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5장 13절 (문둥병) 210202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5장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온다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게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뜻이 이 안속까지 파고드는 그 사람을 예수님이 원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봐도 내가 원하노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13절에 보면 여기서 문둥병자가 자기가 깨끗게 되길 원했더니만 그 원함을 바꾸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원한다. ‘예수님이 원하신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 아니냐 하면은 병 고쳐지는 사람, 이 사람은 예수님이 원하지 않아요. 이건 본인이 원하는 거니까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뜻이 이 안까지 들어오는 사람. ‘안’. 안까지 들어오는 사람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뭐냐 하면은 중보자에요. 중보자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2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개역한글)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개역개정)
20.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공동번역)
20. 그런데 그 중개자는 한쪽에만 속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표준새번역)
20. 그 중보자는 한편만을 위한 중보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우리말성경)
20. Now a mediator is not a mediator of one, but God is one.(KJV)
20. A mediator, however, does not represent just one party; but God is one.(NIV)
20. Now a mediator is not for one [party only]; whereas God is [only] one.(NASB)
20. 仲介者なるものは、一方だけに属する者ではない。しかし、神はひとりである。(일.구어역)
20. 仲介者というものは、一人で事を行う場合には要りません。約束の場合、神はひとりで事を運ばれたのです。(일.신공동역)
20. ο δε μεσιτης ενος ουκ εστιν ο δε θεος εις εστιν(헬라어)
갈라디아서 3장 20절에 보면 “중보는 한 편만 위한 것이 아니다”. 중보의 특징은 한 편만 위한 것이 아니다 했습니다. 그러면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것이 아니면 두 편이 있다는 뜻이지요. 한 편은 하나님이고 한 편은 인간인 겁니다. 예수님이 중보자이기 때문에 예수님 속에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 요소+인간 요소가 같이 들어있는 것이 중보자의 기능이죠.
하나님의 요소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걸 뭐라고 되어 있느냐 율법이라고 되어있어요. ‘율법’. 율법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율법에 부합되는 중보자에 부합되는 인간 요소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예수님께 적용시킬 때 예수님은 저주받았잖아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인간 요소는 뭐냐 하면은 바로 저주받은 형의 인간. 저주받은 인간형. 율법+저주받은 인간형이 바로 예수님의 중보자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아니에요. 그러면 이 문둥병자가 예수님 찾아올 때에 문둥병자는 일반인처럼 자기의 처지가 너무 처참하니까 비참하지요. 어처구니 없지요. 처지가 문둥병이라는 게. 이걸 빨리 원상복귀, 다른 사람처럼 되고싶은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처럼 되는 거에요. 나의 변신이죠. 내가 자꾸 달라지는 것.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 이 문둥병자는 지금 뭘 하고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한테 어떤 기대를 갖고 있어요. 기대를 갖고 있고 예수님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하는 그것을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예측이라고 해요. 예측, 기대. 나의 변신.
인간의 모든 변신은 달라짐은 항상 뭘 시도하느냐? 예측을 시도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보다 예측할 때 자기가 자신을 기대할 때 더 못하게 기대하는 법이 있을까요? 나 더 잘됐으면 기대하겠지요? 예측할 때 보다 잘 됐으면 기대하겠지요. 그렇지요? 결국 인간은 인간의 밖을 못 벗어나죠. 중보자 기능이 되지를 않는다 말입니다.
인간은 두 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 한 편, 자기만 생각하는 거에요. 보다 자기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잘되는 것 중에서 건강도 있고 부유함도 있지만 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의로운 자, 선한 자 되기. 건강하고 부유하고 의롭게 되고 선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예측하는 거에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달라지길 예측할 때에 중보자 되신 예수님하고 비교해보세요. 여기 뭐가 빠졌습니까? 뭐가 빠졌지요? 뭐가 빠졌습니까? 율법이 빠졌지요. 율법이. 율법이 빠졌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와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미 율법의 세계 속에 그들이 놓여있는 거에요. 율법의 세계 속에 놓여있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당밀 있지요. ‘당밀’. 당밀하면 엿 녹은 거 생각하면 됩니다. 또는 더 쉬운 것. 탕수육 소스. 탕수육 소스 할 때 여기에 탕수육 소스가 적당한 예 같은데 돼지고기 튀긴 것이 이렇게 쟁반에 담겨 있잖아요. 담겨 있지요? 다 개별이죠. 개별적. 개별적 튀김들.
소스를 이렇게 죽죽 늘어지게 당밀이나 엿이나 소스를 이렇게 덮어버립니다. 덮어버리면 개별적인 튀김들은 완전히 휩싸여버리지요. 휩싸여. 여기 산과 골짜기 이렇게 전경이 이룬다면 여기에 뭔가 소스 부어버리면 여기 골짜기 높낮이가 덮여버리죠. 개별적인게 다 덮인다 이 말이죠.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말씀, 복음 또는 율법 이것에 완전히 뒤덮여 사는 거에요. 뒤덮여 살아 버리면 뭐가 뒤덮느냐 하면은 시간과 공간에 뒤덮여 살지요. 우리의 모든 계산은 뭐냐 하면은 일상은 뭐냐 하면은 시간과 공간을 쪼개면서 보잖아요. 내가 있는 지역과 남이 있는 지역. 내가 사는 아파트 201호 남은 202호 공간이 쪼개졌지요.
시간은 뭐냐?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이고. 오후 2시하고 오후 3시하고 쪼개져있지요. 4시하고. 모든 게 쪼개져있지요 인간은. 이걸 지난 수요일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 이걸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카운트라고 했어요. ‘카운트’. 헤아림. 헤아릴 수가 가능한 것. 하나, 둘 헤아리는 거에요.
왜 헤아리느냐 하면은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헤아리는 거에요. 나는 자식 3명 있다. 너는 두 명 있다. 카운트가 되야 되는 거에요. 카운트는 누가 카운트합니까? 본인이 카운트하는 거에요. 본인이 카운트하는 이유가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해서 카운트하는 거에요.
학원 6명 모이자 10명 모이자. 이게 뭡니까? 5명 모이면 되고 10명 모이면 안되고 이게 왜 하느냐 하면은 5명 이하 모이면 여러분 공간을 나라에서 인정해주겠습니다. 비록 코로나가 창궐해도 인정해주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식당에 앉을 때 4명까지는 인정해주겠습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제가 우스갯소리로 설교 시간에 했지요. 식구 5명 같으면 식사할 때 하나는 저 방에서 모여야 한다고요. 4명밖에 안되니까. 우스개해도 웃지도 않고.
카운트를 한다는 것은 수 헤아림이 된다는 것은 이 숫자와 이 숫자, 이 숫자가 다 끊어졌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여러분들이 눈을 뜨고 시작! 해보세요.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시계죠. 시계 카운트 하지요. 8시에 출근한다. 그럼 7시는 안돼. 9시는 너무 늦어서 안돼. 8시 되야 돼요. 그럼 8시 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네. 그러면 또 딴 짓하지요. 왜? 8시 안됐으니까 딴 짓하는 거에요. 집에서 노는 사람은 관계없지만 출근하는 사람은.
이걸 뭘로 덮어버리냐 하면은 그러니까 이렇게 카운트가 되어버리면 그 다음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자꾸 예측을 하게 돼요. 기대를 하게 된다고요. 10시에 누구 만나기로 했는데 안 만나고 늦게 오면 어떡하지 이런 것. 지금 차가 와야 되는데 늦게 오면 나는 지각인데 이런 거. 계속해서 예측하고 기대하고 예상한다는 것은 이 모든 시공간이 딱딱 끊어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소스가 속속들이 스며들어요. 탕수육 소스가. 늦게 오신 분 탕수육 이야기 못 들었는데. 탕수육, 돼지고기 튀긴 것에 속속들이 다 스며들지요. 그러면 8시도 내 시간 아니고 9시도 내 시간 아니고 8시 24분도 내 시간 아닌 거에요. 내 시간 아니어버리면 뭐가 날라가 버립니까? 예측이 안되지요. 예측이. 예측하거나 기대가 무의미해져 버린다니까요.
예측, 기대가 안 되어버리면 어떤 게 좋으냐 하면은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염려 걱정이 없어요. 예측이 안 되니까. 그런데 예측을 해버리면 초조, 불안 생기잖아요. 그럼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죄가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계획에 도전장을 제시하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 네가 뭘 알아. 내가 알지. 내 스케줄은 내가 관리하지. 하나님 네가 관리하는 게 아니야.
이게 하나의 모독이 되고 도전이 되는 겁니다. 내가 관리하다 보니까 미래에 대해서 모르니까 그저 예상하고 예측하는데 본인은 초조함과 두려움에 벌벌 떨어요. 안 그래도 날씨 추운데 얼굴 시뻘개져 가지고 초초해가지고 빌고 이렇게 하는데 이게 맞지도 않고 어쩌면 좋아. 오늘 다 했는데 이런 거.
항상 어떤 시기에도 주님의 그 끊어짐이 없는 당밀이라 이게 진덕진덕 하잖아요. 이게 딱딱 끊어지는 게 없잖아요. 그냥 덮어버린 거에요. 그냥. 속속들이 다 속까지 다 스며든 거에요 이게. 뭐가? 율법이. 뭘 이렇게 예상해서 했다고 칭찬하지 않아요. 주님의 칭찬이나 주님의 평가는 율법대로 하는 것이지 우리 소원대로 으쌰으쌰 우리 흥 돋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율법대로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율법에서 벗어난 순간이 없습니다.
청년들 입사시험 친다든지 애들이 수능치고 난 뒤에 또는 대학에 합격할 때에 아침 9시부터 인터넷으로 합격통지서 합니다하면 컴퓨터 틀어놓고 자기 수험번호 764...2번만 치면 되는데 아~~. 불합격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그렇게 될까봐 그 전부터 벌써 밤에 잠도 못자. 떨어질까봐. 얼마나 율법이 모든 시공간을 장악한다는 것을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의 변신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중보자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 요소와 인간 요소가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 요소는 뭡니까? 율법이죠. 인간 요소는 뭡니까? 인간 요소는 바로 율법이 율법답기 위해서 등장하는 인간. 다시 말해서 율법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저주받았다. 거기에 등장하는 게 누구냐? 오늘 본문에 문둥병자, 문둥병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으키는 일은 무엇이냐 하면은 율법을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문둥병자 만드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의 변신을 시도하면서 문둥병 못돼서 환장한 사람은 없잖아요. 자살한 사람은 있어요. 그것도 좀 안 아프게. 그런 사람은 있지만 자진해서 문둥병 되는 사람은 없어요. 자진해서. 모세가 문둥병 되고 싶어 환장하지 않았어요.
모세는 ()다. 할 때. 모세는 그냥 모세인줄 알고 있었어요. 나는 나니까. 모세가 알고 있는 모세.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알고 있는 나. 내가 알고 있는 그 ‘나’가 진짜 ‘나’라고 내가 알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 ()를 다른 걸로 바꿀려고 시도를 합니다.
이왕 아는 거 건강, 이쁜 나,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이쁜 나. 보톡스한다든지 꿰맨다든지 찢고 난리죠. 이런 나. 이게 변신을 시도하면서 변신을 시도하는 거에요.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출근하면서 오늘 하는 모든 일이 껄끄럽지 않고 매끈하게 처리할 수 있는 그런 나, 그런 나. 오늘은 공부하면서 속속들이 다 이해가 되는 그런 멋진 나. 그걸 자꾸 예측하고 기대하는 거에요. ‘변신’.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병신만드는 거에요.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우리로 네가 문둥병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요소가 네 안에 안 들어왔다가 되는 거에요. 문둥병자의 보편화에요. 이 율법의 보편화. 문둥병자의 보편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그렇게 하느냐. 그건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나옵니다.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개역한글)
15.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공동번역)
15. For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availeth any thing, nor uncircumcision, but a new creature.(KJV)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보면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에요. 내가 알던 나, 그거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그건 중보자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는 ‘나’를 완전히 무산시키고 하나님이 원하는 자,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요소가 듬뿍 들어있는 ‘나’로 새로 지어요. 새로 짓는다고요. 새 창조죠. 새 창조.
새 창조니까 내가 알고 있던 나는 이거는 뭐 쿨하게 포기해야 됩니다. 내가 알던 나는 이젠 잊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건 하늘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나를 가꿔도 하나님께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묻는 것이 네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 네 안에 예수님의 요소가 있느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있느냐? 그런 거 묻거든요.
지난주에 낮설교 때 할 때 땡처리 이야기했지요. 주님께서 구원할 때 뭘로 땡처리한다고 했습니까? 고난의 무기로 땡처리. 내가 이 땅에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도 않아요. 유명디자이너의 작품같은 거 그런 거 안봅니다. 성경을 100독하고 그런 거 안 봐요. 그냥 우리는 폐품이에요. ‘폐품’.
지금 우리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가 무능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우리는 우리를 저주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심히 무능합니다. 나를 저주할 줄을 몰라요. 저주할려면 죄를 지어야 하잖아요. 우리는 우리가 죄 지을 줄을 몰라요. 왜냐? 우리는 항상 변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변신할 때 늘 건강하고 부유하고 행복하고 의롭고 착하고 선하고 좋은 쪽으로 변신을 시도하기 때문에 저주받는 방법을 몰라요.
이게 인간의 문제네요. 예수님은 알아요. 예수님은 아버지께 저주받는 걸 알아요. 저주받기 위해서 기도했잖아요. 땀방울이 핏방울 기도한다고요. 그런데 거기 같이 갔던 제자들 3명은 뭐했습니까? 그림에 보면 셋이 붙어서 캠핑 온 것도 아니고 전부 자고 있다고요. 왜 그들이 밤새 기도 안하고 잡니까?
자신의 기대치와 자신의 예측에 의하면 그다지 기도할 땀방울이 핏방울 될 정도까지는 기도할 이유가 안되기 때문에. 대충 주여 잘되게 하옵소서 이러고 잔거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겁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내가 감당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 버림받는 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시편 22편 1절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말씀을 내가 감당해서 완수할 수 있도록 내 뜻을 ‘나’란 자체를 버림받는 ‘나’로 완전히 컨셉 바뀌게 하옵소서. 완전히 달라지게 하옵소서. 아버지께 버림받는 것 저주지요. 지옥의 심판이죠. 그 지옥의 심판을 내가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한 겁니다. 완전히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기도가 멈출 수가 없어요.
자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자살도 폼 내고 자살하잖아요. 그래도 안되고. 자살조차도 내가 죄 짓는 것도 아니고 저주받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나는 저주받고 죄 짓는 것은 주님의 몫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저주는 무엇이 있어야 가능하느냐 하면은 율법이 내 속에까지 들어와야 저주가 돼요. 율법이 내 속까지. 율법을 지켜버리면 저주가 안돼요. 전혀 율법 앞에 무능해야 돼요. 율법이 쏘아대는대로 화살을 다 맞아야 돼요.
그러면 나는 완전히 이것은 나는 완전히 걸레되는 거죠. 나는 하도 총을 많이 쏘고 화살을 많이 쏴서 딱히 건질게 없을 정도로 그렇게 되야 그 다음에 뭐냐? 새로 지음받은 새로 지으심의 의미가 발생됩니다. 다시는 옛것에 대해 미련 갖지 말란 말이죠. 너덜너덜 걸래 다 됐어. 그거 꿰매도 못써. 버려. 버리고 포기하고 새로 지음 받자. 내가 새로 지어줄게.
그 새로 지어주는 것이 뭐냐? 십자가의 중보자의 요소가 들어왔기 때문에 새로 지음 받는 거에요. 십자가 들어오면 새로 지음 받는 거에요. 전에는 누구 자랑했느냐 하면은 늘 자기의 변신과 화려한 변신, 요새는 화려한 돌싱. 변신 이런 것만 생각하니까 자랑거리가 누구 것만 자랑합니까? 혼자 돌아왔다고 자랑질하는데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중보자의 요소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거에요. 율법이 제대로 나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거에요. 율법이. 십자가란 죽음이 저주받은 죽음이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십자가의 죽으심이 곧 율법. 율법에 의한 저주가 내 안에서 작렬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거에요.
왜? 옛사람은 일러라! 내가 변신을 시도하고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시도할려고 껄떡대는 그 모든 것, 그 모든 시도는 이제 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봐야 자기 변신한 것만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십자가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주님도 저주받았지만 주와 함께 누구도 저주받았어요? 주와 함께 들어올 사람들도 저주받은 거에요.
성경에서 신기한 것도 여러 가지 신기한 것 많지만 그중에 신기한 게 뭐냐 하면은 귀신이 들어온 것도 신기하지만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이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이 진짜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들어온 것 보세요. 피부도 성형 째고 들어와야 되거든요. 째지도 않고 수술 칼 자국도 내지도 않고 그냥 우리 안에 들어와버린 거에요.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주님이 들어왔다는 말은 주님의 율법의 저주가 들어왔다는 거죠. 그리고 율법의 저주가 율법의 완성도를 높이는 거에요. 최종완성도가 죄 있는 내가 율법 앞에서 가차 없이 저주받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승리하게 된거죠. 내 안에서. 율법이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요소가 승리한 거에요. 그러면 내 몸은 내 몸을 통해서 누구의 영광?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피조물로서.
그 율법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죽고난 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요건을 갖췄다는 조건이 사흘 만에 부활한 거에요. 그 요건 자체가 사흘 만에 부활된다면 예수님이 와서 우리를 휘젓고 저주받게 했다면 그 대상자는 부활의 참여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 메카니즘이 그 과정이 그렇게 돼요. 알고리즘이 논리정열과정이.
그러니까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누구 뜻입니까? 순전하게 완전히 순전하게 예수님 생각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내가 원한다. 문둥병자야 기다려라. 내가 원해서 너를 고쳐줄게. 중요한 것은 네가 병고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세가 명한 율법, 레위기서 14장 2절 이하에 나오는 문둥병자가 병 나았을 때 하는 제물을 드리는 율법이 있거든요.
그 율법의 완성이 레위기에 나오는 문둥병자 낫게 했기 때문에 드리는 예물이에요. 나아간다 이거 안돼요. 완전히 나았을 때 완전히 저주가 풀렸을 때에 그때 드리는 예물이 누가 완성했다? 바로 문둥병자 속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들어가게 하셔서 그 사람 속에서 예수님이 그 율법을 완성시킨 겁니다. 그러니까 북치고 장구치고 누가 혼자 다 했단 말입니까? 예수님 홀로 다 하셔서 우리는 그 예수님만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 말이에요.
그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을 뭐하고 하느냐?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보니까 “새로 지음 받은 사람”.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은 우리가 예상한 ‘나’, 예수 믿고 천당 가야지 지금 내가 예상한 천국 가 있는 ‘나’는 이건 하나의 변신의 일종이에요. 나의 변화시도에 불과해요. 예측에 불과하고 내가 예상에 불과하다고요. 여전히 나는 지금의 ‘나’가 그 천국가 있는 ‘나’일 것이라고 지금 계속 지금 노리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이거는 뭐에요? 결국은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것밖에 안되잖아요. 중보자 요소도 생각안한 인간이 지금은 고생스러운 이 세상 떠나서 천국 가서 잘 살란다.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이것은 내가 이 땅에서 건강하고 부유하고 의로운 자 선한 자 이거 예측하는 거하고 차이 나는 것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렇게 예수 믿고 천국갈려고 하다보니까 아까 예측하는 데는 뭐가 주어진다고 했습니까? 예측과 예상 여기서 뭐가 발생되지요? 초조와 불안 발생되지요.
‘초조와 불안’. 죄 지으면 안 되는데 뭐 하면 안되는데 예수님께 순종 안하면 안 되는데 열심 안내면 안 되는데 라오디게아 봐라 안약 넣으랬는데 안약 어디서 사지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에베소서 교회는 첫사랑을 잊었잖아. 첫사랑은 자기 고등학교 때 첫사랑 찾고. 그 일곱 교회 이야기하면서 촛대 옮기는지 안 옮기는지 얼마나 초조하고 얼마나 불안합니까? 얼마나 두려워합니까? 이거는 완전히 목사들의 미끼죠. 사기꾼들의 미끼죠.
옳다구나. 잘됐다. 제가 처방전 내려드리겠습니다 이래가지고 접근하고. 본인이 고생 많은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 가서 느긋하게 살려는 욕심은 있고 그런 예측은 하고 나 하니까 혹시 마귀가 와서 방해하면 안 되는데 하니까 그 초조가 있으니까 초조와 불안에 누가 끼어듭니까? 마귀가 끼어드는 거에요. 아이고 죄 지었는데 죄 사함 받아야 할텐데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네가 죄를 알아? 네가 지은 죄가 뭐야? 율법을 알아야 죄를 짓지요. 율법도 모르는데 무슨 죄를 짓습니까? 그저 날마다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서 애쓸 뿐이지 무슨 죄를 지어요. 죄 지어놓고 죄가 뭔지도 몰라요. 왜? 율법을 모르니까. 율법을 안다면 아 율법이 의도적으로 주님이 율법을 앞장세워서 율법이 죄라고 하는 그 죄를 우리를 통해서 이게 생산해낸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생산해낸다는 사실.
주님께서 율법을 그 많은 율법을 딱 두가지로 종합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누가복음 10장에도 나오는데 10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목숨까지 바쳐서 사랑하라. 누가복음 10장 25절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이 율법을 내가 지킬려고 한다면 그 율법을 지켰다 안 지켰다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리는 거에요. 그러면 인간이 율법을 받아놓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은 예측을 하겠지요. 어떤 예측을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 바쳐 사랑한 그 상태의 나를 미리 예상하는 거에요. 사랑하되 목숨까지 바친 그 나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흐뭇해하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막상 해보면 본인도 방해하고 주어진 여건들이 방해할 때 본인은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목표는 목숨까지 바치고 뜻을 바치는 건데 실상은 뭐하냐? 실상은 뭐 생업에 종사해야지. 실상은 생업에 종사해야지요. 목숨까지 바친다면서요? 일단 밥은 먹어야 주님 섬기지요. 그건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 시험할 때고. 일단 기도해도 떡 먹고 기도하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렇게 왔잖아요.
그게 마귀의 모든 것을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마귀의 뜻이 뭔지 뻔히 알면서도 못 지키는 거에요. 못 지키니까 초조하니까 어떻게 돼요? 맨날 자기 성적보는 거에요. 자기 성적. 여러분들은 고등학교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저 같은 경우 고등학교는 입시를 위해서 경쟁적으로 쉬는 시간도 애들이 놀지 않고 공부했던 학교에요.
그러면 시험 딱 치고 난 뒤에는 애들 모의고사 펴놓고 지금 자기 점수 관리한다고 초조하고 불안한 가운데서 이 점수 가지고 서울대 원서 내겠느냐 걱정해 가면서 여러분들은 별로 상관없나. 경쟁하는 거니까. 이미 율법사는 자기가 서울대학 들어갈려고 그것도 최고 하나님 보시기에 제일 기뻐하시는 사람 되기 위해서 목숨을 다 해 뜻을 다 해 하겠는데 딱 문제 냈는데 무엇이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네가 하나님께 바친 그 마음 가지고 이제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 쪽으로 향해라? 이웃을 향해 너도 그렇게 살아라 하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사가 하는 말이 내 이웃이 누굽니까? 하는 거에요 그걸 왜 물어요? 왜? 시험 칠 때 묻는 질문을 똑바로 알아야 답을 똑바로 낼게 아닙니까. 시험문제에. 다음 문제 중 맞는 것을 두 개 골라라 했는데 한 개만 고르면 틀릴 수 있잖아요.
똑바로 알기 위해서는 보다 상세하게 질문자의 질문을 듣기 위해서 이웃이 누굽니까? 하고 이렇게 구분하는 겁니다. 소스가 아니고 딱딱 끊어서 구분하는 거에요. 주님께서 그때 바로 강도 맞은 사마리아인을 그때 끄집어내는 겁니다. 내 이웃이라는 것은 내 이웃 자체가 나를 뭐라고 하느냐. 고발하는 율법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웃을 잘 해주기 전에 이웃이 고발하는 거에요. 이웃이 나를 고발해요.
그러면 이웃이 없는 사람은 자기는 건강하고 부유하고 의로운 자 선한 자 될 수 있다고 믿겠지요. 그러나 진짜 이웃이 되신 예수님께서 율법을 앞세워가지고 아까 율법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지요. 목숨 바쳐 사랑하고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라 율법이 딱 떠오르는 순간 나는 건강하고 부유하고 의로운 자 선한 자 이것 해당사항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쪽을 얻을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안돼요. 대상 자체가.
대상 자체가 안되면 나는 뭐 되어야 마땅합니까? 저주받은 뭐가 되야 돼요? 문둥병자 돼야죠. 문둥병자라고 하는 것은 저주받은 자에요. 레위기에 보면. 저주받은 자에요. 저주받은 자 돼야지요. 하필 주님께서 길 가실 때 문둥병자가 왔기 때문에 건강을 요청하는데 저 인생 고달파서 못 살겠습니다 나도 건강하고 살고 싶습니다 할 때 주여 내가 원합니다 할 때 네가 원하는 것하고 내가 원하는게 따로 있어. 내가 원하는 걸 너한테 심어 넣어줄게.
그게 바로 너는 너의 문둥병 됨과 문둥병자 된 인간의 요소와 하나님의 요소, 율법이 한조가 되어서 주께서는 그것을 중보자의 길을 가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게 뭐냐? 문둥병자가 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받지 못하는 거죠. 율법의 저주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구원될 수가 없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 율법을 주신 이유가 뭐냐? 입을 막고 우리 안에 뭐하게 함이라? 저주받게 함이라.
문둥병자는 주님의 율법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왔을 때 인간의 모습은 그냥 죽음이 아니고 심판받는 모습의 인간, 저주받은 모습의 인간, 이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 왔다는 징조가 되는 거에요. 징조. 분위기가 어떤 귀신이 왔을 때 갑자기 형광등이 번쩍번쩍 거리고 이 무슨 이상한 기가 왔나 하잖아요. 갑자기 초등학교 유리창 깨지고 하면 있잖아요. 주님이 다가올 때 우리는 졸지에 오늘도 건강, 행복하다가 갑자기 뭐 됐습니까? 우리는 문둥병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그게 출애굽기 4장 6절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지요. ‘기적’. 자, 이 기적이라는 것은 수련회 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예측이나 예상, 인간의 언어로서 포착이 되지 않는 것이 기적입니다. 인간세계, 하나님이 저벅저벅 다가오실 때 하는 그 모든 게 기적이에요. 주께서 그냥 계신 자체가 기적이에요. 왜? 인간세계에 없는 요소이기 때문에.
인간이 상상한 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은 나의 변화를 요구할 때 그걸 들어주는 하나님입니다. 내 예측한대로 오시는 하나님이 우상이죠. 인간세계에 속한 신이죠. 인간은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자기에게 유리하고 자기한테 잘해주면 그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인간이 선택하지 않는 하나님은 그 자체가 뭐냐? 기적이고 이적이죠. 내 예상범주 밖에 나가니까.
어려운거 하나 해보겠습니다. 탕수육 잊지 마세요. 탕수육 소스. 확 덮어버리는 것. 내가 어디서 뭘 하든지 낮잠 자든지 누워서 티비를 보든 간에 그 순간에 뭐가 작용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작용하는 순간입니다. 한 번도 쉬지를 않아 우리는 쉬어도 주님은 쉬지를 않고 우리는 시간 계산해도 주님은 시간 카운트한 적도 없어요. 주님 앞에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의미 없어요. 그냥 완전히 말씀으로 덮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산 밑에서 비를 피하는 것처럼 우산 안에서 뭘 해도 여전히 우산 안에 있는 거에요. 인간의 변신, 달라짐 또는 변화 추구, 변화 시도를 하나의 수학의 집합론 가지고 설명해볼게요. 정수라고 하는 것은 1,2,3,4,5,6,7 이 정도까지 합시다. 1,2,3,4,5,6,7 이걸 정수라고 해요. 홀수라고 하는 것은 1,3,5,7,9 이걸 홀수라고 합니다. 짝수라고 하는 것은 2,4,6,8,10 이게 짝수가 되지요.
자, 그럼 물어봅니다. 정수의 합과 짝수의 합이 어느 것이 개수가 많습니까? 정수의 그 하나하나가 많습니까? 아니면 짝수 하나하나가 많습니까? 이게 보통은 짝수는 정수의 반토막, 반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이게 무한대로 가면 어떻게 됩니까? 무한대로 가버리면 1과 2를 짝 2와 4를 짝해버리고 3과 6을 짝을 해버리고 4와 8과 짝을 해버리고 5와 10을 짝을 해버리면 이게 무한대로 가버리면 결국 개수가 동일해버려요. 짝지어지니까.
이 말은 인간이 변신을 시도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세상이 내가 기대하는 모든 것에 무한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7살 때 여자아이가 옆집에 인형을 갖고 싶을 때 나와 무엇과 짝이 되느냐 하면은 나와 인형 가진 나를 짝을 짓는 거에요. 9살 되니까 인형 버리고 컴퓨터할 때 나와 컴퓨터와 짝을 이루겠죠. 그럼 내가 12살 되면 다른 것을 기대하겠지요.
그럼 내가 갖고 싶은 것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됩니까? 항상 1:1로 짝을 이룰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냥 무한대에요. 무한대. 옷을 예를 들어서 600벌 갖고 있는 이멜다. 옛날 필리핀 대통령 부인이 구두하고 옷하고 수집했어요. 그래서 독재라라 망했는데. 600켤레라면 이 사람은 600켤레로 멈추겠습니까? 안 멈추지요. 백화점에 신상 나오잖아요. 601켤레 또 나오겠지요. 내일은 또 내가 602켤레를 사야지 은근히 예측을 하는 거에요. 사는 보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601번째 신을 신은 내 모습과는 다른 602번째 신상을 신고 있는 나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겁니다. 세상은 계속 신작품이 나오니까. 무한대로 연결되는 거죠.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걸 1:1 대칭이 성립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모자람이나 미흡함을 세상에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왜? 1:1 대칭이 되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고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세상 그 정도로 우리집에 물건보다 백화점에 물건 훨씬 많잖아요. 우리집에 책이 있지만 서점에 가면 교보문고 가보면 책이 더 많아요. 계속 새로운 출판물이 나오니까. 모자람을 못 느끼는 겁니다. 그야말로 무한대죠.
그런데 이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데 그러면 무한대에서는 여러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개수가 같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런 거 짝수가 정수보다 개수가 더 많다고 생각 안 듭니까? 이 짝수가 이 정수보다 많다고 생각 안 들어요? 정수 1,2,3,4,5,6,7,8,9 라면 짝수는 그렇다 하고 그 다음에 2의 제곱의 나열. 1의 제곱은 1, 2의 제곱은 4, 3의 제곱은 9, 4의 제곱은 16. 이 개수는 정수 개수와 짝수 개수 어느 게 많겠습니까? 역시 아까와 같이 1:1 대칭이 되니까 동일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여기에다가 4의 짝수에다가 그러니까 4의 배수, 정수 곱하기 숫자의 나열, 1같으면 4가 되겠지요. 2같으면 뭐가 됩니까? 8되고, 3같으면 12가 되고, 4같으면 16이 되고 하지요. 이 숫자는 어느 것이 더 많습니까? 4의 배수 어느 것이 더 많습니까? 역시 아까 1:1 동일하지요? 그렇지요? 무한대니까. 동일하지요. 그러면 여기 짝수 6은 어디 갔어요? 6은 짜투리입니다. 여기서 10은 빠지겠죠. 짜투리죠. 6 빠지고 10 빠지지요. 10인데 14니까 10이 빠져있지요.
이 빠져있다는 말은 이게 다 짝수지요. 그러니까 제 말은 짝수가 정수보다도 더 많은 거에요. 왜? 짜투리 빠진게 있기 때문에. 말장난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지금. 빠진게 있다고요 빠진게.제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변신을 시도하면서 빠트린 게 있어요. 뭘 빠트리겠어요? 바로 나는 문둥병자 되고 싶어요. 나는 지옥가고 싶어요 이게 다 빠져있는 거에요. 이게 빠져있는 거에요.
결국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내 중심으로 나 의도한대로 하나님의 탕수육 소스, 모든 것이 율법으로 덮였는데 우리는 모든 율법을 율법대로, 율법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덮었는데 우리는 그걸 무시하고 내가 원한 내가 더 나은 변화를 추구하는 필요한 것만 뽑아다 보니까 무엇이 빠져있는 거에요? 하나님의 많은 요소를 우리가 빠트리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그 빠트린 요소를 뭐가 주목하느냐? 주님이 찾아오신 거에요. 빠트린 것을 보는 거에요.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 강도 너희들이 천국 갈 것이다. 결국은 나의 구원이 나로 천국을 가로막고 있었던 겁니다. 가짜 천국을 거기에다가 정신 팔려가지고 진짜 천국은 내가 놓친 것들 속에 주님이 찾아온다는 것을 몰라요. 그저 나는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나만 잘되면. 결국 나는 주님하고 내가 생각하는 지금의 나는 주님하고 안 맞습니다. 안 맞으면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