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강-YouTube강의(오해 마태복음 22:29)20210504-이 근호 목사
제350강, 제목은 ‘오해’. ‘오해’라는 말은 제가 쓰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직접 ‘오해’라는 말을 한 겁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또는 하신 행적에 대해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인간 근원 자체가 말씀에 의해서 심판의 대상이지, 이해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인간이라는 것은. 말씀은 심판용입니다.
주께서 찾아왔다는 것은 “일단 맞자”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일단 네가 맞아야 된다. 아담에게 ‘맞는다’는 말은 “네가 일단 죽자” 이런 뜻이죠. 죽을 때 죽는 합당하고 정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말씀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을 들을 때는, ‘아, 이래서 우리가 망해야 되고 죽어야 마땅하군요.’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오해가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본인들이 안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니까 무엇이 나타나지 않느냐 하면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감추어져버리죠.
하나님을 안 믿다가 하나님까지 믿으니까 자기가 스스로 대견해 보이는 겁니다. 훌륭해 보이는 거예요. 자기한테 하나님 믿는 것조차 이게 엉터리이고 잘못이라는 생각은, 감히 도저히 그런 생각은 들 수가 없죠.
마태복음 22장 29절에 예수님께서 오해라는 말씀을 쓰셨는데 그 대목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부활이야기하면서 그 이야기했어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부활이야기, 23절에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이렇게 얘기가 되거든요. 예수님은 부활이 있다고 이야기했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이야기했고.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이 평하기를 ‘너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 이렇게 평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부활이야기가 결국 사람들에게 도달될 때는 그 목적이 있었죠. ‘너는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른다’를 알려주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부활이야기를 언급할 수밖에 없어요.
여기서 예수님이 부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나중에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내가 곧 부활이다’라는 말과 이것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해버리면 그 점에 대해서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유대 및 사회 가운데.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죠. 그러나 바리새인은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일치되느냐? 일치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의 부활은 자신들이 부활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것도 역시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곧 부활이다. 내가 생명이고 내가 부활이다” 너희들이 어떻게 생명을 얻느냐가 아니라, 너희들이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사느냐가 아니라 시작 이야기를 너부터 시작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뭘 하면 부활됩니까, 내가 뭘 하면 영생됩니까?” 라고 묻는 물음자체부터가 이것이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질문부터 시작을 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예수님이 “나는 생명이고 부활”이라는 말은 곧 너희들은 생명을 기대할 자격도 없고 너희들은 부활을 고대할 권한도 없고 그런 대상도 아니라는 이야기죠. 왜? 예수님만이 생명이고 예수님만이 부활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냥 지켜봐야 되겠죠. 예수님만이 왜 부활이고 예수님만이 왜 생명인지를 지켜봐야 되겠죠.
마르다, 마리아 그 가정에 예수님께서 오빠를 조기에 죽이십니다. 병들었지만 죽게 하셨습니다. 죽게 하셨을 때 그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불만이 많았죠. 남들은 잘도 병 고쳐주면서 제자들 빼놓고는 제일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우리에게 이러한 불상사가, 우리 가정에 이러한 비극이 웬 말입니까? 라고 막 울면서 달려들었죠.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의 그 믿음 없음을 보시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또 우셨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생각을 가지고 나를 그렇게 대접했느냐. 그동안 내가 했던 말과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너희는 어떤 평가와 어떤 이해와 해석을 가졌는가. 그것이 한방에 다 노출되었어요. 다 발각된 겁니다.
자기 생각, 자기의 이익을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 덕분에 내가 챙길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겠다고 한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얻을 수 없고 챙길 것 없었으면 애초에 예수님 같은 자는 내가 상대하지 않을 수 있는 결정권이 나한테 있다.’ 라는 말이 돼요. 인간의 오해의 기초에는 이런 게 들어있어요.
‘당신이 나한테 쓸모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당신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 당신이 나한테 이익이 없다면 나는 당신을 내칠 사람이고 당신 생각을 하지 않을 그러한 자가 바로 나입니다.’ 라고 한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결정내린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고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져요.
그래서 마리아, 마르다 또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알아도 자꾸 예수님은 내가 생명이고 내가 부활이라고 고집하시는 이유가 생명이든 부활이든 너희들이 나한테 얻고자 한다고 너희들이 생명이 생기고 부활되는 게 아님을 확실하게 다지면서 나는 부활이고 나는 생명이라고 한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너희는 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울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부활도 모르면 그거 뭐 울어야 마땅하죠. 내 인생을 이렇게 서글프게 하시기 있기요? 뭐 이런 식으로 대들 게 아니고 자기 주제 파악이 된다면, 나는 생명이 아니고 나는 부활이 아니라 한다면 이 땅에서 매일같이 울고 살아도 마땅한 겁니다. 더는 욕심을 내면 안돼요.
개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대범한 체하고요, 세상을 당당하게 이기는 것처럼 그렇게 하게 되면 본인만 피곤해요. 하늘나라에 먹히지도 않는...... 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주님은 그런 속임수에 안 넘어갑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죽음을 초월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래서 이 오해라는 것은, 바로 나는 나 자신조차도 오해했다는 것은, 부활이고 생명이신 주님께서 찾아와주니까 비로소 밝혀지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주님을 오해했습니다’ 하는 그런 고백자체를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 고백을 한다는 자체가 이제 그 사람은 살은 거예요. 구원된 겁니다.
맨날 이제 돌아다니면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나는 오해했었다. 나는 나밖에 몰랐다. 그것이 주님의 복음 전파의 하나의 바탕이 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자기 백성을, 오해했음을 자각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