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숙경

화해의 조건

아빠와 함께 2021. 1. 17. 10:43

title : The Condition for Reconciliation 화해의 조건
preacher : pastor Lee Geunho
text : Colossians 1:19-20
date : January 10, 2021
19.For God was pleased to have all his fullness dwell in him, 20.and through him to reconcile to himself all things, whether things on earth or things in heaven, by making peace through his blood, shed on the cross.

SUMMARY

Reconciliation with God presupposes that we were originally enemies of God. In addition, that "God was pleased to have all his fullness dwell in him" means that God recognized the space called Jesus as the only space of completion where God was satisfied and pleased with the complete elimination of elements of discord with God. Therefore, the labor of seeking the fullness of God “outside Jesus,” that is, within man, is in vain and it is a sin. This is because God was glad that his people would be reconciled to himself only through the blood of Jesus, which was shed on the cross.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은 본래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을 전제한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 안이라고 하는 공간을 하나님과의 불화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는 유일하게 온전한 완성의 공간으로 인정하셨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 밖’, 즉 인간 자체 내부에서 하나님의 충만을 찾으려는 수고는 헛되며 그것은 죄다.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에 흘려진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만 자기 백성이 자신과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This means that those who have not benefited from Jesus' cross blood cannot enter the space of Jesus and cannot be in a state where God is satisfied. Despite this reality, humans do not know that they are at odds with God, and moreover, they do not know why their own contributions should be completely excluded from reconciliation with God.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상태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불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며 더욱이 하나님과의 화해 작업에 인간 자신의 기여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도 모른다.

Ephesians 2:3 states the nature of man as follows : “All of us also lived among them at one time, gratifying the cravings of our sinful nature and following its desires and thoughts. Like the rest, we were by nature objects of wrath.” 에베소서 2:3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Essentially, humans are those who cause God's wrath. That's all that humans can do. Therefore, anything that pleases God cannot come from man. Romans 3:23 clearly declares that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본질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자들이다. 그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나올 수가 없다. 로마서 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명백하게 선언한다.

God's regulation of human beings is over, and humans should no longer talk about it. This means that humans, who are by nature objects of wrath, have a broken path through which they can enter the space of Jesus. So, if someone is "in Jesus," it is a miracle, and he is only a person newly produced by the Holy Spirit through the blood of Jesus shed on the cross.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은 끝났으며 여기에 대해 인간들은 더는 군말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인간이 ‘예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끊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예수 안’에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이며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의 피를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생산된 사람일 뿐이다.

The only condition for “reconciliation” with God is that Jesus must be rejected and killed by humans. Humans are only those who, despite all the hard work of serving God, hinder the work of God declared by Jesus who came down from heaven. God puts the blood of Jesus shed on the cross to the fore and pushes the flesh of the saints to the extreme. God puts the blood of Jesus shed on the cross to the fore and drives his people to the extreme. The final point is the cross, where they participate in reconciliation with God through the blood of Jesus. 하나님과의 ‘화목’의 유일한 조건은 예수님께서 인간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죽임을 당해야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선언하신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방해하는 자들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의 피를 전면에 내세우시고 자기 백성을 극단으로 몰아가신다. 그 마지막 지점이 십자가이며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의 피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에 참여하게 된다.

Daniel's three friends, Shadrach, Meshach, and Abednego, were those who were treated with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by the coming Jesus in advance. Chapter 3 of Daniel records the affair in which Jesus, "the Word," personally entered them and pushed them to the extreme, causing them to participate in the death of Jesus' cross in advance. Since they are also “by nature objects of wrath”, there is no way to enter "the space of Jesus” on their own. This is because humans always calculate the their own profit before making a choice. The “absolute subject” of humans is supposed to show intense rejection to the Word.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장차 오실 예수님에 의해서 구약시대에 ‘말씀’으로 미리 다루심을 받은 자들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친히 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미리 참여하도록 유발시킨 사건이 다니엘서 3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또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자력으로 ‘예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인간은 선택에 앞서 늘 실익을 계산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대적 주체’는 말씀에 대하여 극렬한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어있다.

Daniel's three friends met the fourth person who was waiting for them when they were thrown into the furnace, the place of death, the place of fear that humans absolutely want to avoid. He was the Son of God to come, that is, Jesus Christ who would been crucified and hated by men. Eventually, the furnace fire where Shadrach, Meshach, and Abednego were thrown was “the space of cross” and “the space of Jesus.” It was the only place where they could participate in reconciliation with God.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인간들이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어 하는 그 두려움의 장소, 죽음의 장소인 풀무불속으로 던져졌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네 번째 사람을 만났다. 그분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예수 그리스도셨다. 결국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던져진 그 풀무불은 ‘십자가 안’이었으며 ‘예수 안’이었다. 그곳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에 참여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Entering the cross, the absolute subject and absolute object called "I" and "you" are extinguished, and there is only "us" that Christ chooses and subordinates to Christ. In it, there is no “me” to protect by yourself, and there is no “you” to evaluate and judge. There is also no reason for me to evaluate or measure myself. 십자가 안에 들어서게 되면 ‘나’와 ‘너’라고 하는 절대적 주체와 절대적 객체가 소멸되고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 종속된 ‘우리’만 있을 뿐이다. 그 안에서는 스스로 지켜야 할 ‘나’도 없고, 내가 평가하고 판단내릴 ‘너’도 없다. 거기서는 내가 나를 평가하거나 측정할 이유도 사라진다.

Chapter 22 of Genesis explains how we, by nature objects of wrath, who have an absolute subject are moved into Jesus, through the case of Abraham offering his son Isaac as a burnt offering. Just as Abraham's sword aimed at Isaac, his beloved son for the burnt offering to God, the sword of God the Father stabbed His beloved Son who was presented as a sacrifice of atonement on behalf of the sinner, so peace was achieved between God the Father and God the Son. There is no room for human beings to intervene here. Because all humans agreed to crucify Jesus. 창세기 22장에서는 절대적 주체를 갖고 있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가 예수 안으로 이동되는 방식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사건을 통해 설명된다. 하나님께 드릴 번제를 위하여 아브라함의 칼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겨누었듯 하나님 아버지의 칼은 죄인을 대신하여 화목제물로 드려지는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내려 꽂혔고 이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인간은 끼일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동의했기 때문이다.


Now God applies Jesus' crucifixion to his people who were by nature objects of wrath and moves them into the space of Jesus. The saints are those produced by the effects of fellowship offerings. The space where they are located is a closed space called a cross, where the sword of God's word aimed at the saints persistently penetrates into the bones of the saints, drawing fierce opposition from them and revealing the elements of “the offspring of the serpent” that bruises the heel of “the woman's offspring".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시면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을 예수 안으로 이동시키신다. 성도는 화목제물의 효과에 의해서 생산된 자들이다. 이들이 있는 공간은 십자가라고 하는 폐쇄공간이며 그곳에서는 성도를 겨냥한 하나님의 말씀의 칼이 집요하게 성도의 뼛속까지 파고들어가서 그들에게서 극렬한 반발을 이끌어내고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깨무는 뱀의 후손의 요소를 드러낸다.

Hebrews 4:12-13,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Nothing in all creation is hidden from God's sight. Everything is uncovered and laid bare before the eyes of him to whom we must give account.”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The apostle John introduces the state of reconciliation with God in another way : “We know that anyone born of God does not continue to sin; the one who was born of God keeps him safe, and the evil one cannot harm him. We know that we are children of God, and that the whole world is under the control of the evil one(1 John 5:18, 19).”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화목된 상태를 또 다른 방식으로 소개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8, 19)”

This means that just as detox juice drains toxins from the body as excrement, the blood of Jesus makes the sins of his people continue to excrete as excrement. This is the unfamiliar phenomenon of reconciliation with God that occurs in those who have been forgiven for their sins. Thus, they are willing to confess that all that comes out of them with gratitude and joy in a space where the second death has no power over them(Revelation 20:6) is all sin. 이것은 해독주스가 몸속의 독소를 배설물로 배출해내듯이 예수님의 피는 자기 백성의 죄를 계속해서 그들에게서 배설물로서 배설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죄 사함 받은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낯선 하나님과의 화목의 현상이다. 따라서 그들은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는 공간에서(계20:6) 느긋하게 감사와 기쁨으로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온통 죄밖에 없음을 기꺼이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This is the way the Word is done “as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Israel itself was the only closed space in the world. In that space, they had to face only God. Throughout the wilderness they had to be constantly reminded that they were "by nature objects of wrath". Today, the position of the saints is no different from that of them. 이것이 말씀이 ‘말씀대로’ 행해지는 방식이다. 구약 때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유일한 폐쇄공간이었다. 그 공간 안에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마주해야 했다. 그들은 광야를 통과하는 내내 자신들이 ‘진노의 자녀’임을 계속해서 일깨움을 받아야 했다. 오늘날 성도들의 입장이 그들과 다름이 없다.

이근호

“예수 안에서는 스스로 지켜야 할 ‘나’도 없고, 내가 평가하고 판단 내릴 ‘너’도 없다. 거기서는 내가 나를 평가하거나 측정할 이유도 사라진다.” 내가 그동안 나에게 지적을 퍼부었던  ‘너’(타인)의 역할을 지속할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네 인생이 힘든 것은, 외부의 공격을 막던 그 면역체계가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도 사정없이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화목했다면서도 내가 나와는 화목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 대신 가혹하리만큼 철저함을 요구하는 것은 악마성의 잔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악마성이 ‘자기 의(義)’이다. 이 자기 의는 늘 배설물이 되어 빠져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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