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의 확장
2021년 1월 3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18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사도 바울은 ‘그’분에서 모든 것을 걸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고귀한 생명이나 목숨마저 주저없이 그분에게 넘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최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그분됨은 그분께서 이 인간 세계에 오셔서 마지막 남긴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 재판 사건’을 확장시키려 하십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를 제거하는 일이었다는 겁니다. 즉 우리 인간말과 소통되지 않는 신은 신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반대 의견은 없었습니다.
아니, 반대의견이 한 사람이라는 있는 한 십자가 사건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유보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죽은 자들’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들이 다 ‘죽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죽은 자들’ 그룹에서 스스로 탈출 할 수 있는 자가 전혀 없어야 예수님께서 ‘먼저 나신 자’가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본인 조차도 ‘먼저 나신 자’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는 이제와서 ‘나는 마땅히 지옥가야 하고 죄인 맞다’고 즐겁게 외치는 겁니다. 기쁘게 고백하는 겁니다. 사도는 이 십자가 재판을 다시 가져와 현실을 조사합니다. 즉 인간들 속에는 더 이상 예수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다는 말은 곧 교회도 없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예배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이 아니고 신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요 메시야도 아니요 왕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나 존재를 매여 있는 우리들 입장을 예수님은 전혀 옹호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6:65-66에 보면,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존재는 바로 하나님께서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반드시 먼저 예수님에게로 와야 하는데, 이 예수님에게 오는 문제에 있어서도 아버지께서 허락없으면 올 수 없다는 겁니다. 레위 23: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이스라엘에게 있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 곧 ‘없는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방법은 필히 제사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그 제사장이라는 분을 재판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의견에 모아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을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 믿고 아는 일에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만만이 예수님을 정식 재판에 넘겨 살해하는 일이 모두들 같은 마음으로 동조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재판을 확장시키려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눈에 보이고 잡아챌 수가 있지만 사건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아 챌 수도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성을 살리기 위해, 안 다치게 하기 위해 ‘예수’라는 존재를 죽여 존재에서 박탈당하게 했습니다. 이는 곧 ‘교회의 머리’를 제거한 일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을 없애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주님도 없고 교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등장되는 모든 교회들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꼭 처형해야 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봐서 예수님을 없애고 난 뒤, 나름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만들어 낸 것들이 교회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존재성을 움쳐지려는 태도를 신으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받으려는 시도가 됩니다. 즉 존재에서 존재로 나아가면서도 마지막 때의 신의 심판을 넘어서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것은 미완성입니다. 극한을 제대로 보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된 겁니다. 사도는 우리 성도들은 앞장 서서 죽음 뒤까지 인도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을 보게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끝’인 동시에 ‘세상의 시작점’입니다. 곧 우리 성도가 만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재판 사건의 현장입니다.
‘태초에 재판이 있었다’가 됩니다. 그 재판의 현장을 확대해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들, 모든 존재자들은 다 ‘죽은 자들’이 됩니다. 지옥가야 마땅한 자들이 됩니다. 죄를 짓는 것이 마땅한 자들이 됩니다. 이 사실은 성령을 받아 마음의 눈이 떠져야 가능합니다.
에베소서 1:17-19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옥가도 마땅한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마지막을 만났기에 알게 된 사실, 즉 십자가 재판을 보게 하는 영적 눈을 뜨게 하신 겁니다. 이로서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이미 완료된 ‘십자가 재판 사건’에 연류된 자로 보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경우를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6:7-8에 보면,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재판을 두고서 두고두고 세상을 책망하시겠다는 겁니다.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이미 존재는 죽음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움켜 지기에 안 죽어야 될 이유를 찾는데 평생을 보내지만 성도는 자신이 이미 죽고 주님이 살아계시기에 거기에 근거를 소개합니다.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이 나이는 0이 됩니다. 꼭 어린아이같이 됩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나이나 역사의 관심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는 현재가 사라진 사건이 됩니다. 성도의 남은 삶은 의족과 같습니다. 이미 자신의 다리가 짤렸다는 것을 티내는 의족말입니다. 성도의 남은 존재는 가짜 존재로서 십자가 재판사건을 증거하는 식으로 평생이 사건화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세상 끝을 십자가 재판으로 완료되었음 저들로 매일 새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골 1장 18절(재판의 확장)21010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18절절입니다.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여기 ‘그’라 하는 예수님은 안보입니다. 안보이기 때문에 그의 몸인 교회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근본’이라 하는 것도 이것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자’도 이것도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이것도 우리 주님께서 일방적인 자기주장이지요.
그래서 1장 18절을 보면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말은, 교회라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없으니까 교회도 없는 거예요. 그 논리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도바울은 자신의 목숨, 자신의 인생 전부를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에게 예수님에게 다 걸어버린 거예요. 자기의 생명, 인생, 목숨 전체를 그분에게 다 건겁니다.
걸었다는 근거를 그가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시하는 그 근거가 18절에 보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죽은 자, 죽음을 언급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죽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니까 살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후다닥 장례를 치러서 눈앞에서 없애버립니다. 삭제해 버립니다. 죽음의 세계라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지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있으면 어떻게 할래?” 이렇게 나온 겁니다. “죽고 난 뒤에 있으면 어떻게 할래?” 그렇다면, 너희가 없다고 여긴 것이 진짜 있다면 그 없다고 여겼던 분을 너희들이 어떻게 대했는가, 너희들이 어떻게 그분을 무시했는가, 거기에 대해서 주님 쪽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주님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거지요.
곱게 예수님이 산속에 들어가서 굶어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어떤 과정을 겪었느냐? 재판이라는 과정을 겪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압축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재판이 확장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재판하는 그 재판, 그것은 지금 확산되었다, 멈추지 않고 있다, 그 재판을 주님께서 연속시키고 있다. 그 내용으로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사형당한 입장에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를 증명할 수 있는,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그걸 노렸지요. 자꾸 예수님이 자기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하늘에서 왔다고 하니 없애버리자, 귀찮아죽겠다.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고 재판을 거쳐서 없애는 거지요. 그분을 없애버리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고,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고, 심판의 세계가 있다는 그런 주장마저도 안 들릴 수 있으니 없애버리자. 그렇게 된 거예요. 없애버릴 때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고 재판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사건, 재판 사건을 통해서 없애버렸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을 없앤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는데 메시아는 왕이시다, 메시아는 선지자고 메시아는 제사장이다, 라는 그것이 메시아거든요. 그러니까 왕을 없앤 거예요. 왕을 없애고 제사장을 없애고 그 다음에 선지자를 없앤 겁니다.
레위기 23장 9, 10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우선적으로)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약에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그 이스라엘 사이에 누가 있느냐 하면, 제사장이 있어요. 제사장이 있음으로서 제사장에게 드리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된다는 그러한 구조와 질서로 맺어진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제사장이 없어버리면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장이 중요한 겁니다.
또 선지자는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람이 선지자가 되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든요. 그러면 선지자를 제거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빼놓고 나머지를 심판하기 위해서 왕을 주시거든요. 왕은 전쟁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그 왕의 전쟁자체가 이 세상에 대한 전쟁기능이고 심판기능입니다. 왕이 그걸 담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왕을 없애버린 거예요. 이 세상에는 전쟁도 없고, 심판도 없고, 선지자도 없고, 제사장이 없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왕을 없애버린다면.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가 바로 왕이고, 내가 선지자고, 내가 기름 부은 자고, 내가 제사장이라 할 때 그딴 소리가 듣기 싫어서 예수님을 없애버린 겁니다. 역사적으로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재판해서 하나님을 없앤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없앨 때 그냥 없앤 것이 아니고 ‘자칭’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자칭 하나님’이었다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진짜 구라를 치는 거짓선지자로 왔다면 인간의 일은, 인간의 재판은 정당하고 잘한 겁니다.
그런데 만약 진짜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이제 이 세상은 죽었어요! 이 세상은 죽은 겁니다. 골로 간 거예요 이제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려 버린 거예요. 사도가 자기 목숨도 아깝지 않고 그분에게 다 건 것은 사도바울이 생각이 있어서 한 거예요. 주님이 찾아와서 만남으로서 드디어 사도바울이 완전히 눈이 떠져버린 거예요.
확 눈이 떠진 겁니다. 주님 쪽에서 가만 안 있을 건데, 하나님 쪽에서 가만 안 있을 건데, 사도는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의 이 세상 심판에 대해서 사도는 굉장히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있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다가올 때는 인간이 하나님을 재판했다는 그 재판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고 그 취지를 그대로 살려준다는 것은, 정말 그분이 그 때 오신 그분이 하나님 맞다, 를 증명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일관성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 일의 일관성. 사도는 이런 이야기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잘못 건드렸다. 잘못 건드려서 하나님은 그 재판을 살린다. 재판을 재판으로 끝까지 불도우자처럼 세상을 그 재판하나로 다 밀어 붙이겠다.”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바울뿐만 아니고 사도요한도 마찬가지에요.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그를 찌른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사건을 확장시켜 전개해버리는 겁니다. “그를 찌른 자도 볼것이요.” 하나님한테는 뒤끝이 있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교회의 머리’라고 해 놓긴 했습니다만 아주 노골적으로 해서 오늘 제목을 이렇게 두자로 정할 수 있습니다. ‘깽판’ 모든 것을 깽판 놓는 거예요. “그렇게 증거 하는 근거가 뭐냐? 사도 너는 모든 인생을 그에게 걸었다는 근거를 대라.”고 할 때에 오늘 본문 18절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사신자라.
“죽일 때 너희들이 죽였잖아. 구라인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자칭 하나님이고, 자칭 메시아라고 우겼다고 너희들이 판단해서, 네가 재판 걸어서 그 재판 속에서 죽였잖아. 그리고 너희들이 손을 털었지?” 왜 너희들이 손을 털었느냐 하면, 더 이상 가짜가 진짜 행세하고, 가짜 선지자가 진짜 선지자 행세하고, 가짜 심판주가 진짜 심판주 행세하는 그러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이제는 들려오지 않는다는 속 시원함, 그것을 이제는 간편하게 처리했다는 거예요.
“또 구라치기만 해봐라. 또 죽여 버릴 테니까. 이 세상은 우리들이 판단할 세상이지 누가 와서 ‘네가 이렇다 저렇다’ 우리한테 잔소리하지 마. 우리가 알아서 살 거야.” 거기에 대해서 마음이 하나같이 전부 다 단결되어 있어요. 하나같이 전부 다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에 인간들이 하는 그 짓거리가 모두 집약되어 있는 그 재판, 그 재판에서 이 사람은 가짜가 분명하다고 모든 지혜와 모든 신앙심을 쏟아 부은 그 사건에서, 그래서 전격판결을 내린 사건에서 하나님이 그분을 도로 살려낸다면 앞으로 너 인생 어찌 살래? 이 사태 감당하겠어, 너희들이?”라고 묻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은요,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적인 소생이 부활이 아니에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셨다는 것은 예수님보다 먼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에녹이고 엘리야고 그리고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 그 사람들은 소생한 것이지 부활한 것이 아니에요. 먼저 나신 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먼저 나려면 예수님 빼놓고 모든 것이 일치단결되어야 돼요. 모든 생각이 하나로 묶어져야 돼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생각이 똑같았더라, 가 되어야 돼요. 그리고 그들이 하는 짓거리가 뭐냐 하면, 일치단결해서 인간내부에 들어있는 모든 힘, 지략, 지혜, 모든 힘을 다 끌어 모아서 우리는 옳은 판단을 했다고 재판 걸고, 그 재판의 힘으로서 예수님을 죽여줄 때 예수님의 재판에 연루되어 있는 모든 인간들, 아담의 모든 인간들, 우리부터 해서 모든 인간들은 죽은 자들에 해당됩니다. 죽은 자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내 생각에서 내가 빠져나올 수 없잖아요. 왜? 인간은 자기가 한 생각을 자기가 듣기 때문에. 자기가 한 생각을 자기가 들어요. 자기 생각에서 자기가 못 빠져 나온다고요. 우리 생각의 끝은, 누가 우리 생각에 의해서 돌아가셔야 우리 생각의 끝 지점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또 생각에 생각을 하고, 또 생각에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생각의 끝은 없어요.
생각의 극한이 없다 이 말이지요. 생각의 극한은 누가 오셔서야 그 극한을 보여줘야 되는데 우리 생각, 네 생각 내 생각 서로 통섭하고 서로 소통해서 의견을 합치자, 그 모든 의견을 합친 것들이 예수님의 재판에 모두 소모되고 나니까 그게 뭐냐? 죽은 자들이라고 규정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그래서 먼저 났다는 말은,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죽은 자들 속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 진겁니다. 이게 바로 단절이라는 겁니다, 단절. 끊어짐. 이 끊어졌다는 것은 구약부터 계속 언급했어요. 홍해가 끊어졌지요. 홍해바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했고, 그 뒤에 애굽 군사 따라서 도달했고, 그런데 앞에는 넘실거리는 홍해바다.
무슨 수로 건너갑니까? 건너갈 수가 없지요. 그 전에 유월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죽이겠다고 오는데 누가 그 죽음을 건너갈 수가 있습니까?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저 착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어요.” 이것가지고 건너갈 수가 없어요.
신약을 가지고 구약에다 적용을 시켜보면, 해석을 해보면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힘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집단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홍해바다가 그렇지요. 거기다가 요단강도 그렇지요. 요단강도 단절되어 있지요. 여리고성도 마찬가지지요.
신약에 와서 부자청년, 마태복음 19장의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따라잡겠다고, 그래서 영생 얻겠다고 따라올 때 결국 그 사람은 돈이 많아서 자기 집으로 되돌아갔잖아요. 이것도 단절 아닙니까?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 해도 예수님께 올수가 없어요. 끊어져 있어요. 단절되어 있어요.
바로 십자가 십자가사건을 언급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떡을 주니까 사람들은 떡을 먹고 “야~, 우리에게 떡을 주신 분을 찬송합니다. 나 당신을 믿습니다. 나 당신을 따르겠어요.” 백날 따라와도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 누구든지 내 피와 살을 마시지 않고서는 영생이 없다는 그 말에 자진해서 다 돌아갔어요. 다 돌아갔습니다.
지금 이 나라가 하는 조치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 나라가 하는 일이 너무 고마운 게, 다섯 명 이상 못 모인다, 이거거든요. 나라가 짐승입니다. 악마거든요. 악마가 교회보고 시켰어요. 다섯 명 이상 못 모인다는 그 말은 이런 뜻입니다. 교인 수 5천명, 2만 명, 2십만 명, 뭐 2백 명, 3백 명 되어도 딱 보니 너희들 가운데 신자는 다섯 명도 안 돼,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알려주는 거예요. “너희 다섯 명 모여도 많은 숫자야. 원래 신자가 다섯 명도 안 되는데 다섯 명만 모이라고 했다고 화를 내? 아니잖아.” 너희들 아닌 거 마귀도 알고 주님도 알고 다 알고 있어요. 신자 아닌 걸.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이 가족끼리라도 마스크를 하라, 그렇게 했거든요
그게 얼마나 고마운 말입니까? 부부끼리 키스할 때 마스크 위에다 키스해야 되거든요. 이 말은 “너희 원래 부부 아니잖아! 그냥 경제적 문제, 그리고 애나 놓고 사는 것이지 너희가 언제 부부였고 언제 사랑했어?” 안 그래도 뽀뽀하기 싫은데 잘됐다. 마스크나 쓰고. 그걸 문재인 대통령께서 다 해주신다니까. 문재인대통령께서!
부부 아닌 거 티 내 주잖아요. 범사에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그런 뜻입니다. 신자도 아닌 주제에 무슨 교회를 언급합니까? 무슨 예배를 언급해요? 언제 신자였어요? 언제 교회였습니까? 교회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사도에 의하면 교회는 없고, 신자는 물론 없는 거예요. 왜? 주님이 있다는 것을, 주님을 이미 사형으로 내친 이상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어요. 인간들이 지혜를 아무리 짜내도.
그러면 교회는 뭐냐? 예수님 쫓아내고 난 뒤에 인간들이 종교심으로 저희끼리 정당화, 합리화시킨다고 하나님 믿겠다고 인간들이 만든 교회들뿐이에요. 그래놓고 심심하고 돈도 안 되고 하니까 돈 내라고 “예배도 드리고 십일조 꼭 하세요.” 그런 것도 하고요.
인간이 인간을 추적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귀신이 보이는 거예요. 귀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걸 로마서에는 ‘하나님의 원수’라 하는데 제가 다른 말로 귀신이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귀신으로 봐요. 인간을. 이미 인간이 하나님을 세워놓고 재판을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재판을 연속시켜 버리면 이제는 피고 된 하나님이 인간을 재판할 때 어떻게 재판하느냐? 너희들은 다 죽은 자들이라고 이미 판정을 내리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만약에 진짜 여러분이 성령 받은 성도라면 이 세상 살 때 그냥 살지 말고 긴 작대기를 준비하세요. 작대기를 준비해서 어떻게 하느냐? 공동묘지에서 홍수가 나면서 산사태가 났다 칩시다. 그러면 공동묘지가 다 무너지겠지요. 무너지니까 그 시신들이 홍수에 둥둥 떠다니겠지요. 그러면 뗏목하나 타고 작대기를 가지고 밀어내는 거예요.
둥둥 뜨는 시신을 하나하나 다 밀어내는 거예요. 예쁜 시신이 오니까 저건 현빈, 저건 손 예진, 이렇게 미는 거예요. 추 장관 오게 되면 저쪽으로 밀어내고. 다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물에 둥둥 뜨거든요. 그 사이로 “길을 좀 비켜 줄래요?” 죽은 자들은 듣지도 못하지만 비켜 줄래요, 하면서 가는 거예요. 성도는 세상살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작대기나 준비하시면 돼요.
작대기,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온다는 것은……, 예수님은 이미 우리 인간입장에서 재판해서 죽은 자로 사형시켜서 없는 거예요. 사형되어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없는 자에요. 그 없는 자로부터 말이 들려오는 것, 그것이 성령 받음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20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우리 주’가 지금 없잖아요. 안보이니까 없는데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계시의 정신,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그 재판현장을 주께서는 본격적으로 적용시키시고, 우리에게 되돌려주시고. 재판현장, 십자가사건이 일어났던 그 재판현장을. 그리고 뒤에 나오는 것은 21절에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세상의 모든 권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 하나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이미 하나님은 너희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다는 거예요.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까발리는 그 힘, 능력, 질서, 그 질서는 어디서 오는가? 22, 23절에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분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도 없는 거예요. 다만 교회는 없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게 힘으로 작용하는데 그 힘이 뭐냐? 그것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입니다. 심판사건이에요. 존재는 존재를 붙들 수 있고 존재를 측량할 수 있지만 존재가 못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사건은 붙잡을 수 없고 측정할 수 없고 측량할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붙들려고 한다면, 나는 신자다, 나는 죽으면 천당 간다, 나를 붙들려고 한다는 것은 전부 다 헛짓입니다. 내가 붙들면 안돼요. 그것은 존재가 존재를 붙드는 것이 돼요. 그러면 내가 복음을 빙자해서, 예수를 빙자해서 끝까지 나를 예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나 천당 가려고 교회 오는 게 돼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 존재는 죽은 자들 속에 포함을 시켜놓아서 내가 살았다고 할 수 없어요. 작대기로 밀어내는 둥둥 떠 있는 그 시신, 그 시신 중에 가만 보니 나도 거기 둥둥 떠 있는 거예요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마음의 눈을 열어준 그 사건이 나를 지배한다는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내가 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 사건, 무슨 사건? 심판사건, 그 재판사건, 그 현장, 나를 재판사건의 현장에 관여시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못할 짓을 했다는 겁니다.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는 겁니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지 우리가 죽여야 될 대상은 아니었다는 이야기에요. 여기에 사도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걸었어요.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이 손전등 하나 들고 우리보고 따라오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사도바울이 인도하는 대로 ‘사도바울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나?’ 따라가 보면 죽음 뒤까지 가요. 죽음 뒤까지 우리를 데려간다고요. 마치 동굴 속에 손전등 들고 가는 것처럼. 그러면 우리는 호기심에서 ‘대체 이 세상 끝은 어떻게 되지?’ 궁금해 하면서 도대체 세상 끝에 죽음 뒤에 뭐가 있는가 싶어서 죽 가보니까 턱 받치는 것이 있어요. 보니까 마지막 종착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그게 뭐냐? 십자가에요. 이 세상의 끝은 십자가였습니다.
태초에 재판이 있었어요. 태초에 사건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십자가 있었습니다. 왜? 마지막이 곧 시작점이니까. 알파가 곧 오메가니까. 시작과 끝이 십자가에서 만나기 때문에. 그래서 골로새서 1장에 보면 15, 16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 마지막 예수님을 통해서 드디어 그 형상은 예수님이었다, 처음부터 예수님이었다. 형상이 형상으로 드러나기 위한 그 과정중 하나가 놀랍게도 인간이 하나님을 살해하는 사건이 꼭 필요했던 거예요. 그리고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났다면 그 땅은 생명의 땅이 아니고 죽음의 땅이라는 것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그게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 3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땅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누구든지 죽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땅이 있었다 그 말입니다.
땅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면 죽은 거예요. 땅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죽은 거예요. 왜 죽는가? 죄로 죽는 겁니다. 그러면 죄의 대가는 뭐냐? 지옥이고 그리고 저주요 심판이고, 그런 겁니다. 땅에서 태어난 것, 땅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 것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히브리서 1장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땅을 만드신 이유는 땅이 망하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했잖아요. 추락하는 그 중력에 대해서 존중하라고요. 나를 무너지게 만드는 그 작업에 대해서 우리는 즐겨야 된다 그 말입니다. 내가 망하는 것을 즐겨야 돼요. 그러면 내 존재가 망하는 것이 왜 즐거우냐? 나는 더 이상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사건에 관여되어 있기 때문에. 나 하나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존재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사건에 해당되는 겁니다.
존재를 사건으로 바꾸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너는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야. 주님의 십자가사건의 그 강도야. 구원받은 강도야.”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이것은요, 계속 우리가 속아 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돼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살리는 사건이 여기 있지요. 나를 살리는 사건이.
참,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니 왜 자꾸 미안스러운지, 그런 생각이 들어가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저는 알아듣는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혹시나 못 알아듣는 사람 있을까 미안해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점을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실험을 했어요.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서 무거운 공을 떨어뜨려서 성당의 진자, 당시에는 시계가 없어서 움직이는 진자로 측정해서 실험을 했다는 겁니다. 실험을 해보니까 이런 것이 발견되었어요.
가속도라는 것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속도를 가속시키는 그 비율은 솜털이 되었든, 쇠뭉치가 되었든, 금덩이가 되었든, 죽은 시체를 던지든, 살아 있는 사람을 던지든, 네가 죽은 자냐, 산자냐, 공이냐, 새털이냐, 쇠냐, 나무냐, 크기가 작으냐, 크냐에 관계없이 똑같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뭐냐? 모든 물체는 속도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무게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9.8m/s의 가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가속도 동일의 법칙이지요. 매초마다 떨어지는 비율이 9.8미터씩 떨어지는 거예요. 그 뒤에 뉴턴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이걸 땅에서가 아니고 우주에서 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까, 해서 달이 있고 지구가 있는데 달을 멀리 두지 말고 가깝게 지구에 바짝 붙어서 도는 달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 달은 과연 직선으로 가는 운동이 꺾이고 또 꺾이고 하면서 지구를 뱅뱅 도는데 그 도는 속도를 계산해보니 역시 선배 갈릴레이가 실험했던 결과와 똑같이 9.8m/s의 비율의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거야 뭐 과학의 사실의 하나지.’ 그게 아닌 거예요. 공이든 쇠든 나무든 죽은 자든 산자든 관계없이 인간은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법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법칙으로 인간을 다시 보자는 겁니다. 그 후에 아인슈타인이 등장해서 상대성원리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동일한 빛의 속도로 말미암아, 이것은 특수상대성원리입니다, 세상에 있는 시간, 과거 미래, 과거 미래, ‘과거-현재-미래’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미래밖에 없고,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그 짧은 점 그것만이 이 지구에서 현재가 된다는 거예요.
현재는 거의 면적이 없을 정도로, 폭이 없을 정도로 짧은 순간만이 현재가 될 뿐이에요. 곧장 과거가 되고 곧장 미래가 되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화성에서는 그 짧은,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그 현재가 15분이나 지속됩니다. 이게 무슨 조화냐 하는 겁니다. 이게 상대성원리라는 겁니다. 현재라는 그 짧은 순간이 15분이라는 폭을 가져버리면, 화성에서는 15분, 달에서는 단 몇 초, 태양에서는 8분정도 되겠지요, 그리고 지구에서는 순간이고, 그러면 시간이라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고 시간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나중에 일반상대성 원리에 들어가면 공간자체는 없고요. 시간도 없고요. 공간은 밥그릇 휘어진 것처럼 물질과 물질이 질량에 의해서 휘어진 그 곡면자체가 공간이고 그게 양자역학과 결합이 되어버리면 그 휘어진 곡면에 양자장이라는 새로운 필드가 꽉 들어차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요동치는 양자로 가득 채워져 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원리가 지금 합쳐지고 그래서 이 우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시간도 들쭉날쭉 없는 거예요. 제일 작은 양자라는 입자와 에너지 입자의 질량과 에너지를 상호 교환하는 그것이 이 세상이다, 라고 했을 때 거기에 적합한 설명은 뭐밖에 없느냐? 세상의 모든 것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고, 에너지도 아니고 전부 다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무슨 사건? 재판사건이에요.
주님의 재판의 취지로 꽉 차 있는 그것이 19절에 나오지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충만, 가득 참, 모든 극한이 다 극한으로 드러난 그 순간, 그 사건, 그 사건이 충만이에요. 내가 만약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존재할 때 시간과 공간에 적용받는 식으로, 설명이 되는 식으로 내 존재를 설명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여기 있다가 두 시간 뒤에 어디에 가있다’ 혹은 ‘나는 여기 있다가 조금 있으면 집에 가야 된다.’ 이런 식으로.
공간적으로 어디 가 있다, 또는 시간적으로 내일 되면 내일이라는 것은 지금이 아니다. 이렇게 따지는 모든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내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가 예배 참석했다, 혹은 안했다, 그게 의미가 없다 그 말이지요. 주님의 재판 앞에서는 모조리, 이렇게 해도 그것은 재판사건의 일종이에요. 하나의 과정을 의미하는 거예요. 재판사건의 과정.
‘나는 아침에 대충 밥 먹고 나왔는데 점심에는 담당이 무슨 메뉴 준비했을까? 대구 시에서는 지금 식사를 한다든지 다섯 명 이상 모이면 경찰에 고발하고 폐쇄조치도 한다는데 그러면 쉬쉬 합시다. 우리는 안모였다고 합시다.’ 라고 하는 그런 모든 생각, 그런 생각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재판에 죄인으로 관여할 때 우리의 담당은 뭐냐? 내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으로서 드러내는 겁니다. 왜? 충만하기 때문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그 자체 그런 역할과 기능을 성령을 통해서 드러냈다는 자체가 이미 사건속의 일부로, 사건을 사건 되게 하는 과정의 일부로 고맙게도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참여시켜 준 것이 이게 얼마나큰 복입니까?
‘주님은 나로 인하여 죽었지요?’라고 고백하게 하는, 그래서 십자가사건은 그게 극한이고 극한은 곧 충만이에요. 모든 것이 다 완료된 거예요. 모든 것이 완료된 상태에서 주께서 이 땅에, 1천 9백 몇 년도에 태어나게 하셔서 세상에 어떻게……, 그냥 죽여도 되는데, 그냥 빈대죽이듯이 죽여도 되는데, 어떻게 살아 있으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알게 하십니까?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 있어요?
이게 바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지혜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들 입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그 안목을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받았다는 겁니다. 죄를 짓고 또 짓는 즐거움, 이 즐거움 이상 더 큰 즐거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이미 충만이기 때문에.
내 존재가 질 수 있는 죄는 없어요. 사건에서는 이미 판결이 먼저 났어요. 내가 죄짓기 전에 판결이 먼저 났다고요. 그걸 누가 알았는가? 십자가 사건에 같이 있던 강도가 그걸 알게 된 겁니다. 구원받은 강도가 “나를 구원하려고 강도되게 하셨지요, 그지요, 주님!” 이런 마음을 안다는 것, 그 마음이 누가복음 5장 8절에 나오는 사도베드로의 마음과 얼마나 차이 나는가 보세요.
오늘 설교대로 합시다. 존재가 자기 존재의 시공간을, 밥 먹고 살려고, 지금 나라는 이 존재를 미래까지 이어지게 해서 미래에도 이 존재가 유지되려고, 그 시도를 하려고 고기라는 존재를 그물이라는 존재로 낚아채는 일을 했었어요. 그렇게 일을 하니까, 존재가 불확실한 미래까지 존재를 이어보려고 하니까 고기가 안 잡힐 때는 걱정근심이 오게 된 겁니다.
내 존재가 존재로 버티는데 불안불안 하거든요 내 존재가 피해를 본다 그 말입니다. 나는 존재뿐인데, 나는 내가 사는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고 내 극한인데, 이게 나의 존재의 충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방해받거든요. 걱정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시키는 대로 던졌지요. 고기가 많이 잡혔어요.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누가복음 5장 8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죄인인데 자기를 떠나래요. 밀어내는 거예요. 내 존재가 죄인인 것을 알았사오니 주님이여 이제는 더 이상 나에게 관여하지 말라고 밀어내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존재라는 것,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심하게 추궁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 존재가 되면 나는 비로소 구원될 여지가 있다고 내 존재가 구원될 수 있다는 통박, 계산을 하는 거예요. “주님, 할 일은 다 했으니까……” 하면서 밀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달린 강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 존재가 무너졌어요. 극한이니까 자기 존재는 곧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같이 죽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고 난 뒤의 세계가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겁니다. 주의 나라 임할 때에 저를 생각해 달라. 다시 말해서 “주님이 하시는 일, 주님이 사람에게 재판받고 사형수로 죽음에 넘겨지는 이 사건과 이제 보니 저와 관련성이 있군요.”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사건에 연루되고 관련성이 있다는 것, 그것도 긍정적으로. 이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즐거움입니까? 얼마나 감사할 일이에요? 이미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언급한 것이 있어요. 요한복음 6장 65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눈치를 계속 줬어요. 하여튼 인간은 눈치도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눈치를 줘도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습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이 말은, “너희들은 예수님을 제키고 아버지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몰라서 그런데 내가 진실을 알려주마.”
내게 오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수 없다는 것. 1번, 내게 오지 않으면 아버지 없다는 것. 두 번째,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나에게 오고 싶어도 못 온다는 것.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재판,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재판이 필수적이에요. ‘아, 아하, 예수님의 그 말이 맞구나. 우리가 예수님께 간다는 것이 실패하는 그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님나라에 가려는 그 자체가 애초부터 되지도 않는 일이었구나.’라는 사실을 그들이 예수님을 재판에 넘겨 죽임으로서 그걸 아, 하고 아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이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거구나. 예배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거구나.’라는 사실을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금도 알려주고 있잖아요.
다섯 명 모인다고? 다섯 명도 많을 수가 있어요. 모여서 밥 먹지 말라고? “네가 밥 먹을 잽이 돼? 굶어죽어라 인간아!” 이런 뜻이거든요. 뜻을 제가 너무 오버해서 해석했나는 모르겠는데 “밥 먹지 마. 굶어죽어!” 그런 뜻이라 그 말이지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알아서 교회 문을 폐쇄해 주시니까. 문재인대통령께서 알아서 교회를 폐쇄하잖아요.
앞으로 동영상 그것도 금지할 거예요. “개돼지야, 너는 말씀 들을 자격도 없어.” 그런 하나님의 조치라면 주님께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서 동영상으로 생중계하는 것도 못하게 만들 거예요. “그냥 죽어. 그냥 죽어! 그게 딱 네게 적합해.” 바로 내가 지옥가도 합당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지옥은 극한이에요. 심판, 죄, 전부 다 재판을 통해서 이미 극한으로 나가는 그 극한적인 상황을, 충만 된 상황을, 완성된 상황을 우리가 성령이 왔기에 비로소 눈을 떠서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께서 하는 일이 나와 있어요. 성령의 객관적 일이 뭐냐 하면, 7절에 보면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어요. 유익이 없다니?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천국 갈 준비하고 있는데, 지금 천국캠핑 가려고 텐트준비하고 주님과 같이 천국에 캠핑 갑시다, 하고 있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같이 붙어 있으면 되잖아요. 주님과 같이 붙어 있어서 으샤으샤 하면 천당 가잖아요. 이게 인간들의 생각이거든요. “놔라. 네가 단절을 알아야 돼. 단절도 모르고는 내가 가는 곳에 갈 수가 없어.” 그래서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게 뭐냐 하면, “재판이 없어버리면 너는 너 존재를 천국에 보내려고 할 것이다.” 재판이 있어버리면 어떤 존재도 죽은 자들에 포함된 둥둥 떠 있는 시신덩어리에요. 통나무 덩어리. 가기는 어딜 가? 지옥가야지요. 그게 합당하거든요. “나라는 존재는 지옥가야 합당합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를, 나를 죽여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은 살아 있기 때문에 안 죽으려는 이유를 평생토록 자꾸 드러내요. 내가 안 죽어야 될 이유, 지금 죽지 않아야 될 이유, 애가 어리니까 난 죽으면 안 돼, 이런 식이지만 사도바울은 이미 자기가 죽었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내놓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나는 왜 죽어야 되고, 왜 죄인이 되어야 되고, 그 이유와 주님께서 이렇게 살아 있기 때문에 이게 기쁨이 되고 죽는 것이 합당하다는 이러한 희한한 고백, “주님이 내안에 살아 있고 성령이 오심으로서 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 모든 것은 이미 십자가를 만났고, 완료가 되고, 그게 충만이기 때문에, 충만이라는 것은 완료, 완성,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룸, 하나님의 재판의 취지가 완전히 살아 있음, 그걸로 가득 참, 어딜 쑤셔도 주님의 재판과 연루된 사건이 벌어지는 그러한 현장, 이 세상 나라 모든 현장이 주님의 사건과 관련된 현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의 이 말씀뿐만이 아니고 평소에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어요. 너희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했거든요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어린아이의 특징이 뭐냐? 자기 역사가 없어요. 어린아이는 나이를 몰라도 괜찮아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자기 나이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괜히 어른들이 쑤셔서 “몇 살? 손가락으로 세 살이라고 해.” 그것은 어른들의 궁금증이지 애는 자기 나이가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모든 인간은 나이가 제로가 돼요. 왜? 매순간 사건이기 때문에. 작년에 은혜 받았다고 올해 두 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매순간 죽고 매순간 살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그냥 이미 완료된,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그냥 사건이에요. 주님의 사건이 벌어지는 그냥 터져버리는 현장으로서, 사건에 관련된 인물로서 자기 자신을 증거 하는 거지요. 나는 죽어야 되고, 주님은 내 안에 살아야 되고, 이게 바로 십자가사건 재판사건의 확장이고 전개고 연장이다. 뭐가 더 필요합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의족이라는 것은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 의족이에요. 의족을 하고 있는 사람보고 다리 있네, 그러면 안돼요. 다리 없음을, 다리가 끊어졌음을, 너희는 다리가 있지만 나는 다리가 없음을 보여주는 그 상징물이 그 증거물이 의족입니다.
성도에게 존재는 의족이에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여기 있는 걸로 보이냐?”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의족이에요. 그런데 이게 사건이 안 터지면 자꾸 나는 더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코로나 19를 보내줘 가지고, 식구인지 십구인지 모르겠지만, 보내 줘가지고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그래, 나 참 의족이지. 나는 이미 잘렸지.’ 이미 이 존재는 잘려버리고, 이 잘렸다는 것을 증거하기위해서 주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매일같이 살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증거 하라고 말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감사해야 될 이유를 알게 하옵소서. 사도바울이 모든 것을 그분에게 일어난 사건에 기쁨과 즐거움 넉넉함으로 감사함으로 마음껏 증거 하듯이 우리도 주저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사건으로 모든 것이 게임 끝났음을 원 없이, 죽을 때까지 마음껏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