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8강-사무엘상 강해 : 완료와 미완료
8강은 처음부터 제목을 제가 정하겠습니다. 8강 제목은 완료와 미완료의 싸움, 완료와 미완료의 싸움입니다. 미완료는 사울이고 완료는 다윗입니다. 그래서 완료는 미완료에 대해서 뭐냐 하면은 수비적이에요. 수비적이다. 완료됐기 때문에 공격할 가치가 없는 거예요. 사울에 대해서 공격할 가치가 없습니다. 근데 사울은 미완료기 때문에, 미완료기 때문에 이미 자기 허락도 없이 완료된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미완료의 세계에 남겨있다는 것이, 이거는 자기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어떤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내 허락도 없이 너는 왜 완료가 되느냐? 이걸 속담으로 하게 되면 닭 좇던 개신세가 된 겁니다. 이 사울이.
그래서 다윗의 입장에서는 닭의 입장이고 이미 지붕위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공격해도 완료가 미완료로 돌아서는 법이 없다는 것. 완료가 미완료가 될 수가 없다는 그 점이 굉장히 즐거운 거예요. 본인도 거기에 대해서 굳이 설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본인이 애써서 완료된 게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애써서 구원된 게 아니기 때문에, 구원되려고, 되려고 애쓰는 그런 미완료적인 사람에 대해서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완료의 입장으로 봐서는 미완료가 이미 없어진 세계에요. 없어진 세계. 그러나 미완료의 입장에서 보면 완료라고 하는 것은 아직 내 앞에 얼쩡거리는 세계. 그리고 나를 약 올리는 세계. 그렇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9장 16-17절에 보면, 이러한 다윗과 사울의 전쟁에 대해서 마태복음 9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간단하게 보면 이렇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거와 같은 뜻인데, 옛 술은 옛 부대에 잘 어울린다. 놀던 식으로 노세요. 이거죠. 당신이 놀던 식으로 노세요. 나는 당신이 놀던 식으로는 더는 안 놀랍니다. 그렇다면 이 완료가 미완료와 겹치는 부분, 동그라미가 있다면 이 동그라미와 동그라미가 겹치는 부분, 새 시대에 속한 다윗과 옛 시대에 속한 사울과 겹치는 이 부분이 뭐냐 하면은 그림자에요. 그림자.
이 그림자가 다윗에게 뭘 주느냐, 고난과 고통을 줍니다. 그림자가.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시편이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시편이 나오죠. 당하기는 사울에게 당하고 고백은 자기를 완료시킨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렇게 당한 게 없으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기 형편을 고백할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게 집적거릴 때 그 하소연을 하나님께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여, 왜 저를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저 구원이 됩니까?” 이거는 사울이 하는 소리에요.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저 구원이 됩니까, 라는 것은 사울이 할 소리고. 다윗은 왜 하나님께서 저를 벌써 구원하셨습니까? 저 사람들이 납득이 안 되게. 저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게 왜 이렇게 엉뚱하게 구원을 하셨습니까? 가진 자의 여유죠. 가진 자의 여유. 예배드리나 안 드리나 구원되게 하셨던 하나님. 예배 안 드리면 지옥 간다고 벌벌 떨게 만드는 저들과 다르게 왜 저는 예배와 상관없이 구원을 시켰습니까? 그래서 구원되고 난 뒤에는 예배라는 것이 벌벌 떨 필요가 없고, 어떤 국가권력에 구애될 필요가 없음을, 왜 저는 이렇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사울은 다윗의 무엇을 공격하는가, 그림자를 공격해요. 끊임없이 그림자를 공격합니다. 다윗이 벗어놓은 그러한 유니폼. 땀 냄새가 나는 다윗이 벗어놓은 체육복. 트레이닝복을 가지고 사울은 “저 놈 잡아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다윗은 “내가 벗어놓은 트레이닝복을 잡아서 뭐하시려고 하십니까?” 이렇게 해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사울 임금님. 저는 메추라기 같이 아무것도 아닌데, 빈대 같은 저를 왜 자꾸 뭐가 필요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거는 다윗이 이유를 알죠. 미완료된 자의 답답함이고. 자기 처지에 대한 비관이죠. 자기가 미완료된 것을 완료된 자를 향하여 계속해서 자기 한을 퍼부음으로서 자기 심정을 달래려고 하는 거예요.
이러한 두 이질적인 세계의 조성은 누가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조성하신 거예요. 다윗의 입장에서도 사울의 공격이 그다지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필요 없는 게 아닌 게 왜냐 하면은, 사울 같은 존재로부터 공격을 받지 아니하면 성도가 아닌 거예요. 미완료에 속한 자들이 질투심에서, 분노에서 “너는 뭐 잘났다고 구원이 됐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어대고, 우리는 계속해서 수비만 하는 거예요. 수비만. 계속 수비만 하는 거예요. 방어만 하는 거예요. 공격하지 않고. 뭐 새삼스럽게 공격해서 쟁취할 여분의 것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미 가질 것은 다 가졌고. 우리 신랑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다 알아서 하는데. 내가 뭐 신부답게 하려고 애쓸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거는 내가 옛날에, 사울 시대에 있을 때나 하는 짓거리죠. 마음껏 그들로 하여금 짓밟게 하고 마음껏 욕하도록 그렇게 허락하세요. 왜냐 하면은 그래야 미완료가 무엇이고 완료가 무엇인지가 뚜렷하게 윤곽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다시 한 번 강의하면서 했던 것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다면, 여기 완료의 세계에서 이미 있음의 세계가 돼요. 완료는 있음, 하나님 계심. 그럼 완료가 있음이면 여기 미완료는 뭡니까? 이미 없음으로 규정받은 거예요. 없음의 세계에요. 있음이 없음한테 시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이 미완료의 세계에서는 자기세계만 있어요. 있고, 있으니까 공격하는 거예요. 완료의 세계도 있어요. 있으니까 공격하는 거예요. 있으니까. 내 편이 되라고. 나를 옹호하고 인정해달라고 공격하는 겁니다. 그러나 완료의 세계에서의 있음은, 다윗은 이 미완료, 없음에 대해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수비는 없음 쪽에서 수비를 받되, 공격은 뭐냐 하면은 있음의 세계를 더 나타내기 위해서 누구를 공격하는가, 블레셋과 이방나라를 공격해요. 이방나라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사울에게 추방되고 난 뒤에, 기름부음 받은 왕답게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공격할 때는 공격을 해요.
그것이 바로 사무엘상 30장에 보게 되면, 다윗이 남방 쪽에 있는 그렛 사람, “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멜 남방을 침노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죠. 1절에 보면 “시글락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하여튼 아말렉 사람들이 골칫거리에요. 시글락을 침노했는데 거기에 누가 있었는가 하면, 5절에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임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그래서 처자들이 많이 슬펐는데 다윗이 그걸 보고 600명중에서 200명을 남겨두고 400명을 데리고 가가지고 그곳에 침범합니다. 침범해서, 그들 아말렉이 승리했다고 춤추고 있을 때에 급습해서 그들의 아내도 구하고 그들이 갖고 갔던 모든 재산도 찾아왔습니다.
찾아왔을 때에, 이러한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의 자기 위세로 자기가 해야 될 일을 공격을 했던 거예요.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22절에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비류들이 다 가로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여기서 악한 자, 비류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뭐냐 하면은 다윗이 하나님의 사사의 기능과 율법의 기능, 선지자의 기능 전부 다 왕이 된 다윗이 벌써부터 시작을 한 거예요. 이미 하나님한테 정권을 인수받고, 완료니까, 완료된 상태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전쟁에 나설 때 모든 전쟁은 다윗의 전쟁이라는 것이 없고 완료된 분의 전쟁이거든요. 골리앗 전쟁처럼. 완료된 분이 다윗을 통해서 자신의 완료됨을,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여기 살아계심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일으킨 전쟁이다 이 말이죠. 그 전쟁의 전리품은 누구한테 바쳐야 돼요? 이 전쟁은. 마땅히 누구한테 바쳐야 됩니까?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 민수기 3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이에요. 너희들이 이방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거든 너희들이 차지하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라. 민수기 31장 25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6절,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족장들로 더불어 이 탈취한 사람과 짐승을 계수하고 27절,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28절,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 지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이렇게 되어 있을 때에, 이것은 하나님이 수고했다고 수고비로 주는 게 아니에요. 그 점을 여러분들이 이해해야 돼요. 수고비로 주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배분하시는 겁니다. 수고했다고 주는 게 아닙니다. 군인들은 고생 많이 했으니까 많이 주고 다른 사람들은 적게 했으니까 적게 주는 그런 것이 아니고, 수고는 하나님 혼자 했어요. 하나님이 혼자 하시고 그 현장, 전쟁터에 나갔던 사람에게는 이렇게, 이렇게 나누어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이 율법적인 사실을 모르고 사무엘상 30장에 보게 되면 같이 갔던 그 악한 자와 비류들이 가로되 그 전쟁에 수고하지도 않고 집구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왜 줍니까? 이래 나온 거예요.
이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은, 이들은 율법의 완성의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준다는 사실을 모르고, 미완료 상태, 사울이 했던 그 전쟁과 같은 종류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말로만 우리는 구원됐다, 완료됐다, 이러지 말고.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완료된 자, 다윗을 통해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를 보라 이 말이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완료된 자, 다윗의 입장에서 움직거리고 어떤 행동에 나설 때는 필히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미완료적인 요소가 어떤 것인지 윤곽이 드러나는 식으로 완료된 자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난 뒤에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을 이 땅에 계속해서 남겨두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뭐냐 하면은 구원과 구원되지 않은 자의 모델의 표준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러한 내력이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뭘 주셨죠? 사람들에게 뭘 주시는 겁니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선물을 주시는 거죠.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선물 받은 자가 선물 받을 짓을 해서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니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7절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은혜라고 하는 것은 네가 받은 것, 내가 받은 것, 누가누가 잘 났나 비교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만약에 누가 못나고 누가 좋은 것을 받아버리면, 그거는 뭐가 되냐 하면은 완료자체에서 미완료가 발생되는 것밖에는 안 되니까. 그거는 없죠. 작게 받아도 완료고 많이 받아도 완료고. 어떻게 쓰시던 간에 그 역할 자체가 완료에 해당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받은 것을 통해서 완료성을 드러내면 그만이에요.
나는 한달 일하고 난 뒤에 70만원을 받는다. 아휴, 얼마나 큰 선물인지. 나는 한 달에 대충 놀았는데 주식이 올라가지고 한 달 수입이 7600만원이다. 아휴, 웬 은혜인지. 같이 보라는 거예요. 같이 보는데 이왕이면 7600만원이면 좋겠죠. 같이 보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은 돈을 적게 받든 많이 받든 관계없이 그거는 적다, 많다를 완료된, 이미 주님읜 시선의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그걸 내가 측정하거나 평가할 그런 자격은 없는 겁니다. 그런 것은 누가 하느냐, 사울 쪽에서 하는 거예요. 사울 쪽에서. 옛 부대에 사는 사람들이 한다 이 말이죠. 미완료기 때문에.
그래서 사무엘상의 골리앗 전쟁 이후에 나머지기 일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뭐 이렇게 전개되죠. 미완료가 완료를 계속해서 공격하고, 다윗은 완료기 때문에 수비하면서 자기가 공격할 것은 그 왕다운 면모를 보이면서 공격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울은 다윗을 도대체 왜 공격하는가. 수사 극이라든지 수사드라마라든지 영화에 보면 그런 게 나오잖아요. 어떤 재벌이 자기 용역 깡패들을 시켜가지고 주인공을 계속 추적하고, 하여튼 뭔가 차타고 가면 벌써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알아요. 차타고 가게 되면, 저 인천송도에서 촬영을 많이 하거든요. 길이 넓으니까. 차도 별로 안 다니고. 인천송도 근처에서 차타고 혼자 가게 되면 거기서 반드시 트럭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도대체 저는 그걸 보면서 운전을 어떻게 하기에, 트럭이 나오면 조심해서 길가로 피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냥 하다가 저쪽 트럭에 박아. 왜 박느냐 하면은 이것 때문에? usb가 있는 거라. 재벌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가 있고 연루된 국회의원들과 공직자들의 비리를 완전히 박살낼 수 있는 그 usb. 그걸 주인공이 노리고 있으니까, 죽여서 뺏기 위해서 깡패들 시켜가지고, 트럭운전사 시켜가지고 박아버리고, 경찰들, 고위간부들 다 연루 되가지고 쉬쉬하게 만들고. 이제 뻔해요. 뻔해. 이 usb, 비밀이 있는 거예요. 비밀이. 이게 궁금한 거예요. 도대체 그 usb에 담긴 그 비밀 때문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어느 세계다? 미완료의 세계를 헤맬 수밖에 없어요.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서나, 안 그러면 밑에서 썩은 고기를 먹으나 관계없어요.
usb가 없으면 그 인간은 저주스럽게 살다가 저주스러운 곳,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이렇게 트럭을 가지고 주인공을 치고 죽이려고 하지 말고, 사정해가지고, “주세요. 알려주세요.” 이렇게 하고 싶잖아요. 공격보다도 타협적으로 이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안 됩니다. 왜냐 하면은 완료가 과거로부터 온 완료 같으면 이 미완료에 속한 사람이 “나도 그렇게 해서 앞으로 두 달 뒤에는 구원받아야지.” 이게 되는데. 이 완료가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이게 미래에서 왔거든요. 미래에서.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뭘 이야기해도, 이야기하면 화만 돋울 뿐이죠. 화만.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이 기대한 그런 기대로 구원받았을 것 같으면 내가 당신한테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데, 내가 구원받은 것이 당신의 미완료로 시작해서 완료로 나가는 그 끊어진 것을 내가 완료가 되고 보니까 이게 보이더라.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뭐냐, 이 모든 일은 주께서 하셨지 제가 한 게 없습니다. 이게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usb에 담긴 구원의 비밀입니다. 이러니까 근처에 있는 창이라든지 뭐 돌하루방이라든지 재떨이라든지. 니가 있는 한 나는 괴롭다는 거예요. 니가 있는 한. 니가 있는 한 나는 가짜로 계속 들통 나기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아이고, 이거 사무엘상 좋은 책이네. 좋은 책이라. 몸이 아파서 소년 다윗을 이렇게 채용해가지고 하프, 수금을 타주면 고맙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 뭐가 등장하느냐. 매개입자, 악신이 순간적으로 덮쳤죠. 창 들고 수금치는 다윗을 보고, 조를 바꿔서 지금 c로 바꾸려고 하는데 창이 날아와 가지고 피하니까 벽에 꽂혀가지고 다윗은 놀라서 도망가고. 그 다음에는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왜 이런 발작증세를 일으키느냐. 이게 바로 없음인데, 사울의 세계로 판단할 수 있는 그 범위를 넘어선 인물, 소년 다윗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내가 구축한 있음의 세계는, 그쪽 세계에서 볼 때에 있으나마나한, 있어도 없는 세계가 되는 그 자체에서 자기가 그걸 수용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사울에게 그런 입장에서 다윗은 말합니다. “왕이여, 당신이 공격하는 것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무슨 그림자냐 하면은 바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이 땅에 펼치는 그림자. 이미 완성된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내놓는 그런 그림자. 실체는 없고 백날해도 소용이 없는 그 일을 합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예가 사무엘상 21장부터 해가지고 죽 나오는데, 그중에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뭐 여러 가지 주목해야 하지만. 사무엘상 26장 12절, 그 중간에 이야기가 죽 그런 이야기에요. 미친 듯이 추적해서 죽이려고 하고. 무려 열여섯 군데나, 지도에 보면 나와요. 다윗이 피신한 곳, 열여섯 군데. 엔게디는 제가 가봤습니다. 사해바다 근처에 경치 좋아요. 요새는 우리나라보다 안 좋지만 그 나름대로 좋은 데였어요. 샘이 나오고 폭포수가 있는 거기까지 피해서, 무려 열여섯 군데나 피신하였습니다.
계속 추격하고 계속 하는데, 여기 그의 추격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옵니다. 사무엘상 26장 12절,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그들은 다 잠을 자고 있었던 겁니다. 잠을 자고 있었던 거예요. 여기에 신하가 둘이 있었는데 다윗 편에는 아비새. 사울 편에는 아브넬. 이 두 신하의 특징은 완성과 미완료를 몰라요. 완성과 미완료를 몰라서 사울 정권을 인수하면 그게 다윗 정권이 되는 줄로 생각한 겁니다.
사울은 옛 시대에 속해요. 사울은 이미 구축한 내 힘을 지키기 위해서 힘들을 모아가지고 자기 적들을 공격함으로서 내 것을 지키는 이게 옛 시대 방법이에요. 내 것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지키는 것은 사울식이에요. 옛 부대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나 새 시대는 내가 지킬 필요가 없어요. 방어하고 그냥 수비만 하면 돼요. 항상 이거만 하면 됩니다. 기름부음이 있으니 제가 구원되는 것은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야기만 하면 된다고요.
기름부음이 먼저 주어줬으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름부음이 먼저 있으니, 주님의 성령이 먼저 계시니, 예수님이 먼저 계시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콩 놔라 팥 놔라고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고, 해도 안 먹히고. 그냥 주님에 의해서 벌어진 상황, 완료된 상황뿐입니다. 제가 이야기할 것은 그것뿐입니다. 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저를 공격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저한테는 없는 것 같은데요. 나도 당신한테 왜 공격받는지를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둘 다 아무것도 아닌데 왜 저를 공격하십니까?
니가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는지 그게 궁금하단 말이야? 지금 백성들은 뭐라고 하는지 알아?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그게 여론조사에서 다윗은 90퍼센트고 10퍼센트는 뭐냐 하면은 사울인거예요. 그게 뭐 아홉 배 차이밖에 안 나지만 다윗은 열배차이 난 겁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임금님이여, 그게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그게 옛 시대의 사고방식입니다. 국민들 여론조사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어떻게 끝냈는가를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악신 들린 사울에게는 그게 안 통하죠. 그래서 처음에는 이렇게 물병을 들고 가는 이것도 나중에는 양심에 가책이 됐는지.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가만히 가서 변을 볼 때 뒤에서 옷자락을 싹 베었어요. 그 옷자락을 베고 난 뒤에도 그게 너무 양심에 가책이 되어가지고 아브넬 보고 이 옷자락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어요. 그리고 임금님, 거기 계십니까까까까~~~ 너 누군데에에에~~~ 임금님이 사랑하는 다윗입니다. 사울이 있다가 미안하이. 니가 옳다. 내가 다시는 너를 쫓아가지 않으마. 내가 정신이 없지. 내가 너를 왜 쫓아가. 네가 이스라엘한테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데 내가 너를 괴롭히다니! 내가 정말 너한테 면목이 없다. 잘못했다. 다윗이 알겠습니다, 라고 해놓고는 도망치는 거예요.
그걸 믿지를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은 사울은 사울 시대에 속해있기 때문에, 미안하다, 죄송하다, 다시는 안 할게, 라고해도 이 미완료가 작렬하는 이상은, 이 결핍에, 인간은 자기 결핍을 자기가 견딜 수가 없어서 몸부림치게 되는 겁니다. 자기 결핍에.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의 자아 그 다음에 인간의 주체는 그 자체가 결여기포라고 표현해요. 인간은 항상 뭔가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서 눈을 번뜩거리면서 지금 헤매는,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는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같이 돌아다니는 거예요. 하이에나같이. 나는 그게 싫다고 산장에 올라가 굶어죽는 그런 표범이고 싶다. 미쳤어요? 왜 굶어죽어요. 이 도시의 밀림에서 하이에나처럼 살쾡이처럼 살피고 있는 거예요. 왜? 뭐가 결여됐는지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누굴 만나면, 친구를 만나든지 부모를 만나든지 유력한 자를 만나면 이렇게 묻습니다. 뭐 고상한 말을 하지만 그 내부는 이렇게 해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당신이 나한테 알려주세요.” 전부 다 정신병자죠. 내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내가 당신한테 뭘 원해야하는지 당신이 나한테 알려주세요. 왜? 내가 무엇이 모자라는지 내가 그것 자체를 몰라서 나는 지금 괴롭다고요. 사는 그게 어느 방향으로 가야 옳은지, 어느 길로 가야 그게 옳은 길인지. 어떤 길이 옳은 길이고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걸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보고 다른 사람이 조언을 해주죠. 조언을 해주고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고 인도하게 되면 그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자로 사기꾼입니다. 결여는 가르친다고 결여가 메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사기꾼이 안 되려면 이렇게 해야 돼요. 그냥 사세요. 결여된 채로, 모자라는 채로 그냥 사세요. 여보, 당신이 교회 다니고 복음 아니까 나도 이제 복음 믿을까? 그냥 사세요. 그냥. 교회 와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진작 교회가자고 했지. 그냥 사세요. 그냥. 이게 인간이 할 일이 아니에요. 그냥 사세요. 네가 다니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데 전도도 못하게 하느냐?
내가 욕망한다는 그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옛 시대의 인간들의 모습이에요. 옛 시대에 속한. 그럼 그 결여를 메우기 위해서 뭐냐 하면은 타인의 욕망에 내가 수긍하는 그러한 위장술을 보여요. 당신이 말씀만 하면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식으로. 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그럴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행여나 비어있는 자리에 당신이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굴게 되면, 내 비어있는 미진한 곳을 채워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어떤 거래나 그런 것 때문에 하는 거예요.
이것이 제가 방금 이야기할 때 ‘아, 인간이 옛 시대에 속한, 미완료된 인간의 심리가 이렇구나!’라고 하는데, 이게 단순히 심리 같으면요. 아,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이렇게 하는데, 이것이 단순히 심리가 아니고 세상에서 말한 유일한 현실이 바로 이 결여의 현실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두 가지의 법칙 하에 움직여요. 첫째는 자본주의의 제1법칙이라는 것이 있어요. 둘째는 자본주의의 제2법칙이 있어요. 제1법칙은 이래 돼요. 알파 이퀄 감마 곱하기 베타(?=r*?) 그다음에 제2법칙은 뭐냐 하면은 베타 이퀄 g/s(?→s/g)
자본주의 제1법칙에서 알파(?)라고 하는 것은 자본 소득. 감마(r)라고 하는 것은 자본수익률. 지금 8시간 째 성경이야기 하다가 이런 자본이야기 나오니까 확 땡기죠.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죠. 아는 이야기가 막 나오는 거예요. 베타(?)는 뭐냐 하면은 소득비율자본. 문자가 다섯 개 나오는 거예요. g는 뭐냐 하면은 저축률. s는 바로 성장률. 이래 되어 있습니다. 이 원칙, 법칙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자기가 투자한 자본의 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소득비율에 대비해서 자본 곱하기, 거기에 얼마나 수익을 올리느냐에 따라서 자본소득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은 옛 시대에, 미완료의 시대에 사는 이유는 그냥 돈 벌기위해서예요. 이게 법칙이에요. 법칙. 이 세상의 법칙이에요. 자본주의 시대의 법칙이 뭐냐 그냥 돈이 계속 벌어지는 쪽으로, 그쪽으로 그냥 가는 거예요. 넓은 길로. 멸망의 길이든 관계없어요. 이것이 우리가 가정을 떠나서 우리를 둘러싼 이 세대가 무슨 세대냐, 기성세대에요. 기성세대. 유동자본은 어디에 모인다? 주식에 모이는 거예요. 주식에 모이는 겁니다. 계란이 왔어요~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는 게 아닙니다. 포트폴리오. 한 바구니에 담으면 위험부담이 크다. 머리가 맑아지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라는 자아는 이 돈 버는 것으로, 내가 어느 정도 질적으로 우수한가가 이미 돈을 가지고 측정대상이 되고, 우리는 그 측정대상을 수긍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식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거예요. 이 돈이 안 벌어지면 기도하고 이러죠. 거대한 수레바퀴에 붙어있는 껌 딱지 같은 것이 우리 존재입니다. 껌 딱지. 먼지. 그 수레가 멈출 줄을 몰라요. 왜냐 하면 자본이 멈춰버리면 그 경제는 다 무너져요. 계속해서 굴러가야 돼요. 이게 신용사회이기 때문에. 신용은 없지만 미래에 있는 신용을 보고 지금 투자하는 거예요. 투자해서 언젠가는 투자한 몫은, 그 이윤은 나올 것이라는 게 이 법칙이에요.
자본수익률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알파 이퀄 감마 곱하기 베타(?=r*?), 베타(?)라는 것은 뭐냐, 저축률(g) 앞에 성장률(s), 저축률(g)과 성장률(s)을 나누는 거예요. 저축 대비해서 성장률을 하게 되면 그것은 자본수익률(r)에 그만큼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저축했는데 수입이 없으면 그러면 기대했던 자본소득은 별로 없는 거예요. 근데 이것이 법칙이 된다는 말은 이미 이 법칙의 생산물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공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실제적인 자본이 없으면 국가도 국가가 아니죠. 돈 없는 나라가 무슨 국가입니까? 돈 없는 가정이 무슨 가정이고. 돈 없는 사이가 무슨 부부사이가 되겠어요? 돈 없는 교회가 무슨 교회가 되겠습니까?
처음에는 순진해서 목사들이 비대면 예배, 동영상으로 보게 되면 꼬박꼬박 통장으로 헌금 제 때에 넣을 줄 알았죠? 해보니 오지도 않고 돈도 안 넣는 거예요. 사람 놓치고 돈 놓치고 다 놓친 겁니다. 처음에는 동영상 틀어놓고 반듯하게 옷 차려 입고 양복입고 했죠. 나중에는 파자마바람으로 돌아다니는 거예요. 인건비는 나가야지 수입은 안 들어오지. 미칠 지경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미완료가 끄는 힘으로, 미완료가 끄는 힘이라고 하지만, 미완료가 끄는 힘을 쉽게 말하면 이건 하나의 꿈이고 영원한 비전이고 이게 하나의 소망이고 희망이다 이 말이죠. 희망으로 끄는, 희망이 돈으로 측정이 되는 희망이죠. 돈으로 계산이 되는 희망.
그 희망, 그 사회, 이게 자본주의 사회에요. 우리는 그 사회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게 잠복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현대사회라면 그 당시의 사울과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1차원적인 농경시대에서의 생산물, 농업생산물을 크게 하는, 땅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라고 하는, 그 시대의 나름대로의 경제토대위에 사울 국가가 성립되는 거예요. 아까 사무엘상 8장 보셨잖아요. 왕이 하는 일은 너희들의 십일조를 자기가 다 받아서 왕궁을 단단히 해야, 외부에서의 침범에 대비를 할 수 있는 그런 상비군을 만들 수 있어요. 군사, 상비군을. 그들 월급 줘야 하죠. 치안 담당해야 되죠. 지금은 태양이 지구를 어떻게 돌아가느냐, 그거 아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태양이 지구를 도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 이야기가 돈이 되는 이야기냐, 돈이 안 되는 이야기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겁니다. 빤한 이야기인데 뭘 더 이야기를 해야 되겠어요? 미완료가 우리를 살게 만드는 거예요. 왜 사느냐, 왜 숨 쉬고 사느냐, 왜 있느냐, 돈 벌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사는 거예요. 잘 될 거야. 앞으로 잘 될 거야. 앞으로 내가 날개를 펴서 비상할 거야. 날거야. 전에는 쭈그려 앉았지만 나도 세상에 나가서 내 날개를 펼쳐야, 펼쳐봐라 이 말이죠. 펼쳐봐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죠. 뭐.
그러면 도대체 사울이 뭘 공격하느냐. 공격하면서 다윗에게 뭔가 차곡차곡 생기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왕 제도라고 하는 것은 사사제도와 제사장 제도를 통합시켜서 왕 하나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백성들이 성신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왕이 성신을 받고 왕이 율법을 지키면 그 혜택은 차별이 없이 골고루 다 주어지는 그 나라가 왕제도의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사사제도와 제사장제도는 다 해봤거든요. 사사, 제사장 다 실패로 끝났잖아요. 실패로 끝났다 이 말이죠.
사사도 일시적이고, 제사장도 자식만 챙기면서 자기의 일가를 이루면서 자기만 단도리 할 생각만 하니까. 이래가지고 실제적으로 외부의 적들이 왔을 때에 이스라엘이 전혀 반격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큰 지배를 받고 압제를 받으니까. 제사장이 무능한 제사장. 무능한 사사. 이거 말고 단회적으로 확고한 왕의 자리. 왕의 자리에서, 이 왕 하나 똑똑하고 잘나게 되면, 율법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왕을 보고 백성들이 골고루 하나님에게 선물을 받는 그런 이상적인 나라를 사람들은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사사 작살났죠. 제사장 작살났죠. 그 다음에 뭐가 작살났습니까? 왕 작살났죠. 전부 다 작살난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살아있으니까, 두 개의 왕이 등장해요. 두 종류의 구원이 등장해요. 하나는 언약의 완성된 입장에서 왕이 등장하고, 하나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말씀 지키고자 애쓰고 있는 미완료적인 왕이 등장하고, 두 왕 사이에 완료된 것은 수비만 하고 미완료는 공격만 해대는, 이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이 일을 통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시편 22편이니까 한번 봐야 되겠죠. 뭐 시편 22편이나 딴 것도 마찬가지지만. 한번 봅시다. 시편 22편.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자,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가면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이러한 하소연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완료와 미완료가 확정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완료된 자가 아무 영문도 없이 억울하게 미완료로부터 심한 구박을 받을 때만 나올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조성하셨잖아요. 만들어 내셨잖아요. 하나님. 그럼 하나님의 응답은 뭡니까? 내가 너의 자리를 경유해야 내가 나다운 거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결합은 반드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이 하나님과 결합이 되게 돼요. 결합이 됩니다. 그래서 이 고백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하셔요. 언제? 신약에 와서. 누가? 예수님이. 그래서 다윗 속에 누가 들어있다? 완료된 자가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들어있어요.
무슨 고백을 하면서?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버렸다는 것은 완료된 자만이 완료된 세계가 따로 있고 새 술 시대 따로 있고, 여기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는 옛 시대는 따로 분류되어서, 단절되어서 두 개의 층은 완전히 나누어졌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편 23편을 봅시다. 그렇게 해놓고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이 사망에 가도 완료! 이미 사망이 없는 곳으로 완료! 이래도 완료되었고 저래도 완료되었고. 어떤 환경과 배경으로 삼아도 거기서는 또렷하게 증명되는 것은 이미 다 이루심. 그것뿐이에요.
그 자리가 무슨 자리? 기름 부은 자리. 그 자리를 누가 와서 완료했습니까?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 기름 부은 자의 완료가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인 거예요. 목자가 비록 일당 8,530원인가를 받고 목자가 밤새도록 목자의 일을 해도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월급이 인상되는 것이 완성이 아니라 베들레헴에 가서 어린 아기를 볼 때에, 이미 그 사람은 직업이 목자가 되든 아니든, 퇴직했든 관계없이 그 사람은 완료에 속하는 겁니다. 목자지만 자기가 기뻐하는 것은 목자라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완료되었다는 사실. 하나님이 나에게 쳐들어왔다는 이 사실. 이거는 아기 예수를 보고 그걸 확인해주는 겁니다. 증명하는 겁니다.
본인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본인이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죠. 다만 완료된 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미완료에 둘러싸여서, 자본주의에 둘러싸여서, 돈을 벌어도, 벌어도 또 벌고 싶고. 돈이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붙은 껌 딱지처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에이, 그냥 남 따라서 가보고 남는 돈은 주식투자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그냥 가는 거예요. 도박판에 뛰어든 것처럼. 가면서, 계속 가면서 뭔가 낙이 있겠지. 5년 뒤에는 무슨 일이 있겠지. 5년 뒤에는 내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장담할게요. 5년 뒤에 더 늙어있어요. 이거는 제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고 장담합니다. 5년, 10년 뒤에 더 늙어있어요.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요. 이제 끝이 가까운 거라고요.
우리는 이미 수학적으로 벡터가, 화살표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죽음으로 가는 거예요. 무슨 희망이 있어요. 희망이 없어요. 미완료 자체가 희망을 용납을 안 하는데. 이 미완료 자체가. 그냥 자기 상상의 나래를 펼 뿐입니다. 결핍을 계속 다른 요소의, 만족하면 또 다른 쪽으로 결핍이 일어나는 거예요. 전교에서 1등하면 전국에서 1등해야지. 이래 나오는 거예요. 뭐 어쩌라고. 손흥민이 100골 넣으면 올해는 더 넣어야지. 이런 식으로. 토트넘 우승 한번 해야지. 트로피 한번 올려야지. 손흥민이 기계도 아니고요. 세상이 자기 맘대로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결여에서는 뭐냐 하면은 내 뜻이 뭘 공격한다? 주님의 뜻을 공격하면서 여기서 터져 나오는 고백은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과정. 이 과정을 주님이 주님답게 되기 위한 필수과정으로서 이렇게 완료된 자를 자기 사람으로 참여시키는 겁니다. 니가 내 고생을 앞당겨서 너도 한번 경험해보라고. 사울에게 그렇게 수모를 당하는 거예요.
특히 여기서 에봇을 입게 되는데요, 사무엘서에 에봇을 입는 장면이 두 군데 나와요.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아히멜렉 제사장한테 가서 떡을 달라고 하죠. 떡을 달라고 할 때, 이제는 에봇은 아니고 제사장이 먹는 음식을 자기가 먹어요. 그리고 9절에 보면 에봇을 가져갑니다.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그래서 다윗은 이미 왕으로서의 자기가 해야 될 일을 하고 있어요. 왕은 무엇의 결합? 제사장과 그리고 백성들을 기적적으로 구원하는 사사의 기능을 왕이 이미 통합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22장 18절에 보면 그로 인하여 무슨 불상사가 생기는데, 다윗을 도와줬던 아히멜렉 제사장과 85인 제사장들이 몰살합니다. 그리고 몰살하는 가운데 아비아달이라는 아히멜렉 제사장 아들은 구사일생으로 다윗에게 건짐으로 받고요. 간신배라고 나오는데, 도엑이라는 자가 있거든요. 이름도 좀 약간의 추잡하죠. 이 도엑이라는 사람이 찔러가지고, 고자질해가지고 제사장이 죽습니다. 하지만 도엑은 지금 어느 시대에 속합니까? 결여된 세계, 미완료된 세계기 때문에 마땅히 왕의 지시를 받아야죠.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다윗은 16군데나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계속해서 해나갑니다. 하면서도 여기 이상한 일은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25장 2절,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부자인데 이름이 나발이에요. 나발. 이 나발이 미완료에 속하기 때문에 다윗을 가지고 무시합니다. 요새 주인 버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니도 같은 인간이 아니냐? 이렇게 하니까 다윗이 너 죽었어, 해가지고 이렇게 가는데 부인되는 아비가일이 다윗이 새 시대에 속한 사람인줄 알고 포도주와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미리 마중을 나와서, “저는 다윗의 기름부음을 인정합니다. 당신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25장 26절로 죽 보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스스로 자기 남편을 디스합니다. 우리 남편의 이름이 나발이 아니냐. 요새 말로 하면 바보멍청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그거 뭐 상대할 가치도 없습니다. 저하고 상대해주세요. 제가 당신의 가치를 압니다. 이렇게 했는데 거기 25장 38절을 한번 봅시다.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한 열흘 후에 나발이 죽는데 누가 죽입니까? 여호와께서 죽여 버려요. 여호와께서. 다윗이 나발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그 다음에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완료가 되는 거예요. 다윗은 본인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속 완료됨을 알려주는 그 일에 참여한 거예요. 골리앗 그 전에도 마찬가지고 그 후에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시는 일에 우리가 참여할 뿐이지, 누구하고 우리가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뭐 저녁이나 먹으면 되는 겁니다.
'수련회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여름수련회 사무엘하속의 그리스도 "왕의 무대" (0) | 2021.06.25 |
---|---|
9강-이스라엘의 본질 (0) | 2021.01.16 |
7강-다윗의 등장 (0) | 2021.01.16 |
6강-기름 발린 자 (0) | 2021.01.16 |
5강-없음 (0) | 2021.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