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태초의 비밀

아빠와 함께 2021. 2. 8. 09:04

태초의 비밀

2021년 2월 7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26-27

(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사도는 ‘비밀’을 거론합니다. 그것도 ‘역사 내내 감추어온 비밀’이라는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요. 인간에게 들킬 리가 없기에, 인간들이 예상한 그 후보감에는 속해져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것은 인간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선한 사람이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이 되고자’하는 그 의도로 인하여 자신은 하자없는 존재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창조 전에 무슨 계획이 있고 무슨 뜻이 있는 줄을 모릅니다. 이러다 보니 오로지 자기 정당성만 외치면서 뿜어내면서 살아갑니다.

타인과 좋은 관계를 이룰려고 합니다. 이렇듯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수한 존재라고 여겼던 인간들에게 ‘십자가 사건’, 곧 인간들이 합세하여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죽인 사건에 대해서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즉 “우리들은 우리가 선한 존재인 줄을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사건이 처들어오면 졸지에 인간들은 전혀 하나님이나 자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극구 십자가 사건을 거부합니다. 이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원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

즉 사람은 자기 구원에 무능하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 모든 노력으로 태초의 비밀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악마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체적으로 신에 대해서 탐구하고 믿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들이 신을 알고 있지만(롬 1:21) 그들이 아는 신의 이름으로 참된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비밀은 이런 식으로 이 땅에 사건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신의 존재는 예수의 존재가 비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간을 만나서 벌어진, 곧 주님이 하신 일이 비밀입니다. 그 비밀 일을 골로새서 1:27에서는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표현합니다. 사도는 이 비밀이 세상이 만들기 전에 있었다고 말하므로서 이 비밀 앞에서 모든 인간들은 차이남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즉 세상에서는 너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나에게 일어난 일이 얼마든지 너에게 일어나는데 그 이유는 세상은 나를 위함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너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비밀이 비밀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한 세상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귀한 어린 아이를 데리고 놀이동산에 간 젊은 부부가 있다고 칩시다.

그 부부에게 있어 아이는 자아와 같이 고귀합니다. 곧 자신의 정당함의 표상입니다. 놀이동산이 무슨 재미나는 일이 일어났는데(침팬지 공연) 키가 작은 두 부부는 앞에 사람들에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의 어린 아이를 높이 쳐들고 그 아이만이라도 재미나는 놀이를 보게 합니다.

이때부터는 아이의 엉덩이만 쳐다보면서도 사는 즐거움과 재미를 느낍니다. 이는 곧 이런 뜻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데,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지 전혀 관심없고 그냥 자기에게만 몰두해서 삽니다. 자기들이 낳은 아이만 멀쩡하면 자기에게도 아무 문제없다고 여깁니다.

신앙좋은 자기만 쳐다보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들이 치겨던 그 아이가 침팬지로 변해있다고 어떻겠습니까? 기가 막힐 겁니다. 충격받을 겁니다. 즉 ‘나’라는 존재가 비밀이 아니라 ‘나를 없애는 그 사건’이 비밀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이라는 이름으로 없던 성도를 새롭게 만드십니다.

인간들은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점잖다고 자부했는데 갑자기 질겁을 하면서 자신의 우수함으로 반격을 합니다. 하늘에 있다는 신을 눈으로 목격하고 지옥이 있다는 그 지옥의 사람을 목격해서 자신들이 믿어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눈에 앞에 나타난 것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입니다.

이 비밀을 위해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야했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 야곱은 탈골되었습니다.(창 32:31) 히브리서 11:21에 보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야곱의 지팡이’가 나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뀔 때의 그 사건을 지칭하는 물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됨의 최후의 거점을 타격하신 겁니다. 야곱이 자기 정당성을 외치게 하는 그 가장 의로운 자리를 찢어놓은 겁니다. 이로서 야곱은 철저하게 종속적인 존재가 된 겁니다. 더 이상 자존적인 자가 아닙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야곱은 손자들에게 ‘복’이라는 이름으로 전수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님 자신이 알아보는 새로운 백성의 생산을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찾아냄’의 대상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사야 65:1에 보면,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아보는 자를 만들어서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얼굴을 보게 하고자 하시기 위해 주어진 겁니다.(출 33:20/고전 13:12) 그렇게 해서 함께 영원히 하나가 되어 사시는 겁니다. 아가 2:6에 보면,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고 되어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 그 둘은 둘만의 은밀한 곳으로 갑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으로 말입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이 대목에서 ‘네 얼굴이 아름답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가 2:16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 비밀이란, 나 자체로서 절대로 온전해질 수 없음을 감사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앞장 세워 비밀만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골 1장 26-27(태초의 비밀)21020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26-27절입니다.

골로새서 1:26-27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사도바울이 비밀이라는, 그리고 그 비밀은 계속해서 창세전부터 지금까지 감추어져 온 것이라고 했어요. 감추었다고 이야기하셨지 애초부터 없다고는 이야기 안했거든요. 그러면 창세전에는 분명히 있었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있었던 그 비밀이 인간의 역사 속에는 감추어진 겁니다.

박 태환 선수가 수영할 때 처음에는 물속에 들어간 상태에서 한 25미터정도 까지는 잠수해서 보이지를 않지요. 시작은 했는데 감추어져 있을 때 역사 속에 있는 인간들은 ‘무엇이 시작이었지? 어떻게 시작되었지? 처음에 이 지구는, 이 우주는 어떻게 시작해서 나왔지?’ 거기에 대해서는 도통 아는 바가 없습니다.

과학도 마찬가지고 철학도 마찬가지고 인류의 모든 지혜를 동원해도 ‘인간이 있기 전에 뭐가 있었지?’ 몰라요. 그런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 아니에요. 알게 하면 이게 비밀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감춰졌다고 이야기해요. 인간이 노력해도, 알고자 해도 모르도록 그렇게 감추어놓은 그 비밀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지금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비밀을 알아?” 너희가 게 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네가 비밀을 알아?” 이 우주의 비밀, 천문학, 지구의 비밀, 그 정도 같으면 그것은 몰라도 살 수 있어요. 문제는 이 비밀이 우리 자신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비밀을 모르면 우리의 운명을 우리는 혼란스럽게 생각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내 마지막은 어떻게 되는지, 내 시작은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면서 그냥 시간만 갉아먹고 사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사도바울이 원초적이고 원래적인, 근원적인 비밀을 딱 제시함으로 말미암아 그 비밀 앞에서 모든 것은 비밀로 수렴되기 위해서, 비밀이 비밀 되기 위해서 벌어진 일들이라고 보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중심이 되면요, 남한테 일어나는 나쁜 일은 자기에게 안 나타나는 줄로 알고 나한테 일어나는 좋은 일은 남에게 안 나타나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비밀 앞에 가면 내게 일어나는 일은 네게도 생기고, 네게 일어난 일은 내게도 생기고 그런 겁니다. 비밀이 기초가 되고 비밀이 우선이 되지 내가 우선되고 내가 모든 과정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비밀도 모르고, 창세전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도 않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평생을 산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산다는 그 인생 자체가 뭐냐? 이것은 연출입니다. 조작한 거예요, 조작한 거.

여러분이 세상 살아가면서 여러분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 살아가는 것 보세요. 전부 다 보란 듯이 연출하고 꾸미고 있는 겁니다. 조작이에요. 퍼포먼스에요 전부다 쉽게 말해서 억지스러워요. 산다는 게. 사도바울은 비밀을 제시합니다. “네가 비밀을 알아? 나는 비밀을 알아.”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비밀은 세상 사람들로서는 절대로 모르는 건데 이게 성도들에게만 나타났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26절에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그의 성도들을 교회라 하는데 그의 성도들에게만 그 비밀이 드러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된다는 것은, 내가 죽어서 천당 가려고 성도되는 것이 아니고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인물들을 주님께 새로 지음 받아서 동원시킨 거예요.

그게 성도에요. 성도자체가 천국 보내려고 성도된 것이 아니고 비밀을 비밀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발현하기 위해서 성도를 만든 겁니다. 성도는 자체적으로 자기에게 어떤 목적이라는 게 없어요. 창세전부터 감춰진 것, 감춰진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도되었다면 성도 본인도 본인에게 있어서 성도 본인이 당황스러워야 돼요.

내가 이렇게 교회 나오고 이렇게 산다는 것은 내 사전에 내 인생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는 거예요. 내가 교회 가서 하나님의 성경이라는 그걸 보고 있다는 이러한 내 모습은, 예전부터 나는 이러한 나약한 모습을 보일 나라고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옛날에는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는 것은 나약한 여자들이나 하는 짓인 줄로 알았지요.

거기 가서 하나님께 잘되게 해달라고 복달라고 비는 그 꼬락서니, 그게 자부심이 넘치는 젊은 사람이 보기에는 참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보인다는 말이지요. ‘네 인생 네가 살아가지 왜 신에게 비냐 이 쪼다 바보야! 그렇게 나약하나?’ 무쏘의 뿔로 가라고 하잖아요. 불경에 나오는 이야기, 무쏘의 뿔로 가거라, 그 말이지요. 앞에 뭐가 있으면 받아버리고 “이 험한 세상아 다 오라. 내가 노를 저어서라도 저 대양 끝, 수평선 끝 나의 희망의 나라로 달려갈게.”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게 남자다운 기개, 싸나이, 사나이도 아니고 싸나이 다운 그런 의지의 표상이라 그렇게 본 겁니다. 사도바울이 비밀을 제시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이 비밀에 대해서는 깜깜이다 모른다. 이걸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밀은 결코 기독교라는 종교가 될 수가 없지요. 교회 운영하는 것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 비밀은 감추어졌기 때문에 그 비밀 알아서 내가 내 운명을 천국 가는 운명으로 확정짓겠다고 시도하는 그것조차도 그것은 비밀을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비밀은 감춰졌기 때문에 내 노림수의 대상항목에서, 후보감에서 이게 없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람은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세상에서 후보감을 찾아요. 교회 가서 어떤 장로님이 천국 가는 간증을 했다면 나도 그거 갖고 싶고, 어떤 사람이 암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다고 한다면 나도 그거 하고 싶어요. 전부 다 내가 노리고 있는, 노릴만한 것들을 우리는 나 잘되기 위해서 찾는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나를 나답게 연출하기 위해서 지금의 나보다 더 좋은 나로 조작시키기 위해서, 변신하기 위해서, 갱신하기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비밀은 이미 후보감 자체가 거기서 누락이 되어 있어요. 없어요.

이새라는 사람이 있는데 아들이 일곱 명이 있어요. 원래 여덟 명이 있는데 막내아들은 없는 것으로 쳐서 딱 일곱 명만 내세운 겁니다. 사무엘선지자가 나와서 왕을 뽑겠다고 하니 일곱 아들을 후보감을 세웠는데 그 일곱 아들 중에서 배후의 하나님에게서 사무엘에게 지시가 옵니다.

첫째 아들이 너무 잘생겨서 ‘야, 이거 후보감이다. 왕답다 싶다.’ 딱 하니까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걔 아니다. 빠져” 두 번째 “빠져” 세 번째 “빠져” 일곱 명 다 없어요. 그러면 왕은 어디 있느냐? 없어요. 아버지 이새가 제시한 거기에도 없어요.

없는 인간, 막내아들, “아, 걔는 후보감 아니에요.” “걔 데려오라” 걔가 왕이 된다고요. 하나님의 일이 전부 다 이런 식이에요. 내가 밀어붙이는 거기에는 내가 되고 싶은 내 희망이 있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의 비밀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원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내가 원해버리면 비밀은 감춰졌다는 이 요소가 깨지거든요.

모든 이에게 감춰진 거예요. 내가 성도되고 싶다면 그건 성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가 성도 되고 싶은 그 출발점이 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런데 비밀은 나에게서 출발한 모든 것은 다 제거해버립니다. 예상하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야 돼요.

사도바울이 비밀을 딱 이야기할 때는, 비밀은, 나는 근사하게 있고 나는 여전하고 그 여전한 내가 잘되기 위해서 비밀 하나 더 추가 밥이요, 해서 들어오는 것이 비밀이 아니고 비밀 자체가 우리를 부정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창세전부터 있는 감춰진 그 비밀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전에 공작을 할 수 없어요. 비밀을 얻기 위해서 사전공작은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시도하는 것은 전부 다 헛수고다 그런 뜻이지요. 이 비밀이라는 말을 집어넣는 것 자체가, 비밀은 너희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비밀이 스스로 비밀 되게 할 뿐이다. 네가 눈치 채는 그런 것은 비밀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주 고지식한 어떤 신입사원이 들어왔습니다. 공무원이라 합시다. 공무원은 약간 고지식한 면이 있기 때문에. 신입공무원이 들어왔는데 선배들이 하는 말이 “저 상급자가 봉투를 되게 좋아한대.” 그래서 고시직한 신입공무원이 상급자가 봉투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도 봉투를 드렸어요.

상급자가 ‘아하, 우리 사무실 분위기를 아는구나.’ 하고 봉투를 뜯어보니 그 안에 봉투가 들어 있어요. 상급자가 그걸 보고는 ‘야, 또라이가 하나 들어왔구나. 일 못하겠다.’ 봉투를 좋아한다는 그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봉투가 50장이 들어 있어요. 그 이야기를 선배가 듣고는 깜짝 놀라면서 “바보야. 그런 뜻이 아니야. 그 상급자가 돈을 좋아한다는 말이야.”

그 소리 듣고는 고지식한 그 신입공무원이 ‘아이고 바보같이……’ 그 다음날은 제대로 봉투를 드렸어요. 상급자가 ‘이제 우리 사무실 분위기를 아는구나.’ 상급자가 뜯어보니까 ‘돈’이라고 쓴 종이 50장이 들어 있어요. 돈이라는 글씨를 좋아한다고 본 거예요.

사도바울이 비밀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비밀이 뭔지도 모르고 이거 있으면 천당가는 줄로 알고 있어요. 바보, 진짜 바보에요. 비밀은 네가 비밀이라는 단어를, 원어를 백날 연구해도 그것은 비밀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구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비밀을 주셨다.

그거 땡! 틀린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비밀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아니에요. 그럴 것 같으면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로 여기지 않아요. 비밀은 뭐냐 하면, 골로새서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요.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왔던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했는가’가 비밀이 돼요. 그분이 계심이 아니고 어떤 일을 하는가가 비밀이 되는 거예요. 비밀! 그리고 골로새서 2장 2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이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한테 죽은 것을 아시잖아요. 그리고 유대민족만이 아니고 모든 민족이 다 하나님 믿는 것 아시잖아요. 우리나라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나오잖아요. 모든 민족, 중앙아시아, 중동, 전 세계 모든 민족, 민족이 되려면 다 신을 믿어야 돼요. 하나님 믿는 겁니다.

‘엘’이라는 그 하나님이 유포가 된 겁니다. 바벨탑 해체 이후에 모든 민족에게 엘이라는, 알, 엘이라는 그런 신들이 모든 문화의 기조로서 다 깔려 있습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지만 아리랑에서 ‘랑’이라는 것은 ‘함께’라는 뜻이에요. ‘멀위랑 다래랑’의 그 ‘랑’ ‘아리’는 신, 그래서 ‘신과 함께’ 그게 아리랑이에요.

우리 민족을 아리랑, 하나님이, 신이 함께 있어서 지켜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게 우리나 전래민요입니다. 모든 민족은 신을 알기 때문에 신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명절에 조상 제사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불교도 마찬가지고 모두 신입니다.

그러나 신이 있다는 그것은 비밀이 아니에요. 그 신은 감춰진 신이 아니고 인간이 훤히 아는 신이에요. 그러나 비밀은 너희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감춰놓은 비밀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는 메시아라고 해서 메시아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 따라서 이 땅에 와서 희생하신 분,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하신 그 기능이 바로 그리스도기능입니다.

그리스도 기능을 비밀이라고 한 대목이 고린도전서에 나와요. 고린도전서 2장 7절에 보면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비밀이 지혜로서 나타났을 때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이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나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여기 인간의 지혜가 따로 나오지요. 인간의 지혜는 아니라는 겁니다. 목사의 설교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의 지혜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성령의 나타남으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성령이 나타나셔서 우리 속에 집어넣는 것, 성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비밀이기 때문에 우리 안까지 집어넣어요.

내가 자진해서 기도 열심히 해서, 막 성경쓰기 하고 금식해서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그냥 가만있어도 쑥 집어넣는 거예요. 내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성령께서 집어넣는다는 말이지요.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낯설어요. 왜? 감춰진 것이기 때문에. ‘뭐야 이거, 이거 뭐지? 이게 왜 들어왔지? 이거 내가 주문 안했는데.’

성령은 배달의 기수에요. 새벽 탁송 새벽에 나가보니 벌써 택배가 와 있어요. 그냥 잠자는 시간에 몰래 와서 집어넣어 버렸어요. 6절에 보면, 그 지혜는 세상 지혜와 차별화 되어 있어요. 세상의 지혜와 같지 아니하다고. 그러면서도 세상의 지혜와 경쟁해요. 세상의 지혜는 라이벌이 없는데 성령이 주신 지혜만큼은 세상지혜가 용납을 안 합니다. 용서를 안 해요.

교사가 수업시간에 십자가 이야기해보세요. 교육청에서 용납을 하겠어요? 안하지요. 7절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8절에 보면, 이 지혜는 어떤 사건에 의해서 그 근거가 마련되었는데 그 근거가 뭐냐?

세상지혜, 신을 안다는 하나님을 안다는 그 사람들의 지혜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 그게 8절에 보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비밀이에요.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십자가가 비밀이에요. 십자가가 비밀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뭘 우리 안에 집어넣느냐 하면, 십자가를 집어넣은 겁니다. 십자가, 세상의 지혜와 경쟁상태에 있는 그 지혜는 십자가였어요. 따라서 십자가라는 그 사건이 계속 사건화 되어서 우리 몸에 발현되려면 우리 안에 우리가, 바로 감추인 것도 모르고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내 잘난 척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라는 그러한 인간으로 우리가 새삼스럽게 자기를 제대로 밝히 봐야 됩니다.

‘나는 십자가의 원수다’라는 사실을, 내 육신자체가 십자가의 원수인 것을 제대로 눈 떠서 알게 된 사람이 바로 성도에요. 왜냐하면 그 안에서 비로소 십자가가 지혜가 지혜답게, 감추임이 감추임답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26절에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면 이 십자가가 왜 나를 공격하느냐? 나는 그냥 십자가 받고 싶지 십자가가 굳이 나를 공격할 필요가 없는데 왜 공격하느냐, 라고 하신다면 십자가의 공격의 목표가 로마서 10장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십자가의 공격목표가 유대인을 대표로 해서 보여줍니다. 2, 3절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의가 딱 들어오니까 맹탕이라고 여겼던 그 빈자리, 진공상태에서 마중 나오는 것이 뭐냐? 나의 의가 최종적으로 마중을 나와요. 나의 의가. 이게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과 악을 인간이 알고 난 뒤에 악을 될 수 있는 대로 버리고 자기를 선한사람 만들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굉장히 점잖다고 여기거든요. 누굴 일부러 해코지 할 사람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나는 항상 마음이 넓어서 나는 내 주장하는 것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감추었던 지혜, 비밀, 십자가가 딱 들어오니까 여기서 갑자기 방어막이 형성되어 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의로움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지킨 거예요.

국가에서 운영하는 비밀기지 같은데 보면 사람들 없어요. 만약 어떤 사람이 담장 밖에서 얼쩡거리면 그 때 비상벨 울리면서 긴장 바짝 한 철모 쓴 사람들이 막 나타나지요.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뭔가 가장 나의 악마적인 것을 근원적으로 노출할 것이 뭔가 들어왔다 싶으면 강력한 방어체계가 우리에게서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의입니다, 자기의.

6, 7절에 보면 자기의가 어떻게 작용하느냐?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하나님 계신 것 보고 싶다. “하나님, 거기 하늘에 계시지요? 내가 못 올라가니 잠시 내려오세요. 하나님, 잠시 내려와서 내가 눈으로 목격할 수 있도록 ‘아, 하나님 맞구나.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 믿기로 맘 정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 가까이 좀 내려오세요.”라고 요청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 마음이.

그래야 내가 모든 것을 아니까.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될 지까지 간파가 되니까 나의 나됨은 안심이 되는 거예요. 그 반대로 ‘지옥이 있다는데 과연 있을까? 혹시 지옥이 있다면 오, 지옥에 가신 분 잠시만 이 땅에 올라오실래요?’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 안 되니까, 안 죽어봐서 모르니까 이미 지옥 간 사람 잠시 불러내고 싶은 거예요.

도대체 지옥 간 부자가 천국 간 거지 나사로 불러내서 자기 동생들 지옥에 오지 않도록 아브라함에게 부탁하는 것과 똑같은 부탁이지요. 지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지옥에 있다는 사람들 좀 불러내고 싶어 “잠시 올라오세요.”라고 부르는 그런 짓을 한다는 거예요.

로마서 10장 6, 7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우리가 보통 생각해서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내가 아는 지혜로 내 운명을 확정짓고 싶다는 말입니다. 내 미래까지 미리 다 안전빵으로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이런 의도가 자기 의라는 겁니다. 자기는 안 다치고 싶은 겁니다. 다칠 이유가 없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지금 이미 그리스도가 네 눈앞에 있다는 겁니다. 네가 하늘에 있는 사람 모실 필요도 없고, 지옥에 있는 사람 모실 필요도 없고, 네가 뭔가 결정하고 선택하려고 하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내용이냐 하면, 너의 선택과 결정에 해당되지 않는 그것이 믿음의 내용이 되는 거예요.

예상 못한 것이 내용이 돼요. 너는 이미 나를 공격하는 괴물이 들어 있다, 라고 그것을 확정지어주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믿어야 될 믿음이에요. 비밀은 의도적으로 감추었기 때문에, 우리는 감추인 것을 알아낼 재간 없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출발해서 연속성을 가지고 내가 조금씩조금씩 파악해 가면 비로소 내 손에 잡히는 그 무엇, 그걸 사람들은 믿고자 하는 거예요.

납득이 되는 것 어떤 초월적인 것.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10장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네가 한번 죽어볼래? 다시 살 수 있는가. 안 되지?” 왜냐하면 내가 죽는 것은 죽겠지만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죽을 이유를 내가 스스로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한계입니다.

내가 망해야 될 이유를 평소에 생활하면서 아예 찾지를 않아요. 내가 저주받아 지옥 갈 이유를 찾지를 않는다고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했는데, 우리는 버렸는데 우리를 버리는 이유에 대해서 도통 모르고 있어요. 이래놓고 우리가 뭘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얕잡아 보고, 주님은 우리를 욕하고, 주님은 우리보고 비웃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를 욕해본 적 없고 나를 얕잡아 본적도 없고 나를 비웃어 본적도 없어요.

주님은 말합니다.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게 한계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비밀에 대해서 모르지.” 사람에게 죽었거든요. 그리스도의 기능이라 하는 것은 사람에게 죽은 거예요. 누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피조물한테 창조주가 죽은 거예요. 그 피조물속에 누가 포함되었느냐? 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슨 수로 믿습니까? 이 십자가를.

믿음이란 내가 할 수 없는 내용이어야 돼요. 내가 예상도 안되는 게 내용이어야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공격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출발점에 대해서 성경은 정말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보면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얼마나 친절합니까? 정말 친절하지요. 너라는 인간은 갇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갇혀 있는 인간인 네가 모험을 한다고 빠져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28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내가 와서 너를 덮고 있는 그 귀신, 네가 이기지 못하는 그 귀신을 꽁꽁 묶어서 그 안에 있는 너를 건져내지 아니하면 너는 이 감추어진 비밀에 대해서 너는 모른다.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기초입니다. 이게 기초에요. 그러면 기껏 우리가 하는 것은 뭐냐? 우리가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밖에 인생을 안 살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연출이지요. 제가 얼마 전에 ‘펀드가입서’라는 것을 구해 봤는데요. 거기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공정한 주식과 연계된 증권’ 이런 뜻의 영어문구가 있고요. 그리고 죽 이런 내용이 있어요.

1. 신탁상품은 예금자 보호법에 따라서 예금보험공사에서 보호하지 않습니다. 인지했으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답변하세요.
2. 신탁상품은 운영실적에 따라서 이익이나 손실이 발생되었을 경우에 그 결과는 투자자에게 귀축됩니다. 이 말을 알아들었으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하세요.
3. 과거의 운용실적이 미래의 수익률에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 말을 이해했으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하세요.
4. 가입을 결정하기 전에 운용자산의 환매방법 및 보수 등에 관한 특정금전 신탁상품에 대해서는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5. 기타 비용의 발생여부에 따라서 신탁투자에 부담되는 모든 비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뭐냐? “이 신탁을 가입하기 전에 강제로 누구에게 권유를 당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자발적입니까?” 순, 순, 순, 순 자발적입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이 말을 인지했으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하라는 거예요. 아, 참~, 이 자료를 입수하고 난 뒤에 뭐가 확 왔느냐하면, 교회라는 것이 이 짓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번 그대로 응용해볼까요? 아주 교회가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지가 잘 나옵니다. “당신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당신이 우리교회에서 제시한 신탁사업, 다시 말해서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이거 가입했는데 이 가입한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이 말 이해했습니까, 예 아니오, 로 답변하세요.”

그리고 “교회 다니면서 여러분에게 어떤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든지 병이 나더라도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예 아니면 아니오, 라고 하세요.” 그리고 “우리교회 등록하기 전에 등록한지 6개월 만에 세례를 준다는 그것을 미리 읽어보셨습니까? 예 혹은 아니오, 라고 하세요.”

그리고 “등록을 그냥 하지 말고 숙려시간, 과연 이교회 다닐까 다른 교회 다닐까를 미리 집에서 생각해보고 등록하겠습니다, 해서 등록하세요.” 숙려기간 주는 거예요 특히 놀라운 사실은요, 우리교회 오고 난 뒤에 기타비용의 발생여부에 대해서는 투자 보수비용의 부담은 투자자에 있다는 이 말을 이렇게 응용할 수 있어요.

“우리 교회 등록하고 난 뒤에 목사의 세미나 비용, 사택 고치는 것, 차 바꾸는 것, 교육관 짓는 모든 비용은 교인들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이거 수용하십니까? 예 아니오, 로 답변하세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영혼의 천국을 보장하겠습니다.”

그리고 펀드가입서 제일 마지막에 이름 쓰고 서명하는 거예요. 그러면 가입되는 거예요. 드디어 교회에 등록한 겁니다. 세례식, 성찬식 그런 것.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그 가입서의 가장 하이라이트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무언의 압박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찐찐찐, 순전히 본인이 성령의 뜻에 의해서 이렇게 등록했습니까?”를 묻는 그 대목이 얼마나 악마적인지요? 얼마나 마귀적인지.

그 말은 뭐냐 하면,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순전히 내 판단에 의해서 결정했음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겁니다. 결국 이렇게 등록하게 되면 계속해서 그 교회 다니면서 또는 계속해서 삼성전자 파생 결합상품 그거 가입하고 계속 바라보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내 결정이 과연 옳았는가를 확인하고 검증하는 그것으로 소위 신앙생활을 다 채우는 거예요. 이게 뭐냐? 자기 의에요, 자기의.

여차하면 발 빼면 되지 않겠느냐. 발을 뺄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발을 빼는 그런 성령이 있습니까? 성령이 오는 것을 내 손으로 잡아 뺄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비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인간은 지금까지 자기연출만 하면서 인생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비밀이 있는 사도바울은 이렇게 살아가요. “주님, 왜 자꾸 저를 살려내시는데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비밀이 없는 인간들은 “주님, 왜 자꾸 저를 이렇게 죽이십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왜 코로나를 보내서 힘들게 합니까?” 주로 이런 식이에요.

비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평소에 살아가는 어느 것 하나 이게 자기가 누릴 처지나 입장이 안 된다는 것을 몰라요. 비밀이 없는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손 흥민 지금 여섯 골 이후에 골이 없어요. 주여 일곱 번째 골을 좀 넣게 해 달라. 손 흥민 걱정까지 다 하는 거예요. 두 번째, “코로나 터진지 지금 1년 2개월 다 되어 가는데 언제 끝납니까?”

그거 왜 끝나야 되지요? 이 말이요, 자기 의에서 나온 말인 줄 몰라요. “주님, 왜 저는 밤에 잠이 안 오는 불면증에 걸려 있습니까?” 또는 “왜 자꾸 변비가 됩니까?”그리고 “나는 외로운데 좋은 짝 좀 만나게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되는 겁니다. 비밀이 없으면 그것은 모든 게 연출이에요. 퍼포먼스. 인생사는 게 조작된 거라고요. 허상이라니까요, 허상! 오직 자기만을 위한 자기에요.

비밀은 나의 그 최후의 거점을 찢어놓습니다 아주 빵꾸를 내서 찢어버려요. 비밀의 거점을. “네 안에 네 의 있다. 네 의가 있어. 네 의가!”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얼마 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은데 로마서 3장 2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면요 그거 지옥 갑니다. 비밀이 없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지금 농담 삼아 비밀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영광에 이르지 못하면서 손 흥민 걱정을 하고 있고요, 코로나 걱정을 하고 있어요.

인간 속에는 자기만이 즐길 수 있는, 나만을 독자적으로 목적으로 하는 그러한 의로운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가 들어와야 알아요.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예수존재, 이거 알아서 몰라요.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와야 돼요. 나의 정체성이 파괴되어야 됩니다. 나의 정체성이. OUT OF ORDER, 내가 고장 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전부다 미쳤다. 자기한테 미쳤다 했어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요. 전부 자기한테 미쳐버렸어요. 자기한테 미쳤으니 주님한테 미칠 여력이 없지요. 자기한테 미쳐 있으니까요. 마치 자기에게 자식이 없었는데 40 넘어 자식 볼 때 얼마나 귀합니까? 그 애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놀이동산에 갔다 칩시다.

그런데 침팬지가 무슨 공연을 한다는데 사람들이 키가 다 커서 안보여요. 아빠도 키 작고 엄마도 키 작아서 안 보인다 그 말이에요.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래도 자기애는 보여주려고 죽 팔을 뻗어서 애를 높이 치켜들지요. 그럴 때 그 키 작은 엄마 아빠에게는 뭐만 보이느냐 하면 애 궁둥이만 보이지요.

우리 자신이 평생을 내 궁둥이만 쳐다보고 산다고요. 저기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요. 나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나만 쳐다보고. 이거 나라는 이 중앙이 탈골돼야 됩니다. 이게 탈골됨으로서 하나님을 본다는 그 대목이 바로창세기 32장31절에 나옵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 만나고 난 뒤의 이야기인데요.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이 멀쩡한 환도뼈가 하룻밤 새에 고장이 나버렸는가? 탈골이 되었는가? 하나님이 야곱의 근원을 폭격을 해서 아주 박살을 내서 그래요. 그래서 그 때부터 야곱이 지팡이를 짚었겠지요. 히브리서 11장 21절에 보면 그 지팡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그 지팡이에 의지해서 경배한 거예요. “요셉의 두 아들인 나의 손자들아. 너희들 나처럼 당해야 돼. 그래야 네가 살아 나. 봐, 이 지팡이 짚고 살잖아. 나 탈골되었잖아.” 야곱이라는 나의 본래의 것이 탈골된 거예요. 박살난 거예요. 정체성 파괴라니까요. 파괴, 내가 조각조각 났어요. 완전히.

어떤 권사님은 연세가 많아서 그런지 삐끗하면 자꾸 넘어져요. 넘어지니까 엑스레이 찍어보면 뼈들이 조각났어요. 뼈만 조각나지 말고 자기의가 조각나야 돼요. 의를 수습해서 모을 수 있는 의가 없어요. 박살난 거예요. 내가 나로 인하여 사는 보람과 기쁨의 장소가 없어요. 그걸 공격한 겁니다. 하나님이 미사일, 십자가로 공격한 거예요.

네가 잘났고, 네가 세상걱정하고, 네 걱정하는 그 근원에는 뭐냐? 나는 잘되어야 된다는 자기 의로움과 정당함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나는 잘되어야 돼. 정당화, 그 정당함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남은 몰라도 나는 천국가야 돼. 펀드 가입하듯이 교회 등록했잖아요. 모든 것을 감수하겠나이다. 이게 신천지에요. 이게 한국교회라니까요.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내 의를 박살내지 않으면 그게 왜 안 되는데? 출애굽기 33장 19,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얼굴을 보지 못해서 문제에요. 어떤 분을 제가 서울서 만났어요. 그분을 전부터 잘 알고 복음 안에서 교제했던 분인데 그분이 개인적으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성경가운데 어렵다, 어렵다, 해도 저는 아가서가 제일 어렵습니다.”

자, 그 어렵다는 아가서를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아가서가 왜 어려운지를. 출애굽기 33장 20절,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 긍휼과 은혜를 입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 얼굴을 보지 못해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은사, 선물이 오는데 그 선물은 뭐냐? 얼굴을 볼 수 있는 선물이 와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고린도전서 13장에 11, 12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옛날 거울이 금속의 표면을 닦아서 보니까 희미해요. 내 얼굴이 잘 안 보인다고요. 그처럼 주님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고요. 하지만 그 때에는 분명하게 보는 거예요. 주님의 자기 얼굴 보는 그게 구원이고 영생이다 그 말이에요. 그게 천국생활이에요. 얼굴 보며 사는 게. 얼굴 보며 사는 그게 뭐 그리 대단하고 뭐 그리 소중하냐? 그게 아가에 나오는 거예요. 구약 아가서에 나오는 겁니다.

아가서 2장 6절에 보면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자, 안게 되면, 안 안아 본 사람은 모르지만 안게 되면 서로가 서로의 시선에서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요. 팔다리 보려고 안아요? 뭘 보려고 안는 겁니까? 눈을 쳐다보고 얼굴을 보는 거예요. “그것은 일반적인 사랑인데요?” 하는데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여기 13절에 보면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그리고 14절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은밀한 곳,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 감추어진 곳, 거기서 두 사람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거예요. 이게 아가 내용입니다. 16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나는 그에게 속했고 그는 나에게 속했다. 이 아가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비밀을 누구한테 주느냐? 오로지, 오로지 하나님의 새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만 주는 거예요.

그 새로 지음 받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가의 신랑, 성도는 그 신랑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 서로에게 속하기 위해서 서로만 아는, 이 세상 어떤 인간도 모르고 서로만이 아는 그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것,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가 만든 성도에 의해서 찾아냄을 당하는 겁니다. 오늘 설교의 하이라이트는 ‘찾아냄’이에요. 찾아냄을 당하는 거예요.

우리가 감춰진 것을 알아낼 수가 없어요. 주님이 왔어도 몰랐던 겁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가 고백했듯이 내가 백날 이야기해도 너희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했습니다. 28장 26절에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냥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말만 지금 사도바울이 하고 있어요. 왜? 사도바울에게는 비밀이 있고 너희에게는 비밀이 없기 때문에. 이사야 65장 1절에 보면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여기에 하나님을 찾고, 주님을 찾고, 그리스도를 찾고, 십자가를 찾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사야 65장의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은 비로소 전에는 관심사가 나였는데, 나 정당함이고, 나 잘남이고, 나 우수함이었는데 이제부터는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누구세요? 저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누구세요?’ 찾아냄을, 예수님 스스로가 성도에게서 찾아냄을 당하는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너는 나에게 속하고 나는 너에게 속했다. 그게 바로 은밀한 곳이에요. 그게 비밀스러운 곳이에요. 바로 그 축복을 요셉의 아들들은 야곱에게 전수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 축복을 로마서 10장 19, 20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이 말은 성도라는 것은, 내가 나자체로서 온전하지 않음을 감사하는 사람이에요. 내 자체로서 어떤 온전함도 나에게는 없어야 될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발각당하는 것, 주님한테 발각당하고 주님에 의해서 그걸 규정받을 때 이것보다 더 큰 감사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최고입니다 이게.

아까 제가 들었던 예 들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내 애가 좋아서 그 애를 들고 선채로 앞에서 침팬지가 무슨 공연을 하는지를 모르지요. 우리 애가 좋아서 너나 실컷 봐라, 하고 보여주지요. 그런데 애 실컷 보라고 바짝 들고 섰던 그 애가 없어지고 손에 침팬지가 들린다면 얼마나 기겁하겠어요? 애가 내 자존심이고 나의 영광인데 그 자리에 십자가가 우리 손에 들린다면.

왜 내가 이렇게 달라졌는지 화들짝 놀랄 겁니다. “감춰진 비밀이 남들에게 나타나시지 왜 저에게 나타나 주십니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그 비밀을 저 훌륭한 목사님이나 장로님에게 나타나시지 왜 저한테 나타나십니까?”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 앞에는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순전하게 가짜로만 살았던 저희들. 그러면서도 내가 왜 쓰레기인가, 그 근거를 찾아내지 않으려고 시도할 정도로 완악하기 짝이 없는 우리 자신들에게 주께서 창세전 비밀을 알려주시고 십자가 알려주셔서 주님이 우리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늘 새롭게 다가오게 해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는 나보다 주님께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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