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발광체
2020년 12월 6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10-12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경을 보면서 ‘자기 구원’이라는 이익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는 평소에 과거 내내 오로지 자신이 자기를 챙기는 방식으로 살아온 버릇이 그대로 성경 볼 때도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가 그런 사람이라고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나’보고 구원받았고 언급한 대목이 없습니다.
이는 성경이 ‘나를 위한 성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말씀은 그냥 그렇게 작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나’라는 조건이 빠져야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자체가 ‘나의 구원’을 배제합니다. 즉 내 구원을 위하여 이 말씀을 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왜 여기에 나열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연속되는 하실 일이 이러하다가 나열되어 있는 겁니다. 이 말씀을 위하여 오순절 사건이 생긴 겁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거저 주심’이 주어진 겁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자기 노력에 의해서 본인을 건사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거저주심’이 ‘나를 위한 나의 노력’을 박살댑니다. 폭격해버립니다. 이것이 오순절 지상에 내려오신 성령님이 하시는 일의 방식입니다. 그 박살난 현장이 곧 ‘열매’입니다.
인간에게 과거의 자아가 계속 살아있으면 인간은 자꾸만 자신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시도합니다. 전에 하던 행세대로 요령부려서 자신의 삶의 자기가 끝까지 책임지려고 합니다. ‘거저 주심’이 없으니 그저 선방하는 식으로 인생을 꾸려가면서 그것으로도 위로받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오순절 오셨던 그 성령이 들어온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길게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한 ‘순간’에 불과함을 압니다. 곧 더 이상 미흡함이 남아 있지 않으니 소급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합니다. 반면에 자기에게 평생 매진하는 자들은 늘 긴장된 상태에서 자기 관리에 신경을 쏟아부르면 자기 방어체제가 가동되어 고마움과 감사함이 소멸합니다.
그 대신, 자기가 자기 인생에 수고한 것을 가지고 남들에게 자랑질 하려고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우산살 펼치듯이 성령이 일하시기에 자기쪽에서 타인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가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본인이 이 사태의 주인공이 아님을 압니다.
예를 들면, 도서관에 도서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제자리에게 조용히 공부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잠언 30:2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샹들리에 박힌 유리알처럼 각자의 알에서 빛이 나옵니다. 주인은 보이지 않지만 각 성도는 주님의 몸을 둘러서 박힌 타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에게는 복음이 발산하는 복음의 광채가 비취게 됩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아기 예수님에게 발광되는 복음의 광채가 그것을 둘러선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 홍조를 나타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받은 사람들의 특이함입니다. 그들이 받은 비밀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비밀을 받았다 할지라도 자아가 버티고 있으면 복음의 광채가 가리워집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알려준 복음의 광채는 예수님의 십자가지고 나신 후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스스로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성취하신 그 과정이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삶이란 결코 과거 자아 중심으로, 자기 잘되기 위해서 뭐라도 이용한 그 방식으로 십자가 비밀을 적용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합니다. 성도 안에 아궁이가 있어 그 아궁이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도의 자아를 원료로 삼아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합류시키므로서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바로 복음적 삶을 살게 하는 겁니다.
일종의 성도는 주님이 일하시는 군불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비밀번호를 알아도 어디에 써먹는 비밀번호인지를 모르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삶의 모습들은 과거에 자기를 위한 삶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오래 참음과 오래 견딤이 ‘기쁨’으로 성사된다는 것이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만약에 자아 중심 그대로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필히 적그리스도가 접근하게 마련입니다. 즉 “당신이 당신을 귀히 여기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기어이 당신을 천국에 넣어드리겠습니다”라는 제안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 제안은 바로 신비로운 현상을 체험하게 해서 전혀 자기 다침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그대로 천국에 집어넣고자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천주교 교황청에서 진짜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한 성모발현 현상 같은 겁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악마가 등장해서 세상 곳곳에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수십만명이 한꺼번에 보이도록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신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적에 환호합니다. 그 메시지 내용이 왜 악마적일까요?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①하나는 성모가 스스로 중보자로 등장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중보자 기능에 다른 어떤 것도 섞어 넣을 수 없는 이유는, 오로지 ‘흠없는 자’라는 조건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②두 번째 기적이 제시하는 모든 내용은 선악체제적입니다. 즉 착하게 살면 천국가고 나쁘게 살면 지옥간다는 겁니다. 그러나 선악체제 자체가 악하다는 원리에 위배되는 겁니다. 그리고 ③세 번째 성모발현은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 스스로 행함 여부에 따라 자기 운명이 결정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복음만으로 충족된 자입니다. 정말 주님에게 미치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미치든지 해야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십자가 피만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강-골 1장 10-12(복음의발광체)2012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10-12절까지입니다.
골로새서 1:10-12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지난 시간에 한 ‘신령한 기도’의 내용에 들어갈 것을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 내용을 보면서 특정한 사람이 없다는 것, 어떤 집단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습니다, 할 게 전혀 없어요. 그리고 사도는, 어떤 사람이 그렇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고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사람을 분명히 있게 했다는 겁니다.
10절에 범사에 기쁨이 있는 사람, 그리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가 있는 사람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나게 하는 사람, 그 다음에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있어서 그냥 오래 견디고 오래 참는 사람이 아니고 기쁨으로 오래 견디고 오래 참는 사람이 있게 하시는 그런 현상, 그리고 빛 가운데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한 그런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런 사람이 특정해서 그게 누굽니까, 라고 지적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그렇다고 해버리면 이런 취지가 날라 가버려요. 주께서 하게 한 이 취지가 날라 가버립니다. 이것은 어떤 집단적이지 딱 지정해서, 특정해서 내가 그렇다고 주장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힘듦과 어려움에 못 견디는 경우가 있게 되고요. 그 다음에 어떤 경우에는 선한 열매 맺는 것 같아요. 하지만 꾸준히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장담 못합니다.
무슨 사태가 일어나서 내가 다시 우울증에 빠지든지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가 있거든요. 10절에 보면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지만 일에 바쁘다보면 관심사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고 자기 일에 몰두할 경우가 생겨버립니다. 그러면 이럴 경우에 ‘이게 나냐? 나 아닌 것 같은데? 어, 나 같은데? 어, 나 아니야.’ 혼자 웃었다 울었다, 난리도 아니지요.
그래서 이 본문 보면서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나를 여기서 뺍시다. 자아를 여기서 빼는 거예요. 자아만 빼버리면 그 모든 문제는 저절로 다 풀리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떤 성경을 보게 되면 그것이 꼭 나이어야 한다는 고집 같은 것이 있어요. 왜냐하면 꾸준히 과거를 지나서 지금껏 살아오면서 습관이 뭐냐 하면, 본인 일에 매진했거든요.
본인 일에 매진했는데 뭐든지 좋은 것은 전부 다 내게 해당되어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습관으로 살아왔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내가 다 차지해야 돼.’ 그래야 속이 시원하고 그런 게 있어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특정인간을 특정할 수 없다, 지정할 수 없다,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인자가 와서 심판을 내린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나를 비롯해서 특정인을 나라고 지칭하고 또 누구라고 지칭을 해버리면 ‘나는 평소에 간음한적 없고, 살인한 적도 없고, 도둑질 한 적도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나를 인정해줄 것이라고 생각할 텐데.’
그러면 아침 안 드셨어요? 점심 안 먹을 겁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고, 공무원하고, 교사하고, 이게 우리보기에는 나쁜 짓 아니고, 간음살인 아니고, 도둑질 아니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노아 홍수때 물이 덮치는데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렇게 한 사람들을 전부 다 죄라고 규정하면서 물로 덮어버렸습니다. 마지막에는 불로 덮을 것이고.
특정인을, 어떻게 특정사람을 규정할 수 없어요. 전부 다 한통속입니다. 아침에 밥 먹고, 점심에 밥 먹고, 먹고, 자고, 입고, 평소에 장가가고, 결혼하고, 사고팔고, 장사하고, 농사짓고, 고기 잡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게 뭐가 잘못이냐, 이게 뭐가 악하고 음란한 죄냐, 이렇게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똑같이 보는데. 그 똑같이 보는 주님의 취지를 모르는 거예요.
저 사람은 나쁜 짓을 했고 나는 나쁜 짓을 안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없어요. 하나님의 관점이 없는 이유가, 줄곧 과거의 모든 습성이 나에게 매진하는 겁니다. 나에게 매진하다 보니 항상 하나님 보시기에 괜찮은 사람으로, 내가 나를 특정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유지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 여기서 뭐가 빠져버리는가? 감사와 고마움이 빠져버립니다.
항상 긴장되어 있어요. ‘나쁜 짓 하면 안 돼. 주님을 부정하면 안 돼. 성경대로 살아야 돼.’ 벌벌벌 떨면서 교회 오는 거예요. 아침에 밥 먹는 죄를 지었으면서도. 저녁에 베개 베고 잠을 자는 죄를 지었음에도, 그것은 내가 봐도 죄가 아니라는 겁니다. 본인 해석을 본인이 해온 거예요. 나에게 매진하는 내가, 내 일을 내가 해석한 겁니다. 나에게 충실하게 살아온 내가 그 안목을 유지하면서 나를 측정하고 평가해 온 거예요. ‘나는 나에게 충실했다. 뭐 그게 어때서?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데?’
구약 선지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은 개뿔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천하에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졌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여호와를 안다는 거예요. 여호와를 알면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졌어요. 그걸 세자로 미쳤다, 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미쳤으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몰라요. 윤 석열이가 누구에요? 몰라요. 추미애가 누굽니까? 모릅니다.
왜? 굳이 알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을 가졌기 때문에 굳이 내가 그 사람을 왜 알아야 돼요? 이미 하나님의 언약을 방석으로 깔고 사는데 굳이 왜 내가 윤 석열을 알아야 되고 굳이 내가 왜 문 재인을 알아야 되는데?
더 나가 볼까요? 왜 굳이 내가 나를 알아야 됩니까? 내가 나를 왜 못 버립니까? 여호와가 대신 했잖아요. 뭐뭐 대신에, instead of, 내가 유일하게 아는 숙어. 여호와가, 주님이 나를 대신했는데 왜 내가 나를 관리해야 되고, 간수해야 되고, 잘 지켜야 됩니까? 내가 끝까지 나를 사수하겠다는 사람이 있었어요. 가룟유다 였습니다. 사탄이 들린 거예요. 악마의 모습입니다.
악마는 늘 우리한테 독촉합니다. ‘남이 너 관리 못해줘. 네가 너 관리 안하면 관리해줄 사람 아무도 없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 이것을 악마가 계속 우리에게 배후에서 촉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영광의 힘……, 뭐 좋은 것은 다 있어요. 기쁨, 오래 참음, 견디는 것, 성도의 기업은 천국이거든요, 천국에 들어가는 것, 선한 일에 열매 맺는 것, 주께 합당하게 사는 것, 범사에 기뻐하는 것, 이것 모두 다 주께서 거저주시는 겁니다. 주께서 거저주시는 거예요.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과거는 뭐냐? 내가 노력해야 돼요. 내가 하루만 쉬어도 내 생계비 아무한테서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 몸으로 열심히 일하지 아니하면 일당, 최저시급 아무도 안주거든요. 이것을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습득했고 세상에서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돈만 더러운 것이 아니에요. 정신, 사고방식까지 거기에 연동해서 그렇게 정의된 겁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나를 돌볼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거저 주심이라는 것도 없고, 고맙소, 할 사람도 없고, 감사합니다, 할 대상도 없고, 바들바들 떨면서 평생 자기 붙들고 살아가는 그 식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놓고 나중에 죽고 나서가 궁금하니까 교회 나와서, 그리고 성경에 나오니까, 성경은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야, 하고 자기를 특정해서 오늘 본문 보는데 숙제가 너무 많아요. 범사에 감사해야 되지요, 주께 합당히 해야 되지요, 이거 뭐 언제 이 숙제 다 합니까? 오래 견뎌야 되지요, 오래 참아야 되지요, 빛 가운데 행해야 되지요, 선한 열매 맺어야 되지요.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이거 다 하려면.
거저 줬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거저 줄 때는요, 이게 한꺼번에 다 오게 되어 있어요. 일부 오고 일부 안 오고, 그런 것 없어요. 오늘 이 좋아 보이는 개념들이 한꺼번에 다 옵니다. 오는데 그 중에 11절에 나오는 것도 줘요.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도 와요.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
견딘다 할 때 과거의 일상에 의하면 이것은 이빨을 깨물어야 돼요. 억지로 참아야 돼요. 힘들여서 견뎌야 되는 것이 우리네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냐? 기쁨으로 견디고 기쁨으로 오래 참게 된다는 겁니다. 기쁨이 소실되지 않은 채로. 진짜 이런 상태가 되면요.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기쁜데, 기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은 “참고 있구나.” “아니, 기쁜데?”
제가 지난 오후에 여러분에게 숙제 내드렸습니다. 숙제 하셨습니까? 한주 지나니 무슨 숙제인지 기억도 안 나지요. 복음도 모르고, 복음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고 관심도 없는데 얼굴이 너무 폈어. 마음이 평온하고 평화롭고 얼굴이 고와. 살아가는 것이 행복에 넘치는 사람 한 열 명만 찾아보라고 했지요. 그게 숙제였습니다.
복음은 모르는데, 십자가고 뭐고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매사가 행복행 한 생활, 그리고 늘 웃고 다니고 맘이 평온하고, 그런 사람 한번 찾아보라고 했지요. 못 찾았어요? 제가 찾아드릴게요. 여러분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에요. 복음과 전혀 상관없으면서 늘 마음속에 그나마도 ‘선방했잖아. 이 정도도 인생 선방했잖아.’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성, 그 생각 빼놓고는 아무 생각 없습니다. ‘그 딴 것 복음 알아서 뭐하는데? 나 행복하면 그만이지. 복음, 그런 것 알아서 뭐할 건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어떻게 한꺼번에 거저 주느냐? 그게 바로 오순절 사건이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게 오순절의 일이거든요. 그 오순절사건이 우리 후대에 있는 성도의 몸에 그대로 흡수가 됩니다. 흡수가 되게 되면 오늘 본문이 한꺼번에 다 발현돼요. 터져 나와요. 복음을 몸으로 표현한 거예요. 복음은 몸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표현되는 거예요.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통과하면서 기쁨으로 통과하는 것이, 다른 사람 같으면 억지로, 힘들게 ‘조금만 참자. 그러면 천국이 있으니까 참아야지. 참아야 돼. 참아야 돼.’ 은장도 가지고 과부가 허벅지 찌르듯이 ‘참아야 돼’ 이게 아니고, 기쁨 가운데 오래 참음이 된다는 것은 오순절에 있었던 그 성령이 내재적으로 들어온 거예요. 내 안까지 들어온 거예요. 그 자체가 거저주심이라니까요.
여러분, 오순절 사건을 볼 때 하나의 그림을 그려보세요. 우산 편 상태가 돼요. 우산을 편 상태가 되면 우산 살 이쪽과 저쪽 사이를 바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 경유해야 되느냐? 우산 꼭대기를 경유해야 다른 사람과 연결돼요. 복음으로 이야기해야 돼요. 복음으로 이야기 안하거든 그 사람 만나지 마세요. 복음이 안 나올 때는 그 사람과 이야기 할 필요 없어요. 다 실없는 농담 같은 소리밖에 안 나와요. 이게 우산 펼치는 거거든요.
더 다른 예를 드릴까요? 샹들리에 있지요. 호화스러운 샹들리에. 하나하나 유리구슬에 불을 밝히잖아요. 하나하나 박혀 있으니까 어떤 일을 특정할 수가 없어요. 전부 다 어떤 보이지 않는 몸에 붙어 있는 외부의 그걸 표면현상이라고 합니다. 우리 자체가 나를 특정할 필요 없어요. 나를 잊으세요. 표면에 들러붙은 겁니다. 우리는 주님 몸체에 붙은 타일그림의 한 퍼즐조각같이 붙어 있는 겁니다.
이게 오순절이에요. 내가 나를 특정할 필요 없다. 그것은 우리 과거사에요. 과거는 나 아니면 누가 나를 살릴 수가 없어요. 내가 가동되어서 내가 살리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쉬운 예가 바로 으깬 감자. 으깬 감자를 숟가락 가지고 퍼먹어 보세요. 아무리 퍼먹어도 감자의 중심이 안 보여요. 다 으깨져 있으니까. 어떤 부분을 숟가락으로 먹어도 남아 있는 감자 맛이 숟가락의 작은 부분에 그대로 다 들어 있습니다. 으깬 감자를 아무리 후벼내 봐야 내가 주인공이야, 그런 것이 감자에서 안 나오잖아요.
또 다른 예를 들면 도서관장은 보이지 않는데 조용하게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만 보이는 도서관. 도서관에 학생들은 있는데 도서관장은 보이지 않아요. 조용하게 학생들이 앉아 있어요. 마치 우리교회같이. 제가 어릴 때 겪었던 이상한 일중 하나가 오순절 사건을 적절하게 표현해줄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시골방앗간에 가면 기계는 요란하게 돌아가요.
그런데 이것이 저만의 경험인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주인장이 안보여요. 방앗간에 맹렬하게 기계는 돌아가는데 계십니까, 하면 주인이 없어요. 저만 잘못 생각한 것인가요?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방앗간도 그렇고 정미소도 그렇고요. 정미소의 기계가 돌아가는데 이 사람이 어디 막걸리 먹으러 갔는지 주인은 안보여요. 주인은 없는데 이상하게 정미소 기계는 돌아가요.
잠언서 30장 27절의 말씀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 이게 오순절 성령의 특징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특징이 그거예요. 임금은 없는데 메뚜기가 알아서 가고 있습니다. 그게 보이지 않는 중심에 보이는 것들이 타일처럼 외면을 장식하고 있는 거예요. 외면, 바깥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한테 명령받거나 지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과거의 자아를 그냥 붙들고 있다면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누구 지시를 받아야 되느냐 하면, 목사 지시를 받아야 돼요. 왜냐하면 나의 나다움, 내가 기대하는, 그걸 ‘자아 이상’이라 하는데 이상적인 나의 모델을 얻기 위해서는 미리 아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그대로 갖고 나옵니다.
과거의 나를 그냥 유지해버리면요. 그 사람은 필히 가짜 메시아를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오순절 날 거저 주심이 되어버리면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거저주신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거저 기쁨 속에 살아가게 돼요.
1645년에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마구간 안의 요셉의 꿈>이라는 그림 보면 그 화가의 화풍이 나옵니다. 렘브란트는 분명히 채색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얼른 보면 흑백사진 같아요. 검은 쪽은 아주 검게 칠하고 그 검음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빛, 광채 나는 쪽으로 그림의 주제에 집중하도록 그런 화풍을 사용하고 있거든요.
그 <마구간 안의 요셉의 꿈>이라는 그림을 보게 되면 주변은 뭐가 뭔지 몰라요. 그냥 시커매요. 그런데 아기 예수에게서 나오는 광채를 마리아도 투사 받고 있고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천사도, 아기 예수의 광채를 받든지 아니면 천사 자체가 갖고 있는 광채를 발산하든지, 그런 모습으로 주제, 아기예수 탄생을 렘브란트가 보고 있습니다. 주변은 까맣게 처리해 버리지요.
이 대목을 저는 고린도후서 4장 4절, 아마 렘브란트가 이 대목가지고 그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그냥 일방적인 제 생각이에요.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자 오순절 성령을 그 후대에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발광체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양새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이들은 그냥 보통 우리하고 같아요. 애들끼리 놀다가 신기한 물체를 발견했는데 그게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라 칩시다. 그러면 그들이 창고 안에 그걸 넣어놓고 애들 한 네 명 정도가 그걸 지켜보고 있다 합시다. 어른들이 애들 뭐하고 노는가, 해서 그걸 지켜보게 되면 다른 곳은 시커먼데 애들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네 명의 얼굴에서 반사된 빛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걸 보고 있는 어른은 ‘쟤들 얼굴이 왜 저렇게 밝지?’ 하고 가까이 가보니까 애들 얼굴이 밝은 것이 아니고 그 발광체를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이게 성도입니다. 거저 주시는 발광체가 있는 거예요. 윤 석열이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요. 추미애가 뭐하는 아줌마인지 몰라도 괜찮아요. 거저 주신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세상이 지금 몇 년도 인지 그것도 모르겠어요. 오늘이 12월 6일인지 그것도 모르겠어요. 성령이, 오순절이 와버리면, 예수님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져 버리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 자체가 순간으로 정지가 되어버립니다. 모든 시간이 정지가 되어버려요.
정지가 되면 어떤 특정사건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운 것이 아니고, 이 땅에 태어나서 주님을 알게 된 이 광채, 발광체를 보게 된 이 자체만으로 과거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가 돼요. 소급해서. 그리고 미래도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한꺼번에 다 나온다니까! 이것 지키고 저것 지키고, 가 아닙니다. 이것 지키고 저것 지켜서 천당 가야지, 가 아니고 한꺼번에 다 온다니까요. 그 발광체에서요. 이 기쁨을 말로 설명하기 참 힘든데 대장금의 대사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하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서 생각한 것이온데.”
이게 뭐냐 하면, 최고상궁마마님이 어떻게 해서 그걸 홍시라고 생각하느냐, 그 대목이에요. <대장금> 드라마에 나온 대목이에요. 그러니까 어린애가 하는 말이,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고 생각하느냐고 따지신다면 제가 뭐라고 답변합니까?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걸 어떤 cf에서 패러디해서 “한우 맛이 나서 한우라 했는데 어떻게 한우 맛이 이렇게 맛있느냐, 하면 제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미 천국에 빛을 얼굴에 비취고 있어서 이게 예수님 주 되심의 영광의 빛이라고 제가 그렇게 거저주심에 대해서 맛보고 있고 이게 주님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주신 것이냐고 물으시면 제가 뭐라고 답변합니까?” 이걸 세자로 뭐라고 하느냐 미쳤다, 하는 거예요.
지금 안 미치면요, 여러분이 미쳐버려요. 주님한테 미치지 않으면 나한테 바들바들 떨면서 미쳐버려요. 내가 나한테 특정해서 나한테 미쳐버려요. 이것은 지옥입니다. 지옥행이에요. 나한테 미치든지 주님한테 미치든지 둘 중에 하나에 미치세요. 중간 미치는 것은 이 땅에 없어요. 뭘 지킵니까? 지킬게 뭐가 있어요? 거저 줬는데 뭘 지킵니까? 무슨 십일조 같은 것이 있어요? 연말이라고 또 헌금도 계산해야 되고. 뭘, 왜 지키는데요?
지키는 이유가 착한 일 나쁜 일을 구분해서, 나로 하여금 착한사람 만들어서, 그래서 나를 죽어서 천당 보내려고 누가 수작을 부리느냐? 내가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내가 기독교라는 것을 믿어서, 교회 나와서, 내가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그 뒤에 누가 있느냐? 악마가 있지요. 자꾸 과거의 자기를 안 버리면 여기에 적그리스도가 접근한다니까요.
이틀 전부터 cgv에서 상영하는 영화가 있어요. <파티마의 눈물> 파티마란 포르투갈의 지명인데 거기서 1차대전 때 세 명의 아이가 성모마리아가 발현하는 것을 봤어요.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면서 애들에게 메시지를 준 겁니다. 나는 하나님 뜻이다, 하면서. 1917년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발현했던 그 성모가 몇 년 후 벨기에 보랭에서 나타났고, 그 다음에 스페인 가라반달에서 나타났고요. 그 다음에 이집트의 자이툰이라는 곱틱교회의 공중에 한 25만이 보는데서 성모가 발현되었어요.
그 다음에 베네주엘라 베타니아에서 나타났고, 그 다음에 1973년, 일본의 아키타라는 가톨릭수녀원에서 성모가 수녀원 건물위에 나타났고, 1980년도에 아프리카 르완다의 키베호에서 성모가 나타났는데 그 때는 예수님이 같이 발현했고요. 그 다음에는 1981년도에 유고슬라비아의 메주고리예에서 성모가 발현했고, 그리고 1985년 드디어 전라도 나주에서 성모상이 700일간 피눈물을 흘렸으며, 1987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서 성모가 발현했어요.
이런 것에 대해서 교황청에서는 이게 진짜냐 가짜냐, 조사에 나섰고요. 대부분이 이것은 진짜로 하나님께서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를 준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파티마에서 있었던 성모발현에 대한 영화가 <파티마의 눈물>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뭐가 궁금하냐 하면, 착각일수도 있고 진짜 뭐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25만 명이 모였을 때 또 어떤 때는 스페인의 경우에는 8천명이 모인 곳에서 나타났거든요.
그런데 나타날 때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느냐? 아니에요. 경직된 상태에서 그냥 모습만 보는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사진도 찍은 것도 있어요. 이집트 곱틱교회, 예수님께서 헤롯 왕을 피해서 거쳐 갔던 그 교회에서는 사진도 찍었어요. 성모마리아가 영광체로 나타난 거예요. 그 때 한 25만이 봤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더 궁금한 게 도대체 무슨 말, 무슨 메시지, 그 내용이 가장 궁금하거든요. 그 내용이 가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채우기만 했는데 이제는 흘러넘친다. 성모발현에서 나온 메시지가 공통점이 있어요. 두 번째는, 추기경, 주교, 사제들이 많은 영혼들을 멸망의 길로 이끌고 있다. 그 다음에 성체성사를 강조해요. 이 떡과 이 잔에 예수님이 거기에 임재 한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해서 성체성사를 소홀히 말고 자주하라는 거지요.
그리고 생활을 개선하고 더욱 많은 희생을 하라. 그리고 베네주엘라 같은 경우에는 그 근처 폭포의 물만 젖어도 병이 낫고 한국 나주에서 병든 자가 나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특히 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묵주신공이에요. 기도할 때 돌리는 장난감 같은 것 있잖아요. 그런 것을 하면서 마리아에게 기도하라는 내용들이 한결같이 죽 나옵니다.
그리고 금식하는 것이 마리아한테 가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하면서 살라고 당부했고 특히 르완다 키베오에 나타날 때는 마리아가 하는 말이, 나를 통해서 나의 아들로 가는 길을 인도하러 왔다. 그리고 스페인의 경우, 미카엘 천사가 나에게 지시해서 그 지시를 받고 왔다. 그런 내용들로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천주교인들이 그것을 바라볼 때 여러분이 복음적 입장에서 굉장히 신기하구나, 를 느끼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애들이 어떤 발광체를 보고 빛을 나타내는 것처럼 이 발광체 자체가 굉장히 고귀하고 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참 좋다, 할 거잖아요. 제가 그걸 네 가지로 뽑아봤어요. 이게 왜 악마적인지.
첫째, 나를 통해서 내 아들로 가는 길을 인도하러 왔다고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는데 성경에서 중보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가는 길에 예수님 엄마라고 빽을 써서 거기에 추가될 수가 없어요. 그냥 내 눈에 성모가 나타나든, 주님이 나타나든, 뭐가 나타나든지 갈라디아서 1장 17, 18절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했습니다. 천사라도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한다면 저주받는다.
여기 나타나는 이런 발현들, 전 세계에 점으로 찍으면 열 개, 아니 스무 군데가 넘어요. 병 낫고 어쩌고 뭐가 나타나고.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에 첨가했다는 거예요. 왜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은 중보자로 첨가되면 안 되느냐 하면, 그분만이 흠 없는 어린양이기 때문에, 흠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의 언약에 의하면 흠 없는 제물만 받습니다. 흠이 있는 것은 흠 없는 것에 첨가될 수가 없어요. 우리의 기도, 중보기도 없습니다. 교회가 이단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기도는 안 받습니다. 주의 이름만 받아요. 우리 이름은 안 받습니다. 이런 것은 몰라도 성모라고 복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좀 생소하게 들리십니까?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어요. 둘째,모든 지시가 선악적입니다. 이거 하면 되고 이거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어느 것이 착하냐, 안 착하냐, 나는 착한 쪽으로 가고 싶어, 할 때 마리아가 도와주는 거예요. “네가 착하고 싶어? 내가 도와줄게” 이렇게 나서는 거예요.
그러나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이게 악이에요. 왜냐하면 선악은 나에 매진하고 나에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저 사람은 나쁘고 나는 착하다. 이런 쪽으로 나를 계속 규정을 하려는 것이 나의하루 일과거든요. 나는 저들과 같이 되지 않은 것이 감사하나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따지는 것은요, 간음한 여인이 왔을 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한 이유는, 그래서 주께서 바리새인보고 간음한 여인에게 돌로 못 치게 한 것은, 간음한 여인이 잘했다, 가 아니라 선악이라는 인식자체를 적용시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용서받았느냐, 죄사함이 있느냐 없느냐, 그걸로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런 것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세 번째, 그 모든 성모발현의 특징 속에 빠진 게 있어요. 성령 이야기가 하나도 나오지 않아요. 왜 그러냐? 성령은 누구를 대신하느냐? 나의 선한 양심과 착함이 성령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그럴싸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령은 십지가 지시고 난 뒤에 오시는 영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특정해서 구원할 수가 없어요.
왜? 거저 주셔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한테 열중하고 매진한 대신에 주님이 하신 공로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하시는 것이 바로 택배기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거든요. 네가 어떻게 너 자신을 위해서 노력하고 바르게 했는가, 그런 것은 이제는 잊어라. 다른 말로 하면 과거를 잊으세요. 어제 뭐 했습니까? 카페에서 커피 잡쉈어요? 잊으세요! 잊으세요!
과거는 잊으라고 있는 겁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의 것을 없애 나가는 그 과정이 인생이에요. 성도의 인생은 나의 꼬리 자르기에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주님이 고마워요. 마리아 안 봐도 되잖아요. 이 묵주 안 당겨도 되잖아요. 그냥 사시면 되잖아요. 발광체 보면서, 얼굴 발그레 하게 광채에 비추이면서.
주님의 그 복음의 광채를 보면서 사는 즐거움, 다 이루었다, 완료된 상태, 시간이 정지된 상태, 내일이 되어도 내 운명은 달라지지 않고, 어제일이 어떠해도 내 운명은 달라지지 않고, 그 모든 인생이 한순간이 주님의 순간으로 교체가 되어버린 순간으로 된다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안전빵입니까? 세상에 이런 보험사 없어요. 최고입니다. 사람이 자아를 고집하게 되면 마리아 같은 이런 것에 미혹되고 현혹되게 되어 있어요. 성경 보면 잠 오지요. 그러나 마리아 보면 잠 안 오지요.
그러니 아직도 과거의 습관, 나는 내가 챙긴다는 습관, 감사가 안 나오고 바들바들 떠는 습관,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거기에 벌벌 떠는 것. 이걸 영어로 하면 스톡이라 해요. stock. 이걸 우리말로 번역해서 주식이라 하는데 stock이란 말은 뭐냐? 어떤 관점, 나라는 관점을 고집하면서 나라는 관점이 유리할까 불리할까를, 그 상황을 조사하는 것을 stock 이라 해요.
이게 적정한 번역이 없는데 그냥 고정된 관점, 타인과 연결할 수 있는 나만의 본부, 이게 stock이에요. 재고, 그것도 괜찮다. 의미가 잘 안설 때는 반대말을 보면 돼요. 반대말이 뭐냐? flow, 흐름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거주하기는 하지만 정주하지는 않아요. 아예 터 박고 살지는 않아요. 어디에 있더라도 잠시 있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자리에 있다, 가 아니라 주께서 어디로 흘러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흐름에 같이 흘러갈 때 나는 stock, 이 흐름, flow가 되는 거예요. 어딜 가더라도, 주께서 어떤 변화를 주더라도 나는 모든 것이 감사하는 순간순간 그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광채에요.
이미 악마에게 속한 자를 주께서 십자가의 성령을 줘가지고 구원을 하니까 누가 속이 타들어 가느냐 하면, 바로 악마가 속이 타들어가는 거예요. 자기 사람 놓쳤으니까. ‘그러니까 너 자신을 되찾아. 너는 배알도 없느냐? 체면도 없느냐? 자존심도 없느냐?’ 계속 우리에게 매일같이 들쑤시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주님의 대비책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이 있어요. 광채로 즐겨버리면 어떤 오류에 빠져버리느냐 하면, ‘나는 주님의 광채, 발광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하고 자기 자아로 환원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면 뭐냐? ‘나는 예수님의 광채를 맛보고 있고 성령 받은 사람이다’를 자랑할거냐, 아니면 피를 자랑할거냐를 생각해 봐야 돼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있다’를 자랑할거냐, 아니면 ‘그 광채가 어디서 나왔는가?’로 더 들어가야 돼요. 그게 바로 피 입니다. 피라는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안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연료를 삼아서 우리 안에 아궁이가 들어 있어요. 아궁이라 해도 되고 다른 말로 군불이라 해도 돼요. 주님께서는 주님의 죽으심에 우리가 매일같이 새롭게 등장하는 자아를 결합해서 아궁이에 때는 거예요.
군불 때버리면 죽음이 타는 에너지에 의해서 우리에게서 복음의 광채가 나오는 겁니다. 자아를 죽여서 복음의 광채로 보상받는 거예요. 내 자아를 죽여서. 어떤 인간도, 아무리 복음 아는 성도라도 뭔가 외부에서 힘든 일이 발생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나 어떻게 살아, 내 체면은 어디서 찾지, 과거에 내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았는데, 그게 한꺼번에 다 날라 갔구나, 어떡하면 좋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불러요. 오랜만에 차나 마시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며느리 앉혀 놓고, 이 콩의 원산지는 어디 콩인데 이런 콩을 삶아야 냄새가 안 나고, 이 콩을 빻아서 이렇게 뭉치면 이게 메주가 되고, 메주는 새끼줄로 달아 매야 되고, 이렇게 하면 청국장이 된다고 하니까 며느리가 하는 말이 “어머니, 그걸 왜 나에게 지금 설명하십니까?” 라고 뒤에 말, 멋있는 말 했어요.
“그동안 시어머니한테 공짜로 메주 얻어먹어 왔잖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 왜 나에게 메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십니까?” 너무나 복음의 광채 누리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그래서 어느 날 ‘나는 구원받았다, 왜? 십자가 때문에.’ 이렇게 된다고요. 주님이 내 안에서 타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피를 흘렸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렇게 고난 받고 아파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나는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 하는 말이 “며늘아, 앞으로 이 청국장 사업은 네가 해야 될 것이 아니냐?” 며느리가 하는 말이 “직원도 많은데요. 그리고 사업은 우리 아가씨가 하잖아요.” 이게 <동치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네가 얻어먹더라도 얼마나 고생을 해서 얻어먹는지를 네가 알아야 된다. 장 담글 줄 알아야 돼. 내가 죽고 난 뒤에 네 시누이하고 싸울래? 돈 가지고? 너도 고생해야지. 닭 잡아라. 닭 도망갔다.”
며느리가 도망간 닭 잡는다고, 난 지금껏 누리기만 했는데. 이젠 누리지만 말고, 이제는 내가 누리게 되었다, 그거 자랑하지 말고 주께서 함께 있다, 그거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 안에 날마다 죽어야 될 내가, 살고자 하는 나의 죄가 거기에 군불 때는 연료가 되어서 그 군불 때는 에너지가 지금의 모든 것이 감사하다는 에너지로 발현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해야지 나 구원받음을 증거 하면 안돼요. 그것까지 더들어가야 된다고요. 그러면 여기서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관점이 두 가지가 있지요. 내가 과거의 나로 알았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과거에 살았던 기억이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리면 과거의 삶 중에서 제일 어려웠을 때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것보다 더 망가졌을 때라도 나는 복음으로 견뎌야 되겠다, 라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가를 내릴 수가 있어요.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과거를 알아서 ‘그것보다 더 못한 상태라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거야’라고 미리 대비하는 차원의 그런 ‘아무것도 아니다’가 아니라, 정말 예상도 못했는데, 훅 치고 들어왔는데 갑자기 그 자아가 ‘아냐, 아냐, 이건 아니지요.’라고 버틸 때 그 때 등장하는 그 자아, 그건 뭐예요? 자아, 그걸로 군불 땐다며? 군불 때는 것이 아닌데? 또 생겨버렸는데?
이것은 바로 정말 주님 보기에 나는 착해도 안착해도 인간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돈 벌려고 애쓰는 그 자체가 악하고 음란함과 한통속이라는 것, 그들과 다를 바 없이 심판받는다는 사실, 그 중 하나가 나라는 사실, 그것을 순간적으로 새로운 사태가 다가섰을 때 아, 주님 보기에 아무것도 아닐 때 ‘이제 알았다’ 그것은 주님과 비교할 때 ‘아직 버티는 것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구나.’ 하고 깨닫는 아무것도 아님, 그게 큰 기쁨을 주는 거예요.
왜? 나에 대해서 몰랐던 나를 새롭게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뭘 해야 됩니까? 아니요. 거저주심, 주님의 거저주심이 그만큼 분량이 커진 거예요. 범사에 감사가 전에는 자그마했는데 이제는 범사에 감사가 더 커지면서 비로소 발광체에서 나오는 광채가 더 따갑게 비추는 겁니다.
퀴리 부인이라고 학생들은 다 알아요. 라듐을 발견해서 남편과 더불어서 노벨 물리학상 받고, 그 라듐을 우라늄과 분리해서 노벨화학상을 두 번째 받았던 여자에요. 퀴리부인입니다. 나중에 파리에서 바람났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고 했는데. 그 사람이 침대에서 잘 때 주사약병 만한 거기에 녹색 빛이 나는 라듐을 베개 옆에 두고 잤습니다. 그게 발광체거든요.
스스로 빛을 낸다는 것은, 모든 물질은 고유물질이 있다가 아니라 고유물질도 변화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에요. 원소가 스스로 붕괴하는 물질을 발견한 겁니다. 한번 원소가 영원한 원소가 아니고 한번 금이 영원한 금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달라지는 거예요. 우라늄이 자가 붕괴, 양자붕괴가 일어나면 나중에 납이 되거든요.
그걸 최초로 발견했는데 그게 붕괴되는 그 에너지를 계산한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이고요. 그래서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했고요. 이게 다 현실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거기서 나오는 그 X-선, 그 빛이 우리의 뼈는 뚫지 못하고 다른 것은 뚫고 지나가거든요. 뼈는 칼슘으로 되어 있어서 X-선으로는 뚫지 못하니까 뼈만 보이게 나오는 결과를 낳는데, 그 라듐을 옆에 두고 잤는데 그 방사선에서 열이 나온다는 사실을 그 때까지는 몰랐지요. 그 방사선, 빛나는 광채가 결국은 자기를 백혈병이라는 암에 걸리게 해서 죽게 됩니다.
바로 십자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미리 성령을 통해서 당겨서 아는 거예요. 우리 곁에 십자가를 그것을 병에 담아서 방사선을 쪼이게 되면 나는 잘못해서 죽는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처음부터 죽어 마땅한 흙이 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아는 그것, 그렇게 나를 새롭게 아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 아침에 찬거리 뭐 해서 먹고, 점심에 뭐 먹고, 이 모든 것도 거저주신 거예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거주주신 삶입니다.
거저 줬다는 것은 더 이상 걱정근심이, 내가 할 수 있는 걱정근심은 남아 있지 않다는 거예요. 내일 뭐할까요? 흐름이거든요. 주어진 대로, 본문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하면서 주에 합당하게 그냥 사시는 것, 그 첫 번째 선한 열매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서 그 다음 열매가 뭐냐? 우리에요.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주님이었지만 십자가 죽기까지 복종했잖아요. 이제는 그 작업을 주님께서, 성령께서 그 작업에 우리를 집어넣어요. 왜? 열매기 때문에. 주님도, 첫 번째 열매도 십자가에 죽었다면 두 번째 열매인 우리가 어찌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리오. 이 땅에서.
그런데 우리는 그걸 기쁨으로 견디고, 기뻐하다 보니까 언제 고난이 지나갔어요. 남들 보기에는 고난인데 ‘저 사람은 집도 없이 맨 날 빌라나 돌아다니고……’ 남들 보기에 고난인데 본인은 “아파트가 뭐예요?” 이러고 있다 이 말이지요.
말씀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본문 말씀은 누구를 특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를 특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거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시면서 내 안에 이런 은혜가 거저주신 것은 맞는데 그게 어디서 나왔는가? 피에서 나온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이에요. 골로새서 주제는 비밀입니다. 팔공아파트 상가라 해서 8, 0, 상가라 해서 3, 9, 8039, 거기에 *표 딱 누르시면 됩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8039*’ 이게 비밀인줄은 알았어요. 문제는 이걸 어디에 써먹을 줄을 모르는 거예요.
자아가 죽지 아니하면 십자가 피로 구원 받습니다, 알기는 알았는데 자아가 살아 있는 이상은 절대로 이것은 구원의 기쁨의 능력이 되지를 못해요. 이것은 우리교회 화장실, 남녀 공히 비밀번호입니다. 나올 때 동그라미 누르고 나와야 되는데 그거 안 눌렀다가는…….
그러니 화장실 가실 때 스마트 폰 꼭 가져가세요. 문 잠기면 살려달라고 외칠 수가 있어요. 동그라미 누르시면 나올 수 있습니다. 8039, 팔공아파트 8, 0, 상가라 해서 3, 9. 그 십자가 비밀, 그것은 성령에서 모든 내 있음이 거저주심을 아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의 비밀이고 능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과거에 발목 잡혔습니다. 마귀에 발목 잡혔습니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위에서 외쳐대니 그래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악마의 속임수인줄 몰랐습니다. 태어난 것부터 지금까지 다 거저주신 것인데 이제는 안심 놓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