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상처의 자손

아빠와 함께 2021. 6. 18. 10:34

[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29 - 상처의 자손

21,06,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선악을 알게 하는 영토 !!

오늘은 교재 107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중간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경계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내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먹지 않았다" 라는 것은 어떤 영토, 즉 구역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즉 선악과는 그 영토에 들어가는 출입구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선악을 아는 영토가 있는데, 너는 들어오지 말라" 라는 뜻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것은 '선악과' 라는 과일 하나를 먹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에덴동산 자체가 하나의 영토가 되고 영역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토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죽으면 된다는 겁니다. 독이 든 과일을 먹은 것처럼 선악과를 따먹고 그 나무 밑에서 죽으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나가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그것도 죽은 상태가 아니고 살아서 말이죠.

* 둘로 나누어지는 에덴동산 !!

그러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토의 문제인데, 즉 선악을 앎으로서 드러나게 되는 영토와 그렇지 않은 영토로, 그렇게 에덴동산이 둘로 나뉘어지는 계기가 성립이 된다는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에덴동산이 그만 둘로 분리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둘로 분리가 되기 이전에는 에덴동산이 하나였고, 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지휘부인데, 즉 센터에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센터가 둘로 나눠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한 쪽은 여전히 생명나무가 있기 때문에 생명이 되고, 다른 한 쪽은 저주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에덴동산에서 생명의 땅과 죽음의 땅으로 나눠졌다는 것은, 원래부터 에덴동산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함유되어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에덴동산이 이렇게 생명과 저주의 본질을 함유하고 있었는데, 악마의 술책으로 인간이 그만 그 뇌관을 건드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에덴동산의 원래 있던 본질이 영토화가 되어서 둘로 나눠지게 되었다는 말이죠.

*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

이렇게 되면 무엇이 중요하게 드러납니까? 그것은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라는 것인데, 인간은 그야말로 시시한 존재였다는 겁니다. 특히 이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여자의 후손인데, 그리고 이 여자의 후손이 바로 여러분도 알다시피 메시야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메시야가 상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데, 여자의 후손과 남자의 후손이 싸우는데, 이 남자의 자리에 뱀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뱀과 메시야가 싸우는데,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뱀과 여자의 후손, 즉 미지의 인물과 싸운다는 말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런데 이 여자의 후손은 참으로 낯설고도 생소한데, 왜냐하면 아담에게는 이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아담은 알다시피 남자인데,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든 것은 남자를 위해서 만드신 것이지 여자 자체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남자는 여자가 자기 보조역할이라고 믿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해도 주도권을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쥐어야 한다는 말이죠.

*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 !!

그런데 메시야가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데, 그러면 여기서 남자는 그만 소외가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튕겨져서 나오게 되고, 그리고 여자의 후손도 상대할 자가 남자나 그 후손이 아니라 뱀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힘이 든다고 여길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를 시시하게 보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데 자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신앙생활 자체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 자기를 시시하게 보지 않으면 !!

그래서 저는 감히 단언을 하는데, "복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자기를 중요하기 여기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자기를 시시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말씀과 복음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죠. 중요한 것은 말씀도 복음도 아니고 자기 자신인데, 그러니 그 영토는 어떤 영토인고 하니, 이미 저주를 받은 영토, 즉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영토인데, 그 영토의 특징이 바로 그러하다는 겁니다.

다른 영토, 즉 저주를 받은 영토의 짝이 되는 생명의 영토에서는, 인간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이 영토에는 모든 것의 주인공이 되시는 중보자가 계시는데, 오직 그분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렇게 중보자가 계시고 그분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라는 것이죠.

* 다시 하면 !!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설명을 해드리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순간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나는 어떻게 되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반면에 또 어떤 영토가 있는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자기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자기보다 더 중요하다가 여기는 영토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둘로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나는 어떻게 되지?" 라고 하는 영토는 저주를 받은 영토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영토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되는가?" 라고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나무가 여전하다고 하면, 그 영토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조치를 취하셨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왜 따먹었지?" 라고 하지 않고, "여기서 나가라" 라고 한 것,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토를 지키려고 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영토가 우리 인간보다도 더 소중한데, 그런 시선으로 보게 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토에 비해서 너무나 시시하고 미미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자기 자신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바뀌는, 그런 과정이 바로 복음이 개입되는 과정이라는 말이죠. 자기를 시시하게 보게 되면 불평불만과 걱정이 다 사라지게 되는데,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겁니다.

* 나는 양심의 파수꾼이다 !!

그렇다면 인간은 왜 저주받은 이 영토에서 자기를 중요시하는 겁니까?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저주인데, 시시하게 봐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중요하게 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놀랍게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양심이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있다" 라는 겁니다. 즉 "나는 양심의 파수꾼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이지 싶은데, 그때 이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사탕이 등장했는데, 안에는 액체 초코릿이 들어있고 바깥에는 투명한 사탕으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전에 없는 전혀 새로운 맛이었는데, 초코릿은 액체고 사탕은 고체라는 것이죠. 고체를 깨고 들어가면 액체가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인간들의 모습인데, 그들이 자기를 중요시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자기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양심인데, 그 어떤 범죄자라고 해도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자기 의' 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나'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아무리 힘든 생활을 해도 고집 하나로 버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소중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무엇이 소중하다는 겁니까? 그러면 "나는 어머니에게 소중한 아들이었다" 라고 하면서 문주란이 불렀던 '동숙의 노래'가 줄줄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 노래는 과거에 버스에서 거의 강제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18번이었는데, 울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남들은 다 죽어도 자기는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안에 무엇이 있다는 것인데, 양심이 있고 자기 의가 있다는 겁니다. 양심의 가책이 되기 때문에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왜냐하면 그 양심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파수꾼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이 양심이 바로 성경에서는 선악을 아는 지식인데, 그러니 자기가 자기에게 그만 포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
[동숙의 노래] 문주란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모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음 ~ 때는 늦으리

님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만
그대 따라 못 가는 서러운 이몸
저주받은 운명에 끝나는 순간
님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음 ~ 뜨거운 눈물
-------------------------------

* 당신은 누구 밑에서 일을 합니까?

어떤 분이 어제 한 설교를 듣고 다음과 같이 평을 했는데, 제가 어제 오후시간에 "당신은 누구 밑에서 일을 합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밑에서 일을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때문에, 자기 밑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죠.

욥에게 고난이 오게 되면, 만약에 욥이 신약시대의 성도라면 나중에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욥에게 고난이 온 것이 아니라, 욥은 고난 밑에서 고난을 위해서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까지 욥은 어떻게 오해를 했는고 하니, "나 같이 중요한 존재에 왜 나를 갉아먹고 힘들게 하는 고난이 들어붙어있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욥이 해답을 찾지 못하고 불만을 터트리는데, 왜냐하면 고난에 오면 어떤 가치가 훼손된다는 겁니까? 자기 가치가 훼손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욥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성경은 여기서 시작하는데, 욥의 친구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그야말로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는 말이죠.

그것은 욥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하나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는 그들이 그만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섬겼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건드리십니까? 납득이 되는 설명을 해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그것을 욥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 내내 욥과 욥의 친구들의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 심각하고 침통하다는 말이죠. 생기발랄하고 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천하의 진리와 십자가의 도를 알기 위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심각하고 침통하다는 것이죠(ㅋㅋ).

* 항상 심각하고 침통해 !!

이게 과연 올바른 태도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심각하고 침통하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시시하게 보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나는 나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선악과를 따먹은 본성을 결코 버리지 못하겠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자기는 자기 속에 있는 양심을 지키는 파수꾼이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바깥쪽을 향하면서, 자기 의와 자기 잘남을 공격하는 자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사정없이 그만 발포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살아가는 것이 심각하고 침통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지금 당장 깨지고 죽어도 전혀 상관이 없어요" 라고 하면서 자기를 시시하게 보지 않는데, 항상 긴장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원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양심의 가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깥으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고 하니, 늘 반성하고 회개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고, 그리고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어디서 그렇다는 겁니까? 쫓겨난, 즉 저주받은 영토에서 그렇다는 말이죠.

항상 심각하고 진지하고 침통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주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지킨다고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늘 반성할 준비가 되어있으면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나만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파토를 내버리시는 하나님 !!

그래도 계속해서 자기 몸이 아프든지 하면, "주여, 저는 몰라도 제 자식만은 안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인데, 그래서 "네 자식을 네 칼로 죽여라"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죠. 그야말로 완전히 파토를 내버린다는 겁니다. 오늘의 강의제목으로 제법 괜찮아 보이는데, 이 파토이 고스톱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라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파토가 나지 않으려고 늘 긴장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서 "감사하세요" 라고 하면, "감사가 무슨 말이죠?"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감사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늘 심각하고 침통하기 때인데, 자기를 지키는 온 신경을 다 쓰는 긴장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죠.

* 감사와 어린아이 !!

이 '감사' 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무장해제'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 무장해체의 전형적인 존재는 바로 어린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못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런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마 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런데 무장해체를 하려면 그만 자기 안에 양심을 지키려는 자아가 발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지식을 쌓고 돈을 벌고 하는 것에는 다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여기에 온전히 쏟아 붓는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자기에게 투자를 한다는 겁니다.

* 무장해제 !!

그러니 무장해체가 되려고 하면, 그동안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했던 무기를 하나 둘, 그렇게 해서 모두 다 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미군이 이라크에서 적군들과 싸울 때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은 모두 포위가 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손들고 나와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는 자기를 지키던 무기를 다 버리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 무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기도였고 전도였고 예배참석이었고 성경공부였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평소에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를 하던 것이 다 목적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시시한 놈이 아니야. 나는 대단해" 라고 하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무기들을 구입했다는 겁니다.

누구로부터입니까? 악마로부터 구입을 했다는 것이죠. 보다 더 단단한 '나', 확정된 '나'가 되기 위해서 말이죠. 그 누구 앞에서라도 "나는 신자다" 라고 외치고 싶어서 이런 무기를 구입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기휴대금지 조치를 내리던지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아니 내가 이런 무기들까지 다 장착하고 있었어?" 라고 하게 되는데, 허리에서 권총을 뽑아서 버리고, 가슴에서 수류탄을 떼내어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자기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저주의 영토에 더 집착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그동안 자기를 지켜왔던 그 모든 것이 말이죠.

* 나는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

누구의 노래처럼 "나는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라고 하게 되는데,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그야말로 바보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장사를 어디 한 두 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자기가 망하기 않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목사가 사람들이 진리라고 여기는 성경말씀을 동원해서 "이렇게 하시면 당신은 망하지 않고, 당신이 원하는 것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제가 놀라운 변신을 시켜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매주 교회에 잘 나오시고, 십일조만 제대로 내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교인들은 "오케이, 콜",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가 만들어놓은 노름판에 끼어들게 되는 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들 심각하고 진지한데, 여기에는 감사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감사는 언제 나옵니까? 개뿔도 자기가 지킬 것이 전혀 없을 때, 그러면 저절로 감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 깔깔깔 !!

왜 옛날에는 여고생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가다가도, 낙엽만 떨어져도 '까르르' 웃고 했다는 것이죠. 요즘은 휴대폰을 본다고 정신이 없지만 말이죠. 왜 웃습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웃을, 즉 감사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집에서 먹을 것 입을 것 다 대주니, 자기는 까불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심각하게 살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굳이 자기가 자기를 소유하지 않아도 타인이 자기의 필요한 것을 모두 제공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무장해제가 되어도 상관이 없는 어린아이의 세상보기인데, 즉 세상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늘만 쳐다본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 하늘나라의 요소가 주님이 보시기에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불러놓고 축복을 하신다는 것은, 여기서 축복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축복을 받는 자가 축복을 하는 자의 속마음을 그대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과 연결해주는 고리로서의 축복이라는 것이죠.

* 예수님 마음의 확대 !!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에 주님이 축복을 하셨는데, 그러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그대로 있었습니까? 그게 아닌데, 성인 남자만 5,000명이 있던 그곳에서, 다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겁니다. 즉 계속해서 확장이 되어나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들이 그것을 얻을 때 자기들이 노동을 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닌데, 무상으로 계속해서 주어진다는 것이죠.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이 없는 곳, 죽음밖에 없는 곳에서 생명을 퍼트리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예수님 마음의 확대'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생명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어른이지만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니고, 주님의 본 마음이 확장되어서 그 마음이 대로 넘어왔다는 겁니다. 주님의 본래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게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데,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죽음과 생명이 분리되어있는 영토 !!

바로 그것이 죽음과 생명이 분리되어있는 지금의 이 영토, 그런데 이 영토는 처음에는 에덴동산에서 합체가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그만 뇌관이 되어서, 하나의 영토가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그러니 그것이 의미라는 것은 둘의 본성이 합쳐서 원래 에덴동산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아담이 그만 '윽' 하면서 죽어서 시체가 된 것이 아니고, 그렇게 선악과나무 밑에 쓰러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죽음이란 영토를 따로 만들어서 생명의 영토와 나누어 졌다는 말이죠. 그것이 죽음인데, 즉 생명이 없어서 죽음이란 겁니다.

금요일 밤에 길에 나가면 생명이 없어도 오토바이를 타고 잘들 돌아다니는데, 그들이 잘도 움직이니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생명이 아닌데, 죽음이 그렇게 날뛰고 있다는 겁니다. 날뛴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날뛰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죠.

* 그 동네 꼬라지 !!

제가 설교시간에 추임새를 듣고 전혀 새로운 경험을 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제가 살았던 대구의 비산동이란 곳이 있는데 서문시장의 장똘뱅이들이 모여서 사는 동네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녁에 보면 가관인데, 술을 먹고 집에 와서는 부부싸움을 하고 자식을 때리고 난리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때 어느 집사님이 추임새를 넣었는데, "그 동네 꼬라지하고는" 라고 말이죠.

그러니 개인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사는 동네가 문제인데, 집단적으로 파악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나만 천국에 가면 된다" 라고 하지 말고, 자기가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성해서 허락하신 자리인지, 그 영토 자체를 파악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 이곳은 생명이 없는 곳인데, 그렇게 생명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중요한데, 그게 저주를 받은 몰골이고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게 생명이 없는 것이란 말이죠. 생명이 없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지 않고, 자기는 그래도 양심적으로 바르게 살고 있다고 하는, 자기 정당성을 지키는 것이 진지하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지 싶은데 말이죠. "나는 죄인이 아니야. 나는 누구보다도 양심대로 살고 있어. 그런데 왜 자꾸 나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는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십자가 이야기와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기존교회가 전도를 전혀 잘못하고 있는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이라고 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자기가 자기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데, 거기에 무슨 사랑을 또 받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가사를 "당신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사람 ♬", 그렇게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은 선악과의 경계 안으로 넘어오지 말라는 것인데,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다는 것인지, 따먹었다고 할지라도 따먹기 이전에 기대한 그 영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인지, 그것이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

* 판의 재편성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서 도로 튕겨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선악과, 생명나무, 인간, 뱀이 각자 그 안에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여기 교재에 보면 풋볼 응원단이 나오는데 말이죠. 그 응원단의 응원대형이 갑자기 바뀌는 것처럼, 그렇게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면 그 모든 것이 재편성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이 '재편성' 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편성이 새롭게 되는데, 즉 판이 바뀌어 버린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이 주인공에서 빠져버리고, 즉 이질적인 두 영토의 주인공이 등장하게 되는데, 한 쪽은 여자의 후손이고, 다른 쪽은 인간이 아니라 뱀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편성이 새롭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 대해서 어떻습니까? 전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확정된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자기가 손을 쓸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은 자기 운명을 이렇게 자기 자신이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 과연 기쁩니까? 기쁘기가 짝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러면 안 돼. 내 것이니 내가 관리해야지" 라고, 그렇게 평소의 행동처럼, 즉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옛날의 속성처럼 덤벼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그 자체가 저주받은 모습인데, 아직도 시시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이죠.

* 나는 시시하다 !!

사람들은 "나는 무엇을 알았다. 나는 무엇을 모른다" 라는 것이 신경을 굉장히 많이 쓰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고, "나는 시시하다. 나는 중요하다" 라고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나는 중요하다" 라는 것을 전제로 깔게 되는데, 그래서 무엇을 하나라도 더 알게 된다면, "나는 더욱 더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소유하게 되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영원히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내가 무엇을 알았다. 몰랐다" 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고, "나는 그야말로 시시한 존재인데, 그런데 왜 오늘도 눈을 떠서 나는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지? 도대체 무엇이 문제야?" 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 다시 하면 !!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하겠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모든 구조가 재편이 된다는 겁니다. '트랜스포머' 라는 영화를 보면, 자동차가 로봇이 되고 또한 로봇이 자동차가 된다는 말이죠. 같은 부속품이지만, 어떤 연결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형체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가 어떻게 배치가 되고 연결이 되느냐에 따라서, 무대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무대세팅을 새롭게 하셨는데, 거기에서 우리 인간은 주인공이 아니라 보조역활로 빠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구조가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영원한 영토인데, 처음의 영토가 나누어져서 두 개의 영토가 된다는 말이죠. 생명나무가 있는 곳은 천국이고, 그게 없는 곳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영원한 지옥불이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유황불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이것은 여기에 인위적으로 우리 인간이 의견을 제시한다든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즉 "너는 선악을 아는데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너는 그만 빠져있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 가인과 라멕 !!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성경에 계속해서 나오는데, 벌써 창세기 4장에 두 인물이 등장한다는 말이죠. 한 사람은 가인이고, 또 한 사람은 그 7대손 라멕이라는 겁니다. 둘 다 얼마나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리고 창세기 11장을 보면, 인간들 전체가 자기들의 이름을 하늘에 닿도록 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가 속한 영토가 어떻다는 겁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해와 달도 잘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사람들도 건드리지만 않으면 다들 착한데, 그리고 겸손하기까지 하다는 겁니다. "저는 배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모릅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여보, 음식이 짭잘무리합니다 !!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중요하지 않고 시시하다고 하다가도, 미처 1초도 걸리지 않고 태도가 돌변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짝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 부부싸움의 계기가 무엇입니까? 북한의 핵 문제입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음식문제로 싸운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음식이 짜다" 라고 해서, 그 문제로 싸우는 게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그 말투로 인해서 싸운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사람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이 자기를 무시하는지 혹은 존경하는지, 그것을 본능적으로 먼저 살피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음식이 짜더라도 "여보님이 오늘 만드신 음식이 오늘 조금은 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베풀어주신 사랑을 생각해서, 기꺼이 이것도 맛있게 먹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면, 결코 부부싸움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ㅋㅋ). (녹취자 - 목사님, 비꼰다고 더 크게 싸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거 좀 짭네" 라고 하면, 음식이 짜다는 문제는 그만 날아가 버리고, "지금 당신의 말투가 왜 그래?"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는 행동태도로 번지게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음식에 손이 자주 가지 않으면 그것도 다 파악이 된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으로는 부부싸움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당신은 왜 나를 소중한 존재로 인정해주지 않는가?"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싸운다는 것이죠. 서로가 다 그렇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조상이 가인이고 또한 라멕이라서 그러한데,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지옥행이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면, 여기 108페이지에 "심판 속에서 재조정이 된 구원 외에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구원이란 무엇이라는 겁니까? 재조정된 영토에서 인간은 주인공이 아닌데, 그렇다면 인간은 구원을 시켜달라는 요청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한 적도 없다는 겁니다. 다만 인간이 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교재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교재 111페이지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 옷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인간 쪽으로 하나님의 응시를 의식하고 서로를 타인으로 간주하면서 만든 겁니다. … 내가 보는 타인상과 타인이 보는 자화상을 한 지점에서 고정시켜보려고 한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란 '나에 대해서 더 깊이 알려고 하지 말라' 라는 타인의 시선에 답하는 심리적 자기 방어 시스템입니다.
------------------------------------------

* 인간의 자기 방어 시스템, '옷' !!

이것이 옷의 의미인데, 자기가 부끄럽거나 말거나 아무튼 "나는 내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남들에게 당당하게 내세우려고 하니 좀 부끄럽다는 말이죠. 그렇게 부끄러우니까, 옷을 만들어서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따로 구축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받은 영토에서나 일어날 일인데, 지옥에 갈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선의 자기 방어 시스템인데, 일종의 사드와 같다는 겁니다. 그런 사드와 같은 자기 방어 시스템이 우리 인간에게 있고, 그것을 장려하고 설치하기 위해서 투입된 것이 곧 악마라는 말이죠.

악마는 자기가 예수님과 싸우는 주인공이면서도, 자꾸만 우리 인간을 앞장 세워서, 우리를 미끼로 사용해서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는 것에 대해서 도발을 하도록 내부에서 부추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말고, 예수님의 존재를 믿어라" 라는 식으로 계속 나간다는 말이죠.

"십자가는 안다고 치고 그냥 넘어가라. 중요한 것은 네가 영생을 얻는 것이야. 왜냐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소중하니까"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나 '나' 라는 이름으로 위장해서, 우리 자신이 선악지식이 영원히 고착이 되도록, 절대로 빠지지 않도록 칩을 집어넣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만 선과 악을 아는 '선악지식'이 가장 소중한 것이 되어서, 그것을 파수하기 위해서 평생을 소비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모든 투자를 다 하는데, 왜냐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는 소중하다는 말이죠. 결코 자기는 시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이 세상의 뉴스와 드라마와 영화를 봐야하는데, 왜 그런 뉴스가 나오고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는지, 그것이 이것으로 다 해명이 된다는 말이죠. "아하, 저 사람이 저런 발언을 하는 것은 자기가 소중하다는 의미구나" 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내 속에는 마귀가 있다" 라는 겁니다. 물론 교회도 그러하고 말이죠.

* 심판 속에서 재조정된 구원 !!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인간은 그 자체를 구원할 수가 없는데, 그렇게 하면 천국이 개판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 속에서 재조정이 된 구원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여기 교재 108페이지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사건으로서 심판 속에서 재조정된 구원 외에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심판이 전제가 되어있는 구원이지, '너는 심판을 받을래? 구원을 받을래? 골라잡아라" 라고 하는, 그런 제안은 없습니다.
------------------------------------------

그러니 심판을 하는 가운데 구원을 하시는데, 이렇게 되면 인간 구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의 구원이라는 겁니다. 뱀의 세력권 안에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구원이 되면, 이것이 첫 번째 실이 되어서, 그것을 잡아당기면 줄줄이 사탕이 되어서 모두 다 나온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죽음의 세계에서 가인과 아벨, 즉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저주의 세계에서 줄줄이 딸려 나오는 약속의 계열, 그 이야기가 바로 성경 이야기라는 말이죠. 이것이 구약이고,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악마가 우리 육신 속에 '나' 라는 것을 집어넣었는데, 그러면 그 '나'는 소중하다는 겁니다.

* 초코릿 사탕 !!

조금 전에 새로운 초코릿 사탕을 이야기했는데, 둘러싸여진 액체 초코릿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죄인데, 왜냐하면 선악을 몰라야 하는데 그만 알았다는 겁니다. 선악을 어기는 게 죄가 아니고, 알았다고 하는 그 자체가 죄라는 말이죠. 그리고 자기는 바로 그것을 지키는 파수꾼인데, 그래서 자기는 중요하다고 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저주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께서는 어디까지 들어오시는고 하니까, 바로 이 소중한 성벽, 마치 여리고 성처럼 강력한 성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에 어떻게 오십니까? 그야말로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서는 아주 극심한 반발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십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십자가로서 인간을 잡아매는 악마의 권세를 이미 이겼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어둠의 권세가 제 아무리 강해도, 십자가의 능력은 그 어디라도 다 돌파가 된다는 겁니다. 마치 방사능과도 같은데, 아무리 두꺼운 벽이라도 모두 뚫고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리고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바로 이것이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는데, "아하, 뚫고 들어오셨구나. 도적같이 몰래 오셨구나" 라고 말이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권세를 부셔버리고, 줄줄이 사탕처럼 끌고 나가신다는 겁니다. 마치 실을 당기듯이 당기면 죽은 시체가 새 새명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즉 그리스도가 스티커처럼 붙어서 새 생명의 위력을 발휘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죄 사함' 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작별을 고하게 되는데, 드디어 자기를 떠나가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자기를 떠나게 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정들고 정들었던 자기 고향을 떠난다는 겁니다.

* 나의 살던 고향은 ♬

그러면 성경에 있어서, 성도의 고향은 어디인고 하니, 희한하게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것이 자기 고향이 된다는 겁니다. 꽃 피는 산골이 아니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곳이 자기 고향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의 고향인데, 그런데 그게 성도가 돌아갈 본향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믿거나? 말거나?" 라고 되겠지만 말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이 땅에 거처할 곳이 없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는데, 그러면서 "이 땅에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없다. 다만 우리는 나그네다. 본향은 따로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죠.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곳은 왜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가?" 라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는 겁니다. 말을 하다가보니 갑자기 90년대 중반에 방영된 '서울의 달' 이라는 드라마와 주제자가 생각이 나는데, 서울에 있다가 시골로 가면서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고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기는 알지만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은 받은 사람은 "그렇지, 바로 그것이야. 내 힘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어" 라고 하면서 납득이 된다는 말이죠.

평생 신앙생활을 해놓고, 즉 그동안 기도하고 전도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자기를 지키기 위한 무기와 같은 것인데, 그런 무거운 쇳덩어리를 들고 있었다는 겁니다. 목사, 장로, 집사, 그런 것들이 다 무기였다는 말이죠. 즉 "나는 이만큼 잘났다" 라는 것인데, 결코 자기를 시시하게 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복음마저도 새로운 무기로 !!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복음도 많이 듣고, 그리고 신학공부까지 하면서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굳건하게 "나에게 있어 내가 제일 중요하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관심을 이 세상에서 찾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래서 '툭' 하고 치면 복음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은 "나는 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안다' 라는 것이 자기의 새로운 무기로 장착이 된다는 말이죠. 누군가가 자기를 자기에게서 빼내어주는 작업을 해주지 않으니, 복음에 대한 지식도 자기를 지키기 위한 무기로서 사용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지식도 악마가 심어준 복음적 지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중요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과 복음에 대한 관심사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데, 그래서 "나도 많이 들었다"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그러니 이제 그만 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예수님을 포함한 구원 !!

여기 교재 108페이지에서 "심판 속에 재조정된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심판이라고 할 때는 예수님을 포함해서 모두를 다 심판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외가 되는 것이 아닌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빈대를 잡기 위해서 초가삼간을 다 태운다는 것이죠. 자기 아들마저도 죽이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출생은 '죄 가운데' 태어난 것인데, 그게 1월이든 6월이든 간에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 10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 두 번 다시 생명나무로 따먹지 못하는 나무로 굳어져있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화염검으로 천사들이 지키는 상황으로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구원은 물 건너갔고,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구원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심판이 찾아오고 저주가 찾아들게 되었습니다.
------------------------------------------

* 주님의 자기 구원의 확대 !!

이렇게 되면 구원을 찾는 것 자체가 수상한 짓이 되고 마는데,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이 우리는 찾아오시는 것도 자기 구원의 확대이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요소를 집어넣어서 자신의 것을 되찾는 작업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자기 영을 집어넣어서 자기 영을 회수하는 작업을 하게 되면, 거기에 딸려서 붙어 나오는 자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그것도 단독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말이죠.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손을 좀 내밀어보세요 !!

그러면 그리스도의 지체에 대해서 여기서 이야기를 좀 할까요? 지난 수요일에 했는데, "손을 좀 내밀어보세요" 라고 하면, 손을 내미는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손가락이 이렇게 있는데, 이것은 얼른 보면 독자적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손가락은 손등에 묶여서 튀어나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데, 그리스도에게서 도저히 탈퇴를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기쁘지 아니하냐는 겁니다. 왜 새삼스럽게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까? 이미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죠. 생명의 영토, 즉 그리스도의 영토에서 이미 구원이 되었으면, 그러면 그 소속이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집사님은 누구 밑에서 일을 하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밑에서 일을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밑에서 일하는데, 자기가 자기에게 스케줄을 짜서 지시하고 명령을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소중하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자기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소중한데, 그래서 주님이 지금까지 이렇게 살려주셨다는 말이죠.

여기 교재 109페이지 중간에 또 어려운 것이 나오는데, "그러면 심판은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왜 어려운고 하니, 교재 108페이지에 보면 "현실은 자신을 위한 현실이 아니라, 너무 일찍 오신 메시야나, 너무 늦게 오신 메시야를 위한 장(場)임을 알리고자 하신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 일찍 오신 메시야가 늦게 오신 메시야로 이어지는 과정이 곧 시간 !!

여기에 "너무 일찍 오신 메시야, 너무 늦게 오신 메시야" 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시간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시간이고 하니까, 메시야가 메시야답게 되는 것이 시간 안에 들어있는 시간의 목적이란 겁니다. 다른 이유로는 시간이 없는데, 인간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인간과 시간은 별개라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시간은, 일찍 오신 메시야가 늦게 오신 메시야로 이어지는 과정이 곧 시간이란 겁니다.

그 밑에 보면 이게 설명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즉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인간에게는 메시야가 너무나 일찍 일하시는 셈이 되고" 라고 되어있는데, 오시는 메시야가 심판주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심판해야 한다는 말이죠. '죽으리라' 라는 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메시야가 그 작업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 심판이 곧 구원 !!

선악과를 심은 분이 그 선악과를 따먹은 자를 심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조치인데, 그리고 심판을 하는 그분이 곧 구원자라는 말이죠. 그러니 너무 일찍 왔다는 것은, 심판을 하시는 메시야가 일찍 심판을 하시는 것이 되고, 그리고 구원을 고대하는 입장에서 보면 메시야가 너무 늦게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심판이 곧 구원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역사를 통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다른 이방 나라들은 몰라도 말이죠. 이스라엘은 악마로부터 벗어나서 따로 만든 나라인데, 유월절의 심판을 통과한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유월절에는 모든 인간들이 다 죽는데, 장자를 죽였다는 것은 "너의 후손이 이제 끝났어" 라는 의미인데, 맏이가 가문을 잇기 때문에 말이죠.

* 새로운 나라의 등장 !!

그런데 장자가 살아있는 새로운 민족이 등장하는데, 그 장자는 인간 장자가 아니고 유월절 양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장자이고, 그게 투입이 되면서 만들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원이 없는 이 세상에 비로소 구원이 되는, 택함을 받은 나라가 등장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새로이 등장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그 어떤 나라이든지 간에 그 나라를 쥐어박으면 그만 맥도 추지 못한다는 겁니다.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즉 힘 겨루기에서 밀리는 게 아니라, 그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힘이 강해서 충분히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는데, 그런데 그만 오히려 먼저 공격한 그 나라가 박살이 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힘이 약해서 전쟁에서 진다고 하는 일반적인 이 세상의 원칙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를 심판하고 있는 중이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는 심판하려고 오셨는데, 그것을 우리는 반겨야 한다는 말이죠. 주님에게 나올 때는 가지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데, "주여, 십일조를 해서 천국에 가려고 했습니다. 기도해서 병이 나으려고 했습니다" 라고 하는, 그 모든 무기들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소중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가당치 않은 이야기라는 겁니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데, 최종적이고 마지막으로 제일로 소중한 것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나는 개입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제가 여기에 태어나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반칙입니다. 저는 태어날 가치도 없고 살아갈 가치도 없고, 그래서 일찍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 조치는 너무나 정당합니다" 라는 마음이 든다고 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구원이 자기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자기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손등에 달린 손가락이기에, 그래서 "내가 소중하다" 라고 하는 동네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고백들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 예수님마저 !!

여기 교재 109페이지에 보면, "구원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심판이 찾아오고 저주가 찾아들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자의 후손의 구원이라는 말이죠. 여기에 인간은 빠지고 없는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이 여자의 후손이 쉽게 이기는 것이 아닌데, 이미 이 세상은 뱀에게 그 권한이 주어져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이 이기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나오는데, 그야말로 연약해서 죽으셨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도, 예수님은 연약하시다는 겁니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이 세상에서의 승자는 악마인데, 그러니 예수님마저 졌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감히 이 세상을 이긴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도저히 악마를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그게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절차를 보아야 하는데, 그래서 "아하, 우리가 노는 동네가 구원이 성사되는 곳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분명히 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가진다든지, 지키려고 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 상처에서의 구원 !!

여기 교재 109페이지에 보면, "지금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는 질문이 나오는데,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면 "상처에서 구원이 일어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 상처는 누구의 상처인고 하니, 여자의 후손의 상처인데, 뱀에게 물렸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멀쩡하게 뱀을 이긴 것이 아닌데, 뱀에게 물린 상처가 있다는 말이죠.

이게 그냥 상처 정도가 아닌데, 그야말로 치명적인 상처로서, 그만 뱀에게 물려서 죽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뱀이 물었다는 것을 온 우주에 공개하는 것이란 말이죠. 아이가 학교에서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면, 그러면 상처가 남아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존재성이 아니고 십자가인 이유가 거기에 있는데,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십자가 눈에 보인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상처를 내밀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 세상의 속성이 드러나는데, 그게 누구를 향하고 있다는 겁니까?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 모든 것이 여자의 후손을 공격하고 있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이 국가의 정책이고 목회의 방침이기도 한데,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모여서 여자의 후손을 공격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공격하는 용도로 지금 악마가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는 말이죠.

국가와 교회를 악마가 모두 다 지배하고 있는데, 심지어 우리 가족도 악마가 이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변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밥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음식이 짜다고 하는 것도 다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이란 말이죠(ㅋㅋ).

* 상처 안의 에덴동산 !!

그러니 상처에서의 구원인데, 그러면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답은 이미 나왔는데, 예수님의 상처 안에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안에 내가 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라고 했는데, 남들이 들으면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은 이미 끝났는데, 그런데 왜 사도바울 당신은 아직도 십자가야?"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은 예수님의 상처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 에덴동산이 아니라면, 다른 에덴동산은 없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예수님을 지켰다고 여겼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그 상처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말이죠. 따라서 우리는 무장해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죠.

이제 교재 11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 그렇다면 죽음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 라는 말씀은 취소될 수가 없고, 그 말씀이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어있는 것이라면, '죽는다' 라는 것의 실체는 시간 속으로 점점 지연되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

여기에 시간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인해서 흘러가는 죽음의 시간인데, 그래서 인간들은 어떻게 됩니까? "태어나서 죽고, 태어나서 죽고, 태어나서 죽고" 라고, 그렇게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죽는다는 말이죠.

* 인간 공동체와 천사의 등장 !!

어제 주일학교 시간에 한 것을 잠시 하겠는데,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생기는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물론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세례요한을 이야기했다는 말이죠.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육신들이 설치는데, 그 인간들이 직접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인간을 배제가 되고 천사가 상대를 한다는 것이죠.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아이가 없었는데, 그런데 여기에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지상에서 알고 있는 이 세상은 "사람+사람" 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사람의 연대성이라고 하고, 흔히 '공동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공동체에서 천사는 탈락인데, 물론 주님도 탈락이고 말이죠.

이 공동체는 인간 대 인간의 공동체인데, 그 시작은 가족이라는 겁니다. 시집을 간다는 것은 시갓집에 간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쪽 공동체에서 저쪽 공동체로 이사를 가는 것으로, 그래서 사돈끼리 만나서 인사를 하고 한다는 것이죠. 물론 둘이서 맞벌이를 해서 따로 독립을 하지만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이 알고 있는 모든 언어는 무슨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고 하니, 인간들끼리의 공동체, 즉 사회 공동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연대성을 말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상한 발언을 하게 되면,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여기에 누가 개입하는고 하니까, 천사가 개입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완전히 난리가 났다는 것인데, 이미 심판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시한 존재, 즉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일을 누가 하는고 하니, 천사가 받아서 해버린다는 말이죠.

베드로가 갇힌 옥문을 누가 열어주었습니까? 베드로가 알아서 그 옥문을 열었습니까? 천사가 지진을 만들고, 또한 직접 와서 열어주었다는 겁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고 있었는데, 깨워서 나가게 했다는 말이죠. 베드로가 "누구십니까?" 라고 하니, "나는 천사다"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또 천사의 존재를 연구하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천사가 왔다는 것은, "네가 연구를 하든 무엇을 하든, 네 구원에 있어서 너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사가 하는 일은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지금 너에게 이런 일을 시킨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전령이라는 말이죠.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목자들이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그 들판을 여러분도 직접 한 번 보셔야 한다는 겁니다. 1인당 5백만원인데 말이죠(ㅋㅋ).

* 아, 그 들판 !!

저는 그 들판을 보면서 누가복음 2장을 생각했는데, 한 밤 중에서 목자가 들판에서 양을 치는 장면이라는 겁니다. 요즘은 그곳을 '서안지구' 라고 부르는데, 그 들판에 천사가 온다는 말이죠. 그 목자들은 어디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그냥 하루 일당으로 6만원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너희는 땡 잡았어. 너희는 복을 받았어" 라고 하는데, 그러자 목자들이 "왜 그러시는데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천사가 "빨리 베들레헴에 가라" 라고 하는데, 그 거리가 2km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갔는데, 지금은 그곳에 교회를 지어놓았다는 겁니다. 물론 저는 뛰어가지 않고 택시를 타고 갔는데 말이죠(ㅋㅋ).

거기서 목자들은 아기가 구유에서 태어난 모습을 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목자들에게 일당 6만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목자라는 존재, 즉 '나' 라는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은 다 시시하다는 말이죠. 진짜 중요한 것은 천사가 이야기한, 즉 메시지가 결합된 존재라는 말이죠.

* 메시지가 결합된, 새로운 이스라엘 !!

그리고 그 목자들은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목격자로 지정했다" 라고 하는 것인데, 바로 그 사실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또한 주님의 주님의 백성이라는 말이죠.

(눅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눅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눅 2: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눅 2: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눅 2: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눅 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눅 2: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여러분, 무엇이 중요합니까? 꼭 목사가 되어야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만약 자기가 십자가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라고 하면, 하늘과 땅에서 그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거지 나사로가 천국과 지옥에서 유명한 것처럼, 또한 사도바울이 귀신들에게 유명한 것처럼, 주님의 증인, 즉 목격자는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증거할 것은 주님의 상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악마에게 물어뜯긴 주님의 그 상처로 인해서 저희들이 악마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그 일에 증인 된 것을, 새로운 영토에 속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6,16 오후 7시에 마침.

저의 상처는 집에서 키우는 개들이 핥아주는데, 주님의 상처는 누가?

'대구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세와 십자가  (0) 2021.08.05
인간의 소실  (0) 2021.06.29
연결된 몸통  (0) 2021.05.27
처벌없는 죄인  (0) 2021.05.12
의미와 무의미  (0) 2021.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