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예수안 교회

아빠와 함께 2021. 1. 18. 06:33

예수 안의 교회

2021년 1월  17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20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의 피’가 현실의 일부가 아니라 전혀 현실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은 역사적인 인식으로봐서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일 겁니다. 이는 마치 농부가 자기 밭에 파놓은 우물이 온 우주의 배꼽이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이 믿지 못할 일을 사도는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증거없이는 새로운 것에 믿음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쪽에서 내놓으신 증거가 바로 ‘십자가 피흘리심’입니다. 이 십자가 피로 인하여 인간들이 생각한 이 현실말고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발생되었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 ‘예수 안’이 천국이요 세상에 나타난 참된 교회입니다.

이 참된 교회의 특징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개성들을 인정치 않는다는 겁니다. 옳고 그름과 아름다움과 추함, 많고 적음, 건강하냐 병들었느냐의 유무, 명이 길고 짧은 것 등등 그 어떤 차이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오시는 길에 대해서 미리 이사야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0:3-5에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을 세례 요한에 의해서 실행에 옮겨졌습니다.(마 3:3) 예수님의 나타남에다 이 예언을 적용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자들은 주님의 안목에서 볼 때 모두 이미 지옥이요 죽은 자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나 천국이나 사랑과 긍휼이라는 개념이 모두다 지옥같을 때 비로소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나타남의 취지는 십자가와 부활에 이를 때까지 내용이 희석되지 않습니다. 충실하게 일관성 있게 유지됩니다. 율법은 예수님의 몸통입니다. 거기서 거미줄처럼 뻗어나오는 것이 바로 율법의 파동이요 그물망입니다. 이 율법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습니다. 모든 자들이 율법에 걸려 ‘이미 죽은 자’로 드러납니다.

에베소서 5:14에 보면, 구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즉 구원이란 우리 인간들의 아쉬운 것을 보충해주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죽은 자에게 살아나는 수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자’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태어나면서부터 개인 플레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적 존재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그런 나를 개인적으로 타인과 비교해서 평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개인은 예수님 뿐입니다.

이는 곧 사적인 존재와 평가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집단적 평가만 내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개인을 없애고 집단에 소속되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안’입니다. 그 안에서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도를 개인적인 사항을 문제삼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사항은 일제 거론하지 않기도 합의가 된 상태입니다.

즉 성도가 사는 것은 본인의 자격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의 가치를 살리는 조치를 성도 개인 안에서 발생시킵니다. 그 사건이 바로 모두 ‘십자가 피흘리심’ 사건에서 파생되어 나온 사건입니다. 일체 사적인 요소를 받지 않는 구약적 사례가 민수기 16장과 17장에 걸쳐 나옵니다.

민수기 16장에서 고라도 주동이 되어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합니다. 즉 출애굽할 때에 공평하게 나왔는데 왜 모세 집안에 우리 이스라엘 전체가 복종되어야 하느냐고 따지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모세 만이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열려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만이 긍휼의 의미를 아는 겁니다.

모든 자들이 죽음 광야 안에 갇혀 있는 상태가 되면서도 이스라엘이 안 죽고 사는 것은 모세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점에 시대걸고 대들게 된 사건이 고라 자손에 땅에 파묻혀 죽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참혹한 일이 있고 난 뒤에, 전혀 이스라엘이 고라 자손에 대한 처벌이 가혹하다고 이번에도 모세와 아론에게 대듭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전체 이스라엘이 멸절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향로를 만듭니다.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민 16:47-49)

모세와 아론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섰습니다. 바로 역할을 숨겨진 하나님의 언약의 역할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관찰된 것이 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시선 뒤에는 하나님의 응시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항상 개인적으로 시작해서 개인적인 자기 평가에 몰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된 새 현실의 몸통인 것을 모르는 겁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어떤 율법사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율법의 요약이 무엇인지가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숨바쳐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겁니다.”여기서 율법사는 ‘이웃’의 개념에 대해서 묻습니다. 이 개념을 설명하시면서 예수님은 한 예를 드십니다.

강도에게 당해서 거반 죽게 된 사람을 전제로 해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길을 가지 않고 그 강도 만난 사람쪽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사마리아인에게 물어야 합니다. “당신에 왜 그냥 가던 길로 가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누가 우리 인간이 타고난 본성을 거스리는 자입니까? 그것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율법이란 자신의 본성을 십자가 피흘림 앞에서 어떤 처지인가를 비로소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자기 몸에 난 못자국과 창자국입니다. “네 손가락을 내 몸이 넣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몰두했기에 평소에 예수님을 배제하면서 ‘예수님 몰라도 사는데 지장없다’고 여깁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나도 너를 도무지 모른다”(마 7:2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리가 얼마나 가증한 자리인 것을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강-골 1장 20절(예수 안 교회)21011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20절입니다.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나님께서 화평케 하겠다, 화목케 하겠다는 것을 말뿐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 증거가 교회라는 겁니다. 이 교회를 성경 골로새서 1장 19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예수 안’에 있다. ‘예수 안’에 있는 걸 교회라 하고 교회는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의 화목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너희를 긍휼이 여긴다는 것이 ‘예수 안’에서만 있습니다.

예수 바깥에는 그것이 해당사항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만든 것은 지옥은 천국과 같지 아니하고 천국은 지옥과 같지 아니합니다. 동일한 인간들인데 가는 길이 달라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똑같이 키 백 칠십 얼마, 똑같이 하루 세끼 먹었고, 같은 한국 땅에, 같은 지구상에 살았는데 달라도 어떻게 그렇게 다릅니까, 가는 길이!

이걸 인간들이 눈치 채지를 못해요. 같은 학교 출신 동창생, 같은 식구끼리 누나, 동생, 또 자매간 언니 동생, 형제간 형 아우, 한집에 태어나서 쌍둥이처럼 같이 살았던 가족인데 어떻게 가는 길이 그렇게 다른지 그 식구들끼리도 몰라요. 부부사이도……, 부부사이는 좀 알겠다. 하도 핍박을 해서 부부사이는 좀 아는데 같은 식구끼리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돋보기 가지고 조사를 해봐도, 그가 잃는 성경책을 과학수사연구소에서 치밀하게 지문조사 해봐도 이 성경책을 본다고 해서 성경책 안보는 나와 성경책 보는 네가 운명이 이렇게 벌어져도 이렇게 벌어진다는 것은 어떤 근거가 있어야 될 텐데 아무 근거도 없이 달라도 이렇게 다르다는 것. 갈 길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구라다. 그냥 한번 해본 소리다. 예수란 분이 해본 소리다, 라고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학교에서 또 그렇게 배우고 부처가 한 소리도 구라고 그냥 해본 소리고, 공자도 마찬가지고, 테스형이라는 그 소크라테스도 그냥 해본 소리고, 예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냥 하는 소리지 실제로 현실이 그 말대로 된다는 증거는 없다, 라는 것을 학교에서 다들 그렇게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배워왔는데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 피로” 이렇게 십자가 피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약속, 천국과 지옥이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건으로서 확실하게 드러났다는 거예요. 십자가사건으로. 십자가, 예수님이 죽었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고 그것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 그 말이지요.

코로나 걸려서 죽었는데 그래서 장례식 다 치렀는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뭡니까? 코로나의 권세를 이겼다는 뜻 아닙니까? 코로나 권세를, 모든 인간이 벌벌 떠는 그 무서운 죽음의 코로나의 권세를 이겼다는 거잖아요. 그걸 믿는 자가 예수 안에 있는 자라 그 말이거든요.

같은 부부라도, 형제라도 안 믿는 자들이 “그게 믿어지나 이 바보야! 코로나로 죽어서 무덤에 갔는데 사흘 만에 무덤 헤치고 일어났다? 그게 구라지. 그게 거짓말이지 그게 믿어져?” “나는 믿어지는데. 진짜 너하고 나하고 너무 다르다. 야, 나는 안 믿어지는데, 나는 그게 믿어지는데, 죽음의 권세를 이겼다는 게 믿어지는데, 그게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다는 게 믿어지는데. 믿어지는데 나쁜 짓은 아니잖아. 이 세상의 혈육들만 살고 있는, 인간의 핏줄만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공간, ‘예수 안’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따로 있다는 게, 이게 믿어지는데! 이게 성경에 나오는 건데!”

성경의 모든 말씀이 십자가로 확연하게 증거 된 것처럼 여기 사도바울이 말하는 ‘예수 안’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따로 있다는 것도 십자가에서 파생된 효과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그게 옳을 것 같으면, 실제 일어났다면, ‘예수 안’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특수한 공간도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코로나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본적도 없이, 예수의 영이 임한 적도 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쳐다보면서 평생을 교회 다닌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코로나 터지니까 공포에 질려가지고 뭐가 탁 나오느냐 하면, 윤리 도덕이 팍 튀어나오는 거예요. 윤리도덕은 언제 나오느냐 하면, 공포, 자기가 살고자 할 때, 이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낄 때에 자기 방어차원에서 윤리도덕이 팍 튀어나옵니다.

그까짓 윤리도덕가지고 뭐 하겠다는 말입니까? 사도바울부터 해서 모든 사도들은 그리고 신구약에 나오는 성도들의 특징을 보게 되면, 이미 죽음의 권세를 이겼기 때문에 굳이 살려고 애쓰지 않겠다는, 오히려 사도바울처럼 나는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그런 태도가 나왔어요. 코로나 같은 이것이 얼마나 좋은 사례가 되는지. 코로나 딱 터지니까 죽고자 하는 자와 살고자 하는 자가 티가 팍 나버립니다. 확 나요. 확 나버린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 코로나 없을 때는 자기가 신자라고 여겼는데 탁 터지니까 그동안 예수 믿은 게 이게 뭐예요? 아주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 믿은 게. 내가 믿었나? 그동안 자기가 지어낸 환상 속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예수 안’이라는 특수한 공간, 그리고 예수의 피로 화평을 이룬다 하는 것은 그 밑에 깔려 있는 바탕에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겁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너희를 평가하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개인에 대해서는 너 개인대신 예수님 개인이 네 값을 다 치렀다는 거예요. “죄 값을 다 치렀으니까 난 너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예수 안’에 있는 집단으로 보겠다. 따라서 네가 너 평가하지 말고 네가 소속된 집단이 하나님한테 어떤 평가를 받는가 보라.” 그 집단이 ‘예수 안’이고 그 집단이 교회에요.

하나님의 화목이라는 것이 사적으로 하나님 일대일로 화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이루었던 그 화목, 화평, 더 이상 내가 택한 백성에 대해서 아버지가 죄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이에요. 내가, 예수님이, 다시 말해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건 사람에게는 아버지로부터 심판받지 않는다. 아버지로부터 죄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는다, 라는 그 화목계약이 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자기를 평가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마세요.

내가 어느 소속이냐, 내가 어느 집단 소속이냐, 내가 어느 안에 있는가를 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는 어디 안에 있느냐 하면, 자기는 나 안에 있어요. 나 안에.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어요. 안 믿는 사람들은, 나를 대표하는 사람은 나가 되고, 예수 믿는 사람한테는 자기를 대표해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되고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나는 못난 거 맞는데 예수님이 다 하셨어.”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예수 믿는 쪽으로, 예수님이 하셨다, 쪽으로 밀어붙이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나 예수 잘 믿는다고 끝까지 자기한테 돌아와요. 자기한테 환원된다고요. 내가 예수 잘 믿어? 치매 걸려 보세요. 예수 잘 믿는 게 어디 있나. 예수 누군지도 모를 건데.

개인을 집단화 시키는 방법은 뭐냐 하면, 모든 개인의 개성을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걸 균질이라 하고 균등이라고 해요. 일체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관계망으로 건설되는 예수님의 새로운 현실이 ‘예수 안’에 있다는 현실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40장 3-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외칠 때 이 대목을 가지고 외쳤는데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하나님이 말씀을 외치는 정도가 아니고 실제로 말씀대로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 인간세계에 오시는 거예요.

오실 때에 어떻게 오느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하나님께서 찾아오게 되면 개개인의 우열이나 잘남이나 옳고 그름,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냐 아니냐, 아름다움이나 추함이냐, 많고 적으나, 짧으냐 기냐, 재산이 많으냐 적으냐, 이것 묻지 않고 고르고 평평한 그 작업을 깔고 그 위에 여호와의 대로가 거기서 포장이 되는 겁니다. 깔려오는 거예요.

모든 인간, 모든 것들이 높낮이가 다 평균케 되는 거예요. 잘났다 못났냐 하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는 거기서 거기라 그 말입니다. 똑같다 그 말입니다. 이 말을 한마디로 해서 가난한 자라고 해서 결코 구원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쪽으로 가면 천당 가는 길이 가까운지 알아요? 아프다고 해서 구원되지 않아요. 가난하다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죄인이라고 구원되지 않아요. 똑같아요.

태어나서 한 달 만에 죽으나 태어나서 백다섯 살까지 사나 그것 의미 없습니다. 똑같아요. 균등 된다, 고르게 한다, 똑같다, 균등하게 할 때 그 균등의 수준이, 레벨이 어느 정도냐 하면, 모든 인간은 이미 다 죽었다고 보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에베소서 5장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구원이라는 이 레벨이요, 수준이 어느 정도냐 하면, 돈 좀 잘 벌고, 몸 좀 건강하고, 그 정도 레벨이 아니고 죽은 자여 깨어라 일어나라, 그 정도 수준이에요. “죽은 자여 일어나라. 깨어라.” 따라서 깨어난 자만이 주님의 영이 오기 전에, 주님의 복음이 오기 전에 내가 아무리 높은 빌딩에 살고 잘 먹고 잘 살아도 그것 자체가 죽은 모습이었다. 그걸 뒤늦게 인정해주는 거예요.

그동안 좀 잘 산다고 없는 사람 얼마나 개무시했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잘살고 못살고, 나보다 너는 못 배웠다거나 혹은 배웠다거나, 너는 믿음 없고 나는 믿음 좋고, 그 자체가 이게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 입에서 그런 되지도 않는 비현실적인 소리가 나왔다는 것을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쁨으로 수용하는 겁니다.

‘아, 사적인 평가, 사적인 것은 일체 안 받는구나.’ 나 개인을 대표해서 주님이 대표적 개인으로 나 대신 이미 아버지 앞에, 나 대신 변호사로서 모든 서류정리부터 해서, 운명정리부터 해서 주님 선에서 끝났어요. 이미 다 끝나버렸다고. 그 끝난 이름, 그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코로나가 협박을 하든지 공갈을 치든지 뭐든 간에 내 사적인 내 운명을 내가 감수하고 내가 다독거릴 하등의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균등하니까. 균일하니까요. 남자니 여자니, 아이고, 뭐 그게 대단한 차이라고. 죽을 때 아무 의미 없어요. 이번에 사무엘상 수련회 했는데요. 사울 왕이 죽기 전에 죽은 사무엘이 먼저 등장하지요. 죽은 사무엘이 먼저 등장해서 그 다음에 사울이 죽습니다.

사울 왕이 죽을 때 너는 죽은 이유를 알고 죽으라, 그 말이지요. 사무엘 상 읽어본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것이 나타났던 죽은 유령인 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인지, 아니면 귀신이 만든 가짜 사무엘인지 그게 굉장히 궁금했을 겁니다. 주석이나 어떤 신학 책을 봐도 사람들이 해답을 못 내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수련회 참석했거나 들었던 사람은 비로소 그 해답을 알겁니다. 내가 알겁니다, 라고 했지만 가만 보니 모르고들 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비존재의 존재에서 바라보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내가 여기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내가 해석하기를, ‘그 사무엘은 죽은 사무엘인지 귀신이 조작한 가짜 사무엘인지, 그래서 귀신이 사울 왕을 놀리기 위해서 일부러 만든 걸까?’

나는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렇게 죽음을 보는 것은 그걸 비존재라 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죽은 자냐 산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무엘에서 나오는 그 말씀이, 그 말이 앞에 있는 예언과 일관성이 있어요. 말씀만 살아 있고 산자도 죽었고 죽은 자도 죽었고 다 죽었어요.

‘나는 살아 있고 사무엘은 죽었다.’ 이러지 마세요. 나는 숨 쉬는 모습으로 죽어 있고, 사무엘은 숨이 그친 입장에서 죽어 있고, 그것뿐이지 말씀이 끊어진 인간은 모두 다 죽은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림으로’ 라는 말로 ‘예수 안’이라는 그 새로운 공간을 이야기할 때는 출발점을 뭐로 하느냐 하면, 살아 있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죽어 있고 심판아래 있고 지옥에 있다, 는 그것부터 시작을 해야 이 말이, 십자가 피의 능력이 왜 중요한가가 드러난다 그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불 질러 놓고 그 불속에 주님이 뛰어들어서 불 질러 놓은 그 속에서 자기백성을 건져내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유월절 날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를 죽일 때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여호와의 학살이에요. 학살인데 애굽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섭섭해 하겠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걸 학살로 보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왕 죽은 자, 그 죽은 자 가운데서 일부를 떼 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죽는다.’라는 것을 시범조로 그 맏이를 죽였을 뿐인 거예요. 맏이가 죽었지만 맏이 말고 다른 형제들, 다른 가족도 하나님 앞에서는 관계가 끊어졌으니까 죽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해석이요, 자기가 살아 있고 나는 살아 있으니까 더 살아보겠다고 하는 사람한테는 성경해석이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어요. 닫혀 있어요. 해석불가입니다.

더 실제적인 예를 들면 며칠 전에 강진 구포에서 교통사고 났어요. 78세 된 노인이 저녁 7시 12분, 벌써 날이 다 저물어서 컴컴하지요, 국도 한복판을 걷고 있었어요. sub탄 운전자가 나이 55세, 남자가 몰던 차의 왼쪽 백밀러가 노인을 쳐버렸어요.

국도라서 길이 좁은데 노인이 밤중에 혼자 걷는다는 생각을 못했지요. 게다가 시커먼 옷을 입고 가니 뭐가 보입니까? 잘 안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자동차 본체에 받친 것이 아니고 툭 튀어나온 왼쪽 백밀러에 받쳐서 넘어졌어요.

첫 번째 차로 인해서 그 노인이 넘어지니까 그 뒤에 두 번째 차고 와서 밟았고 세 번째 차가 오면서 또 밟아버리고 세 차가 연달아서 노인을 치고 지나가면서 그 노인은 그 자리서 즉사 했습니다. 첫 번째 운전사가 55세 된 남자, 두 번째 친 차의 운전자가 28세 여자, 세 번째 여성 운전사는 57세.

운전자가 여성이나 남성이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오늘날은 보편적 기술시대입니다. 남자가 운전하나 여자가 운전하나 그저 차가 들이받았지요. 남자가 들이받은 것도 여자가 들이받은 것도 아니고 남자나 여자나 관계가 없어요. 사람 죽는데 차가 받았으면 차라는 그 기계가 들이받은 거지요. 평소에 우리는 남자니 여자니 얼마나 따졌습니까?

그러나 교통사고 나서 죽는 그 현장에서는 차가 들이받았지 여자나 남자가 들이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평가가 아니라 차를 가졌다는 집단이 78세 된 그 노인을 죽인 거예요. 그 집단이. 운전사라는 집단은 사적인 감정 없었습니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아주머니가 계신데 나이 68세입니다. 30년 동안이나 무당하고 친하게 지냈어요. 그 무당을 믿고 무당이 시키는 대로 했지요. 그 68세 된 아주머니 아래 결혼한 딸 셋이 있었어요. 엄마가 무당에 빠져 있으니까 세 딸도 함께 무당에 빠진 겁니다.

그 무당이 딸들에게 뭐라고 했느냐? 딸 셋이 카페를 하는데 장사가 잘 안되었던 모양이지요. 딸이 엄마가 친하다는 무당을 찾아갔는데 무당이 하는 말이 “지금 엄마가 너희들 사업 안 되도록 기를 빨아먹고 있다. 그러니까 엄마를 죽여라.” 그렇게 된 거예요.

딸 셋이 카페에 모여서 엄마를 두들겨 팼는데 엄마의 정신은 뭐냐? 무당도 믿지만 어떤 사고방식이냐 하면, 딸자식한테 잘해주면 나는 복을 받는다는 그런 사고방식인 거예요. 개인적인 자기평가가 있는 거예요. 개인적인 평가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딸 셋이 엄마를 죽으라고 팼는데 그 다음날 엄마가 얻어맞고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멀쩡하게 다시 왔어요. 죽어야 되는데 안 죽고 뭘 했느냐? 평소에 엄마가 손자들을 돌봤어요. 나는 엄마로서 딸에게 내 할 도리는 다 하면 내가 복 받겠지, 이런 생각이에요. 참, 얼마나 많이 접해보는 사고방식입니까? 이 세상에서. ‘자식은 뭐라고 해도 어떻게 엄마가 자식을 미워할 수 있어? 나 하나 희생하고 나 하나 모든 것을 내놓으면 언젠가는 복 받게 되어 있어.’ 이런 마음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나 얻어맞고도, 비틀거리면서도 겨우 딸 카페에 가서 청소해 주려고 오다가 또 얻어맞아서 죽었어요. 이것은 무슨 보편성이냐? 무당말이, 기가 빨리면 안 되니까, 다시 말해서 내 사적인 인생 손상을 입으면 안 되니까 엄마가 되었든 누구든 날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을 거니까 내 액땜, 액이 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하겠다는 겁니다. 왜? 내가 나를 평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평가하고 나 잘되면 그만이니까.

사적평가거든요. 사적으로 내가 예수 믿어서 내가 믿은 예수가 나를 구원한다. 이것도 무당 짓하고 다를 바가 뭐예요?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겁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내 구원위주에요. 내 구원위주. 예수 이용해서 나만 천당 가면 끝나는 거예요. 무당 섬기는 그 심보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 구원이라는 것은 없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어요.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모든 출발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back to the Jerusalem, back to the future가 아니라 back to the Jerusalem, BTJ.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예루살렘을 회복한다고 상주에서 모였는데 back to the Jerusalem이 아니고 무덤으로, 코로나로 가버렸어요.

열방선교회라는 단체가 그 단체에요. 구원받으려면 백신 같은 것은 맞아서도 안 되고, 트럼프 옹호해야 되고, 이 세상에 프리메이슨이라는 음모단체가 있어서 그 단체를 주시하고, 666같은 것은 받으면 안 되고……, 온갖 것들이 있어요. 여러분들은,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고 궁금할 텐데 묻지도 마세요. 그런 것 들을 가치도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네가 천당을 기어이 가려면 이런 짓은 피하고, 이런 짓은 안하게 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가만있으면 구원 못 받고 뭔가 해야 된다는 겁니다.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런 교회, 신천지 같은 이런 교회가 어디서 나왔겠어요? 한국교회에서 나온 거예요. 그거 ‘예수 안’ 아닙니다. 전부 다 사적인 요구사항뿐이에요.

교회 인 듯 교회 아닌 교회 같은 교회. 정답은 이거예요. 시체인 듯 시체 아닌 시체 같은 나.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림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적으로 네가 평가한다면 너는 죽은 자다. 왜? 죽은 자가 되어야 “잠자는 자여 복음을 듣고 일어나라. 깨어나라.”가 성립이 되거든요.

사적으로, 악마가 시키는 대로 선악과 따먹고 내뺄 때 이미 우리는 사적으로 주님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죽은 자에요. 세월 몇 십 년 더 사나 소용없어요. 결국 죽어요. 이미 죽은 자라고요. 죽은 자가 내빼고 있는 겁니다. 선악과 챙기고 도망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이 초등학교 2학년 교과에 나옵니까? 중학교에서 나옵니까? 수능에 나옵니까? 도대체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옵니까? 아무도 이야기 안 해요, 아무도!

이 땅이 죽은 자로 보편화되고, 죽은 자로 되고, 지옥이 될 때 비로소 거기서 화목이 의미 있게 나옵니다. 화목 한다는 것, 구원받는다는 게 의미 있게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화목과 구원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폐쇄공간을 만들어놓고 이방인들 다 잘라내고,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게는 타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다룹니다.

집단적으로 다루었을 때 개인적인 평가가 나오는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분노케 하고 화나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민수기 16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16장에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여기서 주모자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왜 모세와 아론 너희 집안끼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서 너희끼리 다 하느냐? 우리는 뭐냐? 같이 출애굽 해놓고, 요새 말로 하면 민주주의로 해야지 왜 네가 우리 지도자급이라고 설쳐대느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교훈도 그렇지만 미리암의 교훈도 마찬가지에요. 모세의 누나가 결혼문제 때문에 간섭할 때도 하나님께서 문둥병 걸리게 했지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 누구냐?” 이걸 물어요.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긴다는 이 이야기를, 그냥 단지 이야기뿐만이 아니고 직접 하나님 만나서 그 이야기를 들은 자가 너희들 가운데 누가 있더냐?” 그 말이지요. “모세 외에 있더냐? 없잖아. 그런데 네가 왜 대장질을 해? 하나님의 긍휼도 모르고! 하나님의 자비도 모르면서!”

지금 너희들이 죽음의 광야를 지나는 것은 첫째는요, 죽어야 된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고, 두 번째, “죽어야 되는 게 맞는데 네가 지금 살아 있잖아. 죽어야 되는데 살아 있다는 게 이게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너희들은 언약이라는 그것 때문에 너희는 살아 있는 거야.” 이걸 이야기할 사람이 모세 외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고라자손이 반란을 했는데 민수기 16장 31, 32절에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이렇게 고라가족 고라에 속한 사람 다 죽여 버렸어요. 땅이 갈라져서. 거기에 맨홀 뚜껑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땅이 갈라져서 다 파묻혔지요.

뿐만 아니고 그렇게 했다고 해서 백성들이 “모세 네가 뭔데 그 사람들 왜 죽였느냐?” 해서 달려드니까 하나님께서 지시해서 모세가 급하게 39, 40절에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탄 자들의 드렸던 놋 향로를 취하여 쳐서 제단을 싸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그 백성들의 자기에 대한 반란이 곧 하나님에 대한 반란이기 때문에 그걸 막는다고 막았지만 민수기 16장 47-49절에 보니까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 명이었더라.”

몇 명이 죽었느냐? 일만 사천 칠백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론의 지팡이와 다른 일반사람들의 지팡이의 차이를 두는 겁니다. 죽은 지팡이와 산 지팡이와의 차이를, 어느 쪽에 속하느냐를 보게 하는 겁니다.

8절에 보니까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났고 다른 지팡이에는 그냥 싹이 나지 않았어요. 이 말은요, 쉽게 말해서 내 몸에서, 이 머리 위에서 살구열매가 맺히는 것을 여러분 상상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제 머리가 다 빠졌다고, 다 보인다고 하는데 여러분 머리 위에 살구나무 나겠습니까? 안 나는게 정상이지요. 사람이 늙어 죽는 게 정상이라고 보지요.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요. 늙어죽는 것으로 일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늙어 죽는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이고 이것은, 너는 지옥 간다는 뜻이에요. 사적으로 지옥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집단 전체를 하나님께서 천국 보내준 이유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건, 하나님의 희생사건이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원망해도 그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쳐주는 겁니다. 집단적으로 쳐주는 거예요. 사적으로 하나하나 따지는 것이 아니고 네가 지금 어느 소속이냐, 언약 소속이냐 언약 바깥에 있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자기밖에 몰라요. 사적인 평가, 사적인 자기의 의미밖에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자가 피를 통해서 너 잘해라, 똑바로 해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너 죽는 것만 아까워하지 말고 너도 죽었지만 동시에 네가 부러워하는 이들도 다 죽었어. 모든 인간은 everybody 다 죽은 거야. 예수님 빼놓고 다 죽은 거야. 따라서 예수를 믿어라.” 그리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가 지금 하나님의 화목이 교회까지 파급되어야 되거든요. 아니면 교회 아닌 게 되어버려요. 교회라는 무당단체가 되어버린다고요. 사적인 구원받으려고 애쓴다면. 정말 교회라면 영안실 옆에 나란히 있는 시신끼리의 대화이어야 한다 그 말이지요.

“당신은 어쩌다 이렇게 죽었소?” “나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이걸 죽고 난 뒤에 대화하지 말고 살아 있을 때 대화하는 거예요. 누워서. “당신은 어떻게 죽어가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해서 “당신은 어떻게 죽어 가는데 천국을 갑니까?” 이 말이거든요 “나는 나 구원 얻으려고 교회 왔다가 이렇게 천국 갑니다. 이런 식으로 구원받으려고 온 그 짓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의 악마적인 근성인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둘 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어요. 노벨 문학상 두 번이나 후보에 올랐다가 이 책이 지독하게 하나님을 공격하는 책이 되어서, 20세기 중반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너무 지독하게 기독교를 공격하고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라서 노벨문학상 주기를 꺼려했어요. 스웨덴이 기독교 나라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당시에는 거부했는데 지금은 무신론적이고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대드는 책들이 아무 문학적이라고 해서 유명한 책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초반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며칠 후에 처음 내 어린 마음은 부두와 푸릇푸릇한 들판과 열매가 풍성한 넝쿨과 밀 빵과 어머니의 아름다운 미소 뒤에 있는 삶 전체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삶의 진짜 얼굴은 해골이었다.”

어린 마음에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풍경 보는 것 마다 다 예쁘고, 탐스럽고, 좋아 보이고, 신비롭고, 신기해보이고, 호기심이 나고, 저 골짜기까지 뛰어가보고 싶고, 저 끝에 무슨 환상의 세계가 있는가, 궁금해 하고 꿈을 꾸는 그런 어린 시절이었는데 터키 군대가 그리스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학살을 했거든요.

그 학살이 있고 난 뒤에 어린 마음이지만 삶의 진짜 얼굴은 해골이었다는 겁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만큼 충격이었던 겁니다. 여긴 어릴 때지만 보통사람은 이걸 나이 들어서 알아요. 아, 한평생 70이고, 80이고, 90이고 살아보니까 진짜 삶의 진짜 얼굴은 해골이었다는 것, 죽음이었다는 겁니다. 죽음을 기초로 해서 세상을 해석하지 않으면 세상은 환상으로 얼룩져서 거짓과 거짓으로만 보이는 겁니다.

그 죽음, 그 죽음을 알았다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 죽으면 죽지 뭐.’ 이런 식이에요. ‘죽는다는데 어쩌겠어? 변경이 안 되잖아. 끝.’ 그게 끝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간도, 심지어 해골이고 죽는다고 이해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아는 범주 내에서 기껏 모르겠다는 말을 대신 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 안’이라는, 진짜 제대로 된 교회지요,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내는가? 율법으로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예수님의 몸통에서 나오기 때문에. 율법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통이에요.

누가 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와서 묻습니다. 25절에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이야기할 때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고 물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27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게 두꺼운 전체 율법을 요약하면 딱 두 계명이 나오는 거예요. 두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 딱 그걸로 정리가 되는 겁니다. 거기서 전부 다 파생이 된다고 볼 수 있거든요.

주님께서 이렇게 그대로 행하라 하니까 그 사람이 29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하나님은 알겠는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할 때 그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어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웃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3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돼요.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천국 간다, 라고 했을 때에 이 율법사처럼 “나는 지금 이 땅에 살아 있는데 천국 가서 또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라는 식으로 질문을 하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율법이 주어지는 처음 자리로 그 사람을 다시 끄집어 당깁니다. 스타트 지점을 잘못잡고 있는 겁니다. 아까 기도하신 집사님처럼 내가 관찰하고 있는 시선으로부터 출발하면 안 되고 응시, 나를 쳐다보는 응시, 바라봄부터 해석이 출발을 해야 된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이 바라보는 것과 내가 태어나서 내가 살피는 세상하고 출발점 자체가 이게 잘못된 출발점이에요.

마태복음 7장에 아주 충격스러운 이야기가 나오지요. 22, 23절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요? 예수님 보기에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가 어떤 자냐 하면, 지금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몰라도 괜찮아요. 밥 먹고 살고, 돈 버는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이 건물 상가 화장실이 한파에 바짝 얼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래층 미장원에서 사람 불러서 얼어붙은 화장실을 녹였어요. 그게 죽을 일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이걸 여러분이 상상했습니까? 얼음이 얼었다(1). 관찰했잖아요. 내 시선으로. 그러면 어떻게 녹이느냐? 사람 불러서 녹이면 된다.(2) 돈 주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하고 있는 지식이지요. 그렇게 해서 드디어 얼음이 녹았다.(3) 그렇게 해서 내가 그 다음부터 화장실 사용하는데 별 지장 없다.(4)

그래서, 그래서,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지금 1번, 2번, 3번, 4번 가운데 뭐가 빠졌습니까? 하나님이 빠져버렸지요. 예수님이 빠져버렸다고요. 예수님 없이도, 예수님 관심두지 않더라도 나는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 그걸 우리부터 먼저……, 말로야 예수 안다고 하지요. 그거 말고, 그런 허세 말고, 실제 삶에 있어서 예수님을 모르면서도 살고 있는 식으로 살아가는 그런 자가 주님 보시기에 “네가 나를 몰랐잖아. 나도 너 몰라.”가 되는 거예요. 주님 만나봐야 알지요.

목사는 하는데, 목사 짓은 열심히 하는데 주님은 “나는 너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 그 사람의 모든 설교, 모든 강의는 자기 자신이 사적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차원에서 나오는 거예요. ‘나 이만하면 목사답지, 그지? 이만하면 내가 복음답지, 그지?’ 자기가 사적인 평가를 해대는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내가 이런 설교 한다는 것은 내가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하는 집단적인, 개성이 없고 모든 것이 보편화된 죽음의 자리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게 아니고 ‘이만하면 내가 인간답잖아. 이만하면 내가 목사답잖아.’라고 출발하니까 그게 주님하고, 십자가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입에는 십자가 달고 나오지만 본인은 십자가하고 상관없는 거예요, 본인은.

매사가 그래요. 아침에 눈만 뜨면 주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주님이여, 오늘 무슨 일을 시킬 겁니까? 오늘 어떤 일을 할까요? 오늘 포도 딸까요, 뭐할까요?’ 그걸 생각해……, 보셨겠지요, 물론. 그게 가증된 거지요. 가증된 거예요. 코로나 터지면 다 들통 나는 거예요. 코로나 이제 5단계 되어라. 들통 다 나는 겁니다. 나 사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 없습니다.

죽은 자여 일어나라, 깨어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도무지 나는 너 모른다. 그 것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어요. 성경 꽉 눌러 덮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전부 성경 속에 있는 말이니까. 성경 안보면 그만이잖아요. 성경 안보면! 성경 소리 안 들리는 곳으로 피하면 되잖아요.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라고 딱 시작합니다. 강도가 나쁘다. 그런 소리 하나도 없어요. 그냥 강도 만나서 죽게 되었어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그 강도만난 자를 보고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그냥 갔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일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일이 따로 있거든요. 그래서 그냥 간 거예요.

세 번째 사람,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냥 안 갔어요. 우리는 그 사마리아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야 됩니다. 왜 당신은 그냥 가던 길 안가십니까? 질문을 첫 번째 제사장, 두 번째 레위인보고 시비를 걸 것이 아니고 시비를 걸어야 되느냐 하면, 세 번째 사람을 보고 시비를 걸어야 돼요. “당신은 개인적인 볼일이 없습니까? 왜 가던 길 그냥 안가십니까? 그냥 가던 길 가세요. 남의 일 따지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이거 제사장이에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얻습니까?” 이거 레위인입니다. 내 구원이에요. 내 구원만 신경 쓰면 그만이에요. 그냥 하던 일이나 하세요. 그런데 여기 낯선 사건 벌어집니다. 무슨 사건이냐?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나는 하나도 안 아파요. 주님이 아팠지요. 나는 간지럽지도 않았어요. 멀쩡해요. 그러나 주님이 찔렸어요. 창에 찔리고 못에 찔렸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피와 물과 성령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하나님인 것을 증명한다고 요한일서 5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지요. 8절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걸로 증명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에서는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안 믿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중에 나타나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손금보라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뭐가 나와 있느냐? 구멍이 나와 있지요.

그리고 “네 손을 내 밀어서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손가락을 넣어보라는 것은 구멍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 구멍에 네 손가락을 한 번 넣어보라 그 말이지요. 이 구멍이 왜 생겼겠는가? 이 구멍이 네 구멍이냐 내 구멍이냐 그 말입니다. 이게 너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너를 대신 한 나에게는 일어났잖아요. 그러면 믿는다는 말은 뭐냐?

내가 구원받겠다고 하는 이 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 믿을 가치도 없다는 것을 본인이, 도마가 믿게 된 거예요. 도마가, 나는 나를 믿어서는 안 된다, 나의 평가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적인 평가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나를 대신한 분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을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 피 흘림 사건이라고 오늘 골로새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약은 끝났어요. 모든 정산은 처리된 겁니다. 누가 너를 꾀더냐? 십자가 피 말고 뭘 더 하라고 어느 목사가, 어떤 마귀가 여러분을 속이던가요? 속인 그 목사도 나쁘지만 본인이 스스로 속아 넘어간 적은 없습니까?

‘야, 이러다가, 복음 더 알았다가는 내 기 다 빼앗기겠다.’ 이런 식으로, ‘예수 믿다가 집구석 말아먹겠다.’ 하는 식으로, ‘내 인생 내가 지켜야 되는데 못 지키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감, 두려움,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절대로 달라지지 않는 나의 본성, 나 외에는 아무도 안 믿는다는 그러한 고집 같은 거요.

그러나 뭐 하나 걸쳐놓는 식으로 예수 하나 걸쳐놓으면 나중에 좋은 일 생기겠지, 라는 그러한 상투적인 어떤 도박행위, 도박하는 것도 아니고 뭐예요?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야 될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 안’이라는 다른 현실을 마련했습니다.

‘예수 안’이라는 현실은 뭐냐?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그 사건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집합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의 씨줄과 날줄로 온 세상이 율법 없이 만들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다 율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율법의 몸통이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에 의해서 시공간으로 꿰어져 있는 사건의 직물들, 사건의 면포, 그 직물에 의해서 나의 일생은 그 복음사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굴곡에서 거기서 우리 인생이라는 궤적이 발생되는 겁니다.

내가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고 내 주변에서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 십자가사건의 여파, 율법사건에 의해서 우리는 요모조모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말려 들어간 거예요. 유도당한 거예요. 사건에 의해서 유도당한 거예요. 내가 인생을 개척하는 게 아닙니다. 터진 사건이 어쩔 수 없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으로 몰아세운 거예요.

아침에 눈을 떠서 그 사건을 감지해야 돼요. 오늘도 무슨 사건으로 하여금 내가 그리스도를 못 잊게 만드는 사건을 또 주실 것인가? 그 사건을 여러분들이 직면해야 됩니다. 나는 이미 죽은 자고, 나는 이미 지옥가도 마땅한 것을 일깨워주는 사건,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성도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사건들이, 모든 사건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우리로 하여금 내 힘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의 힘으로 천국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농구를 할 때 농구선수가 골대에 공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골대가 공을 낚아채는 식으로 구원시키는 겁니다. 골대가, 죽은 철제 골대가 살아가지고 어서 오너라, 공을 자기 안으로 낚아채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라는, 이 개체라 하는 것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이냐? 우리 자신이 우리의 의가 빠져나가는 구멍노릇 하는 겁니다. ‘내가 이런 의, 이런 잘남, 이런 윤리도덕으로 천당 가려고 헛짓했구나.’ 하는 것이 빠져나가는 배출구 같은 역할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등장시키는 거예요.

내가 나 잘난 맛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세상에 내세우는 겁니다. 직장이 어떠하든, 나이가 어떠하든, 건강하냐 아니냐가 상관없고, 병원에 가든 말든, 어떤 자리에서도 인간은 자기 의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 복음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 하라고 주께서, 십자가 사건의 그 파동이 오늘날 자기 백성들을 끌어 모으는 그러한 사건의 여파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이 남들 보기에는 교회 인 듯, 교회 아닌 거 아니야, 하지만 진짜 교회, 교회인 듯 교회 아닌 교회 같은 교회, 그게 집단이지요. 그 집단 안에 하나님의 화목이 흐르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을 내 몸같이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물어야 돼요. “당신은 이 시간에 집구석에 앉아 있지 왜 교회에 나옵니까? 왜 가던 길로 안가십니까? 당신 잘했잖아요. 당신은 도움 받을 일, 잘난 일 할 줄 아는데, 내 몸 내가 챙기는 것 그것 당신 주특기잖아요, 왜 그 짓 안합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이 생산한 주님의 이웃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화목이 우리에까지 여파가 미쳐주신 그것이 감사합니다. ‘예수 안’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공간에서 모든 문제가, 구원받는 문제가 해결된 입장에서, 여유로운 입장에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에 대해서 할 소리 다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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