 끊어지고 이제 아비아달이 있고 아비아달이 나중에 끊어지고 사독을 왕이 제사장으로 임명하게 돼요. 그러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제사장 중심체제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왕 중심체제로 바뀝니다. 그러면 백성들 입장에서 달라질 게 뭐냐, 제사장 중심체제가 돼버리면, 이거는 왕이 없을 때 제사장은 백성들에게 뭘 주느냐,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을 주면서 신명기 17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선지자나 제사장 말을 듣지 아니하면 죽여 버리라, 이래 돼요. 죽여 버리라.

그런데 이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왕의 말을 듣지 않거든 죽여 버리라고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이 말은 제사장 말을 듣는다 할지라도, 제사장 말에 고분고분 할지라도 왕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가? 죽어야 돼요. 왜냐하면 제사장 중심은 이건 모세언약이거든요. 모세언약이고. 왕 중심은 다윗언약인 겁니다. 제사장 언약이 팔땡이라면 다윗언약 이것은 장땡이 되는 거예요. 죽어! 꿇어! 어디 뭐 제사장가지고. 완전히 이거는 에이스예요. 에이스. 왕은.

그만큼 율법의 범주가, 율법보다 더 상위되는 그러한 새로운 언약에 의해서 율법마저도 통제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율법은 뭐냐 임시적 법에 돼버려요. 임시적 법.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죠. 아브라함에게 구원의 원칙을 주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주고 430년 후에 온 율법이 어떻게 오느냐 하면,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430년 후에 율법이 왔을 때에 율법이 와서 닿을 듯 말듯 하고, 접촉은 안 되고 그냥 쑥 날아가 버려요. 아브라함에게서 왔던 그 율법이 와서 못 닿고 그냥 넘어가버립니다. 율법의 의를 이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지만 율법을 따라서 누가 오느냐, 왕 되신 분이 와버립니다. 그러면 이 세계하고 율법의 세계하고 완전히 분리되는 세계가 되죠.

율법에 의해서 온 거기에 주님께서 이 율법세계에 십자가로서 통로를 마련하게 되는,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 안은 뭐가 되느냐 하면 율법완성의 세계가 돼버려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구원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율법을 통해서 주어졌고 예수님은 율법 따라 오셔가지고 율법을 완성함으로서 원래 의도했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그 계통이 완성되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이것을 어디다가 적용시키느냐 하면은 이 언약, 율법보다 높은 언약을 다윗 왕에게 적용시켜버립니다. 그러면 다윗에게 있었던 그 일, 그 일이 이제는 다윗이 죽더라도, 다윗이 떠나가더라도 무엇이 살아있습니까? 다윗언약은 살아있는 겁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 것을 여러분이 아시죠?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모세언약대로 약속의 땅이 이루어집니다. 모세는 죽어도 모세언약은 살아있게 되어 있어요. 다윗은 죽어도 다윗언약은 살아있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모세에게 먼저 모세언약을 적용했고, 다윗에게 먼저 다윗언약을 적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이라는 이 육신을 관통해버리고 모세라는 이 육신을 관통해버렸어요. 예수님에게는 새 언약이 예수님을 관통해버렸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존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행하신 것, 십자가와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고전1장 18절. 십자가가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지, 예수님의 존재성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와! 이거는 진짜 되게 어려운 거예요. 어려운 건대 여러분한테는 함부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혹시 비디오 남은 것이 없나, 그 당시 동영상이 없나, 혹시 고고학자가 한번 찾아봐라. 예수님은 실존인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옷 같은 것 천주교에서 보관해가지고 그걸 조사를 해가지고, 레이저로 해가지고 년도를 계산해가지고, 산소동위원소 동원해가지고 그거는 예수님의 그 당시 옷 맞다, 안 맞다. 그 고고학이 동원되고요. 그 화학적 검증이 동원되고.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예수님의 존재를 우리가 믿게 된다면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은 거예요. 농약뿌리는 비행기가 병충해를 하는 거예요? 그 뿌려진 농약이 병충해를 없애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뿌려진 게 있어요. 뿌려진 거.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예수님을 보라가 아니에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라가 아니라 십자가를 보라고 한 거예요.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우리 앞에 내세우는 것이지, 예수님의 존재, 키가 1미터 78센티미터였고 뭐 몸무게 46킬로그램이었고, 뭐 몸무게가 너무 적게 나가는데. 뭐 인물은 어떻고 수염이 낫느니, 안 낫느니, 뭐 그런 거. 그게 그런 것을 따진다는 그 자체가 전혀 이 언약의 세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십자가만이 이거는 환상이 아니고 진실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세계는 환상이 되죠.

자, 제사장까지 한 이유를 아시겠죠. 다시 말씀드리면 제사장보다 더 상위인, 제사장의 완성은 왕이라는 인격, 인격성에 의해서 이거는 다윗언약(왕)이고 밑에 있는 것은 모세언약(제사장)이에요. 모세언약이 다윗언약에 의해서 흡수통합이 돼버립니다. 노아언약은 모세언약에게 모세언약은 다윗언약에게 흡수통합이 되죠. 그러면 왕의 언약이 되면 아까 설명한 것처럼 이게 고정성입니다. 이거는 영원해요. 영원한 구원이 보장이 된 겁니다. 언약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다윗의 후손들이 죽고, 죽고, 죽고, 죽어도 상관이 없어요.

왜? 언약은 그 죽음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다윗언약에 따라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예수님이 이 언약에 합치된 인물이 돼버리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왕이 된 입장에서 뭐가 뿌려지느냐, 모세율법을 능가한 새로운 율법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산상설교에 나오죠. 모세보다 더 큰 권세로 주어져버려요. 그래서 예수님의 모세율법해석은 율법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그 해석에 동의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에 대해서 인간들이 지키고자 할 때 율법자체가 예수님을 경유해서 해석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율법을 내가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율법은 뭐냐 하면은 내가 곧 율법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율법이기 때문에,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킬 수 없죠. 안식일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버리면, 전에 이야기했는데 여러분 녹즙기 알죠? 녹즙기. 예수님의 십자가에다 모든 율법을 다 넣어요. 교회 바로 밑에 건강원이 있습니다. 밑에 한번 보세요. 압력밥솥 비슷한 게 있어가지고 거기다가 모든 것을 짜요. 다 집어넣어버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피가 똑똑 떨어지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피로 세운 언약이라고 히브리서 13장에 나와요.

피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모든 율법의 완성이 다 들어있어요. 거기다가 십일조도 집어넣고 안식일도 집어넣고. 안식일에 나무하지 마라.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 사먹지 마라. 주일날에. 이런 것까지도 전부 다 집어넣고. 예배참석하고 찬양은 이렇게 하고 그걸 모두 다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고 남는 것은 뭐냐 하면은 피. 내 살과 피로 모든 것은 완성이 된 겁니다. 그러면 “아, 목사님 감사합니다. 구원받는데 참 쉽게 됐네요.” 문제는 그 녹즙기에다가 우리도 집어넣는다는 거예요. 딴 건 다 안 집어넣고 뭐 십일조 그거는 집어넣고. 자기 인생을 거기다가 집어넣지 않아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뭐냐, 그냥 관람하고 구경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거예요. 함께 죽는 겁니다. 나를 십자가 안에다가 집어넣어야 십자가 안에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성령께서 십자가 안에다가 우리를 집어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우리가 이 땅에서 다윗처럼 새로운 선지자, 새로운 제사장, 새로운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제 그러면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은 선지자직이죠. 그것이 사무엘하 22장에 나옵니다. 사무엘하 22장을 보면 거기에 다윗이 모든 것을, 아모리 족속이고 뭐고 모든 것을 다 평정을 했어요. 평정을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평정을 하기 전에 마지막 남은 할 일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21장에 사울 집안에 대해서, 1절을 읽어봅니다.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은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기브온 사람은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은 사람입니다. 해서 침범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는데, 사울이라는 이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기브온 사람들을 학대를 했어요. 학대를 하고 그 땅을 몰수하고 상당히 괴롭혔습니다. 그러면 뭐가 깨지는가 하면은 여호수아하고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사울 왕에 의해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 거예요. 무시를 당해도 기브온 사람들은 뭐 소수고 할 수 없이 있었는데. 다윗시대에 와서 아직 해결하지 않은 문제로, 이슈로서 등장한 거예요. 미제사건이 남아있었던 거죠. 미제사건이.

미제사건이 남아있으니까, 어떤 자연적인 신호가 뭐냐 하면은 삼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호와께 기도를 하니까, 사울사람들의 그 피의 복수, 계약에 의해서, 그들이 계약을 위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쪽에서 아무 대책이 없이 그냥 있었다. 그렇게 할 때에 맹세했던 이스라엘과 유다족속을 위하여 사울이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다 이렇게 쭉 나오는데.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가뭄이 들었는데 그 해결책이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그 해결책이 꼬여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라고 한 거예요.

이미 기브온 사람이 이스라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학대한 그 이방민족을 전체적인 이스라엘 민족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가뭄을 주셨고 여기에서 다윗이 반응을 나타낸 거예요. 그럴 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울 집안의 일곱 명의 목을 매달아서 복수해주시면, 피의 복수죠. 복수를 해주시면 저는 좋겠습니다. 자, 그렇게 할 때 다윗이 여기서 다윗과 언약한 것과 다윗 이전에 여호수아가 언약한 것과 그게 충돌이 되지 않도록 고려하면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명단에서 빼주고 나머지기 사람 다섯을 잡고. 9절에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그리고 난 뒤에 뭐냐 하면은 나중에 보면 드디어 내려요. 비가 내린다고요.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죽일 때에 일곱 명을 내줬잖아요. 목매달았잖아요. 그러니까 도대체 이 사무엘하가 맨날 죽는 이야기예요. 죽는 이야기. 언약 자체가 죽음을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죽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여기 10절에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반석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시체를 건사해준 거예요.

왜냐 하면은 자기자식이니까. 자기 자식을 그렇게 건사해줬어요. 그리고 이들이 뭘 했느냐 하면은 13절에 “다윗이 그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그 다음 14절에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하나의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든 것이 평정이 되려면 꼬이고 엮이고 한 그러한 원한문제가 하나님의 계약대로, 언약대로 전부 다 풀어줘야 이 나라가 다윗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로 계속 유효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드러낼 수가 있는 겁니다.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은 왕이 해야 될 제사장직이에요. 제사장직을 옛날에는 어디서 했습니까? 성전이나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만이었잖아요. 그만인데 이거는 뭐냐 하면은 피의 복수자, 원한 가진 자의 그 일을 해소하는 일까지 이제는 누가 담당했다? 왕이 그걸 담당해줘야 하는 겁니다. 왜? 자기가 그 사정을 알기 때문에. 율법세계 속에 있다 왔기 때문에 그걸 해결하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가뭄까지 주셔가지고 호응을 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 집안과 완전하게 정권이양이 다 끝났습니다. 사울집안과. 이래서 사울집안과 다 끝나고 그 다음에는 다윗 자기 집안문제가 남아있지만. 사울집안 문제는 다 끝났어요. 끝나고 정권이양이 다 되었습니다. 정권이양이 되고 난 뒤에 자기에게 있었던 모든 것을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한테 보고합니다. 그게 사무엘하 22장에 나오는 선지자 예언이 나와요. 사무엘하 22장. 자, 22장에서 쭉 나오는데요.

1절,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래 되어 있죠. 다윗이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거. 자, 이 구원은 먼저 다윗이 뭘 알았습니까?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고 누가 주인공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말려든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을 할 때에 그 하나님의 구원에 본인이 참여됐음을 아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은 다윗 본인의 일입니까? 주님이 계획하신 일이에요? 계획하신 일이죠. 그렇다면 그걸 여러분들에게 적용시켜봅시다. 여러분들이 평생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일은 여러분 자신의 일이 하나도 없어요. 어떤 상황이든, 모기가 왱하고 날아오는 것도 주님께서 적절한 에너지와 습도를 갖추게 해서 내 옆에 왱하고 오는 거예요. 모든 것.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만큼 살았잖아요. 여기 열 살까지 산 사람도 있지만. 살아온 모든 이것이 율법의 세계에 있는 사람은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이 일을 조성하셨습니다.”라는 것을, 선지자적 기능을 발휘하라고 벌어진 일이에요.

내가 책임질 필요도 없고 내가 그 일에 심각할 필요도 없고. 뭔가 해결할 것도 없고요. 또 준비되어 있겠죠. 뭐가 있겠죠. 갑자기 일을 하는데 가뭄이 안 온다든지 전기가 나간다든지 냉장고가 고장 났다든지. 불안한 계시를 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사무엘하 22장 전체내용을 이렇게 봅니다. 계시를 만드는 사람. 다윗은 계시를 만드는 사람. 그리고 이스라엘도 계시를 만드는 사람. 오늘날 성도도 하나님의 계시를 만드는 사람. 그 계시의 특징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8절에 나옵니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쉽게 말해서 계시는 어디에서 떨어진다? 하늘에서 땅으로. 8절부터 쭉 나와요. 하늘이 흔들리고 천사들이 강림하고. 쭉 합니다. 그렇다면 이 계시를 만든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다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면 어디로 갑니까? 하늘로 올라가겠죠. 바로 이게 언약궤, 그 다음에 시편 51편 예루살렘에 은총을 세우소서. 언약궤 정신이 규정되면 예루살렘이고 그 예루살렘 주인공은 누굽니까? 다윗이 아니고 누구죠? 하늘에 족보를 갖고 계신 분. 멜기세덱. 언약궤+예루살렘+멜기세덱, 딱 이 세 개가 조를 맞추어요. 조가 딱 맞아요.

언약궤는 이 땅에 등장했던 물체고 예루살렘은 이 땅에 등장했던 도시였고. 한때. 한때 도시였고. 멜기세덱은 한때 나타났던 살렘왕, 제사장. 영원한 거룩한 제사장 살렘왕의 한때였고. 그러한 한때가 새로운 언약으로 마감이 되면 이 모든 것이 전부 그 안에 통합이 되어 버립니다. 이 안에서만 하나님의 구원이 가동되는 거예요. 구원이. 구원이 이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이 안에 있는 구원이 가동되는 차원에서 이게 뽑혀 나올 때 구원되는데, 뽑혀 나올 때의 원칙은요. 이 바깥 세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이게 뭐냐, 죄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강의에서 했죠. 다윗의 특징은 뭐냐, 다윗의 특징은 무조건이었다. 이게 오늘날 성도의 특징은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이야~! 아무 이유도 없이 태어났고 아무 이유도 없이 죽는 거예요. 무조건이에요. 언약궤+예루살렘+멜기세덱, 구원이 가동되는 이 세계 자체가 조건이 없어요. 조건이 있다는 것은 죄의 세계에요. 그래서 여기서 빠져나오면서 뭘 아느냐 하면은 아하, 내가 살던 세계가 조건부 세계였구나. 한시적 세계였구나. 이 세계의 그림자였구나. 이 세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꽃피는 산골이 곧 불바다가 되는구나. 내 고향 남쪽나라 아, 가고 싶어라 못 잊을 친구들. 그 남쪽나라가 영원한 불바다가 되는데요.

조건으로 따지는 악마의 세계에서 무조건의 세계로 들어오신 거예요. 그 내용이에요. 모든 조건은 위에서부터 다 주어져서 땅에서 실현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일어난 모든 전쟁과 모든 싸움은 하나님이 나의 방패 되시고 반석 되시고 하나님의 피할 바위 되시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기 증명을 하기 위해서 보잘 것 없는 다윗 하나 골리앗을 만나서 우연히 이기게 해서 그때부터 고생, 고생하죠. 그게 바로 어디까지냐 하면은 바로 23장 7절까지 쭉 하나님의 예언이 되게 됩니다. 이 예언이 또 여러 가지로 많이 파급된 것은 바로 시편입니다. 시편에 보면 자세하게 되어 있죠. 이거 마치고 저녁 먹고 마지막 시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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