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흑암의 권세

아빠와 함께 2020. 12. 13. 22:01

흑암의 권세

2020년 12월 13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13-14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사도는 복음을 말하면서 ‘현실’에 대해서 달리 시작합니다. 그것은 ‘흑암의 권세’와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분리시켜 버립니다. 이 방식은 ‘현실’에 푹 빠져있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낯설고 도발적 발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현실’을 유일한 실제로 이해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보면서 지금 여기 분명히 있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될까를 전제로 현실을 이해합니다. 나에게 실익을 줄까 아니면 나에게 해를 끼치는 줄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본능적으로 탐색합니다. 그러니까 나와 현실, 단지 그 구분만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난데없이 ‘흑암의 권세’을 들고 나옵니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엉터리요 가짜인 채 태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짜이기에 살아 생전 내내 가짜만 나타낼 뿐입니다. 그 가짜 중에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 믿고 천국간다”는 가짜입니다.

누가 가지요? 자신이 간다는 겁니다. 본인이 천국간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주장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실이 나를 위하여 있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나는 어디 출신입니까? 사도 바울에 의하면 ‘흑암의 권세’ 출신입니다.

곧 악마의 사주를 받고, 지시를 받고 태어난 겁니다. 가짜이니 가짜 소리만 평생 나오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식으로 현실을 이해합니다. 좋은 현실, 나쁜 현실 모두 다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질문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흑암의 권세’ 자체가 있는 줄로 모릅니다. 오직 처음부터 현실만 있다고 우깁니다. 그렇다면 ‘흑암의 권세’는 어떻게 해서 나타난 겁니다. 그것은 ‘사랑의 아들의 나라’가 나타나면서 현실은 사라지고 ‘흑암의 권세’로 나타난 겁니다. 이렇게 되니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이라는 용어는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현실’이라는 말이 거짓말이 된다는 말은 ‘나 자신’이 거짓존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하여 있는 세계’라고 그동안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나를 규정하기 위해 ‘현실’이라는 것을 외부환경으로 정해놓은 겁니다. ‘흑암의 권세’를 진입하는 입구는 ‘자아’입니다.

자아는 마치 계란찜  표면막과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자아에게 못이깁니다. 왜냐하면 자아에 갇혀 있는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자아를 걷어내게 되면 거기에 ‘흑암의 권세’가 밑에서 받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악마가 나를 앞장 세워서 세상에 나와 설치게 한 겁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아를 걷어내고 그 뒤에 흑암의 권세를 내비칠 줄을 모릅니다. 기껏 해서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처럼 자기 처지를 비관할 뿐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곳 없네”   -조성모의 가시나무새-

자아로서 흑암의 권세를 대행했던 찌질이 역사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하나님마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인 줄 알았던 겁니다. 하지만 그 중에 ‘구원’에 관한 소식도 전합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 여리고성이라는 도시국가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생 라합이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왜 여리고성 사람들이 멸망받아야 할까요? 그들 삶에 있어 그들이 평소대로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스스로 정당했습니다. 불의를 즐겨하거나 좋아한 자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에게 공격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기생라합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그것은 바로 여리고성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맞이하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2:8-10에 보면,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즉 멸망당해야 될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여리고성 사람들이 평소대로 산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 됩니다. 거짓에 대해서 거짓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란, 자신이 거짓 속에서 태어났음을 믿게 된 자들입니다.

‘전에는 예수 안 믿었다’가 아니라 ‘이제부터 제대로 예수 안 믿는 죄인임을 알았다’가 됩니다. 왜냐하면 ‘흑암의 세계’나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서는 ‘자아’란 낄 데가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가 병에서 나았다면 그때부터 제대로 자신이 앉은뱅이임을 고백할 시점이 된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4:7-8에서는 이렇게 ‘아들의 나라’ 속성을 밝혀줍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즉 ‘흑암이 나라’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흔적을 지닌 자가 성도입니다. 이로서 성도의 자아는 늘 예수님 입 안에서 녹는 막대사탕 같은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현실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음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골 1장 13-14(흑암의 권세)2012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13-14절입니다.

골로새서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사도바울은 흑암의 권세라는 동네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세상 살면서 아무리 돌아봐도 흑암의 권세라는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은 없고 뭐가 있느냐 하면, 현실이라는 것이 있어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어떤 상상도 허용되지 않는 아주 지독한 실재성, 지독한 실재성, 그것만 우리가 매일같이 체득하면서 살아갑니다.

아무리 믿음 좋아도 돈 없으면 거리의 붕어빵 하나 못사먹잖아요. 이게 실재성이에요. 철야기도하고 교회 나오는데 그런데 배고파서 뭐 사먹으려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다. 그러면 이것은 기도하면서 생각했던 그 상상의 세계가 얼마나 헛된 세계라는 것을, 차가운 바람처럼 이 세상이 차갑게 우리한테 인식시킵니다.

‘눈에 보이는 이게 다야. 제발 엉뚱한 생각하지 마. 어딜 다른 세계를 어떻게 상상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데.’ 아무리 교회 와서 복음 들어도 교회 문만 나서면 그 다음부터는 그냥 우리에게 마주치는 것은 실재세계, 현실세계, only, 오직, 오직 그것뿐입니다. 3십년, 5십년 신앙생활 해도, 우리가 눈을 감고 꿈속에서 예수를 만났든 뭐든 간에 눈만 뜨면 우리가 아는 그 세계, 우리 아는 그 세계가 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어떤 여지도 없어요. 어떤 상상의 여지, 망상의 여지도 일체 허락되지 않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절대로 돈이 안 생기는 세계에요.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의 이 말은 우리에게 도발하는 겁니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흑암의 권세가 내비 찍으면 어디에 나오는데요? 어느 동네가 흑암의 권세입니까? 그런 동네 봤어요? 흑암의 동네가 있어야지요. 없는데.

교회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은요, 이 현실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흑암의 권세, 그거 궁금해서 오지 않습니다. 내 세계, 내가 눈에 보고 있는 이 세계에서 내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오직 그 하나의 생각밖에 없어요. 사람답게 살고 싶고 무시 안당하고 싶고, 그것뿐이지요. 뭘 딴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힘에 부치니까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주여, 쭈여, 쮸여, 하는 그것뿐이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에 ‘흑암의 권세’라고 딱 들이댑니다. 없는데, 우리 현실 속에 흑암의 권세가 없는데 권세라고 딱 집어넣고, 그 다음에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딱 들이대 버리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바울입장에서는 오히려 현실이 존재하지 않고 현실은 두 개로 쪼개지는 거예요 하나는 흑암의 권세, 또 하나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 두 개로 쪼개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을 때 그 때 여기에서는 나의 공간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어요. 내 공간, 내 생활, 내가 지금까지 태어나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나 여기 있고 나를 둘러싼 그것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걸 아주 개무시해 버리고 흑암의 권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되어버리면 그 두 공간은요, 나의 고유한 나의 공간을 용납을 안 해요. “네가 뭐꼬?”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너의 세계가 있다고? 너의 세계, 너의 고유한 너만의 세계가 있다고? 없어. 흑암의 세계 아니면 아들의 세계 그 둘밖에 없어.”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딱 보면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딱 보면서 성경자체가 우리를 발로 차고 들어옵니다. “나가 있어! 너는 나가! 떨어져. 현실도 아닌 게 어디 진짜 현실노릇 하면서 감히 성경말씀에 끼어드느냐.” 하고 발로 차버립니다. 그렇게 발로 차버리면, 흑암의 권세자체가 우리를 모독하게 되면 우리도 또 만만치 않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나갑니다. ‘성경 안보면 되지 뭐. 교회 안가면 되지 뭐. 골로새서 1장 13절, 14절 없다고 여기고 살면 되지 뭐.’ 흑암의 권세, 아들의 나라, 이걸 왜 아예 안들은 것으로 치느냐 하면, 그걸 듣지 않아야 비로소 지금껏 내가 살아왔던 나만의 고유의 삶이 생생하게 유지가 될 수 있어요. 나만의 고유한 나의 인생이 이게 의미가 있다고요.

지금의 우리의 삶에 우리가 얼마나 공들였고 애써왔습니까? 아파가면서. 만약 어떤 사람이 그냥 순하게 있는데 다른 외부인이 와서 집적대고 자꾸 괴롭혀 보세요. 그러면 참다 참다 무슨 소리 하는지 알아요? “왜 내가 지켜온 것을 다 망치느냐? 왜, 왜, 왜, 왜 망치느냐? 네가 뭔데 내가 곱게 지켜온 내 공간을 다 망쳐? 네가 뭔데!”

지금 그 이야기를 대신 이야기한 거예요. 사실은 평소에 우리가 그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시집간 딸에게 간섭하니까, 엄마가 뭔데 내가 지켜온 나만의 이 결혼공간을 왜, 왜 다 망치느냐, 돈만 주고 빨리 나가라, 내 인생 어떻게 되든 간섭하지 말라고, 내 인생 내가 지켜온 것을 왜 망치는데, 네가 뭔데 왜 망치는데…….

우리가 성경을 일단 덮읍시다. 일단 덮고 다시 들추지 않도록 여기에 돌이라도 놓읍시다. 그렇게 이 성경위에 돌을 놓게 되면 이 성경도 이 현실속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현실은 눈에 보이는 이게 all, 전부, 그냥 현실이 아니고 유일무이한 현실, 이 현실이 전부에요.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교회요? 예배시간은 오락시간이에요. 놀러온 거예요 그거, 교회 다니는 거. 혹시 천당 있으면 가려고. 그거 오락이라니까요 오락. 손가락 가지고 빰을 꼬집든지 어디를 꼬집어 보세요. ‘이거 꿈 아니야?’ 해보세요. 꿈이 아닌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꿈 아니에요. 그 외에는 다 꿈이에요. 무슨 흑암의 권세가 있고 무슨 아들의 나라가 어디 있는데요? 그게 내비 찍어보세요. 아들의 나라가 몇 번지에 있습니까? 없어요.

흑암의 권세라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없는데 만약에 아들의 나라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아들의 나라가 있다면 비로소 그 때 등장하는 것이 흑암의 권세에요. 그래서 아들의 나라가 진짜 있는지부터 먼저 따져야 되겠지요. 아들의 나라가 진짜 있는지 없는지 그것부터 따지는 것, 예수님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있는 그 나라, 그게 아들의 나라거든요.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뽑아내서 아들의 나라로 이미 옮겼다’고 되어 있는데 문제는 과연 아들의 나라가 있느냐? 아들의 나라가 있다면 예수님을 추방시킨 우리가 그렇게 지독하게 현실이라고 하는 그 현실은 없고 모조리 다 흑암의 권세가 되는 겁니다.

이게 쌍둥이거든요, 쌍둥이. 예수님과 아담과 쌍둥이에요. 둘 다 현실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아담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꺼져, 하고 차버렸잖아요. 차버리니까 아담의 세계라는 것은 없고 눈에 보이는 현실로 바뀐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다른 세계는 없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라는 그 헛소리하는 양반을 쫓아내 버렸으니까. 오직 인간들의 세계만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 흑암의 권세라는 단어 하나가 전 세계에 대해 사도바울이 말씀으로 공격하고 도전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속고 있다는 거예요. 현실이 허상이라는 겁니다. 이 현실을 내가 전하는 말로 바꾸라는 겁니다. 흑암의 권세, 악마가 지배하는 그런 세력장으로 바꾸라는 겁니다.

바꿀 위인은 없지요. 그 안에서 내 고유의 영역 장만하려고 그토록 힘들게 살아왔는데, 마스크까지 하면서 살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마스크 한 이 동네가 흑암의 권세라고요? 악마가 사는 지옥이라고요? 이걸 누가 믿겠어요? 안 믿지요.

그래서 이 흑암의 권세, 아들의 나라, 그 둘로 갈라진 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나 늘어놓을게요. 아버지가 두 딸에게 저택을 유산으로 남기고 죽었어요. 그 저택에 두 딸이 삽니다. 하나는 언니 하나는 동생. 동생의 이름이 로사리오.

로사리오라는 동생은 평소에 뭐가 취미냐 하면, 춤추는 것이 취미에요. 다락방에 전신거울이 있는데 늘 거기 가서 춤 연습했다는 말이지요. 언니는 그 동생을 쌍둥이처럼 좋아했어요. 이 세상, 이 현실 속에 가족이라고는 딱 둘밖에 안 남았으니까.

하루는 동생 로사리오가 거울 앞에서 춤을 춥니다. 거울 앞에서 내 춤동작이 잘 나오는가 보고 있는데 그 전신거울 밑에서 시커먼 뭐가 나와서 로사리오의 발목을 탁 잡고 거울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거울 속으로. 그냥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거울 속으로 들어갔는데 언니는 동생이 안보이니 뭐하나 싶어서 2층 다락방에 가보니까 동생이 있기는 있는데 어디에 있느냐? 거울 안에서 춤을 추고 있어요. 거울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거기서 춤을 추고 있는데 언니는 동생이 없으니까 허전해서 못살지요. 언니는 거울 밖에 있고, 동생 로사리오는 거울 안에 있고, 진짜 이상한 나라의 엘리사처럼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언니가 거울 속에 있는 동생의 그 세계에 합류하려고 어깨로 팍 밀었는데 거울표면이 딱딱하니 거울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지요. 그래서 화가 난 언니가 지하실에서 오함마를 질질 끌고 올라가서는 동생 찾는다고 전신거울을 팍 깨버린 거예요. 전신거울을 팍 깨니까 거울이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면서 거울도 깨지고 동생도 없어졌는데 거울만 없어진 것이 아니고 아예 2층짜리 저택 전체가 다 와르르 무너진 거예요.

그래서 언니가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피해서 다시 살펴보니 분명히 2층 저택이 있던 그 자리가 황망하게 아무것도 없었던 거예요. 언니가 그 집을 떠나서 도시에 갔다가 세월이 얼마쯤 흐르고 다시 그 장소에 와서 뭘 생각하느냐? ‘과연 나에게 동생이 있었던 것이 환상이 아닐까? 망상이 아닐까? 내가 저택을 유산으로 받았다는 그것도 망상이 아닐까?’ 왜 그 현장에 가니까 저택이 있었다는 흔적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아, 동생이 원래 없었는데 내가 뭔가, 그 때 교통사고가 나서 머리를 다쳐서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버지로부터 저택을 받은 적도 없는데 있지도 않은 동생하고 저택에서 살았다고 여겼던 그것도 착각이었구나.’ 하고 돌아서는데 돌아서는 발길에 뭔가 채였는데 보니까 내가 들었던 그 오함마가 그 자리에 딱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동생은 그 때부터 과연 있었는가, 하고 의문점을 남기겠지요. 이게 지난 토요일 날 내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동생이 춤을 추는데, 거울 속에서 춤을 춘다는 말은 모든 삶의 긴장이 풀렸을 때 나오는 동작이 춤이에요. 맘 놓고 추는 거예요. 그 안에서. 그런데 들어갈 수 없는 거울에 들어간다는 말은 뭐냐? 밑에서, 이미 시간이 끝까지 다 끝나고 난 뒤에 이미 종말이 된 시간이 발목을 잡고 거울 속으로 끌어당긴 거예요.

이게 뭐냐? 마지막 때 오는 영 성령이에요. 세상 종말이 되었을 때 종말이 되었다는 표시로 주어지는 것이 성령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로사리오라는 동생은 나이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마지막에 세상 끝이 되고 난 뒤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보니까 이미 거울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간 거예요.

들어갔는데 그 언니는 동생이 거울 속에서 춤을 추고 있으니까 자기도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가 있어줘야 나를 알아요. 동생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 거기 있지 말고 내 곁에 있어야 내가 나다워. 우리 둘이는 자매니까 네가 없으면 내가 없는 거야. 제발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너는 거기 있지 말고 다시 예전처럼 내 곁에 있어줘.”라고 아무리 해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동생은 이미 시간완료 이후의 존재기 때문에, 춤을 추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언니는 힘껏 거울 속에 들어가 보려고 애를 씁니다. 인간이 거울 속에 들어간다는 말, 이게 뭐냐? 과학의 세계에요. 왜냐하면 거울은 ‘이산화규소 + 수산화나트륨 + 석회’를 가열해서 냉각시킨 것이 유리고 그 유리에 알루미늄 피를 입힌 것이 바로 거울이에요. 반사가 되도록.

그러면 언니는 어떻게 되느냐? 언니 몸무게가 70킬로그램이라면 언니가 거울 속에 들어가는 것이 이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해요. 왜? 언니는 어디에 저촉을 받느냐? F=mv, 뉴튼의 제 2 운동법칙에 의해서 힘은 중량×가속도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량이 만약 70킬로그램이라면 거기에 들어가는 힘의 가속도는 686뉴튼(N, 1N은 질량이 1kg 인 물체가 가속도가 g=9.8 m/s^2 이 생기게 만드는 힘)이 되는 거예요. 방언인데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우리는 철저하게 과학적 세계에요. 모든 게 합리적세계라고요. 인간이 거울 속에 들어가는 법도 없고요 그럴 리도 없고요. 우리는 과학적세계에요.

만약에 언니가 강제로 거울 속에 들어간다면 인대내지 근육이 파열됩니다. 과학에 의하면 거울은 5T(두께의 단위, mm)의 두께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부딪히는 그 충돌력에 의해서 거울만 깨질 뿐이지요. 그래서 언니는 과학적 사고를 시도합니다. 오함마를 들고 거울을 깹니다.

거울 깨질 때 거울 속에 동생이 있다는 환상이 깨질 때 뭐도 같이 깨지는가? 내가 이 땅에서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동생이 거울 속에 들어갔다는 그 사실조차 일종의 하나의 에피소드, 옛날이야기, 환상,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오함마로 다 깨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세상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고, 종교라는 것도 의미 없고, 하나님, 예수님, 그것 다 없고, 그것은 인간들이 지어낸 일종의 교훈을 주기 위한 지혜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언니에게는 종결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시 그 집에 가보니 세상에, 모든 것이 환상인데 거기 오함마는 왜 남아 있어요?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3장 1절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는 빈무덤이에요, 빈무덤. 예수 그리스도의 빈무덤이에요. 주님의 십자가는 이미 지난 역사기 때문에 없어요. 손에 쥐어도 없어요.

이 순신 장군 어쩌고 맨 날 해도 이 순신 장군의 흔적만 남았지 죽었다는 그 사건은 날라 가버렸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성령 안에서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오함마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걸로 인하여 동생 로사리오가 들어간 그 거울 속의 세계가 진정 있단 말인가, 진정 그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가 실제로 있다면 내가 과학적으로 따지는 뉴턴의 이 물리학의 세계, 이 것은 실재가 아니고 이 자체가 망상이고 환상인 거예요. 우리가 보는 현실, 그러니까 내가 망상이에요 내가. 내가 망상이라는 말은, 내가 가짜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진짜고 내가 가짜인 거예요.

주님하고 우리하고는 쌍둥이였어요. 처음부터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 오실자의 표상, 아담은 언니였고 예수님은 로사리오 동생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죄가 언니한테 오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현실 속에 잠시 일어났던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무시해도 되는 사건, 이미 지나갔으니까. 그리고 아직 시간은 마지막이 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 로사리오의 발목을,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종말이 되어야 비로소 오는 성령이 로사리오의 발목을 잡고 사랑의 아들로 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춤을 추고 있는 거예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춤을 추고 있는 거예요.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를 녹이는 용액 같은 겁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그 복음이라는 용액 안에 우리 자아가 녹아지면 돼요.

우리 자아는 예수님 입에서 녹는 막대사탕 같은 겁니다. 날마다 주님이 빨아먹으면 조금씩 조금씩 닳아지면 돼요. 인생이 피곤한 것은요 내가 내 것을 지키려고 할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피곤한 거예요. 닳아지고 녹아지면 되는데.

사도바울의 흑암의 권세라는 이 단어자체가 얼마나 도발적인지. 세상의 과학이고 뭐고 간에 이 오는 세대에서 흑암의 권세, 이 악함의 권세, 악마의 권세의 세계, 현실은 없다, 악마의 권세뿐이라고 하는 이 이야기는 얼마나 이게 도발적이고 우리에게 도전적인지요? 우리의 근원적인 존재의 인식 그 뿌리부터 이것부터 문제 삼는 겁니다.

너는 너 안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언니는 언니 안에 갇힌 거예요. 바깥의 동생을 언니처럼 본 겁니다. 제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을 로사리오라고 지은 것은 이름이 좀 예뻐서 그런 거고요. 그 로사리오라는 말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 다 이야기를 꾸며놓고 찾아보니 그 이름이 있기는 있어요. 멕시코의 야구선수 이름이 로사리오인데 그거 말고 또 있을 것인데, 하고 찾아보니 또 있었어요.

천주교에서 로사리오 기도라 해서 묵주기도를 로사리오 기도라 합니다. 장미 꽃다발 이라는 뜻의 라틴어래요. 초대교회 때 장미꽃을 머리에 이고 순교자들 시체를 관리하고 챙겼다 해서 장미꽃다발이라는 이름의 로사리오, 로즈하고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이것도 계시인가, 내가 우연히 한번 해봤는데 그런 의미도 있구나, 했는데요.

중요한 것은, 성령이 왔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해도 거기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 성령께서 이끌어낸 것은 우리가 이 현실이라고 여겼던 것에서 현실이 아니고 흑암의 권세와 짝을 맞추기 위해서 사랑의 아들이 여기에 계속 지속되고 있음, 여기에 계속 등장하고 있음을 비교하기 위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현실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미, 이미, 이미 사랑의 아들, 이미 천국에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서 아직, 아직, 아직 천국에 오지 못한 사람과 대비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출입구가 뭐냐?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흑암의 권세라는 것이 없는데 그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 사랑의 아들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가 뭐냐? 그게 바로 자아가 되는 겁니다.

“이랏샤이마세!(어서오세요)” 하잖아요. 일식집에 보면 비닐 천으로 윗부분만 해놓고 그래서 펄럭이는 출입구 있지요. 그 출입구로 들어갈 때 물론 그런 경찰관은 없습니다만, 만약 어떤 철없는 경찰관이 와서 수색영장 가지고 일식집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바람에 나풀거리는 비닐 천으로 된 문 앞에 “어서 오십시오”라는 팻말을 보고서는 상부에 보고하기를 “저 대장님, 여기 출입구가 철통같이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하는 바보 같은 경찰관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냥 제키면 들어가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 펄럭이는 출입구가 뭐냐? 자아에요. 더 쉽게 표현하면 계란찜의 표면막, 계란찜의 속보다 더 노란 표면의 막. 상상해 보세요. 지금 그걸 걷어내면 펄펄 끓는 흑암의 권세가 들어 있는 겁니다. 자아만 살짝 들어내게 되면 거기에 펄펄 끓는 흑암의 권세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자아는 뭐냐? 흑암의 권세, 그 세계를 감추기 위해서 얇은 막이 자아라는 거예요. ‘왜 내가 지켜온 것을 네가 뭔데 다 망치는 거야?’ 왜, 왜, 왜, 몸 무림 치고 있는 거예요. 그 막을 살짝만 들어내 보면 자아가 없어요. 없고 흑암의 권세, 흑암의 마그마가 들끓고 있는 겁니다. 그걸 들추지를 못해요. 내가 나를.

“내 속에 내가 이길 수 없는 어둠,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바람 불면 네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 이게 <가시나무새>라는 조 성모가 부른 노래 가사거든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여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 어쩌면 좋아.

얇은 계란 찜 막에 불과한데 자꾸 그걸 누가 가로막느냐 하면, 내가 가로 막아요 내가. 들어오지 말라고. 왜? 그걸 들춰버리면 나는 고유의 공간이 없어지고 나의 세계가 없어지니까. 그러니까 흑암의 권세를, 누가 나서서 악마를 변호해주느냐 하면, 내가 나서서 변호해줘요. 자꾸 흑암의 권세, 악마가 만들어냈으니까 나는 뭘 시도하느냐 하면, 내가 속지 아니함으로 내가 구원받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진실 된 것, 옳은 신학, 옳은 복음, 자꾸 내가 정보를 도입해서 그것만 있으면 계란막, 표면막인 내가 천당 갈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찢어져야 되는데, 나의 고유한 공간 자체가 애초부터 없었는데 마치 애초부터 나라는 것이 있어야 되는 것처럼 암 있어야 되지, 내가 없는 세계는 나는 상상 못하겠어, 이것부터 출발하니까 기껏 교회 와서 예수 믿고 천당 가려고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 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세례요한이 “당신이 오실 그 분이 맞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하는 말이 내가 맞다, 고 하시지 않고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하고 이렇게 말씀하신 거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트럼프 대통령의 악담이 있어요. 작년 12월에 무슨 악담을 했느냐 하면 전국의 아동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없다.” 산타는 없다고 했어요. 어른들이 너희를 속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속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렇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다는 그 속임수에 우리가 스스로 속아 넘어가 줘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무엇과 무엇이 만나냐 하면, 그 계란쯤 위에 있는 계란찜의 성분과 아래에 있는 흑암의 성분과 일치되거든요. 동일하다고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잘 안되겠지요. 그러면 쉽게 하겠습니다. 쉬운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소경이 예수님 보고 난 뒤에 눈을 떴잖아요.

눈을 뜨고 난 뒤에 비로소 이런 이야기를 해요. “제가 바로 소경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한 때 제가 소경입니다, 가 아니라 지금 제대로 제가 소경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내가 한때 절름발이가 아니라, 지금 멀쩡하게 걷고 다니면서 한 때 절름발이였는데 지금 걷는다고 하지 말고 제가 진짜 제대로 절름발이 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전에는 예수 안 믿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예수 믿었다, 하지 말고 이제는 제대로 제가 믿지 않는 사람이군요, 라고 해야 돼요. 그래서 성도입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에 ‘옮기웠다’는 그 내용 안에 장착이 되어 있어요.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건져내사, 라는 그 동작, 동사가 그 안에 품어져 있다 이 말입니다.

나는 전에 예수를 안 믿어서 지옥 갔는데 이제는 예수 믿고 천국 간다, 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출발점이 나의 공간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악마가 심어준 가짜의 터전이에요. 그건 가짜에요 가짜. 나는 전에 예수 안 믿고 지옥 갔는데 나는 지금 예수 믿고 천당 가면 천국 간 그것도 흑암의 권세에요. 그것도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나온 거예요.

그러면 뭐냐? “나는 전에 악마의 권세, 악마의 장난에 의해서 나는 구원받아야 되는 사람이라고 우겼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에 의해서 나라는 인간은 구원받지 말아야 하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느냐? 왜! 이제야 그걸 고백한다.” 나는 구원받지 말아야 돼요. 왜? 나라는 고유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나라는 것은 흑암의 권세를 대변하는 하나의 환상 같은 거예요. 진짜 주인공은 죄가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죄에요.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사랑의 아들, 예수님이 주시는 의가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아들도 나는 배제되고, 흑암의 권세도 나의 고유의 공간을 내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거짓말이고, 남을 사랑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헌신한다는 것도 다 거짓말로 자각하는, 그걸 거짓말로 이해하는 자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다녀야 돼요. 거짓말을! 이게 구약에 나옵니다. 구약은 찌질이거든요. 구약의 모든 역사는 찌질이 역사에요. 그 찌질이 역사에 언약이 개입해서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망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역사입니다.

분명히 예레미야 17장 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되어 있어요. 다시 하겠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우리 마음이 심히 부패하다. 그것보다 더, 더, 심오한 말은 뭐냐? “이걸 누가 알리요”

그러니까 예레미야처럼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그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내 마음은 심히 부패하고 거짓되기 때문에 내 마음이 구원을 받겠다는 그 구원도 거짓되고 악마의 속임수였다는 것을 이제 와서 고백한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가겠다는 이 시도자체도 이게 악마가 사주한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고백한다는 겁니다.

구원받겠다는 마음도 더럽고 부패한 마음이에요. 가짜가 가짜 안 되려고 애쓰는 그것도 가짜거든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더럽고 가짜에요. 그걸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느냐? 이미 마지막에, 세상 끝나고 난 뒤에, 심판 끝나고 난 뒤에 이미 심판에서 합격이 된 자의 영이 오니까 그게 눈에 보이는 겁니다. ‘다 가짜였구나. 다 짜가였구나.’

구약에서 이 찌질이같은 역사가 왜 그게 찌질이고 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멸망한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자기는 이스라엘 택한 백성이고, 구원받은 백성이고,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줄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자기 하나님이 자기를 멸망시킬 줄이야 세상에 상상도 못했어요.

그러나 구약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신약의 흑암의 권세 그리고 이 사랑의 아들의 관계, 이 관계를, 그런 사람들을 준 적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2장 10절에 보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리고성 이야기입니다. 여리고성이라는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그들입니다. 자,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여리고성에 있는 사람이 오직 알고 있는 것은 현실 그 자체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그 현실 자체, 오직 그것뿐이에요. 그들에게 있어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성, 도시국가니까 도시사람들이 멸망했을 때 그들은 왜 멸망당해야 될 이유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애 잘 키우고 살려고 열심히 애썼고, 도대체 잘못을 끄집어내고 싶어도 잘못한 것을 끄집어낼 것이 없는데요. 왜 멸망당해야 돼요? 왜 이세상이 하늘의 불심판을 당해야 됩니까? 당할 이유가 없어요.

당할 건더기가 있어야지요. 성경에 보니 살인하고, 간음하고, 사기치고, 도둑질 하고, 탐내고, 이런 것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것 한 적도 없어요. 그러나 사랑의 아들에 이미 들어간 사람이 보기에는 그들이 아무것도 안하고 심지어 지리산에서 혼자 약초 캐면서 자연인 되어서 살아도 그게 간음이고, 그게 살인이고, 그게 도둑질이고, 탐심이다. 전부 한꺼번에 그렇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관점이 여리고성 사람한테는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이 기생라합, 직업까지 붙입니다. 기생 라합, 더러운 창기 라합, 창기 라합이라고 그걸 끄집어내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거짓말을 했어요. 기생라합이 거짓말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멸망을 당할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생 라합과 멸망당한 여리고성 둘 사이에 대조해볼 때 그들이 멸망당한 이유는 딱 한 가지, 기생 라합에서 새롭게 제시되는 겁니다. 너희는 왜 거짓말 안하고 살았느냐? 이 세상에 살면서 왜 거짓말 안했느냐?

여리고성 사람들이 왜 거짓말 안 하겠습니까? 정당하니까, 나는, 이 존재자체가 정당하니까. “하나님은 맨 날 심판이래. 내가 뭐가 잘못됐어? 내가 죄인도 아닌데 왜 심판해?” 나는 정당하다는 거예요. “나는 정당해” 그 정당하다는 것 누구보고 물어봤습니까?

정당한지 아닌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서른다섯 살 되어서 이제는 시집을 가려고 하는데 교회 잘 다니고 있으면서 부모가 결혼하기 전에는 절대로 남자하고 한 방에서 라면 같이 먹거나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어요. 그런데 한 서른일곱 된 그 결혼할 남자는 내 아내 될 사람이다, 생각해서 여자가 자취하는데 들어옵니다. “혹시 라면 하나 끓여주지 않겠습니까?”

껄떡대고 작업 건다 이 말이지요. 그럴 때 자 여기서 서른다섯 된 그 아가씨는 두 가지 반응이 있어요. 첫째는, 지금 만약 저 남자를 내 집에 들이게 되면 지금 내가 서른다섯, 그러면 나중에 사십 다섯, 그리고 오십 다섯, 육십 다섯에, 칠십 다섯 때 내 모습은 저 남자와 함께 어떻게 되겠는가? 한 5초 만에 좍 펼쳐지는 거예요.

그러면 펼쳐지는 그 자아는 어디서 구축되었느냐 하면, 자기가 열 살 때, 스무 살 때, 서른 다섯 살 때까지 자기의 과거 기억으로부터 현재 자기의 자아가 있고, 그 자아가 어떤 남자를 만났고, 지금 저 남자가 사업을 한다고 하는데, ‘만약 결혼했는데 사업 잘못하면 나는 어떻게 하지?’

그런데 사업이 아니고 지금 공직에 있어서 중간에 퇴직할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면 ‘지금 라면 먹고 가라고 해줄까?’ 아니면 사업하는 것 같으면 ‘나중에 좀 있다 결혼하고 난 뒤에, 완전히 혼인신고 다 하고 난 뒤에 뽑아낼 것 뽑아내야겠다.’ 이런 통박이 서른다섯 살 까지 산 자기 인생경험 누적된 데서 딱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반응이 만약 서른다섯 살 먹은 아가씨가 성령 받아서 이미 죽은 자라면 뭐만 생각하느냐 하면, 그 순간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어떻게 시키느냐? 거짓말을 시키는 거예요. “야, 너 라면 먹고 간다는 그 말 거짓말이지?” 남자가 그 소리 듣고 “어떻게 알았지?” “내가 너처럼 거짓말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그런 거야. 안 돼. 이 순간 나의 거짓됨을 드러내는 순간이기 때문에 안 돼. 결혼하고 난 뒤에 정식으로 와. 안 돼.”

만약에 결혼한 뒤에 내가 그 남자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하는데 왜 잘해줍니까? 그렇게 잘해줄 때 노림수가 없었습니까? 안 속으려고 한 거예요. 내 속임수를 내가 뚜껑으로 억지로 덮은 거예요. 나는 흑암의 권세도 싫고, 나는 사랑의 아들도 싫고, 나는 이 세상에서 흑암의 권세, 이 현실 속에서 내가 번영하고, 내가 남에게 사랑받고 성공했다는 소리 듣는 그 속임수에 완전히 내가 빠져버린 거예요. 그 유혹에.

내가 이기지를 못한 거예요. 그것 때문에 남들에게 잘해준 거예요. 오직 나밖에 몰랐던 거예요. 나만 믿은 거예요. 왜 본인한테 안속아 넘어갔습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알았던 겁니다. 아, 남이 속인 것이 아니고 내가 남을 매일같이 속여 왔구나, 하는 사실, 그리고 그걸 알게 된 그 사실에 우리는 춤을 춰야 됩니다. 왜? 모든 것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삶의 피곤함도 없어요. 너도 가짜고 나도 가짜고, 너도 속이고 나도 속이고. 우리가 뭘 더 기대합니까? 뭘 해도 주께서 흑암의 권세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자아를 통해서 율법을 개입시키는데. 율법을 개입시키면 “네가 뭐 정당하다고? 자, 율법 집어넣을 테니 정당한가 보자.” 집어넣어 보세요. 전부 다 더럽고 속이는 것뿐이지요.

어떤 분이 강남강의 갔더니 선물을 주셨어요. 집에 갈 때 주신 건데 아이스 바를 주셨어요. 집에 가서 뜯어보니 아이스 바가 다 속았어요. 아니 녹았어요. 말이 자꾸 헛 나와요. <대장금>인데 <대장간>이라고도 하고 죄송합니다. 아이스바 가 다 녹아버린 거예요. 제 아내가 가위로 포장지 뜯어보니 다 녹아서 주스가 된 겁니다. 주스가 맛있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아이스 바를 뜯지 말고 그대로 냉동실에 넣으면 또 아이스 바가 되거든요. 아이스 바가 같은 비닐 안에 있으니까, 같은 흑암의 권세 안에 있으니까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맨 그 권세에서 못 빠져나와요.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이래도 나 좋으면 되고 저래도 나만 좋으면 된다. 그 아이스 바에서 못 빠져 나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저는 사자성어로 욕창인생이라 하는데 이래 뒤집어도 욕창, 저래 뒤집어도 욕창, 평생을 욕창 걸리면 살아가는 거예요. 호세아 7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이게 뭐냐 하면, 전병인데 이렇게 뒤집고 저렇게 뒤집고 해도 어쨌든 그 공간, 흑암의 권세, 이렇게 누워도 흑암권세, 왼쪽으로 비벼도 비빔면, 오른쪽으로 비벼도 비빔면, 맨 그 놈의 현실에서 또 그 현실로 가서 결국 못 빠져 나와요.

교회 십년 다녀도 현실, 5십년 다녀도 현실, 사랑의 아들의 나라 꿈도 꾸지 마세요. 아브람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가짜였습니다. 거짓말 하는 이삭은 이삭과 서로 가짜였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꿈에서 다 가짜였습니다. 우리는 가짜의 쌍둥이를 만나야 돼요. 그 가짜 쌍둥이가 나고 진짜 쌍둥이는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아담은 오실 예수님의 표상이니라. 하나의 나는 가짜다. 나만 챙기는 가짜다. 이미 오신 그 분은 그 가짜를 사랑의 아들로 건지신 주님, 나의 진짜 자아와 함께 있는 주님이에요. 나는 그분의 팔이고 다리고. 그분은, 머리는 멀리 있어요. 저 멀리 머리는 저기 있고 나는 그분이 움직이는 팔 다리에요. 이게 바로 사랑의 아들의 구조입니다. 특징이에요. 그 사랑의 아들의 특징.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4장 7절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끝났습니다. 이 땅에서 입만 벌리면 거짓말하고, 입만 벌리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 불법 이 모든 죄를 주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그 죄사함을, 가리움을 받고, 죄를 용서받고. 8절에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세상에 이게 춤출만하지 않습니까? 완료에서 오는 동작, 모든 긴장이 풀린 그 동작, 춤추듯이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거짓된 세상, ‘너만 거짓이야? 나도 거짓이야’ 하고 한몫 끼어드세요. ‘너도 사기꾼이지? 나도 사기꾼이야.’라고 외치면서 들어서세요. 그쪽은 벌벌 떨고 우리는 춤추고 있는 거예요. 그것뿐입니다. 이게 사랑의 아들에 도달된 사람입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도 스스로 자기를 속였지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26장 39절의 말씀이에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이여 이 속임수를 그대로 지속되게 하옵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가 나를 속이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나에게 덮어주옵소서.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죄사함이 구원받겠다는 나를 덮쳐주옵소서.

이게 바로 성령의 덮침에서 오는 죄사함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여러분은 돌아서면 “주님이여, 왜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다 망하게 하십니까? 왜, 왜!” 이렇게 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씀 들으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 37,38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어찌할꼬”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성령 받으면 돼.” 간단해요 “어찌할꼬” “성령 받으면 돼.” 성령 받으면 네가 바로 로사리오, 거울 속에, 세상은 다 허상, 우리가 죽어가고 없어지니 없어질 세상,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오함마, 주님의 십자가, 이제는 십자가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안 들키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게 살아 왔었습니까? 주께 원망과 불평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우리, 잘해보려고, 철저하게 착하게 살려고, 나는 정당하다고 얼마나 수고했습니까? 주여, 죄사함의 복이 얼마나 귀한지 살아가면서 더욱더 깊이 있게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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