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충실한 개

아빠와 함께 2020. 12. 15. 07:24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8 - 충실한 개

20,11,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67페이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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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과학과 철학이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배후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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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여기 있다 !!

모든 과학과 철학의 바탕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좀 더 풀어보면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그냥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은 정상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있는 것이 정상이라고, 그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말이죠. 즉 "나는 비정상적이지 않다" 라고, 그것으로 되돌아온다는 말이죠.

교회에 와서 설교시간에 말씀을 듣고 "아, 나는 죄인이구나" 라고 하면서 교회 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렇게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면, 그 죄인은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죄인이니 비정상인데, 그런데 교회 문을 나서면서 뭐라고 합니까? "누가 나를 책망하랴? 나는 정상이다" 라고 나오는데, 다시 원위치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자기가 정상이라고 하면서 되돌아오는 이상한(?) 성격에 대해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관여를 하시는데, 그리고 누가 관여하는고 하니, 악마도 그렇게 관여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과 악마가 인간을 상대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정작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자기가 정상적이라고 여긴다는 것은, 즉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옳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살아간다는 것이죠.

* 나는 늘 옳다 !!

과학과 철학은 "내가 여기 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방금 이야기한 대로 하면, 과학과 철학은 "나는 늘 옳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개입을 하시면, 이런 인간의 모습과 정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님은 어떤 생각이고 하니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벌써 나왔는데, 성령님은 생명을 창출하시는 분이 아니고, 생명을 재분배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창조하시는 생명의 생산자는 누구인고 하니, 성령님에 의하면 그분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곧 생명이란 말이죠.

인간들은 "내가 여기 있다" 라고 하니, "나는 항상 옳다" 라는 것을 생산해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나는 옳으니 나는 살아있어야 한다.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인간은 나름대로 생명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그것은 배후에 악마가 계속해서 관여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그것은 딱 답이 나오는데, 악마는 인간의 편에서 "너의 생명과 너의 목숨은 정당하고, 그래서 네 자신을 네가 생산하면 된다" 라고 하면서 인간을 부추긴다는 말이죠. 악마가 관여할 때는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관여할 때는, 성령님은 본인이 생명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주시는데, 즉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신 것을 증거할 뿐이란 겁니다. 그러니 태도가 전혀 다른데, 성령님은 "내가 옳다" 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옳다" 라는 것인데, 그게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란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그게 아니고, "남이 옳은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 그러니 내가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나를 조금이라도 비난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지적질을 당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죠. 인간은 여기에 아주 투철한데, 그래서 과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이것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평소에 하는 것과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 얼마나 대비가 되는지를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인간들은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정상이다. 나는 옳다. 그러니 내가 사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하는데, 성경은 그것을 한 마디로 '육'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육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다는 것이죠.

* 하이데거, '인간이 중보자다' !!

여기 교재 67페이지에 보면, '하이데거' 라는 철학자가 나오는데,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사실 이게 어느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인간들의 모든 사고를 집대성했다는 겁니다.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 그것인데, 그 이전의 모든 사상을 다 섭렵하고 공부를 해주어야지, 그 당시의 철학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하이데거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이 중보자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목숨의 생산자를 인간은 누구로 보는고 하니,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부지런히 설치는 것은 옳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내가 설쳐서 밥을 먹고 살겠다고 하는데, 네가 왜 지적질을 하느냐?" 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 자기 목숨은 자기가 생산한다는 겁니다.

* 생명의 담지자 !!

그것을 어려운 말로 '생명의 담지자' 라고 하는데, 즉 생명을 담는다는 말이죠. 자기 안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내가 이만큼 공을 들여서 밥 먹고 살았다" 라는 결과가 자기 안에 담겨있다고 본다는 말이죠.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무엇인고 하니까, "너 안에 저주가 담겨있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생산자가 인간이 아닌데, 인간은 주님이 주시는 목숨에 붙어서 부지하는 존재라는 말이죠.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스라엘이 느껴야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살릴 수 없다"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살려줍니까?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다는 겁니다. 만나를 주심으로 산다는 것은, 만나가 끊어지는 죽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지당하고 당연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가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옳다고 보지만, 하나님은 옳지 않다고 여기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듣고 교회 문을 열고 나가서 하는 모든 행동들은 전혀 옳지 않다는 말이죠. 그것을 '옳다' 라고 우기면 정말 곤란한데, '옳지 않다' 라는 것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죠.

* 비틀비틀 !!

여러분은 술을 먹어본 적이 없겠지만, 그런데 술에 취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는 똑바로 걷는다고 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음주측정을 입으로 부는 것으로 하지 못하고, 줄을 그어놓고는 차에서 내려서 걸어보라고 하는데, 그런데 똑바로 걷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복음을 듣고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교회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가지 못하고 옆으로 걷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한다는 겁니까? "나는 정상이다. 나는 옳다.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실제적으로 자기가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 너는 오리지널이 아니다 !!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인간이 요청하지 않아도 악마가 부지중에 계속해서 관여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악마는 "네가 원래 살던 대로 살아" 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원래'는 영어로 하면 '오리지널' 인데, 그런데 성경은 "너는 오리지널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너는 네가 아니다" 라는 것인데, "네가 네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허구이고 가짜다" 라는 것이죠.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성령님은 성령님 본인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아서 "나는 죄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이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고 생명이다" 라고, 즉 "예수님만이 오리지널이고 원천이다" 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말이죠.

* 부지중 악마의 술책 !!

그렇게 우리가 오리지널이 아니라고 하면, 여기에 무엇이 끼어 들었다는 겁니까? 진짜 원천을 교묘하게 가리고 희석시키고 없애버리는, 즉 자기도 모르게 악마의 술책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다는 겁니다. 악마는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정신인데, 즉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옳다. 너는 정당하다" 라고 하는, 그것이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남들은 몰라도 너는 다치면 안 돼. 너는 불쾌하면 안 돼. 너는 즐거워야 돼. 너는 행복해야 돼" 라는 것인데, 그렇게 악마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지중에 그야말로 끊임없이, 우리가 악마에게 요청을 하지 않아도 악마가 뭐라고 합니다? 악마가 관여를 하는데, "너는 옳다. 너는 정당하다" 라고 말이죠.

제가 여기서 하이데거를 언급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이 자기를 중보자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여기 교재에 나오는데,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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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하이데거는 '내가 있다' 라는 것은 존재자는 해답이 아니고,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자가 되게 하는 그 존재를 찾아가는 것이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존재가 존재자가 되게 할 때, 이 존재는 시간이 주어지면서 존재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 자체를 임의로 활용하는 매개자, 중매자, 중재자, 혹은 중보자가 있어야 하는데, 하이데거는 이 존재자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들이 그냥 이 지상에서 죽음에 의해서 사라지는 그 과정자체를 매개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글을 쓰면서 존재자 위에 가위표로 포개는 묘사를 했는데,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자신이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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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증인, '존재자' !!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자라고 하는데, 그냥 인간이라고 하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다양성으로 가면 학문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수많은 인간을 하나의 색깔로 바꾸었는데, 그래서 존재와 관련이 되어있는 '존재자'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말 대신에 존재자라고 했다는 것이죠.

그러니 존재자라는 것은 인간을 짐승과 구별되게 하는 것인데, 짐승은 존재라는 바탕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인간만큼은 존재를 의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바탕에 존재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者)'를 붙였는데, 물론 그가 붙인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러면 '존재자'가 되는데,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그 존재자 위에 '가위(×)'로 표시를 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인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 배후에 있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주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인간인데, 그러니 인간은 존재의 증인이라는 말이죠.

* 복음인가? 하이데거 철학인가?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하이데거가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흉내낸 것 같지 않습니까? 성도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하이데거는 "인간은 인간 배후에 숨어있는 존재의 증거하는 존재자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뭔가 구조가 유사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하이데거는 이 가위표가 된 존재자가 스스로 존재에 이르는 중보자가 된다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에 의하면, 인간이 중보자가 아니고, "하나님 따로, 인간 따로", 그렇다는 말이죠.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2자' 관계인데, 성경은 하나님은 따로 있고 인간도 따로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니 말이죠. 그 중간에 중보자가 들어가는데, 그래서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악마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등장하는 중보자 !!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면, 물론 "예수님이 중보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나오지만, "인간배후에는 중보자가 되시는 분이 중보자로 나타나기 위해서 싸워야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있었다. 인간 너희들은 몰랐지만 말이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중보자가 오시기 이전의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인간의 '2자' 관계, 즉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천국에 갈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2자 관계가 아닌 3자 관계라는 말이죠. 하나님과 인간 사이, 그런 2자 관계에 하나님은 거기에 제3의 요소를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중보자가 어떻게 들어오는고 하니, 그냥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너는 너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만 달랑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보이지 않는 악마가 관여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한 영적 존재가 관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중보자가 등장하니,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악마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당연히 그 중보자를 제거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전처럼 하나님이 있고 인간이 있는, 그러한 2자 관계로 돌아가려고 누가 시도를 한다는 겁니까? 악마가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 예수님의 흔적을 지우자 !!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을 잘 믿자" 라고 나오는데, 그것은 2자 관계인데, 예수님은 빠지고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2자 관계가 되어버리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님도 정당하지만 자기도 정당하다는 말이죠. 즉 "나는 무엇을 해도 정당하다" 라고 하는 악마가 관여한 결과물, 즉 자기 정당성을 살려내면서 자기 구원도 챙기려고 하는, 그런 악마에 전략에 인간이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학이란 것이 하이데거 철학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인간이 자기를 분석해서 하나님과의 2자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되심, 즉 디모데전서 2장 절은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의 흔적을 지우고자 노력하는 것, 그것은 악마의 의도라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술에 취한 것처럼 악령에 둘러싸여서 비틀거리면서 살아가면서도, 자기는 바른 길로 제대로 가고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말로서는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정당하다는 겁니다.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귀신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게 귀신의 믿음인데, 그러면 성령이 주시는 진짜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증거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생명의 창출자는 성령이 아닌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성령은 택한 자들에게 분배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성령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라고 하는데, 그 생각이 무엇인고 하니, 그리스도의 뜻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믿음이 선물로 오는데, 그 선물을 은사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러니 믿음은 우리 인간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이러한 선물로 온 믿음과 귀신이 그동안 인간에게 준 잘난 체를 하는 믿음이, 그게 같을 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빈 공터에서 믿음을 받은 겁니까? 그게 아니면 귀신의 믿음에서 믿음을 받은 겁니까? 귀신의 믿음에서 믿음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아니고" 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성도라고 하면 말이죠. 자기 내부에 믿음이 종류가 있고, 그래서 "나는 전에는 이런 믿음이었는데, 이제는 그 믿음에서 빠져나왔다" 라고,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러면 귀신의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 물론 하나님이 무섭다는 것은 아는데, 그런데 예수님과는 결별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귀신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하기는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왜 우리 일에 관여하십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귀신이 사람 속에 있을 때는 인간의 말을 하다가, 예수님이 오셔서 그 사람에게서 그 귀신을 빼내버리니까, 그 귀신이 쫓겨나가면서 독자적으로 예수님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한다는 것이죠.

* 그것은 귀신의 소리 !!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귀신을 추방시키기 전까지는 귀신의 이야기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로 이해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이란 것은 귀신이 관여한 것인데, 하이데거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자기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하고 공부한 진솔하고 지혜로운 이야기라고 여기면서 내뱉는데, 하지만 그것은 귀신의 소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귀신의 소리는 "예수여, 당신이 무엇이기에 나에게 지적질을 하는가?" 라는 것이란 말이죠.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듣고 난 뒤에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무엇이 잘못인데?"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예수, 당신이 뭔데?"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는 4대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인데,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그리고 예수라는 겁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상이 무엇인고 하니, "어디서 이 목수의 아들이?"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아무튼 나는 옳다 !!

그러니 인간들은 자기 속에 귀신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데, 다만 느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아무튼 나는 옳다" 라는 겁니다. 즉 "나는 지금까지 살만한 가치가 있어서 살아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기 때문에 살아갈 것이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교회에서 사람들이 다들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복잡한 이야기는 치우고 "나는 정당하다" 라는 겁니다. 목사든 장로든 간에 말이죠. 그렇게 정당하다고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었습니까?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니, 이게 앞뒤가 전혀 맞지를 않다는 겁니다.

자기는 정당하고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이 보면 악마에 취해서 악마의 소리를 마구 내뱉는 것이 보인다는 겁니다. 우리교회의 교인들은 마태복음 7장 6절을 아주 잘 지키는데, 거기에 보면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라고 하는데, 그래서 입을 다물고 편안히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ㅋㅋ).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자" 라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교회는 아주 조용하다는 겁니다. 처음에 교회에 사람이 오면 한 두 번 이야기를 하다가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입을 다물고 마는데, 회비나 거두고 말이죠. 다른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복음은 입밖에 내뱉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님께서 자기를 전하지 않고 주님이 하신 것을 배분한 모습과, 인간들이 오늘날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모습, 이것이 이 세상을 제대로 살피는 깔끔한 풍경이란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기는 어느 쪽인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 쪽인지, 자기가 잘났다는 쪽인지 말이죠.

귀신의 믿음은 독립성을 가지고 있는데, 즉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귀신이 들어있는 우리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그래서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그만 주님의 것이 되는데, 즉 주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죠.

* 죄인과 죄사함 !!

여기에서 '하나' 라는 것은,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나의 죄를 자신의 희생으로 용서해주시는 분이다" 라는 것인데, 즉 죄인과 주님의 죄사함, 그렇게 하나로 묶이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주님의 그러한 기능을 보여주는 부속품이란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사히 여기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란 것이죠.

그래서 이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이 없이는 안 됩니다" 라는 것인데, 자기는 없어도 된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데, 성도의 특징을 "나는 주의 것이오니, 주님만 있으면 되고, 나는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다른 것은 다 필요가 없고 주님만 계시면 된다는 것인데, 어제 설교시간에 이것을 '사랑'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주님만 바라보는, 즉 '주바라기' 라는 말이죠. 주님 품 안에 있으면 자기를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 젖 뗀 아이와 엄마 품 !!

시편 131편에 보면, 2절에서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라고 하는데, 여러분이 이 풍경을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아이가 엄마 품에 있으면, 그 아이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 아이는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자기를 바라보는 자들은 악령이 들어있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를 바라보고, 그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자세,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악마가 관여하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그리고 3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라고 하는데, 어떤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겁니까? 젖 뗀 아이가 엄마와 헤어질 수 없듯이, 그런 심정으로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과 헤어질 수 없음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말이죠.

(시 131: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 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달리 말하면, 자기가 단독으로 살아가지 않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것인데, "나는 엄마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라고 하는 마음을 유지하라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 안' 이라고 하는데, 성도는 그런 '엄마 품'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아이가 장애인이든 정박아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엄마 품이란 것이죠.

* 중보자란 무엇인가?

여기서 진도를 좀 나가겠는데, 그렇다면 "중보자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이것은 '3자' 관계인데, 즉 인간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러면 중보자가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인간은 누구를 바라보는고 하니, 하나님을 바라보기는 보는데, "나는 정상이다. 나는 옳다. 나는 살 만한 가치가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오늘 여러 번 이야기를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보이지 않는 악마가 관여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아담 옆에 악마가 떠나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를 해놓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래야 같이 멸망을 시킬 수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그 죄를 인간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라,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묻고, 그리고 악마에게도 묻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뱀을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창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 인간의 분석자체가 악마의 작품 !!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저주를 받았는데, 그것을 인간만 받은 것이 아니고 뱀도 같이 받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뱀과 인간이 이미 한 통속임을 분명히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이데거처럼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분석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 분석자체가 악마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악마에 의하면 예수님의 존재, 즉 메시야가 무의미하게 되고 마는데, 오로지 의미가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그것은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의미성을 배척한다는 겁니다. 주님의 '의미 있음'을 말이죠. 인간이 이 땅에 얼마나 살든,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가?" 라고 하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오래 살았다고 해서 빨리 죽고, 조금 덜 살았다고 해서 늦게 죽고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죽고 사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닌데, 또한 지옥에 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지옥에 가고 싶다고 해서 죄를 지어서 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악마가 관여하지만, 모든 것은 그 위에서 하나님께서 관여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그만 예수님에게 삐쳤는데, 상관도 없으면서 왜 끼어 들고 하느냐는 겁니다. 지금까지 인간을 친구로 삼아서 잘 지냈는데, 그런데 제3자인 중보자로서 와버리니, 악마는 그동안 자기 친구들이라고 여긴 인간들과 강제로 헤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악마는 또 독자적으로 자기 일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붙어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고 뭐고 다 귀찮다고 하면서, "나는 나 혼자서 살 거야" 라고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은 여전히 악마에게 속해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죠.

* 그것은 가짜 하나님 !!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중보자가 오기 전까지 인간이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라고 하는 것은 엉터리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나는 정당하다" 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가짜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죠.

그동안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게 2자 관계인데, 그런 두 사람의 관계로 충분하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 하나님은 가짜라고 했는데, 즉 "너희 아비는 악마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지금 너희 주위에는 악마가 아우라처럼 둘러싸고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자 악마가 인간을 "어서, 물어라" 라고 하면서 부추겨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팔아먹고 죽이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즉 인자는 말씀에 기록된 대로 간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이전에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가벼이 그 미는 사람을 제치고 통과하셨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죽을 때도 인간이 죽이고 싶다고 해서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때가 되어서 예수님은 죽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말을 듣지 않아도, 인간과 함께 있는 악마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 가롯유다야, 이제 네가 할 일을 해야지?

예수님이 "가롯유다야, 이제 네가 할 일을 해야지?" 라고 하니,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순종을 얼마나 잘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가롯유다는 말씀에 순종해서 지옥에 갔는데, 말씀대로 예수님을 팔아먹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정도의 순종이라면 대단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마 26: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 26: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기 이전까지는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함으로서 자기 정당성이 보장이 되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관여함으로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의 되돌아오는 시선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만 바라보는, 즉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을 누가 제일 싫어했는고 하니, 인간의 배후에서 없든 듯이 하면서 인간을 조종했던 악마라는 말이죠. 악마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주인의 된다고 하는 그 프로젝트, 그것을 악마는 너무너무 싫어했다는 겁니다.

* 악마의 적은, 하나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

그러니 악마의 적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을 싫어한다고 하면서 설치는 자가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을 보내봐야 안다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악마에 속한 자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때, 그리스도가 마련한 예수 안에는 어떤 일이 난다는 겁니까? "저는 과거에 이렇게 악마를 믿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라고 하는 그 관계성, 그 과정과 경로, 그것을 예수 안에서 증거하라고 성령께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그리고 성령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그 성령의 일이 그 성령의 일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자가 하는 일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동일하다는 말이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 그게 성령을 받은 성도가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여기 교재 67페이지와 68페이지를 보면, 물리학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난해하니 그냥 넘어가겠는데 말이죠. 아무튼 자기 안에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와야, 그게 곧 성령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성도는 그런 자세가 계속해서 나와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 수시로 시간을 끊고 살아가는 인간들 !!

그러면 이렇게 "악마가 있다", 혹은 "악령이 들었다" 라는 것에 대해서, 평소에 인간이 인간을 볼 때,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는 겁니다. 인간들은 수시로 시간을 끊고 살아간다는 말이죠. 한 텀을 쉬어간다는 것인데, 즉 "이것까지 하고 이틀을 쉬고, 그 다음 프로젝트로 나가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시간을 끊는데, 이렇게 살지 않는 인간이 있습니까? 모두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어떤 계획을 세우면 거기까지 하고, 그리고는 그 다음에 또 다른 일을 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스케줄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스케줄은 인간의 시간관리라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 과연 시간을 관리할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주님이 주님을 위해서 시작하는 것이 시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왜 인간이 끼어 들어서 시간관리를 하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시간에 무슨 자기 시간이 있느냐는 겁니다. 인간이 그 어떤 일을 해도 시간이 다 잘라낸다는 말이죠.

여기서 교재 6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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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날 서랍에는 빛, 둘째 날 서랍에는 바다, 셋째 날 서랍에는 땅, 넷째 날 서랍에는 해와 달, 이렇게 넣은 것은, 그 어떤 피조물도 시간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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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

그러니 이러한 시간의 끊고 이어짐은, 시간이 끊어졌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런 시간의 끊어짐 자체를 통해서, 시간을 관리하시는 분의 계획은 끊어짐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시간을 통해서 증거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본래 시간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인간들은 그 시간을 누가 관리합니까? 계획을 세우면서 연결하고 끊고, 그렇게 자기가 한다는 말이죠. 동일한 시간인데, 성경에서는 주님이 관리하시고,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인간들이 시간을 인간들이 관리한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의 특이한 체험 !!

그러니 남의 시간을, 즉 주님의 자기 시간인 것 여기고 자기가 관리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해놓고서는 "나는 이만큼 열심히 살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우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시간을 강제로 주님의 시간으로 돌리는 경우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체험하게 되는데, 그들은 그런 특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 체험의 장소가 바로 광야였는데, 그러면 광야에서의 시간은 어떤 시간인고 하니까, 그것은 만나가 내리는 날과 내리지 않는 날이란 것이죠. 만나가 내리지 않는 날을 통해서 그들은 무엇으로 산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까? 만나로 산다는 것인데, 그것을 신명기 8장에서는 "말씀으로 산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멈추지 않는 예수님의 스케줄 !!

그러니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말씀이 있고, 이 말씀이 끊어지지 않고 일관성이 있게 나아갈 때, 그 말씀이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죠. 그것을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멈추지 않는 예수님의 스케줄로 인해서 산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기가 하는 것도 "주님이 하게 하셨다" 라고 나오게 되는데, 결코 자기가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그 모든 타이밍도, 자기가 알아서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주님이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하는, 그것이 성도라는 겁니다. 그러니 결코 인간의 시간관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과학인데, 그러면 그 끝장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교재 67페이지에 나오는데,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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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에서 물질이라는 존재를 에너지 덩어리로 해체시켜서 해명합니다. 쪼개고 또 쪼개면 에너지 덩어리만 남는다는 겁니다. 시간이 공간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함께 변화한다는 겁니다. 중력이라는 에너지 흐름에 의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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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악마의 목소리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에너지 흐름이 인간에 의해서 방해를 받으면 물질이 되고, 그 물질이 모여서 신체가 되고, 그 신체가 모여서 '나' 라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과학과 철학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악마의 목소리를 대언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이룬 문명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주님이 무너뜨리면 그것은 일거에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는다고 수고를 했지만, 주님은 무너지게 했다는 것이죠. 노아의 방주가 인간들이 평소에 만들던 배가 아닌데, 하나님의 일은 독특하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착해서 복의 근원으로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닌데, 독특하다는 말이죠. 요셉이 성격이 매우 좋아서 꿈에 하나님이 나타난 것이 아닌데, 역시 독특하다는 겁니다. 사사기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기드온이 남들보다 더 성실해서 사사가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모든 인간은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에 악마가 관여하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에 주님이 특별히 택해서 관여하게 되면, 이 사람이 자기 자신의 증인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에 그것을 하나의 배경이고 역할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 헐 !!

그러니 자기 인생을 최종적이라고 여겨서 자기 인생을 비관한다든지 낙담하는 것은, 그것은 성도에게서는 결코 나와서는 안 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헐!" 이라고 표현할 수밖에는 없는데, 오늘 강의제목으로 하고 싶은 마음도 드는데 말이죠.

그래서 에스더의 경우에는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했는데, 주님이 죽이겠다고 하면 죽여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욥의 경우에는, 주님이 죽이지 않겠다고 하는데 자기는 죽고 싶다고 하면서 난리를 쳤고 말이죠. 일이 그렇게 진행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됩니까?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는, 자기가 죽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을 보여주는 그 배역, 그 역할에 충실한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짱돌을 들고 설치는 것을 아는데,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지금 지켜보고 관여하시는 분이 주님인데, 즉 젖을 뗀 아이는 엄마만 쳐다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에게는 엄마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엄마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여기는지, 그것은 전혀 젖을 뗀 아이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시간' 이란 것은 우리보고 잘 되라고 준 시간이 아니고, 주님의 주님다움을 나타내는, 그 적절한 타이밍을 위한 시간이란 겁니다. 자기가 죽는 타이밍을 인해서 주님의 주님다움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러한 은사가 너무나도 독특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버지에게 감사하노라" 라고 했다는 말이죠. 여기서 '감사' 라는 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골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그래서 성도는 모든 움직임을 통해서 감사거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주님은 그러한 감사를 받을 만한 권한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즉 감사하지를 못하고 짜증을 제대로 부리고 있는데, "내 인생은 왜 이러한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여기서 교재 6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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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름치마가 펄럭이면서 원래 주인공을 찾아가듯이, 사건들은 집결되어서 모든 만물이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이미 깔아놓은 합당되고 배당된 자리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주여, 나를 왜 이 지경으로 몰아넣습니까?" 라고 불평을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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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은 말하는데, "이렇게 힘들게 할 것 같으면 저를 왜 만드셨습니까? 차라리 사산이 되게 하지요" 라고 말입니다. 욥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최초로 존재에서 사건으로 넘어서려는 몸부림입니다. 하지만 존재는 존재를 유지한 상태로 사건으로 넘어갈 수 없는데, 부자인 채로 바늘구멍을 통과해서 천국에 들어설 수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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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주님의 능력 안으로 스스로 갈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을 싫어하는 아우라, 그러한 힘에 둘러 쌓여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주를 위해서 헌신을 하고 선교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악마의 일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기다려봐라. 네가 너를 보기에도 정말로 짜증이 나게 만들어줄게. 네가 두 번 다시는 네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못하게 만들어줄게. 네 자신을 망치는 것도 네가 하지말고, 죄를 짓는 것도 네가 하지말고, 너는 기다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 기다려 !!

이 '기다려' 라는 것은 개 훈련소에서 주로 하는 말인데, 개 대통령인 강형욱이 "기다려!" 라고 하면서 훈련을 시킨다는 말이죠. 천국은 그냥 가는 게 아닌데, 주님이 천국에 갈 사람으로 사육을 시킨다는 겁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라고 하는 믿음의 모습이 될 때까지 말이죠.

우리는 주님의 충실한 개인데, 그러고 보니 강의제목이 '헐' 보다도 이 '개'가 더 낫지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개에 대한 판권이 이미 오용익 목사님에게 넘어가 있다는 겁니다(ㅋㅋ). 그래서 여기에 하나를 붙여서 '충실한 개' 라고 하자는 말이죠.

*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

왜냐하면 천국은 노는 곳에 아닌데, 천국은 천국다워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제가 한 것은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아니라 온 몸으로 그것이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스펀지를 물에 넣었다가 다시 짜면 물이 쫙 나오듯이, 그렇게 우리를 짜면 말씀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그 어디를 건드리더라도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는 것이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이란 말이죠. 그게 이미 시작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성령 안에서 그게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 그리고 우리의 몸이 멀쩡할 때는 그렇게 될 것도 같다는 말이죠. 그런데 몸이 아프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 따로 몸이 따로, 그렇게 따로 따로 놀기 때문에, 그런 아름다운 감사가 나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 혀에 힘주지 마세요 !!

특히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가면, 그래서 의사가 치료를 하면 기구가 들어오고 하는데, 그러면 보통은 긴장을 해서 혀에 힘을 주면서 혀로 그것을 막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의사가 복음을 전하는데, "혀에 힘주지 마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인간을 유기체라고 하는 것은, 면역체계가 가동되고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본능적으로 무엇이 들어오면 방어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의사가 강제로 혀를 눌리게 되는데, 혀로 막는 것을 눌리면 그만큼 빈 공간이 생기고, 그러면 그만큼 치료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복음적이냐는 말이죠. "나는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다" 라고 하고 있었는데, 주님은 강제로 사태를 일으켜서 "이 바보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몰랐지만 악마가 너를 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자리에 내가 관여를 하겠다. 그것은 네가 잘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원상복구를 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비록 네가 거지가 된다고 해도 주님의 프로젝트에서는 제외될 수 없음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서 강제로 혀를 눌려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것으로 중무장이 된 방어체제가 그만 허물어지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의 잘남과 정당함과 고상함, 그것이 바로 악마가 쳐놓은 망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살아계심을 고백하게 되고 말이죠.

* 성령을 받은 자 !!

강의 처음에 한 것이 너무 중요해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성령은 스스로 자기 의나 생명을 생산하는 분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모두 다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분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성령을 받은 사람도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는 이렇게 잘났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주님이 다 하셨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린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한데,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 때, 어느 누가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게 성령을 제대로 받은 자의 모습인데, 도저히 부인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요 21: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어 !!

여기 교재 69페이지에 "사도바울에게 예수님은 죽은 존재가 아닙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은 사도바울도 죽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사도바울 안에는 그리스도가 살아있다 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살아있다고 하면 곤란하고, 즉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살아있다" 라는 것이죠.

그렇게 사도바울은 자기 앞에 '그리스도 안' 이라는 것을 내세우는데,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2자' 관계가 아니라, 중보자를 집어넣은 '3자' 관계라는 말이죠. 즉 "내가 아니라 나의 변호사, 나를 대체시키신 분" 이라는 것인데, 그분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이제 교재 70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히브리서 7장 25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기 이전에 요한계시록 16장 13절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계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 뚜껑을 여니, 개구리가 바글바글 !!

여기에 개구리가 나오는데, 이게 출애굽기 8장에 나오는 그 개구리라는 말이죠. 제가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설교를 했는고 하니,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데, 그런데 '나' 라는 냄비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 개구리가 들어있더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미처 몰랐다는 것이죠.

(출 8:3) 개구리가 하수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에와 네 침실에와 네 침상 위에와 네 신하의 집에와 네 백성에게와 네 화덕에와 네 떡반죽 그릇에 들어갈지며

그러면 그 뚜껑을 누가 열었습니까? 자기가 연 것이 아닌데,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프로젝트는 주님이 시작하시는데, "내가 영광을 돌려야지" 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영광을 돌리는 시발점이 우리의 내부를, 즉 뚜껑을 열어제치는 것인데, 그러자 그 안에서 개구리가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설교시간 때문에 요한계시록과 출애굽기를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여기서 개구리라고 하는 것은 악마의 영이란 말이죠. 출애굽 때 하나님의 공격의 표적이 된 개구리인데, 또한 이, 독종, 피, 우박, 그리고 어둠, 이것들을 애굽 전역이 다 퍼지게 하셨다는 겁니다.

* 신앙은, 이 세상을 폭발시키기는 뇌관 !!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애굽 전역은 주님의 공격대상이라는 말이죠. 애굽은 주님의 원수가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물론 인간들은 모르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이 평온해 보이니 말이죠. 그래서 설교 마지막에 신앙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폭발시키기 위한 뇌관의 등장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 서로 조용하게 살자.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라고 하는데, 물론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말이죠. 우리도 인간인지라 자기 몸 편한 것이 최고라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게 되면 우리가 졸지에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쳐다보면서,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2자' 관계인데, 즉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고", 그러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서로 좋은 게 좋다고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주님이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이 2자 관계에 넣어주자" 라고 하게 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만 우리의 뚜껑을 열어버린다는 겁니다.

* 깨지고, 터지고, 부셔지고 !!

그러니 우리에게 악마가 둘러싸고 있어서, 그동안 악마가 우리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제발, 그런 이야기는 좀 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명절에 분위기를 다 버린다는 겁니다. 동창회든 친목회든, 그런 것이 모두 다 깨지고 만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교회 교인들은,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알아서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조용히 있다가, 상대방이 먼저 시비를 걸면 화끈하게 되받아서 한 바탕 난리를 친다는 겁니다. "그 목사님은 참 훌륭해요" 라고 하면, "그 목사는 이단이야" 라고 하면서 시작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내 안에 개구리가 들어있다" 라고, 즉 "악마의 영이 들어있다" 라고 이야기해줄 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감사라고 고마워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악마는 여기에 대해서 가만히 있지를 않는데, 그래서 방어체계가 갑자기 강렬하게 가동이 된다는 겁니다. 즉 "나에게 지적질하지 말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 지적질을 하시는 성령 !!

그런데 성령은 어떻게 나오십니까? 요한복음 16장 8절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라고 하는데,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즉 이 세상을 보는 그 관점에 대해서 지적을 하신다는 겁니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런데 성령을 받은 자는, 즉 믿음이 있는 자는 어떻다는 겁니까? "내가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그만 사라지게 해주소서" 라고 하게 되는데,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나옵니까? 그것은 자기가 굳이 무엇을 보고 판단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을, 물론 자기 인생도 아니지만, 아무튼 그것을 자기가 알아서 꾸려나가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일어난 사태는 자기가 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의 자기 계획이 일관성이 있게, 즉 끊어짐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천국에 가는 사람은 이미 천국생활을 해야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천국생활입니까? 그것은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죠. 그게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이라는 겁니다.

냄비뚜껑을 열면 개구리가 있는데, 그런데 그렇게 개구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지낼 수 있다고 하면, 굳이 그 분위기를 깰 이유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세상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 !!

그런데 히브리서 7장 25절에서,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 세상의 삶에 푹 젖어있다고 하는 것 자체는, 그것은 구원이 되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인데, 이 세상이 좋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 사는 것이 그렇다는 겁니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왜 빠져나가야 하는데?" 라고 하면서, 그것을 의아해한다고 하면, 그 모습은 그 사람이 평생을 통해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태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이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데?" 라고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런 소리가 아무런 부담도 없이 그냥 흘러나온다는 것이죠.

요즘 같이 가을이 되면 산에 단풍도 들고 놀러가고 싶은데, 코로나 바이러스도 뭐고 간에 산이든 어디든 가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최악의 상태라는 말이죠. 낙엽을 밟고 하는 것도 좋긴 좋은데, 그 모든 것이 악마에 둘러 쌓여있고, 그리고 주님께서 그런 악마에게서 빼내주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 빠져있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자기가 마귀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 목사의 설교는 최악의 상태라는 겁니다. 그런데 최악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꾸준히 일을 하셨는데, 그게 교재 70페이지와 71페이지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예고편으로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 십자가 사건, 그리고 남자와 여자 !!

여기 교재 71페이지에 보면 "남자와 여자는 사건이 출현된 지점을 경유하고 와야한다" 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남자와 여자를 알려고 하면,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너는 남자고 나는 여자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남자와 여자는 어떤 사건을 터치하고 다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그렇다면 이 십자가 사건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무엇이냐는 겁니다. 즉 예수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무엇인고 하니, 여자는 없었는데 생긴 존재인데, 즉 여분의 존재라는 말이죠. 그리고 남자는 기존의 있던 것인데, 무엇과 더불어 그렇다는 겁니까? 악마와 같이 있던 존재가 남자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터치하기 이전에 여자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남자의 일부였다는 말이죠. 그러니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을 위해서 있는 존재인데, 그러니 여성은 여성 독자적으로 그 의미를 챙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남성 세계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남성자체가 없는데, 모두가 여성이 되는데 그 여성을 '그리스도의 신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구원받을 존재는 그 누구도 없는데 여분의 존재,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께서 없는 자리를 만드셨다는 말이죠.

* 여자의 후손 !!

여자가 없는 자리에 '여자의 후손' 이라는 자리를 만드시고, 그것을 자기 자리로 여기시고 하늘로부터 그것을 목표로 해서, 그것을 착륙지점으로 삼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말이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없는 자리가 새로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잉태지 못한 자가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이 많아지는 프로젝트가 실현되는 자리이고,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만드셨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는 경우는 성신이라고 하고, 경유하면 성령인데 말이죠.

그 성령을 처음에는 예수님만이 받으셨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자기 택한 백성들은 성령을 다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혼자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동일한 성령을 받은 자는 양자의 자격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짐으로서 아브라함 언약을 예수님이 성취하시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성령께서 증거하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과 남자의 후손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남자의 후손을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뱀의 후손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남자의 후손 = 뱀의 후손" 이라는 말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인간존재로서는 이런 것들이 파악되지 않는데, 그래서 십자가 사건을 경유함으로서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 사건 안에서는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 2주 뒤에 다시 만납시다 !!

그런데 부부상담을 할 때, 십자가를 빼고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남자는 남자다움을 채워주는 상담을 원할 것이고, 그리고 여자는 여자의 고충을 들어주기를, 즉 자기가 그리워하던 여자로서의 삶을 보충해줄 수 있는 상담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상담을 해도 2주 뒤에 다시 만나자는 소리밖에 해줄 수가 없는데, '사랑과 전쟁'에서 그렇다는 말이죠(ㅋㅋ).

우리가 이론적으로 이것을 한 번 생각해보면, 생판 전혀 모르던 남자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기면 그 해결은 간단한데, 모르던 남자와 여자가 만났으니 다시 모르던 상태로 돌아가면 깔끔해진다는 것이죠. 재산과 같은 것은 적당히 나누면 되고 말이죠.

그런데 여자는 여기서 경험한 것이 있는데, 남자를 카페에서 만났을 때는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다 채워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 실망을 했다는 것은, 생면부지의 남자를 남자를 만난 것이 아니고, 그 남자를 만남으로서 자기 속에서 끓어오르던 것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그냥 자기 생각이 아니고 자기와 함께 있던 악마가 심어준 것인데, 즉 "너는 너 자체로 독자적으로 살아라" 라는 것인데, 그것이 악마의 가르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자는 남자를 만나서 무슨 생각을 했다는 겁니까? "나는 여자로서의 만족한 삶을 누리고 싶다" 라고 하는, 그것 때문에 남자가 필요했다는 말이죠.

직장에 다녀도 스트레스만 받고 하는 일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쇼핑이나 하면서 살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그런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해서 결혼을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남자가 그만 바람을 피우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과 전쟁에 나와서 2주간의 시간을 가지다가 결국은 이혼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 찔찔 우는 여자 !!

그러면 이 여자는 남자 때문에 괴로운 겁니까? 그게 아미면 자기 자신 때문에 괴로운 겁니까? 자기의 헛된 꿈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겁니다. 같이 있던 악마가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예수도 필요가 없고, 너의 너의 행복을 위해서 너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라"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는 성형외과 의사의 도움도 좀 받고 해서 자기의 단점을 수정하니, 거기에 남자가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남자는 여자가 예쁘면 모든 것이 다 용납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자는 자기 계획이 차질 없이 모두 다 진행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과정을 주님이 시킨 겁니까? 그것이 아니라, 여자가 자기 절대적 행복을 위해서, 즉 노동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쾌락은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마치 엠프의 이퀄라이저를 조절하듯이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그만 찔찔 운다는 말이죠.

* 그런데 자식이 태어남으로서 !!

그렇다면 이 모든 행복을 하나님께서 좌절시키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만 새끼가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골치가 아파지는데,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것은 '나'가 아닌데, 그런데 '2자' 관계에서 '3자' 관계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을 통해서 여자는 자기 한계에 접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냥 망가지고 마는데, 자식을 키운다고 밥도 자식이 먹다가 남는 것을 다 먹고 하다가 보니 그 날씬했던 몸도 뚱뚱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를 보고 "나, 예뻐?" 라고 하면, "옛날에는 예뻤지만 지금은 아니야. 너는 거울도 보지 않아?" 라고 하면서 기를 팍팍 죽인다는 말이죠.

* 내가 나를 망친다 !!

그러니 남자나 여자가 살아온 모든 것이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는 마귀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자기 발등을 누가 찍습니까? 자기가 도끼를 들고 찍는데, 그래서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내가 나를 망친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자기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바로 마귀의 짓임을, 그것은 엄마의 품에서 엄마를 쳐다보는 모습이 아니라, 그러한 구조가 아니라, "나만 되면 그만이다" 라고 하는, 그러니 그게 여자가 아니고 죄인이라는 겁니다. 지옥에 가도 너무나 합당하는 것이죠.

*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 !!

그런데 그 여자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무엇이 잘못인데? 세상 여자들에게 다 물어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니 같이 지옥에 갈 자들에게 왜 물어보느냐는 말이죠. 이것은 비단 여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남자도 마찬가지인데, 이 세상 모든 가정이 다 저주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애굽나라 전체에 10가지 재앙이 덮쳤는데, 물론 나중에 이스라엘 가정은 빼주지만 말이죠. 애굽전역이 주님의 공격대상이란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일은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신 대로, 즉 "이것마저도 그리스도의 하신 일임을 알게 해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이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만히 있어도 죄가 나오고 설쳐도 죄가 나오고, 이런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저희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게 하시고 배역을 맡기셔서 주님의 증인역할을 하게 하시니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악마가 아무리 구박해도 그것마저도 주님의 일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11,24 오전 11시에 마침.

개는 훌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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