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9강-사무엘상 강해 : 이스라엘의 본질
제 9강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8장을 보겠습니다. 28장 3절에,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그때 죽은 것이 아니고 그전에 사무엘이 죽었어요. 25장인가 보면 사무엘이 죽었다고 되어 있죠. 사무엘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 이제 사울이 자기가 물어볼 사람이 없는 겁니다. 선지자가 없으니까.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그때는 무슨 자신감이 있었던 거죠. 사무엘이 죽었지만 자기가 왕으로 통치하는 그걸로 모든 것은 안정화되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골리앗이 오잖아요. 항상 하나님한테 찾아올 때는 완료된 사람한테는 어떤 게 찾아와도 두렵지 않죠. 이미 완성으로 결과를 쥐고 완성을, 완성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붙여준 상황이기 때문에, 그 상황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죠. 그러나 미완료에 속한 사람들한테는 지금 내가 안정화된 이것이 혹시 무산될까봐, 노력한 모든 것이 수포로 끝날까봐, 늘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바로 그 점을 치고 하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골리앗을 사울에게 보내가지고 쪽도 못 쓰게 만들 듯이.
4절에,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을 치고” 5절에,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다윗처럼 완성 쪽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 다윗이 완성 쪽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그 자리를, 하나님이 하나님 됨의 자기 증거를 하기 위해서 자기가 선택이 됐기 때문에 자기 일이 없는 거예요. 완료된 주의 일밖에 없기 때문에 그대로 그 상황조차도 내놓으면 되는데, 사울은 모든 것이 자기 일입니다.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킬 사람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무너질까봐. 그래서 거기서 누굴 찾느냐 하면은 6절에 보면,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우림이라는 것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점치는 것이죠. 7절,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신접한 여인에게 물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무엘에게 물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사울은 절망가운데 있습니다.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 일체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으면서 나오는 그것. 그 말 건넴, 그게 갖고 있던 인간의 본질이죠. 자기 자신한테 더 이상 돌아올 게 없는 상태에서 건네는 말, 그 대상자가 누구냐 하면은 죽은 사무엘, 죽은 사무엘을 찾고 싶은 겁니다. 유령이죠. 이미 죽었으니까 유령이 됐죠. 사울의 입장에서, 자기 삶의 영토에서 떠나버린 그 유령까지 자기가 손을 내밀었다는 말은 현재 자기를 살리는데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절망으로 죽 가는 거예요. 절망으로 계속 가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불러내려면 여기에 매개입자가 필요하죠. 엔돌에 신접한 여인.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가지고 변장을 해요. 자기가 왕으로 신접한 여인들을 쫓아냈거든요. 자기 딴에 사울은 율법대로 한다고 신접한 여인을 쫓아내고, 그 다음에 율법대로 한다고 하나님께 꿈으로 묻고 우림이나 선지자로 물어봐도, 율법이 백날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율법이. 절망적입니다.
근데 자기 자기는 무슨 자리냐 하면은 왕의 자리죠.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자리입니다. 왕의 자리가 지금 블레셋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왕이라고 하는 것은 뭘 끌고 가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전체 운명을 끌고 갈 책임자로서의 왕이에요. 그게 사울이 갖고 있던 본인의 왕의 자리였습니다. 왕 자기가 제대로 처신해서 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살고, 못하면 이스라엘이 망하는 겁니다. 그러한 중차대한 책임을 지고 죽은 사무엘을 찾게 되죠.
자, 여기서 사울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나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게 하는가? 이런 질문을 자기한테 해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자체가 모순되거든요. 누가 나를 율법을 어기게 하는가? 율법을 어긴 자가 누구라고 본인이 자백하는 거예요. 내가 율법을 어긴 자라고 자백하죠. 그렇죠? 그럼 율법을 어겼으면 율법 어긴 값은 뭡니까? 그냥 심판이고 멸망이고 저주가 되는 겁니다. 심판, 멸망, 저주가 되는 이것을 내가 용납할 수가 없는 거죠. 이 질문을 할 수가 없어요.
질문이 너무 어렵습니까? 주여, 내가 왜 죄인이어야 합니까? 이 질문하고 같은 질문이거든요. 주여, 내가 왜 죄인이어야 합니까? 그 질문을 복음 모르는 사람들이 하던가요? 안 하죠.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이야기를 하지, 내가 왜 마땅히 죄인이어야 합니까? 주님이여. 그 질문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 질문할 자체가 이미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그 내용이 포함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에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사울이 잘못된 것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못하느냐, 라는 것을 질문했어야 해요.
왜냐 하면은 그 왕의 자리가 그 자리에요. 나라가 누구 나라냐 하면은 왕 자기 나라가 아닙니다. 자기는 심부름꾼이고 누구 나라입니까? 주님의 나라죠. 주님의 나라 이스라엘 같으면 이스라엘 속에 누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사울 본인이 포함이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본인 일도 무슨 일이 된다? 주의 일이 되면 되고. 본인이 주의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자기가 나라를 소유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단독적으로 따로 자기가 내려다보는 위치에 왕의 자리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사울이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윗이 내가 못하는 일을, 내가 못하는 일을 소년 다윗이 할 때 이게 돌아버린 거예요. ‘나의 시대가 끝났구나!’ 이래 되면 되는데, 이 권력이 무엇인지. 그게 주님의 자리인데, 주님의 자리를 뭐로 오해를 했느냐 하면은 내 자리로 오해를 한 겁니다. 이게 이퀄(=)이 안 되거든요. 이퀄(=)이 안 된다고요. 주님의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에요. 주님을 위해서 마련한 자리인데 내가 왜 주님을 밀치고 내가 왜 그 자리에 앉습니까?
모든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주님이 율법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그걸 밀쳐버리고 내가 율법을 지킨다고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어 버리면 그거는 도발이죠. 가장 기본적인데. 참 이거 기본을 알아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게맛을 압니까? 기본에 충실한 맛이 얼마나 좋은지요. 기본에 충실한 맛.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다. 이게 기본이다 이 말이죠. 기본. 근본이거든요.
그래서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냅니다. 그 여인에 의하게 되면 늙어서 노인네가 올라왔다고 되어 있어요. 한 노인. 그때 사무엘이 죽었을 때에 나이가 100살 좀 넘었어요. 옛날은 오래 사니까. 죽은 자니까 음부가 땅 밑에 있으니까 땅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사무엘상 28장 13절에. 땅에서 올라올 때에, 처음에는 그 신접한 여인이 “지금 나라 분위기가 점치면 죽는 수가 있어서 점 못 치겠습니다.”라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가 여호와께 맹세할 때니까 그럴 일이 없다.” 그 여인이 사무엘을 부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당신 사울 왕이죠?‘ 이렇게 한 거예요.
사울은 변장해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는데, 신접한 여인이 얼마나 용한지, 얼마나 신접한지, “당신은 나를 속이려고 해도 못 속입니다. 당신이 사울 왕 맞죠?” 이 말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점을 치는 율법의 죄에 대해서 나는 빠지겠습니다. 당신 쪽에서 나를 이용했기 때문에 이번에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는 이 일에 대해서 저는 책임이 없고 빠지겠습니다.”라고 하고서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그 신접한 여인이 있는 자리에 누가 들어와야 되느냐 하면은 바로 사울이 신접한 여인, 다시 말해서 율법에 저주받아야 될 자리에 누가 여기에 들어선다? 사울 왕이 들어서는 거예요.
지금 블레셋에 멸망하기 바쁜데 언제 이런 것을 따지겠어요? 사울 왕이 급한데. 누구한테든 물어야 되는데. 내가 신접한 여인의 자리에 대신 밀어내고 내가 대표로 앉았다. 그런 것은 신경 쓸 수가 없어요. 그냥. “그래, 니는 빠져라 내가 대표로 이야기할게. 사무엘 맞지?” “맞습니다.” “그래, 내가 이야기할게.” 그래서 이제부터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사울이 엎드려서 있습니다. 이럴 때 사무엘이 사울하고 대화합니다. 죽은 귀신하고 대화를 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율법적으로 위반되는 거예요. 저주의 자리에서, 이미 저주의 자리를 사울이 확보한 채 지금 저주스러운 이야기를, 가장 순수한 이야기를 상대에게 내뱉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순수한 이야기는 저주받는 이야기밖에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지금 블레셋에 포위가 되어서 답답해가지고, 내가 사무엘에게 안 찾아와도 될 성 싶은 것이 아니고, 선지자도 말 안 해주고, 꿈으로도 말 안 주고, 하나님은 나를 떠났기 때문에 내가 누구하고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당신을 불러 올렸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노인네 그 죽은 사무엘이 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요한 말이 뭐냐 하면은 그걸 적겠습니다. 죽은 사무엘이 말한 중요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예언’ 이미 지나간 예언이에요. 이미 끝나버린 예언이에요.
예언에는, 니가 생각하는, 앞으로 블레셋 전쟁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앞으로 뭔가 미래 시간이 남아있다고 여기고 질문한, 사울의 질문에 대해서, 너의 본질은 애시당초 끝났다. 지금 블레셋에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니가 죽는 것은 블레셋에 죽는 것이 아니고 아말렉 때 죽었다는 거예요. 그게 나옵니다. 사무엘상 28장 18절에 보면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블레셋 손에 멸망당하는 것은 블레셋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고 그전에 이미 망한 것을 확인 차, 블레셋이 다시 엎친데 덮친격 뿐이라 이 말이죠. 이미 지나간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예언이 지금 죽은 사무엘을 불러낼 때 그때 확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때 어떤 특정사건에 의해서 그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사건에 의해서 사울의 운명은 이미 규정이 끝난 거예요. 끝난 겁니다. 미래는 미래인데 이게 오래된 미래예요. 백날 미래 해봐야, 오래된 미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지점에서 규정이 될 때에 이 사람이 지옥에 간다면 지옥은 새로운 것이 없고 자기가 한 과거의 지루한 반복이에요.
그러니까 지옥에 가면 묻는 것이 있어요. 지옥에 가서, “오늘은 1월 11일. 하나님 저 어떤 인간입니까?” “니 아말렉에게 분노를 퍼붓지 않았어. 니 망했어.” “그렇습니까?” 그 다음날, “1월 13일. 하나님 저 어떻습니까?” “니 아말렉에게 진노를 퍼붓지 않았어.” 그 다음 날, “1월 14일. 저 어떤 인간입니까? 저 앞으로 잘 할 수 있습니까?” “너 과거에 아말렉에게 진노를 퍼붓지 않았잖아?” 여기서부터 이게 뭐냐 하면은 시계바늘이 가지를 않는 거예요. 가는 것 같은데 시계바늘이 그 잘에 폼만 낼 뿐이지 진도가 안 나가요. 진도가.
왜냐 하면은 그 사건으로 이미 네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도 그 특정사건에 의해서 너의 본질은 확정됐기 때문에 그래요. 확정 났기 때문에. 그러니 지옥 가서 여러분의 저주 받은 과거만 되새긴다는 것이, 이거는 뭐 껌도 아니고, 본인생각에도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얼마나 지겨워요. 내일 아침에는 뭐 먹습니까? 내일 아침에는 밥 먹고 국 먹는다. 이러면 되는데. 내일 아침에는 김밥에 컵라면 먹는다. 점심은? 김밥에 컵라면 먹는다. 아무리 맛있게 먹었지만 뭔가 새로움이 없고 반복이고, 새로운 진척이 있어야 되는데 진척이 하나도 없어요.
너는 그 시점으로서 끝났어. 그 시점으로서. 네가 죽은 나를 찾았어. 나를 찾았다는 것은 너는 이미 저주스러운 죽음으로 끝났어. 너의 자리가 신접한 여인의 자리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는 이미 저주의 자리거든요. 이 저주의 자리에, 그냥 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있는 거예요. 진척도 보이지 않아요. 더 살아도 그것은 신접한 여인의 자리에, 저주받은 자리가 계속 되풀이 되는 지루한 인생이 될 뿐이에요.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자리는 이미 확정된 자리고, 앞으로 더 살아봐야 예수 안 믿음의 세월만 지루하게 되풀이 될 뿐입니다. 이게 얼마나 비참한 거예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는 내가 개척하는 것이 아니고 특이한 사건이 그 인간의 운명을 확정짓는 거예요. 특이한 사건이. 선악과사건. 십자가사건. 유월절 죄용서의 사건. 모든 특정사건이 그 사람의 본질을 최종적으로, 죽어서 최종적이 아니고 죽기 전에 최종적인 사건이 미리 마중을 나와서 그게 최종적인 운명을 확정짓는 사건이 아말렉에게 진노를 퍼붓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말렉 사건은 어떤 사건인가를 볼 필요가 있죠. 아말렉 사건은 바로 출애굽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아말렉과 싸우는데, 싸울 때에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싸운다는 것을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사건이죠. 모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밑에서 실제로 싸우는 여호수아 장군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세가 지팡이가 피곤해서 내려가게 되면 이스라엘이 밀리고 모세의 지팡이가 올라가면 아말렉이 밀리고.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본질이 어떤 것에 밀리고 어떤 것에 증빙이 되는가는 아말렉이라는 족속과 붙었던 그 현장, 그 상황이 이스라엘의 본질을 같이 보여주는 거예요. 장갑에 짝이 하나만 있으면 다른 짝의 의미를 모르듯이, 양쪽 다 있어야 되듯이,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짝을 이루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왜 아말렉이냐? 블레셋도 있고 암몬 족속도 있고 다른 민족도 있을 것인데 왜 아말렉이냐? 이스라엘의 본 이름이 뭐냐 하면은 야곱이에요. 그러면 아말렉의 본 조상이 누구냐 하면은 에서입니다. 여기 에서가 돼요. 그놈의 인연은 질기기도 하지.
하나님의 약속대로 에서는 저주 받아야 되고 야곱은 사랑 받아야 돼요. 야곱은 단독적으로 해서는 사랑을 알 수가 없어요. 에서와 붙임으로서, 저주받는 것과 붙임으로서 야곱의 복이 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서로 밀리면 안 돼요. 복은 복대로 저주는 저주스럽게 확연하게 드러나야 되는데, 드러나기 위해서는 둘이 붙여줘야 하는 겁니다. 아말렉 조상이 에서라는 것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면은 사무엘상 15장 8절에 보면 아각이 나오거든요. 아말렉의 왕이죠. 그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 아각의 조상이 에서출신이에요. 에서의 후손입니다.
창세기 36장 12절에 보면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래 되어 있죠. 에서의 계통이에요. 에서계통. 이 아말렉 계통 중에 또 유명한 사람이 아각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에스더 3장에 10절에 보면 거기에 하만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하만 이것도 축구선수. 축구선수가 많이 나오네요. 독일 성에 하만이 많아요. 하만인데, 이 하만이 누굴 괴롭히느냐 하면은 유다족속을 아주 멸절시키려고 달려든 사람이에요. 근데 하만의 조상이 누구냐 하면은 아각 사람이에요. 무슨 인연이 이런 인연이 다 있어요. 아말렉은 그 이스라엘에 대해서 적대적 관계를 하라고 이 땅에 태어난 민족 같습니다. 에서계통에서.
그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본질이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가장 이스라엘답게 하기 위해 적대적으로 대비가 되고 같이 짝을 이루고 조를 이루는 그 민족이 아말렉 민족인 겁니다. 집단이 되니까. 이스라엘도 하나의 집단이 되고 저쪽도 하나의 집단이 되니까. 그래서 오늘 다시 사무엘상으로 돌아와서요. 사무엘상 28장 8절에 대해서, 사울 왕이 죽은 사무엘을 찾을 때에, 블레셋에게 죽어야 될 이유는, 죽는 것이 확정되었어요.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죽은 자들 가운데 네가 포함이 된다는 것이죠.
“이번 전쟁은 하나마나 너는 죽어!” 이런 뜻이에요. “너는 죽는다고.” “죽는 이유가 뭡니까? 뭐가 잘못돼서 죽습니까?” “너가 아말렉에게 분노를 안 했잖아요.”라고 하는 거예요. “왜 아말렉에게 진노를 퍼부어야 됩니까?”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정체성, 이스라엘이 무엇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붙여준 민족인데, 그 아말렉 민족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본질 속에서 아말렉을 쳐다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의 위신과 체면을 보장하기 위한 그러한 전쟁으로 이용하려고 한 거예요.
예수님의 메시야됨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죽임당하는 거예요. 제자들의 손에 의해서 죽는 거예요. 예수님이 제자들, 가룟 유다의 손에 죽는 이유는 딴 게 아니고 어느 인간도 가장 궁극적으로 죽음의 힘, 죽음의 권세, 이게 음부의 권세인데. 음부의 권세, 죽어야 마땅한 권세에서 인간들은 거기에 갇혀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이 지점이야! 네가 딴 건 다 이겨도 죽음은 못 이겨. 네가 못 이기는 지점을 알려줘? 그래. 알려줄게. 그게 내가 죽는 거야.” 죽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죽음 지점까지 데려가서 예수님만 죽었다가 부활되고 나머지기는 그냥 남겨지는 거예요. 그리고 말합니다. “네가 나를 알아? 네가 나를 알고 믿는 거야? 네가 어느 지점에서 나를 믿는다고 결심했어? 네가 살고자 하는 지점이야? 아니면 죽어도 되는 지점이야? 어느 지점에서 네가 나를 제대로 알았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구원받은 강도는 땡잡은 거죠. 인생의 극한의 지점에서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본 겁니다.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그전까지 강도는 나의 원수만 생각했는데, 나의 원수만 생각하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밀쳐야 되는데,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원수로 인하여 예수님이 부각이 된다면 나라는 것도 어디에 포함된다? 예수님의 원수에 포함된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아, 그동안 내 중심이었던 것이 예수님의 원수, 다시 말해서 인간이 무서워하는 죽음 그것이 주님한테는 원수가 되는구나!’ 주님께서는 “바로 죽음이 원수야. 너는 이걸 못 이겨.”라는 지점까지, 주님께서는 강도의 손을 잡고 친절하게 딱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 데려가주시는 친절한 안내자. 강도가 놓칠 리가 없죠. “오늘 밤에 주와 함께 있기 바랍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주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친히 나를 이 지점까지, 십자가 달리는 지점까지, 이 불편한 장소까지, 이끌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 아프네. 되게 아프네. 하지만 감사합니다. 왜? 이 지점이라도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진정한 나의 적을 몰랐는데 그 지점을 주님의 십자가가 알려주는 거예요. 나의 적을 모르면 누굴 모르느냐 하면은 나를 몰라요.
지금 사울은 절망적입니다. 절망적일 때, 자기가 율법을 지킨다는 그 왕의 위신 때문에, “에잇, 어디 점을 치고 어디 죽은 자를 불러내. 나는 너하고 안 놀아.”라고 자신만만할 때는요. 진정 자기의 끝을 몰랐어요.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지금 자기가 괜찮은 존재인지 알았죠. 그러나 답답하고 컬컬할 때, 컬컬할 때 자꾸 막걸리 생각이 나요. 컬컬할 때, 그리고 뭔 일을 할 때, 김밥집을 한다거나 무슨 일을 할 때, 예수 믿는 것 다 때려치우고 그냥 고사지내는 거예요. “당신도 고사지내?” “나 교회 다니는데 목사님 안 볼 거야.” 답답하니까. 뭐, 신접한 여인이고 무당이고 고사고 뭐고 다 오라는 거예요.
바로 그렇게 답답하고 절망적인 순간이 뭐냐, 나의 본질이 확정지어지는 순간입니다. 더 이상 나한테 어떤 희망이 남아있는 그 순간이 내가 지옥맨이냐, 천국맨이냐를 결정짓는 그 순간이죠. 죽은 사무엘이 사울을 기억할 때 ‘네가 뭐 블레셋을 이기고...,’ 그런 거 기억하지 않습니다. 딱 한 사건만 기억하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기 위한, 진정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이스라엘을 되게 했던 그 아말렉과 네가 붙었을 때에, 너는 아말렉을 하나님의 분노의 심정으로, 분노의 시선을 가지고 아말렉에게 다 분노를 퍼부었느냐? 너는 그때 이미 떨어졌어. 탈락했어.”
그래서 그때 사무엘을 통해서 뭐냐 하면은 내가 이제 왕을 바꿔야 되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죠. 왕을 바꿔야 되겠다. 이런 식의 이스라엘은 생각한 적도 없는 이스라엘이라고 왕을 바꾸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 이스라엘을 관리하는데 아주 철저하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거죠. 그럼 여기서 창세기 25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태동할 때 어떤 토대의 그라운드, 바탕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토대가 왔는가. 그걸 보겠습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여기에 숫자가 1이에요? 2에요? 2가 되죠. 숫자가 2가 된다 이 말이죠. 두 국민이라. 두 국민. 그럼 이 지상에서는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둘로 쪼개질 지상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밑에 잘 보세요. 갈라지지 않는가. 지진이 나서 둘로 쪼개지지 않는가. 둘로 쪼개질 거예요. 둘로 쪼개질 그런 바탕입니다. 바탕 자체가 색깔이 달라요. 둘로 쪼개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죽 하면서 이걸 이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했죠. 소유의 세계와 그 다음에 예언의 세계. 이렇게 나눴습니다. 삶의 영역과 유령의 영역.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소유의 세계와 예언의 세계. 이렇게 나눴는데, 지상에서는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두 국민이 나뉘는 거예요. 두 국민이. 그러면 여기에 두 국민이 나누어지니까, 국민까지 숫자가 아주 많아지니까. 근데 여기 시작은 뭐냐 하면은 두 아이입니다. 두 아이. 아이 둘이 되는 거예요. 두 아이가 어디를 겨냥하느냐, 두 아이가 장래에 모든 세상의 운명을, 둘로 양분될 운명을 지니고 한 사람씩 여기 집어넣습니다. 두 아이.
한쪽은 야곱이고 한쪽은 에서가 됩니다. 에서. 근데 한쪽은 무엇과 연결되었느냐 하면은 예언이죠. 아브라함의 약속과 연결되어 있는 그런 쪽. 아브라함과 이삭. 이삭과 아브라함의 약속이 연결되어 있는 그런 자식이 여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누리라고 했으니까, 두 아이가 통합될 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통합될 일은 없어요. 통합될 일이 없으면, 그러면 따로따로 노는가? 아니에요. 서로 마주봐야 돼요.
왜냐하면 상대가 없으면 나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확정짓지 못해요. 상대, 서로 뒷배, 서로 뒤쪽이 인생관이나 본질이나 사고방식이나 그걸 보는 시선, 관점, 이것이 현저하게 차이 나는 자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붙여주는 겁니다. 현저하게 차이 나는 것을. 통합이 안 되고 적대적 관계에 있는 그런 자를 둘이 같이 한 조가 되도록 붙여주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언약이 굴러갑니다. 언약이 계속 진격해 나가는 거예요. 언약이.
그럼 둘 사이가 붙었으니까 여기서 뭐가 벌어지겠어요? 이질적인 것이니까 여기서 서로 싸움이 벌어지겠죠. 싸움이.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해야 되는 거예요. 외부전쟁도 해야 되고 내부전쟁도 해야 되고. 계속 전쟁을 벌여야 되는 겁니다. 이 전쟁은, 에서 쪽에서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구축된, 소유니까. 소유된 힘을 자랑하는 전쟁.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고 하는 게 있죠. 영화 <친구>에 보면 나오죠.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깡팬데예” “어디서 이게 농답하노?” 귀때기 한 대 얻어맞고. 근데 진짜 아버지가 깡패라서 나중에 선생님이 겁에 쫄아가지고 머리가 홀라당 벗겨지고. 이러는데.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이삭인데요.” “야곱!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없는데에.” 이게 약속이기 때문에, 예언이기 때문에, 유령의 영토기 때문에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땅에 속한 사람과 하늘에 속한 사람을 같이 이 땅에 두는 겁니다. 야곱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몰랐어요. 힘에는 힘. 힘이 없으면 속임수로. 목표는 뭐냐,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유산권을 곱빼기로 따내는가. 장자 되는 것. 거기에 열중했습니다. 철저하게 싸웠지만, 이 싸움은 근본적인 싸움이 아니고 욕심내는 싸움. 둘 다 똑같은 입장에서 싸운 거죠.
그러다가 여기 야곱에게 연결되어 있는 약속의 그 노선에서 찾아옵니다. 누가 찾아와요? 사다리에서 오르락내리락 했던 그 천사 중에 한 사람이겠죠. 사다리타고 내려온 사람. 그 사람이 마하나임이라는 천사의 집단 중에서 찾아왔던지, 뭐 누가 찾아왔던지 간에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야곱에게 찾아와서, 야곱의 이름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이스라엘로 바뀌어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다고요. 그러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뀔 때에, 야곱이 에서한테 복을 따내고 뭐 어떻게 했던 모든 시도를 갖고 있던 야곱의 근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이거는 죽어 마땅한 걸로 드러나는 거예요. 내가 세상에서 내 힘으로 버티려고 했던 그것은 하늘나라에서는 안 받아주는 본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싸움은, 야곱은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은, 야곱은 에서하고 싸울까요? 아니면 누구하고 싸울까요? 누구하고 싸웁니까? 자신의 옛사람하고 싸우는 거예요. 야곱이 야곱하고 싸우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에서를 만나면 “주여!”라고 하면서 일곱 번 절을 하죠. “가져가이소. 이거 다 가져가이소. 다 가져가세요.” 이 말은 좀 주제넘게 이야기를 한다면 “형은 나하고 싸움 대상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나의 적은 나니까. 내가 나의 적이에요. 내가. 사도바울처럼 어떻게 하든지 내 육신을 좀 빨리 벗었으면 좋겠다. 내 소원이 있다면 이 땅에서 내 육신을 벗고, 빠져나오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그것이라.
내가 나하고 싸우니까.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보다 더 센 놈은 없거든요. 나보다 더 센 자는 없다 이 말이죠. 이 완료된 내가, 미완료된 내가 자꾸 발목을 잡는 거예요. “니가 예수 믿는 것은 착각이 아닌가?” 내가 자꾸 나를 의심을 하는 거예요. “니가 예수 믿는다고 돈 가져다 줘? 안 가져다주지. 봐. 니가 헛수고한 거야. 하나님께서는 너를 이번 일로 가만두지 않고 벌을 내릴 거야. 그러면 너는 이제 망했어. 쫄딱 망했어. 아이고, 안타까워라. 예수 믿어 놓고도 하나님께 기도응답도 못 받고 도움도 못 받고 세상 천하에 불쌍한 게 너야. 너는 니가 불쌍하지 않니?” 내가 계속 속삭이는 거예요.
그러면 가끔은 성령께서 뒤에 와서 탁 어깨를 치죠. 주님께서 “마! 니는 이미 죽었고. 니 안에 내가 산 거야. 니 지금 누구보고 헛소리하는 거야.” 옛사람은 우리가 상종할 적이 우리한테는 이미 죽은 나보고 상종하는 거예요. 살아있다고 우기는 그 옛 나가 이미 죽어버린 나를 붙들고 “더 착해야지. 훌륭해야지.”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나는 죽었는데. 지금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습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못 알아들어요. 성령 받아도 못 알아듣는데.
약속이라는 응시, 약속으로 봐야 되는데 출발점을 시선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나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구원받은 나로부터 시작하니까, 이게 일 년 내내 시달리는 거예요. 시달리는 거. 우리는 시작하는 나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쳐다보는 이 약속 있잖아요. 나를 죽게 한 약속. 나를 이미 규정했어요. “니는 죽고. 니 안에 그리스도 때문에 니는 살았어. 그게 의야.” 이미 규정을 했으면 그 규정부터 시작을 해야 할 건데. 내 안에 또 다른 나가 있어가지고, 자꾸 시작을 나로 해서 이 규정을 개무시하고, 옛사람 있잖아요. 옛사람. 좀 근사하고 멋있어 보이고. 신앙 있어 보이고. 그걸로 자꾸 출발하고 독촉을 해대내요. 죽을 때까지.
그러니까 우리 새사람 입장에서는 귀찮아 죽는 거예요. 이거 죽을 수도 없고 뭐. “주님, 죽이든지 어떻게 좀 해주세요.” “가만두어라! 다 필요할 때가 있느니라” 그러니까 이미 성령 받았던 사도들은 이게 죽을 때까지 복음전파자로 계속하는 겁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 복음전파자로 계속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상대가 절름발이든지 상대가 귀머거리든지 상관이 없어요.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원수들이 아니에요. 진짜 원수는 내 안에 따로 있는데 그들이 원수일 리가 없죠.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스데반 집사가 하는 이야기처럼 “주여, 그들이 하는 일을 그들은 모릅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니 하고 안 논다 이 말이죠. 놀 군번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때 그렇게 한 고백을 무슨 고백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면 성령에 충만해서 하는 고백이에요. 안 믿는 사람에게 들으면 아주 개무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도행전 7장 60절에,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아주 여유만만한 거예요.
우리 자신이 이미 본질적으로 특이한 사건에 의해서 확정 났습니다. 그 특이한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사건이에요. 십자가사건입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사건으로 니가 더 이상 오래 사냐에 관계없이 이미 확정된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천국가게 되면 십자가사건을 영원토록 찬미하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공로와 희생으로 이 거룩한 내가 살 수 없는 하나님이 사시는 땅에, 염치없이 이렇게 신부가 되어서 들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걸 매일같이 반복하는 거예요. 그 축복스러운 그러한 상황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가 계속 되는 거예요.
자, 사무엘하 1장을 봅시다. 1장 8절에 보면,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아말렉에게 진노를 퍼붓지 못해서 죽었던 사울 왕과는 달리 이미 완료에 속한 다윗은, 13절에서 “다윗이 그 고한 소녀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14절,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는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절,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6절, “다윗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 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아말렉에 대해서 다윗은 아주 단호하게 처리해버립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 이스라엘이 결코 내가 관여할 나의 나라, 나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친히 왕으로서 통치하는 거고. 자기는 하나님의 왕의 아바타에 불과한 거예요. 아바타기 때문에 항상 나는 왕이 아닌 거예요. 물론 그 전에 다윗이 많은 실수와 오류를 범하지만, 그러나 곧 이어서 결과적으로 뭐냐 하면은 나는 왕이 아니고 죄를 지어도 결국 죄로 말미암아, “나는 왕이 아니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죠.
그 본질의 끝부분, 다윗의 자손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예수님이 인자로 왔다는 것은 사람의 계통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사람 같으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지 인자의 아들이라고 하겠어요? 바로 사람의 계통으로 온 하나님의 아들인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오신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의 하나님 됨, 스스로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찾아가는 그 경로를 보여주지 못한 존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이유가 없어요. 천국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결과물로, 그 열매로, 땅콩부스러기로 꽂히듯이, 묻히듯이, 그렇게 열매로 묻혀 나온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혈육으로 난 것이 아니고 영으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제 전체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일방적으로 받은 거예요. 이것은 사무엘의 예언에 의해서 받았고, 그 기름부음의 출처는 언약궤에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궤가 모신 곳이 성전이었고, 다윗은 마지막에 자기 인생의 끝에 성전을 지으려고 하다가 자기 자손,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당부하고, 모든 준비는 본인이 다했어요. 그러면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한 것은 뭐냐 하면은 나의 나됨은 이 성전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 그게 언약궤에요.
그 언약궤가 모세시대에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왔잖아요. 내려온 나라가 무슨 나라? 이스라엘나라라 이 말이죠. 이스라엘 나라가 그 완성된 임무를 마치고 드디어 하늘나라로, 예루살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거기서 하늘나라를 구성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 됨을 영광스럽게, 찬란하게 빛내기 위해서 그처럼 경로 안에서, 과정 안에서 자기 백성이 바로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생산되고, 선택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것은, 이미 예수님이 하신 것은 아버지로부터 재가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선택한 것도 아버지한테 이미 효과가 있는 겁니다. 주의이름이 효과가 있는 거예요. 내 이름을 죽이고, 내 이름을 죽이는 그 이름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나중에 죽어서 우리의 본질과 우리의 운명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주어진 결정적인 사건에 의해서 최종적인 것이 정해졌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언제부터인가 성령이 왔을 때에 이게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인생인 것을 알게 해주신 이 은혜가 계속 우리 안에서 작동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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