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9 - 터널
20,12,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74페이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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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바를 모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자기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르심에 응해야하는 것이 여자의 운명이요, 자기를 불러준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비정상적인 범죄로 여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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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 지상의 복의 기준으로 정했는데, 이게 선택이라는 겁니다. 보통 자기 구원을 선택이라고 여기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 하나님은 이런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뽑힌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산하라고 이 땅에서 선택된 것이란 말이죠.
* 부여받은 것이 있어 !!
그것을 보통 회사에서는 직원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직원 3명을 둔 이야기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흔히 '달란트 비유' 라고 하는데, 사장님은 멀리 타국에 가고 보이지를 않고, 직원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직원은 자기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사장님에게 부여받은 것이 있는데, 각자가 10달란트, 5달란트, 1달란트, 그렇게 받았다는 것이죠.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그것을 어제 낮 예배시간에 "그저 받았다" 라고 했는데, 사장님에게 그저 받았는데, 그것이 직원에겐 플러스가 된다는 겁니다. 굳이 이것을 재능이라고 하지말고, 그냥 그저 받았다고 하면 되는데, 직원은 사장님의 뜻만 나타내면 된다는 것이죠. 이게 신약의 마태복음 25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구약에도 나오는데, 즉 아브라함이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를 빌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데,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죠. 이런 말을 들으면 신이 나지요? "나를 건드리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 위해서는 아브람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죠. 아브람을 떠나야 아브라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람 시대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아브라함이 없는데, 즉 아브람은 아브라함를 원한다는 말이죠.
* 도망치는 자아 !!
이 아브람이 '나' 인데, 그러니 "내(아브람)가 내(아브라함)가 되기를 원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강의하기 전에 미리 여기에 써놓은 것이 있는데, '도망치는 자아' 라고 말이죠.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자아 이상' 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되고 싶은 이상이라는 말이죠.
이 '자아'와 '자아 이상', 그 사이를 두고 흔히 '비전' 이라고들 하는데,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사람이면 꿈이 있고 목표가 있어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30살이 넘은 자식들이 그냥 놀고 있다고 하면, 밥을 먹을 때마다 부모가 뭐라고 합니까? "너 요즘 뭐하노?"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참다가 참가가 결국은 "도대체 네 나이가 몇 살이고? 이제는 그만 집을 나가라. 그래도 20대라면 이해를 어떻게 좀 해주겠는데, 더 이상은 도저히 안 되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즘은 아들이 아닌 딸에게도 그런 소리를 하는데, "네가 나가서 어떤 남자를 만나든지 모르겠다. 어서 그냥 나가라" 라고 말이죠.
그렇게 쫓아내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미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밉기도 하지만, 인간에게는 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꿈이 실현되었을 때, 그렇게 상상하던 것을 '이상 자아'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상인데, 즉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30살이 되어서 막상 집에서 쫓겨나서 알바자리+
를 전전하면서 살아보면, 그러면 그 이상 자아는 그야말로 박살이 난다는 겁니다. 지금 강의가 어렵게 되어도 어쩔 수가 없는데, 그러면 이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자아 이상' 이라는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현실'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 포르쉐를 탈 것인가? 포르테를 탈 것인가?
그게 '이상 자아'와 '자아 이상' 이라는 것인데, 즉 하나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 이라는 겁니다. 막상 듣고 보니 별로 어렵지 않지요? 자기가 꿈꾸는 것은 승용차 포르쉐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인데, 그런데 현실은 오토바이 포르테를 타고 야식을 배달하고 있다는 말이죠. 지금은 이 오토바이가 단종이 되었는데 말이죠.
야식배달을 하면 한 달에 300정도는 번다고 하는데, 한 콜에 3,000정도 한다는 겁니다. 택배도 그렇고, 그리고 대리운전도 이런 것에 속한다는 말이죠. 물론 대리기사는 수입이 여기에 미치지를 못하는데, 아무튼 이런 것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구 뛰어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현실인데, 불규칙한 식사와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서 몸은 마구 망가지면서도, 화장실에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일을 해도, 한 달에 수입은 200이나 300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자기가 상상하고 생각한 이상 자아가 아니라, 현실이 요구하는 자아 이상이 된다는 겁니다.
* 아브람이 그냥 아브람으로 !!
그러니 이것은 아브람이 그냥 아브람으로 가는 것인데, 여기에 어떤 추가적인 요소도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꿈을 꾸고 해도 아브라함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고 하니, 이것은 중첩이 되어있는데, 아브람 자리에, 물론 그 자리는 아브람이 알고 있는 아브람 자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이상 자아든 자아 이상이든 간에, "내가 알고 있는 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자기가 모르는 '나'가 아브라함이 되고, 이것은 '약속'에 속한다는 겁니다. 이상 자아나 자아 이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 아브람은 약속에 속하지 않는데,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이 하나님이 만든 나를 반대한다" 라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을 내가 반대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 복음을 무시하는 과정 속에서 등장하는 십자가 !!
그렇게 자기 고집이 주님의 약속을, 즉 복음을 개무시하는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십자가라는 약속이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런 것이 어려운데, 그러면 질문을 해보면 된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고 난 뒤에 망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복음을 전파하는 것 자체가 망하는 겁니까?" 라고 말이죠.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고 난 뒤에 왕창 망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아브람을, 즉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브람을 망하지 않게 하려면 아브라함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자아 이상과 이상 자아에 빠지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죠.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이 '나' 라는 것과 '아브라함'을 바꾸어야만 하는데,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인 십자가가 작렬하게 된다는 겁니다.
* 선악과와 농약 !!
오늘 강의가 초반부터 상당히 어려운데, 이왕 어려운 것 계속해서 어렵게 하겠습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는데,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공격했는데, 즉 그들이 따먹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선악과나무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같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런 죽음은 모르고, 자기들은 따먹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이 선악과는 일종의 농약과도 같은데, 이 농약은 그냥 보면 색깔이 예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살용으로 많이 쓰이는데, 특히 제초제가 말이죠. 특히 노인네들은 힘이 없어서 다리 위해서 뛰어내리기가 힘드는데, 그래서 이 농약을 주로 사용한다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는지 몰라도 이 선악과를 그만 따먹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죽음상태에 돌입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약속과 끊어진 상태라는 겁니다. 이것은 '나'가 계속해서 '나'로 진행이 되는 상태라는 말이죠.
이것은 육에서 시작해서 육으로 가는 상태인데, 하늘나라에는 결코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악마는 이것을 알고 있었는데, 즉 "따먹고 나와 같이 지옥에 가자" 라는 것이죠. 그래서 달콤한 말로 유혹을 했고, 아담과 하와가 그만 따먹게 되었다는 말이죠.
* 시간이 흐르는 상태가 곧 죽음상태 !!
여기까지는 쉬운데, 이제부터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죽음상태이니 약속과 멀어졌는데, 약속은 시간이 정지된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상태는 약속과 반대이니까 시간이 흐른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니 시간이 흐르는 강물 속에 있는 상태가 죽음상태라는 겁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아담과 하와의 자아도 시간의 공격을 받는다는 말이죠. '시간의 공격' 이라는 표현자체가 굉장히 어려운데, 자아가 이렇게 시간의 공격을 받게 되면, 이것을 쉽게 이야기를 하면, "과거에 발목이 잡힌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성도는 죄사함을 받는데, 이것은 과거로부터의 단절이라는 말이죠.
과거를 잊지 못하는 것이 곧 죽음상태인데, 그러니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과거라는 꼬리를 잘라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게 죄사함이라는 말이죠. 만약에 5년 전에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그러면 자아는 흐르는 강물 속에 있는데, 그러면 그 사람 머릿속에는 "나는 5년 전에 나쁜 짓을 했다" 라고, 즉 음주운전을 해서 사람을 죽이고는 그 사람을 숲에 숨겼다는 말이죠.
실제로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는데, 그리고 지금부터 20년 전에 어떤 중견 탤런트가 그런 짓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게 덮였다는 겁니다. 과거를 잊어야 하는데, 그런데 자아가 있는 이상 그것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아 속에 시간이 흐르기 때문인데, 이러한 상태가 바로 죽음의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면 죄를 사했다고 하는 것은 과거를 잘라버리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됩니까?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르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떠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를 떠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사함이라는 약속이 발현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나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라고 할 때는, 그것을 자랑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과거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과거에 잘못한 것만이 아니고 잘한 것도 다 잘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 다시, 도망치는 자아 !!
이것을 '도망치는 자아' 라는 것을 가지고 설명을 해보겠는데 말이죠. '나'는 '나'를 겨냥하는데, 그런데 도망치는 자아는 무엇인고 하니, 이상 자아나 자아 이상은 자꾸만 도망을 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의 꿈은 포르쉐를 타는 것인데, 그런데 현실은 타기는 타지만 포르쉐가 아닌 포르테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사람을 평생 오토바이를 탄다고 여기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열심해서 돈을 벌어서 언젠가는 포르쉐를 탈 것이라고 여기겠습니까? 당연히 포르쉐라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자기가 현실에 있어도 인간은 무엇을 상정하는고 하니, 이상 자아인데, 즉 이상적인 '나'를 계속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 속에 살면서 꿈을 꾸는 것이란 말이죠.
이게 제대로 세상을 표현한 것인데, 물론 이것을 주장한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아무튼 현실 속에서 꿈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를 자기를 쫓아가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쫓아가다가 보면, 즉 포르쉐를 몰게 되었다는 말이죠.
* 오브제 아(objet a) !!
그러면 "이제는 죽어도 좋아!" 라고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자아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또 다시 '나' 라는 게 있다는 말이죠. 자기의 영원한 모델이 되는, 그것을 '대상적 자아' 라고 하는데, 그게 '오브제 아(objet a)' 라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쫓아가도 닿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이게 자기를 유인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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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캉에 의하면, '말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모든 의식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영역을 거칠 수밖에는 없고,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사유하게 됐던 것은, 결국 라캉이 말하는 'objet a(오브제 아)'이다. 인간의 의식은 언제나 '실재계'를 향하고 있지만, 인간 의식이 전적으로 언어라는 구조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한 사유가 향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실재가 아닌 objet a, 곧 허상이자 일종의 환상일 수밖에 없다. - 경북대신문, 남경아(인문대 철학과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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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에 괴물이 산다 !!
그러니 이게 악마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인데, 아무리 다가가려고 해도 다가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끊임없이 자기를 유혹한다는 겁니다. 즉 "네가 이렇게 되어야지. 그것이 너의 전부가 아니잖아"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미혹을 한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이것을 두고 "내 안에 괴물이 산다" 라고 했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 괴물의 이름이 '나' 인데, 즉 "지금의 나를 끌어당기는 괴물적인 나다" 라는 것이죠. 즉 아브람에서 계속해서 아브람으로 간다는 말이죠. 즉 계속해서 괴물적인 '나'가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것을 광주강의에서 했는데, 기수 김정수가 부른 '당신' 이라는 노래를 종이에 적어서 거기에 구멍을 뚫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말이죠(ㅋㅋ). 이렇게 대상이 되는 '나', 즉 '오브제 아' 라는 것인데, 이것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만약에 이것이 종이라고 하면 여기에 구멍을 뚫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속도가 어떻게 됩니까? "내가 추적하는 오브제 아, 나의 대상이 되는 나, 내가 되고 싶은 나, 나를 미혹하는 나, 나를 시간의 흐름 속에 있게 하는 나", 그 '나'보다도 속도를 더 빠르게 해서 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속도가 빠르게 되면, 즉 구멍을 내서 통과하게 된다는 말이죠.
* 시커먼 '오브제 아' !!
그러면 이 '오브제 아'의 어디가 보입니까? 앞면이 아니라 뒷면이 보이는데, 즉 '오브제 아'의 구멍을 지나가고 난 다음에 그것을 고개를 돌려서 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시커멓게' 된 것이 보이는데, 그 일을 누가 합니까?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힘으로 뚫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뚫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그렇게 주눅이 들어서, 일생을 과거에 얽매여서, 즉 "나는 과거에 이런 꿈을 꾸었어. 어릴 때 이런 꿈을 꾸었어" 라고 하면서, 보다 더 나은 미래로 나가려고 몸부림을 쳤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모두가 다 정신병자들이라는 것이죠.
박미선의 남편인 이봉원이 사업에 무려 6번이나 실패하고 마포대교에 갔다고 하는데, 그러면 왜 갔을까요? 다리 위에서 한강을 구경하려고 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지금은 7번째로 짬뽕집을 해서 성공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렇게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한강 다리에 간다고 하는 것은,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이상적인 '나'가 되려고 하다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니, "이러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이 괴물은 웃는데, 그러니 괴물은 우리를 무엇으로 만듭니까? 자기 힘에 지쳐서 주저앉게 만드는데, 그렇게 악마가 우리를 계속해서 유인한다는 말이죠.
* 복음을 알고 버리는 경우 !!
오늘 강의주제를 미리 말씀해드리겠는데, 그게 '복음을 알고 버리는 경우' 라는 겁니다. 이렇게 뚫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먼저 쉬운 이야기를 하겠는데 말이죠. 프랑스의 두 남자가 880KM를 걷는데, 그러면서 코로나 때문에 버린 마스크를 다 줍는다는 겁니다. 880KM면 신의주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넘는데, 그렇게 먼 길을 길으면서 버린 마스크를 다 줍는다는 말이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복음이란 들어올 때가 복음이 아니고, 오히려 "이제 내가 안다" 라고 하면서 내다버릴 때 비소로 복음의 기능이 살아난다는 겁니다. 자기가 복음을 버리면 복음은 짓밟히는데, 그러면서도 자기는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말이죠.
* 짓밟힌 복음, 그리고 12제자 !!
바로 그렇게 될 때, 즉 '살아있는 나'와 자기 때문에 '짓밟힌 복음', 바로 그 관계가 복음이고 복음의 진수라는 겁니다. 자기가 복음에 매진할 때는 자기가 잘나서 복음을 아는 줄 아는데, 그런데 그 복음과 이별을 하게 되면 "나는 죽지 않았다" 라는 것이 티가 나는데, 즉 "나는 여전히 나의 꿈이 있고, 이상 자아와 자아 이상에 헤매고 있다" 라는 것을 티를 낸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이런 현상이 속아넘어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복음을 알고 좋아한다는 것, 결코 그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리려 복음은 배척을 받을 때, 그럴 때 복음의 참된 진수가 드러난다는 말이죠. 그리고 바로 그 과정을 예수님의 12제자가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복음을 사랑했다는 말이죠. 그러나 그때까지는 복음이 복음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이 스승을 버리고 도망을 칠 때, 비로소 복음이 정체를 드러내는데, 복음은 인간이 만들 수 없고, 자기가 선택해서 가질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 꿈도 현실도, 모든 것이 다 '죄' !!
그러면 이제 이것을 그대로 적용을 시키면, 십자가 복음이 자기를 뚫고 지나가는데, 그러면 자기는 완전히 걸레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지나가서 다시 뒤돌아보면 어떻게 됩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모든 것이 다 죄가 된다는 것이죠. 뚫고 지나가면 말이죠.
그렇게 자아가 뚫리게 되면 그 자아에 대해서 기대를 할까요? 기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시커멓다는 겁니다. 시커먼 것에서 아름다운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죠. 무엇을 해도 다 시커멓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시커먼 것을 어디에 적용을 시키는고 하니까, 자아 이상과 이상 자아에 적용을 시킨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어떤 꿈도 다 시커멓다는 겁니다. 물론 현실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죠. 쉽게 말해서, 포르쉐를 타나 포르테를 타나 다 똑같다는 말이죠. 둘 다 시커멓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냐는 것이죠.
* 요놈 !!
하지만 도망치는 자아를 우리는 잡을 수 없는데, 계속해서 도망을 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도망치는 자아를 누가 잡았는고 하니까, 십자가가 잡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잡는 순간 시간은 정지가 되는데, 이것을 크게 쓰면 "요놈!" 이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딱 잡으니까, 그러면 5년 뒤에 무슨 짓을 할지, 혹은 5년 전에 무슨 짓을 했던지, 그것을 일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우리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죄사함의 대상으로, 즉 죄사함의 시료(試料)로 여겨서 그렇다는 겁니다.
* 죄사함의 시료(試料) !!
우리가 그 어떤 짓을 하던지 간에, 비록 살인강도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잘남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네 자아를, 그것을 내가 나의 피로 구멍을 내서 통과하게 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요놈!" 이라고 하면서 잡아서 죄사함의 위력을, 그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도록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이미 통과한 상태이고,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상태라는 말이죠. 즉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의 상태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를 지식으로 알게 되면, 그것은 잘난 자기를 더욱 더 꾸미는 하나의 요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귀찮게 여기면서, 마치 마스크를 대하듯이 "이제 마스크를 그만 쓰자" 라고 하는데, 즉 "이 십자가가 뭐라고 나의 자아를 가로막는다는 것인가?" 라고 하면서 버린다는 말이죠.
* 버려진 마스크 !!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조금 전에 이야기한 그 두 사람이 마스크를 줍듯이,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거두어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 두 사람이 주운 마스크를 모아 가지고 무엇을 했는고 하니, 프랑스 파리에 가서 전시회를 열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떨어진 이 마스크의 모양새가 여러분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라는 차원인데, 쉽게 말하면 "마스크를 함부로 버리지 맙시다" 라는 것이죠. 그 두 사람이 그런 퍼포먼스를 열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제가 지금 복음을 전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전시된 마스크,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그렇게 가고자 하는 천국이라는 말이죠. 하얀 마스크, 검은 마스크, 빨간 마스크, 그렇게 골고루 있는데 전부가 침이 묻어있고 다 더럽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더러움보다도 더 위력이 있는 것이 죄사함의 권세라는 것이죠.
* 죄사함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를 잊어도 괜찮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여기에는 잘난 과거도 포함이 되는데 말이죠. 그것은 바로 '죄사함'의 권세가 가동 중에 있기 때문이란 겁니다. 그러니 목적은 죄사함에 있는데, 죄사함을 받아서 괜찮게 된 '나'에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사람이 마스크를 쓰는 목적은 마스크를 쓰고 건강하게 되는 '나'에게 있지만, 주님은 그 '나'가 아니라 '마스크' 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전히 '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아에 구멍이 뚫리지 않아서 그러한데, 예수를 믿고 잘된 '나' 라고 하는, 그런 이상 자아가 그만 우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 갈 바를 알지 못하고 !!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날 때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라고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는데, 그러니 이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죠.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만약에 갈 바를 알았다고 하면 그것은 자아 이상이나 이상 자에게 포함이 되는데, 즉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면 신이 나겠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예상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복음을 알았으니, 남은 인생이나 즐기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구멍이 뚫리지 않은 상태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5년에 전에 당신이 말이야?" 라고 하면, "맞았어. 그때 내가 잘못했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과거는 없어지라고 있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가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굳이 그런 것을 생각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제의 복음을 뒤집기 위해서 오늘 복음을 새로 주신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복음+은혜" 라고 하면 여기서 복음이 나와야 하는데, 인간의 육신에게서는 복음이 아니라 괜찮은 '나'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나'를 조지는 복음을 오늘 새롭게 주신다는 말이죠.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죠.
* 핵심부분을 다시 하면 !!
오늘 강의에서 핵심부분을 다시 이야기하면, "영원한 나의 대상으로서의 나가, 미리 십자가와 만남으로 인해서 구멍이 뚫렸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시간 속의 나가, 시간 바깥의 나가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시간 속의 나' 라는 것은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도 포함이 된다는 말이죠. 미래에 자기가 되고 싶은, 그게 이상 자아라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의 '나'든, 현재의 '나'든, 미래의 '나'든, 그 모든 것이 시간 바깥의 '나'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과거의 '나'가 잘리고 그 현장에서,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이 그 '나'를 지배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어제의 하나님이 아니고 내일의 하나님이 아니고 지금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 뒤로 넘어지기 !!
오늘의 강의제목을 이 '지금의 하나님' 이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물론 주님이 그런 방법을 주셨는데, 그게 바로 뒤로 넘어지는 게임을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어릴 때 그런 놀이를 했는데, 뒤에 두꺼운 이불을 깔아놓고 그대로 뒤로 넘어진다는 겁니다. 그런 기억이 없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뒤로 넘어지면서 쾌감을 느낀다는 말이죠. 그러면 "넘어지면 다친다" 라는 이상 자아가 생각이 나는데, 몇 초 이후에는 자기 머리가 그만 박살이 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시간 속의 '나' 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넘어지는데 뒤에서 푹신한 이불이 바쳐준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의존' 이라는 것인데, 의지를 한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성도가 복음과 결합이 되면 나는 잘리고, 그렇게 나를 잘라낸 복음이 푹신한 이불이 된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복음을 만나게 되면, 복음이 푹신한 이불이 되어서, 나를 뚫어서 나의 연장까지 죄사함을 맛보게 하신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뒤로 넘어져도, 물론 그렇게 넘어지면 죽는데, 하지만 죽어도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이죠.
* 복음은, 의존관계 !!
그것이 바로 복음인데, 그렇게 복음에 마음을 놓고 떨어지는 영역까지 자기를 확장시켜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아브람이 아브람에서 멈추지 않고 아브라함까지 나아가는 것인데, 그 아브라함에게는 무엇이 포함되어있는고 하니, 복음의 푹신한 이불이 포함된 것이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의존관계라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자아가 빵구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구라라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기를 믿고, 또한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믿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아 바깥에는 이불이 없는데, 늘 부들부들 떤다는 것이죠. "내가 40일 금식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자기만 믿지, 다른 누구도 믿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을 행여 남들에게 들킬까 싶어서 입만 열면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맨날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 혼자 밀실에 갇혀서 2시간 뒤에 나올 수 있다면, 그러면 2시간 동안 어떤 내용으로 기도를 채울 것이냐는 겁니다. "주여,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계속해서 시계를 본다는 것이죠. 그렇게 '믿습니다' 라는 천번을 하면, 그것도 빨리 계속해서 하면 어떻게 됩니까?
* 인간은, 복음을 방해하는 존재 !!
그러면 무엇이 터지는고 하니, 방언이 터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2시간이란 시간간격을 늘 의식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게 2시간이 아니라 10시간을 하더라도, 그 사람은 죽은 상태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구멍을 뚫은 주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어떤 존재인고 하니, 복음을 방해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살아나는고 하니, 그래서 오히려 죄사함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얼마나 네가 복음을 방해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너를 긍휼히 여겨서, 너의 모든 죄를 일거에 다 용서하기로 했다" 라고 하시는데, 그 방법은 구멍을 뚫어버리는 것이란 말이죠.
* 줄줄이 엮여서 !!
조선말기에 엽전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사각형 구멍이 나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냥 돈을 들고 다니면 불편하기 때문에 거기에 줄을 넣어서 연결해서 들고 다닌다는 말이죠. 그렇게 구멍에 줄을 넣어서 연결하는 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교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는 3명이 있어도 하나이고 4명이 있어도 역시 하나인데, 왜냐하면 그 매이게 하는, 통과하는 줄이 하나이기 때문에 말이죠.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데, 그래서 에베보서 4장에 보면 "몸도 하나고 소망도 하나고 주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고 하나님도 하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거기를 예수님이 통과하신다는 말이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러니 그 사람이 교사이든 회사원이든 농부이든, 그런 것은 의미가 없고, 중요한 것은 첫째로 사람이 과연 구멍이 뚫렸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누가 통과하느냐는 것인데, 예수님이 통과하신다는 말이죠. 달리 표현하면 "내 안에 죄사함이 통과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터널 !!
이렇게 구멍이 났으니 일종의 '터널'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터널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원래는 터널이 아니고 산으로 막혀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뚫어서 차들이 서로 왔다갔다하면, 비로소 터널은 터널 값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 백성 값을 할 때는, 자기가 돈이 많고 또 몸이 건강하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이게 뚫려서 차들이 다닐 때, 즉 죄사함이 통과하게 될 때, 그 사람이 재벌이든 백수이든 간에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 믿음의 조상 !!
그래서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무엇이라고 합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첫 번째가 아브라함이고, 두 번째는 이삭이라는 겁니다. 믿음의 정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즉 구멍이 뚫리고, 거기에 무엇이 통과한다는 것이죠.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삭과 이야기하고, 또 아브라함이 우리와 이야기를 할 때, 그런데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여기 56절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선지자라는 말이죠.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선지자이고, 이후의 선지자는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라는 겁니다. 무엇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까? 자기의 구멍이 난 부분, 거기에 예수님이 통과하시는데, 그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다는 말이죠.
그 예수님이 곧 하나님인데, 그러면 시간과 관련이 있는 이 바깥에, 그것이 재벌이든 농부이든 간에 시간이 노출이 된 이 육신에, 그 시간과 상관이 없는데, 즉 '다 이루심'이 그 안을 통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터널이고, 통과하는 것은 천국까지 이어지는 자동차라는 것이죠. 그래야 터널이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은 이 '터널'로 바꿔야하지 싶은데 말이죠.
* 흔들리는 자아 !!
지금까지 교회를 30년을 다니던 50년을 다니던 간에,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상 자아, 혹은 자아 이상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챙기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쫓기게 된다는 말이죠. 다른 사람이 "기도를 5분도 하지 못하네" 라고 하면 누가 흔들립니까? "그렇지, 5분이 뭐야?" 라고 하면서 자기가 흔들리는데, 그래서 7분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기도는 그렇다고 치고, 교회봉사는 왜 그렇게 하지 않지?" 라고 하면, "그렇지, 봉사를 해야지" 라고 하면서 또 흔들린다는 말이죠. 남들에게 싫은 소리가 듣기 싫다는 것인데, 이게 구멍이 뚫리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교회를 50년을 다녀도 구멍이 뚫리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계속해서 자기 마래에 대해서 누군가가 지적질을 할 때, 그게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숨겨진 과거를 들추기 위해서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벌벌 떨게 되는데, 그것이 시간상태 속에 있는 육이고, 그것이 바로 죽은 상태라는 말이죠.
* 죄사함 프로젝트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시간에서 벗어나서 과거가 잊어졌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 작동한다는 겁니까? 주님이 지금 계속해서 죄사함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비데가 있으면 그 비데에서 계속해서 물이 나와야만 합니까? 그것은 고장난 비데인데, 볼 일을 보고 나서 엉덩이 그림을 눌리면, 그때만 작동이 되어서 물이 나오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매일같이 "죄사함입니다. 죄사함입니다" 라고, 그럴 수는 없다는 말이죠.
아니 가게에서 장사를 하는데, 손님이 "이 콩나물은 얼마입니까?" 라고 하면, "예, 3천원입니다" 라고 하면 되지, "예, 죄사함입니다" 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면서 "예, 죄사함입니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기도원 식당에서도, "예, 4천원입니다" 라고 하지, "예, 죄사함입니다"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ㅋㅋ).
그러니까 우리는 평소에 하던대로 일상생활을 하면 되는데, 그러면 비데의 경우처럼 엉덩이 그림을 누를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누를 때만 구원을 받는 겁니까? 그렇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그렇게 그림을 누르면 비데가 가동되고, 그것이 정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죄사함라는 것은, 계속해서 죄사함을 부른다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이미 죄사함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남은 시간은 죄사함을 부르짖는 시간이 아니라 죄를 짓는 시간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로서 살기가 어렵지 않은데,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서 살면 된다는 겁니다.
*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 !!
그러면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성도가 아니면 자기가 사업에 실패했다고 다리 위에 올라간다는 말이죠. 구멍이 나지 않으니 마지막으로 믿는 것은 누구밖에 없다는 겁니까? "나는 잘 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믿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에게 실망하게 되면, 그 실망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도의 경우에는,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너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위해서 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너를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택함, 그 선택을 위해서 성도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업에 실패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성도에게는 자기가 쓰는 것이 답답하고 불편하다고 버린 그 마스크, 그 복음이 새롭게 다가온다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의 십자가로서, 즉 어제의 십자가가 아닌 오늘의 십자가로서 다가온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쉬운데, 즉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때 불신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앞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보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게 불신자라는 말이죠.
그러면 신자는 무엇인고 하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구멍이 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결국은 믿을 것은 나밖에 없구나" 라고 하는 태도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행동여하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여기는 것, 그게 불신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 주체가 자기 자신인데, 믿어도 자기가 믿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전히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미 구멍이 뚫렸다고 하면, 그러면 쓰레기인데, 이것은 재활용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도저히 자기에게서는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다는 말이죠. 필요한 것은 이미 주님이 모두 건져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자라면 결코 자기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 다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
그러니 이런 순간에 신자인지 불신자인지가 드러나게 되는데, 신자의 경우에는 반드시 아브림을 거쳐서 아브라함에 오게 된다는 겁니다. 곧 바로 아브라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갈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묵시세계로 간다는 것이죠. 그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가는 것이란 말이죠. 그게 과거에서 묵시세계, 약속의 세계, 즉 천국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미래에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또한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말이죠. 즉 감사하고 고마워한다는 겁니다.
내일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1년 뒤에 자기가 그 어떤 실수를 저지른다고 해도, 구멍이 뚫린 자는 그것마저도 누가 하셨다는 겁니까? 주께서 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는 뒤로 넘어지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뒤의 세계도 주님이 마련하신 연장된 세계라는 겁니다.
* 늘 복음을 받아들이고, 늘 복음을 버리고 !!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마련한 그 세계가 이제는 나의 세계가 되었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나의 세계' 라는 것은 자기가 마련한 세계가 아니라,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주님이 마련해주신 세계라는 말이죠. 그 세계가 이제는 자기의 세계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면, "우리는 늘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버린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안다" 라고 나오니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매일같이 새로운 복음을 주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또 버리고, 주님은 또 다시 주시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미 자기에게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데, 김호중이 부른 노래에 '고맙소' 라는 것이 있는데, 원래 이게 조항조가 부른 노래인데, 아무튼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주님께 그렇게 반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이죠.
그것도 좋지만 김범수의 '끝사랑' 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그대 오직 그대만이 내 첫사랑 내 끝사랑, 지금부터 그대 나를 잊고 살아도, 그대만이 영원한 내 사랑", 그렇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가사가 참 가슴에 와닿는다는 말이죠. 저만 그런가요? (ㅋㅋ)
화투를 칠 때는 "초반 끗발이 개 끗발이다" 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데 여기서는 첫 사랑이 끝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중간에 이 사랑을 얼마나 배신하고 또 배신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십자가 복음을 아는데, 뭐?" 라고 하면서 말이죠.
* 후배들이여, 용기를 내지 말라 !!
대기업인 KT에 다니다가 사표를 낸 사람이 있는데, 임원까지 지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매일 회사를 다니는 것이 너무 지루했다는 말이죠. 그래도 그만 두고 바깥에 나가면, 물론 지금 정도의 수입은 되지 않아도, 그래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뒤에 후배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세상에서는 가장 착한 사람이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 절대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즉 "사표를 내는 용기를 내지 말라" 라는 겁니다. 자기가 KT에서는 연봉이 1억은 되었는데, 그런데 다른 곳에 이력서를 내니 연봉 2천도 받기가 힘들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회사 바깥에, 즉 이 세상에 나와보니 갈 바를 알지 못하겠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을 거부하는데, 이렇게 인간은 결코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갈 바를 알지 못하게, 즉 망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망해야 아브라함이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브람이 망하게, 즉 아브람에게 복음을 주셨다는 겁니다.
* 예수의 흔적 !!
다시 말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이리와. - 착하게 살겠습니다. - 이리와" 라고, 그렇게 구멍을 뚫어버리는데, 그 구멍이 바로 십자가의 흔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에게는 주님이 뚫어버린 구멍이 있다는 것이죠.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자기는 이러한 흔적이 있기 때문에, 같은 육이라도 육이 아니라 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구멍이 나게 되면, 그렇게 자기를 미혹하고 힘들게 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희망을 가지게 하는 '오브제 아', 끊임없이 자기를 약올리는 괴물과도 같은 '나', 그것을 아예 차단을 시켜버린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거기엔 주님의 피도 들어있고 자기 피도 들어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주님과 같이 죽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하는데, 주님의 피 속에 자기의 더러운 피도 같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그 피를 기억한다면, "내가 주님 덕분이 살았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누가 산다는 겁니까? 자기 안에 죄사함이 산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
시편 127편을 보면, 이것을 부흥사들이 예배당 건축을 할 때 많이들 사용하는데 말이죠. 여기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써먹습니까? "당신들 집을 꾸미는 것에만 돈을 처바르지 말고, 성전을 짓는데 내놔라" 라는 겁니다.
(시 127:1)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그런데 이 말씀이 과연 그런 뜻입니까? 같은 성경말씀인데 전혀 늬앙스가 다르다는 말이죠. 부흥사들의 그런 멘트는, 자기 집에는 자기만 살고있고, 교회에는 하나님이 살고 계신다는 것인데, 물론 둘 다 엉터리라는 겁니다. 자기 집이라고 해서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닌데, 주님의 집이라는 것이죠. 주님 앞으로 등기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주님이 살게 해주시니 말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라는 이 본문에서, 그 집을 자기 집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살아보려고 이 땅에서 몸부림을 치는 것, 즉 온갖 장사도 다 해보고, 그리고 목사라면 개척교회도 해보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그러한 모든 것들이 다 자기가 꿈꾸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결코 허락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잘 되면 안 되는데, 즉 죄사함이 드러나려면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맡은 것은 죄인의 역할이라는 말이죠.
* 복음이 나오지 않으면 이야기도 하지 말라 !!
아브라함이 무슨 재벌이었습니까? 물론 재산이 적은 것이 아니었지만,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에게 구멍을 뚫은 주님이 보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했다는 것이죠. 그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데, 그런 믿음이라고 하면, 그런 믿음을 가진 자들은 마치 같은 엽전을 줄에 꿰듯이, 그런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이고 자매라는 것인데, 그래서 어느 설교시간에 "복음이 나오지 않으면 이야기도 하지 말라" 라고 했는데 말이죠. 물론 사회생활을 하려면 우리가 상대방과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하지만 진지한 대화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는 구멍이 뚫리지 않은 자기 자신을, 즉 자기의 고집밖에는 달리 나올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냄새가 나는 더러운 쓰레기를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물론 쓰레기가 아닌 것처럼 위장을 하겠지만 말이죠.
* 네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었지롱 !!
아까 이야기한 영원한 자기의 대상적 자아, 그게 바로 '오브제 아'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자꾸만 나를 쫓아가는데, 그렇게 쫓아가는 나 뒤에 영원한 나가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들이 그것을 '나' 라고 하면 그만 그 '나'를 변신을 시키는데, 즉 "네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었지롱!"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기가 남들에게 놀아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자존심이 있어서 그것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변신을 해서 남들에게 포착이 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남들이 지적하는 '나'에게서 그게 아니었다고 하는 '나'로 가는데, 그런 과정을 점선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렇게 '은폐'를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 자존감, 곤조, 그리고 뒷배 !!
그 절대적 '나'를 계속해서 숨기는데, 보호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인지 자기도 모르는데, 그런데 보호를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존감' 인데, 일본말로는 '곤조' 라고 하는데, 아마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지 싶은데 말이죠. 그 사람의 성격이나 고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곤조는 보호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것마저 무너지면 한강다리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는데, 이게 세상 사람들이 가는 마지막 코스라는 겁니다. 그게 끝사랑인데, 자기 뒤에는 푹신한 이불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뒤로 넘어지면 안 되는데, 이 세상은 무너져도 자기는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뒤에 이불이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성령을 받지 않은 존재, 십자가를 모르는 존재인데, 그래서 그것을 위장하기 위해서 술집에 가서 허세를 부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허세를 부린다고 하는 것은, 오늘 강의제목을 또 바꾸고 싶은데, 터널도 좋지만 '뒷배'로 말이죠. 그런 뒷배가 없는데, 그러니 자기가 최후의 방어선인데, 그래서 그 다음에는 한강다리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자연인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도는 어떻습니까? 든든한 뒷배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예 우리 속 안으로 들어왔는데, 즉 우리 속에는 죄사함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냥 뒤로 넘어져도 괜찮은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강도, 세리, 창기라는 것이죠.
그러니 주님은 예수를 잘 믿는 잘난 '나'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뒷배를 주님은 자랑하고 싶다는 겁니다. 우리가 못났기 때문에 주님의 그 뒷배가 더욱 더 영광스럽다는 말이죠. 하지만 불신자들은 믿음의 후손들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 최종적으로 자랑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또한 즐거워했다는 말이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되는 과정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수많은 역경을 겪게 되는데, 하나님이 선택했다고 해서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교회 꾸러미 !!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겠는데, 우리가 줄로 엮어진 엽전 꾸러미를 기억해야 하는데, 이 엮어진 엽전 꾸러미를 두 글자로 무엇이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교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또 다시 이상 자아와 자아 이상을 가지고 교회를 이해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자기가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버리는데, 그러면 예배당을 짓고, 또 목사를 데리고 와서 월급을 주고, 그리고 장로를 두 명 뽑고, 집사는 열 명을 뽑고, 그리고 돌아가면서 점심봉사를 하고, 그리고 더 커지면 교육관을 짓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에 전단지에 보면 광진교회라고 있는데, 본당이 5,000석 규모라고 하는데, 트럼펫도 가르쳐주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 광고를 합니까? 완전히 사업체인데 말이죠. "이런 멋진 교회에 다면, 그러면 거기에 다니는 나는 얼마나 빛날까?" 라는 것인데, 그렇게 유혹을 한다는 겁니다.
* 클라우딩 컴퓨터 !!
아까 자아는 자아가 유인한다고 했는데, "할 수 있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것이 바로 잘못된 교회해석인데, 그런데 구멍이 난 엽전 꾸러미가 되면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고체가 아니라 기체 덩어리로 보고 싶은데, 마치 자기 하늘의 구름과도 같다는 말이죠.
요즘 컴퓨터에서 '클라우딩' 이라는 것이 있는데, '클라우드'가 구름이라는 의미인데, 구름처럼 올려놓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름이 보이듯 어디를 가도 끌어당겨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죠. 거기에 모든 정보가 다 묶여있는데, 굳이 컴퓨터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항상 그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구름에는 각 개인의 형체가 나타납니까? 나타나지 않는데, 뭉쳐있다는 겁니다. 교회가 바로 이런 집단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빼놓고 이 세상은 무엇입니까? 세상도 개인이 아니고 집단인데, 이게 '집단의식' 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이념이고 이데올로기라는 겁니다.
* 이스라엘, 집단과 집단의 싸움 !!
그러면 우리의 싸움은 무엇입니까? 그게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나오는데,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개인이 아닌 집단과의 싸움인데, 그것을 '공중권세 잡은 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니 그것은 '나'의 싸움이 아니고 '우리'의 싸움인데, 그 우리 안에는 누가 들어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있는데, 그 예수님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되어서 싸우는 전쟁을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이스라엘' 이라는 것은 각 개인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쪽 덩어리와 저쪽 덩어리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구름 덩어리가 그렇게 서로 부딪치면서 싸우는데, 그러니 이 세상은 이미 사랑을 받을 자와 미움을 받을 자로, 그렇게 결정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
우리가 젊은 시절에 연애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의 하나가 무엇이었는고 하니, 그것은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가지고는 나뭇잎을 따는 것인데, 다들 그런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씩 뗄 때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지 않겠지만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사랑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남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것을 버리고 다른 나뭇가지를 가지고 다시 하면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해서 기어이 '사랑한다' 라는 것을 남기고 마는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미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는 것을 말이 아닌 사물을 가지고 표현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 집단은 계속해서 "망한다, 망하지 않는다" 라는 것으로 나가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증거를 찾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갖 변명들을 다 늘어놓는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철학이고 과학이고, 이 세상의 학문이라는 말이죠. 공중 권세를 잡은 악마가 인간들에게 집어 넣어준 것인데, 그게 결국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존엄하다. 이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구라다" 라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가르친다는 겁니다.
* 교회는, 끝사랑 !!
그런데 교회라는 집단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하기 이전까지는, 만약에 "무엇을 한다, 하지 않는다" 라고 하게 되면, 시간이란 요소를 남겨두는 것인데, 그런데 교회는 끝사랑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는 "이미 다 이루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사랑을 받을 자와 미움을 받을 자가, 이미 그 기준이 다 정해졌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가 궁금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고, 우리에게 구멍을 뚫은, 즉 뒷배를 마련한 십자가에게 이미 결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구멍이 뚫렸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고 하는데, '나' 자신은 거기에 결코 포함될 수 없다는 겁니다.
시편 127편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라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 '세우는 자'에 예수님이 들어가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세우는 집은 과연 헛될까요? 헛되지 않을까요? 헛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이 성사가 되면 헛되지 않음이 증명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뒤로 넘어져도 이불이 있다는 겁니다.
*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
예를 들어서, 쇠뭉치가 그냥 떨어지면 박살이 그게 그만 나는데, 그런데 그것이 스펀지 위에 떨어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그 스펀지에는 예수님의 피가 묻어있는데, 그리고 그 예수님의 피 속에 자기가 죽어서 남기는 피도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도 죽고 예수님도 죽었는데, 그 피 위에 쇠뭉치가 떨어진다는 말이죠. 그 쇠뭉치가 자식 문제일 수도 있고 남편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그게 아프겠느냐는 것인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게 과연 아프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자기는 죽었고 주님과 함께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 인간이 육으로는 감당치 못할 아픔을 주님께서 스펀지에 던지신다는 겁니다. "네 자존심이 아직 살아있는지 보자? 체면이 살아있는지 보자? 정말 구멍이 뚫렸는지 보자?"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물론 그러면 우리는 아픈데, 어제의 육신을 오늘까지 끌고 가면 아픈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잠시 우리를 육의 자아로, 즉 구멍을 매워서 어설픈 자아로 만들어놓고는, 이미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즉 "넘어지려면 차라리 넘어져라" 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뒷배가 있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그런 모임의 덩어리 채로, 이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자와 싸우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이 세상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그만 오해를 했는데, 나를 살리는 십자가로 여겼습니다. 나를 죽이는 십자가임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죽임으로서, 그동안 악마에게 미혹이 되어서 짊어지고 있던 그 무거운 짐이 일거에 죄사함으로 다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시고, 그 사랑을 증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12,11 오후 4시에 마침.
개는 훌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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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상담, 그 심연의 세계 - 라캉 정신분석학의 상담 목표 ]
경북대신문, 뉴스관리자 기자 knun@knu.ac.kr등록 2013.03.18
1. 주체는 말을 통해서 구성된다.
자크 라캉(1901~1981)의 정신분석학은 인간 주체가 가진 모든 정신적 근심, 고통, 불안들을 ‘언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가 명명하듯 “말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가 ‘상징계’라고 명명하는 ‘언어’의 구조 속에 불가피하게 위치하게 된다. 나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특정 태명으로 불리었고,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그 이름이 나를 대표하여 나를 의미하고 있다.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 대한 명칭들(예를 들어 누구의 딸/아들, 손녀/손자, 조카, 선생님/제자, 아버지/어머니, 삼촌/이모/고모 등)에서도 나는 나의 존재가 언어, 즉 기표로 규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라캉은 인간이 이처럼 기표로 규정됨으로 인해 그의 실재에서는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인간은 그가 특정 기표로 불리는 순간, 그의 실재와 그 기표는 분리된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기표로 말해진 것’은 기표이지, 해당 기표가 지칭하려고 했던 실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남경아’라는 기표는 분명 나를 대표하고 지칭하는 기표임에는 틀림없지만, ‘남경아’라는 기표 자체가 나의 실재는 아니다.)
2. 자아는 거울상의 나르시시즘을 통해서 구성된다.
한편, 인간은 또한 자기애(나르시시즘)의 구조 속에 위치한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자아’에 대한 사유는 본능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규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와 같이 자기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지만, 처음부터 자신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자아에 대한 개념은 정신작용의 부가를 통해 점진적으로 구성되어진 것이다. 프로이트나 라캉의 이론에 따르자면, 그것은 자아 밖의 세계, 곧 타자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라캉은 그의 ‘거울 단계 이론’에서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과정, 곧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의 구조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생후 6개월의 시기에 접어든 인간 유아는 생리학적으로는 여전히 미성숙하지만, 그에 비해 시력은 조숙하게 정교화 돼 있다. 유아는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껏 부분적으로만 확인했던 자신의 신체를 하나의 전체적인 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낯설지만 완전한 듯 보이는 전체적인 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자신의 모습이라고 동일시하는 상상을 통해서 유아가 지금껏 느껴왔던 무기력함이 보상되고, 불완전하게 인식되던 자아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오는 불안이 극복된다. 이와 같이 인간이 가진 자기애의 본능은 인간으로 하여금 유사자와 자신을 동일화하는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유아가 거울을 바라보는 바로 이 장면에서, 거울 속에 비쳐진 상으로서의 유아와 거울을 바라보는 자로서의 유아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명칭으로서의 특정 기표가 우리의 실재 자체가 아니었던 것처럼, 거울 속에 비친 상으로서의 유아는 거울을 바라보는 유아 자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대표하는 기표가 우리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거울 속에 보이는 우리의 상을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인간 주체가 기표나 이미지와 같은 ‘타자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들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사유작용들은 언제나 분열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그 분열을 동일화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상상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의 사유가 거치게 되는 상상화와 관련된 영역을 라캉은 ‘상상계’라고 명명한다.
3. 자아도 주체도 진정한 ‘나’는 아니다.
라캉에 의하면 ‘말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모든 의식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영역을 거칠 수밖에 없고,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인간이 사유하게 됐던 것은 결국 라캉이 말하는 ‘objet a(오브제 아)’이다. 인간의 의식은 언제나 ‘실재계’를 향하고 있지만, 인간 의식이 전적으로 언어라는 구조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한 사유가 향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실재가 아닌 objet a, 곧 허상이자 일종의 환상일 수밖에 없다. 우리를 지칭하는 기표 자체가 실제적인 우리가 아님에도 우리는 우리를 그 기표와 동일시한다.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가 실제적인 우리가 아님에도 우리는 그 상을 바라보는 우리와 거울 속의 이미지를 동일화하는 상상으로 그 둘 간의 분열을 외면한다. 우리는 동일시되지 않고 분열될 때의 불안, 곧 실재계를 경험할 수 없는 무력함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서, 기표, 이미지와 같은 상징계와 우리를 동일화하는 상상계에 의존하는 구조 속에 위치한다. 라캉은 인간의 모든 병리적 정신현상들이 인간이 타자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는 그와 같은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스스로가 가진 자기애적 본능이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에 대한 사유를 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사유는 타자적인 것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주체의 구조는 이미 소외를 예고하는 분열의 구조이다.
그렇다면 ‘언어’라는 타자와 의식 사이에 발생하는 분열로 인해 인간이 겪는 정신적 불안과 고통을 라캉은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을까? 표면상으로는 아이러니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라캉의 정신분석치료는 상담에 의존한다. ‘언어’가 가진 불완전성은 불충분성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언제나 다의적이다. ‘언어’는 화자에 의해 그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에 의해 그 뜻이 해석되는 구조이다. 언어가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언어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의식 과정이 겪는 분열의 과정이 어느 한 지점에 고착되어 있을 때 그것을 벗어날 길을 제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실재를 언어와 상상적으로 동일화시킬 때에만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그가 양자 사이의 분열을 겪고 있다면, 그것의 극복 방안은 양자를 다시 동일화시키는 방법뿐이다. 다시 말해서, ‘남경아’라는 기표가 실제의 내가 아님에 집착하지 않고, 거울 속 이미지가 실제의 내가 아니라는 불안에 고착하지 않고, 그 기표와 이미지를 기꺼이 나로써 상상하는 방법뿐이다.
4. 정신분석학의 방법과 목표: 무의식의 주체 표상과 환상의 변증법
라캉의 정신분석 상담은 어느 한 지점에 고착된 사유를 변증법적 욕망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상담은 물론 상징계의 논리인 ‘말’에 의존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담과는 달리 정신분석의 상담은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정신분석의 분석가는 ‘분석주체’의 ‘의도된 말’에는 흥미를 갖지 않는다. 분석가는 ‘분석주체’가 사전에 준비한, ‘의도한 말’이 아닌 전혀 다른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럼으로써 분석가는 ‘분석주체’가 의도하지 않은 차원을 분석주체 스스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석가의 말들은 의도성과 무의식성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분석가가 선생님의 자리에 서서 훈계적인 말을 제공하면, 상담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차라리 반대로 내담자가 분석가를 자신의 상담 손님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더 이상 분석가에서 들을 말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분석가를 비판하고 그를 부정할 때, 상담은 종지부에 온 것이다.
부정과 거부는 주체가 홀로서기에 성공한 징표이다. 이처럼 정신분석의 상담은 철저히 주체 스스로가 의식적인 주체로 다시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상징계에 의해 주체가 다시 출현할 수 있도록, 주체의 회복을 분석가가 돕는 과정이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주체는 물론 ‘의식적인 주체’다. 그것은 상징계의 논리에 따라 의식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근대적 주체’가 말하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로부터 확실성을 구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징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objet a라는 특별한 매개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주체다. 즉 스스로 언어라는 타자가 되어 그의 존재를 이런 기표로 혹은 저런 기표로 상상하며 끊임없이 자아를 형성해 나갈 때, 그는 약간의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주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말(기표)이 의미(실재)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말(기표)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나의 기표가 그를 고착시키려고 하면 그는 그것이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기표임을 직시하고 다른 기표로 그 스스로 이동할 때, 그는 분열과 동시에 약간의 자유를 가진다.
자기애적 구조 안에 위치하며 자아를 지속적으로 구성해 가야 하는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사유를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사유를 포기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의미’를 포기할 수는 있다. 우리에게 완전성은 실현불가능한 일종의 환상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언제나 실재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고 완전성을 빗나가는 일종의 환상만을 우리에게 제공할지라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주체는 실재와 환상이라는 분리 사이에서 분열의 극으로 치닫지 않고, 끊임없이 상상적 사유의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욕동’의 주체로 거듭난 주체이다. 그는 비록 언어라는 구조 속에서 실재를 완전히 경험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사유를 계속할 수 있는 주체이다. 정신분석을 통해서 새로이 탄생한 주체, 즉 환상을 통과한 주체는 여전히 상징계의 구조 속에 속박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다의성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주체이다.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으면, 그는 이미 자기의 환상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환상의 사로잡힐 뿐이다.
-남경아(인문대 철학과 대학원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