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입자와 파동

아빠와 함께 2020. 12. 20. 19:58

입자와 파동

2020년 12월 20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15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사도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로 제시합니다. “그분(예수님)으로 살래 아니면 너로 살래?” 예수님에게는 “다 이루심”이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에게는 “다 이루심”이 없습니다. 이는 곧 인간에게는 그 어떤 가능함도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름대로 인간들은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의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다 이루었다”고 했을 경우, 더 이상,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희망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배후에 귀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3-26에 보면,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자신의 일을 하시는 모습은 인간 내부에 들어앉아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이 귀신 추방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말씀대로 일을 제대로 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긴 역사 속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조차 인간들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냥 무턱대고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다합니다. 자기 속에 귀신이 들어있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이유는, 그동안 인간들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우기며 살아온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깨서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죄짓는 외에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능성을 신뢰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불가능한 존재인 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노선 변경’을 할 줄 몰랐습니다. ‘노선 변경’이란 신약 때 십자가가 나타나므로서 제대로 가능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십자가를 향하여 돌진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다 이루심’이 거기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로 돌진하면 사정없이 죽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개별자, 혹은 입자로서 죽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상대자로 못되면서 상대자 노릇을 하던 자아가 악마의 사주를 받는 처지에서 어떤 시도도 다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으로 내세웠고 또는 ‘태어나신 적이 없이 하나님에 의해 먼저 태어나신 분’으로 세움을 입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시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완성의 경지에서 말입니다. 곧 기존의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그 인간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이유는, 율법을 유일하게 완성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로 자처했지만 그들은 모조리 율법의 완전함을 성사시킬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의 신체보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선입니다. 인간의 신체란 하나님의 형상을 담는 그릇같은 겁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므로서 인간은 인간보다 우월한 권세에 예속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계열은 곧 범죄의 계열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인간의 숫자가 많더라도 그 개별성의 대표는 아담, 곧 악마의 사주를 받는 범죄한 아담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신 자’예수님을 이 땅에 출생시켰습니다. 이로서 아담은 아담나름대로  계열을 형성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예수님 나름대로 새로운 계열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인간이 성도된다는 것은 곧 ‘노선변경’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노선변경의 특징은 인간이 개별체에서 파동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은 신약 때 와서 이루어집니다. 구약을 통해서 볼 때, 인간의 개별자 노릇은 모조리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는 더 이상 개인에게 율법의 요구를 따지지 않습니다.

어차피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다른 대표입자, 대표 개별자를 나시게 해서 출발시키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먼저 나신 자’이십니다. 이 ‘먼저 나신’뒤에서 이 계열의 원칙에 따라 ‘나중 날 자’들이 뒤따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본질이 마치 ‘플라스틱 제품 제조 공정에 쓰이는 사출기’처럼 뿜어져나와 성령의 선물로 동일한 효과를 낳습니다.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 15:22-23)

두 개의 대표입자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과 악마에게서는 각각 의의 파동과 죄의 파동이 세계를 덮게 됩니다. 구약의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백부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독자성이나 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악마에 여전히 묶여서 못 빠져나오는 자들은 자신의 자아성을 대표입자로 여기기 때문에 누적된 자신의 과거사에 미련 갖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나름대로 의의 완성을 도모하게 됩니다. 그들은 과거와 이별할 줄을 모릅니다. 과거가 없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취지는 출애굽 때의 유월절 취지를 완성시키신 겁니다. 실제적인 입자는 유월절 희생 양입니다. 이 양으로부터 시작해서 혈육의 노선을 단절 됩니다. “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단층이 생긴 겁니다. 새로움이 시작되는 겁니다. 성도는 매일같이 이 사건이 반복되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지나 내일이 되면 오늘마저 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그대로 이어지면 그것이 입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유일하신 입자이신 예수님의 공로로 가로 막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을 가려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불가능한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구원’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의 구원’에 우리가 참여되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골 1장 15-16(입자와 파동)20122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15-16절입니다.

골로새서 1:15-1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3절에 보면 “그가” 이렇게 되어 있고 또 14절에 “그 아들 안에서”라고 되어 있고 또 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라고 그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로 인하여 살래, 그로 인하여 살래?”라고 아주 끝장내자는 투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동안 너희들은 너로 인하여 살았다는 겁니다. 네가 소속되어 있는 이 세상 방식대로 살았다는 겁니다.

그가 빠져버린 세상, 그가 추방된 세상, 그를 추방시킨 세상, 그분이 안 계신 세상, 여기서 출세하려고 하고, 성공하려고 하고, 여기서 모든 가치를 결정하려고 그렇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세상의 인간들이 밀어버린, 추방시켜 버린 그를 다시 이곳으로 가지고 옵니다. 가지고 올 때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다 이루심’을 가지고 개입을 해요.

그렇다면 다 이루셨는데 뭘 다 이루셨는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빠져나감으로서 빠져나간 그 경계선에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을 해버리면 결국은 우리가 그렇게 안착하려고 하고, 안정되려고 하고, 뿌리박으려고 하는 이 세상은 다 이루심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미완료의 세계에 우리가 놓여 있어요.

미완료의 세계에서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여전히 미완료로 그치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완료는, 다 이루었다 하시는 분은 바로 그분밖에 없다는 거예요. 다 이루신 분. 그러면 다 이루신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로 옮겼는데 그걸 부족함이 없이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분에게만 들어가야, 그 속에 들어가야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무사히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합격 통지받고 거기에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그 완성이 다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14절에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분의 아들 안에서, 다 이루심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이미 얻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죄사함을 이미 얻은 거예요.

그렇다면 그 완성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죄를, 죄가 있는 것을 죄사함으로 전환시키는 그 기능이 그분에게만 있습니다.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만이 우리에게 줄 수가 있어요. 왜? 우리는 미완료고 그분은 완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이런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이야기해도 안 듣고, 거부하고, 반항하는 사람이 있는데 교회에도 있고 다른데도 있고 그렇습니다만, 왜 그런 현상, 사도가 안타까워서 전하는 그분에 관한 소식, 다 이루었다는 그 소식에 관해서도 사람들이 뭉그적거리면서 의심하면서 주저하는 이유가 뭐냐?

그 십자가라는 것에 다가갈 때는 그냥 따져서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하면 모기가 창호지에 다가설 때 창호지가 앞에 막혀 있다고 해서 주저하지 말고 시속 100킬로의 속도로 모기가 창호지를 뚫을 기세로 그대로 들이박는 거예요.

그러면 창호지 바깥에서 모기는 장렬한 죽음으로 툭 떨어지겠지요. 그 장렬한 죽음으로 톡 떨어진 그 곳이 예수 안이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돌진하면 되는 겁니다. 어디로? 그 완성 속으로, 완성 속으로 돌진하면 되는 거예요. 미국 나사에서 올린 그 우주선이 달이나 목성 화성에 갈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목성 화성의 인력에 그냥 맡겨요. 그냥 맡긴다고요.

하늘 유성이 지구에 올 때 자기 힘 다 빼고 그냥 지구와 충돌하듯이, 과감하게 충돌하듯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어떻고, 신학이고 복음이 어떻고, 다 치우고요, 그냥 한 마리 윙 하는 모기라 생각하고 창호지 그 벽을 향하여, 십자가를 향하여 그냥 부딪히는 거예요. 충돌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죽지요. 죽는 것 맞아요. 그러나 우리가 죽게 되면 그동안 얽히고 섥혔던 인연들, 혈육관계, 그리고 남들의 평가, 내가 나를 이렇게 자책하는 것, 그리고 과거에 어떻게 살았던 것, 죽는 입장에서는 어떤 평가, 점수라든지 죽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그게 좋은 거예요. 과거의 꼬리 자르기가 드디어 성사된 겁니다. 나의 과거 꼬리 자르기가.

오늘 열심히 살아도 내일되면 오늘이 과거가 돼요. 과거가 늘 잘리는 거예요. 우리 몸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몸 보고 몸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따라서 삽니다. 내 신체가 이렇다, 이야기 안 하잖아요. 내가 이렇다, 고 이야기하지요. 내 신체는 따로 있으면서 자아가 그걸 대표해서 자아를 가지고 나는……, 맨 날 나는……, 이렇게 하면서 남에게 다가가잖아요.

그 자아는 과거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과거로 만들어진 자아를 그냥 천사한테 맡기세요. 맡기고 천사가 이 죄를 어떻게 의로 바꾸는가? 그것은 그분에게 맡기세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결코 자폭하는 것 외에는 완성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미완료인데 미완료가 미완료 값을 해야지요. 안되면 안 되는 값을 하면 돼요. 해도 해도 안 되면 ‘아, 안 되는구나.’ 하고 그냥 자폭하면 되는 겁니다.

자폭하되 장소 잘 골라야 됩니다. 교회 가서 자폭하지 마시고, 기도원에 가서 자폭하지 마시고 십자가에 자폭해야지요. 십자가사건에 자폭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어려운 거예요. 어느 장소에 가서 돈 바치라 하면 그것은 할 수 있어요.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 열심히 읽어라, 하면 할 수 있는데 십자가에다 앵 하는 모기처럼 그냥 자폭해버리라고 하면 그 십자가가 어디 있는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완성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사도가 덧붙이는 것은 이런 것들은 성령이 하게 하신다, 하고 성령 몫으로 돌리지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일은요, 이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모든 과거라 하는 것은, 왜 사람들이 과거를 쥐고 못 놓느냐 하면, 그게 가능, 가능, 가능, 계속 가능으로 누적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가능한 것들로 계속 차곡차곡 쌓였다 이 말이지요. 그러나 그 가능한 것으로 계속 쌓여봤자 결국은 미완료고 완성되지 못한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성령께서 주실 때는 이 미 다 이루었다, 로 주시거든요. 다 이루었다, 로 주실 때 그 내용은 우리가 불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가능한 것으로 즐겼다면, 인생 보람을 삼았다면 이제부터는 불가능한 것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으로 매사가 둘러싸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셔야 돼요. 제가 어느 설교할 때 그런 예를 들었지요. 보리건빵에서 보리가 98퍼센트인 줄 알았는데 밀가루가 98퍼센트고 보리는 2퍼센트밖에 안된다고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십자가에 돌진해서 그 안에 툭 떨어진 사람은 사실은 백퍼센트 전부 다 불가능입니다. 다 불가능이에요. 백퍼센트.

그 백퍼센트 불가능속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못했는데 주께서 하셨다는 그걸 즐겨야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미 완성된 것 다 이루었다, 가 주어지고 내 신체, 내가 입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전부다 이게 주님의 불가능한 기적이라면 현재 내게 있는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하나의 유품으로 생각해야 돼요.

이미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남겨진 것을 유품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미 죽었다고 쳤을 때 시계, 지갑, 모든 것이 하나의 유품이에요. 매일같이 자기 주변정리를 하시면서 살아야 됩니다. 남겨두지 말고, 오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주변정리를 하시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코로나 3단계 앞두고 마트에 가서 라면 사지 마시고 번개탄을 사 모으셔야 돼요. 번개탄 사모아서 집에 번개탄을 이만큼 놔둬야 된다 그 말이지요.

물론 또 일부러 번개탄 사 모으려고 하지는 마시고요. 라면을 사셔야 되지요. 라면을 사되 라면이라는 이름의 번개탄, 가끔은 자장면이라는 번개탄, 때로는 짬뽕이나 탕수육 먹는 번개탄, 요새 12월 되면 대게라는 이름의 번개탄, 그냥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로 여기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유품이고 그리고 내일이 이어지는 그것조차 나의 가능함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일 되면 내일 치 또 하나님의 불가능한 기적의 선물들이 내일 또 살게 하시면서 또 주시니까요. 그렇게 해서 불가능속에 헤엄치는 것처럼, 불가능속에 춤추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거울 속에서 로사리오가 춤춘다는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집어넣었더니만 제 딸이 너무 동화가 무섭다고 그 이야기는 못 듣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무서웠나, 거울 속에서 춤을 춘다는 그 이야기가 그렇게 무서웠나? 그래서 오늘은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를 할 참입니다. 목욕탕에 가면 세신실이 있잖아요. 사람 엎어놓고 때 미는 그 장소, 그 세신실에 고객이 들어갔어요. 거기 들어가면 꼭 그게 있어요. 때 미는 사람만이 쓰는 수건이 걸려 있어요.

그걸로 때를 미는데 나중에 보니까 손님이 아예 사라졌어요. 왜냐하면 때를 밀다 보니까 그 인간 자체가 때였어요. 때를 밀다 보니 다 밀려서 아예 사람자체가 없어졌어요. 때 덩어리였어요. 인간 자체가.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왜냐하면 미완료기 때문에. 그냥 고상하게 해서 미완료지 더러움 덩어리에요. 더러움 덩어리에서 어느 선까지 가 깨끗하고 어느 선까지가 더럽다는 게 이게 경계선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 ‘주께서 다 이루었다’ 앞에서 우리는 버려야 될 때 덩어리이기 때문에 여기다가 뭘 해보겠다, 이 땅에서, 흑암의 권세에서 출세하겠다고, 뭘 하겠다고 해봤자 주님께서는 미완료라는 이름 때문에, 네가 불가능한 기적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끝장내자는 거예요. 이 말씀 가지고. 이 말씀을 딱 던져놓고 “너 그로 인하여 살래, 계속 너로 인하여 살래?” 끝장을 보자는 거예요. 이 말씀 가지고. 그러면 끝장을 어떻게 보는가? 오늘 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그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 말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것까지 하고 끊어버리세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형상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분이라는 말이지요. 그분을 본 것은 곧 아버지를 본 거예요.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처럼. 그리고 그 뒤에 보면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되어 있는데 태어난 적도 없는 분이 먼저 태어나신 거예요.

태어나신 적이 없는 분이 이 땅에 태어나신 겁니다. 아기로,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미완료된 세계에서, 미완성된 세계에서 이미 주 하나님께서 주어진 완성의 모습은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형상을 본받고자 해도 그것은 미완료에 불과하고, 추접하고, 더러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신 분으로 개입하신 거예요.

형상 면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끊어진 그 사이에 예수님께서 개입해서 끊어진 것을 이어가는 겁니다. 형상 면에서 잇게 되고, 연계하고, 또 하나님의 나라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 하나님의 백성된 것이 아담의 죄로부터 끊어져 있는 백성을 예수님이 개입해서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시는 그 최초의 피조물로 태어나시는 그 분으로서 연계시키기 위해서 예수님 오신 겁니다.

그렇다면, 먼저 나신분이 최초라면 그 뒤에 그분에 의해서 태어난 모든 자는 계열을 이루고 줄, 하나의 노선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한마디로 이야기하게 되면 사도바울은 우리보고 말하기를, 너는 노선 변경했는가를 묻는 겁니다. 기존의 노선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이미 노선변경입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노선변경이잖아요.

노선변경인데 ‘까짓 거 그 노선변경 교회에 가서 시키는 대로 행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 것은 인간이 가능한 겁니다. 인간이 가능한 것 같으면 주님이 이 땅에 개입할 이유가 없어요. 인간이 아무리 해도 가능치 않은 일을 주님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신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질 때도 우리 쪽에서 믿고자 시도하는 이것도 우리가 가능한 행함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님께서 우리 식으로서는 불가능한 기적적인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다 이루었다’는 상태로 우리에게 그냥 주시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는 상태로. 자, 그렇게 노선변경이 되었다면, 예수님이 먼저 나신 분의 최초가 된다면 그 뒤에 줄줄이 따라가는 그 계열, 그 노선에 우리가 들어갔다면 들어갔던 사람의 특징이 있을 것이고 들어갔던 사람의 어떤 정보가 있을 거예요. 어떤 특징, 어떤 증거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 때부터 시작을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둘로 나눠서 생각할게요. 첫째는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라고 했으니까 하나님의 형상 그것을 계열로 설명하고 그 다음에 먼저 나신 자, 인간창조에 대해서 또 하나의 계열로 둘로 나눠서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창세기 5장에 보면 기존 노선이 나와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 이후에는 계속해서 아담의 형상을 본받는 자들이 태어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는 창세기 1장 26절의 말씀도 같은 말씀인데 이건 뭐냐? 형상이 먼저고 그 다음에 사람의 신체가 나중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상이 없으면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거든요.

쉽게 말해서 곡물을 수송하는 화물칸은 뚜껑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열리면 위에서 곡물이 내려오고 다 실으면 곡물 칸 뚜껑을 닫아버린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하나님 형상을 곡물로 여기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담기 위해서 흙으로 인간의 신체를 만드신 거예요.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형상을 실어버리는 겁니다.

붕어빵 만들 때 앙꼬 투하 공정이지요. 붕어빵 틀에 밀가루 부어놓고 거기다가 앙꼬 투하하잖아요. 그래야 붕어빵이 되지 붕어빵 속에 앙꼬 없으면 물어줘야 돼요. 인간이라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냐 없느냐에 따라서 내가 받아들일 인간이냐 아니면 내가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을 인간이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 하나의 인간, 하나의 개별자, 개체를 저는 하나의 입자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 죽 내려오기 전에 그 형상되는 입자가 악마와 결탁해서 하나님형상대신 악마의 형상이 들어왔지요. 악마의 형상이 들어온 겁니다.

마가복음 1장 23절 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나와 있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할 때 우리 인간은 뭔가 주님보시기에 나올 구석이 있어요. 나올 건더기가 있어요.

주님께서 붕어빵 만들기 위해서, 속을 비우기 위해서 긁어내는 거예요. 나오라 그 말이지요. 귀신이 들어 있는 이상 아무리 신학을 공부하고, 아무리 목사가 되고, 아무리 성경을 달달 외워도 이미 귀신이 박힌 이상 이것은 하나님께서 완성된 것으로 받아주지를 않는 겁니다. 빼내고 집어넣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내내 하나님 하신 일은 뭐냐? 율법을 계속 이스라엘에 투입했어요. 계속 율법을 줬는데 율법을 주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율법을 주니까 악마가 그것을 전부 다 달리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율법을 더 줘버려요. 더 줘버리면 더 준 것까지도 달리 해석하지요.

그러면 율법은 양날의 칼이 있어서 만약에 율법대로 못살 경우에는 율법을 받은 대상자가 저주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 나라였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이 처음 만들어진 그 날 밤에, 유월절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녀를 죽입니다. 맏이를 죽이거든요. 맏이를 죽이고 다른 노선에 맏이를 집어넣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유월절 어린양으로 바꿔치기를 한 겁니다.

누구한테만 그렇게 혜택을 줬느냐 하면, 맏아들에게만 그런 혜택을 줬습니다. 그래서 맏이에게만 유월절 어린양으로 안 죽고 다른 남아 있는 가족들은 맏이의 운명에 종속되도록 한 겁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맏아들, 맏이, 장자, 이 개념을 구약 때부터 하나님께서 특별관리체제에 들어간 겁니다. 맏아들 개념, 맏아들 개념이 어떤 계열을 이루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뭐냐? 맏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 그들은 맏아들에 종속되어야 됩니다. 맏아들이 그 집안의 구세주가 되는 거예요. 맏아들의 형상을 이스라엘 속에 계속 집어넣으려고 하나님이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입자 하나의 개체가 되는 이스라엘은 그러한 율법이 다가올 때 그들의 신체 속의 귀신이 나가야 되는데 귀신이 나가지 않고 그대로 귀신이 있는 이상은 여기서 다 튕겨져 나가버린 거예요. 율법이라는 그 뜻, 취지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율법이 배척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이 실험하신 것은 인간 대 인간의 입자, 입자 개체와 개체,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는 어떤 것도 이것은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성도를 하나님이 하나의 입자로, 개체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닌가?

신약에 와서는 우리를 개체로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뭘 로 사용하느냐? 하나의 파동으로 사용하지요. 파동, 입자 반대말이 파동인데요. 파동은 뭐냐 하면, 자기의 주인공이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모든 사람을 죽은 자로 간주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간주하고 그 다음부터는 신약에 와서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율법가지고 뭘 묻지를 않아요.

이미 구약에서 실험은 다 끝났어요. 인간은 입자로서는, 하나의 상대자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마지막 때 먼저 나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입자,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약속의 상대자로 정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과 다른 입자, 다른 사람들, 열 두 제자와 예수님 사이를 비교해 보세요. 유대인이나 사두개인과 예수님을 비교해 보세요.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를 못해요. 그런 가운데서도 마가복음 1장 말씀대로 계속해서 귀신을 보고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귀신은 인간의 과거사를 가지고, 자아를 가지고 입자화 시켜서 인간을 자기의 대표입자로 이 세상에 자꾸 등장시키는 겁니다. 귀신이, 마귀가 우리 속에 있어가지고. ‘네가 잘돼야 만사가 잘 된 거야.’ 너라는 그 개체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를 한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시켜서 인간의 개체를 살리는 인간들이 어떻게 해서 살아가느냐 하면, 받아들이는 방법은 모르고 밀어내는 방법만 알면서 계속 최후의 마지막에 뭔가 내 것이 있어야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악마로부터 훈련받은 겁니다. 그게 세상적으로 말하면 자존감이지요.

모든 인간은요, 자존감으로 완전히 패딩을 입었어요. 이 밑까지 전부 다 자존감으로 무장되어 있어요. 심지어 꼬마, 일곱 살이나 여덟 살 먹은 꼬마도 자존감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일곱이나 여덟 살 먹은 애가 트롯 부르는 것 보면 내가 보기에는 노래라기보다는 자존감이에요, 자존감. 엄마가 그렇게 키웠어요.

입자는 예수님 한분으로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하나님 형상을 잃었기 때문에 전부 다 죽여 버리고 대표입자를 세우는데 예수님이라는 대표입자, 그리고 악마라는 대표입자 둘 사이만 딱 남기고 나머지는 다 사라지게 만들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다 죽여 버립니다.

악마는 아담 안에 계속 숨어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자라고 자꾸 자기를 추천해요. 자기를 응원하고 격려하고 추천하면서 “하나님,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가 대표입자로 나서는 거예요. 뒤에서 마귀가 자꾸 부추기는 겁니다.

‘네가 잘 하느냐 잘못하느냐 에 따라서 너는 구원받느냐 지옥 가느냐가 결정된다. 그것은 너 하기 나름이다.’ 자꾸 너 하기 나름이라고 했어요.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나로 살래요, 아니면 그분으로 살래요?” 언제까지 계속해서 나에게 의지하렵니까? 분명히 나는 미완성인데. 뭘 해봐도 미완성이에요. 그분이 공연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분 때문에 우리는 완성이 되는 건데 그분을 세워놓고 우리는 나 챙길 궁리만 하는 겁니다.

기생 라합은 그냥 항복해서 구원받은 거예요. 미리 항복한 거예요. 백부장도 미리 항복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이유는 더 이상 항복할 건더기가 없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자꾸 악마는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근원에 대해서 자꾸 인간 본인이 근원이고 기원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 속에 귀신이 없어야지요. 악마와 귀신이 우리를 자꾸 앞장세워서 자기는 숨기고 우리를 가지고 앞장세워서 네가 하나님과 상대하라고 자꾸 부추기네요. 전도하라, 헌금하라, 기도하라, 예배하라, 계속 우리를 부추기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대표할 대표입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되었던 열두 제자가 되었든 어떤 인간도 그 사람의 행위로 그 사람의 가능함으로 구원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신약에서는 성도는 어떻게 발생되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계열에 속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것은 관계입니다. 관계. 파동이라는 말을 할 때는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라는 것이 있어요. 양자물리학에서. 그 파동방정식의 특징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직각삼각형의 비례, 밑변, 빗변, 그리고 높이, 이 세 가지의 비를 무한 반복으로 비례를 하는 거예요. 그게 코사인이 되고 사인이 되는 거예요.

코사인이 되고 사인이 되면 하나의 존재가 뭐로 되느냐 하면, 이게 파동이 된다고요. 계속 뺑뺑이 도는, 무한반복 하는 파동이 되는 겁니다. 비례가 된다는 것은 빗변과 높이 그리고 밑변의 관계 설정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은 자기죄를 어떤 관계로서 연계해서 맺어졌는가? 그 관계가 중요한 거예요. 그 관계가!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의의 관계, 의의 파동이 나오고 악마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의 파동이 나오거든요. 그 파동이 이 세상에 간섭효과를 일으켜서 서로 섞여 있는 겁니다.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성도의 특징은, 이 모든 공로는 주님에게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왜냐하면 주님이 먼저 나신 자니까. 주님이 먼저 나셨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태어남을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네가 아담으로 태어난 것은 태어남으로 간주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너 말고 먼저 나신 자부터 새로운 계열 속에 네가 속했는가?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유월절에서 지진이 일어나면 층이 단절이 되잖아요. 지층이 단층이 생겨요. 잘 가다가 삐걱 하면서 단층이 생겨버리는 겁니다. 죽 나가다가 연결이 안돼요. 끊어져 버렸다 그 말이지요. 어린양이, 어린양의 피가 개입한 겁니다.

거기서부터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이 뭐냐 하면, 출애굽 12장 12절에 나오지만 밤에 태어난 민족이에요. 밤에 태어난 민족, 낮이 아니고, 인간이 노동하는 낮에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밤에 태어난 거예요. 보통 인간들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잖아요. 이스라엘은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혈육적인 모든 관계는 단절됩니다. 이스라엘은 이 땅에 부모가 없습니다. 끊어졌어요. 정 부모를 찾으라면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의 피로부터 태어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입자기 때문에 흉내 내서 하나의 조작, 모방이지요. 그냥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어린양 고기를 먹으면 자기는 구원받은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파동에 불과한데, 어디서부터 힘이 나오는 파동에 불과한데 자기가 입자인줄 알고 있어요. 입자는 따로 있는 거예요. 어린양이 구체화 되는 것, 어린양의 목적이 구체화 되는 것, 그게 바로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모든 것은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퍼져 나가는 파동이에요. 퍼져 나가는 파동, 물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어떤 입자로 되는 것이 아니고요, 보이지 않는 형상의 파형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힘으로, 파동으로 미치는 거예요. 이 파동은 입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내가 했다’가 안돼요. 나는 무능성이 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죽은 나지요. 죽을 때는 이유가 있어요. 죽는 이유는 바로 더럽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추잡하기 때문에 죽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안받아주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이 죽음에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공로가 관계성, 파동을 쳐서 우리에게 도달되게 되면 우리 안에는 간섭효과가 벌어지는 거예요.

기존에 있는 죄의 욕망, 죄의 육신의 욕망과 그리고 주님의 그걸 용서하시는 의가 같이 섞여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 흔적, 그런 효과가 드러나는 흔적으로서 성도가 의미가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자가……” 어떻다고 하는데 성도는 주님의 의를 품고 사는자가 꽃보다 아름다워요.

성도가 귀신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 안에 십자가라는 앙꼬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앙꼬, 십자가라는 앙꼬, 그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 입자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로 사건으로 주어져요. 사건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데 제가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플라스틱 수조를 조그만 구멍에다 사출기를 가지고 뽑아내지요. 200도로 녹여서 사출기로 뿜어내게 되면 여기에 컴파운드, 하나의 세팅된 틀이 있어요. 그 틀에 플라스틱 수조를 좍 뿌리고 냉각시키면 전부 다 제품이 되거든요. 하나님의 유일한 다 이루심이 사출기처럼 예수님이 계셔요. 그리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된 것처럼 이제는 우리 자신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형상으로서 신체성을 가지고 이 땅에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속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융용된 플라스틱 액체를 뿌리듯이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틀을 갖추듯이 사람마다 각자 직업이라든지, 태어난 것, 그 사람의 성격 이런 것, 전혀 다 다양하게 예수님의 형상을 뿌리는 겁니다.

뿌릴 때 입자가 되면 뭔가 간직하는 것이 있는데 입자가 아니고 파동이 될 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냥 순간순간 사건이 되어버려요. 말 괜히 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이게 만약에 구약처럼 우리가 입자가 되어버리면 우리는 어제 구원받은 것을, 또 하나의 과거사를 가지고 냉장고에 과일 넣어놓으면 동결되잖아요. 어제 은혜 받은 것을 동결시켜서 이게 내 자아라고 우겨버립니다.

그러면 입자는 이미 따로 있는데, 예수님이 입자인데 갑자기 우리 자신이 실패한 이스라엘처럼 똑같은 행세를 또 하게 돼요. 나는 구원받았다, 이래 나온다고요. 주께서 구원시켜 주셨다, 가 아니라 나는 구원받았다, 가 돼요. 알기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구원은 나의 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그냥 구원이에요.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 자신이 하는 일로 꽉 찰 때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우리가 구원이에요. 우리가 구원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요. 구원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뭐냐? 날마다 파동의 간섭효과에 의해서 날마다 우리의 육신이 뿜어내는, 우리의 관행적인, 관습적인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를 드러내고 그것을 주님의 입자에서 나오는 주님의 다 이루심의 죄사함을 얻은 것을 가지고 나는 이렇다, 하는 그 과거사를 주님께서 전부 다 죽여 버리고, 무시해버리고,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어제가 없어졌다는 것이 기쁜 소식 아닙니까? 없어져야 돼요. 사람이 어제를 안 놓쳐 버리면 어제의 자아를 그대로 오늘가지 움켜 쥐게 돼요. 움켜쥐게 되면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제 뭉쳐진 그 동결된 냉동된 그 과일,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밀어내 버린다니까요. 내 고귀한 기억 속에 있는 괜찮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밀어내요.

그러면 사건과 만나야 되는데 사건과 만나는 것이 아니고 내 입자를 지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또 하나의 개별자, 입자로 간주해서 구약처럼 그렇게 상대하는 겁니다. 당신 나에게 뭐 해줄래,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나 당신한테 지기 싫어, 이렇게 나와요.

그것은 자기가 또 하나의 계열이 아닙니다. 주님의 계열의 특징은 유월절에 일어났던 그 단절, 단층, 갑자기 죽 오다가, 어제까지 오다가 오늘 유월절 피로서 어제가 날라 가버리고 오늘 새로 시작하는 것, 그것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반복해서 단순반복, 계속 반복해요. 십자가사건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개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건 + 우리의 신체’가 바로 보이지 않는 주님의 형상이 되는 겁니다. 이게 첫 번째 형상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형상 이야기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입자가 되고 그 파동에 의해서 그 계열에 속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3절에 보게 되면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부활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설명하기를 그 첫 번 주자를 예수님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입자가 되어버리면, 아담에 속해버리면 우리는 부활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연속되어 있는 과거의 나의 자아성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소생을 원하고 있어요. ‘괜찮았던 어제의 나가 오늘도 그 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거는 소생이지, 이건 다시 사는 것이지 부활이 아니에요.

뭔가 질적으로 플라스틱 새로운 질이 안 들어갔다고요. 예수님의 공로가 들어가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것은 과거의 나나 오늘의 나나 맹탕 똑같아요. 그것은 바뀌어 지려면 계속해서 우리가 입자가 되지 않고 파동이 되어서 주께서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이 날마다 우리를 죽이고 날마다 살리는 사건 속에 우리가 놓여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건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또 이야기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적이고 은혜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고맙소’가 되고 감사함이 돼요.

만약에 입자가 되게 되면 내 것 지킨다고, 내 자존감 지킨다고 악을 쓰게 되면 억지가 되고 만사가 짜증나고 전부다 귀찮아요. 여러분, 하루하루 사는 게 마스크 쓰신다고 귀찮고 짜증나는 게 아닙니까? “요즘같이 천 명씩이나 환자 나오는데 교회 가도 됩니까, 안 됩니까?” 그것가지고 싸우다가 교회 못나오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하는 분이 계셔요.

그래서 제가 답장했어요. 지금 교회 오고 안 오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늘 하루도 감사했습니까, 아니면 짜증났습니까? “에이 씨, 교회 가야 되는데 아침부터 짜증나.” 그러면 집에 있는 자아를 교회까지 운반할 때 이게 누가 할 수 있고 누가 가능한 겁니까? 본인이 평소에 그렇게 해 왔다는 거예요.

이것은 평소에 가능한 일로 자기를 꽉 채운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능한 일로 뭉쳐진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받지를 않아요. 불가능성의 존재만 받습니다. 불가능한 것. ‘내가 오고 싶어도 못 온 것도 주님의 뜻이었고, 온 것도 주님의 뜻이었지 내 뜻은 아닙니다. 내 뜻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라는 그런 태도로 집에 있든, 집이 아니고, 집구석에 있든 교회 오든 그게 어디 있든 감사가 나오면 주의 뜻이고 감사가 안 나오면 주의 뜻 아니에요.

죽은 자를 살려냈잖아요, 죽은 자를. 죽은 자를 살려낸 것은 내 뜻이 아니었고, 내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구원을 위함이지요. 내 구원에서 ‘나’를 빼버리세요. 구원을 위해서, 구원 작업을 위해서 주께서 나를 활용한 거예요. 내 구원이 아니고 입자가 있어야 내구원이지요 내 입자가 없는데, 파동인데, 주님의 구원인데 어떻게 내 구원이 됩니까? 거기에 우리가 휘말렸는데요.

옛날 서양 여자들 옷 보세요. 폼 낸다고 긴 치마 입지요. 16, 17세기에는 아직 석유가 발명 안 되어서 아스팔트가 없어서 도로포장이 안 되었다 그 말이지요. 포장도 안 된 도로에서 콜셋이라 해서 좍 퍼지는 치마 세 겹 네 겹 신데렐라 공주처럼 입고 온 거리를 다니는데 흙탕물 다 묻을 것 아닙니까? 그래도 폼은 내잖아요. 가녀린 몸매인데 그것보다 세 배 네 배 큰 드레스.

그처럼 예수님 개체에서 뽑아 나온 그 파동의 치맛자락, 펄럭이는 치맛자락, 거기에 드리워진 무늬, 그게 바로 동일한 플라스틱의 질로서, 사출기로서 앙꼬를 받듯이 예수님 다 이루심을 우리 안에 매일같이 집어넣는 거예요. 우리가 입자가 되면 나는 앙꼬 받았다, 그러면 나는 잘났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게 아니고 유월절, 단절, 단층, 끊어짐, 우리 육신을 갖고 있는데 그 육신과 날마다 끊어짐, 날마다 끊어짐이 날마다 사출기로 우리에게 뿜어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침에 눈뜨는 이것도 감사할 일이지요. 매일같이 우리는 잘라내야 돼요. 여러분, 깻잎 잡수실 때 조심해야 돼요. 잘못해서 두 장 집으면 짜요. 조심스럽게 깻잎 같은 인생이에요. 한 장 한 장 또 하루하루, 나의 일기장이 아니라 주님이 일기장.

주님의 일기장, 우리를 하나의 볼펜으로 삼아서 주님이 우리를 쥐고, 우리 신체를 쥐고 주님 자신의 일기장을 써가는 거예요. 매일같이. 어떻게 쓰느냐? 그 쓰는 내용이 뭐냐?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제키고 ‘다 이루었다, 죄사함 받았다, 죄사함 받았다, 나의 구원은 다 완성되었다.’ 이걸 매일같이 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그걸 집구석에서 하든지 교회 와서 하든지 관계없어요. 코로나든 뭐든 관계없다고요. 내 힘으로 교회 오는 게 아닙니다. 내 뜻으로 교회 가는 게 아니에요. 악마의 형상, 육신의 아담의 형상, 악마의 귀신들린 형상, 이게 ‘형상 1’이거든요. ‘형상 1’을 ‘형상 2’로 바꾸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개입하신 거예요.

그 다음에 창조. “나는 창조되었다.” “아니. 너 같은 인간 창조한적 없다.” ‘창조 1’에서 ‘창조 2’로. 먼저 나신 분이 계셔요. 그 먼저 나신 분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 형상과 신체가 결합돼야 그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먼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라고 언급하고 그 형상을 담아서 뭐냐, 먼저 나신분이라고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보다 후에 나신 분이지요. 동일한 계열에서는 동일한 동질성,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사건의 동질성, 지금도 계속해서 사출당해서 우리 안에 그 사건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고 매일같이 주께서 그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 사건은 뭐냐? “어제와 끊어라” 악마는 자꾸 과거사를 들먹여요.

‘과거에 너 잘나갔잖아.’ 또는 ‘과거에 너 상처 많았잖아. 이제 와서 네가 만회해야지. 보상해야지.’ 제가 지난 목요일에 누굴 만났는데 앉자마자 자기가 주식 보이스피싱 때문에 몇 천만 원 날렸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만회해줄 줄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것 없어요. 돈 만회하고 뭘 만회하면 이 자아는, 어제 자아는 어떻게 됩니까? 아직도 미련이 있는 거예요.

어제의 자아 그게 귀신인 거예요. 마가복음 1장에서 귀신을 뽑아내야 되는 거예요. 그 입자를 뽑아내야 돼요. 그 입자가 주님 입자를 막아서고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과거에 여러분들 다 공부 잘하고 잘나갔는데 어디까지나 다 과거지사입니다. 갑자기 불교발언 토해내서 죄송합니다. 다 과거지사입니다.

십자가 파도타기, 주께서는 성도에게 십자가 파도타기, 지류에서 시작된 그 십자가 사건이 강물을 이루듯이 큰 강물로 천국으로 가듯이 조그마한, 조그마한 별 가치도 없는 인간들이 십자가 사건 만나서 모이게 되면 강물을 이루어서 그것이 바로 천국으로 입성하는 자들입니다.

천국 백성으로 찬미하면서 모든 혈육관계, 모든 대인관계, 하여튼 과거에 내가 뭔가 했다 하는 모든 것은 다 끊어져 버리고 매일같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기적의 선물, 그게 짬뽕이 되어도 괜찮고 탕수육이 되어도 괜찮아요. 자장면도 상관없이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어느 것도 내가 얻을 수 없는 은혜로 둘러싸인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를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의논도 하고, 격려도 하고, 사수하고, 방어하고, 그렇게 해서 귀신만 좋아하고 마귀만 좋아하는 생활 했습니다. 주여, 작은 모기처럼 바닥을 쳐서 날마다 십자가에 돌진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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