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일군
2021년 1월 24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 21-23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는 관점과 우리가 우리를 보는 관점이 너무나도 다릅니다. 우리 인간들은 어릴적부터 2차원적 표면을 누비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저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한계로 해서, 이 안 쪽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나가는 지를 모델로 여기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유혹거리들이 범람하지만 철들고 보면 결국 최고로 쳐주는 승자는 돈이 많은 자라는 합의된 결론에 도달되게 됩니다.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즉 돈이 있는 것이 착함이요 선함이요 하늘의 복이라고 인식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을 이런 기준에 맞게 조절하고 조정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기가 잘 되는 것’ 외에 다른 기쁜 소식은 없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못되는 것’이 가장 심각한 일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기쁜 소식’ 곧 ‘복음’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화목’입니다.
‘회목’이란 곧 ‘용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신 용서의 근거는 ‘예수님의 죽음’뿐입니다. 다른 것들을 들이대봐야 하나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쁜 소식으로 안 여겨진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은 자체적으로 자신을 선한 인간으로 변모하는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한 일을 했다면 그것보다 더 많은 선한 일을 해서 그것으로 상쇄시키면 된다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이 ‘악함’과 ‘선함’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악함’은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죽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 ‘악’입니다.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나오는 선으로 악을 덮어보겠다는 것은, 이런 작업을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 인생을 건전하게 지켜내는데 선방했다고 자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본성은 그저 무너지지 않기 않게 버티는 일 뿐입니다. 매사가 억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시한 복음은 극한적인 심각을 품고 있습니다.
끝장을 보시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죄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인간들이 모르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필히 죽어야 화목과 용서가 될 정도로 너희 죄는 심각하다. 이 심각성을 너희 힘으로 찾아 낼성 싶은가?”라고 되묻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실 때에도 극단적인 내용을 담아서 주십니다. 마태복음 5:29-30에 보면, “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재대로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면 아무리 해도 지키려는 자기 몸 사수하기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몸이 우리가 건사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해 주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3:27-28를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 앞에 나오려거든 너의 겉짝을 뜯어내고 안짝에 있는 해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진즉은 죽어있고 그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 인간들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극단적인 말씀과 병행해서 자신의 일생도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이나 기적이나 훈계가 자기 백성을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분명히 죽었다’는 흔적이 되는 그 피가 담긴 자라야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의 해골이 자신의 참 모습인 것을 알겠습니까?
그리고 그 어느 누가 전기톱 갖고 다니면서 자신이 죄라고 느낄 때마다 자신의 신체와 눈알을 뽑아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미 완결된 능력이 있는 자신의 피를 ‘보험금 선지급 형식’으로 이미 성도에게 담아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받으신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즉 이미 용서받고 난 뒤에 성도의 남은 인생은, 왜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죄일 수밖에 없는가가 육신을 갖고 세상 살면서 나타나게 하십니다. 인간의 죄는 악마의 정신에서 나온 겁니다. 악마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발꿈치를 뜯어먹는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창 3:15). 즉 ‘나는 지고는 못 산다’ 정신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정신입니다.(창 27:35) 이것이 과거형 인간입니다. 새로운 인간형이 성도에게 들어왔기에 과거형 인간성이 노출되는 겁니다. 과거형 인간을 시범조로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심각한 환경 속으로 집어넣으셨습니다. 그곳이 광야입니다.
인간의 손과 발과 머리와 지혜가 아무 짝도 소용없는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신 겁니다. 민수기 21:5에서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기를 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동원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죽이기 싫어합니다. 굶어죽으나 뱀에 물려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만큼은 자신의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민족입니다. 백성들이 아파서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뱀’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이 모세가 높이 들었던 놋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물어 죽이시는 뱀이었던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은 당연히 죽어야 될 존재라는 겁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된 채 죽는 이유를 아는 자는 벌써 하나님과 화목한 자요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시시한 세상사에 대해서 이기는 쪽으로 굳이 갈 이유가 없는 자입니다. 이 자세가 복음의 일군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에게 일체 중간지점을 용납하지 않으심을 감사합니다.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의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2강-골 1장 21-23(복음의 일꾼)21012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21-23절입니다.
골로새서 1:21-23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우리는 지금 바울이 자기가 ‘복음의 일꾼’이라 하는 이야기를 방금 보았습니다. 왜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까? 우리가 멍청이도 아니고 배울 만큼 배웠는데 왜 사도바울이라는 이 사람을 통해서 들리는 이 이야기가 꼭 들어야 할 이야기냐? 그것은 사도바울이 전하는 이 사도바울의 계통, 복음의 일꾼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유일하게 관통하는 노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기 뜻을 나타내실 때 무턱대고 나타낸 것이 아니고 확실한 노선을 정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줬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 보내신 예수님이 22절에 보면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라고 해서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으로써 그 안에 아버지 뜻을 다 담았고, 그 다음에 그 소식을 복음의 소식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기쁜 소식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사도가 된 입장에서 복음을 너희에게 전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노선의 제일 마지막 단계가 바로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면서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이 그냥 지식적으로 추가적으로 더 보태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을 포기해야 될 것인가, 그런 문제가 발생됩니다. 있는 것에 더 보태는가,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하자가 있고 문제가 있다고 해서 있는 것을 빼고 거기에 복음만 담을 것인가, 그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22절에 보면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육체의 죽음으로. 그 다음에 22절에 보면, 화목케 되었다 하거든요.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가르친 지식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화목 되었다,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와 화목케 되었다고 하니까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느냐를 따져봐야 되겠지요.
따져보는 것이 21절에 나옵니다. “전에 너희가 악한 행실로” 악한 행실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내 속에서 끄집어내는 악한 행실과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악한 행실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떤 처방을 내리느냐 하면, 우리 스스로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악한 행실이 물론 없을 수는 없으니까, 착한 일을 더 많이 해서 악한 행실을 덮어버리면 더하기 빼기 해가지고 당기순이익이 있을 것이 아니냐 이 말이지요. 복식부기에서.
조금이라도 착한 일이 많이 남으면 신과 함께 저 천국 극락에 갈 수 있다. <신과 함께> 라는 영화에 보면 그렇게 나와요. 착한 일 많이 하면 나중에 염라대왕에게 가서 좋은 평가 받아서 극락 간다는 이야기죠. 그런 사고방식, 우리가 스스로 착한 행실을 평가하게 되면 이것은 굳이 예수님께서 지식을 주셔도 좋은데 어쨌든 간에 우리 선에서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굳이 자기 목숨을 구체적으로 자기 피죠, 내가 이렇게 죽어서 이렇게 피가 흘려졌다는 것, 내가 죽었기 때문에 생기지 죽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그 무엇, 그게 예수님의 피거든요, 그 예수의 피를 뿌림으로서 죄사함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극단적인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냐 그 말이지요.
죽음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극단적이고 아주 치욕스러운 패배거든요. 아무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이 들어왔다는 내용은 예수님 죽으심의 그 의미가 들어왔다는 뜻이고, 그러면 우리는 그걸 지식으로 받을 것이냐, 아니면 피를 받을 것이냐, 예수님의 피를 받고자 한다면 내가 스스로 내가 잘못됐다, 하는 이런 평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돼요.
내가 잘못됐다 하는 그 평가 그 자체가 오류고 잘못될 수가 있어요. 내가 잘못됐다 하는 것, 우리가 ‘내가 잘못됐다’ 하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내가 그나마도 선방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할 만 해서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뭔가 이렇게 애쓰고 있고 착실하다는 것을 드러낼 때 나는 죄인입니다, 나쁜 놈입니다, 다시는 나쁜 짓 안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도 결국 그런 짓을 하면서 노리는 것은 뭐냐? 이처럼 내가 반성하니까, 회개하니까 아주 나쁜 놈은 아니잖아요, 라고 자기를 위로하고 방어하는 차원이지요.
불교영화에 보게 되면 그런 것이 나와요. 젊은 중이 해변에서 철없는 아가씨 둘과 이야기도 하고 장난도 쳤다 이 말이지요. 일방적으로 장난질 당했겠지만. 그랬을 때 산 속에만 있다가 해변에 한번 갔다가 세속의 여성을 만나고 그 다음부터는 부처 앞에서 도를 닦는데 자꾸 그 여성의 얼굴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혈기 넘치는 젊은 중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목탁을 치는데 아주 열정적으로 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목탁이 부서져라 칩니다. 그래도 마음에 성이 차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이 정도 하면 부처님께서, 이런 식은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인데, 부처님께서 내 성의를 알아주겠지, 해서 자기 손가락을 불에다 태웁니다.
이정도로 내가 자학하니까 내 성의만큼은 좀 알아 달라. 득도 하는 거지요, 득도. 그게 바로 불교고 그게 바로 종교라는 거예요. 내가 불교이야기를 했지만 기독교도 똑같은 거지요. 득도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자기가 선방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피를 받으라고 하는 것은, 네가 판단하기에 네가 죄라고 판단하는 그 자체가 엉터리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 네 잘남이거든요. 이러나저러나 역시 나는 의롭다는 것을 과시하는, 자기존재를 자랑하는 짓밖에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복음을 집어넣기 위해서 뭘 찾느냐 하면, 우리에게서 나를 찾는 게 아니에요. 날 기대하고 날 찾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서 죄를 찾아낸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찾아내야 그래야 예수님의 피 흘림이 성과가 빛이 나거든요.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약속하신 그 약속이 부각이 된다고요. 그게 도드라지게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서 죄를 찾는데 죄를 찾는다고 하면 또 ‘죄지을까’ 하는데 내가 스스로 판단하는 죄는 죄가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죄지으려면,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하려면 주께서 아주 극단적인 말씀을 해버립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올 때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덩달아 우리도 극단적인 인식과 발상을 가져야 돼요.
마태복음 5장 29, 30절에 보면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이요 얼마나 극단적입니까? 저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성경공부 하면서 말씀에 순종하자, 말씀대로 삽시다, 목사가 맨 날 그렇게 하는데 그 목사 오른손을 한번 보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자기가 오른 손으로 죄 안 지었습니까? 그런데 그 목사 손은 왜 멀쩡합니까? 그거 말씀에 순종 안한 거거든요. 도대체 어디까지 순종해야 돼요?
마태복음 5장 29, 30절까지 순종해야 돼요. 오른 손 찍으면 문제 해결돼요? 왼손 남아 있잖아요. 그러면 왼손으로 죄 지으면 왼손 잘라내야 돼요. 교회 올 때 텍사스 전기톱 가져오면 돼요. 전기톱 가지고 교회 오라는 말이지요. 오늘 뭘 잘라낼까, 머리를 잘라낼까, 마치 이와 같습니다.
차를 잘못 해서 횡단보도에 주차했으면 벌금을 내지 않고 시에서 전기톱 가져와서 횡단보도에 물린 부분만큼 차를 잘라내 버려야 돼요 그러니까 잘라내라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너를 갖지 말라 그 말이에요.
말씀이 율법대로 의롭게 한다면 율법을 살리기 위해서 너를 소모해야 된다는 겁니다. 불쏘시개처럼 오른뺨 왼뺨을 멀쩡하게 두고는 나중에 말씀을 지켰다고 하니까 나는 안 믿습니다. 어디 구라를 쳐! 마태복음 23장 27, 28절에 보면 역시 주님께서 극단적인 발언을 하십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허위와 가짜, 더러운 것, 추잡한 것, 이런 것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이 말씀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내 앞에 나오려면 너의 그 뚜껑을 열어 제켜서 해골을 보이라는 거예요. 해골이라는 것은 언제 나오느냐 하면, 죽고 난 뒤에 한참 지나야 해골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지 한참 된 이 바리새인들아 내가 너한테 찾는 것은 네가 죽었다는 증거를 내가 찾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네 가슴팍을 열어 제키고 해골을 보이라”는 말이지요.
피트니스해서 육체 그런 것, 육체 그런 것 보이지 말고, 살 빼는 것 보이지 말고, 해골을 보이라 해골을! 어디서 광고 보니 “뼈 빼놓고는 다 뺍니다.” 그런 광고도 있어요. “뼈 빼놓고는 다 빼드리겠습니다.” 동대구역에서 봤는데 그렇게 빼는 것 말고 뚜껑을 열어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극단적인 주님의 이런 말씀들은 본인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 화목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용서하는 거예요. 내가 너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극단적 조치 외에는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너를 위해 죽는 것 외에는 너희들의 죄가 얼마나 심한지, 잔소리하고 훈계해가지고 너희 죄가 없어질 것 같으면 내가 진즉에 그렇게 했지, 그렇게 해서 빠질 죄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이라고요. 이게 복음입니다. 인간들은 어릴 때부터 이러한 우리 자신의 심각성을 알지를 못해요. 사람이 자기가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을 모를 때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 하면, 고민과 갈등과 걱정거리에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모르는 겁니다.
왜 심각한 것을 모르냐 하면, 항상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꾸미는 것으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해 보면 저는 어릴 때부터 대구 비산동 사람 많은데, 서문시장, 굉장히 사람 북적북적 하는데서 살았습니다.
어릴 때 커가면서 제가 느낀 것은 뭐냐? 우리 동네에서 누가 제일 맛있는 통닭을 굽느냐, 이런 것, 우리 동네에서 누가 제일 노래 잘하고 키가 크냐, 우리 동네에서 누가 제일 쌈 잘하느냐, 우리 동네에서 누가 딱지 제일 많이 끌어 모았느냐, 우리 동네에서 어느 만두집이 제일 맛있느냐, 우리 동네서 제일 무서운 아저씨가 누구냐, 우리 동네서 제일 착한 아줌마는 누구시냐, 심지어 우리 동네서 제일 부부싸움 많이 하는 집은 어느 집이냐?
어릴 때는 항상 우리 동네서 대빵 찾는 거예요. 우리 동네, 우리 골목, 우리 마을에서. 여자 같으면 우리 동네서 누가 제일 멋있는 오빠냐, 그런 것이 되겠지요. 누가 잘생기고, 키 크고, 우리 동네서, 우리 학교서 누가 제일 공부를 잘하느냐? 그런데 철이 나서 보게 되면 그런 대빵 찾는 것이 아무짝도 쓸모없습니다. 하나의 대빵으로 종합이 되어버려요. 우리 동네서 누가 제일 돈 많이 버느냐?
철이 나니까 아,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 철딱서니 드니까 깨닫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2차원 표면이라 합니다, 2차원 표면. 2차원 표면은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지평선이 나와요. 내가 보는 이 세상을 표면적, 평면적으로 계속 추구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요. 모든 사람이 저 지평선 너머에 뭐가 있겠는가, 저 지평선 너머 내가 철나서 세상 넓게 보게 되면 저 세상 끝에는 또 무슨 꿈, 무슨 희망이 날 기다리고 있느냐?
전부 다 표면적인간이에요. 표면적 인생입니다. 이라는 팝송이 있어요. 그 노래 가사에 보면 세상은 파고가 이는, 거센 파도가 이는 하나의 넓은 대양이에요. 그리고 나는 하나의 선원입니다. 인생이란 뭐냐? 세상이라는 넓은 대양 앞에서, 거센 파도가 치는 대양 앞에서 나는 하나의 선원으로서 열심히 내가 노를 저어가게 되면 나는 이 세상을 개척할 수 있고 언젠가는 나는 성공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원하는 사랑도 얻을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세상출세도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 젓고 이 험한 세상을 이겨나갈 때 비로소 내 길은 거기에서 보인다는 거예요. 이게 이라는 노래에요. “어떤 고난이라도 오라. 내가 모험해서라도 이겨낼게.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갈게.” 그런 식이지요. “바다의 깊은 뜻을 항구는 알까~” 뭐 그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봤자 그것은 2차원 표면입니다. 내가 아는 대양은, 수평선은, 내가 아는 지평선은 내가 아는 것까지의 경계를 지은 거예요. 살아보면 그 뒤에 내가 도전해야 될 일이 또 생기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표면적 존재입니다. 바퀴벌레 같아요. 맨 날 평생을 기어 다니다가 볼일 다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사마리아여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고 하지요. 18절에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할 때 그 여자는 다섯 명의 남자를 사귀었고 이제 여섯 번째 남자를 사귀고 있는 겁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에 물 길으러 왔는데 그 사마리아 여인 입장에서 야곱의 우물이라는 것은 2차원 표면에 박혀 있는 하나의 그렇고 그런 우물이에요. 우물에서 물 긷고 일상생활 하면서 자기는 또 여섯 번째 남자와 사귀고 ‘인생사는 것 뭐 있어? 그게 전부 아니냐.’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나타나셔서 거기다가 뭘 박아 넣느냐 하면, 우물을 박아 넣어요. 그 우물이 4장 14절에 보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 때 예수님께서 네 남편 데려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는 내가 영적으로, 3차원적으로, 입체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너는 평생 살아온 것이 표면적으로 살아온 거예요. 2차원적으로, 바퀴벌레 기듯이 그런 식으로만 살아온 거예요. 그래서 야곱의 우물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냥 우물, 자기 물 긷는 우물이고 그 우물물로 내 일상의 생활을 살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예수님의 자기 우물을 박아 넣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2차원에서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거예요. “다시는 목마르게 하는 우물물 긷지 않더라도 내 속에서 계속 영적인 것이 끊임없이 나오는 우물 되게 해줄게.” 이게 바로 주님의 복음입니다. 그저 어릴 때 살아온 것처럼 더, 더, 더, 더, 더, 계속 더, 저 산 너머 저 들 너머, 이제 한국을 떠나서 해외에 나가면 뭐라도 있겠지, 저 바다 건너 뭐 있겠지, 있기는 뭐 있습니까? 지옥이지요 뭐. 지옥이에요.
평생토록 헤엄치고 노 저어 봐야 지옥 속에 갇혀 있는 채로 노 젓는 겁니다. 2차원적 생활에서 영적인, 입체적이고 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러다가 우리 속에다 영원한 생명이 나오는 샘물이 되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 샘물이 되려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바깥의 타인의 죽음, 사적인 죽음으로 끝나면 안 되고 내 안에 주님의 죽으심이 들어와야 되는 겁니다.
그 주님의 죽으심이 나오는 그걸 설치하는 방법은 바로 주님이 죽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 죄를 내 속에서 끄집어내서 연결시키는 거예요. 그 연결시키는 방법이 뭐냐? 바로 용서입니다. 화목이에요. 화목은 너무 어려우니 그냥 용서라 합시다. 너를 용서해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용서가 뭐냐? 보험금 선지급하는 거예요. 보험금을 미리 지급하는 겁니다.
내가 예상한 용서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요. 내가 예상한 용서는 기껏 해서 ‘주님,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했습니다. 내가 착한 일 해서 갚아줄게.’ 이게 우리 선에서 기껏 할 수 있는, 2차원적인 인간이 앞으로 내일도 모레도 살아야 되고 10년 뒤에도 살아야 되기 때문에 사는데 지장 없도록 나름 조치하는 것이 ‘나쁜 일 했으면 착한 것으로 메우면 되지 않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내가 교회 안다니고 그동안 나쁜 짓해서 이렇게 벌 받았으니까 이제부터는 교회 착실히 다니고 목사님 말씀 잘 듣고 예수님 말씀 순종해서 바르게 살면 과거에 보증 섰다 날린 돈 다 주시겠지.’ 이런 식으로. 몸 아픈 것도 낫게 해주시고……, 뭐 그런 식으로 자기가 계산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지요.
그것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버티는 거예요. 주께서는, 무너져도 벌써 무너져야 되는데 우리가, 뭐가 내가 귀하다고, 뭐가 소중하다고 안 무너뜨리려고 붙들고 있느냐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우리가 나에 대해서 귀히 여겨버리면 우리 평생 살면서 진정 고마운 분을 못 만나요. 사람이 사는 게 힘들고, 괴롭고, 눈물 나고, 서글픈 이유가 고마운 사람을 못 만나서 그래요. 고마운 사람을!
내가 당장 없어져도 괜찮을 정도로 고마운 사람, 지금 나에게 몸을 아프게 하고 나를 죽여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 정도 이상의 고마운 사람, 그런 사람을 못 만나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생 살면서 짜증을 내고, 남에게 이기려고 들고, 달려들고 그런 거예요.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이걸 과거형 인간, 그걸 옛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과거형인간. 그 과거형인간 속에서 주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 피를 흘리는 그 레벨이 있어요. 수준이 있거든요. “네 죄는 어느 정도냐 하면, 내가 너를 위해서 피를 흘려야 될 레벨이야. 그 수준이야.” 그러면 우리는 “그것은 너무 과하십니다. 그것은 오버 아닙니까? 너무 극단적입니다. 과격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먼저 보험금으로 줘요. 내가 용서라는 보험금을 줘놓고 “자, 네가 이제 그 육신가지고 죽을 때까지 실컷 과연 과거형 인생을 살아봐라.” 그리되면 주님께서 과연 그 인생을 살게 되면 모든 사태에 있어서 주께서 그 사람에게 죄를 찾는 작업을 해요. 전에는 이게 죄가 아닌 줄 알았는데 죄 아닌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죄에요.
그 죄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사물의 힘에 주눅 들어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전에는 내가 잘되기 위해서 해외에 나가서 유학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외국에서 공부해야겠다.’ 왜? 나는 선원이니까, 세상은 나의 희망과 꿈이 있는 대양이니까, 내가 스스로 나를 개척하겠다고 나서지요.
그러나 복음이 들어오면 그것은 뭐냐? “네가 마땅히 죽을 이유를 찾기 위해서 유학가거라.” 이미 용서 했어요. 이미 영생 줬습니다. 이미 천국 보냈습니다. 이미 구원시켜 놓았어요. 보험금을 먼저 줬다니까요. 이제는 그 보험금이 왜 필요한지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사고를 일으키는 겁니다. 죄가 나오는 사고, 나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사고를 자꾸 일으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유학가고, 어떤 사람은 집 청소하고, 어떤 사람은 맛있는 것 사먹고, 그야말로 그냥 네 맘대로 사세요. 우리는 자기 맘대로 사는 거예요. 그러나 용서라는 보험금을 선지급 받은 사람은 내가 무심코 사는 일상이 이게 왜 죄가 되는지, 용서받아야 될 죄인지, 이것 때문에 왜 피를 흘려야 되는지, 아, 여기에 내 자존심이,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내 자존심이 여기에 가담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 자존심이.
자존심이라는 것은 기어이 남에게 안 지려는 심보, 이게 자존심이에요.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심보, 이걸 성경에서는 야곱이라 하는 거예요. 야곱이에요,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 되기 전의 야곱입니다. 지고는 못산다 이거예요. 지고는 못 산다. 감히 피조물주제에 창조주의 발꿈치를 물었던 거예요. 누가? 배암이, 뱀이 메시아의 발꿈치를 물었어요.
이 뱀의 속성이 뭐냐? 하나님이든 메시아든 나는 지고는 못산다. 내가 깨물어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 악마의 품성으로 우리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깨물어야 우리는 살맛이 나는 이상한 괴물 같은 존재, 그래놓고도 우리는 그게 죄 아닌 줄 알고 있어요.
주님의 복음이 들어오게 되면, 예수 죽으심이 들어오게 되면 이것은 마치 공항 검색대처럼 “무슨 무기라도 있어요?” 하고 찾는 것처럼 주님 우리 속에 들어와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나를 찾는 것이 아니고 아담의 근원적인 악마성이 네 안에 있다는 것을 밝혀주는 겁니다.
그걸 찾아내면서 “여기 있잖아 봐. 내가 죽어야 될 이유가 여기 있잖아 봐. 있다니까!” 시험을 쳐도 자기 실력껏 치면 되는데 자기가 싫어하는 애가 자기보다 성적 더 나오면, 석차가 잘 나오면 미치는 거예요. ‘걔 죽었으면 좋겠다. 고층건물에서 펜트 하우스에서 떠밀어서 죽었으면 좋겠다.’ 할 정도로 모든 본성은 남이 죽어야 내가 속 시원한 그러한 본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보험금을 선 지급받고, 이미 용서를 받은 자의 눈에서만 그게 보이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보인다고요. 복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그게 보인다고요. 그 죄가 뭐냐? 바로 예수님 보다는 눈에 보이는 소유물, 사물, 사물의 힘이 바로 나를 능가한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기죽고 살지요. ‘내가 저걸 가져야 돼.’ 그래서 우리 안에 그 악마적인 요소, 바로 그게 뭐냐 하면, 자아라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 복음의 일꾼 되었다 하는데 제가 여러분 보고 “여러분도 복음의 일꾼 되어야지요.”라고 한다면 “목사님, 잠간 만요. 나한테 내가 허락 맡고 하겠습니다.” 하고 누가 나에게 복음의 일꾼 되라 한다면 “나에게 그렇게 지시하지 마시고 잠간 만요.” 하고 내가 나에게 허락 맡아야 되고 하고 자기한테 물어봐야 됩니다. 그 자기가 누구냐 하면, 바로 과거형 자기한테 물어보는 겁니다. 내가 손해가 될 것인가 이익인가 따져보는 것.
그런데 과거형 자기의 특징은 뭐냐? 인간의 자아가 두 개 있거든요. 로마서 7장에 의하면 내가 또 다른 나가 있어요. 과거형 나와 주께서 만들어나가시는 나가 두 개 있는데 그 과거형 나가 나한테 요구하는 게 뭐냐 하면, 자꾸 복음의 일꾼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그걸 타인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과거형 나는 악마의 시험에 들어가지고 그 원칙이 뭐냐? 나는 나에요.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내가 제일 중요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의 일꾼은 이건 내가 구성한 내 일이 아니고 예수라는 남이 나에게 요구하는 일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적인 복음이 딱 들어오게 되면 특징이 뭐냐 하면, 주춤 하고 머뭇거리게 되는 겁니다. 주춤하고 머뭇거려요.
이렇게 해서는 잘 이해 안 되는데요. 우리는 내가 유일한 나기 때문에, 내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나 빼놓고는 전부 다 타인입니다. 타인이기 때문에 타인의 말을 들을 때는 그냥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주인인 나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나에게 이익이 있느냐 손해냐를 나한테 따져 물어보는 겁니다.
그래서 물어보게 되면, 나에게 별 이익이 없다고 한다면 치열하게 반발하지요. ‘그것은 주님의 일인데 주님이 알아서 하지 나에게 왜 그걸 강요하십니까? 나에게 강요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기를 ‘사도바울 정도 되면 그런 일이 없겠지.’라고 하지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보게 되면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아, ‘부득불’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 힘보다, 내 과거형 나 보다 주께서 지워준, 주님이 생각한 새로운 인간형이 과거형 인간보다 더 힘이 세 가지고 내가 이 복음을 부득불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9장 1, 2절에 보면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이미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어떤 기능인으로 찾아온 거예요. 사도바울은 자기를 하나의 빈 봉지로 여기는 겁니다. 봉지로 여기는데 그 봉지에 뭐가 담기느냐 하는 것은, 봉지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넣어주는 대로 담을 수밖에 없는데 그게 왜 화목이 되고 용서가 되느냐 하면, 이미 봉지 안에 또 다른 괴물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뭐냐? 과거형 인간입니다. 과거형 인간에 대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민수기 20장 2-5절에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모세와 아론아, 네가 뭔데 우리의 팔과 다리를 왜 꽁꽁 묶어두느냐, 그 말입니다. 내 솜씨를 발휘하고 내 과거형, 내가 자랑질 할 것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광야 이곳으로 왜 데려왔냐 그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성경을 봐도 밋밋하게 보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심각하게 봐요. 이 현실을!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냥 밥 먹고 살고 돈 벌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를 대표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심각한 환경 속에 먼저 시범조로 집어넣은 거예요. 다른 이방민족은 널널하게 자기 농사짓는데 그 시각에 누가 고생하느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서, 이것은 진짜 지옥체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겁니다. 도대체 이것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뭘 할 수 있는데? 할 수 있는 것을 다 묶어 놨으니까 이게 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묶어 놓으니까 뭐가 나오느냐? 과거형 인간, 애굽에 있을 때 좋았다 이 말입니다. 그게 과거형 인간이에요. 나의 나됨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그 시절이 정말 좋았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원망합니다. 민수기 21장 5절에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이것은 정당한 요구잖아요. 과거형 인간에서는 정당한 요구다 그 말이지요.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지 하나님이라는 타인이 하는 일은 나한테는 우선이 아니에요. 그것은 남의 일이에요 나는 내 일이 급하고 중하다고요. 이것은 타고난 것이고 여기에 대해서 토 달고 이의 달지 마세요. 왜? 이것은 타고났으니까. 이것은 이유가 없어요.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거예요. 아담의 죄에서 나왔기 때문에.
문제는 이것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걸 심각하다고 보는 거예요. 이래가지고 천국 못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6절에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불 뱀 물려 죽게 하는 거예요. 물 없이 죽으나 양식 없이 죽으나. 주께서는 “아니, 그렇게 죽으면 안 돼. 복음으로 죽어야 돼.” 불 뱀으로 죽이는 겁니다. 이렇게 불 뱀에 물려 죽게 하니까 백성들이 또 따집니다. “이 불 뱀 물러가게 해라. 불 뱀 때문에 못살겠다. 왜 우리를 죽게 하느냐.” 요한복음 3장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불 뱀인데? 내가 놋 뱀이야! 내가 뱀이야! 내가 너 죽이려고 온 뱀이야!”
나의 죽음, 나의 극단적인 죽음과 너와 함께 너의 옛사람이, 과거형 사람이 죽어야 거기에 영생이 있고 생명이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한 샘물을 박아 넣는 방식입니다. 다른 방식은 없어요. 그것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레위기 26장 27절에 “너희가 이같이 될찌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찐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비참하고 비참하게 된다 할지라도 이 땅에 왔던 하나님의 아들 내가, 이 주님이 죽으면서 비참한 것보다는 그것은 잽도 안 된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이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은 그만큼 심각하고 이 세상이, 네가 생각한 이상으로 처참하게 망가지는 거예요.
우리가 과거형 인간에서는 자기가 배고픈 것이 심각한 문제에요. 자기 일상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 주님의 심각함과 일상의 심각함과 대결구조로 나가는 것이 이게 바로 복음을 아는 우리 마음속의 분란이에요. 어느 것이 심각하냐?
그래서 용서를 선지급 받는 것이 이게 중차대한 일인가, 아니면 저 대양 넓은 바다에서 내 뜻을 이루는 이것이 중차대한 일인가? 맨 날 대결케 하는 거예요. 2차원적인 바퀴벌레의 그 표면을 기어 올라가면서 맨 날 남 따라가면서 출세하겠다, 성공하겠다고 표면을 기어 다니는 그 지저분한, 더러운 바퀴벌레같이 그렇게 살다보니까 우리 자아상, 우리 과거형인간은 뭐냐?
계단으로, 또 계단으로, 그렇게 저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은 거예요. 천로역정 그런 이야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저 높은 곳에 닿는다는. 어떤 사람은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계단 말고 바로 갈 수 있는 것. 바로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주신 것은 계단 말고 단두대에요.
한방에 목을 치는 거예요. 우리의 뚜껑을 열어 제키는 겁니다. 캐비닛 문 열 듯이. 네 안에 이런 더러운 것이 있는 것을 네가 왜 그렇게 그동안 몰래 감추고 살았느냐 그 말이지요. 해골인데! 어제 죽은 것이 아니고 진즉에, 네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 살아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아담의 죽음이. 그걸 주님께서는 죽음의 죽으심이 살아 있는 걸로 바꾸시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이러한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4장 10, 11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바로 복음의 일꾼입니다. 이 복음의 일꾼이라 하는 것은 특정사람이 복음의 일군이 아니고 모든 성령 받은 사람은 다 복음의 일꾼이에요.
11절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을 이렇게 바꿔도 되지요. 우리가 항상 육신을 가지고 죄를 또 짓고 또 죄를 짓는 이유는,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하나님이 너를 용서했다. 이미 용서했다는 것을 드러내게 함이라.
따라서 이미 용서받은 사람은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입에서 즐거운 고백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소 ‘코뚜레’라는 것이 있지요. 소의 콧구멍을 꿰어서 주인이 잡아당기면 부득불 당기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야 되듯이 주님께서 복음을 집어넣으면 우리는 복음의 일꾼 되기 싫어도 코뚜레 꿰인 소처럼 어쩔 수 없이 복음의 일꾼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일은 애초에 이제 없어진 거예요. 내 일이 없어졌다는 말은 내가 나한테 질책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거예요. 내가 평할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만약에 우리끼리 남겨두게 되면요, 과거형 나는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요. 계속 나를 재촉해요. 촉구하고, 나무라고, 내가 나에게 벌세우고, 나를 괴롭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과거형 인간이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가, 마귀가 그런 짓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이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지. 너 더 나갈 수 있는데 왜 여기서 주저앉아. 너는 저 사람보다 더 성공해야 되고 출세해야 돼. 네가 이 꼴로 인생 끝낼래? 남자가 칼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이런 식으로 계속 나에게 촉구하는 거예요. 과도한 업무와 과도한 목표를 제시하게 되면 우리는 내 욕망이 그걸 따라잡으려고 심지어 죽을 때까지, 나이 구십이 되고 백세 될 때까지, 죽을 때까지 헉헉거리면서, 헉헉대면서 ‘그래, 성이 안차. 저것마저 이뤄야지.’ 이래가지고 마귀한테 끌려 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마귀한테 끌려 다니는 인간이 이제는 주님한테 끌려 다니는 거예요. 전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의의 종이 된 겁니다. 로마서 6장의 말씀처럼 이 땅에서 우리가 성도로서 시험에 드는 경우는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어요.
어떤 경우냐 하면, 심각하지도 않은 세상 일, 과거형 인간으로 봤을 때 심각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의 심각성 앞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데 그게 굉장히 심각한 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만드는 시험, 계속해서 우리가 마귀한테 우리의 발목을 잡히고 있습니다. ‘너는 자존심도 없냐? 너는 너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걸 왜 방치하냐?’ 이런 식으로.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보험금을 선 지급 받았다. 용서를 이미 받았으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로 가지 마세요. 이긴다는 자체가 스트레스 받습니다. 차 운전하거든 속도 낼 사람 다 앞에 가게 하세요. 다 보내버리세요. “이게 날 추월해? 아침부터 성질나게!” 이러지 마시고 그냥 보내버리세요.
가봤자 2차원 지평선밖에 더 있겠어요? 미래도 모르고, 앞도 모르고, 그저 우르르 다른 사람들 다 그리로 몰려가니까 그리로 가면 되는 줄로 알고 다 따라가는 거예요. 왜 가느냐, 물어보면 서로 몰라요.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
사마리아 여인이 만약에 예수님 만나지 않았으면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를 여섯 명 사귀었잖아요.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 약 올리는 방법이 뭐냐 하면, 자기 이웃집 아줌마가 남자 열두 명 사귀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야, 인물 별로 좋지도 않은데 벌써 열두 명째라. 엘리자베스 테일러인가? 나는 여섯 명 밖에 안 되는데.’
우리는 쓰잘데기 없는, 아무 경쟁할 이유도 없고 비교할 가치도 없는 그런 것들을 하나의 인생의 과제로 여기면서 그게 무슨 심각한 일인 것처럼 “아버지, 유학 가서 성공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만 잘되면 다들 기뻐하는 것처럼 타인을 생각할 때 나 중심으로 타인을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이미 주님에 의해서 내가 주님의 타인이 된 겁니다. 타인의 일은 시시하고 내 중심은 주님의 죽음이 중심이지 내가 나의 중심이 아닌 거예요. 주님의 생명이 생명답기 위해서 우리는 빈 봉지 같은 우리에게 주님의 생명이 담겨지게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현실화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 ‘남의 이야기고, 들을 필요도 없고, 내 이야기도 아닌데 내가 꼭 굳이 알아야 돼?’라고 하면서 어느새 우리의 몸뚱이가 곧 복음의 움직임으로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시는데 그 증거가 뭐냐 하면, 바로 이 애굽, 옛사람, 과거형 인간들이 좋아했던 그 애굽이 따지고 보면 내가 죽는 시점이 오게 되면 한 때 추억이었고 시시한 것이고 다 지나간 농담 같은 거예요.
다 지나간 농담 같은 것, 그거 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데, 딱지 끊기나 마나, 탕수육 한 그릇 먹었다 치고 별 중요한 것 아닙니다. 아무 중요하지도 않아요. 젊은 목사가 개척교회 하면서 자기는 교인수가 얼만데 저쪽 자기 동기는 벌써 5백 명 교인 되었다. ‘아, 나는 언제 5백 명 되냐. 내가 교회 간판 페인트칠 해볼까. 5십만 원 들여 가지고. 뭐 이런 식으로 해서 교인들 모이겠나?’ 이 자체가……, ‘주여, 이걸로 해서 하늘나라 확장되게 하옵소서.’ 하면 주님이 뭐라 합니까?
그게 바로 시시~한 일이에요. 정말 시시한 일. 바로 주님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악마의 머리 대가리를 쳐버리는 거예요. 악마는 예수님을 물고 주님은 이게 어디서 물어, 하고 머리를 쳐버리고. 따라서 중간에서, 우리는 끼어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립을 허용한 적이 없어요.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중립이 아니에요
주님의 용서를 선지급 받든지, 안 그러면 계단타고 지옥으로, 지옥인지도 모르고 지평선 넘어 선원처럼 노를 저어 가든지. 나한테 독촉을 받고 나한테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결국 남아 있는 것은, 우리 몸이 늙어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왜 죽지?’ 자기 죽음을 설명 못하는 이 무식함으로 그동안 무슨 철학을 하고 무슨 신학을 합니까?
내가 죽어야 될 이유가 내 죄 때문에 죽는 건데 그 죄를 이미 용서받았기에, 생명을 받았기에 이제는 죽도록 그냥 내버려 두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경 쓸 일도 아닌 것에 대해서 화내고 분노하고 스트레스 받았고 몸 사리면서 공포에 떨었습니다. 다 악마에 속한 우리 육신의 흔적인 것을 저희들은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원 없이 주께서 원하는 죄를 나타냄으로서 그저 십자가의 공로가 얼마나 대단하고 심각하고 소중한 것을 날이 갈수록 더욱 더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