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난만 있음

아빠와 함께 2021. 2. 1. 08:44

고난만 있음

2021년 1월 31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24-25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의 이러한 자기 증거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좋게 들리지 않을 겁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나 안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고난’은 모든 자로부터 기피되는 상황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지켜내는 것이고 계속 ‘있음’에서 ‘있음’으로 키워나가는 겁니다. 하지만 고난은 빼앗는 것이고 파괴당한 경우를 뜻합니다. 곧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인간들은 고난에 대해 두려움을 가집니다. 고난은 예수님으로 끝내고 우리 자신은 넉넉한 평온함만 갖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사도의 입장은 비단 자기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다같이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구현이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예상도 못한 일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부정하기 위한 단체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 것을 추구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고난이 세상 때문에, 세상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은 진리의 시작은 ‘나의 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게 아니라 진리의 시작을 ‘창세 전’의 약속부터 시작합니다. 그 약속 안에 ‘십자가 사건’이 있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다윗의 자아 고백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실 일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실 그 일이 담겨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창세 전부터 말입니다. 이로서 이 세상의 시작은 그거 공허와 혼돈 뿐이어야 정상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사도 바울은 신중하게 인생을 산 것도 아니요 과욕없이 인생을 산 것도 아닙니다. 그는 피조물의 한계를 알고 살았습니다. 즉 인간은 ‘있음’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 곧 ‘공허하고 혼돈’해야 한다는 겁니다. 진정한 있음은 오직 ‘십자가 고난’ 뿐이어야 합니다.

즉 인간은 개별자로서의 ‘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고린도전서 12:14-17에 보면,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에게 있어 ‘나’라는 것은 ‘누구의 손’혹은 ‘누구의 코’, 혹은 ‘누구의 발’로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인하여 살아 생전에 성도는 미리 자신의 ‘마지막 장’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죽음’을 목숨 붙어있을 동안 목격하게 된 겁니다.

‘나’가 사라지고, 전에 ‘나’라는 여긴 그 자리에 다른 분이 차고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원래 인간의 자아는 악마로 인하여 생겼기에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극구 반발합니다. 행여 타인이 들어오더라도 자꾸만 양보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마지막까지 다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동안 과거생활이 ‘나로 인해’ 살던 생활입니다. 즉 인간들은 미래를 생각할 때, 과거 생활과 비교하면서 미래를 구상합니다. 자신이 미흡했거나 억울하거나 상실된 것을 미래의 삶에서 보충되기를 바라면서 미래를 구상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 미래란 곧 ‘나의 죽음 너머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나’가 상상도 못한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구상하는 모든 세상은 일단 ‘나의 영원함’을 전제로 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비록 하나님이라도 나를 얕잡아 보는 것은 도저히 용납하지를 않는 법입니다. 이게 악마의 정신입니다. 참으로 ‘나’가 없음을 아는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악마의 힘’으로 꽉차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마치 누출된 방사능의 세계 같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환상은 이처럼 근본이 ‘나 있음’으로 비롯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다에 눈 내리는 것처럼 내리는 쪽쪽 다 소멸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고난에 근거해서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을 땡처리합니다. 십자가 고난의 무게 달아서 구원하십니다. 곧 십자가 고난으로 인해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인해 빼앗기고 그 현장에 ‘값’만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 값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신에 꽉꽉 담았습니다. 이로서 창세 전부터 오늘날까지의 일관성에 사도 바울도 일부가 됩니다. 고난의 세계는 실은 이 땅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질서’입니다. 하지만 이 질서는 패턴을 갖고 있습니다. 고난에서부터 시작된 소용돌이가 온 각처에 다 퍼져있습니다.

이 고난은 오직 창세 전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만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로서 일방적 ‘선택’되었음이 인간들의 자아중심의 결정과 선택을 밀어버립니다. 덮어서 뭉개버립니다. 따라서 성도는 결코 선택받지 못한 불신자들을 상대로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버림받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고생으로 주님의 고난을 가로막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골 1장 24-25(고난만 있음)21013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24-25절입니다.

골로새서 1:24-25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사도바울에 있어서 고난 없는 사도바울은 사도바울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들어갔다가 또 나가고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은 줄곧 자기 안에 예수님의 남은 고난으로 꽉 채워진 것으로 자기 인생을 끝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 남은 고난으로 채워진 자기 몸을 뭐로 보느냐 하면, 그리스도 몸인 교회와 일치된다는 것을 교회의 하나의 particle, 부분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에게 채웠는데 이것이 교회됨의 표준형이라는 겁니다. 성도라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이 사도바울 나처럼 너희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채워져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됨과 지체가 하나의 동질성을 이룬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표준적인 고난자로 채택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우선 알아야 될 것은, 사도바울이라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인하여 그는 그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그걸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고난에 엮였다는 말은 쉽게 말해 이렇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의 전체 소용돌이 속에서 성도는 개개인이 서로 얽혀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어떤 패턴을 갖고 있는데 그 패턴이 고난이라는 이름의 패턴을, 모든 전체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사람, 어떤 성도를 끄집어내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다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교회 전체는 하나님의 질서,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자신의 할 일의 질서의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너는, 우리가 하나의 전체의 질서속의 일부가 된다면 그러면 너는 뭐냐, 라고 물을 수 있지요.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자기 몸 안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꽉 채우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뭐가 되느냐 하면, ‘없다’가 돼요. 나의 고유의 것은 없다, 가 되는 겁니다. 그 없다는 말을 여기 골로새서보다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4-20절 보게 되면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눈이다, 또는 코다, 입이다, 발이다, 하는 것은 뭐냐? 나 고유의 나라는 것은 이미 없어졌다는 이야기에요. 나를 대치하고 나를 대신하는 것은 다른 분이 가져간 거예요. 그 다른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니까 그리스도가 되시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전에 내가 나라고 여겼던 모든 것을 빼앗아가서 이제는 전에 나라고 여긴 것은 그리스도가 되고 나는 없어졌음을, 나는 그리스도에 붙음으로서 나로서 나는 없어졌음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나는 누구의 발이요, 누구의 손이요, 누구의 코요, 누구의 귀다, 이렇게 표현한다 그 말입니다.

‘누구의 나’는 ‘나’로 표현해서는 이게 반칙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누구의 발이요, 누구의 손으로 이야기해 줘야 되지 나는, 다른 말로 하면 자아지요, 자아는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에서는 용납이 될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내 것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그러면 이 세상에 진실로 있는 것이 뭐냐?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질서를 심판해버리고 하나의 그리스도로 통일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 말은, 이 세상 모든 것은 결국은 없어지는 거예요. 없고 있는 것은 고난만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무방해요. 이게 기니까 그것을 짧게 줄여서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만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려니 굉장히 어려운데 이렇게 설명해 봅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회한다고 광고 크게 냈어요. 세종문화회관 그 큰 건물에서 연주회를 하는데 벌써 티켓은 조기에 다 팔려버렸어요. 이제 관중들은 슬슬 자기 자리를 채웁니다. 그런데 좀 일찍 간 사람이 보니까 아직까지도 무대를 청소하고 있었어요. 물걸레질도 하고 코로나 때문에 의자 하나하나 다 소독제로 닦고 있는 청소용역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관중들은 진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피아니스트가 언제 피아노를 연주하는가, 딱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연주하느냐 하면, 조금 전까지 무대에서 물걸레질로 바닥을 닦던 그 사람이 청소복을 벗더니 그랜드피아노에 앉아서 연주를 하는 거예요. 조 성진, 조성진이라고 쇼팽대회 우상한 사람 있지요. 그 정도 돼야 세계적인 연주자지요. 조성진이 연주하더라는 말이지요.

그럼 연주하는 그 손가락은 무슨 손가락이냐? 조금 전까지 세종문화회관 더럽다고 물걸레질하고 청소하던 그 손이었던 거예요. 그 고난의 손, 더럽다고 때를 밀던 그 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거예요. 사람들은 뭘 기대했습니까? 청소하는 사람 따로 있고 피아노 치는 사람 따로 있다고 생각했지요. 피아노 치는 사람이 그렇게 피아노를 연주함으로 말미암아 세종문화회관 전체 어느 구석이라도 그 연주자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한 곳도 없잖아요.

이게 뭐냐? 이 세상은 예수님의 고난에 의해서 구원되기도 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입각해서 정당하게 저주받고 정당하게 불 심판 받아야 될 그 세상인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 영원히 있다는 것은 주님의 고난, 주님의 십자가사건이지요, 주님의 고난만 있고 나머지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없는 겁니다.

제가 아까 없다는 말을, 당신은 누구의 손입니까, 누구의 발입니까, 이렇게 묻는 식으로 없음이 형성된다 했지요. 당신은 누구의 코입니까, 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나다, 라고 하면 안돼요.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내 육체에 작렬한다. 그런 뜻으로 설명해도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그 고난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고 죽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에 내 육체에 채운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내 인생 한가운데서 나의 마지막 장을 만난다는 뜻이에요. 내가 나의 죽음을 일치감치 목격하게 되었다. 내 인생 살면서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데 내 죽음은 일치감치 목격한 거예요.

아, 내가 이렇게 잃어버려야 될 존재라는 것을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아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한테는 타인이지만 그 타인의 죽음 속에서 나의 죽음을 일치감치 만나는 거예요. 만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나는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없는 거예요. 자아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라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타인이 내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어떤 덩어리, 그게 나입니다. 나! 그게 나에요. 주님께서 이렇게 복음을 전할 때 쑥 들어오잖아요. 쑥 들어오면 우리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주님, 그 복음 내가 수용합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내가 그걸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 십자가 복음 죄용서 피 뿌림이 있어야 내가 천국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오늘 본문같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나의 남은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내 마지막 하나까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쳐들어온다. 이렇게 돼버리면 여기서 뭐냐? 주춤, 머뭇거림이 생겨요. ‘도대체 어디까지 양보해야 됩니까, 주여! 어디까지?’ 목에다가 십자가 목걸이 걸면 구원 받는다. 얼마나 쉽습니까? 목걸이 그거 얼마 한다고요. 한 5천원만 주면 사잖아요. 목걸이 걸고 다니면 구원받는다. 이게 너무너무 수월하지요. 구원받는데 사도신경 외우면 구원받는다. 그것은 좀 어렵겠다. 머리 안 좋은 사람들은.

교회 등록하는 거, 그건 쉽지요. 한 6개월 다니고 등록하면 되니까 할 수 있거든요. 그래가지고 구원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구원은 목걸이 들고 고백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아예 고백하는 나를 없애버려야 구원이 돼요. 그러니 이게 구원이라는 게 뭐 몇 마디 그럴싸한 성경구절 하나 모방해가지고 그거 흉내 낸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내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인생을 살면서 내 마지막 장을 만났다는 말은, 그 마지막 장 그 너머에서는 내가 있는 게 아니고 타인으로 여겼던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손으로서, 귀로서만 존재하기에 나는 없고 그리스도가 나를 차지하고 있고, 나는 그분의 손과 발로서, 신부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 마지막을 만나고 난 뒤에 그 뒤부터는 내가 없다면 이게 근원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근원적인 문제거든요.

조폭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 보게 되면 조폭들이 겁주려고 쇠파이프 들고서 꼭 주인공 하나 묶어놓고 입에 테이프 붙여놓고 있지요. 겁주기 위해서 쇠파이프로 낡은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장면이 나온다고요. 쇠 긁히는 소리가 지지지직, 나지요. 벽을 탕탕 치기도 하고요. 남은 고난이 우리에게 채워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이냐 하면, 내 삶을, 주님의 쇠막대기가 내 바닥을 긁어내는 거예요.

내 바닥을, 마지막 바닥을 긁어요. 지지직~ 지익~ 하면서. 기분 더러운 소리를 내면서 내 바닥을 긁어내는 겁니다. 우리는 내 바닥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것을 극히 싫어해요. 누가 쳐들어오면 배려해주고 뭐 이정도 맞이하지 더 쳐들어오면 도대체 어디까지 양보하나, 그래서 더 물러서면 나만의 것을 챙길 수 있을까, 하고 계산하잖아요.

그 계산하는 순간이 멈칫하는 순간이고 머뭇거리는 순간이에요. 그러면 나만의 것으로 내가 사는 재미를 느꼈는데 진정 내 재미를 느꼈던 그 나만의 것, 나만의 것이 진정 없었단 말인가? 주님은 우리보고 말합니다. “너는 바닥이야.” 그 바닥에 환상을 만든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 되는 환상, 소설을 쓰면서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그 환상은 바다에 눈 내리는 식이에요. 눈이, 폭설이 내리는데 육지에는 눈이 마구 쌓여도 바다에 한번 가보세요. 거기에 눈이 쌓입니까? 하나도 안 쌓이지요. 환상은 이처럼 거품이에요. 그냥 바닥을 감추는 용도에요. 내 바닥을 곱게 감추는 용도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나라는 자체가 없다니까요, 나라는 자체가!

오늘 본문에 경륜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경륜은 economy, 경제라는 뜻도 있지만 과정이라는 뜻이 있는데 경륜이라는 말은 처음의 것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거든요. 처음이 뭐냐 하면, 공허하고 혼돈스러웠어요. 이 말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고난이지요, 그리스도의 고난만 있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산도, 들도, 짹짹거리는 참새도 없고, 메뚜기도 없고, 낙타, 곰도 없고, 악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산도, 들도, 아무것도 없고, 지구도 없었어요. 그냥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 혼돈하고 공허할 뿐입니다. 그래야 환상이 아니에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자꾸 있음이 없음에 비해서 환상인 것을 모르고, 있음을 환상이라고 여기고 그걸 움켜쥐고 그걸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챙기려고 하니 자동적으로 모든 근심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과 공포 온갖 세상 것 다 찾아와요. 다 찾아온다고요. 내 것이 없는데. 내 것이 뭐 있어야 내가 내 걱정할 텐데. 애당초 내 것이 없잖아요. 내 것이 없다면, 정말 진짜 내 것 이것도 빼버리고 그냥 없다면 걱정근심 한다는 자체가 이게 뭔가 마귀가 환상을 노리고 나에게 찾아온 거예요.

언제 수요일인가 그런 예를 들었는데 이웃집 통닭을 훔쳐서 멀리 도망가서 거기다 양념 발라놓고 이것이 우리 집에서 만든 양념통닭이라고 내놓는 거예요. 옆집에서 훔친 닭인데. 주워온 것인데 주워온 그 통닭하나 거기다가 자기가 소스 만들어서, 양념 발라서 이게 내 통닭이다 내놓으니까 원래 주인이 아주 끈질기지요. 끝까지 찾아와서 “네 양념 통닭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거 원래 내꺼야.” 내꺼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내 거라고 여기기 때문에 평생 통해서 온갖 환상을 거기다 다 소스 바르듯이 심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원재료부터 날라 가버리니까 거기다 부어놓은 인생의 모든 공로가 같이 다 날라 가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버티지요. 버티는 거예요. 인간이 인생을 버티는 이유가요, 이게 내거기 때문에 버티는 거예요. 내 것이 여기 있다는 것 때문에 버티는 겁니다.

그래서 늘 계산하는 겁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양보해야 되고, 정말 다 주고나면 내가 즐길 수 있는 진짜 나의 나다움, 나만의 것으로 즐겼던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그것 때문에 염려하고 초조하고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9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이 통닭이야기가 나옵니다. 괜히 통닭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했잖아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내 것이라고 여기니까 여기서 내 것을 지켜야 되잖아요. 지켜야 사는 보람이 있지요.

애 둘 낳고 저 자식은 내 자식이다, 해야 자식에게 열심내고 키우는 그 보람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애당초 내 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 그게 착각이었다면, 남의 것을 훔쳤다면 우리가 구원받는 방법은 빼앗기는 것 외에 없지요. 우리가 순순히 주님께 내놓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빼앗아 가는데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해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 성도의 인생은 남는 것이 뭐만 남아야 되느냐 하면, 나가 남으면 안 되고요, 값이 남아야 돼요. 값이! 그 값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그 말이지요. ‘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이것 주고 악마로부터 환상에 빠졌던 나를 본래 주인 되신 주께서 가져가셨구나. 바꿔치기 했구나.’

지금 사도바울은 이것 때문에 자기가 선택되어서 너희들 앞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은 모든 성도의 이상형이에요. 모든 성도의 이상형인데 왜 우리는 사도바울의 이상형을 이상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피하는 의도가 강합니까?

전에 이야기했듯이 초등학교 애한테 장래 희망사항 1번 세종대왕, 2번 이 순신 장군, 3번 심 형래, 4번 퀴리 부인, 5번에 에디슨, 이런 식으로. 여기에 사도바울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초등학생은 아직 철딱서니 없다고 치고 교회에 문제를 내보지요. “당신의 이상형은 뭡니까?” “사도바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꽉 채웠기 때문에요.”

아, 참 제 평생에 이런 이야기 한 사람이 내 기억에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그런 일이 없어요. 교회에서 없다니까요, 교회에서. 왜냐하면 인간은 타고난 이단이에요.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 이단이거든요. 자기의 이상형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 자기의 과거에서 찾아요. 환상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현재를 자기의 과거와 비교하면서 마련하는 것이 환상이에요.

과거에 미흡된 것, 결핍된 것, 모자란 것, 과거의 억울하게 당한 것, 이런 것을 나의 미래에는 충분히 보상되기를 원한다. 그게 환상이에요 그게 뭐냐? 자아의 일관성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고난의 일관성이에요. 나의 일관성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일관성이에요. 이것이 우리 안에서 대결하고 있고 심벌즈처럼 두 악기가 빵 하고 부딪혔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환상이란 어디서 생기는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미래에, 과거의 내가 분통 원통 절통한 것들을 미래에 보상받기위해서 미래를 설정하거든요. 그 자체가 환상의 고리에요. 환상의 사슬이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의 그 이상형, 그리스도의 고난은 어디서 나왔는가?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져도 십자가 다 이루심만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 고난, 그것이 내가 미처 과거로서 생각 못했던 주께서 준비하신 미래다. 주께서 준비하신 나의 미래상이 먼저 성령을 통해서 인생 살면서 이 목숨 붙어 있는 한에서 미래가 먼저 나를 마중 나온 거예요. 들이닥친 거예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없으면 너는 성도가 아니라고 들이닥친 겁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유명 의상 디자이너라면 그리고 자기의 작품이 백화점이나 해외에서 고가로 팔린다면 얼마나 자부심이 대단하겠습니까? 앙드레김 같은 유명한 사람, 혹은 이 상봉이나 이런 사람들, 우리나라 유명디자이너들이 있지요.

그런데 작품 내놓아도 세월 지나니 안 팔리네요. 백화점에 내놓아도 안 되니까 아울렛에 내놓고 그래도 안 팔리니까 그 다음에는 옷을 무게로 달아서 땡 처리합니다. 그 모습을 디자이너가 봤을 때 ‘아, 내가 그 아이디어 끄집어낸다고 얼마나 고생했다고.’ 그렇게 하잖아요. 땡처리 된다고요.

오늘 아침에 운동을 하고 내려오는데 쓰레기통에 두꺼운 성경책이 있어요. 한글과 영어 합본된 그 성경책 그거 보면서 ‘그 귀한 예수님의 피로 쓴 성경책도 안 맞는 사람한테는 이게 쓰레기가 되는구나.’ 하나의 폐지로 무게 달아서 쓰레기처리 해버리지요. 제가 주워서 저 뒤에 책꽂이에 꽂아 놓았어요.

주께서 심판하실 때 고난의 무게 달아서 나머지는 땡 처리 해버립니다. 네가 이 땅에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도 않아요. 집사 장로 목사 필요 없어요. 그리스도 고난의 무게 달아서 땡 처리 한다고요. 왜? 주님의 자기 솜씨거든요. 주님의 고난은 자기 솜씨가 있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그 주님의 복음이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극구 막 강력하게 반발하지요. ‘주님의 고난으로 다 차지해버리면 내가 내 인생 살아가기 위해서 고생한 것 어디 있습니까? 내가 고생한 그 보람으로 사는데 내가 미쳤다고 고생했습니까? 내가 가정, 내 교회, 내 인생, 지금껏 이 정도라도 일궈놓은 것도 얼마나 수고하고 애썼습니까? 그런데 그걸 완전히 땡 처리해서 밀어붙여버리면 앞으로 난 어떻게 살지요? 난 무슨 재미로 살지요?’ 그렇게 강렬하게 반발할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다윗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22편 1절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편 22편 1절에 나오는 이 말씀이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외친 그 말씀이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나는 무엇이다. 나는 □다, 할 때 그 빈 자리에다 뭘 집어넣어야 되느냐 하면, 나는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서, 무슨 기능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떤 조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앞에 있고 그 뒤 네모를 채우는데 그게 뭐냐?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미 하나님과의 약속관계, 구원관계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그 성립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체험,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아무도 동의를 안 하는 것 같은데요. 새삼스럽게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된 자이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고생해서 인생 일궜다, 내 가정, 내 교회, 내 사업체 이렇게 잘 됐다, 그거를 네모로 채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라도 나라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창세전부터 선택되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택이라는 의미를 절실하게 잘 보여주는 대목이 사극에 나오는데 남원고을에 사또가 있지요. 사또성씨가 변씨입니다. 변 사또. 변 사또가 그 고을에서 기생들 다 불러모아놓았어요. 삼월이요, 춘심이요, 죽 나올 때 거기서 간택이라는 것이 있어요. 왕이 왕비를 간택하는 그 간택이지만 거창한 것 말고 그냥 남원고을만 두고 보면 간택은 뽑아내는 거예요. 뽑는 겁니다.

뽑을 때 뽑히지 않은 사람이 필히 등장해요. 뽑히지 않은 사람끼리, 자기들끼리 무슨 자랑하느냐 하면, 내 옷고름 어때, 내 노리개 어때, 내 머리 스타일 어때, 백날 자랑해도 그것은 이미 선택, 간택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은 뭐냐 하면, 십자가 지셨고……잘 기억해 놓으세요.

십자가 고난이 있었고, 그 다음에 무슨 작용이 있느냐 하면, 창세전에 아무것도 없을 때, 공허하고 혼돈스러울 때, 산도들도 없고 지구도 없고 태양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인간도 없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이 있었다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경륜이라는 말은 접혀진 것이 풀리는 것을 경륜이라 해요. 접혀져 있는 비밀이 하나둘씩 시간 따라서 풀리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공간중심이 아니고 시간중심이라니까요. 십자가는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안에 있다는 겁니다. 풀려나가는 겁니다. 풀려나가면 거기에 고난만 있고 그 고난을 증거 하기 위해서, 십자가 있고 그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증거자를 뽑는데 그게 간택현상이 일어나요. 선택을 한다고요.

그래서 선택받은 사람 중 하나가 사도바울이라는 말이지요. 제 말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불신자는 시기하거나 경쟁하거나의 대상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왜? 선택이 없어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런 기능이 없다고요. 다윗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이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가 있어요. 나가 있기 때문에 타인이 자기한테 들어오려면 본인이 선택한다고요.

‘내가 저 사람을 받아들일까? 받아들이는데 어느 선까지 받아들일까? 어느 선까지 받아들여야 내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 아니냐. 훅 들어오게 되면 나는 감당 못하지.’ 자꾸 나의 것, 나의 나다움으로 살았던 그 나다움을 절대로 우리는, 이 자아는 어떤 경우라도 놓치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사력을 다 합니다. 나는 내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공개적으로 이 근호 목사의 신학에 대해서, 몇 년 전에도 그런 게 있었고 작년에도 보면 그런 것이 또 올라와 있어요. 늘 평하는 이야기가, 이 근호 목사는 뭐 하나님이 죄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한다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악할 수가 있느냐,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해대는 거예요.

찾아보니 벌 써 십년 전인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십자가 마을에서 반박을 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의 이야기, 왜 이 근호 목사는 인간을 개무시하느냐, 이게 기분 나쁘다는 것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 주장은 결국 뭐냐? 개혁주의 신학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당시에 뭐라고 반박을 했는지 보니까 지금 해도 그렇게 반박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워요.

첫째는 뭐냐 하면, 개혁주의 신학이 이게 철학입니다. 그 사람이 저를 욕하는 게, 이 근호 목사는 철학나부랭이 짓을 한다는 거예요. 개혁주의 신학이 철학이에요. 왜냐하면 한국교회 모든 신학이 철학인 이유가, 나 있음부터 출발한다고요. 나, 여기 있는 나를 어떻게 천국에 보내서 천국에 있는 나 되게 하느냐. 거기 필요한 성경구절을 모조리 뽑아서 거기에 심어놓은 거예요.

내가 있어버리면 이게 철학이 된다고요. 그 안에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온갖 좋은 것 다 집어넣어도 이게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나 자체가 없어요. 사람이 바닥까지 내려가야되는데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 나를, 환상을 딱 걸쳐놓고 스톱, 여기까지 스톱, ‘신학이고 뭐고 성경이고 복음이고 나한테 허락 맡아. 내가 잘되면 믿어줄게.’ 여기서 스톱이 되고 말아요. 나를 뚫고 나 넘어서 안 간다고요.

다시 말해서, 내가 죽고 없는 그 마지막 장, 마지막 순간을 살아생전에 만나본적이 없어요. 나는 죽고 주어진 값만, 유월절 어린양의 피만 있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아직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 증거 하느냐? 멀쩡하게 내가 있으니까 백날 신학을 언급하고 성경구절 가져와도 누구 증거 하느냐? 나 잘났다, 를 증거 해버려요. 누가? 모든 한국교회 전체가 다, 전부 다!

마지막 때에, 지금 마지막 때라면 마지막 때 코로나를 하나님이 일으켰잖아요. 코로나를 피할 생각하지 말고 이게 내 마지막 모습이다, 하고 걸리면 돼요. 왜 걸려야 되느냐? 걸리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를 판단할 수 있는 나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어려운 말 하는 게 아닙니다. 철학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죽으면 내가 없어져요.

지금 그 말 하고 있는 겁니다. 일찍 죽자 그 말입니다. 숨 끊어질 때 죽어서 내가 어디 깔까, 하지 말고 살아 있으면서 내 죽음을 목격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내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게 얼마나 힘들다고!” 하지 말고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해요. 내가 얼마나 세상 사는 게 힘든지, 그거 자꾸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준 것은요, 줘놓고 버리기 위함이에요. “내 아버지여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줘놓고 빼앗아버리고 버리시는 거예요. 그걸 누가 했느냐?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서는 빼앗기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그것이 짱이다, 그게 최고다, 그게 성공이다 그 말이지요.

왜? 내 성공이 아니고 아버지의 약속한 바가 약속한 그대로 나타났으니까 그게 최고의 존재의 이유고 목적이다 그 말입니다. 내 것이 없어지는 게, 내가 없어져야 주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particle, 하나의 부분이 된다 그 말이지요. 주님의 이루신, 그 십자가의 고난으로 만들어진 그 보이지 않는 질서체제에서 우리는 손이나 발이라는 하나의 패턴으로, 고난의 패턴으로 담기고 실리고 거기에 이끌리고 당겨가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겁니다. 내가 없다고 여길 때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은 뭐냐? 이 세상에는 나도 없지만 너도 없어요. 내가 없으면 너도 없어요. 남한테 주눅 들고 눈치 볼 이유 없다고요. 없는 자가 잔소리하는 그게 뭐가 대단해요?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있는 게 뭐냐? 악마의 힘밖에 없어요. 악마의 힘은 우리 자아, 뒤를 뚫어가는 것을 극구 반대합니다.

그래서 악마가 십자가를 그렇게 싫어해요. 다 이루었다, 를 그렇게 싫어한다고요. 악마 이야기는 그겁니다. “네가 있잖아. 있으면 너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지. 있는 인간이, 네 인생에 네가 책임져야지. 네가 낳은 자식을 네가 책임져야지. 아비가 책임져야지.” 맨 날 책임이야 책임! 갑자기 흥분을 왜 하노.

교회 헌금 안 나오면 목사가 책임져야지, 이런 거요. 회사는 사장이 책임져야지, 네 인생인데 네가 책임져야지, 결국 소중한 것은 너고 남는 것은 너밖에 없어. 이게 과거에 얼마나 우리가 교육받고, 교육받기 이전에 우리 몸 자체도 타고난 이단이니까 그런 것만 들려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하고 비교하느냐? 불신자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간택되지 않고 선택되지 않은 사람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비교하니까 매사가 쫄고 있는 거예요. “강남의 아파트 사놨는데 딴 사람이 5억 더 줄 테니 팔아라, 해서 귀찮아서 5억 더 받고 팔았어.” 이런 이야기가 굉장히 사람 쫄게 만드는 겁니다. 전세 사는 사람이 무슨 강남에 집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쫄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 애는 학원도 안다니는데 전교 1등 한다. 이런 이야기 있잖아요. 간택 이야기, 선택 이야기 다 빠져버리고 <누가 누가 잘하나> 목요일에 오후 5시에 하는 kbs어린이 노래자랑 하듯이 그런 것만 계속해서 tv로, 인터넷으로, 휴대폰으로 모든 쏟아내는 것이 뭐냐? 방사능의 힘, 악마의 힘, 악마의 힘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멸망받기 전의 세계가 아주 발악을 합니다, 발악을!

그동안 신앙생활 뭐했습니까? 도대체 교회 왜 다닌 거예요? 결국 있는 것 잘해보려고 다닌 거예요. 그런데 뭐가 있어야 잘해볼 것이 있지요. 없는데요? 없는 인간이 무슨 책임을 져요? 뭐가 있어야 책임을 지지요. 사도가 신중하게 살았습니까? 사도가 과오 없이 살았습니까? 아니에요. 사도는 피조물의 한계를 알고 살았어요. 피조물의 한계.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인생 안 살았어요. 그냥 피조물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나의 한계에요, 나의 한계.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기독교도 사과를 해야 한다. ‘교회가 욕 얻어먹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런 소리 하는 것도 있고 또 반대로 ‘교회가 버텨야지. 예배를 해야지.’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코로나니 예배를 하니 마니 복잡한데 뭐가 문제입니까?”

답변을 해드렸어요. 문제는 뭐냐 하면, 기독교와 교회가 종교의 티를 낸다는 거예요. 환상을 자꾸 꾸미는 거예요. 기도, 전도, 예배, 전도, 선교, 교회 만들기, 자꾸 종교적인 어떤 데코레이션, 장식을 자꾸 하는 거예요. 장식을 해놓으니 그 장식이 아깝잖아요. 아까우니 못 버리는 거예요. 그걸 버리지를 못하는 거예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빼앗기는 중이다. 그렇게 살면 되거든요. 있어도 내가 있다, 하는 것도 바다에 눈 내리는 것처럼 내려와야 뭐 가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바닷물만 출렁거리지 아무것도 없다고요. 백날 뭐 했는데, 열심히 뭐 했는데, 아부하면서 고개 숙이면서 살아 보려고, 살아보려고 했는데 남는 것은 이 주름살, 점점 늙어가는 것, 죽어가는 것, 없어져 가는 것, 뭔가 빼앗겨 가는 것 그것밖에 없는 거예요.

이 자아가 진리를 뭉개고 있으니까 주께서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네 엉덩이 치워라” 치워보니까 거기에 선택이 나오고, 거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십자가라는 숨어 있는 질서가 있는 거예요. ‘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지체고, 그리스도의 손이고, 발이고, 코였구나. 누구로부터 이렇게 엮여져 있는 시간 시간들이구나.’

그것도 모르고 개별자, 나만의 것, 예쁜 나, 관리 잘하는 나, 착한 나, 맨 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근본마음은 ‘하나님이여, 저를 너무 얕보지 마소서.’ 맨 날 이런 마음이 깔려 있으면서도 그게 안 들키는 것처럼 여기면서 두리번거리고, 주님의 고난 이야기하면 ‘나도 못지않게 고생했습니다.’ 하고 주님이 고난 앞에 내 고생을 들이대면서 대결하고 주님의 일관성, 고난의 일관성속에 나의 일관성 가지고 훼방질하고 방해하고, 기껏 이야기하면 “그러면 나는 뭡니까?”

“이런 식으로 나는 뭡니까, 하는 너를 없애버릴 거야. 나는 너 없애버릴 거야.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못하도록. 나는 뭡니까, 하는 너까지 없애버릴 거야.” 교회도 없앨 거예요. 코로나는요, 사람 죽이려고 보내신 거예요. 그래서 걸려 죽으면 돼요. 원래 죽을 자니까. 안 걸려도 죽고 걸려도 죽는데!

마태복음 17장 5절에, 성경에 다 하나님의 진리가 나와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태양같이 빛나는 그 대목이거든요. 그 대목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명이 산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모세와 엘리야도 같이 변화되어서 있었습니다.

그게 환상이거든요. 그게 딱 지나가고 무슨 이야기가 들리느냐?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 진실로 영원히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내 아들만 존재하고 있다, 그것뿐이다. 너희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너희라는 존재는 저의 말을 들으면 돼요. 그러니까 주님의 요소가 나중에 십자가로 완성되거든 그 완성된 요소가 너희라는 껍데기 속에 그냥 들어오면 되는 거예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런데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내 말만 들어요. 왜? 최종적으로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남이 뭐라고 하면 참고로 할 뿐이지 마지막 결정은 내가 내린다는 겁니다. 왜? 내가 내 인생 최종적인 책임자기 때문에 천당 가고 지옥가고 이건 내가 선택한 결과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의 말을 끝까지 안 들어요. 어느 정도 하고 자꾸 거래하려고 합니다. “그 정도 와서 스톱해주세요. 더 들어오시면 내 자리가 없어집니다. 나는 내 자리 없으면 못 삽니다.” 이런 식으로, “그동안 살아온 것이 내 자리 때문에, 소박하나마 진짜 간당간당 죽을 똥 살 똥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내가 사는 이유는, 내 자리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그거 하나 희망 걸고 살아갑니다.” 라고 버티고 있었던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최근 영화 <소울>이라는 만화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가 주장하는 게 이거예요. 기독교도 이제 시답지 않고, 천주교나 불교도 그렇고 그럴 때 인간의 지혜로 끄집어내는 종교가 뭐겠느냐? 그 종교가 바로 재즈에요. 재즈, 흑인음악 재즈, 화음만 줘놓고 그 화음 안에서 자유롭게, 어떻게 살아도 편하게,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그러한 세상이 정말 우리가 원했던 착한 종교다. 우리가 원했던 진짜 종교다. 그게 소울이라는 그 만화영화의 주제입니다. 지금 상영하고 있어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재즈처럼 자기 편한 대로 살면 그게 인간의 최고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인간이 희망을 걸고 있는 이 시대 마지막 종교가 재즈다. 재즈라는 음악 안 해도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그러면서도 거기서 희망을 가지는 것, 내가 여기 있음에 희망을 갖는 것, 그것이 현재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종교라면 그러면 교회가 뭐냐? 천주교가 뭐냐? 불교가 뭐냐?

그 사람들의 희망에 맞춰준 거예요. “등록하시면 구원받습니다. 나머지는 마음대로 사세요. 코로나 겁이 납니까? 집에서 예배드리세요. 그냥 맘대로 하세요. 왜? 너는 소중하니까. 나도 소중하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없어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없어요. “어떻게 내 것을 몽땅, 조금도 남겨두지 않고 홀라당 다 빼앗아가서 아예 나를 없는 존재, 공허와 혼돈의 존재로 만드십니까?” 이런 고백 없어요.

깡패가 와서 쇠파이프를 콘크리트 바닥에 지지직 끌고 올 때 “시끄럽다 씨! 짜증 난다. 나는 내 바닥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고상하게 살아왔어. 선하게 살아왔다고. 누구 앞에서 나는 내 자랑, 내 의로움 떠벌이면 두 시간 세 시간 떠들 수 있어.”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게 우리 표준형입니까? 그게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형이에요? 자기 안에 자기 잘남과 의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요. 그게 무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까? 오히려 주님을 고난케 하는 악마의 힘으로 가득 차 있지요.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이미 죽음을 경험한 사람, 자기 죽음을 자기의 살아생전에 목격하고 죽음 그 너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주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2-27절입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곽 채우신 고난입니다. 사도바울이 증거 하는 그리스도 일꾼이란, 바로 이것은 미래에서 온 건데 주의 십자가 고난이 왜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모습으로만 드러내야 되는가? 그걸 그대로 나를 통해서 나의 기능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라고 할 수 있고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세상에 나가면 하루하루가 이미 다 이뤄진 거예요. 다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빼앗아가고 죽이려고 하시는 하나님, 그걸 찬미해야 됩니다.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그 값이 귀함을 위해서, 그 값의 귀함에 어떤 나의 공로가 훼방되지 않도록 내 것을 자꾸 빼앗아가고 끝까지, 나의 바닥까지 뚫고 오시는 주님의 그 사랑, 그것을 여러분 감사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목걸이 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편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악마적 본성을 저희들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에 합류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께서 선택해서 주의 것을 담은 그 자체가 구원인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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