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강-에스겔16장 15-22(행음)13061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6장 15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6:15-22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네가 네 의복을 취하여 색스러운 산당을 너를 위하여 만들고 거기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 하니라 네가 또 나의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또 네 수놓은 옷으로 그 우상에게 입히고 나의 기름과 향으로 그 앞에 베풀며 또 내가 네게 주어 먹게 한 내 식물 곧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을 네가 그 앞에 베풀어 향기를 삼았나니 과연 그렇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에게 드려 제물을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너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네 어렸을 때에 벌거벗어 적신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 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질책하는 것을 보면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가 현대인들은 개인 나름대로의 자기인생관이 따로 있어서 ‘자기인생은 자기가 살아간다.’는 입장이거든요. 그런데 성경본문은 개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집단적으로 너희가 간음했다, 음행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점이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한테는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나만 잘하면 되지, 라고 하는데 본문에서 음행을 했다, 음란을 많이 베풀었다, 우상에게 행음했다, 이런 이야기는 특정 개인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 전부가 그런 분위기에 빠졌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기만 잘하면 된다고 보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교육도 받고 그런 분위기속에 있는 우리가 어떤 집단자체를 평해 버리는 하나님의 그 평가에 대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평가하는데 흔히 우리가 ‘나 혼자 잘하면 되지.’라고 하는데 나 혼자 잘한다는 그자체가 아직 사태파악을 못해서 나오는 망발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시대의 환경이나 분위기를 도저히 헤치고 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에스겔 16장을 보면서, 저뿐만이 아니고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제일 난해한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책망하면서 비유를 하되 몸을 파는 창녀에 비유해서 우상을 섬겼다고 책망을 한다는 겁니다.
그 비유가 어떻게 몸을 파는 창녀에 비유하는지, 그 취지가 뭐냐는 겁니다. 그 점을 파악하는 것이 굉장히 난해한 겁니다. 에스겔 16장 6절에 보면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라고 되어있고 오늘 본문에서도 22절에 “네 어렸을 때에 벌거벗어 적신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 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아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적용은 이스라엘 전부에 적용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하는 것은 나 개인이 다른 개인과 비교해서 “하나님, 저 어때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라는 말이지요.
저 사람이 하는 사고방식과 내가 하는 사고방식이 이미 한통속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나는 달라, 나는 특별해, 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음란한 여인, 창녀라고 표현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룰 때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튀어나오는 몸, 이 몸을 가지고 다루시는 겁니다. 창녀의 특징이란 자기 몸을 파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것을 우리는 ‘아, 저 집은 사적으로 절에 가서 부처를 섬기더라.’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적으로 우상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네가 주체할 수 없는 몸의 욕망에서 나온 결과가 우상 섬기는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우상을 섬기는 것, 부처나 조상 숭배하는 그 집만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똑같은 몸을 가진 너도 같은 몸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너도 한통속으로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짓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두루 뭉실 합쳐서 “너희들은 창녀”라고 한꺼번에 언급을 하면서 그 평가를 때려버리는 겁니다. 하나의 창녀라고 규정을 지어버리고 너, 나 이런 구분을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같은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 “나는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해.” 같은 몸, 같은 코, 같은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몸은 아주 특별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죄 안 짓는 몸이고 욕망이 안 튀어나오는 몸인 듯 위장을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네가 가진 몸이나 내가 가진 몸이나 똑같은 몸이 되는 거예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주변국가가 우상을 섬기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우상을 섬기지? 우리는 여호와 섬긴다.” 당연히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그 심보, 정신상태, 마음상태가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 사람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튀어나오는 몸을 가지고 우상을 섬긴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방인들이 자기 몸에서 나오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서 우상을 섬기는 그 몸인데 너도 별난 몸이 아니라 똑같은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지요.
주제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저쪽 몸은 우상 섬기고 이 쪽 몸은 여호와 섬기고, 그것이 아니고 저쪽 몸이 우상을 섬긴다면 똑같은 몸으로 태어나는 이 이스라엘도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는데 너희들도 우상을 섬기면서 마치 여호와를 잘 섬기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제파악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경유해서 다시금 이스라엘을 스스로 되돌아보도록 만드는 겁니다. 저쪽보다 심하게 우상을 섬기니까 너는 창녀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창녀에 불과하니 창녀와 놀아나는 남자들은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보기에 우상이나 섬기는 남정네를 부러워해서 네 몸을 그 남자에게 파는 너도 똑같이 창녀가 되는 겁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특이한 점, 좋은 점은 뭐냐 하면 다른 민족은 같은 육체의 몸을 가지고 욕망을 태워도 창녀라는 말을 안 듣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서 이스라엘과 유다에게는 창녀라고 해 준다는 이 자체가 축복이 되는 겁니다. 네 주제파악을 하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리면 뭐냐, 남하고 비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15절에 보면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라고 되어 있고 14절에 “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똑같은 더러운 육체인데 옷을 예쁘게 입혔거든요. 하나님이 예쁘게 입혀놓았는데, 이쪽이나 저쪽이나 똑같은 더러운 몸인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입혀놓았는데 그 입혀준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입혀준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입은 옷을 벗는 경우뿐이거든요. 여자가 입은 옷을 벗는다는 말은 남자와 관계를 할 때만 옷을 벗게 되어있지요. 그러니 우상을 섬긴다는 것, 우상이란 여호와가 아니라 남의 나라 하나님이 아닙니까?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결국 전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입혀준 옷을 홀딱 벗어 팽개치고 저쪽 우상을 섬기는 쪽과 한통속이 되어서 뒹구는, 그것을 그리워하고 부러워하는 경우에만 창녀 짓이 되니 하나님의 준 그 사랑과 은혜는 어디서 찾느냐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옷을 벗겨버리니까 이스라엘이 오해하기를 이 옷은 원래 내 옷이고 옷을 벗어도 맨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는데 남자하고 관계한다고 하나님이 주신 옷을 벗어보니까 그야말로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전의 그 피투성이의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 거예요.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인간의 몸이 본래 지니고 있는 죄악 된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짓거리에 해당되는 짓입니다. 그러면 우상이 아닌 경우는 뭐냐, 이 더럽고 추잡한 더러운 몸을 하나님께서 곱게 입혀주신, 우리 주제에 맞지도 않는 곱고 귀한 장식과 의복을 만들어서 입혀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고마워하면서 입고 있는 것, 이것이 우상이 아닌 거예요.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주께서 입혀주신 옷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워지지 자기의 몸을 관리해서 아름다워지는 법은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새삼스레 알려주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한다면, 하나님께서 네 본래의 모습을 알려 주마, 하는 이야기에요. “옷을 걸치고 있다고 해서 네가 대단한 존재인줄 아는데 그러면 네가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내가 입혀준 옷을 홀라당 벗어서 집어던지는 짓이다. 자, 그 모습을 보자. 네 벌거벗은 몸이 얼마나 더러운가?” 이 벌거벗은 몸에서 나온 짓이 뭐냐, 20절에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에게 드려 제물을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너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이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이런 짓을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짓인데 그 짓을 했거든요. 그것과 같은 짓을 했다는 말은 그들과 같은 벌거벗은 육체성을 그대로 노출시켜서 욕망과 욕망이 만나서 한 이불속에서 뒹구는 짓거리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렸을 때 적신이었다고 했거든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입혀주는 것을 입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린애가 점점 커가면서 하나님이 예뻐하니까 인물이 좀 나더라는 말이지요. 어린애가 어른이 되고나니 하나님이 입혀주는 것은 귀찮다고 다 벗어버리고 육체가 커지는 동시에 욕망도 같이 크게 폭발하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의 본 모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서 이것을 덮어주니까 원래부터 자기가 잘난 존재인양 오해를 한 거예요. 지옥 갈 이방민족이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은 몸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계시를 주시는 것은 네가 처음 벌거벗었을 그 때의 심정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 때, 아무것도 없고 누군가 건사를 해줘야 겨우 사는 그 자리를 네가 잊으면 그것은 여호와를 잊는 것이 된다는 거지요. 좀 살만 하니까, 자기가 좀 대단하다 싶으니 하나님이 주신 귀한 은혜의 옷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내 나름대로 남들과 비교하면서 한 번 해 보겠다, 하는 것은 그게 바로 우상숭배요 음행이라고 주께서 단정지어버린 거예요.
방금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성경에 드러난 겉모습이거든요. 아직 제가 깊이 들어 있는 이야기는 안했어요. 17절에 보면 “네가 또 나의 준 금, 은 장식품”이라고 나오는데 하나님께 예쁘게 이스라엘을 단장해 준 것들이지요. 이런 것들을 주실 때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원래 취지가 뭔지를 이야기 안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시편 51편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성경을 어느 정도 봤고 백독이나 천 독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남에게 지은 죄, 담 타넘고 들어가서 도둑질 한 죄, 간음, 욕한 죄, 살인죄, 남 미워한 죄, 교통사고 일으킨 죄, 남을 폭행한 죄, 거짓말과 사기를 친 죄, 이것을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에게 한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편 51편 4절에 보면 기절초풍할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주께만 범죄 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범죄 했다는 것을 빼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너무 중요해서 숨이 막히고 말을 못할 지경입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사주한 거예요.
왜, 내가 사람에게 범죄 한 것이 아니고 주께만 범죄 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흐리멍텅 하게 만들기 위해서 마귀가 “나는 저 사람에게 못할 짓을 했다.”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사랑과 전쟁에 보면 나오잖아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아내가 실망했다, 할 때 “여보, 미안해! 내가 당신에게 잘못했어.”라는 깊이 있는 반성, 이런 반성이 마귀 짓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상상이나 해 봤습니까? 시편에 보면 다윗언약에서 성도는 오직 주께만 범죄 하지 절대로 인간에게 범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왜 그런가하면, 이스라엘은 남하고 비교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저 사람은 범죄 안했는데 나는 범죄 해서 남에게 피해를 입혔구나, 이런 짓을 하게 되면 본래 이스라엘이 이 지상에 나타내야 될 그 취지가 완전히 마귀에게 빼앗기는 것이 된다니까요. 이것은 진짜 어려운 이야기에요. 쇼킹하다니까요! 성도는 사람에게 죄지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성도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람에게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께만 범죄 하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만이 성도에요. 성령 받은 사람만이 그걸 알 수가 있어요. 사람한테 일체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바람을 피우든 뭘 하든 자기 마누라에게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바로 이런 차이성이 독특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창녀라고 하는 취지에 담겨 있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을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현금인출기에 서서 돈 뺄 때 절차대로 하면 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현금인출기는 그 인출기 앞에 선 사람이 이게 도둑인지 강도인지 어린애인지 병자인지 노인인지를 일체 묻지를 않아요. 사용법만 알면 현금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신을 원해요. 하나님이 복잡한 사용법을 주게 되면 우리는 그 매뉴얼대로 해서 돈을 찾는, 복이 나오는 신을 우리가 원하는데 바로 그 신이 우상이라는 겁니다. 어제인가 전화가 왔는데 보이스피싱이에요. 전에도 많이 받았어요. 현금인출기가 똑바로 해서 보이스피싱같은 것에 속지 말게 해야 되는데 보이스피싱이라도 현금인출기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돈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상은 사람의 됨됨이를 보지를 않습니다. 그저 사용법대로 하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검찰청입니다. 당신의 카드번호가 도용당했을 가능성이 있사오니 카드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또는 “당신의 아들이 교통사고 난 것이 맞습니까? 확인이 필요하니 주민번호를 대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이지요. “당황하셨어요?” 이런 것들. 그 나쁜 중국인들이 인출기 앞에서 해도 인출기는 돈 다 내줘요. 사용법만 알고 있으면.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 섬기는 것이 성립이 안 되고 창세기 2장의 원천을 품고 이 세상을 살아야 될 운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게 뭐냐, 에덴동산 중앙지점에는 사람이 못살고 그 중앙지점에 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악과나무, 하나는 생명나무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사람은 중앙을 차지 못하고 나무가 중앙을 차지해요. 나중에 선악과를 따먹으니 인간의 육체가 에덴동산에서 아예 추방을 당합니다. 인간의 몸은 이 나무한테 져요. 나무가 인간을 이겨요. 인간이 중앙을 차지 못한다는 말을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몸은 나의 중앙이잖아요. 이게 잘못된 거예요. 이게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서 죄지었기에 우리 자신의 몸을 우주의 중앙지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뒤에 몸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몸의 변화가 일어날 때 다른 몸이 와서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고 나무 때문에 그렇다니까요. 그 선악과라는 나무와 생명나무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은, 내 몸은 나를 위해서 있어야 되고 항상 나를 기쁘게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생뚱맞게 선악과나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생명나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몸은 들러리 같은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 본래 인간이 만들어진 취지입니다.
그 취지를 이방민족에게는 안 알려주고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알려줬으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보고 “너는 창녀”라고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인간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고 너는 주께만 범죄 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에게 어떤 범죄를 해도 주께만 범죄 한 것인 것을 모르게 되면, 인간에게 범죄를 했으니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이게 다 이방인들이 하는 우상숭배 짓이고 창녀 짓이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창녀 짓이 안 되려면 벌거벗었던 그 몸, 그 신체, ‘왜 나는 벌거벗은 채로 태어나야 했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벌거벗어야 되지?’ 그것은 하나님이 심어놓은 나무 때문에 벌거벗었다는 창세기 2장의 사건의 반복, 되풀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오늘날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주께만 범죄 했다는 겁니다. 사람한테 사과하면 칭찬받습니까? 한 예를 들게요. 한국과 레바논이 월드컵 예선전을 치른다 합시다. 한국 팀이 이겨야 하는데 근근이 1:1로 비겼어요. 그 때 사람들이 “한국대표팀이 실력도 없어서 월드컵이 간당간당 하는구나.” 하고 실망하는 겁니다. 또 예를 들어서 내 자녀가 다른 애들 합격하는 경찰채용 시험에서 떨어졌다면 속이 상하지요. 자, 그럴 때 “남 공부할 때 공부도 안하더니 잘 했다. 남들 다 취직하는데 넌 취직 언제 하고 언제나 결혼하겠나!” 하고 애 쥐어박을 때 아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아들은 주께만 범죄 했어요. 주께만 범죄 했는데 공부 못한 것을 가지고 닦달을 내버리면 그 애는 ‘나는 주께만 범죄 한 것이 아니고 세상 적으로도 잘 되어야 할 인간이구나.’ 하고 그쪽으로 가버리면 그 아들은 난 처음부터 벌거벗은 존재라는 것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입히고 장식하는 것은 주께만 범죄 한 유일한 이 시대의 아담, 그 때 그 시대의 아담이 지금 생생하게 살아 있는 아담으로서 주의 계시를 보여주기 위한 역할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다른 나라가 너무 잘사니까 그들이 믿는 식으로 신을 믿고 현금인출기에서 시키는 대로 그대로 남들 하는 대로 하게 되면 그것이 인간사는 것인 줄 알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창세기 2장 3장을 의도적으로 가려버리는 악마의 짓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할 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입혀주고 장식해준 그 은혜를 놓치게 되는 현상이 되는 겁니다. 창세기 3장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뭘 느끼셨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몸이 부끄럽게 되잖아요.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담이 어디 있느냐” 하잖아요. 그 뒤에 하나님이 어떻게 했다는 내용을 우리가 모른다 치고요, 몸이 전 같지 않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면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이렇게 합니다. 무화과 잎 치마를 벗겨버리고 다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몸으로 바꿔주면 되잖아요. 여러분은 그런 생각 안 해봤습니까? 하나님께서 무화가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벗겨버리고 창세기 2장으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벗어도 부끄럽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조치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렸던 그 자리를 자신의 가죽옷으로 대신 입혀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원상복귀를 원하나 하나님은 장차 인간의 죄를 용서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목적으로 인간을 계속 활용하고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겁니다. 성도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산다, 맞지요?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그 뜻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살아 있는 주님이 나에게 뭘 해줬는가? 가죽옷을 입혔다는 겁니다. 왜, 더욱더 부끄러워하라고. 우리는 주께만 범죄 했다는 것이 모든 범죄에 앞서서 범죄 한 연결고리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뤄줄 때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는 도화지고 주께서 백지에 그림을 그릴 때 그 백지에 이미 그려진 그림이 있기에 그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같으면 가죽옷을 입혀야 되고 가죽옷을 입었다는 말은 “우리는 가죽옷이 없으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벌거벗은 인간이고 우리는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죽옷으로 분명하게 확인하고 또 새기고 또 새기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아침에 눈만 뜨면 가죽옷부터 챙겨야 돼요. 자기가 만든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 말고, 다른 사람들이 다 입는 그 옷 말고, 주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만,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그 가죽옷을 챙겨야 돼요.
그것은 일종의 애들이 차는 기저귀지요. 기저귀를 차야 돼요. 기저귀를 차고서 돌아다녀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대외적으로 “우리는 주께만 범죄 했기에 주께만 범죄 한 것에 합당한 그 죄만을 용서받은 증거를 우리는 존재의 이유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의미로서 차고 다녀야” 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그것만을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하는 그 사실, 주님께서 그렇게 나를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을 증거 해야 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너무 이방인이 잘 사니까,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잘 사니까 “에이, 주님 주신 것 벗어버리고 세상 것 가지고 그것으로 기저귀 삼아서 세상 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그런 힘이 들어 있는 옷을 입고 세상 사람과 같은 사람 되어서 부끄러움을 해소하겠다.” 할 때 그것을 가지고 음행이라고 단정하시는 그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존재이유가 원천으로 다시 돌아가 깨닫게 하옵소서. 남들처럼 못되었다고 기죽을 것이 아니고 남들이 차고자 해도 찰 수 없는 가죽옷을 입었사오니 이 의미가 무엇이며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우리는 평생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