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조건
2021년 1월 10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19-20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갈등에 시달립니다.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를 청산해서 자기 마음이 안정화되기를 원합니다. 자기 마음을 달래고 싶은 겁니다. 이런 의도에서 보면, 성경에서 ‘화해’, 즉 ‘좋게 지내자’라는 하나님의 제안에 마음 끌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화해란 우리 마음을 좋게 하시는게 아닙니다.
우리 자체를 우리가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화해입니다. 더 이상 성도는 자기 관리에 나설 필요가 없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화해’란 하나님과 인간간의 ‘화해’가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도리어 진정한 ‘화해’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선언하신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이들 인간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얼신거리지 않도록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듯이 예수님을 죽음 끝 너머로 넘겨버린 자들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앞장세워 ‘인간 존재’ 자체를 극한으로 밀어붙이십니다.
인간은 미처 모르겠지만 ‘인간 존재’ 자체가 수상하고 위험입니다. 인간들은, 왜 화해 작업에 자신들이 배제된 지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만족의 상태’는 오직 예수님께서 인간들로부터 밀려서 죽임을 당하므로서 성립된 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만족 상태’가득찬 것이 곧 ‘충만’입니다.
모든 ‘충만한 것’은 오로지 ‘예수 안’에만 적용됩니다. ‘예수 밖’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는 예수님을 밀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럽지 않고 만족으로 충만하지 않더라도 인간들은 전혀 사태에 개의치 않고 자기 즐거움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뭐라고 보느냐에 대해서 인간들은 전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3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진노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것만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외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로마서 3:23에 보면,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끝난 이야기입니다.
인간 규정에 관해서 인간들은 더는 군말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예수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생산된 자들 뿐입니다.
바로 이 작업이 구약 때부터 있었습니다. 다니엘 3:22-25에 보면,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불사형 집행 현장에 공무원이 있었다는 점을 유념합시다. 그들은 왕의 명령이 너무 엄했기에 다니엘 세 친구를 불속에 집어넣었는데 도리어 불이 이 집행관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세 친구는 불 속에서 살아 있었는데 거기에 4번째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즉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으로 다니엘 세 친구를 다루었던 겁니다. 말씀이 친히 그들 속에 들어오신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말씀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이해해도 인간들은 자신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자력으로 ‘예수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자꾸만 실익을 계산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이 들어와 버린 자들은 죽음보다 더 강력한 내부 환경이 마련되는 겁니다. 죽음과 비교하도록 말씀이 다루시게 됩니다. 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내부적으로 강렬한 반항을 하게 마련입니다. ‘절대적 주체’가 극렬한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히브리서 4:12-13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닭요리 재료가 되는 닭을 사정없이 토막내듯이 말씀이 뼛속까지 파고들어옵니다. 창세기 22:9-10에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아들인 이삭을 칼을 들이대면서 잡습니다. 죽어라고 칼을 꽂는 겁니다. 화해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잡을 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성사됩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시작해서 새로운 존재를 생산해내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을 함께 사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만족스러워하시는 천국백성입니다. 곧 죄로 인하여 성도의 육신은 이 땅의 생활에서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겁니다. 요한일서 5:18-19에 보면,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았기에 인간의 육신을 통해서 계속, 즉을 때까지 죄만 빠져나오는 겁니다. 이게 ‘말씀대로’입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유일한 폐쇄공간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만 상대됩니다. 그들이 광야를 통과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진노의 자녀’임을 알아야 했던 겁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이들과 같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나 자신의 측정하거나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게 하옵소서. 이미 예수님에게 종속된 존재임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0강-골 1장 19-20절(화해의 조건)21011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19-20절입니다.
골로새서 1:19-20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화해한다, 화목한다, 하는 것은 원수지간이 좋은 관계로 전환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남하고 싸우기를 원치 않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데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러한 보편적 화해는 현재 자기위주의 화해가 되겠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화해는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예수 안에만 화해가 있고 예수 바깥에는 화해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모든 완성이 예수 안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충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나머지 것을 제거하고 난 뒤에 이제는 그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제거된 상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상태에 가득 찬, 그리고 19절에 이미 그것을 아버지한테 재가 받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만족스럽다는 그러한 허가가 떨어진 거예요. 만족스러운 상태가 무슨 상태냐?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여기 설정된 겁니다. 우리 안이 아니고, 세상 안이 아니고, 세상 안에 있는 인간들 말고 따로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놓으시고 그 안에 들어가 있을 때만 하나님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시고 만족하는 충만한 완성의 상태가 그 세계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 밖에 있는 모든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화해되지 못한 자들이라고 규정되게 되겠지요. 그래서 그 ‘예수 안’이라는 충만한 상태가 어떤 식으로 완성이 되느냐 하면, 20절에 보면, 그의 십자가 피로 화평을 이루었다, 했거든요. 십자가 피로.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은 예수 안에 들어올 수도 없고 들어가지도 못한 상태가 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만족스런 상태가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예수 ‘십자가 피로’ 할 때 그 예수님 십자가 피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을 오해해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해서 그들은 소극적으로 대처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예수님의 피 입니다. 십자가 이벤트 벌인 것이 아니고 거기서 예수님이라는 분이 제거되었거든요. 사형 당했다는 말입니다. “너는 인간이라고 칠 수가 없어. 우리 인간이라는 이 공동체 집단에 있으면 안 돼.” 라고 제거를 했다는 말이지요.
그 제거하는데 인간들은 성공한 거예요. 성사시킨 겁니다. 이로써 ‘예수 안’과 그리고 인간세계는 끊어져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 필요 없다고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그 제거된 그분이 따로이 ‘예수 안’이라는 특정 공간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세상에서 ‘예수 안’으로 넘어갈 수 있는, 들어갈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이 말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는 대상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 말입니다. 성경에서 화목, 화평, 나오니까 사람들은 귀가 솔깃 해가지고 맘속에 있는 갈등 같은 것, 파도 같은 것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를 달래는 용도로서 하나님의 화목을 자꾸 취득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들은 지금 무엇이 아주 심각한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라는 것은 생각 안하고 자기 맘 달래기에 급급해가지고 하나님께 잘 보이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화해해가지고 좋은 관계로 설정해 줄 것처럼 그렇게 성급하게 나섭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은, 너는 신앙인 흉내 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본질자체가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네가 신앙이랍시고 ……척, ……척, ……척, 해도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거리를 더욱더 내비치는 것 밖에 안돼요. 모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짓거리밖에 안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게.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맘을 나쁘게 먹어서가 아니라 본질상 진노유발자에요. 본질상! 자기 본질을 자기가 어떻게 합니까? 본질이 그건데. 예수님 떠나 보내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 하면 주께서 봐주십니까? 우리 조상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나중에 잘못됐다, 해서 아담이나 그 후손들이 스카치 테이프가지고 선악과 따먹고 남아 있는 그것을 나무에 다시 붙이면 그것이 온전한 선악과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어도 “하나님, 우리 인간이 뭘 알겠습니까? 그냥 실수 했다 치고 봐줘서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화해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나님에게 요청하고 싶고 자꾸 기도하고 싶지만 충만이라는 뜻은 뭐냐? 이미 하나님의 재가가 예수님 십자가 피에 근거해서만, 하나님이 그래, 고개 끄덕이면서 “됐어. 끝났어. 음, 모든 것은 게임오버, 끝났어. 그래. 만족해.”라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피로만 가능한 거예요.
이미 일은 완전히 끝난 겁니다. 어떤 노력을 해서 예수 안에 들어갈 수 없어요. 노력한다는 그 자체가 진노유발자가 내뱉는 그 진노 받을 모습, 진노 받을 짓만 계속 할 뿐입니다. 그래서 충만이라는 말, 완료, 완성했다는 말이지요.
충만, 그 다음에 가득 찬 것, 하나님이 원하는 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 그것은 바로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만 성립되고, 십자가피로 화평했다는 말은 그 공간을 조사해보니까 거기가 왜 만족스럽고, 왜 화목이 되고, 화평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관계가 모두 해소되어서 사랑으로 넘치느냐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피로 십자가의 피로 만 거기에 새로운 본질이 갖춰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물, 그리고 하늘에 있는 것들, 천사들이지요, 모든 것을 새롭게 재정립하고 재배치하고 구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화해와 화목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이걸 알아야 돼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분명히 언급을 한 그 일이 따로이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마련하게 된 이유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느냐? 그 점이 중요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극단으로 밀어붙입니다. 밀어붙이니까 거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십자가 피가 예수님죽음이지요, 예수님을 죽이는 그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렬한 마지막 행위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죽이는 그 일로 모든 것이 다 드러났어요.
그렇다면 인간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고요. 그러면 예수 안이라는 그 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면, 죽음보다 더 강력한 힘이 발휘되는 공간입니다. 죽음보다 더 강력한 공간, 그 공간이 바로 ‘예수 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없애버릴 때 “이제는 예수 이야기하지 마라. 예수라는 존재는 사라졌다.”라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알려주기를 “예수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고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어떤 힘으로서 자기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떤 강력한 힘으로서. 그 힘을 우리가 어떻게 포착하고 느낄 수가 있느냐 하면, 예수바깥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시켜주는 식의 강력한 힘이 우리에게 작용할 때 이 세상 말고 ‘예수 안’이라는 다른 공간이 따로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다니엘 3장에 보게 되면, 거기 다니엘 세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인간들이 인간을 다룰 때 가장 극한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은 내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린다, 하는 그 죽음이거든요. 그 죽음을 실제로 실습 당하듯이 당한 인생이 다니엘 세 친구입니다. 국가가 법으로 정해서 금 신상에게 절하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상이기 때문에 절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다니엘 세 친구가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 세 친구가 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는데 그 처벌이 뭐냐?
처단하는 사람조차 가장 무서운 상황을 다니엘 세 친구는 그걸 몸소 받아내는 거예요. 이점이 상당히 함축적이고 중요한 겁니다. 본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을 상대에게 다 덮어씌우는 거예요. 본인에게 무서운 것을. 사람이 남에게 욕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이게 현실이 되는 상황이 내게 가장 무서운 상황이라는 것을, 그걸 본인이 구성하고 구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 구상한 것을 그냥 입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내뱉는 것 그게 욕입니다.
“너 저주 받아라.” 이 말은 “나는 싫어. 저주받는 것이.” 자기한테 이런 일은 안했으면 하는 그것을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퍼붓는 거예요. 다니엘 세 친구가 그냥 단순하게 불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 다니엘 세 친구를 빼놓고 나머지는 무엇에 두렵다? 그냥 곱게 죽는 것은 안 두려워요. 불속에, 포항제철 용광로 속에……, 포항제철 안 가봤지요?
포항제철 용광로 속에 들어가자마자 녹아버리는 그 용광로, 물론 터미네이터는 손가락 가지고 I will be back,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일반인들은 그게 안 되거든요. 그 무서운, ‘정말 죽을 때도 저렇게 죽는다면 진저리나. 진저리쳐져. 나는 죽더라도 저렇게 죽기는 싫어.’ 할 정도로 싫어하는 그런 죽음.
원래 자살을 해도 마포대교, 겨울에는 거기서 잘 안 죽어요. 떨어지면 아파. 죽을 때 얼음이 라서 거기 떨어지면 아파요. 그냥 퐁당 잠겨서 곱게 죽고 싶지요. 겨울에 떨어져 보세요. 멍 다 들고 아파서 죽잖아요. 그렇게 죽기는 싫어요. 죽어도 자리 봐가면서 죽고 싶은 거예요.
불속에 그들이 들어갈 때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공무원들이 등장합니다. 공무원들 잘 들어야 돼요. 다니엘 3장 22절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왕의 명령, 이걸 요즘말로 달리 하면 문재인의 명령이라 해도 돼요. 왕의 명령이 엄하고, 정 세균 국무총리의 명령이라 생각해도 돼요.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여기 붙든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공무원들이에요. 공직에 있는 사람들, 이 사람은 줄을 잘못 섰습니다. 줄을 잘못 섰어요. 줄 잘못섰다는 것이 뒤에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풀무불에 떨어졌거든요. 떨어지고, 25절에 보니까 분명히 결박된 채로 들어갔는데 그 포승줄이 다 풀리고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않았어요.
분명히 세 명 집어넣었는데 그 불속에서, 사망 속에서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절대로 저 세계는 나는 들어가면 안 돼.’라고 벌벌 떨었던 그 세계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네 번째 사람, 3+1. 마트 세일해도 그만큼은 안줘요. 3+1.
십자가의 피라는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겁니다. 인간이 가장 일어나지 않았으면, 나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 공포스러운 상황이 집약되어서 보여준 사건이 십자가사건이고 그 십자가사건 너머로 예수님을 떠밀어 버린 거예요. “가거라. 멀리. 다시 돌아오지 말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재수 없다.”
재수 없다고 떠밀어버린 그 세계를 ‘예수 안’이라고, in christos, 예수 안의 세계에요. 그 안의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천국입니다. 만족스러운 상황, 다른 천국은, 다른 화목 된 상황은 없습니다. 네 번째 사람하고 너울너울 춤을 추는데, 제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지만 떠밀었던, 국가법의 명령에 의해서 떠밀었던 그 공직자, 다니엘 세 친구를 붙들었던 교도소 공무원들은 어디 갔습니까?
타 죽었어요. 줄 잘못 선거예요. 죽는 길을 본인은 사는 길로 여겼던 겁니다. 좁은 길로 가야 영생인데 넓은 길로 간 거예요. 그게 사는 길이 아닌데, 죽는 길인데. 그런데 이 다니엘 세 친구는 꼭 불속에 들어가기를 어릴 때부터 고대한 것은 아니고, 다니엘 세 친구의 특징은 그들이 말씀을 지킨 게 아닙니다.
말씀이 그들 안에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네 번째 사람, 장차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네 번째 사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거든요.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미리 공작을 한 거예요. 다니엘 세 친구에게 공작을 해서 다니엘 세 친구가 말씀 안에 이미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게 ‘말씀 안’, 그 말씀이 완성되고 화해가 되면 그게 ‘예수 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 안에 들어온 사람과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이에요. 말씀을 분해하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말씀을 깨작깨작 건드리면서 말씀을 믿을까 말까, 믿을까 말까, 저거 믿으면 천당 가는데, 만약에 안 믿으면 손해 아닌가, 이렇게 재기나 하는 사람, 말씀을 하나의 객관화 시킨 사람.
객관화 시키면 자기는 절대적주체가 되거든요. 절대적 주체를 놓치지 않고 객관화시켜서 저거 믿으면 내가 어느 정도 이익이 오는가를 늘 통박을 굴리는 사람, 이런 사람은 공무원입니다. 다니엘 세 친구와 관련된 공무원들이에요.
십자가 안에, ‘예수 안’에 들어서게 되면 두 가지가소멸돼요. 하나는 뭐냐? 나와 너가 소멸돼요. 나 너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너가 있을 경우에나 나가 생기거든요. 나, 너, 라는 것, 절대적 주체와 절대적객체가. 내가 선택한 객체가 없어요. 소멸되고. 왜냐하면 우리는 그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종속되기 때문에 따로이 내가 선택한 너, 내가 선택한 나, 내가 지킬 나가 없어져요
또 하나는 뭐냐? 내가 나를 평가하거나 판단하거나 나를 측량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측량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이게 일생 내내 스트레스가 돼버려요.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해도 안 믿어요.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양심대로 살면 되지 않습니까, 바르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맨 날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데, 본질상!
인간 자체가, 인간이, 하나님이 뭘 원하는지를 알려고 한다면 인간은 자기가 여기 있음이 처음이 아니고 내가 있기 전에 무슨 일이 먼저 일어났는가를 그것을 봐야 돼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정녕 죽으리라, 했을 때 하나님이 만족스럽다는 것은 선악의 지식이 없는 상태가 만족스러운 상태거든요.
따라서 예수 안에 들어와 놓고도 자기를 판단하고, 측량하고, 계산하고, 나는 잘했을까, 못했을까, 나와 너, 또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쓴다면 이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부터 출발한 논리지 처음부터 하나님이 뭘 원했는가, 부터 시작하지 않은 그러한 생각이에요. 처음부터 인간은 따먹지 말라, 에 종속되었고 생명나무는 따먹어라, 에 종속된 겁니다.
절대적 주체를 가질 이유가 없다고요. 내가 따먹을까요, 말까요, 본인이 생각할 필요 없다고요. 따먹지 말라, 가 찾아오고 생명나무 따먹고 영생 얻어라, 가 찾아오게 되면 그게 그냥 우리의 존재이유가 그걸로 충만한 겁니다. 가득 찬 거예요. 더 이상 따로이 내 자리를 만들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 안’에는 내 자리가 없는 겁니다.
이에 얼마나 뻔뻔스러운 이야기인지. 십자가에 예수님 달릴 때 강도 둘도 같이 달렸는데 구원받은 강도는 참으로 세계 뻔뻔스러움 대회 1등할 거예요. 자기가 그동안 한 짓거리, 자기가 다른 가정들에게 한 짓거리를 생각해 보세요. 그래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 나라 임할 때, 천국 갈 때 저 생각해 달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당신에게 종속되고 싶어요.” 다시 말해서 “지금껏 내가 왔던 그 나를 이제는 놓고 싶습니다. 내가 지키고 싶은 나를 당신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나 이제 그만 놔 버리겠습니다. 중력에 그냥 떨어지도록 그냥 놔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강도를 했든지 강도를 잡는 경찰이 되든지 그것도 이제 다 귀찮아요. “당신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만 있고, 예수님이 이루신 나라만 있으면 되지 따로이 내가 내 살림 따로 챙길, 독립할 생각 없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지옥 간 강도는 뭐냐 하면, 계속해서 말씀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절대적 주체가 있고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객체로 본 거예요. “당신이 나를 여기서, 이 십자가에서 내려주면 믿을지 말지는 그 때가서 내가 한번 고려해볼게.” 그러고 있는 거예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하나님의 창세기의 그 결정을 지금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살아보면 좋은 날이 있겠지, 하는데 그런 논리는 없어요. 살아도 안살아도 관계없어요. 태어나서 16개월 만에 아빠엄마 손에 죽어도 마찬가지에요. 태어나서 얼마를 살던 간에 인간이 살면서 뭘 했느냐는 주께서는 물을 맘도 없고요. 물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뭘 해봐야 구차한 변명, 지저분한 변명밖에 뭐가 나오겠습니까? 아무것도 안 나오지요. ‘테세우스의 역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 그 괴물을 죽인 옛날 아테네, 기원전 6-7세기의 신화에 나오는 영웅이거든요. 테세우스의 배가 아테네 항구에 딱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그동안 괴롭혀 왔던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죽였던 그걸 기념하고 싶어서 그 배를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를 보존하려는데 세월 따라 배가 계속 상하잖아요. 그래서 나무널빤지 상한 것 떼 내고 다시 새 널빤지로 갈아입히고, 노도 바꾸고, 돛대도 바꾸고, 이렇게 바꾸다 보니 원래의 그 테세우스의 배는 없어지고 전부 다 수리한 배만 있을 때 ‘그게 테세우스의 배냐, 아니냐?’의 문제, 그게 테세우스 배의 역설이라는 겁니다.
그 말은, 인간의 신체가 7년마다 완전히 다 업셑 돼요. 리셑 됩니다. 모든 것, 피부터 해서 7년마다 세포가 조금씩 다 바뀌어요. 내 것이 없다니까요. 내 것이, 나의 신체가 없는 거예요. 나의 신체도 없는데 나라는 자아성, 아이덴티티, 정체성은 어디서 온 겁니까? 이것은 우기는 거예요. 억지지요. 신체는 변화되어서 바뀌는데 나는 안 바뀌네요. 이거 너무나 고집스러움 아닙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거울 앞에 비취는 그걸 나라고 여길 경우에 그것은 내가 일방적으로 거울 앞에 비췬 지금 모습의 거울이지 내일되면 또 다른 모습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한평생 허송세월 다 보내고 있는 겁니다. 본질상, 본질적인 문제는 내가 관찰하고, 측량하고, 연구하고, 관찰하고, 탐구한다고 내 것이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이 순간에 관찰하고 측량해도 이것은 2021년도 1월 10일 이 때 관찰한 것이고 내일 되면 내일 관찰한 것이 또 바뀐다고요. 십년 뒤에 바뀌어요. 치매 걸려서 또 바뀌어요. 자식도 못 알아봐요. 그 때는 “누구세요, 아저씨?” 그러고 있다 그 말이지요. 옛날에 알았던 나라는 것은 벌써 다 날라 가버렸어요.
내 기억과 함께 다 날라 가버렸어요.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보고 믿으라고 하나님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변화를 주고, 너의 진실과 본 모습은 네가 아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내가 알고 있는 거예요. 믿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 믿음도 하나님께서 거절합니다. 성경에서 화목이라는 말만 나오면 사람들이 자기 잘되기 위해서 화목을 거론하는 경향이 굉장히 많아요.
심지어는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옥도 없고 천국도 없고 모든 사람 대자대비해서, 이게 불교이론이거든요, 대자대비 하셔서 모든 것을 다 용납하고 받아주신다. 여호와의 증인도 그런 주장하잖아요.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고 넘쳐가지고 지옥이라는 말은 겁주려고 하는 말이고 사실은 지옥은 없고, 하나님은 모든 세계, 자기가 만든 인간을 자기 자녀로 삼아서 다 받아주시기 때문에 결국은 다 구원된다는 거예요.
천주교도 마찬가지지요. 살아 있을 때 돈 번다고 바빠서 예수 잘 못 믿고 성당 갈 시간이 없었던 그런 사람,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겨서 사랑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불쌍히 여겨서 죽고 난 뒤에는 패자부활전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줘요. 그게 연옥설이라는 겁니다. 네가 고생하면 정신 안 차리겠나.
고생해도 세상만큼 고생하는 데가 어디 있어요? 전 국민의 환자화 다 되어버렸는데요 전 국민이 환자 아닙니까? 다 마스크 쓰고. 이것보다 더 큰 고생이 어디 있어요? 과연 하나님께서 사랑이 너무나 많아서 모든 인간을 예수 안 믿어도 다 천국 보내준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교회에 사람 끌어 모으려고, 사람 끌어 모으려고 그 짓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성경을 도대체 얼마나 가리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사도행전 24장 15절에 사도바울이 이렇게 설교합니다.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의인과 악인의 부활, 악인의 부활.
요한복음 5장에도 나오지요. 28. 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악인, 지옥 갈 사람들은 지옥 가도록 그렇게 만든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쓴 편지 데살로니가후서 1장 7-10절에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뭐? 모든 사람을 화목하게 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고요? 사도바울은 그런 조로 이야기한 적 없어요. 하나님의 화목, 하나님과의 친화,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정상화되었다는 것은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만 해당돼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세상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 안에서만 모든 것이 리셑 되어서 충만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만.
자,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어떻게 나밖에 모르는, 어떻게 절대적 주체를 갖고 있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가, 어떻게 나만 챙기고 있는 나가, 죽는 순간까지 나만 챙기는 나가 어떻게 예수 안으로 이동할 수 있느냐? 그 이동문제가 거론되지요. 이동문제에 대해서 성경 창세기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이동문제에 대해서 나와 있어요. 창세기 22장 9절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잡습니다. 9, 10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기에 칼 나옵니다. 칼, 칼이 나와요. 자기 아들을 놓고,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향하여, 칼이지요, 나이프지요, 칼로 찌르는 겁니다. 이게 아버지가 하는 일이에요.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한 칼날이에요. 여러분, 닭요리 손질할 때 처음에는 닭 한 마리가 통일체, 개별적 단위체로 되어서 닭이 돌아다니지요.
그거 한 시간도 안 되어서, 30분만 되어도 이미 닭은 뜨거운 물속에서 완전히 온탕에 들어가서 욕조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털은 다 뽑히고 벌거벗긴 채로 들어가 있지요. 30분도 안 지나서 양념통닭 되어서 다 나오지요. 손질할 때 닭다리, 날개, 전부 다 찢어버립니다. 아예 형체를 없애버리잖아요, 형체를!
하나님께서 이 나라는 형체를 없애버려요. 칼로 찢어서. 난도질까지는 아니지만 모든 것을 조각조각 내버리는 겁니다. 그 칼, 그 말씀의 칼인데 히브리서 4장 1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뼈 속까지 주님의 그 날카로운 칼날이 거기에 도달되고 도착되는 겁니다. 꽂혀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마지막 거기에 꽂히면 우리는 극렬하게 말씀에 반발하면서 도망치지요. 계속해서 도망칠 때 무엇을 보따리에 싸서 도망치느냐 하면 ‘나는 다답다. 나는 나다워야 돼. 나라는 것은 중요한 거야.’라고 하면서 계속 도망치는 거예요.
“이것까지는 들어오지 마소서. 잘 해드릴게요.” 제가 십일조 드리고, 헌금 다 하고, 예배 충성하고 순종할 테니까 제발 나의 깊숙한 그 나만의 공간만큼은 칼날이 째고 들어오지 않게 해달라고 계속 도망치는 겁니다. 극력한 반발, 반항, 이게 뭡니까? 살아 있는 마귀새끼지요. 퍼덕거리는 미꾸라지처럼 마지막 남아 있는 미꾸라지, 자아, 절대적 주체, 쉽게 말해서 내가 곧 신이라고.
말씀의 칼날은 그걸 노리고 갑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들어오지 마세요. 들어오지 마세요.” 도망칩니다. 마스크 쓰고 도망쳐요. “들어오지 마세요.” “너 죽인다.” “들어오지 마세요.” 결국은 우리가 지뢰를 밟아 꿈틀하듯이 우리가 끝에는 “더 이상 그렇다면 나도 참지 못하지요.”라고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를 모독하게 됩니다.
이게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구현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악마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깨물어 버리는, 깨무는 그러한 요소가 우리 안에, 자아 안에 그게 들어 있었던 겁니다. “모든 것을 용서해도 나를 건드리면 나도 아무리 참을 인(忍)자 세 개, 천개라 해도 나를 건드리면 나도 못 참습니다.” 라는 것이 나올 때까지, 그게 나올 때까지 십자가를 깨물어버리지요
교회 역사가운데 그런 인물들이 있는데 그런 인물 중 하나가 잔느 귀용이라고 봐요. 토마스 아 켐피스, 이런 사람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신앙 좋다고 추앙받는 사람의 특징은 내가 보기에는 가장 악마적인 자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잔느 귀용, 토마스 아 캠피스, 우리나라의 한 경직 목사, 주 기철 목사가 되는 이유는 얼추 하면 나도 따라잡을 것 같은 하나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는 안 돼. 왜? 너무 심했어.” 예수는 너무 심해서 못 따라잡고 예수 믿는 사람 중에서 대빵,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가장 믿음 좋은 사람, 대빵, 그거 건드리면 돌멩이 맞는 대빵 있잖아요. 칼빈, 루터, 이런 사람들.
인간으로부터 추앙받는 자체가 악마적 요소로서 가득 찼다고 보면 돼요. 모든 것을 헌신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 문둥병자가 씻은 그 물까지 마시는 그 데미안이라는 신부, 이런 사람들. 자기는 의사면서도 남수단에 가서 대장암 걸려가면서 ‘울지 마 톤즈’ 이런 사람들.
평생을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외쳤던 김 수환 추기경 같은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 하나님의 진노의 세계, 하나님의 저주의 세계에서 추앙받는 사람들 있잖아요. 20년 전인가, 30년 전에 애들에게 제일 추앙받는 사람 1등이 세종대왕, 2등이 이 순신, 3등은 조금 있다 이야기하고 4등이 퀴리 부인, 5등이 에디슨입니다. 3등은 심 형래. 요새 같으면 3등에 손 흥민이 들어갈 거예요.
나의 나다움, 이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걸로 채우는 거예요. bts 같은 걸로. 나의 나다움은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내가 끌리는 것을 모두 담은 나의 나다움. 예수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데,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인정은 해주겠는데 제발 이것만큼은 좀 안 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마지막 협상과 타협에 나서지요. 거기서 나오는 말이 뭐냐? 우리 좋게 화해합시다.
아브라함은 사정없이, 칼날을 사정없이 자기 아들에게 때립니다. 그게 뭐냐?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을 죽이는 겁니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빠져야 돼요. 왜? 모든 인간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데 동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화해대상이 안됩니다. 인간은 빠지고 화해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사건으로 만들어내요.
어떤 사건?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는 사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사이가 먼저 화해가 정립이 되어야 돼요. 그게 바로 부활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시킴으로서 이제는 내 아들과 좋은 관계가 되었다는 겁니다.
로마서 3장 23절 읽어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본질적으로 진노의 자식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영광에 이르는 요소가 하나도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인간은 배제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어떤 폐쇄 공간, 완전히 폐쇄된 공간이 따로 만들어졌어요. ‘예수 안’에서만 뭔가 일이 만들어지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제물의 여파, 화목제물의 효과에 의해서 오직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천국,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충만한 그 나라는 ‘예수 안’밖에 없습니다. 다른 세계는 없어요. 그래서 내 안에서 ‘예수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가설 수는 없고요. 집요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칼날이 되어서 우리를 닭 손질 하듯이 손질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극렬한 반항을 내 보내면서 이것은 봐 주세요, 이것은 내가 정들었던 곳인데, 여기는 내 추억이 깃든 곳인데……, 계속 내빼고 도망치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은 경상도 남자같이 “너 잡히면 죽는다!” 이래가지고 끝까지, 끝까지 따라와 주시는 이 사랑, 이러한 하나님의 폐쇄공간을 이 땅에 생산해 내는 겁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돼요. 누가 하나님의 화해대상인가? 화해대상에서의 우리는 하나님의 새롭게 생산된 우리가 하나님의 화해대상이 됩니다. ‘우리’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거지요. 우리를 만들어 낼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출발점이 되어서 그 사건으로부터 새로 시작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 화목제물, 예수님의 피로부터 새롭게 생산된 자가 등장했으니 그들이 ‘우리’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오늘 본문의 그 우리가 그 우리잖아요. 아무나 우리가 안 됩니다. 너희, 또는 우리.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했는데 이 폐쇄적인 이 공간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민수기에 나오는데요. 민수기는 얼마나 폐쇄적인지, 민수기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라고 하는 인간족속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그들이 따로 분리되어서 이제는 그들만, 그들 생각에는 우리지요, 우리만 있는 그런 집단을 형성해서 광야의 사막 길을 통과했습니다. 인간이라고, 너라고 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여기서 너라고 하는 대상이 등장하는데 그분이 누구냐?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해 주시는 겁니다.
사람은 없고 하나님만 상대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성도가 지니고 있는 폐쇄공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폐쇄공간이에요. 그 폐쇄공간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내부에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 얼마나 극렬한지를 바로 그 폐쇄공간에서 독특하게 보여주게 됩니다.
민수기 16장 31절에 보면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고라자손이 당을 지어서 모세에게 대들었거든요. “같이 애굽에서 나와 놓고 모세 네가 왜 대장질하느냐?” 하고 대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고라자손이 하는 반항을 보시고 땅을 갈랐어요. 예상도 못했지요. 땅이 그 입을 열어서 그들을 다 묻어버렸습니다. 폐쇄공간에서, 너희들이 어떤 경우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어떤 상황에서 진노하시는가를 이스라엘만 대상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시범조교로 삼으신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원래 화목제물이 처음에는 번제와 화목제물밖에 없었어요. 출애굽기 20장 24절에 보면 나옵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번제와 화목제물, 제사가 이 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1, 2, 3장에 들어가면 드디어 화목제물 드리기 전에 반드시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속죄제, 속건제 드리고 나서 화목제물 드려야 됩니다. 그래서 제사가 두 종류가 늘어나서 다섯 종류로 되거든요. 그래놓고 왜 죄사함에 대해서 속죄제 화목제가 이렇게 희생제물이 무시무시한 불 가운데서 죽어야 되는가를 알려줍니다.
레위기 3장 5절에 보면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위 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찌니 이는 화제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번제라 하는 것은 태워버리는 거예요. 남김없이 다 태워버리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그게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민수기 21장 6절에 보면 또 폐쇄공간에서 광야로 그들이 갔을 때 그들이 고기 먹고 싶다는 거예요. 너무 음식 한 가지만 먹으면 짜증나잖아요. 그래서 고기를 먹고 싶다는 거예요. 고기 먹고 싶은데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애굽생활이 좋았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렇게 나왔을 때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애굽사람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오직 하나님과 상대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지적받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너희가 이해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너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짜증을 내면서 오히려 자기가 그 분노에 대항해서 자기도 못지않게 하나님께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겁니다. ‘마스크 쓰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런 식으로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서 죽여 버린 거예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왜 율법이, 왜 하나님의 말씀이, 왜 죄를 용서하는 제사법이 하나님의 화목제라 하는 것, 화목제물 드리면 화목하게 해주는 거거든요, 그 전에 네 죄에 대해서 인정하는 자에 한해서만 화목제물에서 화목의 효과를 보는 그 이유에 대해서 먼저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 대해서 화내고 있다는 점을 너희들이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나의 안에서 예수 안에 들어올 때 이동하면서 말씀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 그 내용이에요. 내 존재위주로 보지 말고 내가 이렇게 늙어죽는 이유가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는 것도 나 말고, 나를 제쳐두고 외부적인 사건이 있어야 돼요. 그 사건에 준해서 사건에 말씀이 담겨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내가 말씀을 해석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해석하는 주체인 나는 살아 있어야 된다는 모순에 빠지는 겁니다. 내가 판단하고 저 말씀은 나에게 좋다 나쁘다, 내가 판단해 버리면 이것은 여전히 나라는 존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그 원칙에 위배돼요.
히브리서 12장 4절에 보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피를 흘렸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죄한테 당하는 것은 쌉니다. 이게 우리 본질 맞습니다. 본질에 합당한 조치로서 이렇게 알려주시니 이걸 성도가 아니면 누가 알겠습니까?” 하고 기뻐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요한1서 5장 18, 19절에 화목 된 상태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이 말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이 범죄, 죄짓는 것만 나온다는 그것을 이제 우리는 느긋하게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된다는 그 말이에요. 하는 것 마다 이게 안에서 밀리니까, 말씀이, 범죄치 아니하는게 들어오니까 바깥에 밀려서 빠져나오는 것은 전부 죄로 빠져나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세상에 해독주스도 이런 해독주스가 없어요. 해독주스 마시니까 배설물로 독한 것들만 다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더 이상 내가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미 죄 씻음이 차고 들어왔기 때문에 들어왔다는 티를 내야지요. 그 티가 뭡니까?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가 하는 모든 것, 내가 기대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하나님 보기에 진노를 살 일 뿐입니다. 이런 것, 이런 것 맞지요?” 하고 내놓는 거예요.
제가 수요일 날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시험지의 앞뒤가 있는데 앞면에는 이미 죄 씻음 받았어요. 이미 하나님께 속해서 죄 씻음 받았어요. 죄가 없다 이 말이지요. 죄가 없으니까 뒷면에는 뭘 쓰느냐 하면, 그동안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애썼던 것 있잖아요. 헌금하기, 기도하기, 순종하기, 말씀대로 살기, 십자가 피 믿고 성령받기, 온갖 것들을 좍 평생 살면서 노력하면서 “주여,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 유발할 죄군요.” 라고 뒷면에다 쓰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앞면에 죄 씻음 받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이, 화목이, 화해하심, 만족스러움이 없기 때문에 뒷면에 써야 될 것을 어디에 쓰느냐 하면, 앞면에다 쓰는 거예요. 디립다 쓰면서 “주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인데 어떻게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교회는 그런 교인들 모아놓고 장사하고요. 주께서 뭐라 합니까? “그게 네 자존심이다. 그게 마지막 남은 너의 악마의 모습, 얼굴이다.” 악마가 다른 게 아니고 그게 악마에요. 주님이 하신 피의 효과를, 죄 씻음을 모독하는 거예요. 그걸 개무시하는 거예요. 그 자리에 내 자존심을 거기에 걸쳐 놓는 것,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것은 그거였습니다.
끝으로 로마서 3장 23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제가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겠어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이 말이지요. 모든 사람은 가라, 이 말이지요. “나 새로 시작할거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시작할거야.”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서 주께서 만족하니까, 만족하신 예수님께서 자기 이름을 집어넣는데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고 예수 이름이 완성태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예수 이름으로 새로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화해된 이스라엘입니다. 폐쇄적공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자기가 평가하거나 측량하지 않게 하옵소서. 혹시 죄 지은 벌 받을까 싶어서 벌벌 떨지 않게 해주시고, 내가 나를 살리는 방법을 구상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나오는 이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나오는 것들이 주께서 죄 씻어 주었기에 쓰레기로 나오는 것인 줄 알고, 평생을 살면서 하는 모든 짓거리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