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28 - 연결된 몸통
21,05,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중보자의 오심 !!
오늘은 교재 10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중간에 보면 '중보자' 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중보자는 제시하셨다는 말이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은 중보자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에 의해서 여자의 후손으로 중보자가 오고, 그렇게 중보자가 오셔야만 뱀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이죠. 뱀의 후손이 말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인간은 중간에 등장해 !!
인간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냥 들러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니 이 세상의 모든 것들도 움직이는데, 일들이 자꾸만 생겨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중보자가 움직임으로 말미암아서, 진리에서 진리로 가는데 있어서 그 중간이 출몰한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나' 라는 것인데, 그러니 진리가 진리대로 전개가 되는 과정에서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중도의 존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중간에 등장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처음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리고 인간은 마지막도 전혀 아닌데, 그렇지요? 그래서 인간은 나타났다가 소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 인생과 바둑 !!
혹시 여러분 가운데 바둑을 두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 바둑판을 보면 인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작나무로 만든 바둑판이 제법 비싼데, 거기에 가로 19줄과 세로 19줄, 그렇게 선이 그어져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361개의 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두 사람이 앉아서 바둑을 둔다는 것이죠.
물론 아마추어들은 30분이면 한 판이나 두 판도 두는데, 프로 기사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현재 세계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는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까, 우리나라는신진서이고 중국은 양딩신인데, 그 두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잘 둔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바둑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실컷 두고 나서 그만 밀어버린다는 겁니다. 이게 마치 인생과도 같은데, 즉 실컷 살았는데 소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죠. 판도 그대로 있고 알도 그대로 있고 사람도 그대로 있는데, 그런데 무엇인가가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다는 겁니다.
* 누가 누가 잘났나?
바둑게임을 하니 승부욕이 발동하는데, 그런데 그 바둑게임이 끝나고 나면 주섬주섬 돌을 다 걷어서 없애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바둑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생에서 보면 "네가 똑똑하냐? 내가 똑똑하냐?" 라는 것인데, 그것을 견주기 위해서 어떤 룰을 가진 게임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둑을 만든 것인데, 중국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네가 똑똑하냐? 내가 똑똑하냐?" 라는 것을 가리기 위해서 어떤 환경이 있어야 하는데, 그 환경을 바둑이라는 게임의 룰을 통해서 둘이서 몰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바둑을 두고 난 다음에 "나의 백집은 56집, 네가 맏는 흑집은 49집이다. 이것을 한국바둑의 룰로 6집 반을 공제하고 나면, 내가 반집을 이겼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들이 바둑 한 판을 두는데 있어서, 거기에 걸려있는 상금이 무려 1억이라는 겁니다. 보통은 제한시간은 3시간, 초읽기는 1분, 그렇게 해서 바둑을 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나중에 2판, 혹은 3판으로 늘어나게 되면, 상금이 무려 3억까지도 올라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확인하는고 하니, "네가 나보다 똑똑하다면 이 바둑판으로 승부를 걸자"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누군가가 이긴 것으로 결정이 되면 바둑판에서 바둑알은 다 없어진다는 것이죠. 그렇게 두고 쓸어버리고, 두고 쓸어버리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비트겐슈타인 - '이 세상은 게임판이다' !!
그러면 결국 인생이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잘났다" 라는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세상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인간이 나설 때는 무엇을 증명하기 위함인고 하니, 당연히 '자기 잘남' 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은 그런 게임판이라는 겁니다. '비트겐슈타인' 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이것을 밝혀서 사람들이 경악했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게임에서 지지 않는다" 라고 하는 자기 잘남을, 그런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진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중간에서 출몰해서, 인간은 그런 중도의 존재로서 평생 게임만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게임에서 자기는 패배자가 아니고 승리자라는 욕망을 평생 달성하다가 세월을 보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바둑이 끝나면 바둑판에서 돌이 다 사라진다고 했는데, 그게 인생이라는 말이죠. 아무리 게임에서 이기도 또 이겨도, 지금 삼성그룹만큼 게임에서 이긴 경우가 없는데, 그래서 돈이 제일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건희가 어디에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진리라는 것은 최초인데, 그런데 인간은 중간에 등장했기에 그 최초를 모른다는 겁니다. 나중도 진리인데, 그런데 인간은 그 나중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은 최초도 모르고 또한 나중도 모른다는 겁니다. 인간은 중간에 출몰했는데, 즉 중간에 나타났다가 중간에 사라진다는 말이죠. 잠시 출몰했다가 사라진다는 것이죠.
* 그것이 곧 중보자를 아는 것 !!
그러면 처음과 나중의 진리성,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 중보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중보자를 만난다고 하는 것은, '나' 라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헛짓을 하면서 인생을 보낸다는 것인데, 그것을 아는 것이 곧 중보자를 아는 것이란 말이죠.
그 헛짓을 제가 방금 바둑을 가지고 예를 들었는데, 즉 "나를 그냥 나가 아니라, 잘난 나로 증명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 글자로 헛짓이라고, 즉 그런 것이 다 헛된 짓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게임은 예수님과 마귀 사이에서 하는 것인데, 그 게임에 우리 인간이 주인공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냥 시다바리인데, 즉 보조역할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인공이 그 게임에서 이기게 되면, 그 보상과 그 혜택은 중보자에게 속했던 사람들에게 공짜로 주어지는데, 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는 말이죠.
* 죽음을 이겼다 !!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는데, 그래서 그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죽음을 이겼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겼다는 것은 게임을 벌렸다는 의미라는 것이죠. 죽음은 저주인데, 그렇다면 저주와 심판에서 이기지를 못했다고 하면, 그러면 어느 쪽에 가게 됩니까? 이기지 못한 쪽에 합류하게 되는데, 그러면 저주와 심판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 대상이 바로 예수님과 한 판 붙었다가 예수님의 발뒤꿈치만 깨물고 머리통이 박살나고만 뱀인데, 그러니 뱀은 영원히 굴복이 되어야하는 존재라는 말이죠. 그러면 뱀에게 붙어야 있는 자들도 당연히 모두가 패배자가 된다는 겁니다. 결코 승리자가 아니라는 것이죠.
* 루저, 부자 !!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가 나오는데, 그는 살아있을 때 승리자였다는 겁니다. 앞에 살고 있는 거지보다는 말이죠. 그러나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가서 승리자가 되고, 부자는 그만 지옥불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 지옥에서 부자가 뭐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에게 요청하기를, "나는 이미 이 게임에서 졌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요즘 영어로 '루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부자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나에게 남은 동생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이렇게 지옥이 있다는 것을 좀 알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이미 지옥에 온 사람은 다시 세상에 나가서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눅 16: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왜냐하면 인간은 중보자가 아니고 중도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끝장이 났으면 중보자의 기능에 있어서 인간은 이미 탈락이라는 말이죠. 중보자의 기능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즉 시작이 무엇이며 끝이 무엇인지, 그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다른 인간들은 안 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인간들은 안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다른 인간들은, 인간은 중간에 출몰할 때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매여있기 때문에, 그래서 시작과 끝을 제대로 증거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마지막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증거할 것 같지만, 그것을 증거하는 과정 속에서 무엇이 여기에 결합이 되어있는고 하니, "이런 것을 증거하는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용도로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것이죠.
* 복음전파는 중보자의 고유한 능력 !!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자기 능력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와야만 하는데, 자기가 아무리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자기 능력으로는 복음이 전파될 수 없다는 말이죠. 이것은 중보자 고유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으로 시작한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으로 끝이 나고 마감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거기 중간에 인간이 개입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시간에는 왜 중보지만이 할 수 있는지, 왜 우리는 복음을 알아도 그것을 전파할 수 없는지, 그것을 강의초반에 살펴보고자 한다는 말이죠.
여기 교재 102페이지에 보면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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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선조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나는 분명히 따먹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조선시대의 이항복(1556~1618)은 경주 이씨의 시조가 됩니다. 이항복이 어릴 때부터 야무졌다고 하는 뜻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8세 때의 일인데, 자기 집 감나무의 가지가 옆집 대감의 담을 넘어가서 그 감을 따기가 곤란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옆집 하인들이 "담을 넘어온 감은 우리들의 소유다" 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이항복음 직접 그 대감을 만나러 가서는 자기 주먹으로 그 집의 문 창호지를 그만 뚫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묻기를 "이 주먹이 뉘 주먹입니까?" 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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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이항복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린 아이라도 참으로 똘똘한데, 제가 바로 그 경주 이씨라는 겁니다(ㅋㅋ).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무엇인고 하니, "이항복 주먹과 이항복 몸통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있다" 라는 것인데, 이게 정말로 중요하다는 말이죠.
* 하나님과 몸통이 연결된 새로운 인간의 등장 !!
제가 칠판에 쓰겠는데, 즉 "하나님과 몸통이 연결된 새로운 인간의 등장이다" 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중보자' 라는 말이죠. 이항복이 자기 주먹으로 창호지를 뚫고 나서, "이 주먹이 제 주먹입니까? 대감님의 주먹입니까?" 라고 했는데, 얼마나 똑똑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과 그 몸통이 끊어졌다는 것인데, 그래서 인간들은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고, 그냥 악마의 마음을 그대로 인수를 받아서, "나는 잘났다" 라는 게임을 하면서 평생을 다 보내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잘났을까? 못났을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심지어 착함도 잘남의 주특기에 속하는데, 겸손한 것도 그렇고, 믿음이 좋다는 것도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다 자기 믿음이 좋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이야기라도 다 자기에게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면, 그리고 중보자에 의해서 등장한 성도의 경우에는, 하나님과 몸통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죠. 마치 이항복처럼 말이죠.
우리가 성도가 맞다고 한다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과 몸통이 연결되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건드리면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다. 나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면 예수님에게 대접한 것이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 자가 양이고, 그런 자가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 죽음의 의미를 몰랐던 인간 !!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주의를 주셨는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다른 나무의 열매는 다 따먹을 수 있다. 그러나 선악과는 따먹으면 죽는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은 이 '죽는다' 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아담은 죽어보지 못했으니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죽는다' 라는 것은 하나님과 몸통이 끊어지는 것이었는데, 즉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 곧 죽음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진리로부터 단절이 된 것인데, 그것은 악마의 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모르고 뱀의 후손인 악마는 모든 것을 알고, 천상회의에서 악마가 하나님 옆에 있었기 때문에 다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마귀에게 농락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마귀는 인간에게 신처럼 대우해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즉 "너는 신이야. 그러니까 신답게 굴어. 네가 최고야. 그것을 이 세상이라는 게임판에서 증명해라"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 나는 너와 다르다 !!
인간들 세계의 모습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너와 다르다" 라는 것인데, 인간들은 이런 생각에 완전히 꽂혀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다르다고 하는 것은 남을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최고라는 것인데, 즉 "나는 나 하나로서 충분하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 "추잡하고 더럽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성경은 세상 전체를 하나로 보는데, 정작 이 세상에서는 자기를 챙기고, 자기가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너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소중하다" 라는 의식을 평소에 가지고 있다고,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가동이 된다는 겁니다.
* 망가지는 제사 제물들 !!
하지만 성경은 그게 아니고,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추잡하고 더럽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레위기에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법이라는 말이죠. 인간들이 얼마나 지저분했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인간들을 씻어내는 재료가 어떠합니까?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제물들의 모습이 그야말로 흉측하다는 겁니다.
제사 제물을 누가 잡는고 하니,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잡는데, 제사장은 피를 뿌리는 일을 한다는 말이죠. 직접 다리를 꺾고 고기를 발라내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양이나 소를 잡으면, 그 짐승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게 잡으면서 그런 감정을 느껴보라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집에서 키우던 애완견을, 요즘은 반려견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가 키우던 개나 고양이를 교회에 데리고 와서 직접 한 번 잡아보라는 겁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자기 아들을 잡았는데, 그러면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우리는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하지만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는고 하니, 그 죄를 씻기 위해서 동원된 방법이라든지, 혹은 그 재료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그런 것을 보게 되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의 처지를 대변해주면서 망가진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지금 문밖에 죽음의 사자가 와서 "이제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지옥에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는 방법은 아버지의 피를 발아야 합니다" 라고 했을 때, 그래서 자식들이 아버지를 죽여서 피를 발라서 문에 붓으로 마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피를 가지고 떡칠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피로 다른 식구들이 살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식구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문을 열 때마다 발린 피를 보게 되는데, 그러면 "아버지가 죽지 않았으면 나는 지옥에 갈 뻔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쁘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자기가 얼마나 무용지물인지,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죠.
* 어린양의 피를 발라라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시켰는데, 즉 "어린양의 피를 발라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애굽 사람들은 피를 바르지 않았는데,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상당히 정상적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과격하기도 하고 매우 도발적이라는 겁니다.
* 십자가 사건 !!
칠판에 적어보겠는데,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인간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푸는 사건을 두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십자가 사건'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가 요구하는 해석을 원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우리 인간은 이 땅에 나와서 무슨 게임을 한다고 했습니까?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임을 한다는 말이죠. 그게 이 세상인데, 그런 이 세상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불쑥 어떤 분이 들어오셨는데, 그런데 이 세상은 자기 잘남을 증명하는 것만 용납되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잘남을 진실이고 진리라고 보는데, 그런 진실과 진리를 찾고자 한다는 말이죠.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다 마찬가지인데, 유대인들은 이적을 통해서 찾고자 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통해서 찾고자 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성경을 얼마나 교육을 많이 받는지 모르는데, 그리고 헬라인들도 철학적으로 신을 규명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말이죠.
신은 무엇이고 자연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지, 복음이 들어오기 500년 전에 이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그렇게 다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철학'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는 과학도 이 철학 안에 다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진실을 원하고 찾는 자가 누구인고 하니, 그것은 인간인데, 그런데 십자가 사건의 입장에서, 인간이 볼 때는 거짓은 누가 이야기한 겁니까? 인간이 자기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진실이란 개념을 만들어내었고, 그 개념에 맞추어서 진실만은 찾고 있을 때, 그것을 완전히 뒤엎어버리고 거짓이라고 이야기한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하나님인데,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 사건을 믿는 자를 두고 성도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십자가 사건을 감추는 교회 !!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닌데, 밥이나 먹고 살면 조용하게 흘러갈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이 십자가 사건이 터진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그게 대한민국이라는 겁니다. 왜 교회가 십자가 사건을 감추고 있는지 이제 알겠지요?
교회에 나오는 고객들이 무엇을 원합니까? 그들이 십자가를 원합니까? 그게 아니라, 진실된 하나님을 원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남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교회에 나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게 교회에 나오는 이유라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복을 달라고, 능력을 달라고, 돈을 벌게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몸도 아프지 않고 가정도 화목해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남들보다 잘났다는 것을, 그렇게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서는 중보자도 바꾸고, 복음도 바꾸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해야 교회가 장사가 된다는 말이죠.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눈에서는 번개가 치는데, 그것은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라는 배틀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게 두 사람이든 세 사람이든 간에, 몽땅 다 추잡하고 더럽다는 말이죠.
그게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이고 제사법인데, 그야말로 추잡한 것들이 서로 잘났다고 하면서 바둑을 두듯이 게임을 벌리고 있다는 겁니다. 오래 만에 만나면 "너거 아들이 고3이었지? 이번에 어디에 들어갔노?" 라고 하는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 게임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바로 거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분, 마치 이항복처럼 몸통과 연결된 분이 오셨다는 겁니다. 바로 그분은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무엇과 몸통이 연결되었다는 겁니까? 하나님과 연결이 되었는데, 그것을 예수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라고 하셨는데, 하나라는 것은 둘이 아니라는 말이죠. 연장이 되고 연결이 되었다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 그러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참으로 신기한 이야기인데, 이러한 신기한 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즉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라는 것인데 말이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그러면 아담의 100대손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아담의 100대손은 선악과를 따먹었기는커녕 구경해본 적도 없다는 말이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는 100대손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데, 나중에 태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출몰하고 난 다음에,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한 몸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아담 바깥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새끼를 쳤다는 겁니다. '아담' 이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시스템은 그래도 유효하다는 말이죠.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두 번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룰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는 아담에게 속한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에게로 이동하느냐는 것인데, 성경으로 보면 그게 최고의 난제이고 관건이라는 말이죠. 즉 "아담에게 속한 자가 어떻게 예수님에게 속하느냐?" 라는 겁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풀 수가 있는데, 지금 바깥에 비가 오고 있는데 말이죠. 주님은 놀고 있는 것이 아닌데, 주님께서 비를 주시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비를 맞는다고 해서 아담에게 속한 우리가 예수님에게 속해지는 겁니까?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 그저 남산 위의 노루새끼들처럼 !!
저는 할머니만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그때는 방 하나에 삼촌들과 같이 7식구가 같이 생활하고 잠도 같이 잤다는 겁니다. 그 옆에 부엌이 있는데, 그런데 새벽마다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궁금해서 문을 빼꼼히 열고 보면, 거기에서 할머니가 종이를 태워서 공중으로 올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탄 종이가 땅에 내려오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물론 열의 대류현상에 의해서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가는 현상이지만 말이죠. 그러면서 "우리 자식들이 남산 위의 노루새끼들처럼 잘 뛰놀게 하시고, 무탈하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하면서 가마솥 앞에 정화수를 떠놓고 빈다는 겁니다. 항상 같은 문구를 반복했는데,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는 말이죠.
하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두 손으로 빈다고 해서 아담에 속한 할머니의 자식들이 예수님에게 속하는 것이 아닌데,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오늘 강의에 의하면, 할머니의 경우에는 "오늘만큼은 게임에서 우리 새끼들이 잘났음을 보여주세요"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할머니는 삼신 할머니에게 빌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이 하나님에게 비는 것과 그야말로 똑같다는 겁니다. 성경에는 전혀 없는 것인데, 그것을 교인들이 하고 있고 또한 목사들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의 할머니들이 부엌에서 이미 하고 있던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비가 와도 안 되고, 빌어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고 하니,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셨기에 우리가 아담에서 예수님에게 속하게 되었느냐는 말이죠. 여러분이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 우리는 죽이시는 하나님 !!
그것은 바로 '죽음' 인데, 우리를 죽이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전혀 한 통속이라는 것이죠. 물론 우리는 선악과를 구경도 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태어나보니 자기와 연결된 그분이 모든 태어난 후손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그런 시스템 안에 우리가 놓여있었다는 겁니다. 그 시스템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비가 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듯이, 오늘날 우리를 아프게 하고 또한 늙어서 죽게 만드는 것, 그것이 누구의 일이라는 겁니까? 그것을 성도가 아는데, 즉 중보자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손을 대고 있다는 말이죠. 놀랍게도 보이지 않는 주님이 우리 안에 일을 벌리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너는 아담 안에서 죽고" 라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아담 안에 없다는 말이죠.
물론 육신이 있는데, 어디까지나 그것은 껍데기라는 겁니다. 창세 전에 예정된 사람의 경우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무엇이 보이는고 하니, "내가 아담 안에 속했었구나" 라는 것, 그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말이죠.
* 인간이란, 납작한 종이인형 !!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이것도 알아야 하는데, "그래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주장하면 곤란하고,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방금 껍데기라고 했는데, "인간이란 납작한 종이인형과도 같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초등학교 앞에 있는 문구점에 가보면, 종이에 인형모양을 인쇄해놓았는데, 그러면 그것을 오려서 인형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니 앞에서 보면 얼굴과 팔다리가 있지만, 옆에서 보면 폭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엄마와 아빠로 나누고 해서 소꿉놀이를 한다는 겁니다.
* 물집과 자아 !!
방금 제가 폭이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악마의 세계에서는 폭이 생긴다는 말이죠. 이것을 '자아' 라고 하는데, 저는 이것을 "물집이 생긴다" 라고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종이인형에 물집이 생기는 것을 보신 적이 있어요? 그럴 일이 없는데,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아가 생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아는 납작한 종이인형에 생기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그런데 선악과의 효과로 인해서 인간은 납작한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의 자기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피곤하면 몸에 물집이 생기는데, 그러면 그것을 바늘을 가지고 터트리는 되는데, 그리고 나서 몇 시간만 지나면 피부가 달라붙어서 괜찮아 진다는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주님께서는 바늘을 가지고 우리에게 날마다 생기는 자아를 톡톡 찔러서 터트린다는 말이죠. 납작하지 않고 부풀러져 있는 풍선의 경우에, 그 바람을 빼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간단한데, 그 풍선에 바늘을 가지고 톡 찌르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시편 119편 67절을 보겠습니다.
(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여기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물집, 즉 자아가 생겨서 그렇다는 겁니다. 자아의 특징은, 자기 잘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가서 게임을 벌린다는 말이죠. 비교를 하는데, 즉 "나냐? 너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전부가 다 더럽고 추잡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라고, 이 세상을 두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오늘따라 바깥이 참으로 조용한데, 그렇게 조용하니까 또 이상하다는 말이죠(ㅋㅋ).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 물집을 터트리는 주님 !!
고난이란 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런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일부러 고난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죠. 즉 물집을 터트린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탓할 문제가 아니라, 자기에게 생기지 말아야할 것이 생겼다는 말이죠. 그것을 주님이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내 안에서 주님의 일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죽음이란 말이죠.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지 않으면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래서 죽이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의 일은 죽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이 '나', 즉 자아를 죽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물집을 자꾸만 키우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했는데, 물론 우리는 선악과를 구경도 하지 못했지만 조상인 아담과 한 몸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는다는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은 그 위력, 그 테두리 안에 계속해서 놓여있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 10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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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생각하는 스케줄이 아닌 다른 인생 스케줄이 덮칠 때, 우리는 그게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케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이 됩니다. 그래서 '나' 라고 하는 인생 자체가 없어지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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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들는 "나는 악마에게도 연결이 되어있지 않고, 주님께도 연결이 되어있지 않다. 나는 나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허용한 적이 없다는 말이죠. 아담에게 속하든지, 그게 아니면 주님에게 속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중도에 출몰한 존재임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라는 말이죠.
제가 왜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이 세상 자체가 거짓인데, 악마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작부터가 "나는 누구에게 매인 적이 없어요. 매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게 물집인데, 그래서 바늘로 콕 찔러야 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종이인형과 같은 존재인데, 그런데 그런 존재에 그만 폭이 생겨서 종이인형이 아닌 풍선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나중에 바람에 다 꺼지는 것이 지옥에 간 어리석은 부자인데, 그래서 "내가 인생을 헛살았구나" 라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자기밖에 모르고 자꾸만 살려고 하니,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래서 중보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데, 어떤 식으로 보내시는고 하니, 첫 번째는 하나님과 몸통이 연결된 인간의 등장이고, 두 번째는 스스로 파괴되는 시스템을 중보자가 가지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인데, 이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 스스로 파괴되는 시스템 !!
그러니 예수님은 이 땅에 살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스스로 죽으려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데, 즉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스스로 파괴되는 시스템을 하나님이 가동을 시키니, 이미 악마에 속한 그 어떤 누구라도 예수님을 결코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그래서 사람들은 "뭐야? 왜 스스로 죽고자 하는 거야? 자기는 죄가 없다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면서? 그러면 하나님이 살려주겠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제가 만든 것이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 구경을 가보자. 하나님에게 온 사람은 하나님이 가만히 있겠나? 살려주실 거야. 엘리야를 보내주실 거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것이 실제인지 보기로 했는데, 하지만 주님은 그냥 파괴되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악마에게 그냥 장소만 제공할 뿐이라는 말이죠. 주님은 스스로 파괴된 그 시스템에 구원받을 백성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 안에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면,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무너진 그 시스템을 우리 안에 설치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불신자들은 버티려고 애를 쓸 것이고, 반면에 성도는 자기가 죽어서 이 땅을 제대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시스템이 가동이 되니까 그렇다는 말이죠.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가 전혀 아닌데, 사람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것을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부에 율법이라는 시스템을 가동시키셨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민수기 15장을 보겠는데, 32절에서 36절입니다.
(민 15: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민 15: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민 15: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민 15: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민 15: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나무를 하면 돌로 쳐죽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여러분이 길가는 사람을 잡고, 불신자에게 여기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과연 이것이 합당하다고 하겠습니까? 불신자에게 묻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안식일이 있다는 것이 문제야 !!
그러면 똑똑한 불신자는 다음과 같이 나오는데, 즉 "그런 안식일이 있다는 것이 문제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안식일이 없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나무를 해도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불신자의 해석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죽지 않는 쪽이 진실이 된다는 말이죠. 더욱이 그렇게 해서 죽은 자가 자기 동생이라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학원강사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계속해서 가르쳐야 합니까? 그게 아니면 잠시 휴강하고 집에 와야합니까? 집에 와야하는데, 왜냐하면 죽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일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어머니가 안식일 때문에 죽는다고 하면, "안식일, 너 나와봐. 내가 죽여버리겠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안식일을 보고 나오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곧 안식일을 만든 하나님을 보고 나오라는 소리라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터졌다는 겁니다.
* 예수님, 사랑합니다 ??
이것이 우리가 아는 현실인데, 이 현실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 어떤 인간이든 단합해서 하나님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스템을 예수님은 이 땅에 가지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자기 무너짐을 넘어서서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십자가를 좋아합니다" 라고 하겠느냐는 말이죠.
자기를 파괴시키는 십자가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12제자들도 모두가 다 도망을 갔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즉 진리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우리가 이 땅에 출생했다는 증거라는 말이죠.
성도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는데, 즉 "나는 전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공부를 좀 했다고 하는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뭐라고 나옵니까? "나는 모르겠다" 라고 하는데, 물론 그게 정답은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기에, 죽어 마땅하고 망해도 마땅합니다" 라고 해야하는데, 모르겠다고 발을 뺀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 선악과는 없고 생명나무만 있는 낙원 !!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준비하셨는고 하니, 이게 세 번째라는 겁니다. ①첫 번째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 몸통의 등장인데, 그런 몸통이 되는 인간, 그게 중보자라는 말이죠. ②두 번째가 중보자가 어떻게 오셨는고 하니, 스스로 파괴되는 시스템을 가지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선악과 열매는 몇 개였습니까? 한 두 개가 아닌데, 많이 열려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미 훼손이 되어버리면 무엇이 충족이 됩니까?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에는 '따먹어라' 라는 지시와 '죽는다' 라는 벌칙이 결합이 되어있어서, 그래서 따먹게 되면 이미 선악과나무는 하나님 쪽에서 밀어내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계선이 어디인고 하니, 선악과나무는 없다고 여기고 생명나무가 있는 쪽으로 경계선을 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③세 번째에서는 무엇이 중요한고 하니,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없는, 즉 선악과는 결핍되고 생명나무만이 있는 낙원을 만드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에는 선악과나무도 있었고 생명나무도 있었는데, 그런데 나중에 천국에 가는 자들의 경우에는, 선악과는 없고 생명나무만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나오는데, 거기에는 생명나무만 있다는 것이죠.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결핍된 존재로서 천국에 !!
그러면 과거의 에덴동산처럼 선악과나무도 있고 생명나무도 있는 곳이 아니라, 이제는 선악과는 없고 생명나무만 있는 곳으로 가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 자신은 결핍된 존재라는 겁니다. 즉 "나는 결핍된 존재로서 천국에 들어간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기 잘남을 증거하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결핍된 존재인데, 그런데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에 가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처음과 나중을 비추어볼 때 자기는 모자란다는 것을, 즉 결핍된 존재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게 참 중요한 문제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자람을 채우려고 한다는 말이죠. 완전한 자는 중보자가 되시는 오로지 예수님 한 분밖에 없고, 그분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장자가 아니라는 말이죠.
생명나무만 있어주어야 계속해서 무엇을 지적할 수 있는고 하니까, 선악과 훼손에 관한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천국에만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지적받는 동네는 무슨 동네입니까? 바로 지옥인데, 선악과를 따먹어서 영원토록 저주를 받는 동네라는 말이죠. 그러니 지옥을 지옥답게 하기 위한 천국의 출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따로 지옥따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 있어야 되는 이유를, 천국은 그 권한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주님, 왜 저를 불쌍히 여기십니까?"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결핍된 너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권한은 나에게 있다" 라고 하시는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천국에 넣어주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나의 사랑으로 천국에 왔다" 라는 것인데, 세리와 창기가 바로 그들이라는 말이죠. 많이 용서함을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백성은 자기 얼마나 모자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래서 주님의 사랑 앞에서 감지덕지하게 된다는 것이죠.
* 생명나무의 스스로 충만 !!
조금 전에 살펴본 시편 119편 67절에서,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스스로 결핍이 아니라 충만하다고 여겨서 까불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자아를 그만 풍선을 터트리듯이 터지게 하시니, 그러면 "아하, 나는 주님의 종이인형이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주님이 사용하시는 대로 사용이 되는, 일종의 노리개일 뿐이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아' 라는 자기의 물집이 터지고 나니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지 모르는데, 너무나도 가볍고 행복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피조물다운 모습인데, 즉 결핍된 존재로서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 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④하늘나라에는 선악과나무가 없는데, 그 없는 자리가 무엇이 박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주님의 자기 백성으로서 보충이 된다는 겁니다. 즉 "죄인인 너희를 천국까지 내가 데리고 왔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생명나무가 스스로 충만한, 그것을 자충이라고 하는데, 그런 요건이 하늘에서 다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여기서 요한계시록 15장을 보겠는데, 2절에서 4절입니다.
(계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계 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 불이 섞인 유리 바다 !!
여기 2절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라고 나오는데, 이 불은 저주의 불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불의 바다를 인간은 통과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바다 자체가 그러한데, 인간은 물고기가 아니기에 통과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홍해를 건널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세계에서는 천국은 없다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이나 애굽인들이나 홍해를 건너서 가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이것을 좀 설명해보면, 이게 홍해바다인데, 이 홍해를 50만이 건너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렇게 바다를 건너왔다고 보면 안 되고, 남자만 50만명인데, 이들이 건너온 것이 아니라, 바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죽음에서 죽음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애굽군대가 따라올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애굽군대는 자기들이 보기에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너가고 있으니, 자기들도 그렇게 건너면 저쪽 세계에 갈 수 있다고 오해를 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인데, 홍해는 바다이니 바다에는 길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바다로 들어가면 당연히 빠져 죽는데, 그런데 그 죽음 속으로 길을 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는 계속해서 죽음이고 죽음 안인데, 그런데 바로 그 죽음 안에서만 생명이 있다는 말이죠. 죽음 바깥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 이상한 나라, 천국 !!
예를 들어서, 아이들을 보고 앞에다가 큰 거울을 세워놓고 그 거울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아이들은 거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울 뒤로 간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 보면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러니까 천국은 이상한 나라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짓말인데, 십자가 안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구라라는 겁니다.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만큼이나 그것은 거짓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런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이 세상의 것은 그야말로 사소한 것이라는 겁니다. 세상에서의 고민은 고민거리도 아니라는 말이죠.
애굽의 군사들은 죽음이 무서워서 건너올 수가 없는데, 그런데 아직 길이 열려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희들이 가면 우리도 간다" 라고 해서 따라왔는데, 그런데 그 길이 홍해바다의 일부라는 말이죠. 즉 죽음의 일부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죽음 속으로 겁도 없이 따라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것은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인데, 무서웠다는 말이죠.
결혼식에 가서 축하를 해주고 단체사진을 찍는데, 왜 찍는고 하니, 나중에 신랑신부가 그 사진을 보고 "이분들이 우리를 보고 잘 살라고 격려해주기 위해서 이렇게 왔으니, 우리도 열심히 살아보자" 라는 차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스크를 쓰고 찍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사진을 찍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마스크를 왜 씁니까? 죽지 않으려고 쓴다는 겁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 인간의 본능인데, 그래서 제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하더라도 막상 코로나가 터지니까, "교회문을 닫자" 라고 하는데, 이것은 본능이라는 말이죠. 그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말이죠. 평소에는 잘 따르지 않던 정부시책을 이럴 때는 잘 따른다는 것이죠.
* 강의를 다시 하면 !!
강의를 다시 하면, "나는 게임의 승리자가 되고 싶은데, 그런데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 자체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죽지 않아야 이 땅에서 승리자로 행세할 수 있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시스템, 즉 마귀의 시스템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시스템은 무엇인고 하니, 스스로 죽어버리는 시스템이 가동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가 빨리 죽는 것이란 말이죠. 아주 지긋지긋해서 더 이상은 살기가 싫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아직 안 된다. 네가 할 일이 남아있다. 조금 더 봉사를 해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시키신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은 자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건짐을 받도록 하는 기능, 그런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두고 그리스도와 몸통이 하나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주님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곧 주님의 백성도 함께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즉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래서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부를 때까지 복음을 전했는데, 자기가 죽고 싶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죽고 하는 게 아니고, 사나 죽으니 주의 것이기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은 가기 소관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삶과 죽음이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여러분도 평소에 그렇게 살고 있지 싶은데, 아닌가요? (ㅋㅋ)
여기서 교재 10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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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악과는 누가 따먹었느냐고 했을 때, 그것을 사건화를 시켜서 선악과 사건을 반복하는 겁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을 자꾸 우리 눈에 띄게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자꾸 눈에 띄게 하는 겁니다. … 그런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어디서 온 겁니까?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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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 이 세상은 선악과로 가득해 !!
그러니 이 세상은 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두 개의 시스템과 비교해보면 말이죠. 그래서 아담의 시절을 그리워할 이유가 없는데, 지금이 바로 지금이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 주변이 선악과나무로 가득하다는 말이죠. 그것을 따먹었다고 해서 기가 살고, 따먹지 못하면 기가 죽고, 그게 지금 이 세상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기에 지저분한 요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지 싶은데, 그렇지요? 그런데 지나가는데 어쩌다가 눈에 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그런 드라마의 작가라고 하면, 시작과 끝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온갖 설움을 다 받고, 그리고 출생의 비밀을 넣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아이가 바뀌고 하는 것을 말이죠.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등장해서 그것이 밝혀지는데, 고생고생을 다해가면서 대학을 겨우 나와서 힘들게 회사에 입사에서 그 회사의 회장의 아들을 만나는 것으로, 그렇게 시작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집에 가사 도우미로 들어가든지 하면 된다는 말이죠.
* 드라마의 결말은 항상 승부욕 !!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무엇인고 하니, 과정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 끝에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것을 두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겼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승부욕이 작동한다는 겁니다.
착한 사람에게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허락하고, 반면에 악한 사람에게는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세상이 그런 세상이어야 정의가 살아있는 진실된 세상이라고, 마귀가 드라마를 통해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 복음이란?
그러니 누군가가 "복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이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이죠. TV 드라마가 곧 세상의 일부인데,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니, 드라마도 이 세상의 한 모퉁이로서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드라마와 반대로 이야기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결핍과 모자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간증집회에서 나오는 간증거리를 보면, "그래서 망했다. 거지가 되었다. 죽었다" 라고 합니까? "잘 되었다. 오래 산다. 건강하다. 복 받았다" 라고 합니까? 어느 것입니까? 사람들을 교회로 유인하는 방법이 어느 쪽이냐는 말이죠. "잘 되었다" 라고 해야 유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복음의 전파자가 아니고, 일종의 교회 영업사원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잘 되었다. 복을 받았다" 라는 것으로 무장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과 교회가 서로 짝꿍이 되어서 주님의 십자가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이죠. 지금이 그렇다는 말이죠.
* 겨울 월수입이 1,500정도 !!
그래서 여러분도 사도바울처럼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싶은데, 그런데 제대 계획서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안 돼. 더 고생해" 라고 하면 우리는 더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한 달 수입을 1,500만원씩 보장해주고, 그리고 집을 3채나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그것을 좋아합니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육신의 정욕이 뭐가 좋다고?" 라고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서 사용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물론 남들은 그것을 복이라고 하겠지만, 성도에게는 그게 복이 아니라는 말이죠.
* 주님은 당신보다 더 고생했어 !!
그러면 무엇이 복인고 하니까, 천국이란 것은 생명나무만 있고 선악과의 대표로서 자기가 거기에 참여하는 것임을, 그렇게 주님에게서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 그것이 곧 주님의 사랑이고 또한 복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제 이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는데, 우리가 복음을 알고 있다면, 지지리도 가난하고 몸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그리고 하는 일마다 망하는, 그런 자에게 쓸데없는 위로는 하지 말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주님은 그것보다 더욱 더 고생했다는 겁니다. 바로 그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세상에 편승해서 같이 장단을 맞추면서 살지는 않았습니까?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본성이 우리의 육신에 여전히 남아있는 줄로 압니다. 이것이 바로 결핍요소이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인 것을 알고, 오직 주님의 그 불쌍히 여겨주심에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5,26 오후 6시에 마침.
오늘도 덧나는 나의 상처, 어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