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27 - 처벌이 없는 죄인됨
21,05,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표현 !!
오늘은 교재 98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에 보면 "창조란 하나님의 자기표현이다"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창조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포함이 되어있을까요? 당연히 여기 창조물인데, 그러면 여기 이 창조에 인간을 집어 넣어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을 로마서 9장 전체를 통해서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시는데, 하나님은 자기를 어떻게 표현하시는고 하니, 그것을 두 가지 성질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자비'와 '공의로우심' 이라는 말이죠. 공의로우심이라는 것은 겁나게 무섭다는 것인데, 즉 심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심판의 반대말이 구원이라는 말이죠.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 자비와 공의 !!
이 심판이란 것은 자비를 베푸는 것 외에 것, 그것이 전부 심판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의논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나님에게 건의한 게 아닌데, 자비라는 것은 불쌍히 여겨서 그냥 베풀어주시는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공의는 심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자비와 공의를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어놓았다는 말이죠. 일반적인 나무에는 벌칙이란 것이 없는데, 그렇지요? 나무를 어떻게 건드린다고 해서 특별히 벌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미리 말씀을 드리지만,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자기가 우리에게 벌을 내리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죄에 신경을 씁니까? 벌을 받는데 신경을 씁니까? 당연히 벌을 받는데 신경을 쓴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정신에 더 충격을 주는데, 왜냐하면 그 벌이 엉덩이를 몇 대 얻어맞는 수준이 아니라, 그게 지옥불이라는 말이죠. 그런데도 하나님은 "너희는 심판인 지옥불이 아니라, 너희가 죄 속에 있다고 하는 것, 거기에 관심을 두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 '죄 속' 이라는 의미는?
그런데 여기에서 '죄 속' 이라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죄를 지을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 속에 집어넣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이 스스로 "나는 죄를 지었다. 짓지 않았다" 라고 하는, 그 측정을 능가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착한 일이든 아니든 간에 무조건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 원칙이 곧 선과 악을 안다는 지식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겁니다. 선을 알아서 바르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해서 알았다고 하는 것, 악에 대해서 안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이죠.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
그래서 주님은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어놓았는데,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에 벌칙은 없는데,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하나의 나무에게만, 즉 "선악과나무의 과실은 따먹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벌칙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정작 아담과 하와는 이 벌칙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벌칙이라는 것은 경험을 해보아야 하는데, 이 죽음이라는 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전혀 낯선 것이란 말이죠. 그들은 죽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선악을 알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그 말씀을 현실화를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누구를 이용하셨는고 하니,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 즉 악마라는 겁니다. 그런 피조물들을 통해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이 실제상황이란 것을, 정말로 그러하다는 것은, 하나님은 여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
이렇게 "선악을 알면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공의에 속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비는 어디에 속하는고 하니, 두 가지 나무 중에서 생명나무가 있는데, 이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먹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인간 스스로 따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먹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지게 되려면 인간은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합니까? 심판의 위치,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가 인간의 고정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한다고 해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을 수 있는 권리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생명나무는 인간이 어떤 권한을 가지고 따먹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이것은 주님에 의해서 불쌍히 여겨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속성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의 속성이고, 그런 피조물의 속성대로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죠.
요즘 장로님의 옆구리에 돌이 있어서 엄청 고통을 느끼시는데, 그러면 그만 죽고 싶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장로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심판-선악과, 자비-생명나무" 라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에덴동산의 주인공은?
그래서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에덴동산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가 주인공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말씀이 주인공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데, 그러면 에덴동산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곧 골로새서 1장 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의 자기 얼굴이라는 말이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그리고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본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라도 결코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에게로 곧 바로 통하는 길은 없다는 말이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로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산 자와 죽은 자는 대화 불가능 !!
여러분의 친척 가운데서 돌아가신 분들이 있을 텐데, 있지요? 그분들에게 전화를 한 번 넣어보라는 말이죠. 그러면 통화가 됩니까?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전화를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죽은 자가 산 자에게도 전화를 할 수 없고 말이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데, 그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이니 '죽은 자' 인데, 성도와 비성도 사이에 대화가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해도 대화불가라는 말이죠.
그래서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들만이 알아듣는 이야기만 해야한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가 허락된 자들만 알아듣는 이야기를 말이죠. 지옥에 갈 자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에 갈 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옥불에 들어갈 자들의 특징은, 자기 성격이 곧 현실이 되기를 우긴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나의 성격대로 이 세상이 돌아가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성격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 주여,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
몸이 아파서 "주여, 몸이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은, 자기 몸이 아프지 않은 주의 뜻이 아니고 자기의 뜻인데, 그렇게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서 자기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출발점이 '나의 뜻' 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뜻을 고집하는 것, 그게 바로 교회에 나와도 지옥에 갈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몸이 아프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몸이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자비였다는 말이죠. "네가 죄를 지은 것은 생각하면 이런 짱돌로도 부족하지만, 내가 너의 성격과 요구사항을 일체 묻지 않고 무조건 너를 1년 중에서 364일을 건강하게 해주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1년 중에서 단 하루가 아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364일 동안 아프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고 하면, 단 하루가 아픈 것도 역시 은혜이고 기적이고 주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에 가는 사람인데, 즉 하나님의 자비로서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이해하는 자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는 사람들이 요구사항을 가지고 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그것이 자기 성격인지, 그것이 아니면 주님의 자비인지, 그것을 판정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 판정하는 방법은 일일이 불러서 상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성격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교회 문을 열고 뛰쳐나갈 것이고, "어렵도다" 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죠(ㅋㅋ). 그러면 "죽은 자는 산 자와 통화가 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 소리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여기까지는 안다고 치고 이 칠판의 내용을 모두 지우겠는데,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은 우리를 보고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제가 뜻이라고 쓴 것이 아니고 비밀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비밀이라는 것은 인간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알아야 될 사람만이 아는 것인데, 그래서 비밀이라는 것이죠.
* 이 비밀은, 하나님에게도 비밀 !!
이 비밀이란 표현이 에베소서를 비롯한 예수님의 편지에 종종 나오는데,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복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게도 비밀이 된다는 말이죠. 이게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하나님이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고이 간직하고 싶은 내용이라는 겁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그러니까 이 비밀을 허비하거나 아무에게나 날리는 것이 아니고, 마치 대북전단을 날리듯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 안에 들어있는 1달러가 가짜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어차피 다 엉터리라는 겁니다. 아무튼 이 비밀은 비밀다운 가치를 유지하면서 전달해야 하는데, 그게 복음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6절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라고 하는데, 사람을 개나 돼지로 본다는 겁니다. 우주보다 더 귀한 복음의 가치를 그들은 경멸한다는 말이죠.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그러면 누가 개이고 돼지인지 알 수가 없는데, 일단 던져보면 안다는 겁니다. 이 비밀 안에는 하나님의 의중에 들어있고, 하나님의 성격, 혹은 성질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 성질이 하나는 자비고 하나는 심판인데, 불신자들이 왜 고생을 합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을 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알려면 무엇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까? "나는 지옥은 모르겠고, 천국만을 생각합니다" 라고 하는, 즉 "심판은 모르겠고 자비만 생각합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다는 겁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 예수님은, 지옥의 하나님 !!
제가 쓴 책 가운데 '지옥의 하나님' 이라는 것이 있는데,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이 책도 거의 팔리지 않는다는 겁니다(ㅋㅋ). 그리고 이 책은 제목자체가 너무나 험악한데, 사람들에게 전혀 희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지옥에 갈 사람은 겁이 나서 사기 싫을 것이고, 천국에 갈 사람은 아예 살 필요가 없고, 그러니 이러나 저러나 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옥을 모르면, 즉 심판을 모르면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도 모두 가짜라는 말이죠. 심판을 모르는데 자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에게 사랑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지옥의 심판을 전하기 위해서 몸소 누가 오시는고 하니,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지옥의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천국은 아예 인간에게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죠. 그 사실을 굳히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인간이 천국을 바라본다는 100프로 구라인데, 인간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의중과 의도는 주님의 성격이 아니고, 이미 범죄한 인간의 자기 성격이라는 겁니다.
왜 인간이 범죄를, 즉 죄 가운데 있는고 하니, 선과 악에 대해서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게 '양심' 이라는 겁니다. 즉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다' 라는 것을 저 개나 돼지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 라고 우기는 것, 바로 그렇게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자체를 주님께서는 문제로 삼으신다는 것이죠.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데, 그것은 하나님 선에서 내리신 일방적인 결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서류를 인간이 왜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는 창조주의 소관인데, 왜냐하면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니 말이죠.
* 강의를 다시 하면 !!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성격과 심판의 성격을 가지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에 대해서, 그것은 인간은 완전히 배제가 된 상태에서, 오직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악마가 그 서류를 빼돌려서 인간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야, 이것을 우리도 알자. 하나님은 몰라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을 알면 너도 신이 될 수 있어" 라고, 즉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네가 결정할 수 있어" 라고 하면서 사기를 치는데, 종교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유포를 시켰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나는 지옥은 싫고 천국은 좋아. 그러니 이왕이면 천국에 가야지" 라고 하는데, 하나님도 아니면서 그 따위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의 결제서류를 왜 인간이 가지고 있느냐는 말이죠. 천국과 지옥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는, 그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천국에 가고, 거기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행위책에 의해서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여기에 일체 권한이 없다" 라는 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파견근무를 나오셨다는 말이죠. 즉 "인간의 모든 운명은 인간 손에 달린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비밀'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을 완전히 개무시시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결정하셨다" 라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하니, "나는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라고 하는 자들만이 그것을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세리이고, 창기이고, 강도라는 말이죠. 같은 사람들에게도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 문둥병자 모세 !!
구약에서는 이게 문둥병자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냥 피부병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병이라는 말이죠.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는 평소에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자기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 문둥병에 걸린 손이 되었다는 겁니다.
(출 4:6)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그러면 그 손은 어디를 갔다왔습니까? 자기를 내부를 다녀왔다는 말이죠. 인간은 자기 눈을 통해서 바깥만을 쳐다볼 줄 알았지, 내부를 쳐다볼 눈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문병병에 걸렸다는 말이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세는 자기 자신을 멀쩡하다고 보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문둥병자, 즉 저주를 받은 자로 보았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자의 후손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인간이 지어낸 소설이 아닌데, 하나님의 비밀책에서 나온 내용이라는 겁니다.
* 성도란, 처벌이 없는 죄 속에 파고드는 자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처벌 속'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죄 속'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라는 것은, 처벌이 없는 죄 속에 파고드는 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표정이 보니 지금 별로 반응이 없는데, 이게 기쁘지 않느냐는 말이죠.
사람들은 그 관심이 처벌에 있는데, 그런데 처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한 처벌이 없이 죄 속에 파고 들어간다는 말이죠. 자기는 과거에는 헌금을 하고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하는 것이 착하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죄로 들통이 난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이런 소리가 기분이 좋지만, 다른 교회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살짝(?)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자기는 예수를 믿어서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몹시 불쾌하게 들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화를 받는 척을 하면서 바깥으로 도망을 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죠(ㅋㅋ).
성도란 처벌이 없는 죄 속에 파고드는 자인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일반 교인들은 거부를 하는데, 특히 목사들은 굉장히 심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의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까지 그것과 반대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가르친 모든 것이 사기였다는 것이 들통이 나게 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힘든다는 겁니다.
누가 봐도 성경은 "여러분은 죄인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고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올바르게 살아야한다" 라고, 이것은 하나의 공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자가 봐야하는데, 성령을 받은 것과 상관이 없이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이니, 그게 문제라는 말이죠.
* 일회용 하나님 !!
이것은 자기가 성경을 보면서 무엇이 되고 싶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나는 지금까지는 쓰레기였지만, 이제는 그런 생활을 청산하고 천사처럼 살고 싶다" 라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일회용인데, 한 번 쓰고 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자기 힘으론 죄를 씻지 못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살짝 이용해서 죄를 씻고 나서,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버리고 "나는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 라고 하는, 그것을 '개과천선(改過遷善)' 이라고 하는데, 그런 자랑질을 하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속성, 자기 성격을 그대로 펼치는 가짜 성도이고, 오늘날 교인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폭이 더 커지는 것이란 말이죠. 그게 에베소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사랑을 느끼려고 하면, 자기가 미처 몰랐던 죄의 깊이가 더욱 더 깊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깊고 깊은 죄의 세계 !!
그렇게 되면, 자기의 이 육신이라는 탱크가, 이게 이처럼 죄로 가득하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의 내부가 그야말로 깊고 깊은 죄의 세계인데, 갑자기 '깊고 푸른 밤' 이란 영화가 생각이 나는데 말이죠. 그야말로 우리의 내부에는 의로운 것이 전혀 없음을 날마다 확인하는 기쁨과 감사, 그게 넘치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 기침을 하는 분이 전혀 없는데, 이런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말이죠. 당연히 자가 격리를 당해야 하는데, 아직 그런 분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말이죠. 아무튼 지금까지 이렇게 지내온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과분한데, 죄인은 그런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도 과분하고, 이렇게 찹쌀로 된 음식을 먹는 것도 과분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식사기도를 할 때 "주여, 너무 과분합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루치의 음식 밖에 받지 못했는데, 그런데 우리는 쌀독에 쌀이 있다는 말이죠.
물론 그렇게 기도를 할 때는 감사하다고 해놓고는, 돌아서서 반찬이 짜니 마니 하면서 난리를 치는데, "짠 음식을 먹고 빨리 죽으라는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때가 되어서 밥을 주지 않는다고 닦달을 내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도 다 주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돌아서는 다시 자기 위주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비를 키우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심판의 근거를, 그 이유를 주님은 같이 키워준다는 겁니다. 누구를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까? 바로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 그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타자(他者)'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나말고 다른 사람은 통해서, 내가 그들을 얼마나 모방하고, 또한 그들처럼 살기 위해서, 신자든 불신자든 관계가 없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서, 하나님은 잠자는 나의 욕망을 깨우게 하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의 욕망이 얼마나 발작을 하는지 모르는데,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는 자기가 본받고 싶은 경우의 사람들이 깔려있고, 또한 만나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자기 옆에 자기보다도 무식한 사람이 오면 기분이 좋은데, 그런데 갑자기 자기보다 더 똑똑하고 돈이 많은 사람이 이사를 온다는 말이죠. 자기 자식을 자랑하고 싶은데, 그런데 그 집의 자식들은 더 잘되어있다는 겁니다.
자기 아내가 상을 받았다고 자랑하고 싶은데, 이번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이 자기 동네에 이사를 오면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화가 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여,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 표현'을 회수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이 있잖아?" 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곧 '자비' 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그 자비를 주시고 다시 회수해 가신다는 겁니다. 즉 "너는 사랑의 대상이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급겸손 모드에 들어가는데, "제가 주님께 한 것이 전혀 없어요" 라고 말이죠. 이 자비라는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이기 때문에, 잘잘못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 처벌이 없는 죄인됨 !!
그러한 자비의 구체적인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처벌이 없는 죄인됨' 이라는 겁니다. 오늘 이것을 강의제목으로 하고 싶은데, 죄인인데 처벌이 없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으니 신이 나지 않습니까?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를 만하다는 겁니다. 지옥에 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죄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천부여, 두 손을 들고 나옵니다" 라고 할 수밖에는 없는데, 주님이 그런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증거해야하는 것은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기 표현이라는 말이죠. 주님의 자비가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림,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것으로 게임이 끝났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한 것이 바로 그것인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말이죠. 또한 그것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겁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중심이 전혀 아닌데, 그리고 중국의 시진평이 아무리 어떻게 해보려고 설쳐도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의 중심은 눈에 보이는 것이 중심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주님이 중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 안 되고,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을 쳐다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 주님은, 나의 타인(남) !!
그러면 이제 "주님은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인데, 교회에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좀 했다고 하는 분들에게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져보라는 겁니다. "당신은 '주여, 주여' 라고 하는데, 그 주님이 누구입니까?" 라고 말이죠. 거기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이러한데, "주님은 나의 타인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의 타인'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남이 되는데, 즉 주님은 남이었다는 말이죠. 이 '남' 이라는 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자기가 친구를 사귀던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친구나 자식은 남이 아니고 자기에게 예속된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즉 "나는 저 사람을 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이미 자기 것이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베지밀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집사님이 가지고 오셔서 나누어 주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앞에 놓았는데, 그런데 집사님이 "이런 잘못 놓았구나" 라고 하면서 그만 다시 가지고 가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당연히 나쁘다는 겁니다.
누가 베지밀을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줘놓고는 그만 다시 빼앗아 가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러한 가운데 마법과 같이 무엇이 발생하게 됩니까? "인간은 항상 내 것을 노린다" 라고 하는, 그런 자기의 죄악된 본성이 그만 발각이 된다는 겁니다.
* 욥의 경우에 !!
그래서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욥이 부자가 되게 해놓고 그것을 다 빼앗아 버린다는 말이죠. 그리고 건강하게 해놓고 그 건강을 빼앗아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 이것을 누가 알고 있습니까? 악마가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악마가 하나님에게 말하기를, "제가 인간에 대해서 좀 아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찾는 조건이 이미 만들어졌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에게 유리하고 자기가 건강해지는 경우에만, 그렇게 자기 욕망대로 해주면 그게 어떤 신이 되었던 간에, 그러한 신을 찾고, 거기에 빠져버린다는 말이죠.
* 인간의 생각이 곧 악마의 생각 !!
따라서 인간들이 신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신이 자기에게 좋은 것을 주었을 경우에만 신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악마가 자기 이름을 걸고 자부를 했는데, 그렇게 악마의 말대로 오늘날 모든 교회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악마의 말이 이 땅에서는 진리인데, 왜냐하면 악마가 인간 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생각은 곧 악마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의 것을 빼앗기는데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인데, 그런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욥도 마찬가지인데, 자기 것을 빼앗기면 기분이 더럽다는 겁니다. 누이가 좋고 매부도 좋은 것이 인간세계인데, 그게 악마가 만들어놓은, 죄 속에 들어있는 인간세계라는 말이죠. 악마가 얼마나 지혜롭고 간교한지 모르는데,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악마의 지혜를 이길 수 없다는 겁니다.
(욥 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10)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욥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먼저 줘놓고 빼앗아갔다고 하면, 여기에 대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을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베지밀은 요양병원에서 사용을 많이 하는데, 그런데 어떤 할머니에게 이 베지밀을 주었다가 다시 빼앗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하면, 그 할머니는 치매가 왔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성도를 보고 죽으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말이죠. 살아있으면서 웃을 위인은 없다는 겁니다.
안중근이 권총을 들고 사람을 쏘는 것이 자기 주특기가 아닌데, 나라를 빼앗기니 열을 받아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자기 것을 건드리니 죽어 당연하다는 것인데, 복수심이라는 겁니다. 제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아무리 나라를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은 일종의 사적인 복수심이라는 말이죠.
* 내가 요청한 '타인' !!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이 타인이 두 종류가 있는데, 자기가 요청한 타인이 있고, 이것이 방금 이야기를 한, 자기에게 소유가 된 타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타인이 이런 타인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좋게 '사랑' 이라고 표현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마치 "달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즉 "저 달은 나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예수님은 내 소유의 예수님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원하는 예수라는 겁니다.
그런 것의 한계가 언제 드러나는고 하니,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자가 자기가 믿는 예수를 같이 믿을 때라는 겁니다. 그때는 성질이 나서 "내가 지옥에 갔으면 갔지, 같은 예수는 믿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 삐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에게만 잘해주는 예수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에게도 잘해주어야 하고, 특별히 자기에게 더 잘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우리교회 교인들에게 헌금을 나누어주시는데, 물론 골고루 10억씩 준다면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물론 자기에게 더 주면 더욱 더 좋고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아니라 전도사님에게만 20억을 준다고 하면, 그 나머지는 다 삐친다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이 10억을 주고 10억을 빼앗아 가면 기분이 나쁜데, 그런데 20억을 주고 20억을 빼앗아 가면 더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죠.
* 사랑은 곧 관심사 !!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몸은 아프지 않습니까? 식사는 잘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것을 다른 말로 '관심사'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에게 대한 관심인고 하니, 자기에게 대한 관심인데, 우리는 그것을 두고 "사랑이 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누군가가 자기에게 대해서 관심을 가져줄 때, 그것은 사랑이 찾아온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은 자세히 알아보는 것인데, 왜냐하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 이것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
그런데 서울에 있는 자식들이 촌에 있는 부모에게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이사를 가면서 자주 찾아뵙는다고 해놓고는, 그 자주가 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자주라는 겁니다(ㅋㅋ). 전화도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하다가, 나중에는 무슨 날이나 되어야 전화기를 든다는 말이죠.
그때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무슨 감정을 느끼는고 하니, "왜 나에게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 않느냐?" 라고 하면서 섭섭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이제 자식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이죠.
* 말이 최고 !!
그러니 이 세상의 사랑은 자기가 요청한 타인이, 그게 자식이 되던 누가 되던 간에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인데, 자기가 몸이 아프든지 하면 돌보아 주고 말이죠. 그렇게 관심을 가져주면서 "정말 잘하십니다. 참 대단합니다" 라고,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그런데 특히 경상도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을 꼭 말로 해야하나?" 라고 하는데(ㅋㅋ), 하지만 말이 최고라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를 보고 "사랑합니다. 참 좋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자기가 요구하는 타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소유가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사랑은 자세히 알아보는 것인데,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서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서로 사랑이 튼 사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주님은 이런 사랑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에 있어서 타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다니엘서에 나온다는 겁니다.
다니엘서 2장 28절에서 30절을 보겠는데,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단 2: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단 2:29) 왕이여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단 2:30)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 놓쳐버린 꿈 !!
이게 무슨 내용입니까? 자기 꿈이 아니라 남의 꿈을 찾아내는 것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우리는 자기 꿈도 잊어버려서 찾아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 꿈이라도 자기가 놓치면 자기 소유는 끝이 났는데, 꿈은 자기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자기 표현인데, 그것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는데, 그래서 누가 동원되는고 하니, 여기에 타인이 동원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요청하지 않은 타인이 찾아오게 되면, 자기 내부, 자기 심정, 자기 마음은 탈탈 털린다는 말이죠. 즉 타인이 자기의 모든 것을 강탈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을 아까 '회수' 라고 했다는 말이죠. 가지고 간다는 겁니다. 그게 여기 30절에 나오는데,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왕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하나의 현장이라는 겁니다.
* 예수님은 내가 요청하지 않은 타인 !!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은 자기의 타인인데, 그 타인은 자기가 요청하지 않은 타인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요청한 타인은 자기의 연장이기 때문에, 그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일방적으로 자기가 그 타인을 간섭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부모가 되어서 "자식들이 왜 요즘 전화를 하지 않지?" 라고 한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인데, 그래서 "요즘 너무 바빠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 "아무리 바빠도 전화를 할 시간은 있잖아. 그렇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아버지가 유산을 가지고 시위를 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물론 부모들의 마지막 무기가 유산인데, "내가 사인하지 않으면 너는 한 푼도 없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법적으로 부모가 마음대로 하는 것은 곤란한데, 아무튼 유산이라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전화기가 울릴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먼저 다 주고 나면 요양병원으로 직행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것이 되어야 만족을 하는데, 인간은 그 정도로 죄인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의 선과 악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불리하면 악이라는 겁니다. 이런 악마에게 속한, 그러니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아예 죄에 속해있다는 말이죠. 교인들이 가끔 기도시간에 "날마다 죄를 먹고 마시고" 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같은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는데, 그래서 "나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는 예수는 가짜 예수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자기 성격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어서, 그런 세상을 일방적으로 요구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 인간은 악마적이라는 것이죠.
* 우리는 껍데기 !!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자기가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그래서 자기는 손을 뗄 수밖에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즉 주님의 계획이 자기 허락도 없이 자기 속에 들어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탈탈 털리게 되는데, 하지만 애초부터 자기 것은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껍데기뿐이었다는 것인데, 그 안은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말이죠. 창세 전부터 예정해서 집어넣은 것인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한 원칙에 의해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오셔서, '나의 것'을 주님이 다루시는 '주님의 것'으로, 그렇게 전환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 들어온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비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전혀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하셨다는 겁니다. 처벌이 없는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 인류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 !!
다시 다니엘서 2장으로 돌아와서, 다니엘서 2장의 그 이야기, 즉 금, 은, 놋, 철, 흙으로 된 신상에는 하나님의 자기 표현, 혹은 하나님의 속성, 혹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그것이 그 안에 모두 다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곧 인류의 역사가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공식을 하나 만들어보면, "인류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였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 개인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느부갓네살 왕인데, 그가 가지고 있던 심성이 확 펼쳐지게 되면 인류의 역사가 된다는 겁니다. 남은 역사도 여기에 모두 다 들어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공식과 동일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가 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 느부갓네살을 집어넣어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느부갓네살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죠. 그게 인류의 역사인데, 그러니 인류의 역사는 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논리가 아주 간단한데, 인류의 역사, 즉 이 땅의 역사는 망한다는 것인데, 그 망하는 것에 너무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망하는 것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이 되는데, 그러면 자기가 망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면 된다는 겁니다.
* 망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왜냐하면 자기는 망해도 주님의 계획만 그대로 진행이 된다면 괜찮다는 말이죠. 자기 자신이 망하는 것은 주님이 묻지도 않는데, 그런 것은 의논대상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자기 뜻을 은근 슬쩍 집어넣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것이죠.
주님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가 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망하게 된다면, 그러면 그것이 주님의 하나의 의견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실제로 그러합니까? 역사적으로 그러한데,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망했다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믿어야 하는데, 그게 갈라디아서 3장 1절이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망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는 우리 자신도 이 세상에서 침몰하라고,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주어졌다는 겁니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심판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반드시 심판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뜻에서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는데, 성도는 처벌이 없는 죄인이라는 말이죠.
* 언약궤를 중심으로 한 동서남북, 출발 !!
그러면 이런 십자가 계획이 구약에서는 어떻게 펼쳐질까요? 그것이 민수기 2장에서 10장을 보면 나오는데, 5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각 지파별로 일정한 간격을 맞추어서 움직이게 된다는 겁니다. 요즘과 같은 거리두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나름대로의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죠. 어제 설교시간에 이것을 했는데 말이죠.
여기 가운데는 언약궤가 있는데, 이 언약궤는 동서남북, 그렇게 방향을 정해준다는 말이죠. 동쪽에는 유다지파가 위치하게 되고, 이 동쪽에서는 유다지파가 대장이라는 겁니다. 즉 유다, 시므온, 갓 지파, 이렇게 3개의 지파가 하나의 세트가 된다는 말이죠. 남쪽에는 르우벤, 잇사갈, 스불론 지파, 동쪽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그리고 북쪽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레위지파가 빠져있는데, 이 레위지파는 언약궤가 있는 공간을 지킨다는 겁니다. 그리고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들처럼 숫자를 세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들은 이미 죽은 자로 간주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표출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죽음이 늘 되풀이가 되는 장소인데, 양이든 염소든 간에 제물이 계속해서 죽어 나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특징은 제일 한 가운데 죽음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살과 같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일어난 죽음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언약궤를 몰고 다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마지막에 실시하실 그 무서운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 경험케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무섭다는 말이죠. 그 무서움을 가운데에 두고 그들은 행진을 하는데, 특히 그 역할을 레위지파가 한다는 것이죠.
이것을 두고 "전쟁을 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이 주인공이 됩니까? 언약궤가 주인공이 됩니까? 당연히 언약궤가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민수기 10장을 보겠는데, 35절과 36절을 누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민 10: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민 10:36)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 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 사람없음이 주인공 !!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사람없음이 주인공이라는 것인데, 즉 나무상자가 주인공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십자가가 주인공이 되는데, 십자가 사건, 즉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은 그 사건이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죠.
이 땅의 인물은 그 누구라도 아버지 앞에서 구원될 자격이 없다는 것인데,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미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사람 이름과 거래를 하지 않는데, 하나님은 본인하고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과 모든 계약을 맺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님의 계약은 인간과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과 하시는데, 그것이 곧 새언약이라는 말이죠. 즉 주님의 살과 피라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죠.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이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렇다면 "이들이 어디로 가는가?" 라는 것인데, 이게 상당히 어렵다는 겁니다. 동쪽의 유다지파부터 출발을 하는데 말이죠. 그들은 무엇을 보호하는데, 언약궤가 중간에 위치하고 제사장을 앞장세우고, 제일 앞에는 유다지파가 진격을 한다는 것이죠. 즉 그들이 언약궤를 둘러싸고 있다는 겁니다.
수평적으로 보면 그러한데, 그런데 이것을 수직적으로 옮기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데, 그런데 시내산에는 하나님이 살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잠시 시내산에 머물렀다는 겁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3일을 기다렸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계룡산에는 있을지 몰라도, 시내산에 하나님이 앉아있고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ㅋㅋ).
* 슬쩍 들어온 하나님 !!
아무튼 이것을 수직적으로 보면, 하늘의 요소인 언약궤를 이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이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궤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만군의 하나님인데, 즉 천사들을 대동하고 세상을 이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감히 인간인 주제에 보필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고 신분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 시내산이 2,000미터가 좀 넘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바짝 눌러보자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언약궤는 수직이 아니고 수평으로 와닿게 되는데, 그러면 수평에 언약궤가 있는데, 이것을 수평으로 생각하지 말고 수직적으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길을 대동하고 다니는 것이 된다는 것이죠. 가마를 태워서 말이죠.
* 성도는, 움직이는 성전 !!
그러면 하늘의 요소가 땅의 요소에 포함이 되어있는 것인데, 소속이 아니라 슬쩍 들어가서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신약의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면, 그러면 성도는 무엇입니까? 성도에게는 하늘의 것이 수직적으로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의 마음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움직이는 성전이라는 것이죠.
이게 하나님의 약속인데,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선 "그런 것은 신경을 쓰지 마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고 사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들어있는 언약궤,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이것이 언약궤이고 타인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내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남이 나를 점령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준 것을 회수해가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그야말로 껍데기로 사용하신다는 것이죠.
* 죄 속으로, 가나안 땅으로 !!
일단 이렇게 해놓고 다시 질문을 하겠는데, "이들이 어디로 가는가?" 라는 겁니다. 바로 정답을 알려드리면 '죄 속'으로 간다는 말이죠. 그것을 구체적인 지명으로 이야기하면 '가나안 땅' 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지금 죄가 관영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죄 속에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신약에 와서는 충분하게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 십자가 속은 그야말로 깊은 푸른 죄의 탱크 속인데, 그런 죄의 탱크 속에서 우리가 들어가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죄인데,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죠.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인데, 아프든 굶어죽든 코로나에 걸리든 어떻게 되던 간에 말이죠. 죄인인 주제에 골라서 "이것을 주세요. 저것을 주세요" 라고 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했는데, "네가 알아야 하는 너의 죄 속으로 들어간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구약으로 말하면 가나안 땅에 합세하는 것인데, 그리고 그 땅에서 이스라엘은 망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말이죠.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 텅 빈 이 세상 !!
이스라엘은 망하고 언약궤는 불에 타버리고, 그러면 그 현장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야말로 공백이라는 겁니다. 하늘의 것도 사라지는데, 하나님이 스스로 붙에 태워버렸다는 것이죠. 마치 십자가에서 의도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내치는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내치시는데, 즉 오지 말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오는데, 생명나무는 우리 인간이 기대하거나 목표로 삼거나 얻고자 시도할. 그런 대상으로서 일체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멀리 꺼지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이 땅을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다음에 이 세상은 다시 평온 상태로 돌아갔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 - 없었어. - 얼마 전에 좀 요란스러웠다고 하던데? - 예수라는 인간이 와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했는데, 정치적으로 사법적으로 깔끔하게 처리했어. 무덤까지 다 만들었어"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이것을 그 당시 여론층이었던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의기소침해 하면서 그 나오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우리 이제 고기나 잡으러 가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 외에 그들은 달리 할 일이 없었다는 말이죠.
* 제3의 사나이 !!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제3의 사나이가 달라붙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나이가 "어디로 가느냐?" 라고 하니, "예루살렘에 소문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만 죽었다고 해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누가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런데 그는 제자이면서도 그 사나이가 예수님인 줄 몰랐다는 겁니다.
(눅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 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그런데 나중에 다시 눈을 뜨게 되는데, 그러자 그분이 주님인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이 눈을 뜨는 순간 예수님은 나타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야, 주님이다" 라고 하지만, 정작 그 현장에는 주님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 안 된다는 말이죠. 육신 자체를 죄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보았다" 라고 하는 예수님에 대한 존재증명, 그것만이 남아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네가 미쳤다" 라고 하는데, 그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시니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주님, 이제 떠나지 마세요. 가버리니 우리는 힘듭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주님은 떠난 적이 없어 !!
아까 인간의 사랑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누가 요청하는고 하니, 자기가 요청한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떠나지 않겠다" 라고 하는데, 주님은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수직적인 관계를 제자들이 모르니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떠난 줄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바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을 알려주겠다" 라고 해서 오신 것이 성령이라는 겁니다. 성령은 세상 끝날까지 주님이 우리 함께 있음을 실증해주는 것이란 말이죠. 즉 "너는 껍질에 불과하고, 그 중심은 내가 차지하고 있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더욱 더 깊은 죄 속으로 !!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어디로 갑니까? 더욱 더 깊은 죄 속으로 들어가는데, 처벌이 없는 죄인으로서 말이죠. 여러분은 이 말을 들으니 신나지 않습니까? 신이 난다는 겁니다. 칼을 들고 남의 배를 찌르고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이전에는 의로 여겼는데, 이제는 그게 죄가 된다는 말이죠.
자기 착함, 자기 의로움 등등, 그런 모든 자기 행위가 죄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자체가 죄의 전당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교회도 아니고, 십일조도 아니고, 전도도 아니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서, 그 주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겁니다.
* '주님의 것'으로서 !!
다시 강의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모든 계획이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라는 말이죠. 거기에 피조물을 충분히 활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피조물과 의논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무엇만 하면 됩니까? 죄만 지으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새삼스럽게 무엇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죄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은혜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는 말이죠. 죄가 된다는 것, 그것은 중간에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것이 은혜로 그거 주어졌다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은혜' 라는 것이 '주님의 증인'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 주님의 증인이 시간이 지나면 '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죄를 더욱 더 알게 하시는데, 그러니 그것이 '나'가 안 되고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값을 주고 산 주님의 것이 되도록,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모이게 되었고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에게도 비밀인 그 비밀, 그 십자가 비밀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게 사람의 지혜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로만 구원이 능력이 된다는 것에 감사하는, 그리고 그것을 운반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5,12 오후 4시에 마침.
강의 제목이 기가 막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