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움직임의 방향

아빠와 함께 2021. 4. 21. 17:23

349강-YouTube강의(움직임의 방향 마태복음 2:2)20210420-이 근호 목사


제349강, 제목은 ‘움직임의 방향’. 달리 이야기하면 ‘운동의 방향’,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방향을 갖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 아닙니다. 인생에는 방향이 없어요. 그냥 몸부림치는 것이지 방향이라는 게 없습니다.

왜 인간은 방향이 없느냐 하면 본인이 중심점을 이미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의 중심점을 본인이 접수하고 있거든요. 그럼 원에서의 원점은 방향이라는 게 없어요. 산이 있다면 산의 최정상에서는 사실 방향이라는 게 없어요. 도달점에 다 도달되었기 때문에 더 갈 곳이 없잖아요.

그처럼 인간은 자기가 미완성이라는 그런 쪽의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으면 굉장히 섭섭하고 그 사람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내가 어때서? 내가 뭐가 부족한데?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중심이니까 그냥 폴짝폴짝 스카이콩콩 하듯이 뛰는 겁니다. 그냥 뛰어보는 거예요, 그냥.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폴짝. 인생자체가 그냥 팔짝팔짝 뛰기의 연발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향 없습니다.

정말 방향을 안다면 자신이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있어줘야 방향이 생기는 거예요. 아, 나 이렇게 살면 안 돼. 이건 안 돼. 이건 엉터리야. 내 인생 이거 헛살았어. 이런 삶은 잘못된 거야. 뭔가 자기 인생이 잘못되고 있다는 자각이 있어줘야 그 다음부터는 방향이 발생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특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보실 때 간편하게 보시는 방법 중 하나가 방향을 잡으면 돼요. 인간들은 구경꾼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보탤 것이 없어요. 제자들도 그냥 구경꾼이에요. 제자들과 다른 관람객의 차이점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구경한다는 것.

사람들은 자기가 인생의 중심이고 자기가 최고봉이기 때문에 방향이 없다 했죠. 그러면 인간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 방향은 누가 시범조로 보여줘야 되냐면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쉽게 보는 방법은 예수님은 출생해서 어디로 가느냐를 보세요. 이거 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해석 그냥 반 이상 다 한 거예요. 방향을 잡아줘야 돼요, 방향을.

그런데 보통 성경해석 마태, 마가하면서 방향을 주님 가신 방향으로 잡아야 되는데, 목사님, 저 어떻게 살면 돼요? 갑자기 방향이, 그 화살표 끝이 자기 심장 쪽으로, 자기 쪽으로 막 돌려요. 화살표를 억지로 막 꺾었어. 이거 꺾으면 안 되는데. 내 쪽으로 오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방향이.

성경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에요. 방향이 중간에 엿가락처럼 휘어져서 내 쪽으로 향하면 안돼요. 저 어떻게 돼요? 저 천당 가겠어요, 지옥 가겠어요? 방향을 휘어서 이렇게 나한테 물으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분명히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가는 방향 쪽으로 오지를 못한다. 베드로보고도 이야기했고 제자들뿐 아니고 이야기했죠. 바리새인에게도 이야기했어요. 너희들은 내가 가는 곳에 합류하지 못한다. 난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전혀 방향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그 말씀으로 확연히 다 드러났어요. 아, 인간은 갈 곳도 모르면서 그냥 폴짝폴짝 지가 지 기분에 답답해서 뛰는구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딱 깨놓고 말해서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사는 겁니다. 그 외에 뭐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순간순간 기분 따라 웃었다가 기분 따라 울었다가. 거기다 만약에 제가 “어디로 가십니까?” 물으면 “가기는 뭐. 내가 늘 여기 있었는데 가긴 어딜 갑니까?” 갈 데도 없고 가는 방법도 모르고 그냥 기분 따라서 쭈그렸다가 기분 좋으면 폴짝 그 자리에서 뛰고. 그게 전부죠.

일기 써보세요. 일기 쓴 내용이 뭡니까?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아침에 아버지한테 꾸중 들었다. 아, 기분 나쁘다. 그런데 저녁에 아버지가 맛있는 찐빵 사줬다. 기분 좋다. 결국에 하루하루가 자기 기분 관찰하기. 자기 기분 관찰하고 끝. 잤다. 내일 아침에 또 시작이 돼요.

마태복음 2장에서 별을 바라보는 동방박사들은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줄곧 별만 바라보다가 아니, 별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조금 움직이다 그만 둘 줄 알았죠. 아니, 별이 따라오라네, 이 별이. 별이 무엇을 대표하느냐. 이 대자연을 대표해서 처음부터 이 자연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수학에서 벡터(vector)라고 하는데. 수학에서 양(量)을 스칼라(scalar)라 하고 방향 쪽으로 갈 때는 그것을 벡터라고 이야기해요. 거기에 어떤 질(質)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양이냐 질이냐.

“네가 크고 부자 되고 잘 먹고 잘 살고 양적으로 살 거냐, 아니면 어떤 방향을 향한 질적인 인생이 되겠느냐?” 그럼 “난 질적인 인생이 되고 싶다.”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그럼 너가 너 됨의 질은 어느 지점에서 오는지 네가 아느냐?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를 네가 아느냐?” 상당히 중요한 문제죠.

동방박사의 이 별 따라 온 이것이 동방박사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베드로후서에 그런 말씀이 있죠.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내 안에, 내 마음에 샛별이 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샛별은 방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샛별이 뜬 그 곳, 네가 영원히 안식해야 될 그 곳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를 통해서 너에게 알려줬다’ 라는 것입니다. 변화산 이야기를 하면서 그 뒤에 이야기했죠.

자, 동방박사가 방향성을 갖습니다. 이 방향성이라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하루하루 일과에서는 사적인, 자기 기분에 웃고 기분에 우는 그 사적인 것을 이게 깨끗하게 표백해버려요. 사람이 어떤 방향을 바라볼 때는 지금 한 달 수입이 얼마냐, 도대체 내가 잘날 수 있는 거리를 얼마나 챙기고 있느냐를 표백해버려요. 그것을 하얗게 탈색시켜버립니다. 그딴 게 의미가 없어요. 왜? 가야될 곳이 있기 때문에. 존재의 가벼움이죠. 굉장히 존재가 가벼운 거예요.

적절한 예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안중근 의사. 그 사람은 자기 아내한테 사과를 했거든요. 보통 남자들은 가정을 돌보는데 나는 나라 살리는 그 거사 때문에 미안하오. 우리가 낳은 자식은 당신이 알아서 키우고 나는 내 갈 길을 갑니다. 대한국인 손바닥 탁 주홍색 피를 묻혀가지고... 갑니다.

자기 인생에 어떤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다시 말해서 이 국가와 민족을 아우르는 그러한 큰 사명감이 있을 때는 가정 일도 아주 소소하게 되겠죠. 이거 또 쓸데없이 되지도 않으면서 지 마음대로 하는데 가정에다가 적용시키지 말고요. 그러니까 이 예가 적절한지 적절하지 않은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성도한테는 주님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나의 사명이 아니에요. 자꾸 내 사명, 내 사명이라는 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내 사명은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방향이 있어요. 아버지께로 합류하는 거예요. 그 때는 아버지와 내가, 너희들이 하나가 되는 그 방향으로.

그래서 동방박사는 어디로 가느냐. 아기 예수로 가죠.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 동방박사만의 경우가 아니고 오늘날 모든 성도한테는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성령이 주어졌기 때문에 자기 체면과 관련된 사소한 자기 자랑 같은 것은 탈색해야 돼요.

늘 표백될 때 아, 주께서 특정한 방향으로 나를 이끄는구나. 세상 것, 이딴 것 필요 없는 그 나라. 천국이죠. 천국 갈 때는 이런 무거운 짐 같은 것은 하찮게 여겨야 된다는 것을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매일 삶 속에 저 위를 보라고 오늘날 방향을 주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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