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창조의 시료

아빠와 함께 2020. 11. 3. 07:11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6 - 창조의 시료

20,10,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의 창조, '날'에서 '분'으로 !!

오늘은 '창조에 대해서 하겠는데, 창세기 1장과 2장을 중심으로 말이죠. 그것이 교재 59페이지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라고 하는 창세기 1장 3절의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교재 60페이지에선 그것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날' 이라고 하는데, 창세기 1장이 그렇다는 말이죠.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하나님이 일하시는 '날'이 아니라, 그게 '분'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 끝 부분에 보면 나오는데, 즉 날이 어떤 분으로, 그렇게 인격으로 바뀌어 진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내막이 드디어 밝혀진다는 겁니다.

그 창조내막을 알기 위해서, 먼저 창세기 4장 7절을 보겠습니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죄가 그 인간을 원한다 !!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런 제사 사건이 있은 이후에 하나님의 예언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은 자기가 죄를 원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런데 여기 창세기 4장에 보면, 인간이 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그 인간을 원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죄가 인간을 원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 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짓는 행위가 아닌 어떤 인물이 되고 마는데, 즉 죄가 인격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죄라는 것은 인간을 어떤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숨어있는 인격체, 그게 곧 죄라는 말이죠.

* 인간을 인격으로 보지 않는 창조

인간의 입장에서 자기와 닮은 것을 인격적이라고, 즉 인물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성경은 그 한계를 넘어선다는 겁니다. 즉 인간을 인격으로 보지 않는 죄, 인간을 인격으로 보지 않는 의, 인간을 인격으로 보지 않는 창조, 인간을 인격으로 보지 않는 심판, 이런 것이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분에 의한 작업이 된다는 말이죠.

창세기 1장 1절에서 분명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하는데, 거기에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는 순간 어떻게 되는고 하니,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그만 놓치게 된다는 것이죠.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다. 즉 인간을 비롯해서 산과 들의 짐승들, 그리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다. 그러면 창조가 끝났다" 라고 여기게 되면. 성경은 창세기 1장으로 끝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 2장, 3장, 계속해서 나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창조는 그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격화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조금 더 비약해서 이야기하면, "창조하신 것을 버림으로 창조를 본격적으로 개시한다" 라고, 혹은 "창조작업에 나서신다. 마무리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신 것을 버림으로서, 이제 본격적으로 창조작업에 나서시는데, 그것이 바로 '날'에서 '분'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창조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진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즉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으로 만드시고, 인간이 되게 했던 형상을 찾아 나서시는 일, 그런 과정 속에서 창조의 역순이, 창조 날의 역순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즉 "7에서 6, 6에서 5, 5에서 4, 4에서 3, 3에서 2, 2에서 1",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 어둠 속에 창조의 목적이 !!

그렇게 7에서 6이 되면 6일 박살나고, 또 6에서 5가 되면 5가 박살나고, 4가 박살나고, 3이 박살나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2에서 1이 되면 2가 그만 박살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1일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고 하니까, 창세기 1장 절에 보면 거기에는 흑암, 즉 어둠이 있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어둠이 있었다는 것이죠.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어둠 속에 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라고 하는데, 즉 어둠에서 시작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원래의 창조의 목적이 그 어둠 안에 있었다는 겁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갑자기 해가 사라지고 캄캄해진다는 말이죠. 창조된 것이 일종의 껍질과도 같은 것인데, 즉 6일 동안 만든 것들의 껍질을 층층이 벗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벗길 때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고 싶었던, 바로 그 창조의 목적이 되시는 분, 그분이 점점 더 가까이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죠.

바로 그 어둠 속에서 빛으로 오신 분인데, 즉 빛으로 오신 분이 첫째 날에 빛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렇다면 만들어진 빛과 빛이 되신 예수님 사이에 어둠이라는 간격이 있고, 그 간격은 창조하신 창조주만이 원래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갈 수 있다는 말이죠.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결국 일종의 미끼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기 위한 미끼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천지창조가 전부이고 완성이라고 여겼는데,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니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나타난 것으로 좋았던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그분을 인하여, 그분에게 가기 위한 과정자체가 보기에 심히 좋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나타난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면 하나님도 역시 좋아하실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피조물의 한계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인데,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 보이는 것과 나타난 것 !!

히브리서 11장 3절에 보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아니다' 라는 것을 빼게 되면, 그러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이다. 그게 완료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이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예수님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이 없어져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보이는 것이 곧 나타난 것이고, 나타난 것이 곧 보이는 것의 전부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오늘날의 과학이란 겁니다.

그래서 창조론의 경우에, 그들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소리라는 말이죠. 거기서 말하는 창조는 훼파되고 사라져야 하는데, 진짜 창조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벗겨내야 한다는 겁니다.

* 그 만드신 것을 버렸다 !!

그러면 무엇이 진짜 창조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것을 버렸다" 라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창조라는 말이죠. 만들어진 것을 없애버리는 것, 그게 창조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게서 저주를 받았기에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버림을 받았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한다고 해서 아들의 본질이 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인데,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라고 하게 될 때, 진정 아들답고 진정 주님답다는 말이죠.

* 인간은 들어오지마 !!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더 이상 악마의 지혜가 들어오지 못하는데, 그게 바로 '간격' 이라는 겁니다. 즉 "여기까지는 넘어오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그 아담의 능력이 곧 악마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능력은 악마가 준 능력인데, 악마는 주님이 주신 간격으로 인해서 저쪽 골짜기에 머물러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악마가 에덴동산까지는 들어오지만, 그러나 천국까지는 절대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철칙이라는 겁니다. 즉 "악마는 들어오지 마라"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미 인간은 악마의 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은 "인간은 들어오지 마라" 라고 하는 것과도 똑같은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렇게 그들은 들어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셨는데, 예수님을 핍박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었다는 말이죠. 그들이 유대인들인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창조한 것의 절대적 지배권을 발휘해서, 그게 하나님 주권사상인데, 그렇게 철두철미한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죠.

* 너희들은 거기까지 !!

다시 말해서, "배후에 악마가 있는 인간들아, 너희들이 갈 때까지 가봐라.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메시야를 주신다. 그리고 그 메시야에게 율법을 주셨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면 신의 백성이 된다' 라고 하는 것, 너희들은 바로 거기까지다" 라는 겁니다.

인간이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면 거기까지는 갈 수 있는데, 하지만 그것을 했다고 해서 간격을 뛰어넘어서 천국에 갈 수는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거기까지 안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버리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에 말이죠.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쉽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 천국이 있고 지옥에 있다고 하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것처럼 여기는 갭이 있다는 말이죠. 도저히 건너올 수 없는 골짜기인데, 인간은 오밀조밀 여기에 모여있는데, 물론 악마도 여기에 같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건너오려면 오려면 와봐라" 라고 하시면서 약을 올리는데, 그러니까 악마가 주님을 그만 놓쳐버렸다는 말이죠.

(눅 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아무리 가려고 해도 아직 처소가 마련되지 않아서 갈 수가 없는데, 아무리 베드로라고 해도 자기 자리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목사도 하고 장로도 하고 신학박사까지 다 했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자기 자리가 없으면 천국에는 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여보, 어디에 갔었어?

제가 꿈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데, 그런데 어제 밤에는 정말로 황당한 꿈을 꾸었다는 겁니다. 거실에 아내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운동을 간 줄로만 알았는데, 그만 휴거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내가 휴거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버림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게 황당하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해도, 두 사람이 쟁기를 갈다가 한 사람이 버림을 당하게 되면, 버려진 그 자체로서 인생은 끝이라는 겁니다. 그 갭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같이 잠을 자더라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그냥 있다는 겁니다.

저의 경우에는 정말로 꿈에서 깨어나서 묻고 싶었는데, "여보, 어디에 갔었어?" 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물을 대상도 이미 하늘나라로 가고 없는데,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나오는 '휴거' 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죠.

* 닭을 창조하신 하나님 !!

그런 휴거의 능력과 동일한 능력이 무엇인고 하니, 6일째 인간을 만든 능력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인간을 만들 때 갓난아이를 만든 겁니까? 그게 아닌데, 성인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즉 하나님께서 닭을 만든 것이지, 계란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지 모르는데, 인간 쪽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도록 골짜기를 만든 것인데, 그게 창조이고 창조의 능력이라는 말이죠. "빛이 있어라" 라고 하니 빛이 있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그 빛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라고 묻고 싶은데, 빛을 빛이 되게 하는 그 이전의 절차, 그것이 궁금하다는 겁니다.

* 지옥에는, 천지창조의 목적이 빠져있어 !!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차단시켜버렸는데, 왜 차단을 시킵니까? 그렇게 해야 마지막에 예수님이 사는 세상, 그것이 곧 천국인데, 즉 아들의 나라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는 세계를 마주보면서도 건너올 수 없는 세계, 그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말이죠.

그 지옥에 불구덩이가 있다는 것도 참으로 무섭고 힘든 것이지만, 지옥의 가장 비참한 점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하신 목적이 거기에는 빠져있다는 겁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있다는 것인데, 그게 가장 지옥의 지옥다움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에서 17절을 보겠습니다.

(살전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예수님의 경로 !!

이것은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님의 경로를 보여주는데,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었고, 10일 이후에 오순절이 오게 되는데, 초실절 이후 49일을 지나고 그 다음날이 오순절인데, 그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이후 셋째 날이니, 그게 유월절 그 다음, 그 다음 날이라는 말이죠. 유월절 다음 날이 안식일이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안식일 다음 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3일인데, 예수님은 안식일 하루 전날 돌아가셨는데, 그 날이 유월절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구약의 절기에 맞추어서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가 진행된 것인데, 성령까지도 거기에 맞추어서 오셨는데, 즉 절기의 완성으로서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경로인데, 그 경로 중의 하나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올라가시는 것이란 말이죠. 그것이 여기 17절에 나오는데, 즉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창조가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름 속으로 끌고 올라가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란 것이죠. 왜냐하면 만들어진 것은 버림을 받아야하니 말이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버려져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는데, 그 경로를 오늘날 택한 백성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게 되면, 현재 우리의 창조된 이 몸은 필히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첫째 사망인데, 왜냐하면 그 버려진 일 속에서, 즉 "나는 주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라는 게 창조의 목적이 아니고, "어떤 분을 모델로 해서 창조하셨지?" 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게 창조의 원래 목적이란 말이죠.

그래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내가 여기에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살아있다" 라는 것을 가지고 "내가 살아있다" 라는 것을 그만 대체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요즘 잘 산다 !!

친구가 "너, 요즘 뭐하노?" 라고 했을 때, "나는 살아있어"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물론 친구는 그 말의 의미를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죠.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 라는 말이 너무 기니까, 간단하게 줄여서 "요즘 잘 산다" 라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잘 산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천국백성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천국백성은 어디까지 가는고 하니, "내가 살아있지 않다" 라는 것까지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보기에 내가 살아있지?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해주어야지, 그것이 창조원리에 부합되는 천국백성의 삶의 태도라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릴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기다림의 시간조차도 자기 시간이 아니고 주님의 시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것도 주님이 살리시는 것인데, 왜냐하면 마지막에 주님을 만나보니, 주님이 창조를 하신 분이고, 또한 그분이 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어라" 라고 해서 빛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빛과 의논한 적이 없는데, 빛은 그냥 결과로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빛이 있어라" 라고 하신 것처럼, "너는 구름 속으로 올라와"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업무라는 겁니다.

그러니 "너는 구름 속으로 올라와" 라고 하신다면 주님이 강림하시는 것이 되고, 또한 "믿어라" 라고 하시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되고, 그리고 "죽어라" 라고 하신다면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명령과 권한은 오직 최종적인 창조의 목적이 되신 그분에게서 나온다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안다고 하면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된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먼저 창세기 4장 7절을 말했는데, 즉 "내가 죄를 원하는 게 아니라, 죄가 나를 원한다" 라는 겁니다. 죄가 가인을 보고 "나는 너를 원해" 라고 하는데, 그 세계는 나타난 것을 추적해서는 알 수 없는 세계라는 말이죠.

히브리서 11장 3절에 의하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즉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게 하시는 다른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보인다는 겁니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나타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것으로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나타난 것으로 모든 이야기가 다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타나게 하셨지?"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믿음' 이라는 분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우리가 '믿는다' 라고 하면, 그것은 창세기 4장 7절에 어긋나는데, 즉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분이 믿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의 본질이고 진수라는 겁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서, 우리는 자기의 능력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다고 여깁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라는 것까지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심지어 창조론자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즉 보이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나타난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증명해봐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밖에 되지 않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는 것을 전해봐야, 그것은 유대교를 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유신론적인 종교전파인데, 전혀 복음전파가 아니라는 겁니다.

* 목사님, 어떻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까요?" 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파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복음전파는 주님의 소관이라는 말이죠. 주님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가만히 있는 것을 포함해서 설치는 것까지도 복음전파로, 주님이 그렇게 활용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왜 전도에 대해서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고 하니, 그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전도라는 것이 따로 규정이 되어있기 때문인데, 그것에 미달하게 되면 전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노시는 분이 아닌데, 예수님은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지금도 주님은 계속해서 자기 창조성을 표출하고 계시는데, 물론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말이죠. 하지만 성령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창조 이상의 것을 이해하도록 인도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 1장부터의 성경기록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기록된 성경말씀이 있다는 것은, 그러면 유대인이 성경을 보는 것과 성령을 받은 성도가 보게 되면, 그 해석을 통해서 차이성을 드러나게 되는데, 그 차이성이 바로 복음이란 말이죠. 실컷 이야기를 하면, 주님께서는 "너의 실력으로는 안 돼. 나의 실력으로만 가능해"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차이성으로 마감이 된다는 겁니다.

* 그 차이성이 곧 복음 !!

그 차이성을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지금 이 대구강의가 우리교회에서 하는 강의가 아니고 대구 청도에서 하는 특강인데 말이죠. 아담은 이미 성인인데, 그런데 성인이라도 그 나이는 한 살이라는 겁니다. 한 살인데 성인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아담은 하나님께 "저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없는데, 아담은 어릴 때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 자체가 성인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아담에게 늙는다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까지는 그런 일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늙는다는 것은 아담이 도로 흙이 되는 순간이고, 또 죽음을 행하여 가는 순간인데, 그런데 그렇게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은 언제부터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 아담은 늘 아담이고, 어린 시절이 없어 !!

그러니 아담은 늘 아담이고 어린 시절이 없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오직 천지창조 때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데, 즉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 인간세계에 들어왔다면 늙습니까? 늙지 않습니까? 당연히 늙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처음엔 예수님을 임신한 것으로 시작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임신을 한 아기의 모습 자체가 차이를 보여주는데, 원래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과 육신을 입은 분의 모습의 차이는, 그게 갓난아이로부터 출발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시간 속에서 출발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이 죄를 품고 있다는 말이죠. 즉 죽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런 시간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구원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원은 죽은 것, 즉 시간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는 세계로 빠져나오는 것이란 말이죠. 또한 예수님은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형제와 무슨 관련성이 있습니까? 관련성이 없다는 겁니다.

* 버르장머리가 없어 !!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멜기세덱을 뭐라고 합니까? 3절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라고 하면서,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님이라고 봐도 되고 오늘날의 성도라고 봐도 되는데, 그렇게 되어야 창조의 목적이 완성된다는 말이죠. 이게 참 신난다는 겁니다.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보통 나이가 든 사람이 젊은 사람들을 보고 야단을 칠 때,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냐?" 라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는 아비도 어미도 없는데, 그래서 버릇이 없다는 말이죠(ㅋㅋ). 윤리도덕적인 행동을 해주어야 짐승이 아닌 인간다운 것인데, 그런데 선과 악이 없으니, 그야말로 버르장머리가 없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깜짝 놀란다는 말이죠.

기존교회에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여러분은 벌을 좀 받았습니까? 벌이 오지 않는데, 이게 놀랄 일이라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아이가 심하게 아프고 해야하는데, 그런 일이 없으니 이상한 일이라는 말이죠. 나쁜 짓을 했는데 왜 아무런 일이 없느냐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큰 일이 나는 줄로만 알았다는 겁니다.

*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는 '천년' !!

진도가 중요한 것이 아닌, 조금 천천히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의 저주는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고, 그 은혜는 천대까지 베푸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천(1,000)' 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하신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숫자라는 말이죠.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일 오랜 산 사람이 창세기 5장에 보면 나오는데, 에녹의 아들인 므두셀라라는 겁니다. 969살을 살았는데, 그러면 1,00t0살과는 불과 31년의 차이인데, 하지만 이것은 영원한 차이라는 말이죠. 천년이라는 것은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창 5:25) 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창 5: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시간을 계산한다는 것 자체가 버리는 카드인데, 즉 "지옥에 가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이란 것은 하늘나라를 묘사한 것인데, 이 땅에서의 왕국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는 세계가 성령의 세계인데,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천사와 같이 된다고 했는데, 이들 천사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지상에서의 모든 관계는 죄의 관계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원수가 집안식구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아내든 자식이든 간에 전부가 무슨 관계라는 겁니까? 모든 것이 다 죄와 죄로 엮어진 관계라는 겁니다. 그게 이 세상이라는 말이죠.

* 죄가 아담계열을 노리고 들어왔기에 !!

제가 또 다시 묻겠는데, 우리가 죄를 짓습니까? 아니면 죄가 우리를 노렸습니까? 죄가 우리를 노렸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기존 아담의 계열을 노리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서 죄가 없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니 주님께서는 근원적으로 이 모든 관계를 다 끊어버리는데, 아내가 죽고 난 다음에 "여보, 천국에서 만나자"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결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잉태지 못한 자만 드루와 !!

구약에서 '시형제 결혼법' 이란 있는데, 그 집안에 대가 없을 때 형수는 시동생과 결혼해서 대를 이으라는 말이죠. 그게 안 되면 그 밑의 시동생과 해야한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씨족중심이지 개인 가정중심이 아니기에 그러한데, 씨족 자체가 복을 받은 것이지, 가정이 복을 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가문이 복을 받는데, 즉 아브라함 가문이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자는 가문을 위해서 시집을 온 것인데, 그것이 룻기에 잘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시동생이 7명인데, 다 자식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형수는 어떻게 됩니까? 그게 바로 '잉태지 못한 자' 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잉태지 못한 자, 즉 예수님을 시작으로 해서 예수님에게서 태어난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데, 이 땅에서 태어난 자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잉태했다' 라는 조건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죄의 관계에서 잉태된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그러한 자들을 막는데, 즉 "태어난 자여, 오지마" 라는 것이죠. 태어나지 못했다고 하는 조건을 품은 자, 그런 자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육적인 조건으로 태어나지 못한, 그게 마음의 할례인데, 그런 자들만이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할례라는 것은 인간의 육을 다 끊어버리는 것인데, 그런 태어나지 못할 조건 아래에서 태어난 자, 그런 자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드루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ㅋㅋ).

여기서 에베소서 5장을 보겠는데, 8절에서 14절입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엡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엡 5: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엡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 잠자는 자여, 어둠 속에서 일어나라 !!

여기 14절에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어둠에 속해있으면 다 죽은 자라는 겁니다. 제 아무리 건강하고 몸매가 좋아도 그것은 죽은 자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에게 빛이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빛을 만든 그 이전의 빛인데, 그분이 오게 되면 죽은 자에서 깨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창세기 1장이라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1장의 감추어진 내용인데, 즉 "빛이 있어라" 라고 해서 빛이 있었던 것처럼, 빛의 원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너는 빛이다" 라고 하시면 빛이 자녀가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창세기 1장을 통해서 보이는 것으로, 즉 나타난 것으로 설명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보이고 나타난 것은 모두가 다 껍데기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다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 드러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창조하시는 일들만, 그게 신약성경에 기록된 것들인데,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펼쳐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성신이고, 신약에서는 성령이란 말이죠. 그래서 성신은 보이는 것들로 설명을 하는데, 그래서 성전도 보이는 것들로 표현이 된다는 겁니다.

* 보이는 성전 !!

그래서 에스겔서 48장에 나오는 성전복합단지는, 그것이 왜 복합단지인고 하니, 성전이 왕궁도 있고 토지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천사가 와서 수치로서 측량을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보이는 것들로 장차 오실 보이지 않는 성령의 세계를 설명하는데, 그것을 구약이기에 성신이 하신다는 겁니다.

(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성신이 에스겔을 뼈다귀만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가는데, 나타난, 즉 보이는 인자가 바로 에스겔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뼈다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 이스라엘 군대가 되었는데, 이런 것은 모두 나타난 것이고 보이는 것이란 말이죠.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그러니 이것은 종이 글을 쓴 것과도 같은데, 이런 글씨, 이것이 말씀인데, 이 말씀이 요한복음 1장에 오게 되면 예수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문자로서 했던 시기의 내용들이라는 것이죠. 그게 나타난 것이고 보이는 것이란 말이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요한계시록의 모든 이야기는, 구약 때 문자로 하던 것을 일단 그대로 박아놓고, 성령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구만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요한계시록은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죠.

* 설계도 있는 성전은 여기까지 !!

에스겔서의 성전을 보면 거창하게 되어있는데, 3층으로 해서 말이죠. 설계도가 다 나와있는데, 그러면 인간이 지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는데, 그러니 이것은 천국의 맞은 편에 있는, 즉 지옥에 머물러있는 모양새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데, 건너지는 못한다는 말이죠.

아담이 갓난아이에서 어른이 되었다고 하면, 이것은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다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성인이면서 동시에 시간이 완료가 되었다는 말이죠. 시간이 측정된다는 것은, 이미 인간은 버리는 카드라는 겁니다.

* 창조역순으로 하나 하나씩 !!

그런데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버림으로서 거기서 7부터 시작해서 1까지, 결국 어둠 속에서 나타나시는 진짜 창조의 주인공, 즉 "그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진짜 창조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1일부터 7일까지 창조를 하셔놓고, 그것을 역순을 시켜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노아홍수 때 멸망을 한 것들이 무엇인고 하니, 땅에 있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게 역순이니 말이죠. 그 다음에는 해와 달과 별이 날아가고, 땅이 날아가고, 하늘의 물이 날아가고, 그리고 바다는 2일 째인데, 4일, 3일까지 날아가도 바다는 그대로 있는데, 이 바다에는 영적요소, 즉 악마의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악마를 들추어내고, 그 다음에는 빛이 날아가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이 세상은 어둠으로 환원이 된다는 말이죠. 즉 "모든 것은 어둠이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 진짜 빛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둠에 누워있는 자들이 일어나서 빛이 자녀가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여기 교재에도 있는데, 히브리서 1장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 멸망을 시키기 위해서 창조를 !!

10절에 보면,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게 영원할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11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라고 하는데, 그러니 멸망을 시키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주님의 영원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앞에 버릴 카드가 필요했다는 말이죠. 주님의 영존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앞에 천지창조가 이루어져야하고, 그리고 그것들이 멸망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주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옷과 같이 낡아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지창조와 복음은 차이성인데, 즉 "천국과 지옥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가?" 라는 겁니다. 주님의 작업이, 즉 주님의 과정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건너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는 죄인이라는 뜻인데, 죄를 우리가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의 왕 노릇을 한다고 하는 증거를 우리가 보여주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악마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시는데, 악마가 인간의 마음에 준 것을 성도는 그것을 스스로 배설물로 여기고 토해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것들이 악마가 한 것이지, 그것을 성도로 하여금 보게 하면서, 자기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기뻐하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공감하면서, 같이 기뻐하게 된다는 말이죠.

* 아하, 주께서 졸게 하셨구나 !!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자기가 그릇이라고 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바깥으로 다 끄집어 내어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 하나 다 꺼내어보니, 설교시간에 졸고 했던 것이 다 누가 했다는 겁니까?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다는 말이죠(ㅋㅋ).

이게 웃을 일이 아닌데, 주님이 하셨다는 겁니다. 자기가 운전을 하다가 가로수를 박은 것도 주님이 하셨다는 말이죠. 그것이 아니고 자기가 정신을 차려서 했다면, 그것은 죄가 되는데, 반면에 자기가 무의식중에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님의 의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많겠습니까? 주님의 의가 더 많다는 것이죠. 자기가 야무지게 "믿씁니다" 라고 하는 것은 죄가 되는데, 그러니 우리는 그 죄를 멸해야하는 대상으로 삼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인데,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믿는다는 행위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원해주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데, 그게 하나님의 창조가 되고 믿음이 되고 소망이 되고 사랑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늘 주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는 자가 된다는 말이죠.

아무튼 창세기 1장 5절에 보면,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 날 자체도 이 땅에서는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죄가 되는 것이 왜 있습니까? 그것은 '날'에서 어떤 '분'으로 바뀐다는 말이죠.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38년이 된 병자 !!

그래서 신약에 예수님이 오셔서 이 날을 문제로 삼는데, 그것이 안식일 논쟁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이 된 병자가 나오는데, 우리가 보시에는 주님이 그 병자를 낫게 해주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병자가 낫게 되면 그 사람은 죄인이 됩니까? 의인이 됩니까? 죄인인데, 아픈 죄인에서 건강한 죄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는데, 예수님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작업, 그 어떤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있어서 필요한 시료, 그게 바로 38년이 된 병자라는 겁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우리구원이 아닌 주님구원인데, 그러니 주님의 구원이 구원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5장 5절에서 9절을 누가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요 5: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그런데 여기 9절에 보니 "이 날은 안식일이니" 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병자는 낫게 해준 것이 하필이면 안식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짓거리라고 주시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이번에는 5장 18절을 다른 분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불신자 안에 복음이 들어있다 !!

하나님의 계획이 참으로 멋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뜻을 주님을 싫어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 집어넣는 방식을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떤 멘트를 하기 이전에, 그들의 마음 속에 이미 그게 들어있다는 말이죠. 안식을 위반하고, 그래서 죽여버리겠다고 하는데, 그 다음에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동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것이 이미 그들 마음속에 양생이 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불신자 안에 복음이 들어있다" 라는 것인데, 이게 얼마나 신기합니까? 물론 신자 안에도 결과적으로 복음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불신자 안에는 복음의 시작점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김정은 안에 복음이 들어있다는 것인데,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는 그 마음에 복음의 시작점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즉 "너 같은 인간은 죽어라" 라는 겁니다.

* 참수를 당한, 47세의 프랑스 교사 !!

얼마 전에 47세의 프랑스 교사가 길을 가다가 체첸 청년에게 참수를 당했는데, 수업시간에 마호메트를 놀리는 만화를 보여주었다고 해서 말이죠. 프랑스에는 복음이 없는데, 개신교는 소수이고 대부분이 천주교라는 이단이라는 겁니다. 물론 개신교도 이단이지만 말이죠. 아주 열성적인 개신교 신도가 극소수 있다고 하는데, 주님이 그렇게 믿게 하시면 누가 말릴 수 없다는 겁니다.

프랑스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서 인권주의가 그만 종교가 되고 말았는데, 그래서 이슬람도 옹호한다는 것이죠. 인권이니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프랑스 교사가 마호메트를 비판하는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것음 바로 이 지구상에 아직도 십자가가 보인다는 생생한 증거가 되는데, 즉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는 주님의 살아계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교사는 그야말로 땡 잡은 것인데, 그야말로 특별제대를 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그렇게 가고자 했던 천국을 당겨서 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구원이니 말이죠. 주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 싹텄네, 싹텄네 ♬

여기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는데, 예수가 안식일을 범하고 또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된 것으로 여기니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오신 그 목적이, 그게 이미 저쪽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 싹이 트고 있었다는 겁니다.

가스펠 송에 보면 "싹텄네, 싹텄네 ♬" 라는 것이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그러니까 온 천지가 예수님 이야기라는 말이죠. 불신자 속에도 예수님 이야기, 물론 성도 속에도 예수님 이야기, 그리고 산천초목들의 움직임 속에도 역시 예수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나타난 예수님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나타나지 않고, 유대인들의 유대신학만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라고 하는, 그게 유대인들의 신학이라는 것이죠.

* 여보, 또 어디 갔어?

자기는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아침에 마누라는 이미 떠나고 없다는 겁니다(ㅋㅋ). 정말로 그게 꿈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 뻔했느냐는 말이죠. 전혀 아내를 따라갈 재주가 없는데, 자기만 덜렁 남아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버림을 받은 것인데, 그러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그 전날에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자기만 혼자 남았느냐는 말이죠.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그게 구원이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구원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그런 고백을 한 것을 근거로 해서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 구원에는 시간요소가 없어 !!

주의 일에 합류가 되었다는 것을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아는데,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주님에게 가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믿을 내가 굳게 지켰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에게로 다시 환원이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자기 마음은 나이가 들고 하면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장이나 성숙과 같은 시간요소를 자꾸 집어넣게 되면, 그것은 구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게 하시는데, 하지만 그 주도권은 주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죠.

47살에서 48살이 되면 더욱 더 성숙할 것인데, 그런데 왜 47살에서 죽게 하시느냐는 말이죠. 성경에는 성숙 개념이 없는데, 주님이 찾아오신 것 자체가, 즉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완료라는 겁니다. 마치 아담을 만든 것이 완료이듯이 말이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그 뒤에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것 자체가 이미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아담이 아니고 흙인데,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는 의미에서 흙이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뱀을 에덴동산에 돌아다니게 해서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게 창조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즉 흙에 속한 형상으로서의 아담이 전부가 아니란 겁니다.

* 창조의 시료 !!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때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으리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는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료로서 우리는 사용될 뿐이란 겁니다. 이제 오늘 강의제목을 정하겠는데, '창조의 시료' 라고 말이죠.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구약의 성신을 받은 사람은 신약의 성령을 받은 사람과 통하는데, 성신은 바로 성령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번 내려갔다가 와야하는데, 즉 성신 자체도 성신을 포기해야하는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게 언제인고 하니, 바로 십자가의 시점이라는 겁니다.

구약의 모든 개념, 즉 에덴동산의 개념, 율법개념, 그 모든 개념들이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그 이전에는 본래 함유하고 있던 개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에 쏠려서 주님이 그 모든 것을 다 이루게 되면, 그 의미가 만개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을 지어서 그 의미가 완성이 되는데, 그게 창조의 최종적 의미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기뻐하시는데, 물론 그 이전에도 기뻐했는데,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말이죠. 예수님이 태어날 때도 그랬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도 그랬고, 변화산에서도 그랬다는 겁니다.

* 이 세상은 망할만해서 망했다 !!

그것은 아직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할 일이 남아있다는 것인데, 이 세상이 망하는 근거를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삽입시키라는 말이죠. 즉 "이 세상이 너를 버렸다. 따라서 너는 망해도 할 말이 없지?" 라는 요소를 집어 넣어주어야,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망할만해서 망했다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고맙게도 우리의 몸이 늙어서 죽는다는 말이죠.

그것이 전도서 마지막에도 나오지만, 힘도 떨어지고 다 구부러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이 삭는다는 것은 주님의 창조작업이 계속해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우리가 다 나중에는 요양병원에 들어갈 정도로 활발한데, 그래서 나중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는 겁니다.

(전 12: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주님께서 열심히 일하셔서 우리의 숨이 넘어가게 하시는데, 그러니 창조한 것을 버리는 것이 곧 창조라는 말이죠. 버리는 창조작업, 즉 빛으로 시작한 세상을 어둠으로 다시 돌려놓는 작업, 이게 주님이 하신 창조작업이라는 말이죠. 그 어둠 중의 어둠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나타났는데, 시간을 초월한 함축된 어둠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그 어둠에 다 빠져들게 된다는 말이죠.

* 욕조구멍 !!

그것을 안양강의에서 '욕조구멍' 이라고 표현했는데, 처음에는 물이 그냥 빠지는 줄도 모르게 빠지는데, 그런데 마지막이 되면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면서 빠진다는 겁니다(ㅋㅋ). 물이 방금 여기에 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다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 욕조구멍이 바로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 사건이후에는 한 쪽은 지옥이고, 다른 한 쪽은 천국인데, 이 십자가를 따라간 제자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홀로 지셨는데, 그래서 오직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받는다는 겁니다.

* 인(印) 치심 !!

그 주의 이름이 미리 자기 택한 백성들을 찾아올 때는 성령으로 찾아오시는데, 그 근거는 생명책에 기록된 것인데, 그런 자들에게만 오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성령에 인을 받았다고 하는데, 즉 도장을 찍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성령에 인을 받은 사람은 구원이 취소가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일체 모든 행함에 대해서 받지 않는 입장에서, 즉 이쪽에서 저쪽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쏘아버리기 때문에, 그 어떤 환란이나 곤고나 어려움이 와도 그것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고래를 잡을 때 쏘는 그 포경선의 줄보다 더 질기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면 남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왜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인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동안 인간이 한 모든 것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끊을 때 얼마나 아픈지 모르는데, 그래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겁니다(ㅋㅋ).

모든 노래가 다 사랑타령인데, 자기가 준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뭔가 그 이상으로 더 얻겠다는 것인데, 그런 보상을 바란다면 그 사랑은 자기가 했던 사랑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을 뭐라고 합니까?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끊으라고 한다는 겁니다.

* 담력=능력 !!

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능력인데,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것, 그것이 능력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담력=능력'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휘장 사이로 들어갈 담력을 얻었는데, 그 담력으로 인해서, 즉 코앞에 천국에 보인다는 말이죠.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히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는데, 그렇게 버릴 때 주님이 우리 자신을 버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자기의 행함과 착함을 다 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자아를 끄집어내는데, 그냥 자아가 아닌 착한 자아를 말이죠. "이 쓰레기 같은 것이 어디서 설쳐?" 라고 하면서 내칠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 의가 주님의 의를 방해한다는 것인데, 십자가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죠. 너무 충성하고, 너무 봉사하고, 물론 여러분에게 해당이 되는 사항은 아니지만 말이죠(ㅋㅋ). 자기가 죽기까지 선교를 한다고 설치니 어떻게 됩니까? 외과의사가 수단에 가서 암에 걸리기까지 봉사를 하니까, 그만 십자가를 가린다는 겁니다. 그 의사는 천주교 신자라고 하는데, 물론 개신교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 너는 평생토록 십자가를 가려라 !!

하지만 그렇게 십자가를 가리는 죄인이 되는 것은 자기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죄가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데, 악마가 그렇게 자기를 겨냥했다는 겁니다. "너는 평생토록 십자가를 가려라" 라고, 그렇게 악마를 누가 사용했다는 겁니까? 주님이 사용하셨는데,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것이죠.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게 해주셨으니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악마와 결탁되었음을 알았으니, 자기를 버리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다는 겁니다. "나는 믿음이 좋고, 나는 신앙이 좋다" 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고 있는데, 그러니 그것을 누군가가 와서 제거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악마가 불을 지르면, 성령께서 빼내주신다는 겁니다. 내일이 되면 또 악마가 "너는 착해" 라고 하면서 불을 지르면, 성령이 오셔서 "너는 악마야" 라고 하시면서 빼내주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께서 하신 일만 남아있어야 하는데, 자기의 일은 부정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일을 성령께서 하신다는 말이죠.

* 주님께 면류관을 반납하면서 !!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으면서 나타나고 보이는 것들이, 천국에 갈 때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추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면류관을 자기 머리에 도저히 쓸 수가 없는데, 그래서 장로들이 그 면류관을 벗어서 어떻게 합니까? 벗어서 주님 발 앞에, 그 보좌 앞에 던진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면류관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쓸 수 있습니까? 자기가 한 것이 전혀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머리에 쓰냐는 말이죠. 면류관을 주신 것은, 원래 창조의 목적이 되신 분에게 다시 돌려드리라고 주셨다는 겁니다. 머리에 쓰고 폼을 잡으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 돌려드리게 되는데, 즉 "주님이 쓰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는 겁니다.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 왜 십자가가 3개인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같이 달린 두 명의 강도의 경우에,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가 아니고 3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3개냐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언제나 함축해서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보이는 일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인데, 보이는 것의 그 배후에 있는 예수님의 경로가, 그것은 어떤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모든 날과 공간도 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가 3개라는 겁니다.

2개가 없는 하나의 십자가가 아니라, 2개가 더해져서 십자가의 의의가 살아난다는 겁니다. 어느 쪽인지 몰라도 한 쪽은 지옥에 가는데, 물론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보기에는 둘 다 지옥에 가는데,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을 포함해서 셋 다 지옥에 가고 말이죠.

* 너무나 상이한 두 명의 강도 !!

이게 인간의 한계인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리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강도인데, 사형을 당할 정도의 그야말로 악한 일을 한 강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누가 봐도 사형을 시키는 것이 당연한 자들인데, 그런 두 명의 강도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강도는, 즉 인간 대 인간으로 보면 그 강도들은 그야말로 악한 놈들인데, 죽어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지옥에 간 강도의 모습인데,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내가 어디 강도짓을 하고 싶어서 했나? 어쩔 수 없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다른 한 쪽으로 강도는 참으로 이상한데,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과 묶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와 하나로 묶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의 끈으로 같이 묶여지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죠.

이것을 두고 강도의 믿음이 좋다고 하면 곤란하고, 주님이 그 강도를 데리고 가셨다는 겁니다. 창세기 4장 7절에서 죄가 노리듯이, 여기에서는 주님이 이 강도를 노렸다는 말이죠. 죄가 가인을 노린 것은 죄를 죄답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즉 피조물이라는 나타난 것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반면에 여기에서는 주님께서는 주님답게 하기 위해서 창조된 이 모든 것, 즉 나타난 것이 필요해서 그 중에서 강도를 뽑아서 타이밍에 맞추어서 같이 죽게 하시고, 그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너희가 강도가 되어도 좋은가?

이 강도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를 보고, 주님께서 "너희가 강도가 되어도 좋은가?" 라고 묻는 것인데, 주님과 하나가 된 자라고 하면, 주님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즉 '나'와 '너'가 아니라, '우리' 라는 한 묶음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할 때의 그 '우리' 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 곧 죽게 될 강도의 입장에서 그 주기도문을 다시 한번 보라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는데, 즉 "여기에는 주님과 우리뿐입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러니 이 강도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인고 하니, 바로 우리 이야기이고, 그리고 창기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인고 하니, 바로 우리 이야기라는 겁니다. 남들이 강도니 창기니 하고 하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죠.

* 주님은, 사랑의 랩 !!

주님의 사랑의 비둘기라고 할까요? 아가서에 보면, 사랑은 팔에 앉아준다고 했는데, 말로서만 그냥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팔로 다정하게 그러면서 강력하게 앉아준다는 겁니다. "오른팔로 나를 완전히 감으소서" 라고 하는 것, 그러니 주님은 그야말로 랩이라는 겁니다.

(아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그러니 주님은 우리를 감아주시고, 우리는 그렇게 감겨진 가운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한일서 3장에 보면, 이 사랑은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안다고 했다는 겁니다.

(요일 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마지막 때에 드러내시고, 처음에는 조금씩 알려주셨는데, 그런데 이제는 신약시대의 성도로서 그 마지막의 십자가 사랑까지 도다 알았사오니, 이 모든 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10,23 오전 11시에 마침.

장사가 되지 않아서 힘든 모든 상황을 그만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그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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