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쓰레기

아빠와 함께 2021. 4. 7. 11:35

347강-YouTube강의(쓰레기 마태복음 15:27)20210406-이 근호 목사


제347강, 제목은 ‘떠남’. 제346강 <꿈>의 동영상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제가 하나밖에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예상 밖이다, 모든 내용이. 두 번째 내용을 이 347강 <떠남>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에다 넣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그 두 번째 내용이 뭐냐. 하나님의 계시에서는 누구를 지적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지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 자신을 지적하지 마세요. 우리는 내가 나를 지적할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지적하지 않을 때, 이 말은 곧 내가 타인에 대해서도 지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서에 이런 말도 나와요. 남의 일에 간섭해서 인생 살지 마라. 또는 다른 말로 남의 인생에 보증서지 마라. 타인을 네가 보증할 입장이 안 된다. 자식이라도 부모를 보증하지 말고 부모라도 자식을 보증할 수 없어요. 누구라도 사람이 사람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 잘 될 거야, 저사람 못 될 거야, 확답할 수가 없어요. 이 말은 평소에 내가 나를 지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그 버릇이 남을 지적하는 식으로 나타나거든요. 그럴 필요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떠남’이라는 내용과 지적하지 말라는 것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마태복음 15장 22절에 귀신들린 딸 이야기를 하는 여인이 나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내 딸이 흉악한 귀신들렸죠.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내 딸이 귀신들렸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귀신에 대해서는 인간은 손 못 대고 우리 주님만이 처리할 수 있습니다’ 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아까 346강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예상 밖이라 했죠.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올 때는 내 딸이 귀신들린 이야기하면 불쌍히 여겨서라도 나와 내 딸에 대해서 주님께서 관심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 주님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15장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라고 되어있어요. 그럼 이것은 그 가나안 여인의 관심사와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긋난 겁니다.

귀신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 당신이 유일하게 귀신을 추방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귀신이 있는 현장에 소방수가 와야죠. 아프다는데 아픈 사람 있다는 그 이야기를 지금 의사되시는 분께 이야기할 때 그 의사는 아픈 사람 있다면 의사로서 마땅히 고쳐주는 것이 본인의 사명 아니겠어요? 여자는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주변에 다른 제자들이 있었겠죠.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26절에 나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내게서 떠나라. 이 이야기죠. 내가 온 것은 양한테 온 거죠. 나는 양과 개를 구분 짓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개가 귀신들리든 뭐를 하든 나는 모르겠고 나의 관심사는 어디에 꽂혀 있느냐.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데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가나안 여인이니까 떠나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잃어버린 양을 위해 왔다는 말은, 잃어버린 양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귀신이 들리든 귀신의 대장이 있든 간에 그것은 네 사정이고 예수님 내 사정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섭섭한 분이 주님이세요. 우리가 뭐 아쉬운 소리하면 오냐오냐해서 다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주님은. 우리가 굉장히 착각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 예상 밖의 계시를 받아야 돼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하면 잃어버린 양 외에는 개가 되죠. 개에 대해서는 주님이 따로이 뭔가 지적할 게 없다 이 말입니다. 그냥 떠나라 이 말이죠.

이건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성도가 되었으면 내가 나의 옛사람에 대해서 지적하지 마세요. 왜? 그것은 주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주님과 떨어질 것이거든요.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이기 때문에 ‘옛날 내 행동이 이랬습니다’ 에 대해서 내가 나를 지적할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옛사람은 떼어내야죠. 떠나야죠. 옛사람은 떨어져 나가야죠. 자꾸 옛사람가지고 주님 앞에 귀신들렸다고 내밀지 말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는 게 아니에요. 그게 끝이 아니에요. 죽여놓고 살리는 것이 주의 일이거든요. 구닥다리 옛날 것 고장 났다고 고쳐달라 하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주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내 아쉬운 것 좀 고쳐 살았으면 좋겠다. 나 이러면 안 되니까 기도하면 주께서 응답하겠지. 이것은 엄청나게 주의 뜻을 오해한 겁니다.

주의 뜻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고치는 게 아니고 죽여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있으니까 떠나야 마땅하죠. 그런데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죄가 이렇습니다. 내가 내 죄를 알고 난 매일같이 이렇게 나를 비판하고 지적합니다. 누가 너보고 지적하라 했어? 왜 쓸데없는 짓하고 있어? 버리고 떠나야지, 버리고 포기해야지, 왜 그걸 쥐고 뭔가 거기서 어찌어찌해서 천국에라도 들어가려고 왜 그런 수작을 하냔 말이죠.

27절에 “여자가 가로되 옳습니다” 개라는 점이 옳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적받을 대상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야 양아, 너 잃어버렸어. 이리 와. 그건 양한테 해당되는 거죠. 개는 아예 귀신이 들렸든 뭐가 들렸든 간에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옳습니다. 주께서 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주님 앞에서 떨어져 나가고 주님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한 그 주님의 조치에 대해서 본인이 잘 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여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의 희망과 기대에 대해서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완벽하게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내 딸이 귀신들리든 귀신의 귀신이 들리든 그것에 대해 주님이 관심두지 않을뿐더러 덩달아 나도 거기에 관심둬서는 안 된다. 아니 내 자체가 나한테 관심둬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자, 개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면 개와 주인집이 이어지는 매개, 고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여분의 것, 부스러기거든요, 진짜는 다 먹고 갖다버린 것 있잖아요, 갖다 버린 것을 가지고 음식쓰레기라 하죠. 오늘 제목을 <떠남>보다도 <음식쓰레기>가 더 적절한데 음식쓰레기는 버렸기 때문에 제가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양한테 주고 나머지, 버려진 것이 있지 않느냐, 버려진 것. 그 버려진 것을 먹는다는 말은 개라는 생각을 가진 자에게만 해당돼요. 개가 아니면 어떻게 버려진 것에 대해 구미가 당기겠습니까. 개한테만 해당되는 거예요.

그런데 28절에 주님 하신 말씀이 “네 믿음이 크도다”는 말은 바로 그거야.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그 양이 어떤 마음씨가 되어야 되느냐. 너 같은 마음씨를 가질 것을 내가 원했던 거야. 잃어버린 양은 어떤 마음씨?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 믿음을 잃어버린 양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개 같은 네가 보여줬으니까 네 믿음이 크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여자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과 합치를 본 거예요. 일치된 거예요, 예수님의 마음과. 개만 건지겠다. 개 같은 인간만 믿음이 있다고 나는 간주하겠다. 이게 바로 주의 뜻입니다. 28절,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바로 주님과 링크가 되니까 연결이 되니까 부스러기의 효과로서 쓰레기 효과가 귀신을 떠나게 한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하려 하지 말고 주님 앞에 쓰레기라는 그 마음자세를 유지하는 것, 그럴 때 뭐가 보이느냐. 주님의 일방적 능력만, 자비하심만 크게 느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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