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7 - 처음자리
20,11,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 이 시간에는 교재 63페이지부터 하겠는데, 그 소제목이 '3강, 주의 이름 부르기'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죠. 그러면 시작 부분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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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시간에 강의한 것은, 성경책 속에 홈을 파서 우리를 그 안에 집어넣고, 그 책 속에서 나올 때 하나의 사건이 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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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음'에서 '사건'으로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성경책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는 우리는 하나의 개체, 혹은 존재, 있음,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성경책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사건으로서 정리가 된다는 겁니다. 있음에서 사건으로 말이죠.
여기에 이렇게 성경책이 있고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성경책은 우리 눈에 보이니 있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여기에 있으니 역시 있음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굳이 '있음' 이라고 하니까 또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냥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죠.
성경책도 여기에 있고 우리도 여기에 있는데, 그러면 이 성경책에 들어갔다가 나오게 되면, 우리는 있음에서 말씀이 유발한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성경책 속에 집어넣었다가 뱉어버리면, 그러면 우리는 성경책이 폭발하면서 튀게 되는 하나의 파편이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이렇게 수류탄이 있는데 이 수류탄이 터지게 되면 파편이 튀는데, 우리가 바로 그 파편, 즉 쇳조각이 된다는 겁니다. 수류탄의 일부, 즉 수류탄의 'N분의 1'이 된다는 말이죠. 혹시 자식들에게 유산이라도 남길 때는, 이 N분의 1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되면, 있음 자체는 그만 날아가 버리고 사건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내가 있는데, 그리고 성경책이 있다. 내가 그 성경책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게 되면, 그러면 있음이 아니라 말씀의 사건이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어떻게 성경책 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가?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이해는 되는데, 그런데 우리가 성경책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말이죠. 성경책을 자기 몸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 거기에 홈을 파서 들어갔다가 나오면 되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그것은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성경책을 예수님으로 바꾸어보자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그냥 있으면 있음인데, 그런데 예수님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예수님의 'N분의 1'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파편이고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이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은 이해가 되지요? 제가 지금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있음을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있음이 없음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게 그냥 없음이 아니라 사건을 보여주는 없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 그러면 예수님에게 들어가는 방법은?
방금 제가 우리가 예수님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사건이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예수님에게 들어가는 방법, 그것이 난감하다는 말이죠. 사실은 난감한 것이 아니고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현재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그것은 없음이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가 목욕탕에 들어간다고 하면, 그것은 말이 된다는 겁니다. 목욕탕이 눈에 보이고, 그리고 그것이 자기보다 더 크니까, 그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자기도 있고 목욕탕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인데, 불이 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게 상식인데, 그러니 지금 우리가 예수님 속에 들어가고 싶어도, 성경에서 아무리 '예수 안' 이라고 해도, 그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있음에서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없음으로 통해서 있음을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설명하기가 참 힘드는데, 지금 예수님이 보입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렇게 없는데 들어가기는 어디에 들어가서 나오고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교회에는 왔다갔다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계속해서 자기가 있음이 되기 때문에, 사건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럴 경우에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게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데, 이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도 난감하기가 짝이 없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하나 하나에 점점 더 힘들어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4절을 보겠습니다.
(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 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 돌이켜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
여기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12명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베드로도 있고 요한도 있고, 그렇게 있음, 있음, 있음이라는 겁니다. 가롯유다도 있고, 그렇게 12명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있으니 있는 것끼리 누가 더 높은지, 그렇게 비교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큰 일이 났는데, 왜냐하면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어린 시절은 지났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미 성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바르게 살아라. 훌륭하게 살아라" 라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 어린 아이가 되어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불가능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도저히 불가능한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그러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 난감하네 !!
그렇게 되면 제자들의 제일 중요한 목표가 그만 날아가 버리는데, 그러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수고한 그 모든 것들이 그만 허사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되라고 하고, 정작 자기들은 이미 어른이 되었기에, 다시 어린아이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한번 봐줄 양반도 아니고, 예수님은 자기가 한 말을 거두어들이거나 철회하시는 분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은 천국에 갈 수가 없는데, 참으로 난감하기가 짝이 없는데, 지금 제자들이 처한 상황이 그렇다는 겁니다.
* 어른→어린아이→갓난아이→없음→예수님 !!
지금 이렇게 어른이 12명이 있는데, 그러면 점점 더 늙어 가는데, 그러면 결국 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방향이 어린아이 쪽이 아니고, 그게 어른이 되는 쪽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천국이 없다는 말이죠. 천국은 어린아이 쪽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보다 더 뒤로 가면 갓난아이가 있는데, 그러면 더 뒤로 가면 무엇이 있습니까? 그게 바로 '없음'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있음의 '나' 라는 것이 천국에 가려고 하면, 없음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그러면 천국에는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즉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예수님은 없음의 세계 !!
그러면 어른이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겁니까?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서 없음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없음의 세계인데, 있음의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죠.
지금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없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없는데, 성경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없는 분,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자꾸 들이댄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면, 교회는 눈에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괜찮다는 말이죠.
그리고 어떤 특정 목사를 믿으라고 한다면, 그 목사는 눈에 보이니까 그것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그 예수님은 없는 분인데 어떻게 믿느냐는 말이죠. 눈에 보이면 얼마든지 믿겠다는 겁니다. 같이 사진도 찍고 친하게 지내면서 말이죠.
여기서 성경말씀을 한 군데 찾아보겠는데, 누가복음 14장 12절에서 14절입니다.
(눅 14: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눅 14: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눅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 형제, 친척, 부한 이웃 !!
지금 예수님께서 누구를 초청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12절에 보면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아니 식사초대를 하는데, 친척이나 친구를 초대하지 않으면 누구를 합니까?
* 가난한 자들, 병신들, 저는 자들, 소경들 !!
그런데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12절에 나오는 "형제, 친척, 부한 이웃" 이라는 그룹과, 여기 13절에서의 "가난한 자들, 병신들, 저는 자들, 소경들" 이라는 그룹과의 차이점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겁니다.
앞의 그룹은 자기 있음을 더욱 더 강화를 시켜주는데, 즉 "내가 여기에 괜찮게 산다" 라고 하는 것을, "나는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자들이 곧 형제고 친척이고 부한 이웃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자기 있음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꾸게 해주는 자들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잔치에 와서 실컷 배터지게 얻어먹고 나서는, 자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줍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아무리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도, 돈도 없고 힘도 없기 때문에 전혀 그런 역할을 해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도망을 치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이것들이 70만원어치나 처먹어?
그러면 그들은 자기에게 잠시 왔을 때, 그것은 있음의 존재로서 온 것이 아니라, 없는 존재로 왔다가 그만 가버렸다는 말이죠. TV프로에 보니, 운동선수 4명이 먹는데 그 식사값이 무려 70만원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게 자기 주머니에서 나갔다면, 그것이 친구나 친척이면 나중에 70만원이 다시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거지에게 대접하면 들어올 리가 만무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있음에서 돈이 70만원이 나갔다는 것은, 자기 있음에 유리합니까? 불리합니까? 당연히 불리한데, 돈이 없으면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자기 있음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태롭게 만다는 겁니다.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이 그렇다는 말이죠.
*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
그래서 여기 누가복음 14장에서 "부자들은 네게 갚음이 되고, 거지들은 갚을 것이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라고 하는데, 이 또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화지 무슨 복이냐는 것이죠.
그러니 복이 무엇인고 하니, "어른이 된 네가 그 있음을 뒤로 백을 해서 없음 쪽으로 가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있음을 갉아먹어서 없음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복인데,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이 그렇게 조치를 한다는 말이죠.
* 부활의 세계는 곧 갚아줌의 세계 !!
그리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는고 하니까,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게 핵심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부활이 나온다는 겁니다. 부활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고 하니, 갚아주는 일이 벌어지는 곳, 그게 바로 부활의 세계라는 말이죠. 갚아준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부활의 세계는 갚아주기 위해서 여분의 것으로 제공된 세계가 바로 부활의 세계라는 말이죠. 그게 예수님의 설명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 부활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부활의 세계가 없는데, 예수님도 없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성도에게는 부활의 세계가 있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부활의 세계는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세계라는 것이죠. 그런 없는 세계를 성도가 바라본다는 것은, 성도 자체가 없는 세계의 파편인데, 즉 N분의 1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성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부로서 살아가는데, 분명히 자기가 이렇게 있지만, 이곳은 늙어죽으면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없어지는 것, 그게 없음의 뒤에 바치고 있는, 즉 없음의 세계까지 장악하고 있는 없음 뒤에 있는 그분,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의 세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없는 존재로서 합류하게 된다는 것, 그것을 아는 자가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 성도는, 없음의 세계를 알려주는 사건 !!
그러니 뒤로 가는 것인데, 어른이라면 어린아이가 되고, 어린아이라면 없음이 되고, 그 없음 뒤에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따라서 그런 예수님의 세계가 곧 부활의 세계이고, 그 부활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갚아줌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대상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있음을 중요시할까요? 없음을 중요시할까요? 없음을 중요시한다는 말이죠. 없음을 마치 있는 것처럼, 아니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없음의 세계에 속한 자이고, 이런 자들이 곧 성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없음의 세계를 알려주는 사건으로서 있다는 말이죠.
* 처음부터 다시 !!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하면, 똑같이 해보겠는데, 교재 63페이지입니다. 성경이 있고 우리는 여기에 있다고 하면, 그렇게 있을 때는 그냥 우리는 있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 우리는 있음에서 무엇을 바뀌는고 하니, 사건이 된다는 말이죠. 무엇을 보여주는 사건인고 하니, 없음의 세계가 있음의 세계보다 더 확실하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으로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만 다니고 복음을 멀리해라. 교회에 다니는 것을 내가 봐준다" 라고 하는데, 만약에 교회에 없으면 그 말을 제가 받아들여주겠는데, 그런데 교회는 눈에 보인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는 있음인데, 그런 있음의 교회에 왔다갔다하는 것은, 목욕탕이나 노래방에 왔다갔다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 없는 교회는, 죽은 자들의 동창회 !!
그것은 그냥 어른으로서 있음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는 있음이 되기 때문에, 어느 교회든 간에 교회는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교회든 무슨 교회든 간에 없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교회에 다녀야 구원을 받는다" 라고 배웠기 때문에, 교회가 마치 구원해주는 것처럼, 즉 교회 있음이 자기 있음을 구원해주는 것으로 오해를 해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있는 교회가 아니고 없는 교회가 구원을 하는데, 그렇게 없는 교회는 바로 살아있는 자들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동창회라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알아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보내셔서, 즉 사건으로서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온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보내셨고, 그리고 오후 3시에는 집에 가게 했다" 라는 것인데,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 괜찮아, 많이 먹어 !!
여러분이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하면, 친구와 친척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리는데 있어서,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가 그렇게 아는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하던지 하지, 생판 얼굴도 모르는 노숙자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리고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네가 오만원짜리를 먹었으니, 네가 나의 있음에 유리한 돈을 가져갔기 때문에, 그것을 채워주면 친구라고 여기고, 그것이 아니면 끝이다" 라고 하지는 말라는 것이죠. 그것은 자기 있음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인데, 그러면 어린아이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 친구 : 잘 먹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갚아주지 못하겠어.
* 성도 : 괜찮아, 부활의 세계에서 주님이 갚아주신다.
* 친구 : 너는 부활을 믿어?
* 성도 : 그럼, 당연히 믿지.
* 친구 : 부활의 세계는 어떤 동네야?
* 성도 : 부활의 세계는, 없는 쪽에 했다는 것에 대해서 갚음이 되는 세계야.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께서 "나는 여기 부활의 세계에 있어. 물론 세상 사람들은 없다고 여기지만, 나는 여기에 있어. 그런데 너는 진짜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믿었구나. 그러면 여기에 있는 내가 너에게 갚아줄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세계인데, 물론 세상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미친 짓인데, 왜냐하면 보이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하니 말이죠. 물론 어른이 어린아이가 되는 것도 그러한데,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누구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 없어짐을 누리는 자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어른이란 자기 있음을 측정하는 자인데, 다른 말고 하면 계산을 하는 자인데, 즉 어른은 항상 계산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린아이는 어떻습니까? 어른은 측정하고 계산을 하는데, 하지만 어린아이는 누리는 자라는 겁니다. 계산을 하지 않는데, 물론 조금 크면 하지만, 그냥 누릴 뿐이라는 것이죠.
"아버지에게 인사를 잘 하면 인형을 사주겠지" 라고 하는 것은 조금 큰 다음이고, 그 이전에는 그런 계산이 없는데, 그냥 누린다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N분의 1인데, 부모가 가진 든든한 세계를 자기는 누린다는 말이죠. 이게 천국인데, 천국은 주님의 세계를 우리가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그냥 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실 나이가 70이 되고 80이 되어도 괜찮은데, 그 마음가짐 자체가 자기 있음을 측량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죠. "당신, 그렇게 살면 죽어?" 라고 하면, "죽어도 괜찮아" 라고 하는데, 이것을 합치면 "없어짐을 누리는 자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아저씨, 안녕하세요 !!
그런 영화가 있는데, 강도가 어떤 가정집에 쳐들어와서 부모를 죽이고 물건을 훔쳐가면서, 집에 있는 아이까지 죽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이가 "아저씨, 안녕하세요" 라고 하면서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는 겁니다. 영화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장면은 기억이 나는데 말이죠.
여기서 그 아이는 자기의 없어짐도 누린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있음, 즉 자기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있는 것도 사건이고, 없어지는 것도 주님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으로 가고 있는 중이고, 이게 곧 '신앙생활' 인데, 그냥 모든 것을 누리는데, 아쉬운 것이 없다는 겁니다. 계산을 하지 않으니 모자람도 없고 말이죠.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인데, 그것을 마태복음 18장 4절에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라고 하고, 누가복음 14장 11절에서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눅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니 예수님이 정해놓은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8장에서, 제자들끼리 "천국에서 누가 높은가?" 라고 하면서 서로 기 싸움을 하는데, 천국에 가는 것을 기정사실로서 여기고 말이죠. 거기에 대한 주님의 규정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말이죠.
* 천국은 꿈도 꾸지마 !!
사람이 경쟁을 할 때는, 서로를 알기 위해서 계산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런 계산이 아니고 누리게 되면, 이것은 "높은가? 낮은가?" 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낮으면 낮은 대로 누리고, 또한 높으면 높은 대로 누린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아이를 연년생으로 낳게 되면, 자라면서 수많은 다툼이 일어나는데, 저는 형과 3살 차이인데도 어릴 때 지지 않으려고 했던 기억이 아직 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5살 차이가 나버리면 싸우지 않는데, 서로 서로 그냥 누린다는 말이죠.
그게 누나라면, 유모차를 끌어주고 하는데, 우리 손녀가 그렇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서로 싸울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측정을 하지 않는데, 서로 계산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너보다 높다. 혹은 낮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 신앙생활이란?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천국에 갈 욕심이 앞서서 자꾸만 비교를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적인 관성이 너무 강렬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살아온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신앙생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해도 그것을 멈출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자꾸만 자기에게 유력한 사람을 들먹이는데, 즉 "내 친구 중에, 친척 중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꾸만 측정을 하고 계산을 해서 자기 있음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게 되면,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죽어 없어져서 예수님을 만나야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그 이전에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겁니까? 미리 앞당겨서 신앙생활을 맛볼 수는 없느냐는 겁니다. 어린아이의 그 맛을 말이죠. 물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구약의 아가서라는 겁니다.
여기서 아가서를 보겠는데, 4장 1절에서 5절입니다.
(아 4: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아 4: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아 4: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아 4:4)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아 4: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 옷은 인간의 행함 !!
그러면 이게 무엇을 걸치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둘이 다 벗고 서로의 자태를 표현하는 구절도 여러 곳에 나온다는 겁니다. 아가는 일명 '사랑의 노래'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옷을 설명하는 겁니까? 몸을 설명하는 겁니까? 몸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죠.
옷은 입고 있더라도 꿰뚫어보는 것인데, 그러니 옷은 인간의 행함이라는 겁니다. 즉 옷은 인간의 문화이고 문명이라는 말이죠. 인간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것인데, 즉 자기 잘남을 과시하기 위해서 쌓아놓은 모든 업적이 옷이라는 겁니다.
* 나는 이 정도야 !!
정신병이 무엇인고 하니,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감추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정신병지라는 말이죠. 옷은 감추는 용도인데, 자기 본색은 가리고 말이죠. "나는 이 정도다" 라고 하면서 자기 본래 모습은 숨기고, 화려하게 치장한 겉모습만 드러낸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본 누가복음 14장에서, 벗이나 돈이 많은 자들을 초청하지 말고, 불구자나 가난한 자들을 초청하라는 것은, 그들은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있으나마나한, 즉 없는 존재라는 말이죠. 그러한 없는 존재를 초청해서 밥을 같이 먹었다는 것은, 자기도 역시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즉 "우리는 다 없는 존재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마음을 낮추는 것이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있음에서 없는 쪽으로 가는데, 그 없는 쪽은 누가 받는고 하니, 천국에서 받아준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없는 존재였기에 말이죠. 이 세상은 있는 것을 더 가지지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가 사라진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부활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고 하니, 없는 주님을 섬겼다는 것에 대해서 갚음이 되는 세계라는 말이죠.
* 처음자리 !!
아가서에서 옷은 인간의 노력이고 행함인데, 즉 문화라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병자는 자기의 본래의 것은 숨기고, 그럴싸하게 옷으로 치장해서 "나는 이 정도야" 라고 하는데, 그게 옷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아가서에는 둘 다 옷을 입지 않았는데, 옷을 입어도 신경을 쓰지 않다는 겁니다. 둘 다 몸 자체, 그것을 '처음자리'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것이 갓난아이이고, 그래서 여기 2절에 보면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틀니가 아니라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모든 것이 처음자리인데, 이것을 오늘의 강의제목으로 하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러니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없는 것에서 생긴 처음자리, 다시 태어날 그 자리, 그 자리가 이미 태어나서 이만큼 된 자기 자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어른보다도 어린아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인데, 즉 없었는데 태어났다고 하는 그 사건, 그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5절에서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라고 하는데, 즉 사랑하는 여자의 젖가슴을 백합화에 비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고 꽃에 말이죠. 하나님이 그 꽃을 만드는데, 인간이 보탬이 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백퍼센트 주님의 작품인데, 물론 요즘은 원예기술이 발달해서 농부가 손질도 많이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 백합화, 이것은 손대지 말라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거기에 무엇을 더 가미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야말로 막 태어난 노루 새끼와도 같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여인인데, 그게 진짜 하나님의 작품 그대로라는 말이죠. 옷이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인데, 벗은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겁니다. 아무런 인간의 행함도 걸치지 않은 그 모습, 주님이 그렇게 우리는 보겠다는 것이죠. 우리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것은 우리의 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주님의 있음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나', 그것은 있음이 아니고 사건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있음으로서 무엇을 걸치지 않고 그 자체로서 기뻐하는 것, 그게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 하나님의 기쁨 !!
누가복음 2장 14절에 보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자를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여자 친구처럼 아름답게 보신다는 말이죠. 인간의 행함으로 거듭난 것이 아닌데, 예수님 때문에 새롭게 태어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처음 태어난 자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보시겠다는 것이죠.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번에는 누가복음 15장을 보겠는데, 3절에서 7절입니다.
(눅 15: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 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잃어버린 자 !!
여기 7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라고 하는데, 주인이 기뻐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어떤 자에게 해당이 된다는 겁니까? 그것은 곧 잃어버린 것을 아는 자라는 것이죠.
그러면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 있음은 어떤 상태인고 하니까, 자기가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내가 여기에 있어. 나는 참으로 대단해. 그러니 나를 무시하지마" 라고 것 자체는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것은 잃어버린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누리는 자가 결코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계산을 해야하고 늘 긴장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방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방어' 라는 것도 강의제목으로 괜찮지 싶은데 말이죠.
달리 말하면, 벗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정신병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정작 내놓을 것이 없으니, 자꾸만 엉뚱한 것을 가지고 들이대는데, 즉 교회를 얼마나 다녔고, 헌금을 얼마나 했고, 기도를 얼마나 했고, 봉사를 얼마나 했고,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 모두 다 잘린 12제자 !!
그러니 이것은 "누가 서로 높은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계산하고 측량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닌데, 주님은 지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냥 누려라. 싸우지 말고, 비교하지 말고, 경쟁하지 말고, 네 형편을 그냥 누려라. 그게 어린아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12제자들이 다 잘렸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변호한 것이 아닌데, 자기 방어를 했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베드로는 자기 방어에 급급했는데, 그게 옷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이런 식으로 어른답게 살아왔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여기에 성령이 오신다는 말이죠. 이것을 "사랑이 온다", 혹은 "주님의 기쁨이 온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100마리의 양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는데, 그러면 그 잃어버린 양이 알아서 네비를 찍어서 본대로 합류한 겁니까? 전혀 아닌데, 양은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는데, 그런데 목자가 먼저 찾아왔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도 그냥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매고 간다는 겁니다. 왜 어깨에 맵니까? 너무나 기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99마리의 양보다도 한 마리의 양을 찾은 그 기쁨을 놓치지가 싫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잃어버린 양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전혀 구원받을 수가 없는데, 그야말로 모든 것이 어설프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다는 겁니다. 강도가 자기 집에 쳐들어왔는데, 그런데 그 강도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아저씨, 안녕하세요" 라고 하면서 인사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혀 자기를 방어하거나 지킬 여력이 전무하다는 것이죠.
* 무척 어려웠던 아가서 !!
지난번에 대전 십자가 마을 수련회에서 아가서를 강의했는데, 그런데 수련회가 다 끝났는데도 어렵다는 반응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물론 저도 무척 어려웠는데 말이죠.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고 하니, 주님의 일방적 사랑을 이해하기가 힘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사랑은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 서로가 알아서 또 갚아주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옛날 드라마를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고 구박할 때 뭐라고 합니까? "네가 시집을 올 때 얼마나 해왔노? 우리 집안이 얼마나 뼈대가 있는 집안인 줄 아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드라마에서는 항상 무슨 대사를 같이 동원시키는고 하니, "우리 집안은 뼈대가 있는데, 너는 근본도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매일같이 그렇게 구박을 하는데, 그런데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뼈대가 있는 집안이란 것이 12제자에게 다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서 누구의 뼈대가 더 좋은 뼈대인지, 그것을 가지고 다투었다는 말이죠. 그들이 뼈대싸움을 벌렸다는 것이죠.
* 주님은 이 땅에서 근본이 없어 !!
그런데 정작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닌데, 그러니 이 땅에서는 근본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하늘에 속한 분이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7장에 분명히 나오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쉽게 말해서 "내가 근본이 없는 것처럼 너희도 근본이 없어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있음이 아니라 없음인데, 없음의 존재라는 말이죠. 즉 존재가 아닌 사건으로 살아가라는 겁니다.
(요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 찾아가는 하나님의 기쁨 !!
하나님의 기쁨은 어떤 것인고 하니, 자기가 알아서 찾아오는 사람이 기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 그런 자들이 너무나도 기쁘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주님의 기쁨이고, 또한 성도가 된 자의 기쁨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보니, 이게 기쁘지가 않다는 겁니다. 헌금을 많이 한 경우에는, 그렇게 자기가 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계산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즉 "누가 더 많이 기여했는가?"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로서 누군가가 봉사를 열심히 하면 은근히 걱정이 되는데, 나중에 위세를 얼마나 부릴지 모른다는 말이죠. 제가 그런 경우를 한 번 두 번 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하나의 사건으로서 봉사하게 될 때, 이것은 기적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정말로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죠.
존재로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서 봉사하는데, 그러니 자기가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없는 존재인 주님께서 봉사하듯이, 그렇게 그 봉사하는 인간을 없어지게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미 그런 기쁨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서 그 무슨 짓을 해도 주님은 우리를 보고 예쁘다고 하시는데, 조금 전에 살펴본 아가서의 말씀대로 말이죠. 여러분은 아가서에 나오는 그 술람미 여인이 마치 미스월드나 되는 줄 알지도 모르겠는데, 전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녀의 가족 중에서 오빠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오빠가 자기 여동생을 보고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과수원에서 일한다고 얼굴이 시커멓게 되고 엉망인데, 그런 너를 누가 데리고 가겠노?"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가슴도 크지 않는데, 그래서 "너 같이 가슴도 작은 여자를 누가 좋다고 하겠노?" 라고 했다는 겁니다.
* 너는 너에게 반했어 !!
그렇게 같은 가족들은 무시했는데, 그런데 솔로몬 왕은 그 술람미 여인을 보고 반해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반했다는 겁니다. 다른 양들을 알아서 목자를 따라갔는데, 그런데 이 잃어버린 양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만 이탈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목자가 찾아가서 건지는데, 왜냐하면 그 건짐 차제가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겁니다. 너무나 좋아서 목자가 자기 어깨에 매는데, "어이쿠 내 새끼, 어디에 갔다왔노?"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신앙과는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다시 누가복음 15장을 보겠는데, 8절에서 10절입니다.
(눅 15: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눅 15: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 아하, 내가 죄인이구나 !!
어느 여자가 그만 동전을 하나 잃어버렸는데, 그래서 부지런히 찾아서 결국은 찾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10절에 보면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라고 하는데, 즉 기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기쁨은 자기가 인위적으로 조작해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볼 때 기쁨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죄인으로 보는 것, 그게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니고, "저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는 것이 진정성이 있을 때, 그러면 주님의 사랑만 완벽하게 노출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누림인데, 주님의 사랑을 성령 안에서 누린다는 것이죠.
가롯유다를 빼고 11명의 제자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11제자의 모든 과거가 죄인임이 드러나서, 그게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이 오셨다는 말이죠. "나는 성령을 받았다. 그러니 무시하지 말라" 라는 게 아니라, "나는 한 것이 전혀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을 특별히 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또한 살림을 살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기침이 나면 기침을 하면 되고, 그러다가 좀 심하다 싶으면 병원에 가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신경이 좀 쓰이겠지만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제발 자기 자신을 측량하지 말고 계산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는 몇 점일까?"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점수를 매기기 말라는 것이죠. 그런 것은 자기가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더러운 행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 하이, 하이데거 !!
그 다음에는 교재 65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하이데거' 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20세기 중반의 독일 철학자인데 말이죠. 그 당시가 독일은 히틀러 시대였는데, 그때 대학교 총장까지 지낸 분으로서, 그러니 히틀러에 대해서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의 책 가운데 '존재와 시간'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그 뒤에 나온 책의 이름이 '시간과 존재' 라는 말이죠. 그러면 처음 책인 '존재와 시간'에서는 시간보다는 존재를 앞장세웠다는 겁니다. 존재는 있음인데, 즉 "나 여기 있다" 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있는 입장에서 시간을 생각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뒤에 쓴 책이 '시간과 존재' 라는 것인데, 여기서는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을 그만 뒤로 돌려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보다 시간이 강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예를 여기 교재에 적어놓았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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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서, 배가 고픈 쥐가 우글거리는 방에 치즈가 한 덩어리 있다고 합시다. 그 쥐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합니까? 사방에서 달려들어서 치즈를 갉아먹는데, 그러면 나중에는 치즈가 거의 남아있지를 않습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치즈는 쥐새끼인데, 존재를 시간이 와서 다 뜯어먹어 버리면, 존재는 더 이상 그 존재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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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쥐새끼와 같은 시간에 당할 재간이 없어 !!
다시 말해서, "시간이 나 있음을 갉아먹는다" 라는 겁니다. 자기가 시간을 잘 활용한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 책을 쓴 경우이고, 그런데 나중에 보니 어떻다는 겁니까? "내가 시간을 활용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떤 형편에 놓이든지 간에, 시간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고 달려들어서 갉아먹더라" 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거울도 보기가 싫어지는데, 자기가 자기 모습을 보기 싫다는 말이죠. 온 얼굴에 쥐가 와서 갉아먹은 흔적뿐이라는 겁니다. 얼굴만 그런 것이 아니고, 팔이고 다리고 간에 쑤시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이죠. 허리디스크에 고관절에, 어디 멀쩡한 곳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눈도 침침해서 글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말이죠.
그래서 시간을 이겨보겠다고 보톡스를 맞고 하지만, 그것도 몇 개월 지나게 되면 얼굴이 원래의 모습이 되고 마는데, 아니 더 심해지는데, 잘못하면 그만 선풍기 아줌마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 부작용으로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는 말이죠. 주름을 펴려고 하다가 그만 가분수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젊었을 때 그렇게 멋있던 자기 모습도 시간이 지나면 그만 꼴보기가 싫어지는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나 여기 있어. 내가 있으니 나를 알아줘" 라고 했던 것이 어떻게 됩니까? "나 여기 없다" 라고 되는데, 그래서 나이가 많은 분들은 결혼식에 가더라도, 친척들이 다같이 사진을 찍을 때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나는 이제 그만 빼도" 라고 하는데, 사진을 다 버려놓는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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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만 창조한 것이 아니라 시간 안에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게 된 그 바탕, 즉 하나님의 형상과 연계하는데 있어서 시간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결코 시간 안에서 인간승리로 이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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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인간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시간도 만들었다는 것은, "얘들아, 조금만 살고 없어져라" 라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참으로 허무한데, 하나님께서는 시간도 같이 만들어서, 그 시간이 인간을 갉아먹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 시간은 안내자 !!
그러면 시간은 어디로 갑니까? 시간은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그 처음에는 누가 있습니까? 모든 시간과 공간은 누가 만들었는고 하니, 시간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예수님 쪽으로 간다는 겁니다. 시간으로 인해서 모든 만물이 피곤해서 소멸하게 되면, 그러면 결국 그 시간이 안내자가 되어서 모든 피조물을 예수님 쪽으로 소개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어디로 갑니까? 인간도 역시 예수님 쪽으로 가는데, 그런데 여기서 인간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과 결합이 되는데, 이 하나님의 형상이, 즉 예수님이 인간에게 핍박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 사이는 어떻게 됩니까? 서로 대립관계가 성립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지옥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리고 천국도 역시 만들어져 있다는 말이죠.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을 구박하지 않은 사람은 어디에 갑니까? 그런 사람은 천국행이지만, 반면에 예수님을 구박한 사람은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습니까? 성도도 역시 예수님을 구박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셨다는 말이죠.
* 베드로의 자기 방어 !!
여기서 잠시 복습을 하면, 베드로의 경우에, 그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을 옹호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는 자기 방어에 급급했다는 겁니다. 자기 잘남, 자기의 어른다움, 즉 "내가 행해서 이만큼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베드로는 자기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하던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나의 나됨'에 대해서 자꾸만 압박을 가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게 이 세상의 악마가 하는 짓인데, 그 악마가 하는 말이, "네가 교회에 다닌다면서? 복음을 안다면서?" 라고 하면서 시비를 거는데, "그래도 복음을 전할 거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동성애 방송을 취소하라 !!
어느 기독교 방송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로마서를 이야기하면서 "동성애는 악하다고 합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자 방송심의단체에서 "그 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허가를 취소하겠습니다" 라고 연락이 나왔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성소수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취하기 때문에, 그런 자들을 비난하는 방송은 허가취소의 사유가 됩니다" 라고 통고가 나왔다는 것이죠.
만약에 우리가 그런 방송을 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대책을 세우면 될까요? 그러면 동성애 부분을 빼고 복음을 전하면 됩니까? 아니면 아예 방송을 접어야 하는 겁니까?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물론 그 방송국이 복음을 전했다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말이죠.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독교 방송국인 CBS는 정부정책에 동조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튼 여러분이 방송국의 사장이나 주체자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1장 27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과연 이것을 빼버리고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전할 수가 없는데, 그러면 방송국 문을 닫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죠.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하지만 저의 경우라면 문을 닫지 않고 계속해서 방송을 하겠는데, 그러면 경찰이 쳐들어와서 강제로 문을 닫게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말이죠. 우리는 우리대로 하고, 그리고 경찰은 경찰은 경찰대로 하는데, 경찰이라는 공권력을 동원한 것도 역시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각자 각자의 일을 하면 되는데, 즉 개는 개대로 짖고 복음은 복음대로 전하고, 그러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방송국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방송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존재는 지옥에 가는데, 그러니 반듯시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사건은 천국에 가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천국에 와있다는 겁니다.
* 복음이냐? 먹고사는 것이냐?
이것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자꾸만 자기 가정의 존재함, 사업체의 존재함, 그렇게 존재로 나가니, 제 아무리 몰래 한다고 해도 악마가 귀신같이, 원래 악마가 귀신인데 말이죠. 그 악마가 압력을 가하는데, "복음이냐? 먹고사는 것이냐?" 라고 하면서, 양단 간에 결정을 내리라고 압력을 가한다는 겁니다.
이 악마는 예수님에게도 "이 돌이 떡이 되게 할래? 아니면 굶어죽을래?" 라고 했는데, 바로 그 악마가 지금도 살아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아무리 해도 이 악마의 시선을 전혀 벗어날 수가 없는데, 기필코 찾아와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냐? 존재하는 너의 가정과 사업체냐?"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시비를 건다는 말이죠.
*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으로서 !!
그러면 우리는 그런 현실 속에서 감사해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 힘으로 회개해서 주님 쪽으로 갈 수 없음을 또 다시 아는 순간이 된다는 겁니다. "아하, 내 존재로는 어떻게 해도 천국까지 갈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우리는 그냥 잃어버린 양이라는 말이죠.
주님께서 존재를 사건으로 바꾸시는데, 이게 기쁨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건지는 사건만이 우리를 통해서 고스란히 드러내고 보여주게 되면 된다는 말이죠. 결코 어렵지 않은데, 그냥 살면 된다는 겁니다. 경찰이든 검찰이든 간에, 그들이 아무리 협박을 하고 공갈을 쳐도, 그것은 그들의 일이고, 자기는 주님을 섬기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든지, 혹은 어느 누구처럼 객기를 부리면서 덤비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주님이 경찰을 동원하든지 해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악마가 방송국을 폐쇄시킨 것이 아니라, 주님이 더 이상 하지 말라고 문을 닫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복음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데, 경찰이 오던 누가 오던 두려워하지 말고 말이죠. 이래도 손해가 아니고 저래도 손해가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손해를 볼 것이 없다는 겁니다. 완벽하다는 말이죠, 방송국 문을 닫아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죠.
물론 실제로 방송국 문을 닫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거기에 관계가 되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일단 사과문을 내고 계속해서 방송을 해야한다는, 돈이 많은 유력한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하니, 방송국 문은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악마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고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는 죽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사건이고, 주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주님이 이끌어 가는 대로, 즉 사건으로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죠.
조금만 더 하고 마지겠는데, 교재 66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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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은 마련되어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 정답으로 몰려듭니다. 정답으로 질주하는 부지런한 사건에 휘말려서 오늘 우리는 지금의 이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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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답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없든지, 그게 아니면 재벌가문에서 태어나든지,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든지, 사막의 한 가운데서 태어나든지, 그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란 말이죠. "내 인생이 이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라고 하면서 측정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 왜 남자와 여자인가?
이제 67페이지를 보겠는데, 이것은 너무 어려워서 맛만 보고 마치겠습니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 문제인데, 이제 창세기 2장에 들어가는데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왜 몽땅 다 남자이든지, 몽땅 다 여자가 아니냐?" 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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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2장에 남자와 여자가 나오는데, 이 지경은 무슨 지경입니까? 아직도 과학자들, 그리고 생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사람이 왜 남자와 여자로 구분이 되는지에 대해서 해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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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즉 진화론적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까, 남자와 여자가 있는 이유를 번식 때문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남자 혼자서, 혹은 여자 혼자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남자 혼자서 번식이 되게 하실 수가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죠.
지금도 실제로 성이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번식을 하는, 즉 무성생식(無性生殖)이 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서로 성이 다른 것이 합쳐져서 번식을 하는 것을 두고서 유성생식(有性生殖)이라고 하고 말이죠. 물론 대부분이 유성생식이지만, 무성생식도 있다는 것이죠.
그 이유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무엇이라고 답변을 합니까? "그것은 진화가 그렇게 되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진화가 되었다' 라는 것은 어떻게 살다가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왜냐고 묻지 마세요" 라는 것인데(ㅋㅋ), 한 마디로 말해서 '모르겠다' 라는 겁니다.
* 여자는 '여분'의 것 !!
여기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무엇인고 하니, '여분', 즉 나머지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다이빙대'로 예를 들고 싶은데, 여기에 이렇게 세로로 벽이 있고 그리고 밑에 풀장이 있으면, 이것이 그냥 이렇게 밋밋하게 있으면 안 되고, 여기 중간에 돌출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출이 된 부분이 남성이 아니고 여성 부분이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남자인 아담을 먼저 만드셨는데,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남자를 만들고 난 뒤에 그 추이, 그 과정, 즉 텀을 두고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돌출부, 즉 여분의 것이라는 말이죠.
* 이것이 남자의 슬픈 운명 !!
아담은 그 차제로서 완성인데, 그런데 그 완성된 것에서 돌출이 나왔다는 것은, 아담, 즉 남자는 아무리 해도 여자가 있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자가 아무리 여자에게 모든 것을 잘해주어도, 여자는 그 남자에게 미흡함을 느끼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남자의 슬픈 운명이라는 겁니다(ㅋㅋ).
그리고 이유를 물론 여자도 모르는데, 다만 여자는 남자로부터 모든 것을 다 얻어도 항상 성이 차지 않다는 것을 경유하고 돌아옴으로서 무엇을 보여주는 겁니까? 장차 부활의 세계, 즉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여성이라는 것을, 즉 예수님의 신부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이 결코 만족함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을 이 세상의 시달리는 피곤한 인생을 삶으로서 돌출 부분, 즉 주님이 주신 여분의 것으로 인해서 만족해하는 심성, 그것은 남성 쪽이 아니라 여성 쪽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무조건 다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그러나 여자는 남자에게 먹히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는 결혼을 통해서 실컷 체험케 하도록 하시는데,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으로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다 뜻이 있고, 그것이 전부 예수님에게서 나온,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항상 주님의 은혜로 어린아이와 같이 누리를 삶을 살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11,07 오후 6시에 마침.
동성애든 이성애든 모두 다 죄임을 알고, 어린아이처럼 누리면서 살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