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강-YouTube강의(꿈 시편 73:20)20210406-이 근호 목사
제346강, 제목은 ‘꿈’. 꿈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요셉 같은 경우에. 또 삼손의 아버지한테도 하나님이 꿈으로 이야기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으로도 이야기했지만 인간 속에서 특별히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우기는 자들, 그런 자들에 대해서 신명기나 율법에 보게 되면 그런 사이비를 용서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자는 용서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사람에게는 꿈으로 계시하고. 그러니까 이 말은 꿈을 내가 꿨다고 해서 그 꿈을 내 소유화시킬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꿈으로 계시하실 때 이것이 제대로 된 꿈이냐를 알기 위해 두 가지를 생각해야 돼요. 하나는 ‘이게 예상 밖이었다’ 라는 것. 하나님께서 꿈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세상을 꿈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허망한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꿈으로 들어오죠.
사람들은 오히려 꿈을 허망한 것으로 보고 현실 따로 꿈 따로 그렇게 보거든요. 꿈은 밤에 착각해서 그런 거니까 현실에 넣어주질 않아요. 부질없는 것, 그것을 꿈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 같은 경우에 특별히 꿈으로 이야기하시는 것은 바로 대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지독한 현실, 너무나 생생해서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부정 못 하는, 정신분열증 환자나 부정하지 조금이라도 제정신 있다는 사람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더욱더 확실하고 생생한 이 현실, 그 현실을 깨는 겁니다. 대결시켜서 깨버리죠. 깨버리게 되면 그 현실 속에서 네 진리와 네 희망을 찾는 자체가 애초부터 잘못이라는 겁니다.
삼손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기존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해결책을 찾고 싶어서 온갖 것을 찾아 헤매도 그 헤매는 영역이 꿈이 아니고 본인이 말하는 그 생생한 현실 내부에서 계속 찾게 되죠, 현실 내부에서. 그 당시 블레셋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지배받으면서 자기한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까요? 절대로 생각 안하죠. 자기한테 문제없다고 생각하죠. 본인한테는 문제가 없는데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불편하고. 그러면 해결점은 어디서 찾습니까? 난감하죠.
그게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둘 다 하나님께서 긴급적으로 꿈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은근히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기대했던 사람조차도 그 꿈의 내용은 예상 밖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꿈의 내용이 예상 밖이라면 지금 우리는 뭐 꿈속에서 계시 받습니까? 계시 안 받죠. 성경이 있으니까요. 계시 안 받잖아요. 그러면 이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봐야 되느냐. 그것은 항상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성도한테는 예상 밖의 일로 일어나는 겁니다, 예상 밖의 일로. 당황스럽죠. 매사가 당황스러워요. 예측을 했는데 이게 하나님에 의해서 강력하게 묵살당하는 겁니다. 거절당하는 겁니다.
사람이 예측할 때 그냥 예측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뭔가 될 때 나는 어떤 어떤 것을 준비하면 되느냐를 생각하면서 예측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음식을 하기 위해 재료를 다 준비해서 ‘손님 오게 되면 이런 음식을 준비해야 된다’ 다 예측이 되잖아요. 그냥 예측하는 게 아니고 마트에 가서 음식재료를 사온단 말이죠. 사오는데 그날 따라 가스를 배달해서 쓰는 집 같으면 가스가 그만 딱 떨어졌다든지, 안 그러면 올 손님이 30분 전에 ‘미안해요’ 하고 안 와버린다든지, 음식 이만큼 준비했는데. 친구 5명 오기로 했는데 5명 다 취소되었을 때 내가 준비한 것이 바보짓이 되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바보짓이 되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십니다. 이게 참된 계시에요. 너 바보 안 되려고 했잖아. 네가 지혜롭게 실수 줄이는 방향으로 인생 살려고 네가 얼마나 아등바등 애를 썼느냐. 너 바보 아니라고 자부하지? 그런 자세로 내가 천국 들여보내줄 거 같아? 아니야.
네 솜씨, 네 멋있음, 너의 대처 잘함, 너의 뛰어난 대처실력, 일말도 천국에 같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것 다 떼고 들어와야 돼요. 그럼 그것 떼는 환경은 바로 천국 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그게 떨어져 나가야죠. 그게 바로 어린 요셉에게 꿈으로 나타난 겁니다. 마노아 가정에 꿈으로 나타난 거고요.
시편 73편 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여기 꿈 뒤에 나오는 말이 뭐냐. 꿈은 무시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천국 갈 때 우리가 한평생 산 것을 주께서 “너는 꿈속에서 살았어.” 하고 우리를 무시할 때 그걸 각오해야 돼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인생살이가 그래요. 자기가 집착하고 신경 바짝 써서 너무 신경을 써가지고 스트레스 받아 암에 걸릴 정도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완벽에 완벽을, 철저에 철저, 오직 실수 없는 쪽으로 안전빵이라 하죠, 가장 조심스럽게 안전한 길로 그렇게 갔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에 주님의 계시를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 발상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상한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었음을 알아야 돼요. 그리고 한번만 느껴지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에요. 매일같이 지금 내가 혹독하게 질감적으로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이 현실이 십자가 앞에서는 무시할 만한 꿈같은 세월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시편 73편 22절에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라고 이야기하죠. 주님의 계시를 받고 난 뒤에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예상하고 고대하고 싶죠. 그러나 실제적으로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내 모든 계획들이 여지없이 작살나는 그 순간, 그 순간이 주님이 안 계신 순간이 아니고 도리어 너무 깊숙이 주님의 계시가 나를 장악한 순간입니다.
네가 그 일을 예상하고 성사를 노리는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이유는 뭐냐. ‘나 이렇게 잘났잖아요’ 하는 자기 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의가 있는 사람은 천국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처리한 것은 바로 자기 의라는 아주 강력한 죄를 처리한 거죠.
그러면 그 죄가 십자가에서 처리되었으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남과 성공한 인생을 우리가 개무시해야죠. 그래서 우리는 인간도 아니고 우매 무지하고 짐승같사오나 23절,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붙드셨기 때문에 내가 짐승이라도 좋소. 내 인생에 대해 내가 질질 끌고 힘들게 지키려 한 이 참한 그리고 소중한 내 인생이 한낱 허망한 꿈이라도 좋소. “주님만 계시다면 그걸로 저는 좋습니다.” 라는 고백. 그것을 하기위한 인생을 우리가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