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망각

아빠와 함께 2021. 4. 21. 17:22

348강-YouTube강의(망각 이사야 44:21)20210420-이 근호 목사


제348강, 제목은 ‘망각’. 잊는다는 이야기죠, 잊어버리는 것.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획득했다. 이것은 주의 뜻이 아니고 마귀의 뜻이었다. 창세기 3장에 그렇게 나와 있죠. 여기서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이 너무 길잖아요. 이것을 줄여봅시다. 그냥 아는 것. 지식.

그 지식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가로막게 됩니다. 안다는 게, 아는 게 화근이죠. 문제가 된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안다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연결되는 아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과 다른 방향으로 아는 거예요. 마귀가 세상을 아는 것, 그쪽에 편향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그것을 따먹으라 했으니까.

아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아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지식으로 무장시키는 쪽으로 아는 것이 계속 쌓이게 되어있어요. 아는 것이 자기를 더욱더 공고히 한다. 라는 식으로 점점 더 주님이 창조하신 그 인간과 비교해서 변질되어가죠.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하는데 그 어린아이와 어른의 아주 노골적인 대조되는 차이는 바로 어른은 안다고 여기고 어린아이는 몰라도 된다는 생각이죠.

어린아이가 자기가 지식 없다고 뭐 고민하고 울고불고 이러지 않죠. 아는 것과 전혀 상관없이 마음껏 웃을 때 웃고 울 때 또 울고. 자유롭죠. 그러니까 인간은 그 어린아이시절이 지나버리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아는 것이 쌓이기 때문에 이미 알게 된 것을 버릴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그렇게 많이 알고 그렇게 지혜가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 자체를 아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먹통이냐. 네가 안다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방해물이 되었다, 장애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겁니다.

이사야 1장 3절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감히 그 존엄한 사람을 소에 비유하고 아주 천한 나귀에다가 비교시키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대학 나오고 박사학위를 딴 그 사람보고 당신은 소보다 못하고 나귀보다 못하다고 하면 대단한 모욕이죠. 이 학위 따려고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 그 공부하니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기를 몰고 가거든요. 아는 것이 하나의 베를린 장벽처럼 가로놓여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묻죠. “네가 네 임자를 아냐? 네가 너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그렇게 묻고 있습니다. 신학을 해도 마찬가지죠.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주 단정내리고 있습니다. 내 백성은 모른다. “내 백성은 모른다” 했으니까 그 문장을 반대로 하게 되면 “나를 모르는 자가 내 백성이다” 이렇게 돼요. ‘내 백성은 모른다’와 같은 뜻으로 ‘전혀 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그 다음에 ‘내 백성 이스라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하시면서 ‘너희들은 이쯤 알아야 되지 않느냐’ 라고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예 너희들은 ‘모른다’ 부터 내가 다 해줄게. 아예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내가 너희들에게 알게 해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또다시 지식을 동원할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다시 말씀드려서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르게 되어있죠. 제가 말씀드린 대로 모르는 겁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거기에다가 또 1장 18절에 보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 색깔 비교를 보게 되면 눈같이 양털같이 희잖아요. 그럼 우리 인간 세계에 흼의 반대말은 검어야 되는 겁니다. 검죠. 그런데 양털의 반대말이 검은색이 아니고 진한 붉은색이 돼요. 흰 눈의 색깔과 반대색깔이 주홍이다 이 말이죠.

그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될, 깔끔해야 될, 산뜻해야 될 거기에 쓰잘데기 없는 아는 것으로 채우듯이 도드라지게 죄가 빨갛게 드러난다는 거예요. 시선을 확 끄는 거죠. 인간은 모르지만 주님은 아십니다.

이 순진한 너희들아.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이 붉디붉은 너희들아. 아주 눈에 확 띄는 거예요, 붉다는 게. 멀리서도 띄는 거예요. 검은색 되어서 흐리멍텅한 게 아니고 눈에 확 띄는 겁니다, 죄가. 죄 색깔이 뭐냐. 검은색이 아니고 죄의 색깔이 주홍 같아요, 찐한 주홍 같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성질날 때는 립스틱 짙게 바르죠, 빨갛게. 멀리서도 입술만 보이게. 나 지금 화나고 있어. 나 성질나고 있어. 립스틱 짙게 바르죠. 쫙 그어버리죠. 한바탕 하겠다는 식으로.

자, 그래서 결국 이것은 인간이 안다고 우기는 그것이 자기 죄가 얼마나 유별난 죄를 짓고 있는지 더욱더 모르게 만드는 그러한 배경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 처지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는 거죠.

그럼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사야 44장 21절에 보면,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했죠. 기억하라는 말은 오늘 제목처럼 너희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지식쌓기에 매진하다 보니까 기억할 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고 출애굽 사건, 여리고 사건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 성경에 나오는 사건, 사건들. 일어났던 그런 갖가지 사건들, 아말렉 전쟁 그리고 사사기의 숱한 전쟁들. 왜 전쟁을 일으키느냐 하면 하나님은 존재로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기억하라는 겁니다. 특히 출애굽 사건 같은 거죠.

왜냐하면 그 사건을 통해서 인간이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돼요. 사건은 내가 아는 힘과 지식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그것을 밝혀주는 사건들이었어요.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가진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기드온 전쟁 같은 경우에 역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달랑 300명을 데리고 갑니다. 이 말은 300명 있잖아. 라는 말하지 말고 에게, 300명밖에 없는데 어떻게 135000명을 이기냐. 이것은 없는 거다. 300명 있음으로써 ‘없다’를 강조하기 위해서 300명을 준 거예요.

이사야 44장 21절,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주님을 망각했어요. 또 망각 안할 위인은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망각했는데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은 나는 비록 주님을 잊었지만 주님은 나를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나의 망각이라는 토대 위에 주님의 기억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망각이 필수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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