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의미와 무의미

아빠와 함께 2021. 5. 12. 18:46

[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26 - 의미와 무의미

21,04,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95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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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종식되고, 하나님이 약속으로 제시한 '여자의 후손 + 생명의 후손' 사이의 화해의 장이 악마의 투쟁의 모습으로 지상에 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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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약속으로 주어지는데, 모든 인류의 역사는 바로 이 약속에 준해서, 약속이 심지가 되어서 그대로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여자의 후손은 누구이고, 그리고 뱀의 후손은 누구냐는 말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은 반드시 결합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생명의 후손과 결합이 되고, 그 생명이 하와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은 '1'이 아니고 '2'가 된다는 것이죠. 반면에 뱀의 후손은 결부되는 것이 없는데, 그래서 독자적이라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은 '나+너'가 되지만, 뱀의 후손은 '나'가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결탁되는 것이 없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즉 뱀은 '나' 라는 것이 최고라는 말이죠.

뱀은 반복해서 그 정체를 드러낼 뿐이고, 반면에 여자의 후손은 역사 속에서 생명의 후손과 결부가 되어 나타나기에, 여자의 후손은 '2'가 되고, 뱀의 후손은 '1'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 라고 하면 뱀의 후손이 되고, 그 '나'가 마지막, 즉 '1'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나'가 아닌 하나님이 준비한 또 다른 '나'가 있다고 하면, 그 '나'는 뱀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 율법 외에 한 의 !!

이것을 율법을 가지고서 설명해보면, 로마서 3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기에 율법, 즉 성경말씀이 있는데, 그런데 이것을 뱀의 후손이 지키게 되면,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그것은 '나의 의'가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우니, 그리고 그것을 자기가 지켰으니, 그것이 '나의 의'가 된다는 말이죠. 전혀 어렵지 않은데, 자기가 말씀을 지키게 되면, 그렇게 말씀을 지켰다고 하는 의가 남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킨 당사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 외에 한 의가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지킨 율법이 아닌 다른 분이 율법을 지키게 되면, 그래서 율법 외에 한 의가 된다면, 그러면 비교대상이 있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지킨 자기의 의, 그리고 생명의 후손이신 주님이 지킨 주님의 의, 그렇게 의가 1개가 아닌 2개 등장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율법의 한 의를 통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로 시작해서 자기로 마감이 된다면 뱀의 후손인데,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고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게 뱀의 후손들인데, 쉽게 말해서 오늘날 교회가 하는 짓거리가 곧 악마가 하는 짓거리라는 겁니다.

제 아무리 성경공부를 하고 말씀을 듣고 해도, 그것을 지킨 자기가 잘난 존재가 되기 때문에, 즉 '1'로 시작해서 '1'로 마감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뱀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의 경우에는 '2'가 되는데, 율법 외에 한 의가 등장한다는 말이죠.

* '나', '나', '나' !!

그게 로마서 3장에 나오는데, 21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과 하나님의 한 의, 그렇게 하나가 아니고 두 개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하나가 아닌 둘로 구원을 하신다는 겁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왜 그렇습니까? 이미 이 세상은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인데, 그래서 다들 악마를 닮아있는데, 자기밖에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가 하는 짓이 자기 잘남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만 머리에 가득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나' 라는 것인데, 절대적 '나', 자기밖에 모르는 '나',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시니까, "야, 저것을 지켜야 하겠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지키면 자기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죽어서 자기에게 좋은 천국에 가니 그게 좋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라는 겁니다.

* 그런데, '너' 말고 '나' !!

그런데 신약에 오면 천국은 누구의 나라입니까? 자기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인데, 그러니 이 세상 전부가 자기밖에 모르는 '하나', '하나', '하나', 그런 하나인 세계에서 예수님은 어떤 세계를 보이시는고 하니, '너' 말고 '나', 그렇게 두 개가 등장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그 내용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두 개인데, 즉 창세기 3장 15절에는 두 개의 상반된 질서, 혹은 두 개의 대상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 하나의 이름은 여자의 후손, 또한 다른 하나의 이름의 뱀의 후손이라는 말이죠.

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제일 싫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에는 자기만 있어야 하는데 여자의 후손이 따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누군가가 '쑥' 들어오게 되면, 그게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뱀은 무엇을 밀어내려고 애를 쓰는고 하니, 그것이 여자의 후손인데, 그렇게 뱀이 여자의 후손을 밀어내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에게는 율법이 있다. 성경말씀이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내가 지킴으로서 나의 의가 보장이 되고, 그런 의가 있는 자는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간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 라는 종교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온다는 말이죠. 즉 "교회에 나온 착한 일을 한 내가, 나중에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오늘날 교회는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하나가 아니고 둘로 갈라지는데, 즉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으로 갈라진다는 것이죠.

* 너는 너의 집으로, 나는 나의 집으로 !!

그렇게 '1'과 '2'로 갈라지는데,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데, 그렇게 다르니 '1'이 아니라 '2'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찢어지는데, 젊은 아이들이 하루종일 같이 놀다가 집에 갈 때는 "우리 그만 찢어지자" 라고 하는데, 즉 "너는 너의 집으로, 나는 나의 집으로 가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나만 되면 편한데, 즉 자기만 살면 편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둘이 되니 어떻게 됩니까? 이게 찢어질 판이라는 말이죠. 이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우리 주위에 있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보라는 겁니다. 둘을 귀찮아하는데, 평소의 태도가 그러하다는 말이죠. 즉 "나만 편하면 그만이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인간은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데, 자기가 제일 중요하다는 겁니다.

* 율법 외에 한 의 !!

그러니 우리 인간은 궁극적으로 '나 말고'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 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네가 중요해? 그런데 너보다 더 중요한 분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율법 외에 한 의'가 등장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니 인간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그 말씀을 지키는데, 그런데 '나' 말고 다른 '나'가 있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율법 외에 한 의' 라는 것이죠. 그러니 의가 두 개가 나오는데, 즉 '2'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두 번째의 '1'은 기존의 '1'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나의 소중함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그렇게 후손이 두 개가 되는 취지가 살아난다는 것이죠. 이게 결코 어렵지 않은 이야기라는 겁니다.

* 여보, 교회에 가자 !!

예를 들어서,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을 보고 "여보, 오늘은 교회에 가자" 라고 한다면, 남편은 "싫어, 나는 등산을 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내는 "왜 그래?" 라고 하는데, 그러면 남편은 "내가 등산을 가고 싶어서 가는데, 그런데 당신이 왜?"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반대로 남편이 아내를 보고 "여보, 오늘은 등산을 가자" 라고 한다면, 아내는 "싫어. 나는 교회에 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남편은 "왜 그래?"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아내가 "내가 교회에 가고 싶어서 가는데, 그런데 당신이 왜?" 라고 하면 안 되고(ㅋㅋ), "주께서 가게 하셨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불신자는 하나에서 시작해서 하나로 끝나는데, 그렇게 하나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신자는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고 하니, '율법 외에 한 의' 라는 겁니다. '나' 말고 다른 분인데, 그래서 "주님이 교회에 가라고 하니 간다" 라고, 달리 말하면 "너는 너 혼자 살지만 나는 주님과 더불어 산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신자라는 것이죠.

* 집에 물이 새는 것과 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관계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2층 양옥집을 하나 샀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데 그런데 비가 오니까 그만 1층이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집을 분명히 잘못 산 것인데, 그렇다면 이렇게 집을 사는 것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관계는 어떠하냐는 말이죠. 이런 것이 어렵다는 겁니다.

이번에 오세훈 씨가 서울시장이 되었는데, 그러면 오세훈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관계는 어떠하냐는 것이죠. 이런 것은 유투브에 나오지 않는데, 참 우리모임도 유투브에 나오니 이것도 나온다고 할 수 있는데, 요즘 유투브에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는 겁니다(ㅋㅋ).

그런 것을 우리가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항상 우리가 무엇을 끄집어내어야 하는고 하니, 이게 중요한데 말이죠. 그 어떤 경우라도 문장에서 '주어'를 끄집어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세훈이 서울시장이 되었다" 라고 하면 주어가 오세훈인데, 즉 오세훈부터 시작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1이 되어버리는데, 즉 뱀의 후손에 속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시장이 되게 하셨다" 라고 하면, 그러면 겉으로 보기는 오세훈이지만, 옥상옥으로 그 오세훈을 넘어서 주님이 계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은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이 피조세계에서 결단코 양보한 적이 없는데, 바로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 아브라함의 경우에 !!

그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아들인 이삭을 돌 위에 눕혀놓고 칼로 찔러서 죽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외부에서 보면, 그렇게 죽이는 행동의 주인공이 누구인고 하니, 아버지인 아브라함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창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그러면 아브라함을 보고 "당신은 왜 당신의 아들을 죽입니까?" 라고 하면, 아브라함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믿음의 내용이 나오는데, 즉 "내가 시작점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에게 시킨 일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신앙인이라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평소에 자기 아들을 죽이고 싶어한 것이 결코 아닌데, 그런데 문제는 자기의 주님이 되는 분께서 시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율법의 의'에 자기가 머물지 않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가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그런 율법의 의에 머물지 않고 어디로 가는고 하니, 율법 바깥에 있는, 즉 '율법 외에 한 의'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니라, '율법 외에 한 의'가 개시한 일이라는 것을 자기가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죠.

*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빼버려 !!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기 아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죽였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믿음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임으로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더불어 일을 하시는데, 그런데 그 아브라함을 그만 발로 차버린다는 말이죠.

이런 것이 어려운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을 시키면서도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을 그만 빼버리고, 하나님이 하나님끼리 일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은 누구와 일을 하는고 하니, 생명의 후손과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아버지는 아들하고만 일을 하시는데, 그게 신앙이라는 겁니다.

* 아버지와 아들만 !!

그래서 '율법 외에 한 의' 라고 할 때는, 그 의가 자기 좋아라고 하나님이 주신 의가 아니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의이고, 그 매개체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밖에 모르는 '나'를 통해서 주님이 영화롭게 되신다는 말이죠. 율법으로 지켜서 의가 되지 않으니 다른 것을 찾다가 "여기 율법 외에 의가 있구나. 이것을 믿어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마감되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가 그만 주어가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뱀의 후손과 다를 바가 없는데, 즉 '1'로 시작해서 '1'로 끝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2'가 나오되, '나'가 아닌 두 번째로 등장하신 분, 즉 '나'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등장하신 분, 그래서 '2'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증인이 되는데, 즉 그분에게 종속이 된다는 말이죠.

* 인간은 '쌍'을 이루어서 !!

그러면 교재 95페이지를 계속해서 하겠는데, 여기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한 글자로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쌍' 이라고 표현을 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타인과 쌍을 이루는 존재로서 살게 된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결코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 하와의 후손은 누구와 쌍을 이루는고 하니까, 아담의 후손과 쌍을 이루는데, 아담은 그 이름의 뜻이 '흙'이고, 하와는 그 뜻이 '생명'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과 흙이 쌍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죠. 혹은 부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자녀를 낳게 되는데, 그 자녀에게서 한 사람은 가인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가인이 된다는 말이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아닌데, 영원히 갈라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여자의 후손을 지상에 실현시키기 위해서 등장한 인간, 즉 하와의 후손인데, 그 후손을 통해서 두 자녀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나온 가인과 아벨은 서로 대립적이라는 겁니다. 서로 충돌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 터진 것이 살인사건이라는 말이죠.

* 살인사건 !!

이 살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한 쪽을 없애는 것인데, 즉 가인이 아벨을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 살인사건은 예수님도 언급을 하셨듯이, 즉 "아벨의 피, 스가랴의 피가 나에게 지어졌다" 라고 하셨는데, 이 살인사건은 곧 십자가 사건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사건 사이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그렇다면 오세훈 씨의 경우에 "내가 서울시장이 된 것은 주님의 뜻이다" 라고 했다면,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는데, 하지만 본질에는 전혀 들어가지도 않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뭐라고 해야하는고 하니, "내가 서울시장이 되었지만 이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거기까지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증거해야, 즉 십자가의 요소와 나와야만 그게 성도이기 때문에 말이죠. 큰 교회의 당회장이 되어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지 않는 목사는 없는데,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는 나중에 나갈 때는 "돈 내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짓이냐는 말이죠. 전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죠.

"나는 아버지로서 자식을 잘 키웠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이야기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나는 너를 키우면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았다" 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응용문제가 별로 어렵지 않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 나는 의미를 가질 자격이 없다 !!

그렇다면 조금 전에 이야기한, 집을 잘못 샀을 경우에, 그래서 비가 줄줄 샌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인 흉내를 내려고 "그것도 다 주님의 뜻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더 나가면, 비가 새는 집을 구입한 자기의 모든 것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집이 새든 말든 간에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 인해서 나오는 고백인데, 자기가 집을 잘 샀든지 못 샀던지 간에, 비가 새든지 말든지 간에, 그러한 것들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서울시장이 된 것이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의미를 가질 자격이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 우리 몸이 이렇게 있는데, 그러면 이 두 개가 다 우리 몸 속으로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여자의 후손인가? 뱀의 후손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주어가 되어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죠. "나는 여자의 후손이 되어서 천국에 갈 거야" 라고 자기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인데, 자기가 주어가 아니기에 말이죠.

그러니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도, 여기서 누가 구원을 받을지, 거기에 대해서 에서나 야곱이 어떻게 결정할 수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야곱과 에서가 이 땅에 태어났을 때, 그때 엄마인 리브가는 임신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전혀 아니었다는 말이죠.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들은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짜증을 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화를 내든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태어났다고 하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중에서 자기가 어디에 속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이 '나' 라는 육체의 공간을 사용하셨다는 말이죠. 그게 피조물의 도리인데, 자기가 어느 쪽인지, 그것을 자기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 체르멜로 공리(Zermelo 公利) !!

이것을 조금 더 논리적으로 정리를 해보겠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세세하게 일반적으로 일어난 모든 일들이 복음으로 파악이 가능하다는 말이죠. '체르멜로 공리'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핵폭발이 일어난 러시아의 체르노빌이 아니고(ㅋㅋ), 이것은 사람 이름인데, 수학의 집합론 이론에 보면 이게 나온다는 겁니다.

이 '집합론' 이란 것은 다른 말고 하면 '다수론'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다수를 이해해주어야 사회, 국가, 가족, 교회와 같은 것들이 이해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럿이라는 겁니다. 이런 여럿으로 뭉친 하나의 단체가 성격이 어떻게 되는지, 그런 것을 규명할 때에 수학이 다수론이 동원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체르멜로 공리'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집합에서 한 원소를 골라내든지 선택하게 될 때, 그 선택한 원소들의 다수는 새로운 집합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앞에 빠진 것이 있는데, 공집합이 아닌 집합에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어려우니까 일단 생략을 하겠는데 말이죠.

이것을 줄이면, '선택', '새로운 집합(단체)', '새로운 대표',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이것은 공리라는 겁니다. 공리라는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것인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표정들을 보니 벌써 힘들어하는 분위기인데, 그것은 제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니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보도록 하겠는데 말이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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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멜로(Ernst Zermelo) - 베를린 출생. 1910년 취리히대학교 교수, 1926년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수학분야에서는 집합론·기초론을 연구하였으며, '체르멜로의 선택공리'(1904)가 있다. 또한 통계역학도 연구하여, J.W.기브스의 통계역학을 번역하고 소개하였으나, L.볼츠만의 H정리에 관해서는 이른바 '재귀성(再歸性)의 반론'을 제출하여 이를 비판하고 논쟁하였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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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공리 - 공집합이 아닌 집합에 대하여 공집합이 아닌 부분집합들의 모임이 있다고 하자. 선택공리란 각 부분집합에서 하나의 원소를 선택하여 집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러 동아리들의 모임이 있을 때, 이 선택공리에 의하면 각 동아리의 대표들로 집합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백과, 대한수학회 제공,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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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게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는 겁니다. '1' 따로, '1' 따로, 그래서 '2' 라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이것을 선택한다는 겁니다. 공리라는 것은 "네가 인간이냐? 그러면 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반박이 안 되지? 같은 인간이잖아"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삼각형은 세 변으로 되어있다" 라고 하면, 여기에 대해서 반발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공리인데,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반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총각이다" 라고 하면,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 그러나 공리는 마귀적 !!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공리가 너무나 마귀적이라는 말이죠.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마귀적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공리는 '2'가 아니고 '1' 이라는 것인데, 즉 인간들만의 세계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란 말이죠.

예를 들어서, 이렇게 동창생이 10명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나와 같이 낚시를 갈 사람은?" 라고 하면 10명이 모두 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분명히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3명이 따라나왔는데, 그러면 자기가 낚시를 같이 갈 동창생을 따로 뽑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선택을 했는데, 그러면 동창생 10명 중에서 3명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서 자기가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반박이 되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체르멜로 공리' 라는 것인데, 반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삼성그룹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삼성그룹의 직원들이 따로 있고,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또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새로운 단체가 된다는 말이죠. 반박이 되지 않는데,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악마적이냐는 것인데,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다는 겁니다.

* 선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

'선택' 이라는 말을 할 때는 그 선택의 주인공이 있는데, 자기가 선택의 주인공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선택했다는 자기 의지가 등장하고 자기 결정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지를 주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을 하도록 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어떤 전략을 꾸미는고 하니, "인간이 선택한 신은 반드시 진짜 하나님을 죽이도록 되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인간이 선택한 신은 반드시 하나님이 죽이게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선택공리에 의하면 선택한 것은 새로운 단체가 되고, 그 단체는 선택한 자가 대표자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여기서 새로운 '1'이 생기게 되는데, 그 '1'은 라이벌 '1'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악마는 결코 '2'를 용납하지 않는데, '1', 즉 '나'만 남아있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불로동의 '장모님 김밥'을 선택해서 샀는데, 그런데 점심 때 먹어보니 우리동네의 김밥보다 맛이 못한 것 같다는 겁니다. 그렇게 선택한 자가 오야붕, 즉 '1'이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기의 선택이 남에게 흠집으로 잡히는 것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우리 손자가 1등이다 !!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는 하는데, 그렇다면 제일 잘 뛰는 아이가 1등이 되기를 원합니까? 자기가 아이가 1등이 되기를 원합니까? 당연히 자기 아이가 1등이 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바램과를 달리 자기 아이가 7명 중에서 꼴등인 7등으로 달린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어디에선가 강풍이 불어서, 앞에서 달리던 아이들은 다들 넘어지고 자기 아이가 1등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아이의 할아버지가 그것을 보고 있다가 "이번 달리기는 무효다" 라고 합니까? 그게 아닌데, 그대로 밀어 부치는데, 왜냐하면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 인간의 손에 죽은 신이 진짜 하나님 !!

그러니 인간이 선택한 신은 반드시 하나님을 죽어야하고, 그렇게 인간의 손에 죽은 신만이 진짜 신이라는 겁니다. 즉 반드시 악마의 후손이 일을 벌리게 되고, 그렇게 해서 살인사건이 일어나 주어야만, 그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교회에 와서 사람들이 "나는 예수님을 믿을래" 라고 한다면, 그것은 누가 믿은 겁니까? 자기가 선택한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믿기로 작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예수를 믿는 새로운 단체에 내가 선택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 단체의 대표자는 내가 되어야 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누가 한 짓입니까? 마귀가 한 짓이라는 것이죠.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마귀의 짓임을 우리는 전혀 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십자가 요소가 그만 날아가 버렸다는 겁니다.

* 장로님, 잠시 들리겠습니다 !!

이것은 간단한 경우인데, 조금 더 복잡한 예를 살펴보자는 말이죠.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일방적으로 자기 집에 불러서, "우리 집에서 라면을 먹고 갈래?" 라고 한다면, 억지로 끌려간 그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당신 집에 내가 왜 끌려와야 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응용문제인데, 즉 "내가 오고 싶지 않아도 당신은 나를 강제로 끌고 왔기에 나는 반발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체르멜로 공리를 집어넣으면, "나는 어느 집에 가도, 내 의지로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해서 갑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강제로 끌고 간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자기를 데리고 갔다고 문제시하는 그 사람이 문제라는 겁니다.

제가 만약에 시내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장로님, 잠시 들리겠습니다" 라고 하면, "원수야, 오지 마라" 라고 하지는 않는데(ㅋㅋ), 그런데 부인인 권사님이 무엇이 걱정이 되는고 하니, 짐이 청소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말이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손님이 올 때는 청소가 되고 난 다음에 오는 것이 내 방침이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그게 자기의 선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은 뱀의 후손인데, 즉 "내가 주인공이 되는 의미가 없는 살아갈 수 없다" 라는 것이 원칙이 된다는 말이죠. "나는 주인공이다" 라는 것을 유지하는 조건 하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결정, 자기 선택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직 청소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찾아오면 내 체면이 무엇이 되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동안 알았던 복음이고 십자가고 간에 그 순간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자기는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철벽방어하면서 살아왔음이, 손님이 갑자기 찾아오는 순간 다 들통이 나고 만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갑자기' 가셨는데, 청소도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삭개오의 반응이 참 놀라운데, "어찌 주님 제 집에 다 찾아오십니까? 그야말로 황공하옵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찬송가에도 보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님이 계신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라고 하는데, 공간개념이 없다는 겁니다.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무의미에 정착하라 !!

그런데 인간은 '나' 라는 것이 있으면 그 주변에 자기 영역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의미'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결정한, 그렇게 축적된 모든 것이 자기 의미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의미에 정착하라" 라고 하는데, 의미가 아닌 무의미에 말이죠.

1978년에 김만중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가 있는데, 그게 바로 '모모' 라는 겁니다. 다들 알고 있지요? 이 모모는 어린아이를 의미하고 있는데, 그 노래의 가사에 보면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방랑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해서 계속해서 떠돌아다닌다는 겁니다.

이 모모는 '자기 앞의 생' 이라고 하는 프랑스 작가인 에밀 아자르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인데, 그 모모는 철부지이고 방랑자라는 겁니다. (녹취자 - 그동안 독일 작가인 미하엘 엔데의 소설인 '모모' 라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고 에밀 아자르의 소설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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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 - 김만중(1978) ]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 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듯이 날개 짓하며,
날아가는 니스(Nice. 프랑스 도시)의 새들을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 바늘이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 바늘이다.
우~우우 우우 우 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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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여기서 철부지나 방랑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간들의 삶은 늘 새로운 의미를 얻기 위해서 떠돌아다닌다는 것인데, 그게 곧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표면적 삶' 이라고 했는데, 일차원적이라는 것이죠. 선분 위를 왔다갔다하는데, 바깥으로 도약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오세훈이 서울시장이라는 바위표면에 붙어있는데, 그렇게 모두가 붙어있는 존재라는 말이죠. 초월적인 존재가 아닌데, 초연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는 거기에 붙어있으니 그 붙어있는 영역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 세상은 의미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복음인데, 그러니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최종적이 '2'가 되시는 분이 오셔서 '1'을 부정해버리는 것인데,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죠.

강의를 다시 하겠는데,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는데, 그러자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달라붙었다는 겁니다. 율법을 지켜서 자기가 천국에 가겠다는 말이죠. 그런데 '율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외에 한 의'도 있는데, 그게 바로 '2'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중복되어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주님이 선택하시는데, 누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갈지, 그것은 주님이 결정하고 선택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들은 체르멜로 공리에 의해서 자기가 결정하고 선택을 한다는 말이죠. 자기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는 것인데, 그리고 그것을 두고 "나의 나됨의 의미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집에 찾아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반응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 "당장 나가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당연한 것인데, 그래서 그 이웃이 누가 되었던지 간에, 아벨이 되었던 스가랴 선지자가 되었던 사도바울이 되었던 주님이 되었던 간에, "당장 나가주세요" 라고 즉각적으로 반응을 한다는 겁니다.

물론 관념적으로는 "아, 예수님이시군요. 들어오세요" 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장 나가주세요" 라는 것이 먼저라는 말이죠. 자기가 알아서 심방을 요청하든지 할 때 오라는 겁니다. "강제를 나를 왜 끌고 가십니까?" 라고 하면서, 버티고 반항을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미 기본적으로 '1'에 익숙해져있다는 겁니다.

* '쌍'과 '쌍'이 서로 충돌을 !!

그렇다면 '율법 외에 한 의' 라고 했는데, 이 두 번째 의의 세계가 첫 번째 세계에 어떻게 침투하느냐는 말이죠. 모든 것이 '쌍'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그 쌍과 쌍이 서로 충돌을 한다는 겁니다. 그 대결하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즉 예수님의 선택과 결정이 나의 선택과 결정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박살을 내어버리는지, 그게 우리는 궁금해야 한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여 없애버리는데,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런 일을 시켰습니까? 아들 이삭은 '1'이 아니고 '2'에 속한 인물인데, 이삭은 아브라함 자신이 낳은 자식이 아니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약속의 자식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1'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2'인 이삭을 죽이게 함으로서, 아브라함이라는 죄인을 누가 구원하는고 하니, 아브라함의 손에 죽었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의인이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체계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유일하게 선택하신 체계라는 말이죠. 다른 체계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선택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닌데, 지옥을 선택하는 자가 누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자기 선택은 항상 천국인데,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니 생각이고"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따로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이 자기 속에 침투를 했는지, 그게 아니면 자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재롱을 피우면서 봐달라고 매달리는지, 그것을 어떻게 결정하느냐는 말이죠.

이게 매우 중요한 결정인데,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가 율법 외에 한 의를 믿고 있는지, 그게 아니면 주님이 결정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는지, 그것을 자기가 어떻게 아느냐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쉬어 가는 의미에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겠는데 말이죠.

* 무의미한 '3×2=6'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무의미의 세계인데, 체르멜로 공리의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세계는 마귀의 세계라는 말이죠. 그러니 수학이나 과학 등이 결국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데, "3×2=6" 이라고 하면, 이게 맞습니까? 틀립니까? 물론 맞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은 지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지식을 그만 진리로 전환을 시키는데, 하지만 과연 진리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리냐는 말이죠. 요한복음 14장에 의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진리라는 것이죠. 그러니 "3×2=6" 라는 것을 진리로 보면, 이것은 그야말로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2층 양옥집이 비가 새든 말든 간에, 그 집을 제대로 샀던 말았던 간에, 그 집에 살고 있는 자기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집이 새든 말든,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어떻게 이제 응용이 되었습니까?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의미가 없게 만드는 그 의미, 그게 곧 진리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3×2=6" 라는 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자기를 개무시하시는 그분, 그분이 진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를 개보다도 더 못하게 여기는 슬로보니게 여인이야말로 진리를 만났다는 것이죠. "우리 집은 아직 청소가 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는 게 진리가 아니고 말이죠.

삭개오처럼 청소가 되었던 말았던 간에 주님이 오시면 반겨드리는 것, 그게 바로 구원이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말고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를 박살내기 위해서 '쑥' 들어오시면 반겨 맞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죠.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하나님이 아닌 복음 !!

무의미의 세계에 대해서 두 가지를 해보겠는데, 그러면 먼저 우리는 신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합니까? 복음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합니까? 신이 아니고 복음인데, 하나님이 아닌 복음이란 겁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마귀의 세계인데, 사도들은 신이 아닌 복음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이죠.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에 의해서 성취된 것인데, 즉 아벨의 후예, 스가랴의 후예로서 오신 분이 복음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전도를 한다고 하면서 무엇을 가지고 다투는고 하니, 하나님의 존재, 즉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을 가지고 싸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전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복음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오세훈이 서울시장이 되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라는 식으로 말이죠.

* 인간은 기계다 !!

이런 무의미의 세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복음의 세계이고, 즉 이 세상을 의미가 아닌 무의미하게 본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까, 복음도 아니면서 복음을 흉내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과학이라는 말이죠. 그 중에서도 인공기계인데, 즉 인간을 기계로 본다는 겁니다.

요즘 젊은 아이들을 오토바이를 타고 마구 돌아다니는데, 그것은 오토바이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이란 말이죠. 스스로 자기를 기계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으로는 완전히 망가진 것인데, 그래서 사람을 죽여놓고 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는 사람을 죽이라는 기계라는 겁니다.

* 주님(2)이 누구인가?

이렇게 기계라고 한다는 것은 마귀가 들려서 그런 것인데, 무의미의 세계에서 과학이 이러한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복음은 무엇입니까? "나(1)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2)이 누구인가?" 라는 겁니다. 즉 "주님이 나에게 어떤 결정을 하셨는가?" 라고 하는 것, 그게 바로 복음이라는 말이죠.

일단 이렇게 해놓고 아까 제가 던진 질문을 해보겠는데,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면서 의미로 가득한 이 세계에, 그것도 체르멜로 공리에 의해서 각자 모든 것이 자기가 다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직장, 이 가정에 대해서는 손대지 말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인턴사원의 경우에 !!

체르멜로 공리를 여기에 적용시켜보면, 예를 들어서 회사에 어떤 사람이 신입의 인턴사원으로 들어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회사는 하나의 집합이 되는데, 즉 다수가 모인 집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인턴사원은 생각하기를,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내 통장에 매달 돈이 들어온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이 회사에서는 인턴사원이 대표자가 아닌데, 왜냐하면 이 회사에서는 자기의 선택과 결정을 빼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라고 하셨는데 말이죠. 아무튼 인턴사원은 참 좋은데,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다가 자기는 6시에 퇴근을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이메일로 업무를 지시하는데, 보통 하루에 50개를 하게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느 말 여기서 49개는 잘 했는데, 하나는 그만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클레임이 걸리고 난리가 났는데, 그러면 회사에서는 조사를 해서 이 인턴사원에게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책임을 묻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인턴사원은 자기가 돈을 번다는 것이 그냥 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택의 책임에 의해서 벌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인턴사원이 취할 태도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직서를 내는 것이란 말이죠. 그 회사에 뼈를 묻을 각오라면 용서를 빌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사직서를 내던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인턴사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이 단체에 소속은 되어있지만 대표적인 책임과 같은 것은 전혀 지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직서를 내던지고 다른 회사를 알아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회사는 그 사람에게 무의미한 것이 된다는 말이죠.

* 그런 것은 듣기 싫어요 !!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십자가를 믿습니까?" 라고 하면, "예,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당신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습니다" 라고 하면, "그런 것은 듣기 싫어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끝까지 자기는 부정을 당하지 싫다는 것인데, 자기의 선택과 결정이 있는 자기 의미의 세계가 십자가 앞에서 깨지기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십자가를 전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나갈 사람은 나가라는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다 끌어 모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 의미가 손상을 당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이든 예수든 간에 말이죠. 이게 바로 뱀의 후손의 특징인데, '1'로 시작해서 '1'로 가서 마감도 '1'로 된다는 겁니다. '쌍'이 없는데, 하나님이든 뭐든 간에 자기 좋아라고 믿는다는 말이죠. 자기 선택, 즉 자기가 자기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이것은 고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판도라의 상자 !!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도 이러한 인간의 자기 위주가 모순이 있고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죠. 고대 그리스 신화에 보면 '판도라의 상자' 라는 것이 있는데, 원래는 이게 항아리인데, 이것은 상자의 이름이 아니고 여자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 상자의 뚜껑을 열면 온갖 악하고 지저분한 것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 상자를 열면 안 되는데, 그래서 제우스는 열지 말라고 했지만, 이것이 마치 선악과 같아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다는 말이죠. 그래서 판도라가 여니 온갖 재앙들이 다 튀나왔는데, 하지만 마지막으로 상자에 희망이 남게 되었고, 그래서 이 세상에는 희망만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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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도라의 상자 - 판도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인간들에게 불을 훔쳐다 주자 그 대가로 인간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는 헤파이스토스(기술, 공예자이자 대장장이)에게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헤파이스토스가 여자를 빚어내자 다른 신들은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저마다 여자에게 선물을 주거나 자기가 지닌 재능울 불어넣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단박에 판도라가 겉보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마음속에는 거짓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에피메테우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짝, 반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때, 제우스는 그들 부부에게 결혼 선물로 상자 하나를 주었다. 그러면서, "이 상자를 받아서 안전한 곳에 고이 간직하거라. 하지만, 미리 일러두건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것을 열어 보면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에피메테우스는 사랑에 흠뻑 빠진 나머지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 말라는 프로메테우스의 경고를 잊고 상자를 받아 집 한구석에 숨겨 두었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판도라는 상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였고 에피메테우스를 졸랐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다며 완고하게 거절하였다.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가 나가고 없는 사이에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자, 증오, 질투, 잔인성, 분노, 굶주림, 가난, 고통, 질병, 노화 등 장차 인간이 겪게 될 온갖 재앙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마지막, 상자에 남은 것은 '희망'이었다. 그 뒤로, 인간들은 갖가지 불행에 시달리면서도 희망만은 고이고이 간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열린책들(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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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이런 판도라가 나오는데, 요한계시록 5장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계 5: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계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 !!

판도라의 상자가 주어졌는데, 이 상자는 곧 예수님의 선택이 담겨있는 것이 모든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죽여버렸는데, 즉 "우리끼리 살자. 2는 필요가 없어. 1만 있으면 된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우리끼리 모인 다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인데, 그래서 낚시 동우회를 만들고, 등산 동우회를 만들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이 세상이 예수님이 오시게 되니, 그래서 예수님을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그 판도라 상자가 열리기는 학수고대하는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사도요한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얼마나 고대했던지 사도요한이 울었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운 것이 아니고 엉엉 울었는데, 크게 울었다는 말이죠.

역시 사도는 사도인데, 이 세상이 왜 무의미한지를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니, 각자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야,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 집을 사든 말든, 또 시장이 되단 말든 간에 의미가 없어" 라고 해야하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모르기에 사도가 엉엉 울고 있다는 겁니다.

* 7개의 인, 7개의 나팔, 7개의 대접 !!

그러자 장로 중의 하나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릴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열어버린 상태가 요한계시록 6장, 8장, 9장, 16장 등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여니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7개의 인, 7개의 나팔, 7개의 대접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천사들이 와서 하는 행동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바꾸는 작업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바로 저주이고 심판이라는 말이죠. 성경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데, 예수님의 결정만 의미가 있고 다른 것은 모두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 세상은 뱀의 후손이 되어서 강력하게 반발했고, 예수님은 그 숨기고 있는 반발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들었는데, 즉 "어느 신을 선택하겠는가?" 라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는 신을 원하는지, 그게 아니면 율법을 지켜도 소용이 없고 저주를 받는다는 신을 원하는지, 그것을 물었다는 것이죠.

그러자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율법, 즉 말씀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다" 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자들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의미와 의미의 전쟁에서,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그만 없애버렸다는 말이죠.

처음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미가 없었다는 겁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에게만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1'이 필요했던 것이지, '2'가 필요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는 말이죠.

* 모든 것이 '나의 의미' !!

그 점을 다시 살펴보겠는데,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영역 만들기는 무엇이 동원되어야 합니까? 자기의 선택과 결정이 동원이 되는데, 거기서 대표자가 누구인고 하니, 바로 '나' 라는 겁니다. 이런 재미도 없이 무슨 인생을 사느냐는 말이죠. 아파트도 자기 아파트이고, 운동회에서 뛰는 아이도 자기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자기의 선택이고 결정인데, 그게 바로 자기의 의미라는 것이죠.

이런 선택과 결정으로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것인데, 즉 누가 믿어라고 해서 믿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믿기로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자기가 선택을 해서 자기가 믿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인데, 즉 "그러한 의미가 있는 나를 계속해서 의미가 있는 나로 밀고 가겠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를 천국까지 이끌어주는 분으로서 예수님을, 그렇게 자기가 선택을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 예수보다 더 의미가 있는 분은 없네 ♬" 라고 하면서 찬송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고수하는 의미의 세계인데, 이것이 과학과 철학의 세계이고, 종교의 세계이고, 교회의 세계라는 말이죠.

* 주님, 이 세상을 박살내주세요 !!

그런데 사도요한은 엉엉 울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요한이 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보존시켜달라고 하면서 우는 겁니까? 그것이 아니면 왜 박살을 내지 않느냐고 하면서 우는 겁니까? 사도요한은 지금 밧모섬에 갇혀있는데, 완전히 독이 올랐다는 말이죠. 사도요한이 운다는 것은, 제발 엉터리인 이 세상에 대해서 불 심판을 내려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도요한 예수님 편인데, 인간 편이 라는 말이죠.

그렇게 울고 있을 때,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걱정하지 말라. 내가 판도라의 상자의 열겠다" 라고 하시면서 7개의 인을 마치 단추를 떼듯이 뗀다는 겁니다. 천사를 동원해서, 즉 폭격기를 동원해서 박살을 내어버리는데,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이 왜 무의미한지를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여기서 요한계시록 6장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계 6:7)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계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 COVID-19 !!

여기 8절에 보면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세사의 의미가 있다는 인간들의 결정과 선택으로는 손댈 수 없는, 도대체가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능력 바깥에 있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렇게 해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죠. 그 중에는 'COVID-19'도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발악을 하면서 하나님에게 달려드는데, "신이시여, 왜 이러십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왜? 너희들이 신을 죽였잖아. 그러면 이제 너희들이 맞아야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의미가 없는 것들이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나오니, 당연히 박살이 나야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모모처럼 의미가 아닌 무의미에 정착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철부지이고 방랑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사를 동원해서 의미가 있다고 하는 이 세계를 폭격하신다는 말이죠. 의미가 아닌 무의미로 바꾸어 버리신다는 겁니다.

* 주님은 이런 일을 하십니다 !!

여기서 우는 사도요한과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인간들을 비교해보면, 사도요한 이미 구원받은 자인데, 그래서 그 사도요한을 두고 '주 안에서', 혹은 '성령 안에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자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선택은 주님이 하시고, 자기는 그 통로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런 일을 하십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는 아는 대로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사도요한은 어떤 의미에서는 밧모섬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아주 편안하게 산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런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뜻이 아니고, 이 세상을 박살내기로 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가 곧 여자의 후손, 즉 주님의 백성에 속한 자들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눈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통해서 보게 하오소서.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일하시는 분을 만나고, 모든 것들이 그분의 선택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의 모든 의미를 바꿔치기를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4,29 오후 5시에 마침.

자녀가 아닌 주님의 일로 울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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