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디도.빌레몬

2011여름 3강

아빠와 함께 2021. 5. 24. 18:13

20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디모데전후서[교회를 잊으라!] 제3강
(강의 : 이근호 목사)


세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에 성령이 함께 계셨고 사실은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배후에는 성령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주님의 자리가 성령을 보내주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이라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하늘나라의 새로운 구조였습니다. 오른편이 하나님이 일한다는 아이디어는 어떤 우상에서도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에요.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도 오른편을 무시해버립니다. 이해가 안 되니까. 그저 하나님, 하나님. 인간, 인간. 하나님 앞에서 말씀 듣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거기에 집중했지 오른편이 하는 역할, 구약의 시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오른편이 왜 필요한가? 오른편을 잘라내면 하나님이 일을 못하는 이유가 뭔가? 거기에 대해서 학자들도 모르니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니까 주가 되고, 주가 되니까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데 주의 자리가 하나님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에요. 오른편의 자리도 왜 필요한지를 인간들이 그걸 따지고 물을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조차도 나올 수가 없어요.

성경의 중요한 개념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주의 오른편 그리고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 이런 것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해도 성화론으로 구원시킬 수 있고 이런 걸 언급 않더라도 사람을 천국 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성경에서 중요한 개념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런 걸 완전히 무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골라잡은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고 하는데 형상이라 하는 것은 기독교 오기 전에 플라톤의 형상론에 이미 나와 있는 거거든요.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그것을 그 다음에 성경 들춰가면서 하나님의 형상론과 결합해서 죄인을 천국 보낼까 싶어서 교회들이 이용하는데 주의 오른편이나 이러한 개념은 기존에 인간들이 생각했던 모든 신학과 아이디어를 전부다 묵살해버립니다.

주님의 오른편의 자리라는 것은 감춰진 자리에요. 인간들이 신을 향하여 이야기하게 되면 오른편 자리에서 중간에 차고 들어가죠. 인간들은 분명히 신을 이야기할 때 신과 주고받으면서 이득을 생각하는 겁니다. 현세에서 이득뿐만 아니고 내세에서 이득을 생각하는데 여기 갑자기 주의 오른편이 차고 들어와 버리면, 인간이 신과 거래하는 모든 흥정이 무용지물이 돼버려요. 오른편이 차고 들어와서 신과 합의해서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오른편의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오른편의 자리에 있을 때만 유일하게 보이는 게 있어요. 오른편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면 보이지 않는 게 있습니다. 인간의 자리에선 절대로 볼 수 있는 게 있어요. 오른편 자리에서 뭐가 보이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보입니다. 숨어있는 악마죠.

주의 자리에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악마가 보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악마란 자기한테 해코지하고 사기 치고 돈 떼먹고 도망가면 악마인줄 알고 있어요. 인간의 자리는 다시 말해서 주의 오른편의 자리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이건 일방적인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큰 오산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오산을 안 하려면, 주께서 내 주에게, 주님께서 주님의 오른편의 자리에 위치해서 언약을 완성한다는 이 구조를 파악해줘야 되는데 이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나의 자리에 구원 의지, 인간의 자리에서 구원을 시도하는 모든 것이 여기선 전부다 탈락이 되는 겁니다. 구원이란 바로 오른편 자리에 계신 주님의 소관으로 이관이 돼요. 담당자가 이동된다 말이죠. 구원받아야 될 내가 구원에 대해서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개입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이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여기서 주의 자리에 계신, 오른편에 계신 분과 의논해서 지난 시간에 했듯이 창세전에 결정한 대로만 그러니까 분배가 나가게 마련이에요. 그것을 어린양의 생명책에만 기록된 자만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가 데쓰노트 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이건 죽여야 돼. 이건 살려야 돼. 지가 일기 쓴다고 그 일기장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겁니다. 주의 오른편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 언약의 완성도 안 된 것이, 자기 소망을 담아서 쓴다고 해서 그것이 남한테 효과가 있겠어요.

장희빈이 왕비 죽이려고 짚으로 인형 하나 만들어서 바늘로 콕콕 하니까 몇 키로 떨어진 거기서 윽윽윽. 십자가마을에 글 쓰지 마시고 인형을 하나 만드세요. 바늘 준비해서 급소를 찔러서. 여기다 대못을 박든지.

죄 사함의 권세는 내게 있다고 주님께서. 모든 만물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가 원하는 자, 내가 원하는 자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다 해먹어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관여할 수 없는데 그 일에 동조해서 영으로 일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이 다 해먹는다니까요. 왜? 원래 이 세상에 주주가 세 사람밖에 없어요. 그분의 회사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그분들의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여분의 것으로 태어난 거예요. 혹 같은 존재가 중앙지에 개입한다는 자체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느냐 하면, 악마의 사주를 받고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주일날 오전인가 했는데 인간은 뱀의 앞잡이라 했어요. 잘 안 쓰는 과격한 용어인데.

주의 오른편의 자리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주의 오른편에 있을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를 척결하실 합당한 분은 오직 서른세 살 먹은 청년, 나사렛 예수밖에는 없음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나의 구원은요?’라는 질문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사적인 구원은 날아가 버립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그런 말씀이 있죠. 사도 바울이, 내가 복음을 전해놓고도 오히려 복음 전한 내가 복음에 잘릴까 염려된다 했단 말이죠. 복음에 잘릴까 염려되는 어떤 여지가 있느냐 하면, 복음을 전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구원을 나의 구원으로 챙길 수 있는 여지가 그게 구원에 잘릴 여지가 되는 겁니다.

구원이란 구원이 나간 본부가 있어요. 본부로 되돌아와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의 선교의 본부가 안디옥이라 하는데 안디옥이 아니에요. 선교의 본부는 움직이는 사도 바울이 선교 본거지에요. 사도 바울이 로마 가면 로마가 선교본부가 된다 말이죠.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계시를 만든 사람이니까. 말씀이 있는 곳이고. 사도 바울이 죽고 난 뒤에 남아 있는 결과물이 말씀밖에 없죠. 그러면 말씀이 전파되는 그 모든 현장이 선교지의 본부가 되고 그것이 예루살렘이 되고 동시에 땅 끝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로 하여금 땅을 다니면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했지요. 유대인들은 하여튼 따라가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가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같은 유대인이고, 같은 사람이라고 본 거예요. 오해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그것이 유다의 힘이거든요. 유대나라의 힘이란 말이에요.

유대나라의 힘이니까 사도 바울이 가던 곳이 예수님의 생애를 되풀이해야 되니까 사도 바울의 모든 여행지에서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전부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밤빌리아 거쳐서 바나바와 첫 번째 선교를 나섰는데 이고니온에 가니까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했어요. 도망쳤지요.

죽이려는 이유가 왜 율법을 무시하느냐? 율법을 무시하게 되면 어떤 논리에 빠지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율법을 무시해서 율법 없이도 구원받는다고 하면, 이것이 제로게임이 되어서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이단이 됩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이단이 안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식대로 하지 않는 쪽을 어떡하던 악마로 몰아세워야 자기가 살아요. 사도 바울에게 돈 빌려주고 돈 떼먹고 그런 사적인 원한관계가 아니고 유대인들의 정체성 자체가 이단으로 드러날 판이란 말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을 율법 때문에 죽이려고 했는데 이런 시도가 처음이 아니고 예수님한테도 역시 율법 때문에 예수님을 살해한 거거든요. 십자가에 죽여 놓고 신명기에 나오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는다는 하나님의 뜻 그대로 맞다. 그리고 예수님 죽이려 할 때 성경말씀대로 한 사람을 죽임으로 다른 사람은 산다는 원칙대로 예수님을 하나의 제물로 제거해야 우리 민족이 산다.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이냐? 성전이 있는 민족이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이다. 그리고 율법이 무시당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없는 존재가 되니까 이것은 하나님 뜻에 근본적으로 모순된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선택된 민족이 있을 것이고, 선택된 민족이 있다면 선택된 민족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다할 것이고, 이것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구조인데 이것을 만약에 전부 무시한다면 결국 그동안 수천 년 동안 믿어왔던 하나님 존재자체가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되니까 그러면 우리가 유대인이 태어났다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태어났다는 자체도 우리의 뿌리를 스스로 부정해야 된다는 그런 딜레마에 빠져버려요.

그러면 그거는 말이 안 되죠. 자신들의 모순적인 한계, 세상을 보는 한계에 딜레마에 빠지니까 그 딜레마를 해소하는 방법은 이런 한계에 대해서 도전하고 공격하는 그쪽 세력을 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해선 그렇게 예민해요. 뭐, 감수성이라고나 할까. 감수성이 그렇게 높은 거예요. 다른 건 다 치되 율법은 건들지 말라는 거죠. 모세가 독대해서 만든 거니까.

이건 사람에게 나온 것도 아니고 직접 하나님이 친히 수고스럽게 만들어서 준 건데 유대민족역사를 파탄시켜버리면 시내산에서 준 것이 허깨비고 귀신이 주고, 산 할아버지가 준 거냐. 말이 안 되잖아요. 전체적인 모든 계시의 흐름을 통일시켜서 가려면 통일성을 깨트리게 만드는 것은 과감하게 척결시키는 것이 유대인의 훌륭한 사명인데 그 사명자의 선봉에 선 자가 사울이죠. 바울이잖아요.

그러니까 수를 아는 거죠. 9급끼리 바둑 두고 있으면 이세돌이나 이창호가 봅니다. 그것 좀 틀린데요. 왜 훈수합니까? 바둑을 최고로 잘 두거든. 수를 안다 이 말이죠. 사울이란 사람이 수를 알거든요. 자기가 그걸 겪었단 말이죠. 꼭 십자가마을 사람 같아. 한국교회 수를 알아요. 목사들이 하는 수법을 다 알아요. ‘하나님께서’ 하면 뒤에 ‘돈 내라’ 아예 추임새를 갖다 붙여요.

그래서 이고니온에선 죽을 뻔 했는데 루스드라에선 죽었어요, 그냥. 이고니온이 엘에이나 뉴욕 근처가 아니고 요새는 터어키인데. 이 동네는 뒤에 아가 많아요. 여기 바다가 있고 바다 건너가면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요. 세상의 테마여행 같은 것 보면 경치가 아주 좋아요. 북쪽의 넓은 지역을 마케도니아라 하고, 남쪽지역을 아가야라고 이렇게 강이 있고.

사울이란 사람이 예루살렘이 노는 동네가 아니고 터어키 남쪽의 다소라는 이 동네 사람인데 그리고 큰 도시가 안디옥이 있고. 이 사람이 다소에 있으면 로마의 시민권을 얻고 당당했죠. 예루살렘에서 권한을 받아서 안디옥에 가는 순간 말에서 떨어졌어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이것이 AD32년이라고 대충 계산이 나와요.

여기서 안디옥 가서 그 다음에 3년 동안인가 아라비아에 갔어요. 남쪽에 가면 시내산, 명승지지요. 거기 갔다가 다소에서 8년 있었는가. 남쪽에서 ‘소문 듣고 왔어요.’ 해서 착한 바나바란 사람이 있어요. 바나바는 굉장히 설치는 쪽의 열심이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어디서 믿음 좋다는 소리 들으면 꼭 확인하는 버릇이 있어요. 꼭 저 같아. 칭찬하면 나중에 보면 다른 데 가고 이상하게 돼버리고.

바나바가 사울을 추천해서 안디옥에서 3년간 같이 일하면서 둘이 가서 이 동네 한 바퀴 돕니다. 여기 처음에 안디옥 교인들이 두 사람을 정해서 하는데 바나바가 또 속셈이 있어요. 이 사람이 원래 키프로스 사람인데 고향동네 같이 가고 이렇게 돌자 해서 같이 갑니다. 처음에 마가란 사람을 데려가요. 여기서 마가란 사람이 집안에 가스불 켜놓고 왔는지 가버리고.

아시아로 해서 이고니온에선 돌에 맞았고 루스드라에선 죽었어요. 본인도 죽은 줄 알았는데 보니까 깨어났어요. 유대인들이 율법 어긴 인간 치워라 해서 치웠는데 나중에 슬슬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을 뻔했다고 고린도후서에 보면 나와요. 여기 더베란 곳에 가서 한 바퀴 돌고 코스대로 배 타고 시리아, 두로 지방에 가서 도착하는 이것이 14년 후에 한 바퀴 돕니다.

돌면서 갈라디아란 동네가 있어요. 사도 바울이 선교한다는 게 유대인 회당에 가서 그러니까 남의 업소에 들어가는 거예요. 가서 장사 방해하는 겁니다. 선교라는 게 다른 게 아닙니다. 꼭 여호와증인 같아요. 꼭 교패 보고 들어가는 거예요. 여기 우아한 선교 없습니다. 남의 장사하는데 가서 ‘여러분, 조상들 잘못 섬겼습니다. 저도 이런 것 해봤다는데 다 엉터리였습니다.’

결국 선교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겁니다. 이것 중요한데요, 성령 받은 쪽에서 세상에 대해서 공격하고 세상의 기존의 세력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쪽을 죽여서 서로가 서로를 죽여서 죽음의 도탄에 빠지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작전이에요. 왜냐하면 주님의 오른편의 자리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와 병행해서 등장해야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공격하는 원수와 인간들이 생각하는 원수와 개념이 달라요. 인간들은 그냥 자기 원수를 복수해달라고 신에게 빌지만 하나님은 그런데 전혀 관심 없고 하나님만이 아는 원수가 따로 있는데 그 원수에 신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해서 반발하는 그런 영적 존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이 뭐냐? 기독교가 뭐냐?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주시다’ 그거에요. 인간은 별 볼일 없고. 그냥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된 피조물에 불과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했고. 그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주 되심과 이 땅의 접촉 부분에선 반드시 십자가 외에는 다른 계시를 준 적이 없고, 그 십자가가 인간의 눈에는 하나의 개인의 죽음, 피 흘린 죽음으로 보이지만 하늘나라 숨어있는 편에서 바라보면 그것이 숨어있는 구원의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법의 완성이에요. 하나님 계시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쪽에서 보면 사랑이고, 인간들에겐 잘 죽었고.

그러니까 하나님 쪽에서 보는 것과 인간 쪽에서 보는 양쪽 편을 다 이야기하다보니까 성경해석이 굉장히 어려운데 어려우면서도 나중에 두 패로 갈리게 되죠. 뭐냐 하면, 십자가가 있는데 이쪽 패 하늘, 주의 자리고, 이건 땅이라면 땅에 있는 사람이 구원을 받고자 나오다가 십자가, 벽이죠. 벽은 가락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문이 있으면 문 열면 바깥이 있어야 되는데 바깥이 없어요. 그냥 폼만 문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이 안에 있는 이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겁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살아요. 희망 없으면 못 삽니다. 왜? 인간 자체가 정지가 아니고 흐름이니까. 인간은 자꾸 울렁증이 있어요. 내일은 뭐하지? 오늘 오후에는 뭐하지? 내일 아침에는 누굴 만나지? 만날 울렁증이 있어요.

애 낳고 집구석 박혀서 애나 키우지. 그것 몇 달 못 갑니다. 그 다음에 애 안고 친구들 만나서 누구 애가 예쁜지 시합하러 갑니다. 예배시간에 보면 유아실에 앉아서 어릴 때는 이렇게 밀고, 약간 크면 피아노레슨 이야기하며 예배시간 다 보내버려요. 울렁증이 있어서 뭔가 자꾸 움직여야 되는 거예요. 가만있으면 죽음처럼, 시체처럼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문에다 [천국문] 이 자체가 성공하는 힘, 활력소가 돼요. 이래서 한국교회는 부흥되는 겁니다. 문제는 이 문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냥 폼이에요. 폼생폼사가 여기서 나온 말이죠.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본 놈도 없고 가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뭐 있겠지. ‘있겠지’가 사람을 살린다니까.

지금 병원에서 말기 암으로 누워있는데 ‘평소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아이고, 몇 시간 지나면 지옥 갑니다.’ 이런 목사는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시면 천국 갈 수 있습니다. 회개하십니까?’ ‘회개합니다.’ 지가 뭐 안다고 회개해요? 십자가를 알아야 회개하지. 주의 원수도 모르는데 무슨 회개한단 말입니까. 기껏 회개해봐야 자기한테 돈 떼어먹은 놈 저주했는데 그거 회개합니다. 그건 지 원수고.

주의 원수를 알아야 돼요. 원천부터 소급해서 회개해야 돼요. ‘나는 바로 악마의 앞잡이였고, 나는 예수라면 죽기보다 싫었고 예수 없는 곳에 도망쳤고, 예수쟁이라 하면 의도적으로 이상하게 싫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 믿고 착하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나, 원래 그런 인간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런 질문이 오고가야 그 다음 대화가 되는데, ‘잘못했습니다.’ ‘그럼 사도신경 외워보세요.’ 더듬더듬. ‘모르겠습니까? 보고 읽으세요. 그 다음 주기도문 읽으세요. 구원받습니다.’

그런 구원 같으면 미리 당겨서 열두 살 때 해놓으면 나중에 죽을 때 천당 가겠다. 나이 많아서 할 필요 가 뭐 있어요. 미리 당겨서 하면 안 됩니까? 장래 해야 될 일을 미리 당겨서 하면 편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제 말 못 알아들어요? 침대에 누워서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스무 살 때 미리 당겨서 해놓으면, ‘옛날에 다했습니다.’ 하면 ‘그래요? 그럼 구원받았습니다.’ 간단하게 끝날 것 아닙니까. 1544-0744 이순재 보험 들지 말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여기서 두 가지 해석에서 여기서 중요해요. 인간들이 성경에 십자가로 구원받는다하니까 십자가를 하나의 소망의 문으로 삼는 겁니다. 십자가로 접근하면서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뭘 노리느냐 하면, 이 땅에 사는 버릇이 오죠. 권력인데 그 권력이 교회 아닙니까. 십자가 이용해서 교회하겠다는 것으로 되돌아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십자가에 접근하는 사고방식에 대해선 내가 스스로 부정하진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쪽에 하늘에 계신 주님 보시기엔 그것이 죽어 마땅한 짓이라고 보는 겁니다. 왜? 십자가 자체가 죽음이니까. 여기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규합하고 모아지면 결국 죽어 마땅한 일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최종적으로 마지막 언약이니까. 더 이상 언약이 없으니까. 최종적인 언약이 뭐냐 하면, 너의 모든 한 짓은 바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고 살이 찢겨져야 할 일로 최종 규정이 나버렸어요.

예수님 부활하실 때 도마가 참석 안 했습니다.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지만 부활하셔서 문 열고 들어왔을 때 제자들은 있었는데 도마는 없었어요. 그 다음에 도마가 들어왔지요. 나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줬을 때 도마가, ‘이제 보이니까 믿어지네.’ 이랬습니까? 아니에요.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랬어요. 뭘 부정하는 거예요? 보여야 믿겠다는 자체가 결국 예수님으로 하여금 창자국에 피를 흘리게 했고 못자국이 손에 박히게 한 기존에 내가 구원에 접근하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접근방식조차도 주께서 죽게 만드는 죄에 해당되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내 쪽에서 천국 쪽으로 가던 방향이 그때부터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발생된 거예요. 이젠 내가 본다, 안 본다는 자체가 믿음이 생기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안 거죠. 그래서 주께서 뒤에 해석을 붙이죠.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다.’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도마를 처음에 그 자리에 끼지 않게 한 것 같아요. 나중에 도마를 등장시켜서 보고 믿겠다는 모든 인간들의 생각들조차도 예수님을 십자가 피로 죽게 만드는 허접스러운, 신앙도 아니면서 신앙이라고 우기는 하나님의 원수가 제공한 그러한 신앙의 종류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요. 그러면 전 세계가 뭐가 됩니까? 이쪽에 이야기 한 사람들 죽이고, 유대인들도 사도 바울 죽이고,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다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의 세계에요. 그것을 로마서 11장에서는 불순종 안에 가두어두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제 오후설교하면서 제가 짧은 노래 불렀죠.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저 빠따에 누워~’ 그게 뭐냐 하면, 죽음의 바다에 누워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양쪽 다 죽여요. 이 세상은 내가 살기 위해서 저쪽을 죽여야 내가 사는 겁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에요. 저쪽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으면 내가 살 수가 없고. 그렇게 살려고 애썼던 나를 또 누가 나를 등쳐먹지 않으면 저쪽이 못 살고. 이거는 가족끼리도 마찬가지고 이웃끼리도 마찬가지고. 불편한 진실이에요.

사도 바울에 있어서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죽음으로 몰아넣으면 선교중심지가 없게 돼요. 이 땅 자체가 대지 자체가 죽음의 바다인데 어디서 생명을 얻었습니까? 생명은 움직인다 했어요. 사도 바울이 움직이는 것이 하늘과 땅의 유일한 사다리 같은 역할 하는 하늘의 벧엘 같은, 그게 성령이 임하니까. 성령이라 하니까 이렇게 하면 쉽겠지요. 조명발이라 보면 돼요.

앞에 무대가 있고 사도 바울이나 바나바가 다닙니다. 두 번째는 사도 바울과 실라가 다녀요. 실라가 어디서 추천됐느냐 하면, 바나바가, 하여튼 바나바가 큰일 했어요. 바나바가 유다와 실라 데려오면서 유다는 가버리고 실라만 두 번째 선교여행에 가거든요. 이건 조금 있다 이야기하고.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요. 디모데는 외가 쪽에서 신앙이 좋지 친가 쪽은 없어요. 아버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외할머니와 엄마가 했는데 그때 사도 바울이 죽을 뻔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죽었습니다. 깨어난 것은 주의 뜻으로 깨어난 거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죽는 걸 보고 감동을 받았는지 한 사람은 죽었는데 디모데는 살았어요. 디모데를 데리고 두 번째 선교하면서 무시아라는 동네, 드로아, 드로아는 해변가에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또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어떤 초췌한 아저씨가 와서, ‘우리 동네는 무시하십니까? 우리 동네에 건너오소서.’ ‘알았어.’ 해서 무시아로 가려고 하다가 아시아로 가는 것을 성령께서 금지시키고 바다 건너서 빌립보에 가요. 거기서 밑에 데살로니가 있고, 베뢰아, 아테네 다음에 고린도 있고. 터어키 쪽엔 에베소, 골로새 있고.

여기서 마케도니아에서 어떤 아저씨가 와서 초췌한 모습으로 ‘우리 동네에 복음 전해주세요.’라고 하는 그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목회자들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사도 바울에게 그런 놀라운 주께서 나타나서 아시아 쪽은 가지 말고 환상으로 나타나서 우리 동네에 복음 전해주세요 한다면 적어도 유대인한테 핍박받는 일은 면제해주는 것이 주님하고 서로 거래하는데 있어서 뭔가 원만한 계약이 안 되겠습니까?

‘우리 회사에서 일해주세요. 그 대신 돈은 한 푼도 없습니다.’ 이러면 계약이 성사 안 되잖아요. 적어도 귀신도 쫓아내고, 에베소에서 스게와에 일곱 아들이 있는 귀신 쫓아내니까 귀신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네가 뭔데 귀신 쫓는데? 귀신이 보니까 귀신보다 못해.’ 그 정도의 확고한 신분적인 보장이 된다면 적어도 순교는 안 당해야지요. 주께서 친히 주와 함께 있다는데 왜 죽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열두 영이 내려와서 십자가 달리기 직전에 ‘암행어사 출도여!’ 해서 변장 풀고 난 뒤에 변사또 꿇어앉히고 그 다음에 춘향이 데려와서 ‘춘향아. 고개를 들라. 수청을 들지라.’ 춘향이가 ‘오는 놈마다 다 똑같은 놈이네. 어딜 감히.’ 이렇게 성공사례를 줘야 되는데 분명히 곳곳마다 주의 영이 함께 있고 주의 지시를 받기는 받는데 가는 마지막 몰골이 처참해요. 그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서 어떤 격려나 어떤 희망도 보여주질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이것은 선교하는 자가 성령께서 선교를 시키는데 어느 날 선교하게 하신 분의 주체는 날아가 버리고 선교하는 심부름꾼, 담당자가 선교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을 십자가가 용납하질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계시가 만들어지지만 사도 바울의 일상은 결코 하나님의 계시다, 아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그 복음에 의해서, 계시에 의해서 잘릴까 염려됨이라. 이거는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 이 원칙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왜 그것이 유효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선교를 할 때 선교를 하면서 선교를 담당한 주의 지시와 명령이 있을 때 자기는 깨끗하고 의인이기 때문에 선교시킨다는 오해가 그렇게 말썽을 일으킨 거예요. 누구를 선교시키고 누구에게 전도시켜서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구원을 받을 때 그것은 내가 이런 실적과 업적을 거뒀다는 그것만으로 나는 저 사람을 구원시킬만한 그 정도 자질과 능력이 나한테 소지돼있다고 오해를 한 겁니다.

사실은 본인이 죄인 중의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구원받았으니까 나는 적어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의롭고 착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스스로 하는 거예요. 사실은 그 사람 안에 큰 교회 하겠다는 야망과 야심과 하나님의 원수 될 수밖에 없는 속성이 다 들어있는데 선교라는 이름으로 어떤 권력을 쥐겠다는 본인도 미처 모르는 본인도 미처 예상 못한 강한 악마의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데 본인은 그저 눈에 보이는 사람들 앞에 속아 넘어가면 그게 자기로서는 그만한 대우를 받아도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선교는 날마다 회개해야 될 자기의 여정일 수 있어요. ‘아~ 이런 것도 죄구나. 이것도 하나님의 원수구나.’

결국은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란 자리가, 그래서 성경해석에 있어서 정말 깊이를 요하는 겁니다. 하늘의 안목에서 볼 때 십자가 안에 갇혀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 입장에서 보는 바탕의 자리가 하나님의 원수, 원수니까 악마죠. 악마가 만들어낸 주체성을 형성시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무 살 때 만든 주체성은 스물한 살 때 깨지면서 다시 만들고, 스물한 살 때 했던 주체성은 스물두 살 때 새로운 사태를 만나면서 깨지고 다시 만들고. 군에 이등병 들어갔을 때는 제대만 하면 감사하다하다가 제대할 때 되서 취직문제로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군에 안 간 여자들은 몰라요. 군의 세월이 너무 길어요. 남자의 눈물 같아. 이쪽에 가면 제대가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이등병 때 생각하면 내가 병장 달면 이등병에게 잘해줘야지. 막상 병장 되면 이등병 잘해줄 생각 없습니다. 왜?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지금 취직 준비해야 돼요. 그때그때마다 달라요. 새로운 주체성이 형성되는데 그 주체성을 마귀가, 하나님의 원수가 다 도와줘요.

주체성이란 어려운 말 했는데 결국 ‘자기 것’이라는 거예요. 나의 것을 사수하고 지탱하려하는 겁니다. 이걸 철학적으로 동질성이라 하고 다른 말로 등질성이라. 또는 자아의 연속성이라. 문제는 이것으로 십자가 속을 가면서 이것이 안 깨지게 만드는 십자가를 따로 원하는 거예요. 이 마지막 코스에서 이단이 등장하는 겁니다. 내가 평생토록 애쓰는 것이 안 깨지게 그걸 오히려 보호해주는 그런 십자가 어디 없나?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십자가는 후딱 지나가고 부활의 새 생명이 그리워지는 거예요. 왜? 부활의 새 생명은 예수님 좋으라는 새 생명이 아니고 십자가 믿었던 나의 것이 아주 영화롭게 찬란하게 빛이 나는, 상급 받아서 상이 너무 많아. 개근상에다 공책 두 권하고 연필하고. 나눠줘야 된다 싶을 정도로 너무 많이 받았어. 스데반 집사가 상급 받다가 돌에 맞아죽었습니까?

그래서 지금 모든 사람이 교회 온다는 것은 이득을 보기 위해서 온 거고, 이득은 ‘나의 것이 어떻게 안전하게 보존되면서 더 영광스럽게 찬란하게 하늘나라에서 빛날 수 있습니까?’라는 소비자들, 그런 고객들을 위해서 교회는 십자가를 지붕 꼭대기에 달고 밑에 건물 지면 돼요. 그래서 지금은 십자가는 있는 거고 목회중심은 밑에 건물을 얼마나 잘 짓는가가 특히 부산저축은행 돈 빌려서 지으면 되지요. 나의 것이 안 깨지고 그대로 보존되는 것.

여기에 사도 바울이 선교한다고 보세요.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이 십자가는 들러리고 너희들의 속셈과 노림수는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왜 죽었지? 여기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을 십자가가 어떤 식으로 보호해줄 것인가에 관심 있는 겁니다. 내가 나의 것을 유지하는데 문제점이 뭐냐 하면, 이게 혹시 죄가 있을 수 있고 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 못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뭐로 씻습니까?

여러분 설거지할 때 무슨 세제 씁니까? 퐁퐁? 십자가는 퐁퐁으로. 죄 씻는 퐁퐁으로 보는 겁니다. 완전히 깨는 게 아니고 씻어주는 거예요. 씻어줄 때 씻어주는 게 예수님한테 너무 수고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지가 먼저 흠집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두나 사과나 수박 날 때 흠집 있는 걸 상인들이 빼잖아요. 흠집 있는 걸 따로 뽑아서 회개하는 시간에 따로 모아서 ‘주여, 이것 문제 있습니다.’ 하면 ‘그것 씻어줄게.’ ‘감사합니다.’ 이제 흠 없다고 자기 창고에 저장하는 겁니다. 이게 모든 종교에 있는 내용이에요. 기독교, 이슬람교나 모든 종교가 다 그래요.

심지어 신이 없다는 중국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 구조입니다. 중국철학의 특징은, 신은 내 안에 마음속에 살아있는 거예요. 여기에 잡티가 끼면 그러니까 움직이는 연못은 사물을 깨끗이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움직이는 마음은 평정을 유지하면 달의 영상을 깨끗이 비출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중국철학에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캄다운, 마음을 정숙하게 하고 흔들지 말고 침착해야 돼.’ 그것은 내 안에 살아있는 자연의 신이 나로 하여금 복 되게 만들어줄 것이고 만약에 흥분해버리면 오히려 내게 주어진 복이 달아난다. 그것이 중국, 일본, 한국 그리고 동남아 전체에 미친 영향입니다. 그게 어느 날 우리의 제2의 속성이 되고 본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 보더라고 기존의 바탕이 이런 선입관이 깔려있는 상태로 보니까 십자가라는 것이 거침돌이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십자가가 뭐꼬?’ 하면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은 것. ‘미쳤다고 왜 죽지? 이상한 인간이네. 우리한테 좋은 소리하면 얼마든지 마음을 평정시켜서 그 말씀대로 살면 되는데 죽기는 왜 죽나.’ ‘죄를 씻게 주기 위해서.’ ‘그러면 이해된다.’

그러니까 나한테 흠 있는 것 약간 씻어주고 퐁퐁으로 씻어주게 되면 십자가는 다, 퐁퐁은 그릇 씻는 용이지 그게 국물용, 음식용 퐁퐁, 여기는 크리넥스, 옥시크린 이런 걸 퍼먹진 않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네 마음 밭을 씻지 말고 퍼먹으라는 거예요. 내 마음에 문제가 없는데 약간 흠집 난 것은 퐁퐁으로 씻기고 십자가는 치워버리고 이젠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내 마음을 유지한다는 거예요. 그게 동양철학이고 사고방식이 전부 그런 겁니다. 흥분하면 안 되는데 흥분하면 달이 잘 안 보이는데.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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