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광기
2020년 12월 27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16-17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사도는 성도들에게, 세상 전체가 하나로 묶여져 있는가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자기 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지혜만 필요로 합니다. 세상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 가에 대해서 관심가질 마음도 없고 여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흔히 말하는 ‘신 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 중심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자연의 혜택을 그냥 누리고 이용하고 활용하기만 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인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훼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을 노출시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 내부에는 예수님에게 반발하고 미워하는 성질이 담겨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권세’는 곧 악마를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권세 밑으로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예속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마저 우리 주님께서 설정하는 구조입니다. 히브리서 1:10-11에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75:3에 보면,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창조된 인간이 임무는 망하는 겁니다. 인간들의 존재는 일종의 가리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와서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하느냐를 알리기 위해 인간들을 먼저 만들었습니다.
악마는 주님의 미끼를 걸려들었습니다. 악마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육신을 갖는 것이었습니다.(창 4:7) 즉 보이지 않는 권세자가 보이는 인간들을 앞장 세워서 나름대로의 자기 세계를 조직한 겁니다. 그 조직체는 혈육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점 ⟶선⟶면적⟶형상⟶리듬의 순서를 가지는 경로를 보여줍니다.
아담에서 가족이 생기고 그 가족들의 수가 많아지는 경로들이 선으로 나타나고, 그 선들이 모여 면적을 이루고 거기서 ‘국가’라는 형상을 갖게 됩니다. 이 국가는 그동안의 인간이 가능한 모든 힘의 집결체입니다. 사람들이 사모하는 것은 힘입니다. 그중에서 최고의 힘은 국가의 힘입니다.
국가가 개인의 소원과 야망을 이루어줄 것을 고대하게 됩니다. 기원전 5세기 경, 지금의 터키 동부 해안에 자리잡은 밀레토스라는 도시 국가는, 국가의 힘보다 개인의 총기와 지혜와 이성의 토론으로 참된 진리를 도출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도모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그런 ‘인간 자율적인 집단’을 그냥 보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B.C. 494년 이웃 거대 제국인 페르샤가 쳐들어와서 항복을 요구했고, 그 도시주민들은 반대 봉기에 나섰지만 도리어 페르시야 제국의 화를 더욱 돋우게 하여 처참하게 도시는 망가지고 많은 주민들은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인간은 결코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나 독자적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위한 질서체’를 악마쪽에서 제공하고, 인간은 오로지 그것만이 진리의 전부라고 알고 살아가는 겁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짓이라고는 이렇듯 입자같은 자신의 축적된 힘을 지키는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주변의 힘을 끌어모으고 잡아먹을려고 하는 겁니다. 평소에 주고받는 대화나 인사 속에서 바탕은 이런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 나라에 특이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민족의 구조를 까발리십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간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것은 진멸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잔인한 진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망하는 것이 본래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차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방민족을 불쌍히 여겨 화친을 맺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가차없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멸해버리십니다. 이렇듯 저주하시고 심판하는 광기를 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사랑의 광기’를 발휘하십니다.
빌립보서 2:6-8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쏟고 생명을 쏟아버리시고 다 비우시고 죄인의 바닥자리까지 내려가시는 광기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망해버리시고 저주받으시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 방식이 됩니다.
시편 8:2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이방민족은 힘되는 것들을 총 동원합니다. 말과 전차를 들고 나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병거와 말로서의 승리는 필요치 않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편 71:2과 24에서는,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는 망해가면서도 그 이유를 아는 자들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 인하여 필히 일어나기에 세상의 핍박을 도리어 즐기는 자들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망하는 체험을 통해서 십자가의 사랑에 참여되어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골 1장 16-17(사랑의 광기)20122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16-17절입니다.
골로새서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6. For by him were all things created, that are in heaven, and that are in earth, visible and invisible, whether they be thrones, or dominions, or principalities, or powers: all things were created by him, and for him:
17.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공동번역)
17.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합니다.(표준새번역)
17. 하나님의 아들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 함께 서 있습니다.(우리말성경)
17. And he is before all things, and by him all things consist.(KJV)
17. He is before all things, and in him all things hold together.(NIV)
17. And He is before all things, and in Him all things hold together.(NASB)
사도바울이 세상에 대해서 전부 다 모든 것을 포섭해서 설명을 해줍니다. 사도바울은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사도가 세상 전부를 우리한테 이야기하려는 그 의도에 대해서 우리가 굳이 원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만 알고, 우리가 필요한 것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도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필요한 것만 가져버리면 뭘 놓치느냐 하면, 16절에 “만물이 그……”에서 ‘그’를 놓치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이 만물은 하나님이, 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신이 만든 게 아니고 ‘그’가 만든 거예요. ‘그’가 누구냐?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이 만든 거예요. “만물이 그에게서” 하나님이 아니고 ‘그’에게서 나온 거예요.
여기서부터 다툼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이 믿는 신과 그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과의 싸움이, 다툼이 벌어지는 겁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지금 자기가 살아가는 이것을 긍정하고 좋게 생각하고 밥이나 먹고 잘 살면 이게 인간의 행복이다, 라고 내가 하는 것에 대해서 전부 긍정적으로 나올 수 있는 신, 그건 인간이 만든 신이에요.
이슬람교인들을 보면 모든 생활 자체가,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와서 신으로 말미암아 신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을 그대로 행위로 다 보여줍니다. 힌두교도 마찬가지고. 각자 자기가 믿는 신에게 전폭적으로 모든 걸 헌신합니다. 그런데 성경, 복음이 이야기하는, 주님을 만났던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우리를 부정하는 하나님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나라는 하나님은, 네가 나를 죽인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어딜 행복을 찾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가 행복을 찾을 입장이 되느냐?” 이렇게 하는 것은 오늘 성경본문에 나오는 ‘그’에 해당돼요. 신의 주권, 신을 높이고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것, 그것을 이슬람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달달 외우면서 그들에게서 도출된 결론은 뭐냐? 신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는 그것이 신에게 영광이라는 겁니다. 그 헌신한 사람 중 한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이었고 그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위임장 받아서 돌아다니다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사도바울이 골로새서를 쓴 겁니다.
그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내가 아는 여호와, 성경에 나오는 어떤 여호와도, 물론 성경자체는 여호와 맞지만, 내가 그것을 여호와라고 이해하는 나로부터 나오는 여호와는 바로 나를 인정해달라는 내가 만든 가짜 여호와, 가짜 신이었다는 것을 예수님 만나고 고백합니다.
그걸 사도바울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예수님이 사울을 만나서 한 이야기가 있어요.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부정적 관계를 언급하는 거예요. 핍박관계라는 거예요. 나는 핍박 받고 너는 핍박 하고. 하나님한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네가 바로 하나님을 핍박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몰라서, 없어서 핍박 안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알든 모르든 간에 주님은 너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있었다는 겁니다. 네가 바보라서 그걸 몰라서 그렇지.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에서 그분을 어떻게 세웠느냐 하면,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그리고 우리가 지난번에 봤듯이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먼저 나신 자, 먼저 계신 자가 이 땅에서 십자가로 사람들에게 밀침을 당하고 살해를 당한 거예요. 사람들이 필요 없다고 쫒아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과 그리고 주님 사이는 단절입니다. 단절, 끊어짐이 있어요. 먼저 나셨다는 것이 단순히 먼저 나신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인간들이 어떤 노력도, 어떤 수고 어떤 신앙을 갖춘다 할지라도 먼저 계신나라에 들어갈 수 없이 상태가 끊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겁니다. 먼저 계셨다, 먼저 나셨다.
그러면 이 만물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히브리서 1장 10-11절에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이 대목을 보게 되면 우리가 있는 여기와 하늘나라는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데 11절이 있어요.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주님의 영존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친히 만든 이 모든 것은 필히 멸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망하는 이유는 십자가로 보여줬어요. 망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거예요. 시편 75편 3절에 보면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만들었다고 해서 그 만들어진 것과 만드신 하나님과 연결되리라는 착각은 하지 말라.” ‘만들어졌으니까 이게 사랑이고 만들어졌으니까 하나님 아들이겠지.’라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버릴 패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이 땅에 존재하는 것 때문에, 이 땅에 만들어졌다는 것 때문에 중요한 것이 가리워졌고, 그 가리워진 것을 철거시키고 폐기시킬 때 비로소 왜 가리워진 것이 이 땅에 만들어져야 되는가, 그 이유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 가리워진 것 중에 우리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싹 다 갈아엎어야 된다는 거예요. ‘사랑의 재개발’ 완전히 싹 다 갈아엎어야 돼요. 모조리 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 다. 여기 보이지 않는 것은 악마를 이야기하고, 보이는 것은 세상의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지요.
보이는 것의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가두리양식장전국연합회’ 이런 거요. ‘전국시금치재배협회’ 이런 것 전부 다 보이는 거예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괄호 열고, 합동, 괄호 닫고.’ 이게 보이는 거예요. ‘천주교주교회의’ 이게 보이는 겁니다. 공동체, 동호회, ‘전국 500cc 오토바이동호회’ 전부다 보이는 거거든요.
이거 다 망해야 되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은 망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목사라 하는 것은 죽으라고 있는 거고요. 절벽에서 떨어지는 자가 그냥 떨어지면 돼요. 그냥 망하면 되는데. 우리가 중력을 존중해 줍시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그 자체를 존중하라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잉! 사는 게 참 쉬워요. 망하라고 만들어놓으면 그냥 망하면 되는 겁니다. 경주 이 씨 상서공파, 혈육이지요. 혈육, 족보거든요. 경주 이씨 상서공파 왜 있느냐? 망하라고 있는 겁니다. 안동 권 씨 추밀공파. 원래 안동 권 씨 시조가 권 행이라고 신라 말기 경애 왕 때 공을 세웠다는 겁니다. 원래 권 씨가 없고 성씨가 김 행인데 그 김 행이 공 세웠다고 해서 권 행이 된 겁니다. 그 때부터 안동 권 씨 시조가 되어서 여러 가지 파가 생긴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공을 세웠느냐? 망하라고 공 세운 거예요. 안동 권 씨 무슨 파, 무슨 파, 양파, 무슨 파 전부다 이 세상은 몽땅 다 주님의 중력에 고분고분 해야 돼요. 망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임무라 하는 것은 망함을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이 성도의 임무에요.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 19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돈을,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라는 말씀이 나온 것은 뭐냐? 성도만이 보물을 땅에 쌓아둘 수가 있어요. 왜? 성도는 망하는 것 그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거 머리 나쁜 사람 이해 못합니다. 지금 땅에 쌓아둘 때 이 돈이 어떻게 썩어 문드러지는가를 성도가 아니면 누가 알겠어요? 맛 되게 없는, 소금기 하나도 없는, 남에게 전혀 필요치 않는 인생은 성도만이 살 수 있고, 빛을 등경 아래 두는 거예요. 요즘 많이 하잖아요. 코로나 때문에 안모이고.
이게 뭐냐 하면, 빛을 등경아래 두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에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성도밖에 없어요. 왜? 무엇이 망하는 것인지, 뭣이 중헌디, 망하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일은요, 우리가 애쓸 필요 없어요. 꾸준히 해 왔던 거예요. 우리의 망할, 죽을 육신을 주께서는 얼마나 고마운지 재료 다 준비했어요. 아담의 육신이잖아요. 아담의 육신, 혈육 좋아하고, 돈 좋아하고, 죽는 것 무서워하고, 세상 부귀영화 좋아하고, 광야에서 대표입자, 예수님과 악마가 만나서, 그 때 인간은 다 빠지고요,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사람은 떡 없이는 못 산다. 사람은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세상 부귀영화, 모든 세상권세 에 대해서 인간은 욕망을 가진다. 악마가 이미 그것으로 예수님을 위협했잖아요. 그것은 악마가 모든 인간세계를 접수 했다는 뜻이에요. 보이지 않는 권세, 악마가 이 세상 신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보이지 않는 권세가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다 장악했어요.
주님께서는 그걸 허락을 한 거예요. 왜? 일거에 망할 수 있기 때문에. 망한 것들끼리 한통속이 된 거예요. 보이지 않는 악마에 의해서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 집중시켜서 한 마음이 되게 만들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싹 다 갈아엎어버립니다. 다 망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뭐냐? 십자가에요.
하나님을 믿게 해서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싹 다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일곱 교회는 망하라고 만들어진 거예요. 이 얼마나 이게, 하, 이게 기쁜 소식입니까? 정말 너무 기뻐서 미칠 지경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들을 그냥 둬버리면 자기가 망해야 되는지를 전혀 몰라요.
그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폭격을 하십니다.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요한이에요. 세례요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침략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유대민족은 드디어 세례요한의 이야기한 그것부터 시작해서 폭격을 당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느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회개하라. 심판의 날, 천국의 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까이 온 그 나라는 어떤 나라냐? 모든 것을 심판하는, 불로서 심판하는 그 때가 바로 진짜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 천국을 공격하는 그 때가 된다.”
마태복음의 세례요한의 말씀, “물속에 첨벙첨벙 들어가라. 요단강 속에 들어가서 죽어라.” 하고 전부 다 요단강 물속에 들어가서 일거에 다 죽게 만드는데 그러한 세례요한의 작업이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의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연속됩니다.
아까도 산상설교 이야기했지만 7장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그것을 이 세상은 멸망하는 길로 여기고 사람들은 다 기피하는 거예요. 성도만이 멸망하는 길로 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15절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성도만이 거짓선지자를 분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복은 뭐냐? 이 세상에서는 돈과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는 것, 세상 부귀영화를 얻는 것, 그걸 사람들은 복이라 여기는데요. 포르쉐 같은 고급차 타고 넓은 아파트에 사는 그런 것을 사람들이 다 같이 부러워하거든요.
그런데 아까 히브리서 11장에 의하면 그게 바로 망하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아, 저것도 저런 식으로 망하는 거구나. 돈이 많고, 잘 먹고 잘살고, 모든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한 저게 바로 망하는 표본이구나.’라는 것을 성도가 아니면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복은 뭐냐? 마태복음 5장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복된 성도, 심령이 가난한 성도,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려면 누가 누구하고 짝이 되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천국복음을 인하여 우리에게 욕을 해줘야 되고, 거짓으로 우리에게 악한 말을 해주는 짝이 있어야 돼요. 그 짝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되지요. 그래야 십자가가 확장되거든요.
오늘 본문 17절에 세상 모든 “만물이 그 안에” 여기서 ‘그’라 하는 것은 십자가 지신 그 분이에요. 십자가를 위해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와 함께 섰다는 말은 유지된다, 견지된다, 지속된다, 그런 뜻이에요. 세상 모든 만물이 십자가를 위해서 유지되는 이유는, 이들이 망하면서 그냥 망하지 말고 망하는 이유를 드러내고 노출시키는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망해야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교회 모이기 힘듭니다.” 하고 이야기하게 되면 이걸 달리 이해하면 이렇게 돼요. 내가 신앙인 티를 내고 싶은데 코로나 때문에 신앙인 티를 못 내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코로나를 좀 잠잠케 해주면 착실한 신앙인으로 티가 날 것인데 그게 못마땅해서 짜증이 난다는 거예요.
본인이 신앙인인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부터 잘못된 거예요. 본인이 왜 망해야 될 자인 것을 확인하고 싶은데 마침 코로나가 창궐해서 참 멋진 환경을 조성해주셔서 주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집구석에 앉아 있으면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 1장 10,11절이 그게 십자가거든요.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나(예수님)를 위해서 만들었는데 그동안 세상눈에 보이는 것들이 예수님을 가려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코로나가 와서 세상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니까 “그게 바로 세상 역할이야.” 우왕좌왕, 믿음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그런 기능, 안 망하려고 믿는 믿음, 그게 얼마나 불신앙입니까?
깻잎이라는 아가씨하고 고기라는 남자하고 둘이 결혼했어요. 고기라는 남자는 나이가 24세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그의 아버지나이가 팔십이랍니다. 언제 애를 낳았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고기라는 남자에게 팔십이 된 아버지가 있는데 그 아버지가 옛날 사람이 되어서인지 깻잎이라는 며느리가 혼수를 적게 해왔다고 그렇게 구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깻잎 엄마, 그러니까 고기라는 남자의 장모도 헤어져라, 했어요. 이미 애도 있어요. 애는 고기가 키우기로 하고 깻잎은 이혼해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우리 이혼 했어요> 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거예요.
그럴 때 사람들의 대안이 참 재미있어요. “그 시아버지 죽여 버려라.” 그렇게 된 거예요. 시아버지 죽고 나면 맘 푹 놓고 이제 간섭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고기하고 깻잎, 고기는 원래 깻잎에 싸서 먹는 거잖아요, 함께 한다는 뜻이지요, 같이 부부가 되면 참 좋겠다, 하는데 그게 부부가 아니고 그 팔십 넘은 아버지가 있더라도 남편이 되었으면 고기가 깻잎을 감싸 줘야지요. 그게 부부지요.
팔십 넘은 시아버지가 계속 살아 있어야 돼요. 그 아들이 시건 날 때까지. 옛날 사람한테 언어적 폭력을 안 받도록 남편이 막아줘야 할 텐데 우리 아버지가 어릴 때 나를 힘들게 키웠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자기 아내가 자기가 낳은 아들을 두고 이혼하겠다고 해도 자기는 뭐가 잘못됐는데 그러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 이야기를 왜 제가 말씀드리냐 하면, ‘코로나만 없으면 신앙생활 잘할 것인데…….’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코로나가 있음에 ‘아하, 전에 교회 다닌 것도 지옥 가는 식으로 교회 다녔구나.’ 이게 티가 난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고마워해야 돼요. 코로나한테 감사해야 된다고요.
복음 들어서 자기가 망해야 된다는 것은 알았는데, 자기가 안 망하고 싶은데 뭐 어쩌라고? “추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아멘, 해놓고 “목사님, 안 망하는 수는 없습니까? 추락 안 하는 수가 없습니까?” 이걸, 왜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저에게 요구합니까? 코로나 4단계나 되어라! 통행금지나 이루어져야 돼요!
하나님의 이 코로나 조치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정말 감사해요. 사람 사는 목적이 하나님께 망하기 위해서 죽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인간은 죽는 것 외에 다른 임무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기껏 태어나서 한 것이 자기가 자기 지키는 것 외에 다른 일 한 것 뭐가 있습니까? 내가 나 지키는 것 외에 다른 일 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신은 내가 만든 신인거예요.
구약성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구조와 이방구조, 이스라엘 나라와 이방나라를 맞붙여서 거기서 전쟁을 일으키는 거예요. 전쟁을 일으킬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부탁한 것이 있어요. “모든 이방민족은 어린애까지 갓난애까지 전부다 진멸해 버려라. 어린애까지도 살려두지 말고 다 죽여 버려라.” 그게 이스라엘한테 당부한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쪽에서 미안해서 진멸 안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멸해 버리는 겁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왜 안 해? 왜 이방민족의 갓난애를 네가 불쌍하게 봐? 내가 언제 그 애를 불쌍히 보라고 이야기했어?”
지금 하나님의 목적은 장차 십자가 지실 예수님 메시아가 이 세상을 십자가사건이라는 그 중심으로 완성된다는 것,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된다는 것,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이 세상을 만들어놨는데 말 들어야 될 이스라엘이 그 일을 훼방하잖아요.
옛날 전자제품 부속은요 새로운 전자제품에 안 맞아요. 예수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했어요. 현재 이 육신 가지고는 하늘나라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무가 있어요. 추락하는 것이 임무에요. 창세기 3장 22, 23절,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 취지를 살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아담은 이 땅에서 에덴동산에 있다가 이 세상으로 쫓겨난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쫓겨난 이유가 다 있습니다. 쫓겨나게 될 때 거기에 아담이 미처 모르는 게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던 겁니다. 아담이 쫓겨나게 될 때 거기에 저주구조, 벌칙을 내리는데 그 벌칙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누구냐? 뱀의 후손이에요.
뱀은 이게 천사가 되어서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보이지 않는 힘, 보이지 않는 권세에요. 쉽게 말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입자의 힘, 힘, 힘을 위해서,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힘들을 긁어모으기 위해서, 그래서 내가 하나의 입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개별체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사물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처음에는 점이거든요. 나중에는 선이 돼요. 나중에는 면적이 돼요. 나중에는 그것이 리듬, 파동이 됩니다. 처음에는 빗방울 또는 나뭇잎사귀, 하나의 개별체에요. 파도의 방울, 그런데 조금 더 크면 이제는 물고기, 개구리, 좀 더 크면 코끼리, 기린, 이게 더 발달하게 되면 인간, 인공지능 같은 인간, 인간이 인공지능 같아요. 말이 좀 이상합니다만 인공지능 같은 인간.
인간의 특징은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악마와 결탁된 인간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악마와 결탁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래서 그 악마의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악마 쪽에서 아담을 제시한 이유가 있어요. 소원이 있어요. 악마가 인간에게, 아담에게 접근할 때 손해 보는 장사 안했거든요. 어떤 노림수를 갖고 찾아온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네가 되고 싶다는 것, 내가 육체를 얻고 싶다는 겁니다. 인간의 육체를 얻고 마음대로 부렸던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특징은, 자기가 자기를 관찰하고, 측정하고, 측량해서 최종결론을 내린다는 것, 그걸 진리라고 내리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하는 것은 뭐냐? 신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종교생활 하는 겁니다. 교회 나오는 거예요. 절에 가는 겁니다.
교회 나와서, 절에 가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하나의 입자로서, 개별체로서 얼마나 내가 정당한가를 내가 원하는 신을 통해서 내가 증명 받고 싶은 거예요. 잘난 맛에 살고 싶은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기원전 4-5세경에 있었던 데모크리토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전까지는 신들에 의해서 세상 자연변화를 다 설명하는 그런 시대였어요. 그런데 데모크리토스라는 사람이 아주 천재적인 발상을 하기를, 이 세상은 하나의 입장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본 겁니다. 나무바퀴가 닳는 것, 빨래가 마르는 것, 그런 것은 전부 다 나무 입자와 물 입자가 천천히 닳아지는 현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지금부터 무려 2천 6백 년경 전에요. 대단한 천재 아닙니까? 그걸 원자론이라 해요. 입자론입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입자가 되고 나머지는 허공으로 되어 있다. 이거 주장한 거예요. 오늘날의 분자, 원자 이야기를 벌써 2천 5, 6백 년 전에 데모크리토스라는 사람이 이야기한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도시가 있어요. 밀레토스라는 도시국가가 있는데 그 도시국가가 터키쯤 되는데 밀레도라 해서 사도바울이 3차전도 끝나고 난 뒤에 에베소에 있는 장로를 불러서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한 장소가 밀레토스 또는 밀레도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도 거기 가면 그리스 유적지가 남아 있어요.
그 밀레토스라 하는 도시는 어떤 힘을 갖고 있는 작은 도시니까 절대적인 힘이 있는 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힘을 발휘하는 사제계급의 권력이 그렇게 센 것도 아니고, 그냥 ‘아고라’라고 하는 토론의 광장, 만남의 광장, 광화문광장 그런데 모여서 자유롭게 인간이 자기가 경험한 것, 관찰한 것, 체험한 것을 자유토론을 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그런 식의 이성이 발달된 그 도시국가가 밀레토스라는 국가입니다. 도시국가에요.
그래서 거기서 나오는 원리가 뭐냐? 세상의 척도는 내가 척도다. 인간이 곧 세상을 보는 척도라고 주장한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런 주장할 때 인간이 승리한 것으로 여겼지요. 악마를 인간이 이긴 걸로 여겼어요. 악마는 신에 속하기 때문에 악한 악귀도 인간의 이성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리석었습니다. 왜냐하면 bc494년에 밀레토스에 누가 들이닥치느냐? 바사, 페르사 나라가 들어가서 그 도시국가를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을 주장했던 모든 사람들이 노예로 잡혀갔습니다.
이게 뭐냐? 개인에 대한 누구의 승리냐 하면, 국가의 승리에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 뭐가 있느냐? 국가가 있는 겁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국가 있어요. 악마가 인간이 자율성을 발휘하도록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안동 권 씨라는 혈육적가족은 가족이 족보, 가문이 되고, 그 가문이 하나의 사회가 되고, 사회가 더 나아가면 국가 되는데 그 국가는 우리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그 단체가 국가입니다.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는 게 국가에요.
그 국가가 이방국가, 이방민족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없는 국가에요. 없는 국가가 나타나서 이방민족과 전쟁을 만들어요. 전쟁을 만들 때 어떻게 전쟁을 했는가? 시편 20편 7절에 보면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전쟁을 벌이는데 시편 8편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스라엘의 전쟁에 대해서는 기존에 있는 세상나라 구조와 전혀 딴판의 구조에요. 그게 뭐냐? 힘을 쏘옥 빼는 구조에요. 힘을 쏘옥 빼는 구조. 하나의 내가 하나의 입자가 되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힘을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상대를 이겨야 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점까지 아신다면, 여러분이 혹시 길에서 아는 사람 또는 직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그걸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우리 내기할까요?’ 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너 가진 힘이 세냐, 내가 가진 힘이 세냐? 어느 쪽이 힘이 세냐? 이긴 쪽이 판돈 다 끌어먹기로, 다 먹기로 우리 내기합시다.’ 하는 뜻으로 이해하면 돼요. 그런데 그 말이 너무 길기 때문에 간단히 줄여서 ‘안녕하세요!’
또 다른 예는 “혈액형이 뭐예요?” 이게 뭐냐? “우리 내기 합시다.” 하고 같은 말이에요. ‘당신이 재수 좋은 혈액형 A형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재수 없는 AB형, 갈라지는 그런 형을 갖고 있는지,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데 봅시다.’ 혈액형이 뭐예요, 하고 같은 말이 사주보셨습니까, 하고 같은 말이에요. 심리 분석해 드릴까요, 이것도 다 같은 말이에요.
‘당신은 입자, 나도 입자. 가진 입자가 얼마나 크고 단단하냐? 얼마나 대단하냐? 죽음의 공포로부터 얼마나 많은 스펀지를 깔았느냐? 그거 내기할까?’ 그 말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악마한테 소원을 빌었고, 악마는 또 우리의 소원이 되었고, 서로의 소원이 맞아떨어져서 우리는 악마와 한통속이 된 겁니다.
인간에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의 끝은 뭐냐 하면, 바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내 것으로 가지는 것. 그걸 누가 보장해줍니까? 단단한 국가, 듬직한 국가, USA, 미국이 보장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이민 간 겁니다. 이민 갈 때 가난한 나라에 이민 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르헨티나에 이민 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캐나나, 뉴질랜드. 왜? 내 힘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국가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 경계선이지요. 그런데 그 뒤에 누가 있느냐? 진짜 세상을 다스리는 힘, 악마가 바로 동아줄로 꽁꽁 묶고 있어요. 사람이 사는 것, 사람이 노력하는 것은 바로 주변에 있는 것을 내 것으로 긁어모으고 잡아먹기 위해서, 상대방을 잡아먹기 위해서 활동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그 일을 하셔야 되는 거예요. 왜? 유일하게, 이래서 망하는 이유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뭐 억지로 안 해도 돼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타고 났으니까요. 타고 났다고요. 세상은 늙어가고 있습니다. 늙어가면서 젊어지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것은 새로움이 아니에요.
시편 71편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오직 이세상은 병거나 칼 그런 것으로 자기를 지키고 구원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돈이나 권세나 힘이나 이런 것으로 되는데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주의 의로, 주님의 의로움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71편 24절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너는 힘자랑해라. 나는 주의 의만 자랑하겠다. 나는 십자가만 자랑하겠다. 누가 이기는가 한번 보자.’ 누가 마지막에 최후에 웃는 자인데 한번 보겠다는 겁니다.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그러니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저쪽에서 힘 가지고 나오지요. 이쪽에서는 힘을 빼는 겁니다. 기생 라합이 그래서 구원받은 거예요. 자기가 모든 힘을, 나는 망했다 하는 것을 받아들일 때 기생라합은 구원받은 거예요. 망해야 되는 자는 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수를 죽였던 유대민족은 이스라엘의 그 정신을 모르고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사용한 거예요. 오늘날의 교회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준다는 겁니다. 뭘? 우리를 입자로서, 하나의 개체로서 우리교회가 부흥되도록 하나님께서 힘을 도와주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망하기 위해서 교회가 있거든요. 보통 교회는요, 한해 마지막 주일되면요, 광고시간이 20분 30분이 넘어가요. 집사 임명 다하고, 내년 계획 다 이야기하고, 설교 시간은 한 20분 되고 나머지는 다 광고시간으로 다 때웁니다. 성가대 일으켜 세워서 “올해도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장로들 앞자리에 불러 세워놓고 다 임명하고, 올해는 돈 받고 바구니에서 성경구절 빼내기 하는 그런 짓은 안하겠지만.
우리교회 목표는 작년이나 올해나 한결같습니다. 망합시다. 뭐가 망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 주일처럼 제대로 보여주듯이 제대로 망해주는데 그 망하는 방법은 하시던 대로 사시면 돼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요? 그게 바로 망하는 길이에요. ‘너만 힘 있나? 나도 힘 있다.’ 그게 망하는 길이에요. 그게 어렵습니까?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러니까 돈이 보이는 세계를 아우르는 범주, 와꾸(틀)지요 와꾸, 그 와꾸를 뭘 로 표현하는가? ‘돈을 사랑함’으로 보는 거예요. 돈을 사랑해서,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2천 2십 년도에 이 체험을 한 번 해봐야 안 됩니까? 우리가 이 체험, 돈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근심으로 찌를 때 얼마나 아픈지를 내년에는 꼭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점잖은 체 하지 말고, 안 그런 척 하지 말고 하시던 대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편에 나오는 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이 본래의 본질, 하나님의 의의 전달자, 운반체,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어떻게 사울에게, 성도에게 주어지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2, 23절에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이것은 ‘전국가두리양식장조합총회’하고 다른 겁니다. 왜? 그것은 인간이 가능하니까. 우리 육신이 가능한 총회, 그것은 보이는 것이에요.
그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악마의 예속에서 못 벗어납니다. 악마의 대리자에요. 악마의 대리자니까 가능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이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우리 육신으로, 우리의 기도로 불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사랑을 주면 사랑 받으면 되고, 미움을 주면 미움 받으면 되는 거예요. 사랑을 주면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고 미움을 받으면 미움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뭐냐? 힘이 없는 상태에서. 그것은 바로 사랑 그리고 미움이에요. 사랑과 미움입니다.
이것은 힘을 뺐기 때문에, 힘에서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힘의 논리에서 절단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광기, 광기라고 하는 겁니다. 광기, 사랑의 광기, 이게 있어야 돼요. 이게 연결점이에요. 그리고 그리움. 하나의 예를 들면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사랑했어, 사랑했어. 우린 미치도록 사랑했었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내 사랑이 다 식기전에~” 왁스가 불렀던 <여정>이라는 노래 가사에 나옵니다. 집에 가서 한 번 찾아보세요. 그리고 이런 것도 있어요. “너에게로 또다시 돌아오기까지 왜 그리 힘들었는지~” 힘들 수밖에 없지요. 자기가 입자니까, 힘의 구체화니까. 이 힘이 무너지게 하는 게, 이게 그렇게 힘들어요.
빌립보서 2장 7, 8절에 보면 주님의 광기가 나옵니다. 그 주님의 광기가 뭐냐? 얼마 전에 우리가 빌립보서 다 봤잖아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게 광기에요. 우리에게 말씀만 하는 광기가 아닙니다. 아예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피를 쏟아버린 이것보다 더 센 광기는 없어요. 이건 미친 거예요.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자기의 피를 쏟아버린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 피 뿌리듯이. 이것은 어떻게 말로 설명됩니까? 우리가 가능합니까? 우리는 망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수퍼맨도 아니고, 중력을 거슬러서 거꾸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 사랑이 와요.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는 중력을 거스르게 되는 겁니다. 왜냐? 파동이기 때문에, 입자는 따로 있기 때문에, 나는 힘을 쏘옥 뺐기 때문에, 그분의 그림자기 때문에. 주님 십자가 바라볼 때까지 나는 왜 그리 힘들었을까? 아, 정말 십자가뿐인데, 그걸로 충분한데, 왜 십자가 말고 교회가 어떠니, 부흥이 어떠니, 나는 집안이 행복하니, 건강하니, 돈이 있니 없니, 나는 출세 했니, 승진 했니, 왜 그렇게 쓰잘때기 없는 힘 끌어 모으는데다가 혼신의 힘을 다 했습니까?
물론 태어날 때부터 우리 본성이 나를 지키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구석이 없기 때문에 그것만 했지만. “이제 나는 알았어 내가 죽는 날까지 널 떠날 수 없다는 걸~” 이미 끝났어요. 또 이런 노래가 있어요. 이건 그리움이에요. 그리움도 광기에요. 사랑, 그리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를 생각을 안 해요. 내가 어느 정도냐를 아예 잊어버려요.
“떠나야 했던 것도 모두가 우연일까. 돌아온 그대모습 그려보는 것만으로 너무나 행복해. 나는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그대는 어디에~” 알리가 불렀던 <그대는 어디에> 라는 노래입니다.
<그대는 어디에>
지금도 기억 속에 남겨둔 그대눈물
이제는 가슴속엔 묻혀만 두긴 싫어
떠나야 했던 것도 모두가 우연일까
비 오는 거릴 보며 그대다시 떠올라
아직도 함께했던 그 많은 시간들을 그리며
나의한숨 시간 속에 남아 나를 눈물짓게 해
돌아올 그대모습 그려 보는 것만으로
너무나도 행복해진 나는 자꾸 눈물이 나는지
그대는 어디에.
왜 자꾸 나는 그분만 그리워질까? 내 형편, 꼬라지는 생각 안하고.
남들은 자기 꼬라지 챙긴다고 그렇게도 잘 챙기는데 왜, 나는 내 이야기 할 것이 왜 없을까?
망하는 것 외에 할 것이 뭐가 있겠어요? 보통 세상적으로 연말이 되면 부르는 노래가 있어요. 올드랜사인(Auld Lang Syne)이라고 아일랜드 민요인데요. 영어로 하면 old long since, 옛적부터 있었던 것, 이런 뜻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작별이에요. 빠이빠이, 라는 뜻입니다. 옛적부터 있어 왔던 나, 육신부터 해서 모든 것들 빠이빠이. 우리 찬송가도 그런 것이 있지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빠이빠이 했습니다. 이제는 떨어지는 것은 떨어지는 것인데, 전에는 안 떨어지려고 애썼는데 이제는 버릴 패라는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광기를 일으켜서 십자가에 들어갔던 그 노선을 따라서 같이 떨어지는 것을 즐기는 그러한 남은 인생.
‘아, 광기 한번 맛볼까? 사랑의 맛을 한번 봐?’ 이것은 내가 사랑을 하고 싶다, 가 아니라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의 자리에서, 십자가에서 마중하시는 분이 있기에 그 힘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나를 잊어버리고. 주님이 오셔서 떠났어요. “떠나야 했던 것도 모두가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지요. 필연적인 거지요. “돌아올 그대모습 그려 보는 것만으로 너무나도 행복해진 나는 자꾸 눈물이 나는지~” 이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또 5절에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망할 인간인데 왜 구합니까, 망할 인간인데! 이제는 제발 나를 좀 놔주세요. 좀 본인을 놔주라고요. 떨어져 봤자, 안 떨어지려고 해도 죽고 떨어져봤자 죽고. 아까 기도하신 집사님 말씀대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우리 목적은 죽는 거예요. 그걸 인정합시다. 삼성재벌도 죽고 모든 것이 죽는 거예요. 우리 몸은 안 받습니다. 주께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몸, 예수님 몸밖에 없어요.
그 예수님의 몸을 과연 너희들이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느냐, 라고 묻는 이야기가 바로 유명한 사마리아 비유라는 겁니다. “네가 강도 맞아. 누워있는 나를, 자비를 베풀 수 있느냐?” 그 이야기에요. 예수님 몸만이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율법은 뭐냐? 아버지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것은 유일한 입자입니다. 유일한 몸이에요. 우리 몸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동안 그 몸을 가렸습니다. 방해했습니다. 왜? 이방민족이니까, 이스라엘이 아니니까.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만 힘 된다고 생각하는 것, 기도 많이 하면 복 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복은 뭐냐? 이미 온 복, 그리스도 복음의 핍박받고 고난 받는 그것이 바로 팔복중 하나에요. 복의 마지막입니다.
모든 것을 놓고 살아가는, 망하면서 중력을 느끼는, 중력의 무너짐의 속도를 느끼는 것, 그 속도는 빠라바라빠라바~ 그 이상입니다. 맞바람, 망해가는 바람, 한 달 수입이 백만 원 받다가 한 달 수입 5백만 원 될 때 ‘이게 바로 망하는 일이구나.’ 빠라바라빠라바~ ‘이게 망하는 거구나. 마귀가 이쪽에서 기다리고 있구나.’
우리의 모든 소원을 포기합시다. 이게 <원더우먼 1984>의 주제에요. 영화 내내 이야기하는 것이 “소원을 버리라.” 이게 <원더우먼 1984>의 내용이에요. 시간 있거든 한 번 보세요. 소원 때문에 이 세상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진리는 이미 십자가가 진리입니다. 이미 건널 수 없는 진리, 그 진리 위해 악마까지, 보이는 모든 것이 망하기 위해서 주께서 부지런히 지금 유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자신을 마치 내가 나 위해서 있는 것처럼 여겼던 것은 악마의 속삭임이었다는 사실을 그동안 우리가 몰랐었습니다. 악마가 시키는 대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오해했고 착각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라짐으로서 십자가만 드러내 보이는 그런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