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아담의 뾰루지

아빠와 함께 2021. 1. 8. 00:52

강남-누가복음 5장 8절 (아담의 뽀루지) 201222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5장 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거기까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잘 하시다가 갑자기 자기 일이 아닌 시몬의 고기 잡는 일에 관여를 하셨습니다. 이 관여로 인하여 베드로의 사적인 자기 인생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엉망이라면 베드로가 강력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내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밀어야 되는데 여기 보게 되면 8절에 보게 되면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이렇게 갑자기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 죄인이라고 이야기한 그것을 계기로 해서 10절 11절에 보면 “이제 이후로는 네가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고 이후로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누가 포획된 거죠. 말씀으로 베드로하고 친구들 동무들 있단 말이죠.


그러면 고기 잡는 어부. 보통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듯이 예수님께서는 뭐를 던져서 베드로를 잡았습니까? 말씀을 던져서 베드로를 잡았지요. 그러면 여기 나오는 현상은 하나는 뭐냐 하면은 말씀에 잡혔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은 “나는” 그 다음에 무엇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가 본인을 스스로 설명할 때 나는 죄인입니다 설명했습니다. 이거 자발적이죠. 본인의 자기 고백 자발적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 그래 네가 죄인이야. 베드로가 자기 설명, 이걸 설명이라고 하고 서술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러합니다라고 서술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그래,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너는 이제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그 다음에 “되리라” 하고 배를 놔두고 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출발점이 뭐냐 하면은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로 달라질 때 그 출발점이 나로부터 출발했다가 한 단계, 뭐로 변하느냐 하면은 나는 무엇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시작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죄인입니다 하니까 주님께서는 그 죄인을 뭐라고 규명했느냐 하면은 사람 낚는 어부에 자질 또는 자격이 구비된 걸로 보는 겁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데 자질과 자격으로 보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 베드로로 하여금 죄인 아닌 자를 죄인 되게 하는 이 과정을 통해서 그 끝은 그 사람 낚는 어부로 드디어 하나의 과정을 형성 만들어냈어요. 하나의 과정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첫 번째 봅시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을 때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죄인을 갖고 있는 그 구성, 구성요소 그것이 나에게서 나왔습니다 또는 나의 전부입니다 라고 할 수 있어요.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면 이런 걸 가지고 죄인이라고 한다는 그 구성적인 모습이 그냥 나에게 다 덮친 거죠. 나에게.


나는, 나=죄인입니다. 이렇게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가버리면 나는 평소에 의인인줄 알고 죄인인줄 아는데 나는 의인보다 죄인에 속했습니다라고 이렇게 자기 의사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방향은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벌어진 상황은 죄인으로서 ‘너는 죄인이 바로 너야’ 라는 것을 베드로를 통해서 고백하도록 유도한 거에요. 말씀이.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이 죄라는 개념은 내가 평소에 분류하고 있던 아 이건 의야, 이건 죄야, 그 죄에 내가 해당됩니다. 그 점에서 나는 동의합니다. 나는 그 점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이게 아니고 나는 의도 알고 선도 알고 죄도 압니다 라는 이 자체를 묵살을 해버리는 거에요. 이 자체가.


이것을 알던 말던 상관없이 무조건 적으로 나는 죄인에 해당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온 거에요. 왜? 엎드렸으니까. 내가 입이 있어도 더 이상 말 안하겠다.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나는 죄인입니다. 그 죄의 규정은 예수님의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이 아시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냥 엎드리는 거에요. 엎드려서 무조건 주님의 안목에 의하면 저는 죄인될 걸요. 아마 죄인일걸요 이렇게 되는 거에요.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나는 죄인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해서 내가 아는 죄인이 아니고 주님이 설정한 그 죄의 죄가 나를 덮쳤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으로 포획하는 그 방식이다 이 말이죠. 이 방식을 나중에 베드로가 성령 받아서 성도들 전도할 때 그대로 이 방법에 그대로 적용되는 거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조건 뭐다? 무조건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어떤 문제가 풀리느냐 하면은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다니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베드로의 생애는 어떤 내용으로 꽉꽉 채워질 것이냐가 이미 밝혀졌어요.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느냐 하면은 내가 아는 내가 알고 있던 죄나 의의 개념은 그것은 이제 점점 날라가 버리고 주님 홀로 알고 계시는 죄가 나를 통해서 계속해서 여기서 생산되고 만들어지는 작업에 베드로가 놓이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함께 있지를 못했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것은 사전에 미리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잖아요. 그게 가장 베드로다운 거에요. 가장 베드로 답다는 말은 가장 반석답다는 말이고 그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은 교회의 가정 전형적인 그 모습, 교회를 구성하는 그 인간의 그 모습은 베드로가 대표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주님이 알았던 그 죄를 주님의 말씀과 접촉되면서 내가 미처 몰랐던 죄가 내 안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거죠. 만들어지게 되면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베드로가 했더라도 이 고백을 이제는 내가 고백한 고백이 아니라 주께서 베드로답게 만든 그 고백으로 주님께서 말씀으로 이 현상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래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베드로가 계속 죄인이 되어가고 점점 더 죄가 많아진다는 말은 이것은 그 베드로 안에 주께서는 말씀만 했잖아요. 예수님 자신이 이제는 베드로 속에 들어와서 베드로를 말씀으로 속에서 관통하고 뚫고 같이 지나가는 거에요. 뚫고 지나가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가 합일된다는 말은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 ‘하나’. 1이 된다는 말은 우리는 뭘로 등장합니까? 미처 몰랐던 우리가 죄인이 되는 거에요.


어떤 죄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 예수님만이 십자가 져야 될 이유가 다른 사람은 거들 필요 없이 예수님 홀로 죄를 대속하실 분이 예수님뿐인 것을 더욱 더 드러내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이 자기 구원에 죄인이 협조할게 아무것도 진짜 아무것도 없어야 가장 찐찐찐! 진짜 죄인이 되는 거죠.


회개를 했다든지 이런 거 전혀 보탬이 안돼요. 배신할 때 확실하게 배신해야 돼요. 확실하게. 배신의 끝장을 보여줘야 돼요. 강도가 배신하는 것은 그건 이해되죠. 왜? 예수님께 별로 혜택을 안 입었으니까. 그러나 가장 누구보다 가까이 혜택을 입은 자가 배신을 해줘야 배신의 진수를 보여주는 겁니다. 배신의 진수를.


예수님과 합의를 했다. 신비로운 합의다. 신비로운 합의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라는 말이에요. 나에게서는 어떤 거룩이나 어떤 성결이나 괜찮은 것은 일체 애초부터 우리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나는 왜 내 바닥을 몰랐는가. 왜 나는 바닥을 몰랐는가. 제가 주일날부터 노래했지요. 한번 적어볼까요.


‘저 바닥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어디서 많이 들었던 노래죠? 저 바닥에 누워. 가장 바닥에 누웠을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있는 자의 전형적인 찐찐 성도의 모습이에요. 성도는 십자가를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 제대로 죄인의 코스 괴수의 면모를 다 보여준다면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 자신 베드로를 통해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심판의 부합되는 인물, 심판에 부합되는 인물을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심판에 부합되는 것.


심판에 부합된다는 말은 내가 있을 자리가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가 내가 거기에 있을 자리다라고 인정하는 것.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유’. 심판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는 거에요. 심판 속에서. 왜냐하면 나에 대한 어떤 기대가 전혀 이것은 애초부터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 심판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그걸 알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부자유는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은 부자유란 비교와 그리고 경쟁. 비교와 경쟁의 여지가 있는 곳에 부자유가 있거든요. ‘비교와 경쟁’. 비교와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누구와 비교한다? 나와 남들, 타인. 하나님 저 보기에 어때요? 저 괜찮아요? 지금 신앙이 맞아요? 불신앙이에요? 라고 할 때 이게 전부 다 뭐냐? 부자유를 의미하는 거에요. 자유가 없는 거에요. 아예 심판 속에 있으면 비교할 건덕지가 없잖아요 비교할 건덕지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있던 강도가 예수님을 바라봤을 때 그걸 알게 된 거에요. 자기가 강도 세리나 창기. 내 쪽에서 근사한 것, 내 쪽에서 괜찮은 것을 끄집어낼 것이 전혀 없었다는 거에요. 내가 살아가면서 알았던 선악체계에서 알았던 그 죄 말고 예수님이 말씀을 가지고 주실 때 비로소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그 죄의 깊이. 내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선악체계에서 알고 있는 그 죄 말고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서 아는 그 죄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을 던지면서 어느 쪽으로 갑니까? 살려고 갑니까? 죽으러 가십니까? 죽으러 가시죠. 그래서 예수님이 죽을만해서 죽게 되는 그 예수님의 죽음에 순간에 비로소 드러나는 그 죄를 베드로는 이제 그걸 알게 된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거에요.


시작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그 뒤에 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베드로하고 예수님하고 그래 너 사람 낚는 어부해라 하고 헤어지거나 졸졸 따라오는 정도를 허락한 게 아니고 이제는 베드로에게 뭐가 채워지느냐 하면은 왜 예수님이 너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되느냐 그 이유를 베드로 안에서 점점 더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주변 상황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거에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만들어냈을 때 성령을 받게 되고 그걸 내가 심판에 합당하다는 것을 내가 알 때 그게 뭡니까? 자유라고 했지요. 자유라는 것은 우리에게 뭘 주느냐? 평안함을 줍니다. 영원한 안식을 주지요. 비교하거나 경쟁하거나 어떤 것도 비교 경쟁 대상이 없어졌다는 사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 이걸 아셔야 돼요. 신비하고 영 또는 성령 이걸 좀 구분해야 돼요. 신비라고 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신비입니다. 언어를 통해서. 영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 못하는 거에요. 이해 못하는 세계에요. 세상이 이해 못하는 것. 신비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뭐냐 하면은 유한과 무한의 관계라면 유한의 세계는 신비가 아니잖아요. 유한 너머의 무한의 세계가 신비입니다. 언어로 묘사될 수 없는 무한의 세계. 궁극적인 세계.


이것이 신비라면 영의 세계는 뭐냐 하면은 유한과 무한이니까 따라붙을려고 노력하겠지요. 이건 양적이에요. 계속 양이 얼마나 악을 줄이고 선을 늘리고 양적으로 이렇게 지향되게 된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은 양적이 아니고 질적이에요. 그냥 죄와 의의 관계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이해 못해요. 그래서 신비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이것은 너무 보여요.


예수님 오실 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 보고 있었어요. 보고 있었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왜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은 자기가 그 정도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기가 그 정도로. 영적이라고 하는 것인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이걸 가지고 어린애가 눈에 보입니다. 보이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왜 같은 인간인데 자기는 의가 없다고 주장하느냐 이 말이죠. 왜 인간인데 남하고 비교할 생각을 아예 안하느냐 이 말입니다. 경쟁 할 생각을 왜 안하고 비교할 생각을 왜 안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해를 못하는 거에요. 그런데 신비는 지금 비록 인간은 후패하지만 저기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 있어서 우리는 더 그것을 지향해야 되고 그것을 추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더 순수하게 더 순결하게. 이것은 신비입니다.


신비 이것은 천주교에서는 작은 형제들, 이름도 보세요. 얼마나 경건합니까. 큰 형제들이라고 안하고 작은 형제들. 수도원이죠. 불교, 티벳 불교. 보통 불교. 전부 다 이게 뭘 추구하는 겁니까?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신적인 것을 뽑아낼 수 있는가. 유한한 인간이 무한의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무한의 기적을 뽑아낼 수 있는가 에요.


그래서 이 신비로움을 체계한 공식이 옛날 철학부터 옛날 헬라 그리스 철학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육과 그리고 혼과 영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육과 혼과 영. 그래서 이것을 잘못됐다는 것을 설명한 대구 강의에서 지구의 구조를 설명한 거에요. 지각이 있고 눈에 보이니까 그리고 멘탈, 마그마 보이니까 외핵 S파 P파 로 외핵의 존재를 아니까. 그리고 내핵 있고 여기 중심에 핵이 있고.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인간이 아무리 볼 때 지구 자체가 핵이 있지요. 핵은 제일 무거운 물질. 철과 니켈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것을 뭐로 본다? 입자로 보는 거에요. 입자로 봅니다. 이게 몇 kg이냐 몇 kg이냐 이건 전부 다 뭡니까? 양적으로 본다. 양. 양으로 비교가 돼요. 너 성적 몇 점 나왔어? 한 달 수입이 얼마야? 전부 양적이죠.


이걸 양적으로 선악체계를 하게 되면 오늘 착한 일을 몇 번했어? 나쁜 일을 몇 번했어? 전부 다 측량이 가능하지요. 측량이. 그러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했으면 나쁜 짓 좀 해도 괜찮지요. 군에서 고생 많이 했으면 휴가 조금 보내줘도 괜찮다. 휴가 가서 좀 일탈해도 너무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의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그런 것은 경찰서에서도 봐주고 이런 거 있잖아요. 양적으로 조정하는 거에요. 인간의 마음을. 왜? ‘나’라는 입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라는 입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갈수록 예수님 배신할 때까지 계속 안에서 죄가 말씀에 입각해서 증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말씀에 입각한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과 기적을 할 때 그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있었지요. 베드로하고 이 사람들 있었지요. 그러면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된 사태지요. 사태. 사건, 상황이 주어졌지요.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 왔을 때 병 고쳐줬습니까? 죄사함 했습니까? 중풍병자 본인은 중풍병 걸린 거에요. 중풍병 낫게 해달라고 지붕 뚫고 온 거에요. 자, 여기 중풍병자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전과 후를 생각하는 거에요. 자기가 처음에는 중풍병에 안 걸렸어요. 안 걸렸는데 얼마 전부터 몇 년 전부터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중풍병에.


그래서 이 사람은 지붕 뚫고 예수님한테 와가지고 뭘 기대합니까? 중풍병을 낫게 한 중풍병이 없는 자기를 기대하겠지요. 그러면 이건 뭘 의미합니까? 입자에서부터 시작해서 입자로 와서 끝까지 뭘 고수한다? ‘나’라는 자는 입자로 계산하는 거에요. 입자로 구축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 주님께서 여기서 만나서 중풍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뭘 이야기합니까? 죄 사함을 이야기한다고요. 죄 사함을. 죄 사함을 이야기한다고요.


이제 두 번째 어려운 거 나와요. 두 번째 어려운 게 진짜 어려운 거에요. 뭐냐 하면은 지금 중풍병자가 병 고치러 나왔을 때 중풍병자가 뭘 갖고 있느냐 하면은 시간을 자신이 갖고 있어요. 시간을 갖고 있다. 시간은 가는데 시간은 흐름을 내가 안다. 시간을 갖고 있고 인간은 시간의 속에 있다. 시간의 흐름이 뭐냐 하면은 과거 있고 현재 있고 미래 있다면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간다라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 중풍병자가.


그러니까 전후를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해버린단 말이죠. 죄 사함을 해버리면 이건 어디서 나오느냐. 말씀의 위력 아닙니까. 말씀의 위력이거든요. 말씀의 위력에서 뭐가 어려우냐 하면은 인간이 시간인데 여기서 주님의 시간과 만나버리면 이 시간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시간의 상대성이 나와요. 시간이 상대성이 나옵니다. 어렵지요?


상대성이 나와버리면 주님이 활동해버리면 인간은 시간이 흐르는게 아니고 인간은 고정되어 버립니다. 인간에게는 시간이 없어요. 인간은 시간이 없어요. 흐른다는 이 자체는 이건 자기 혼자 생각이에요. 인간들 세계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본인이 시간이 있다고 주장하니까 누가 시간이 없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고정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고정된 하나님.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누굴 보냈습니까? 예수님을 보내가지고 예수님이 활동해 버리니까 그 활동에 의해서 예수님이 활동해버리는 순간 인간은 인간의 모든 시간은 다 없어지는 거에요. 인간에게 시간이 없다는 말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인간에게 자아란 없다는 뜻이에요. 이게 세 번째 어려운 겁니다.


자, 인간은 자아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아까 인간 입자로 생각해서 지각 뚫었다고 했지요.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뚫어버리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여기 제일 밑바닥에 아담의 층이 나와요. 아담의 층. 자꾸 어렵다 하지 말고 쉽게 해야겠지요. 그게 저의 임무지요.


여러분들이 집에서 샤워할 때 오른쪽으로 틀면 물 나오지요. 왼쪽으로 틀면 물이 잠기지요. 그런데 치매 환자가 그걸 잊어버렸다고 칩시다. 그런데 자기가 샤워할려고 갈 때 이걸 오른쪽으로 틀지 왼쪽으로 틀지 모르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과거가 날라가 버렸으니까. 과거가 날라가 버렸으니까 다시 둘 중에 하나니까 둘 다 해보는거죠. 치매까지 안와도 요즘 나도 그래요.


인간이 어떤 운전을 한다든지 뭘 할 때는 이미 과거에 했던 그 기억이 우리 속에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이 ‘나’라는 신체를 움직이는 자아가 되는 겁니다. 나는 어느 동네에 순대국집을 안다. 과거잖아요. 나는 지금 순대국집에서 순대국을 먹는다. 현재지요. 먹고 나는 한숨 자야지. 미래지요. 그렇잖아요. 그렇게 계획을 잡을 때 그 계획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주인공이 ‘나’가 되는 거에요. 신체가 주인공이 아니고 자아가 주인공이라니까.


나는 저걸 알고 나는 지금 하고 있고 나는 앞으로 잠을 잘 거야. 신체가 주인공이 아니고 자아가 주인공이 되는 거에요. 자아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뭐가 있다? 시간 개념이 흐르고 있어요. 시간 개념이. 계획이 있다고요.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을 지금 실행에 옮기고 그 다음에 미래에는 계획을 하고 이게 인간의 자아란 말이죠. 이게 바로 베드로에요 이게. 이게 베드로라고요.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엎드렸던 베드로가 그냥 베드로가 아니고 그냥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다 자기 고집, 자기 시간, 자기 계획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옆에 붙어서 지금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함께 공유하고 그걸 지금 듣고 있는 거에요. 그게 죄인 줄 몰랐지요. 그게 죄인 줄 몰랐던 거에요. 예수님한테 가서 예수님 하늘나라 가면 누가 높은 자리 앉습니까? 이미 자기의 스케줄 자기의 계획이 있지요.


베드로의 신체가 이야기했습니까? 자아가 이야기했습니까? 베드로의 ‘나’라고 한 게 그런 거에요.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 베드로의 혓바닥이 이야기했습니까? 베드로 본인이 이야기했습니까? 본인이 이야기한 거에요. 본인이. 자, 신체, 자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베드로의 신체가 있어요. 키, 몸무게, 머리, 눈 다 있는데 이 베드로가 신체를 가지고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여기서 자아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무슨 요소를 가지고? 시간 요소.


시간 요소라는 것은 기억 더하기 기대. 기억+기대 아닙니까? 기대거든요. 아침에 눈 뜨면 여러분 그냥 눈 뜹니까? 나는 지금 눈 감고 눈을 떴다 이겁니까? 안 그렇잖아요. 눈뜨면 뭐부터 합니까? 오늘 뭐하지? 가정주부 같으면 아침에 눈뜨면 아침에 뭘 또 해 먹이지? 뭘 해 먹일지 뭘 걱정해요. 홈쇼핑에 볶음밥같은 거 한 40개 사가지고 하면 깨끗이 해결될 걸요. 국 없으면 육개장 시키면 되고.


기억과 기대가 있는 그게 자아가 되는 겁니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나’라는 거에요. ‘나’. 내가 기억과 기대할 때에 이 ‘나’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 말씀을 만나기 전에 뭐하고 있었어요? 고기 잡고 있었어요. 고기 잡고 있었는데 신체가 고기 잡은 게 아니고 베드로라고 ‘나’라고 하는 베드로가 고기를 잡았잖아요. 신체가 그냥 고기 잡으면 그냥 으쌰 잡아당기면 그만이에요. 오른쪽으로 넣어라 하면 오른쪽 던졌다. 아무 접촉점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보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해요? 내가 열심히 잡았지만 말씀에 의지한다 하지요. 그 객소리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 객소리가. 그 자아는 뭐에 걸쳐있다? 자기 시간관에 걸쳐있는 거에요. 시간관에. 그 자기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자기가 쫙 엎드려있는 거에요. 그냥 엎어져있는 거에요. 엎어져서. 쫙 엎어져있는 거에요.


운전할 때 내 신체가 운전하는 게 아니고 내 자아가 운전해요. 자아가. 그래서 어떤 때는 자아가 운전하다 보면 차가 나와 동일시 되가지고 딴 생각하다보면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왜? 그냥 하도 습관화 되가지고. 습관화 되가지고 마치 내가 인공지능 같애. 심지어 운전대 잡은 감각도 없다니까요. 내가 지금 운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운전대 붙들고 구경하고 있는지 이상하게 차가 잘 가네. 잘 가는 이유도 몰라. 딴 생각한다고요. 80넘으면 운전하지 말아야 돼요. 정신 없어요. 술 먹으면 더 심하게 되고.


주님께서는 이게 베드로가 과거를 알고 있고 현재 고기 잡고 있고 현재 미래 기대가 있다 이 말이죠. 여기는 고기 안 잡혀. 밤새도록 해도 안 잡혔어 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그 현재에 주님께서 수직으로 말씀을 결합시켜요. 말씀을 결합시켜보면 자신의 전체에 있는 시간 자체가 말씀에 강탈당합니다. 빼앗겨버립니다. 빼앗겨버리면서 빼앗길 만하니까 빼앗겠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나는 뭐다? 나는 죄인입니다. 갑자기 과거 현재 미래 나오다가 다시 말해서 자아가 알고 있는 바가 나오다가 이 자아가 뭐로 돌변했습니까? 죄인으로 돌변했어요. 죄인으로 돌변했다고요. 이 말은 내가 어제만 죄인이었습니다. 이게 됩니까? 인간은 어제만 죄인이라는 게 성립이 안돼요. 어제 기억을 갖고 있는 게 ‘나’이기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라는 것이 앞으로 잘하겠다는 것이 앞으로 잘 할 거라고 생각하는 현재가 그런 소리를 현재의 내가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내 시간 자체를 주께서 뽑아내버려요. 이제 어렵다는 말도 안 할란다. 아예 기대를 안 할 테니까. 아까 수도꼭지 왼쪽 오른쪽 하듯이 인간에는 모든 인간에는 과거사가 있습니다. 과거사. 그 과거사가 전에는 수도꼭지 오른쪽 왼쪽 했잖아요.


성경에 보면 우리가 아담의 아담층하고 연결되어있어요. 아담의 선악과 따먹은 것이 아담의 이야기가 아니고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과거사에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것이. 그리고 아담 다음에 누가 나옵니까? 이스라엘 나오고 이스라엘 멸망 나오지요. 이스라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이 우리 이야기라고요.


이게 신체가 개체가 되니까 입자가 되니까 아담 따로 나 따로잖아요. 주님께서는 아담의 시간 따로 있고 내 시간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앞에 지각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있고 일본 있고 미국 있을 때 미국 따로 우리 따로지만 밑에 들어가보면 전부 다 이 밑에 흐르고 있는 맨틀이 365일 동안 맨틀이 20cm 25cm 움직인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밑에 더 깊이 들어가 버리면 주께서 말씀 더 깊이 들어가 버리면 지각에 지구 표면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전부 다 한통속이에요. 모든 인간은 아담의 뿌리를 받고 있고 오늘 제목이 아담의 뽀루지. 아담의 뽀루지에요. 아담의 뽀루지인데 이걸 누가 억누르고 있느냐 하면은 나의 좁은 나의 기억 속에 태어나서 살았던 나의 좁은 시간이 이걸 감추고 억누르고 덮고 있는 겁니다. 이걸 캐내는 것은 누가 캐내고? 주님의 말씀이 캐내는 거에요.


우리는 뭐라고 변명하느냐 하면은 저는 선악과 구경도 못 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네 밑에 누워 있는데. 아담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어요. 왜? 아담의 신체니까. 아담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다고요. 아담의 암반층과 우리가 같이 결합되어 있다 이 말이죠.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죄인 같으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마땅히 죄에서 나온 뽀루지죠. 죄인이죠. 죄인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에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육신의 모습으로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친히 어디까지 친히 방문하셨다? 아담층까지 방문하신 거에요. 아담층. 아담층에 방문하시니까 어느 인간도 아담에서 벗어난 인간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뭐 이스라엘 욕한다고? 이스라엘 우리 과거사인데요. 왼쪽으로 돌리면 물 나올까? 이것만 우리 과거사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전부가 우리 과거사라고요. 과거사 없는 게 아닙니다.


나만 잘하지. 나만 신과 결합해가지고 어떻게 신비로운. 참나. 그래놓고 주님의 신비로움에 신비로운 연합했다고. 주여 제대로 하겠습니다. 네가 아는 너는 그건 껍질, 껍데기. 돼지 껍데기 알지요? 그냥 껍데기 부분. 기껏 내가 기억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과 어떻게 잘 해볼라고 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뽀루지, 종기라고 합시다. 피부가 이렇게 있는데 종기가 났습니다. 여기 고름이 있고 좀 더럽지만요.


이걸 가지고 수술할 때 뽑아내게 되면 여기는 옴폭 뭐가 나옵니까? 이렇게 파이지요. 갑자기 시간이 과거 미래 단절되었어요. 현재성이 완전히 박살난다고요. 말씀이 와서 이걸 잡아당겨 버립니다. 이걸. 이걸 잡아당겨버리면 우리는 아담으로 태어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벌 받고 있어요. 이건 대구강의에서 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벌 받는 게 아니고 태어난 것부터 자체가 벌이에요. 태어난 자체가. 태어난 자체가 벌이에요.


전에 죽었던 담배 많이 피워서 죽었던 이주일이 맨날 무대에서 폼 잡고 나와서 하는 말이 뭔가 보여드릴까요? 였는데 우리도 뭔가를 보여줘요. 뭘 보여줍니까? 죄를 보여주는 거에요. 죄를. 아담과 나는 상관없다. 이스라엘과 내가 무슨 상관있냐? 저 사람 잘못한 거 나와 상관없다. 전부 다 자기가 조작된 자기의 짧은 시간 안에서 조작된 그것만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어부인 베드로의 과거사에서 밤새도록 고기 잡았는데 지금 예수님이 지적한다고 해서 오른편에 고기가 많이 잡힐 수 있다는 그것은 베드로의 기억에는 없어요. 그리고 베드로의 친구에게도 없어요. “혹시 그런 일 있었나? 밤새 안 잡혔는데 오른편이 이상하게 보물단지가 되가지고 고기 많이 잡혀서 배가 침몰할 정도로 많이 잡힌 거 봤나? 없지?” “없지.” “없지?” 없는 거에요. 자기 자아의 기억에서는. 자아의 기억에서는.


그런데 말씀에 의지하여 던지니까 자아의 세계의 자기의 기억의 세계, 시간의 세계에 없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 격차. 그 차이. 베드로는 그걸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 나의 지평선보다 더 넓은 이여 나를 떠나소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지평선이라는 말은 지평선의 특징은 그 지평선을 아무리 가도 지평선은 내가 움직인 만큼 지평선이 넓어지는 거에요. 더 멀어져요. 지평선 다 따라잡았다 해도 가보면 내가 처음 지평선과 동일한 거리의 지평선이 있는 거에요. 그게 우리의 지평이에요. 우리의 한계, 삶의 한계가 그렇다 이 말입니다. 삶의 한계가.


이게 바로 자아의 한계죠. 자아의 한계. 그런데 주님은 우리 쪽에서는 그 지평선을 넘어 설수가 없어요. 우리의 공간이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베드로의 공간에 말씀, 예수님이 여기서 침입을 했어요. 여기서 침입하니까 지금껏 자기의 지평선이 감당이 안 되는 거에요. 감당이 안돼요. 감당이 안 될 때 베드로의 본능적으로 누굴 지킵니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나를 떠나소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자아에 머물겠습니다. 나를 떠나소서.


아주 겸손한 태도의 주님을 밀치는 거에요. 밀치는 겁니다. 그렇게 밀칠 거 같으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네가 한 그 고백의 의미를 이제는 내가 채워줄게. 내가 채워줄게. 네가 생각한 네 시간을 쏙 다 빼놔줄게. 네가 생각하는 시간, 네가 나한테 배신하고 앞으로 어떻게 했더라도 그것은 네 시간이 아니고 그게 바로 주님의 활동시간이었습니다. 아예 내 시간 자체가 없어졌어요. 나중에.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이렇게 저렇게 했습니다 자체가 날라가버려요. 왜? 뭘 해도 심판받을 죄인이기 때문에. 뭐 더 이쁜 죄 덜 이쁜 죄 그런거 없어요. 그냥 죄에요. 그냥 죄. 그래서 베드로는 사도 되고 난 뒤에는 원 없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왜? 더 이상 자기한테 자기가 내세울 과거도 없어 자기가 기대할 미래도 없고 그냥 주님의 성령에 붙잡힌 바 되었기 때문에.


나의 고유의 나의 세계, 나의 공간, 나의 영역은 주님한테 쏙 빼앗겼습니다. 전부 다 강탈당했습니다. 주께서 그거 가져가서 어디에 써먹을려고 합니까? 그걸 가져가야 그 죄를 가져가야 그게 바로 베드로가 했던 죄의 생산, 죄를 드러낸 그 작업이 베드로의 본인의 작업이 아니고 누구 작업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자신의 작업이 됩니다.


죄인인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에서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는 본인의 작업에 베드로의 일대기는 아주 유용하죠.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심판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은 거에요. 심판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만끽하고 기쁨과 감사가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그 자유, 심판 속에서. 그래서 주님께서 늘 성령받은 성도한테 묻는 것은 이거에요. ‘네가 아직도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라고 추궁하죠.


뭐 주님이여 헌금 얼마를 해드릴까요. 주님 저에게 사명을 주옵소서. 너는 네가 아직도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심판 속에 있는 자가 긍정적인 어떤 행함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심판 속에 있기 때문에. 따라서 어떤 심판 속에 있는 성도가 어떤 복음을 전파해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면 이것은 누구 작업입니까? 예수님의 작품이죠. 예수님이 하신 일이죠. 자기는 심판 속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인간이 내 공로다. 내가 고생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 네가 제공해야 돼.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거 어떻게 돼요? 그때 주님이 네가 아직도 네가 죽은걸 모르느냐? 하고 박살냅니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저 사람에게 복음 전하면 저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건 아직도 뭐가 살아있는 거에요? 내 시간이 살아있는 거에요. 내 시간이.


그걸 단선적 인과관계라고 합니다. 참 오늘 또 고상한 거 하나 합니다. 단선적 인과관계. 선이 하나. 선이 하나고 지금 내가 원인 있으면 어떤 결과 나온다. 단선적 인과관계. 이것은 바로 이 시간은 주님 앞에 허용될 수가 없어요. 그럼 단선적 인과관계가 아니라면 중첩이 될 수 있는데 단선적 인과관계에서 중첩관계. 원인은 주님이 주시는 거거든요.


여기에 과정 속에서 베드로 같으면 순서를 쉽게 하겠습니다. 과정을. 단선적 인과관계에서 중첩하는 여러 가지니까. 복선이라고 할 수 없어요. 복선보다 더 많은 여러 가지 관계있을 수 있으니까. 중첩했다고 봅시다. 중첩 관계가 이렇게 있다 할 때 첫 번째는 베드로는 타인을 상대합니다. 이거 다 우리한테 해당돼요. 우리는 남을 상대하지 않아요. 뭐가 있을 때는? 자아는 나 말고 타인이다. 나 말고. 주께서는 이게 뭐냐? 베드로는 아담을 상대합니다. 내 속에 있는 아담이 타인 속에 있는 아담을 상대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꼬라지하고는. 네 꼬라지나 내 꼬라지나 둘 다 똑같다. 세 번째는 베드로는 나를 상대한다. 증진한 타인은 내 안에 있어요. 증진한 타인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나를 상대한다. 나보고 격려하는 거에요. 똑바로 해. 언제까지 이 꼴로 살래? 앞으로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내가 나한테 격려하고 질책하고 꾸중하고 그리고 칭찬하고 응원하고.


한번 적어볼게요. 나는 나를 원한다. 내 시간을 갖고 있다. 만약에 안 되면 자살. 안되면 자살하는 거에요. 왜 인간이 자살합니까? 자기가 내가 나에게 타인이기 때문에. 내가 처분이 가능해요. 내가 정한 타인이기 때문에 내가 처분 가능한 거에요. 그래서 자살한 사람이 누굽니까? 가룟 유다 아닙니까. 가룟 유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뭐라고 하느냐? 사탄이 들어갔다 하지요. 결국은 사탄은 단선적 인과관계를 계속해서 인간에게 심어놓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5장 8절 (아담의 뽀루지) 201222b-이근호 목사



만약이 아니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버리면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활동이 예수님이 활동을 해버리면 지상에 있는 우리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고 주님의 활동 시간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활동한 것은 이것은 시간에 들어가지를 않아요. 시간을 빼앗겼으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 이루어버리면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심판으로 고정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심판으로 고정되어버리는 것. 심판 속에 고정되어버렸어요. 태어날 때도 아담 속에 있었고 중간에도 20대도 마찬가지고 70되도 80되도 아담 속에 있는 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되면 앞에 나의 구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의 구원은 없다는 것은 베드로가 성령 받고 한 일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심판 작업에 참여하게 되죠. 심판 작업에. 언제부터? 처음부터. 베드로가 태어날 때부터. 성령 받을 때부터가 아니라 성령 받고부터면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과 후가 나뉘어져요. 베드로 시간이 되어버려요. 처음부터 모든 게 주님의 계획이었고 주님의 예정한 뜻이었습니다.


그걸 에베소서는 “창세전에 주께서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택하여서” 이렇게 나온다고요. 창세전부터 우리를 기쁘신 뜻대로. 야곱은 미워하고 아니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 들으면 섭섭하겠다. 말 잘못해가지고.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겁니다. 소급해서. 어느 한순간도 이미 우리 속에 있는 아담이라는 우리의 과거사, 그 이스라엘이라는 과거사. 거기서 우리는 한 번도 거기서 따로 떼어나간 적이 없어요. 그게. 아주 단단한 암반층처럼. 그게 박혀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우리의 과거사는 결국은 아담사가 되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그러면 아담을 아담으로 이야기하신 분은 누굽니까? 주님이 그렇게 붙이지요. 가인은 개인적으로 이야기했고 아벨은 개인적으로 이야기했던 간에 그걸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또는 옛날에 그 일을 상황을 만든 주님의 일 속에 집어넣어버리면 그 속에서 주님께서는 자기 시간을 뽑아내신다. 자기 시간을 뽑아내는 거에요.


가인 속에서 아벨 속에서 뽑아내는 거에요. 그 자기 시간을 뽑아내서 다 이루었다 하게 되면 뭐냐 하면은 십자가죠. 하나는 뭐냐 하면 복, 하나는 십자가 언약이기 때문에 복과 십자가로 인하여 뭐 나옵니까? 저주가 오지요. 복 받을 사람과 저주 받을 사람을 주님께서는 성경 속에 이 세상에 쫙 깔아놓고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거기서 다 뽑아내는 거에요.


마치 지하에 지하 2km 있으면 거기에 셰일층이 있어요. 셰일층은 석유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석유회사에서 그 셰일층에서 추를 박고 뭘 뽑아냅니까? 쏙쏙 석유 다 뽑아내지요. 사슴농장에 사람들이 가가지고 사람들이 사슴 뒷목에다가 빨대 꽂아가지고 보신한다고 뽑아내고 사슴 도망가면 붙들어서 실제로 그렇게 혐오스럽게는 안하겠지만 피 빨아 먹듯이 주님이 드라큐라처럼 자신의 시간을 다 뽑아내요.


아벨에서 뽑아내고 엘리에서 뽑아내고 베드로에서 뽑아내고 사도 바울에서 뽑아내고 오늘날 우리에게 뽑아내고. 이렇게 뽑아낼 때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서 뽑힙니까? 움직이면서 뽑힙니까? 격렬한 저항이 생기지요. 격렬한 저항. 누가복음 4장 한번 봅시다. 4장 41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주님께서 사람에게 쪽쪽 사슴 피 빨아먹듯이 뽑아서 자기 시간, 자기가 행하신 일. 시간은 주님에게만 의미가 있으니까요. 역사 속에 들어오신 주님 아닙니까. 그냥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역사 속에 이스라엘 속에 왔잖아요. 역사에 오신 분이 그 모든 역사는 누구 역사입니까? 하나님 본인의 역사에요. 시간이란 말이죠.


그걸 하는데 사람들은 곱게 뽑아가세요 뭐 이런 식으로 고개 내미는 게 아니고 누가 발악하면서 달려듭니까? 누가 뽑혀 나오지요? 예? 귀신. 귀신들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을 인간은 몰랐지요. 손흥민이 자기 속에 귀신 있는걸 압니까? 손흥민이. 70m 드리블해서 한골 넣어놓고 귀신이 했습니다. 이럽니까? 아니지요. 귀신은 인간을 앞장세워가지고 철저히 인간 편이에요. 인간의 시간을 옹호합니다. 인간의 계획을 응원합니다. 격려합니다.


그래야 귀신이 인간을 다스린다는 것을 인간이 몰라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도 쉿! 입 다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대표자, 너와 나와의 관계지 인간은 관계없다. 인간은 악마한테도 당하고 주님한테도 당하고. 주님에게 당한 사람은 구원받고 귀신에게 계속 당하고 있는 인간은 계속 그대로 지옥 가는 거고요.


주님에게 온전히 다 이루었던 십자가의 주님의 시간의 완성의 그 당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심판 받아야 될 자라는 것을 아는 자유를 누리고. 그런 반면에 귀신이 있는 인간은 자기 스케줄에 빠져가지고 어떻게든 간에 내가 성스러운 성결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어가지고 죽어서 좋은 나라 천국 가겠다고 아득바득 애를 쓰지요.


천국 가는 것은 누구 하기 나름이다? 나 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누가 그렇게 사주했습니까? 귀신이. 광야에서 귀신은 말씀을 거론하지요. 귀신이. 악마가.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 가는 사람들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 구원받겠다고 열심히 성경 들추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안경쓰고 이렇게 앉아가지고. 뭐 하나 지킬려고.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내 시간이 뽑혀야 되는데. 아니야 조금 있으면 오실거야 주께서. 주님 오시는 걸 대비해야 돼. 기름 준비해야 돼. 주유소 옆에 살면 되지 뭐. 주유소를 하든지. 자기 집이 주유소인데 기름 준비할게 뭐 있어요. 수시로 예수님께서 주의 일을 하실 때에 제자들은 전혀 예수님이 하는 일의 의미를 감을 못 잡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은 첫 번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 왔을 때 그 당황스러움. 베드로의 당황스러움이 베드로 일생 끝날 때까지 계속 됩니다. 당황스러움이. 너는 너의 원대로 가지 않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당황스러움이 계속 간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은 베드로의 생애는 방황하고 방랑자 신세, 다시 말해서 종잡을 수 없게 만들어요. 모든 성도의 인생이 이렇습니다. 자기 스케줄이 먹히지를 않아요. 자기 스케줄이. 이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 또는 택한 백성에게 주는 하나님의 혜택이에요. 내 스케줄 뜻대로 되지 않아요.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굴하지 않고 또 계획을 또 세워요.


그 때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아직도 네가 네 조상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네가 심판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몰라? 넌 너를 왜 그리 몰라? 너는 뭘 해도 심판이야. 알아? 그걸 계속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네가 그 말을 어떤 식으로 했던 간에 그 너 말한 대로 그 죄를 너에게 덮어씌울 거야.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가 아니라 주여 나와 함께 계셨기에 주께서 떠나지 않고 함께 계셨기에 제대로 나는 죄인 맞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그래서 베드로 입장에서는 이게 뭐냐 하면은 비현실적입니다. 자기의 생애가 비현실적 같애. 뭔가 열심히 아득바득 살려고 살려고 발악을 하는데 내 뜻대로 되지를 않는 거에요. 발악을 하는데 내 뜻대로 되지를 않아요. 내 계획대로 되지를 않아요.


그러면 아예 계획을 세우지 말게 하시던지. 아니에요. 계속해서 주께서 계획을 세우게 만들어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아담의 주특기가 그거거든요. 자기 시간을 자기가 계획해서 미래를 단선적 인과관계, 내 계획한데로 결과가 도출되기를 단선, 선이 하나밖에 없는 이 시간위에 존재하는 것. 그것에 계속 매이게 하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The time is out of joint”. 시간은 경첩에서 떨어져 나갔다. joint에서 떨어져 나갔다.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에요. 시간은 경첩이 되가지고 부채살처럼 한곳에 매여서 오늘 지나면 내일, 내일 지나면 이렇게 되야 하는데 어떤 사태가 벌어져 버리면 어떤 사건이 벌어져버리면 이 시간이 뽑혀가지고 혼자서 날라다녀. 혼자서 날라다녀요.


정처 없어요. 뿌리도 없어요. 내가 앞으로 뭐가 될지 어디로 갈지도 몰라요. 거기에다가 주님은 그런 거 생각 하지 마 너는 이미 어디서 무얼 하든지 어떻게 살든 심판 안에 있잖아. 그걸로 됐잖아. 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지. 네가 선교사가 되든 뭘 해도 그게 심판이고 그게 죄가 되는 거에요. 선교지에 가서 죄 짓고 코로나 걸려가지고 선교지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와도 죄 짓고.


선교사들 코로나 때문에 잠시 한국에 온 사람들 돌봐주는 그런 단체가 있어요. 웨슬리하우스라는 게 있어요. 우리나라 선교사가 2만 8천명인데요. 많지요. 그중에서 6천명 들어왔답니다. 6천명이 갈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24지점 거기에 웨슬리하우스라고 해가지고 선교사들 보호해 주는 겁니다. 선교사들 나가서 죄 짓고 들어와서 죄 짓는 거에요. 뭘 해도.


그 사실을 만약에 선교사 가운데서 내가 보기에 거의 모르지 싶은데 이건 내 교만이고. 혹시라도 그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짜 성도입니다. 진짜 성도에요. 바깥에서 죄 지었고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안에 와서 죄 짓는다. 이제는 웨슬리하우스에서 신세지면서 죄 짓는다. 인간아 왜 사냐? 뭐 이런 식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자 있다면 그건 정말 성도에요.


왜? 그 사람에게서 나올 것은 뭐냐 하면은 고정된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그래요. 앞으로 잘 할게. 앞으로 선교사 잘 할게 이게 아니고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고정된 십자가만 증거하는 방법이 그 방법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제대로 주님과 통하는 시간을 제대로 발견한 거에요 그 사람은. 제대로 발견.


내 시간이 아니고 나에게서 뽑혀나와서 죄 지은 시간을 의로 바꾸신 주님의 자기 의로 바꾸시고 자기 의로 완성으로 바꾸신 그 고정된 시간. 어떤 죄도 죄 사함이 되게 하는 그 시간 있잖아요. 하나님과 주님과 함께 있기에 어떤 심판도 뭐로 바뀐다? 복으로 바뀌는 심판. 그 안에 놓여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태 누가 요한 다 볼 거 없지만 여러분 다 아는 상식 내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자기의 과거사. 자, 여러분 다 아시니까 베드로의 과거사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의 과거사 뭐라고요? 아담. 아담이 긴 치마, 원피스 치마처럼 퍼져 나가면 이게 뭡니까? 인류사죠. 인류사. 그러니까 이 전체 인류사가 우리 개인에게 다 집약 다 들어있는 거에요.


그래서 아담의 성질, 타락한 아담의 성질, 성깔 그게 우리 안에 그대로 다 나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운동하는 거에요. 움직이는 것. 그리고 감각하는 것. 뭘 느끼는 것. 냄새라든지 귀로 듣는다든지. 감각하고 운동하는 것. 이걸 계속해서 우리가 활용해서 내 계획대로 실시를 합니다. 오늘 아침은 뭘 먹을지 점심은 뭘 먹을지. 늘 계획하지요. 애는 어떻게 교육시킬지. 애 교육을 6살인데 학교 가기 전에 어떤 걸 배워놓고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 계획하고. 전부 다 움직이는 거에요. 움직이고 감각하는 거죠.


그런데 언제 우리가 주님의 완성에 접촉이 되고 내가 심판에 있다는 것을 아느냐 하면은 이 모든 감각의 행동이 이게 고장날 때. 쉽게 말해서 내 뜻대로 안될 때. 내 뜻대로 안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초조하지요. 그렇죠? 초조하다는 말은 곧 내가 뜻대로 되게 되면 시간가는 줄을 몰랐었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내 시간을 느낄 때가 언제냐면 내 뜻대로 안될 때 어깃장 났을 때 어! 내 계획대로 안됐네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시간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육신을 장악하고 있는 이 아담의 요소가 늘 이렇게 그냥 가만 자동적으로 놔둬도 아담의 위세, 죄의 위세, 위력이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들어요. 계속 계획하고 움직이고 펀드는 어느 쪽에 넣으면 되고 주식은 언제 빼고 무슨 주식 사면 되고 항상 쉬지 않고 살아있는 티를 내요. 뭐든지 살아있는 티를 내요.


그런데 성령이 또는 주님이 와서 이걸 어떻게 합니까? 밤새도록 고기 잡고 고기 안 잡히면 다음날 또 고기 잡고 하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개입했지요. 오른편에 던져라. 주님의 개입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움직임에 잠시 STOP하는 겁니다. ‘STOP’. 주님의 모든 지시는 딱 하나 밖에 없어요. STOP! 아 제가 아주 절실하게 그 단어를 느꼈어요. 개한테 STOP하는 걸 배웠거든요. 이게 개한테 할 게 아니라 주님이 우리한테 하는 거구나. STOP!


이 말은 일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 일은 너의 계획이 아니고 나 주님의 계획이었어. 네 생각을 STOP하라. 어떻게 STOP하느냐. 너는 지금 심판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이게 STOP이에요. 심판에. 단선적 인과관계, 이걸 해서 이걸 얻겠다는 그 생각을 STOP해라. 멈춰라 이 말이죠. 너는 나한테 충실한 개니까. 네가 열심히 해서 인간 되는 게 아니니까. 충실한 개니까.


소위 교회에서 선교사나 교인이나 이걸 사람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잡는 어부에요. 그 사람을 격려 못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우리 교회 오면 3년 안에 사업 잘 됩니다. 복 받습니다. 가정이 화목합니다. 귀신이 시킨 전도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귀신이 시킨 전도를. 귀신이 떠나간 전도가 아니고 계속 인간이 계획하고 있는 시간은 격려하고 후원해 주는 전도.


당신이 하시는 일은 믿음대로 하시면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귀신이 나가야 되는데 귀신이 나갈 턱이 있어요? 안 나갑니다. 귀신이 나갈려면 우리가 심판에 놓여있다는 소식을 전해야 귀신이 나가지요. 아이씨 더는 못 속이겠네 이러면서 나간다고요. 아이 참 속일려고 했는데 안 속네. 이래서 나가야 되는데, 네가 뭘 해도 심판 안에 있어. 이 소리를 해야 귀신이 나가는데 그 소리를 안 하니까 계속 희망을 갖는 거에요. 희망을. 계획을 잡고 희망을 갖는 거에요.


그 희망은 움직임의 자기 시간이 더해 버리면 이건 뭐냐? 나만의 지평선. 나만의 지평선. 나만이 공간이 형성됩니다. 요양병원에 가면 이런 사람들 많이 누워 있어요. 내가 자식 어떻게 키웠는데 이러면서. 평생에 자기의 과거사, 자기만의 지평선이에요. 거기에 대고 어머님, 어머님은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면 야야 나의 지평선 바깥의 이야기는 이야기하지 말아라. 너는 나를 떠나라.


내가 아는 이 지평선은 뭐냐 하면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기억의 반지름들이에요. 내 지평선들이에요. 내가 얼마나 잘났고 얼마나 훌륭한지. 단선적 인과관계 속에 다 형성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이것 말고 어머님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죽는데 죽는 이유가 죄 지어서 죽습니다. 그러면 야야 내가 무슨 죄를 내가 평생 파출소도 간 적 없는데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죄인이냐 이렇게 나올 때는 이 지평선 밖에서 나오는 거에요. 이 지평선 밖에는 못 넘어가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직접 폭격을 해야지요. 성령께서. 뭐로 폭격합니까? 고정성으로. 우리 보기에는 십자가가 고정되어 있지요. 반대입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 어디서 무얼 하든지 어떻게 살든 이건 고정되어 있고 심판 안에 고정되어 있고 아담의 암반층에서 빠져 나온 적 없었고 움직이는 건 누가 움직였다? 주님이 움직이죠. 움직여야 여기 시간이 나오니까. 주님의 시간이, 스케줄이 나오니까.


나는 성령으로 태어나서 이런 말씀 전하다가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이건 누구 스케줄이죠? 주님의 스케줄, 그 스케줄 너 나아가면 나는 아담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고 선악과 심었고 따먹게 했고 전부 다 모든 스케줄이 누가 다 걷어가요? 주님 자기 걸로 다 걷어가는 거에요. 주님 자기 것으로. 이 사무실에 냉장고 있는데요 우리가 와가지고 배고프다 해가지고 어?! 여기 피자있네 해가지고 이거 끝나고 우리 피자 먹읍시다 하는데 여기에 사무실 주인이 와가지고 내 피자 가지러왔다 하고 가져가 버리면 우리 피자 먹을려고 하는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가져가 버리죠.


우리의 바닥부터 우리의 신체까지 전부 다 우리 것이 아니고 다 주의 것이에요. 주님의 것인데 이게 누가 와서 주인도 아닌 게 중간에 선악과 따먹으라고 누가 부추겼어요? 독립하라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독립하라고. 시작을 하나님부터 시작하지 말고 너로부터 예수님부터 시작하지 말고 너로부터 시작하라고 누가 그렇게 격려했던가요? 이게 악마잖아요. 악마부터, 따먹을 때부터 내 시간이 시작되는 거에요. 내 시간이 시작된 거에요.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무슨 벌을 줬습니까? 네가 만난 사람마다 널 해치려 한다니까 시간을 알고 있는 가인이 너무나 놀래하면서 자기 장면을 생각해볼 때 아득하거든요. 제발 타인이 나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그건 좀 너무 심한 벌입니다 이렇게 한 거에요. 그러나 아벨 죽일 때는 순간에 죽었지만 가인은 순간에 죽지 않고 사형 당하지 않고 오래 살다가 죽었잖아요. 그 오래 산다는 게 뭐냐? 시간을 그만큼 경유한 거에요. 벌 받을 시간을 늘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죽었어요 이제. 벌 받을 시간을 늘인 거에요.


아슬아슬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을 늘인 겁니다. 시간이 주는 폭격을 한번 맞아봐라. 시간이 얼마나 우리한테 무서운 징벌인지를. 시간이. 시간은 주님이 받을 징벌이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데 주께서는 주님의 그 시간 징벌을 주께서 다 받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시간이 없는 언제 어디서 무얼 하든지 고정적인 시간이 없이 항상 고정되어 있었다. 너는 그 자리에 제자리 뛰기 했었다는 그러한 그것을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심판의 요소로서 우리에게 육신을 준 겁니다.


제가 이렇게 심판 안에 들어오게 되면 모든 것이 자유라고 분명히 격려 차원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실컷 이야기했건만 여전히 우리에게 찝찝하게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은 축복 안에 고정되어있다고 하면 듣는 오빠 기분 좋을텐데 심판 안에 있다 하는 게 왜 그렇게 찝찝합니까 생각하실 거에요. 그건 간단해요.


축복 안에 내가 있어버리면 나는 나를 포기를 못해요. 나는 나를 포기를 못한다고요. 축복 안에 있어버리면. 축복 안에 있는 것은 바로 나를 포기 못했다.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 이게 언제부터 생긴 거냐 하면은 바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긴 귀신의 사주를 받는 아담의 모습이 이거에요.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와 같은 말이 뭐냐? 내가 최종적 의미다. 내가 최종적 의미다. 하나님이 오시든 가든 간에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 이게 내가 최종적 의미에요. 이것이 그대로 살아서 복을 받겠다고 기대한다면 이거야말로 악마의 ‘나’가 그대로 지금 탱탱히 살아있는 셈이 되잖아요 이게. 그렇잖아요? 이걸 도중에 이걸 어떻게 해야 돼요? 이걸 없애버려야죠 이걸. 이걸 없애버려야죠.


심판의 일부로써 내가 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나는 나한테 최종적 의미다? 아니다? 최종적 의미가 아니죠. 나는 나한테 기대를 한다? 안한다? 기대할게 없지요. 나한테 기대할게 없으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최고의 복이거든요. 그걸 제가 엥~하고 모기가 십자가 속으로 돌진하는 겁니다. 사실은 모기가 십자가에 돌진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모기에게 돌진해가지고 모기를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의 생명은 날마다 갖고 있지 말고 나한테 넘겨라.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에 넘기움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이 살아있는 방법은 우리의 것을 주님 앞에 넘기는 겁니다. 넘기울 때 그냥 넘기지 말고 주님 앞에 뽑혀서 넘겨야지요. 주님 앞에 내 놓을 가치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그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인간은 심판 안에 있다. 심판 안에서 빠져나온 적이 없는 그러한 존재로서 그런 자아로서 기꺼이 심판 안에 있으니까 기대할게 뭐 있어. 기꺼이 그까짓 것 나 같은 것 기꺼이 주님 앞에 드리지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키우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비록 내가 그리스도와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한 바로다. 얼마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보세요. 자신 있게 이야기하잖아요.


자, 그 다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심판 안에 있다. 또는 심판받을 자로써 주님 앞에 넘겨서 주님의 활동, 주님의 작업의 요소가 되게 했다 했습니다. 그럼 이번부터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은 아담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에요. 아담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자, 우리 안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아담 있다고 했지요. 우리 안에 이스라엘 있지요.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멸망당했습니다. 그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거죠. 이 말은 뭐냐? 우리가 날마다 매일의 삶을 통해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성깔과 성질을 계속 우리를 통해서 뿜어져 나온다는 뜻이에요.


아담의 자기 잘난 체하는 그걸 복음 이기주의라고 하는데 복음 가지고 또 이기주의 활용해 먹는 자기 잘난 체하는 하나님께 귀한 것 받았다 하면서 자기 자랑하는. 이게 선악과야. 얼마나 맛있는지 이러면서 자랑하는 이 자기 위주, 자기의 최종 의미를 계속 뿜어내죠. 이스라엘이 망했던 것을 계속 끄집어내지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 인간의 육신은 뭐가 나온다? 아담의 죄가 나오고 이스라엘의 죄가 나오지요. 여기에 주님이 마중을 나갑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마중을 나가지요.


마중을 나가서 이것을 이것은 이미 심판 안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안 받는다라고 쳐들어오게 되어있어요. 성령은 십자가의 사건에서 옵니다. 주일날 설교하면서 너무 압축적인 이야기를 해서 미안한 구석이 있는데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신체+사건이다. 이게 형상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신체+사건이에요.


형상은 어떤 모양을 말하는 게 아니고 뭐를 어떤 의지가 뿜어져 나오는 거에요. 어떤 의지가. 어떤 성질이 나오는 거에요. 성질이. 우리의 신체를 통해서 무엇이 나온다? 복이 나오는 게 아니고요 저주가 나오는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나옵니다. 십자가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희생가치가 완료되었다. 완료된 희생이 나오는 거에요. 완료된 희생.


그러면 희생이 희생될려면 우리는 뭐가 되어야 돼요? 우리는 여기서 뭐가 나와야 됩니까? 죄가 나와야 되지요. 죄가 나오게끔 주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을 세상 환경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덮치게 하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코로나19. 요새는 코로나19가 아니고 완전히 코로나 식구됐어요. 개그입니다. 아재개그. 무슨 말이냐 하면은 코로나 걸렸으니까 교회 그만 나와라. 교회 문 닫습니다. 제목이 코로나 식구에요.


주님이 무서운 게 아니고 뭐가 무서워요? 코로나가 무서워요. 이거는 뭐가 무섭다? 주님보다도 누가 무섭다? 저승사자가 귀신이 더 무서운 거에요. 귀신이여 부탁하오니 제발 나를 지켜주옵소서. 이 식구, 이 패밀리.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한다고 했지요. 그럼 종이 하는 이야기가 뭐겠어요? 모든 행동과 모든 내용 속에서 바닥에 뭐가 있습니까? 나는 당신의 딸랑딸랑 종 입니다가 거기에 의미가 담겨서 행동하고 나오겠지요.


코로나19가 찾아오면 자진해서 코로나 식구 되는 거에요 이제. 알아서 기겠습니다. 안 모이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기적은 그럼 모이는 게 기적이냐? 모이는 게 기적이 아니고 말씀이 십자가가 덮치는 게 기적이에요. 십자가가 덮치는 게 기적. 그래서 코로나 오더라도 모이라는 뜻이 아니고 모이든 안 모이든 감사가 나와야 돼요. 나로 하여금 죽음에 벌벌 떠는 적나라한 심판받아 합당한 것을 뽑아내주시는 그 주님의 성령의 작업에 우리는 참여합니다. 감사하고 우리는 즐겨야 돼요.


그래서 어떤 분이 코로나19 때문에 참석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길래 제가 집구석에 있더라도 감사하시면 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그동안 내 뜻으로 교회온 것이 아니고 코로나 없어서 온 게 아니고 주의 뜻으로 오고 가게 했다면 주께서 있게 한 것도 주의 뜻입니다라고 코로나라는 환경을 돌파해서 직접 주님의 은혜와 접합하는 게 이게 기적이란 말입니다. 이게 기적. 코로나 네가 겁나는 게 아니고 겁나서 안 모이는 게 아니고 오늘은 주님이 모이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하네. 이상한 핑계를 대나. 오늘 가지 말고 오늘 잠시 교회 쉬고 이게 주의 뜻 같애.


더욱 더 우리를 죄인 되게 해서 변명이 되겠느냐만은 결과적으로 어떻게 보면 그 자체를 다시 한번 내가 얼마나 심판에 있을 만큼 믿음이라는 것은 개뿔도 하나도 없다는 완전히 뒤로 뒤집어서 털털 털게 하시는 그 기적, 그 기적이 성도이기에 받는 기적입니다. 그거 받아서 성도 되는게 아니고 성도이기 때문에 그것이 확인되고 발견되는 거에요. 주님의 일하심이 발견하는 거에요. 이게 기적입니다.


교회 모이면 코로나 있더라도 교회 모이면 성도고 안 모이면 성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거는 누구한테 계속 기대를 갖고 있습니까? 나의 결심을 내가 믿어야 돼요. 내 각오에 대해서 내가 헌신해야 됩니다. 이것은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은 내가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을 가능성을 내가 스스로 또 만들어내는 거에요. 그것은 배후에 누가 격려하겠어요?


귀신이 그렇게 격려하지요. 너 할 수 있어. 너의 신앙을 보일 수 있다고. 보여 봐 보여 봐. 이 창궐하는 전쟁통 속에서도 네가 신앙이 있음을 장렬하게 순교하는 것을 보여 봐. 누가 이 소리를 하겠어요? 악마는 누구한테 기대를 겁니까? 내 속에 아담이 있지요. 악마가 아담을 노려서 성공적으로 아담을 종으로 삼았잖아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을 뭐라고 합니까? 죄의 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6장에서도 나오고. 죄의 종인 거에요.


죄가 왕노릇하고 왕노릇하면 아담은 그 종이 되는 거고. 그리고 로마서 6장에 보면 죄가 왕노릇하고 있는 거에요. 죄가 왕노릇할 때 우리는 악마를 의식합니까? 안합니까? 악마를 의식하지 않는 식으로 우리는 악마의 종이된 거에요. 모든 결정은 내가 알아서 내가 선택해서 한다 그게 바로 악마의 종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 4장 42절 오니까 분명 그 사람 멀쩡해요. 멀쩡한데 주님 와서 오니까 주님의 의가 오니까 죄의 아담과 악마가 결탁했던 죄가 근원적인 예수님이 찾아오니까 그게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에이씨 하면서 비타민씨를 이야기하면서 에이씨 하면서 악마가 나온 거에요. 악마가 나오고 귀신 나오고 난 뒤에 귀신들린 본인이 놀래버려요. 나한테 귀신이 있었어? 내게 괴물이 있었어?


비로소 우리는 귀신들린 자라는 것을 성령 받고 난 뒤에 아는 겁니다. 앉은뱅이가 낫고 난 뒤에 앉은뱅이 아는 게 아니고 앉은뱅이가 낫고 난 뒤에 비로소 내가 바로 앉은뱅이인 것이 합당한 것을 낫고 난 뒤에 아는 거에요. 소경도 마찬가지고. 내가 바로 소경입니다. 이제는 느긋하게 자신만만하게 제가 바로 소경이고 제가 바로 불신자고 제가 바로 지옥 갈 사람이고 제가 바로 심판 속에 있습니다를 왜 말을 못해. 왜. 이제는 다 주님의 과거사 아닙니까. 다 과거지사입니다. 이제는 법명으로 불러주세요.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다 과거.


우리의 과거사가 육신이 있는 한 아직 계속 뿜어져 나오는데요? 계속. 어제 구원받았는데 하면 안돼요. 어제란 시간은 우리의 단선적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어제 구원받았다는 것이 이게 의미 있으면 안돼요. 어제 주께서 일하셨겠죠. 그러면 오늘은? 오늘 주께서 일하시겠지요. 왜? 나는 매일 고정되어 있고 시간 속에 움직이는 것은 주님의 시간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4장에서 귀신 쫓아내고 5장에서는 그 쫓아내는 그 주님께서 그 주님이 바로 베드로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귀신이 그대로 있는 자, 정말 자기가 어떻게 뭔가 시도해서 뭘 해보겠다는 사람.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공부 얼마나 했는지 봅시다. 성경 개념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고정되어있습니까? 활동되어있습니까? 인간들 입장에서는. 범죄한 인간들 입장에서는 고정되어있습니까? 활동하고 있습니까? 문자니까 고정되어있지요.


그러면 인간은 고정되어있으니까 본인은 고정합니까? 활동합니까? 활동하지요. 활동하는 내가 고정된 성경 말씀을 지켜서 뭐 하겠다? 구원받겠다 시도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귀신들린 자들의 특징이죠. 그런데 누가복음 5장에서 누가 활동합니까? 말씀의 개념이 누가 움직여요? 주님 스스로 움직이죠. 말씀이 주님 스스로 움직여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아담이 있다면 아담의 책임자는 누구냐 하면은 아담이 아니에요. 아담의 책임자가 아담이라고 여기는 것은 누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뱀이 한소리고 아담의 책임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담 속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움직이는 거에요. 뭘 움직이는가? 말씀으로 언약으로 율법의 완성으로 움직여서 찾아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은 나도 움직인다 그 다음에 누구도 움직인다? 주님도 움직인다. 내가 움직이게 되는 것은 어떤 기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단선적 인과관계에서 기대하고 있지요. 주님은 뭡니까? 다 이루었지요. 다 이루심이 뭐를 보게 합니까? 내 기대하는 것을 작살내니까 우리의 인생은 뭐다? 방랑자. 도대체 어디로 튈지를 몰라요. 내가 어디로 갈지를 모르겠어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에요.


주일날도 설교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나를 매직 삼아서 주님의 자기 일기장을 하루하루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하루하루에요. 주님은 깻잎을 두 장 쥐지 않습니다. 깻잎 짱아찌를 한 장만 딱 쥐지요. 우리는 성질 급해서 미리 서너장 내년 5월달까지 계획 다 잡아놨어요. 아이고 그때 비가 안와야 될 텐데. 그때 코로나 잠잠해야 될 텐데.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관여하실 때 관여하면서 다가오면서 뭐가 이루어지는가? 바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다 이루심의 입장에서 그것을 확인하고 발견케 하는 겁니다. 확인하고 발견케 하는 거에요.


충실한 개가 아 나한테 주인이 있었지. 그걸 매일같이 발견하는 거에요. 보다 더 충실해야지 이게 아니고 보다 더 충실한 게 아니고 일은 누가 하느냐? 우리 주님께서 다 하시고 나는 그 주님이 다루는 대로 다루어졌을 뿐이다 하는 것을 그것을 아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내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계획이 있더라도 순간적으로 성령이 와버리면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했던 간에 주께서는 그것을 다 이루었다가 되게 하시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가 되게 하시는 거에요.


왜 내손에 맡기지 않는가? 나는 심판 속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육신이 있는 한 우리의 기능은 역할은 뭐냐? 우리는 뭘 해도 죄고 저주고 심판이라는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 역할. 그 역할 하면 돼요. 그런데 만약에 이 역할 하는 우리가 만약에 하나의 개체라면, 입자라는 말이 어려우면 개체. 개체라면 그다음부터는 개체라고 생각한다면 걱정이 되는 거에요. 아까 여러분 걱정을 제가 대신한다고 했잖아요.


만약에 진짜 심판 속에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만 지옥 가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가 이것은 뭐냐 하면은 개체가 아직 살아있는 거에요. 개체가 깨어져버리면 입자가 깨지면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파동이 있다고 했지요. 파동은 스스로 에너지가 없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에너지가 없어요. 돌은 연못에 돌 던지면 연못가에 있는 파동은 어디서 나오는 에너지입니까? 돌과 연못에 물과 부딪힌 그 에너지가 퍼지잖아요.


이미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 사건, 그 돌멩이가 파고를 이루면 우리는 다 이루었다는 파동에 여기에 포획되는 겁니다. 어려워요? 주님이 개입하지 않는 나의 일은 없어요. 모든 일에 주님이 개입했습니다. 모든 일에. 마태복음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6장 30절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보세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울 들풀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울 들풀. 이 들풀은 내일까지 살 수 있습니까? 못 삽니까? 못 살지요.


그러면 이 들풀이 만약에 입자라면 개별체라면 인간이라면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되면 나 이제 지옥 가는구나 하고 들풀은 고민에 빠집니까? 고민에 빠진 들풀 뭐 이런 거에요? 들풀 고민합니까? 고민 안 합니까? 들풀이 고민할 리가 있어요? 주께서 쓰시옵소서 이렇게 되잖아요. 그 들풀을 우리로 바꿔치기 해봅시다. 심판에 있다고? 그럼 지옥 가는데 그럼 나만 손해인걸.


지옥이란 지옥의 모습은 관계성이 끊어진 게 지옥이에요. 주님이 존재고 나는 그 존재에서 나오는 하나의 팔이고 다리고 하나의 연관된 관련성이 있는 같은 지체라는 것을 모르면 그게 지옥이에요. 지옥 안 가도 이미 지옥 온 거에요 그 사람은. 단독적으로 개체, 끊어진 관계. 관계가 이어진 게 아니고 관계가 끊어졌으면 그 자체가 지옥이다 이 말이죠.


자기 걱정하는 자체가 지옥 같은 걱정이죠 근심이죠. 내 믿음이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불신자 되는 거에요. 왜? 내가 불신자 되도록 주께서 하셨다는 그 관계가 살아있다면 그 관계가 신자가 되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는 마음껏 나는 불신자야. 나 믿음 없어. 나는 행한 것 없어. 나는 헌금한 적 없어. 나는 기도한 적 없어.


주님의 기도의 여파가 계속 나로 하여금 주께서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께서 친히 들풀도 먹여 살리잖아요. 우리가 내일 아궁이에 안 던져질 보장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이중에서. 내일 살 수 있는 사람? 보장 있는 사람 없어요. 들풀 신세와 우리 신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죠 관계. 관계가 그 나라와 의에요.


그 나라 의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성된 것이 예수님이 이 지상을 다녀갔기 때문에 그 완성의 자락이 그 완성의 여파가 이미 지상에 있습니다. 어디 있어요? 아담의 세계에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아담에서 주님이 구원하는 방법이라고 했잖아요. 아담에 있는데 어떻게 구원하느냐? 어떻게 찾아온다? 주께서 움직이는 말씀이 찾아오는데 말씀이 찾아올 때 이미 완성된 말씀이 찾아오게 되면 아담에 속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새 아담, 새로운 피조물로 생산되는 겁니다. 이게 누구 솜씨에요? 주님의 솜씨죠.


그래서 그 작업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육신 자체를 뭐했다? 죄 아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오늘 줄곧 이야기한 심판 아래 있는 것. 아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심판 아래 있다. 이게 뭐가 그렇게 염려스럽고 걱정스럽고 고민거리고 골칫거리 이야기입니까. 안 그러면 이게 자유의 이야기고 승리의 이야기잖아요 이게. 난 뭘 해도 심판 속에 있다 이게 얼마나 큰 승리입니까? 외쳐야 되지요. 나 임금님 벌거벗은 거 봤다고 산 위에서 외치는 소년의 그 기쁨, 기쁨이잖아요. 나는 봤다! 나는 보았다! 내가 벌거벗은 것을.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됐잖아요. 누가? 강도가. 어디서? 십자가에서. 유한이 무한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자기 지평선 때문에 못 따라가요. 아무리 해도 그 지평선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한이 유한이 아니고 양적인 문제가 아니고 질적으로 죄 속에 죄라는 질속에 주님의 의가 고정된 의가 들어와서 죄를 모르는 우리가 뭐가 되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알게 된 거에요. 그렇게 해서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을 우리를 통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시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 다 이루었다는 그 사건.


그러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앞으로 해야 될 일을 남은 여생을 죄를 드러내는데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죄는 주께서 성령이 옴으로써 코로나19보다 더 쎈 변종이 나와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마귀적으로 나 자신을 지킬려고 했는지 옛날의 아담의 과거사가 나의 과거사인 것을 처절하게 체험하면서 역시 혹시 했는데 역시 우리는 내 힘으로 구원 안 되는구나 그걸 확인하는 즐거움과 승리의 기쁨이 있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할 일 정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죄 짓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이 얼마나 즐겁고 기쁨인지요. 일체 나에게 기대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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