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5 - 내 안에 십자가
20,10,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이 죽었어요 !!
오늘은 교재 55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고소를 했는데,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맞아죽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굉장히 간단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는 어떻습니까? 감히 인간이 신을 때려죽이지 않는데, 그것이 차이점이라는 말이죠. 신은 받들어 모시지, 때려죽이지는 않다는 겁니다. 대구에도 교회가 참으로 많은데, 인간으로서 신을 받들어 모신다고 하는 것, 그것은 타고났다는 말이죠.
그런데 모든 인간에 있어서 신이 라이벌인데, 자기보다도 더 위대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을 가볍게 보면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래서 모든 인간은 신을 섬긴다는 것이죠. 자기에게 손해가 되지 않으려고 말이죠.
* 인간의 지혜와 판단력으로 !!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방금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이 죽었다고 했는데, 그것을 두 종류로 나누게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먼저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였고, 또 하나는 로마인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죠. 즉 합쳐서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나름대로 지혜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있었는데, 생각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 생각을 지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나름대로 지혜가 있고 그 지혜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겁니다. 누가 그렇다는 겁니까?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합쳐서 인간들이 그렇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인간들 속에 우리 자신이 있다는 겁니다.
유대인과 로마인이 합쳐서 인간이고, 그 인간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있고, 그 우리는 지혜가 있고 판단력이 있는데, 즉 결정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판단력으로 인간들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죽인 것인데,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 초라한 신은 상상도 할 수 없어 !!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인데, 그들 유대인의 생각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일리가 있는 판단인데, 하나님은 적어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거룩해야 하는데, 보이더라도 천사보다 더욱 눈부시게 있어야 그게 하나님답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인간들끼리 모였는데, 헤쳐보니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그것은 인간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여기 대구에 교회가 많은데, 하나같이 전부가 다 위대한 신을 섬긴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지혜로 인한 판단과 결정에 의하면 신은 위대해야 한다는 것인데, 초라한 신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말이죠.
* 가짜 신을 섬기는 교회 !!
그러니 초라한 예수님으로 인해서 인간들의 신은 다 가짜가 되고 마는데, 그러니 결국 교회는 무엇이라는 겁니까? 가짜 신을 상상하고, 그 가짜 신을 높이기 위해서 만든 단체, 그것이 교회라는 말이죠. 그렇게 가짜를 섬기기 때문에, 진짜를 이야기하면,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자기 지혜와 판단과 결정에 의하면 해당사항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단히 싫어하고 미워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는, 그게 순간적으로 실수를 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야말로 싫어하고 미워해서 죽였다는 것인데, 그러한 점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유대인과 로마인, 즉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는 겁니다. 인간은 신을 위대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데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인데, 그런데 그 예수님은 너무나 초라하다는 말이죠.
그 초라한 분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치욕스럽다', 혹은 '수치스럽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초라하게 본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너무나도 잘 아시고,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초라하고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운 자리에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은 위대하다" 라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보기에 "초라하고 치욕스럽고 수치스럽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에게는 기피대상인데, 누가 말이죠? 하나님이 그러한데, 그런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해서 환장해서, 신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게 인간의 지혜이고 판단이고 결정인데 말이죠.
* 위대한 예수, 초라한 예수 !!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기피대상으로 오셨다는 것인데, 초라하게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하늘에 계신 위대한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이 땅에 오신 초라한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그것을 결정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을 때,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수치스럽게 보았기 때문에, 그런 예수님을 선택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모두가 위대한 신을 믿으려고 하지, 사람이 된 그야말로 초라한 하나님은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예수는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게 두 종류가 되는데, 하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그 위대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라고 해서 믿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초라한 분이다" 라고 해서 믿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의 본성에 의하면, 예수님을 위대하게 볼까요? 초라하게 볼까요? 위대하게 보는데, 그러니 가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을 믿어도 가짜, 예수를 믿어도 가짜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를 위대하고 대단한 분으로 보기 때문인데, 사람이 흠모할 만 분으로, 존경하는 분으로, 착한 일은 다 하실 것 같은 분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런 예수를 믿으니 당연히 가짜라는 것이죠.
그래서 한국교회는 모두 가짜 예수를 소개하고 있는데, 물론 외국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말이죠. 즉 "당신은 못났지만 예수님은 대단합니다. 그분이 당신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예수를 소개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에 여전히 초라한 예수님만을 소개하시는데, 예수님이 초라하다는 것이 아니라, 초라한 예수님을 소개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인간들의 지혜와 판단과 결정으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하신다는 말이죠.
인간들의 지혜와 판단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지적을 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들의 지혜와 판단에 문제가 있는 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위대해. 나는 그런 예수님을 믿을래"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천국에 가는데 아무런 소용도 없는데, 그야말로 무용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보기 때문인데, 그러니 예수님은 여전히 기피대상이라는 겁니다.
* 성령을 받은 사람이 없다면, 교회도 없어야 !!
예를 들어서, 어떤 도시에 예수님의 영이 임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러면 그 도시에 교회가 있어야 합니까? 없어야 합니까? 200만명이 사는 도시인데,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도시에는 당연히 교회가 없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교회도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워지는데, 그것은 가짜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예수는 위대한 분이고, 그래서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 라고 선전하는 가짜 교회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진짜 교회는 없는데, 성령을 받은 자가 없기 때문에 말이죠. 만약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엉터리고 짝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없다고 해서 우리가 답답해할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큰 도시에 교회가 없다고 해서 말이죠. 왜냐하면 구원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없도록 하셨기에 교회가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죠.
* 아주 평범한 이야기 !!
그래서 오늘 강의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는데, 시골에 살던 어떤 청년이 대도시로 돈을 벌러 갔다는 겁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빈둥빈둥 놀다가 부모의 눈치가 보여서 얼마간의 생활비를 챙겨서 서울로 올라왔다는 말이죠. 아무 평범한 이야기인데,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묻겠는데, 그렇게 도시로 돈을 벌려고 갔다고 하면, 다음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느냐는 겁니다.
첫째, 이 청년은 사람은 만납니까? 말씀을 만납니까? 사람을 만나는데,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라는 말이죠.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인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아까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온다고 했습니까? 사람의 모습으로 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위대하게 계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왔다는 말이죠.
인간은 위대한 신을 상상해서 믿지만,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인데, 너무나도 놀랍지 않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면 되는데, 이 땅은 인간에게 맡기고 말이죠. 그런데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느냐는 겁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처음 문제의 해답은 사람을 만나지 말씀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두 번째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까요? 아니면 사기를 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까요? 물론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하지만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사기를 친다는 말이죠.
* 사람 대 사람의 만남 !!
이 청년은 자기 쪽에서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노자돈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는 줄 것이 없는데,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상대방을 만났다고 하면, 그렇다면 이게 형편상 거래가 되겠느냐는 말이죠. 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균형이 맞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자기는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방금 시골에서 올라와서 공장에 취직을 하려는 청년에게 도와주겠다고 하면, 그것은 99퍼센트가 사기꾼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내놓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잘해준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인 사기꾼은 아니고, 먹을 것도 없으니 그런 놈들이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 청년이 서울에 와서 택배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그래서 사장이 "일을 해라. 돈을 주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청년이 "얼마나 일을 하면 됩니까?" 라고 하니, "요즘은 노동법이 엄격해서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루에 8시간을 일해라. 그러면 시간당 8,500원을 줄게"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내가 나에게 속는 세상 !!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8시간이 아니라, 12시간도 하고 14시간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청년은 택배회사 사장에게 속은 겁니까? 속지 않은 겁니까? 물론 그 사장에게 속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 제가 묻는 것은 과연 누가 누구를 속였느냐는 겁니다.
이게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넘어갔다는 말이죠. 이것은 사장이나 다른 어떤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닌데, 자기가 자기를 속였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은 자기가 서울에 가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이 일종의 희망인데, 그렇다면 희망과 청년이 서로 같다고 하는 등식이 성립하겠느냐는 겁니다. 즉 "희망=청년", 그렇게 되겠느냐는 것이죠.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라는 것이 어떤 곳입니까? 그렇게 만만한 곳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이 세상은 자기의 희망대로 되는 곳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을 고집한다고 하는 것, 그렇게 자기가 노력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너무나 좋게 평가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청년이 "내가 택배회사에 취직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마을 사랍들에게 자랑을 해야하겠다" 라고 하는, 그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까? 아니면 더 높여야 합니까? 낮추어야 하는데, 밥이라도 먹게 된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택배회사 사장이 처음에는 "저놈이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 거야"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택배회사의 일이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공장에 취직을 하더라도, 조금만 힘들면 그만 두고, 또 다른 곳에서 월급을 더 준다고 하면 당장에 옮긴다는 말이죠.
*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굶어죽었어요 !!
그런데 이 청년은 마음을 낮추어서 불평을 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한다는 겁니다.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서울에서 굶어죽었어요" 라고 하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말이죠. 그러면 "요즘 보기 드문 놈이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더 대우도 잘해주고 더 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장의 입장에서는 그런 겸손한 청년을 찾기가 힘들기에 말이죠.
그러니 사람 대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 어떤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는고 하니까, 마음을 낮춘 사람을 원하는데, 이 사회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처음에는 돈을 많이 벌어서 자랑질을 하려고 했다가, 그런데 막상 서울에 가보니 어떻다는 겁니까?
자기를 잘났다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오히려 자기를 이용하려는 그야말로 이리와 같은 인간들만 득실거린다는 말이죠. 그럴 때는 자기 마음가짐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고 하니까, 그야말로 마음을 낮추고 낮추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그러면 천국에 들어가는 인간상은?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이렇게 길게 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인간사회에서도 사람을 만날 때는 이렇게 마음을 낮추든지 해야, 겨우 밥이라도 빌어먹고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인간상은 과연 어떠해야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야말로 촐랑거리고 까불거리면서, "나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라고 하는 인간을 과연 천국에 넣어주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마음을 낮춘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러한 모델이 되는 분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 강의를 다시 하면 !!
강의를 다시 하겠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의 그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위대했습니까? 초라했습니까? 그야말로 초라했는데, 그래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는 말이죠. 치욕스럽고 부끄러운데, 그래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상상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자기가 잘 나가니까, 자기가 잘 나가는 것보다 더 잘 나가는 하나님, 그러한 대단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우리는 오해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은 없는데, 진짜 하나님은 인간의 무리에 섞여 들어왔는데, 인간보다 더 못한 인간이었다는 말이죠.
교회에 다녀서 덕을 보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지옥행인데, 정작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면서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디에서 들은 풍월은 있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복을 주신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사기라는 말이죠.
* 분에 넘치는 혜택 !!
그러니 지금 교회에 다니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고 하니, 우리는 그야말로 분에 넘치는 혜택을 입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밥을 먹고 살아가는 것도 과분한 은혜라는 말이죠.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지 싶은데, 솔로몬이 입은 그 영광보다 들에 핀 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귀하다는 겁니다.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은 그야말로 금수저 출신인데,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말이죠. 실제로 금으로 된 수저와 밥그릇과 용기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솔로몬의 그 부귀영화를 따라갈 자가 없는데, 하지만 그런 솔로몬의 영광이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탐욕의 대상이 되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나도 저 솔로몬처럼 되어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들에 핀 꽃보다도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분에 넘치는 혜택을 입고 있는데, 그러니 "내가 고생해서 이만큼 이루었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고생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데, 주님의 과분한 은혜로 이렇게 밥이라도 먹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건강한 것도 자기가 몸 관리를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의 혜택이라는 겁니다. 마치 들에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말이죠.
* 인간인가? 말씀인가?
이런 것이 어디에 나옵니까? 그것이 성경말씀에 나오는데, 그러면 제가 다시 묻겠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간을 주었습니까? 말씀을 주었습니까? 인간이 아닌 말씀을 주셨다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는 간에 모든 인간은 전부 다 잘난 척을 한다는 것이죠.
잘난 척을 한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혜택을 입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인데, 즉 "나는 내가 잘 나서 이렇게 되었다" 라고 하면서, 자기 자랑질이나 할 줄을 알지, "이렇게 밥을 먹고 사는 것도 저에게는 너무나 과분합니다" 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정말로 힘들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남의 것을 더 빼앗지 못해서 환장을 하고, 지금보다도 더 성공하지 못해서 환장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입니까? 말씀입니까?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말씀에 관심이 없느냐는 말이죠.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고 잘나서, 즉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성공하지 못해서 미쳐버린 존재, 그게 인간 !!
그러니 말씀이 자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 수준을 자기가 너무 높여버렸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그 방향이 낮은 쪽인데, 하지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높아지지 못해서 환장을 한다는 겁니다. 남들보다 더 성공하지 못해서 미쳐버린 존재, 그게 곧 인간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말씀을 대하고 복음을 대하면서, 남 탓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문제가 남들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엄청난 문제가 자기에게 도사리고 있는데, 그런데 자기가 자기에게 너무 점수를 후하게 주어버린다는 말이죠.
* 다른 하나님은 없어 !!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그런데 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이는 식으로 자신을 나타내니까, 그게 피조물인 사람에게도 배척을 받는 치욕스러운 모습이란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유일한 하나님인데, 다른 하나님은 없다는 말이죠.
다른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이고 모두가 다 가짜라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이고, 날조된 신이라는 말이죠. 진짜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그분인데, 오직 그분만이 유일한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님은 없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이죠.
* 말씀이 육신이 되어 !!
그분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말씀' 이라고 하는데,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3절에서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라고 하는데, 즉 모든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을 골로새서 1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이 모든 만물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를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주님이 친히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그러니 이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목사님,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게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나오는데,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는 말이죠.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하는데, 우리가 듣기에는 쉬워 보인다는 겁니다. 그 정도는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본성상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게 전혀 맞지를 않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그게 바로 죄의 본성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저주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즉 "너만 신이라고? 그러면 다른 것은 아니라는 말인가?" 라는 식으로, 그렇게 예수님을 저주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을 주라고 한다면, 그때는 무슨 절차를 겪게 되는고 하니까, 예수님을 저주하는 자기의 본성을 거쳐서, 그 다음에 "예수님은 진정 나의 주님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기존 교회에 다니다가 오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ㅋㅋ).
* 예수님은 슈퍼스타 !!
기존 교회에서 예수님은 슈퍼스타인데, 왕중왕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데, 우리의 모든 요구사항을 다 들어준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키워주려고 애를 쓰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기존 교회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쉬운데, 왜냐하면 자기를 잘 되게 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자기를 괜찮은 존재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는데, 그런 자기를 더욱 더 위대하고 성공하도록 해준다고 하니, 그런 예수님이라면 얼마든지 자기가 주라고 인정해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즉 "예수님을 저주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에 부합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보다도 자기가 더욱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신보다도 자기가 더 잘났다는 겁니다.
그런 잘난 자기를 후원해서 더욱 더 잘나게 해준다고 하면, 그러면 그게 예수든 부처든 누구든 간에 섬기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얼마든지 모시겠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인데, 자기가 전부이고 최고라는 말이죠.
서울에 올라온 시골청년의 경우에도, 택배회사에 취직해서 열심히 일을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회사를 위해서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나은 자기를 위해서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이 뭐라고 해도 참고 또 참는데,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나중에 성공하면 너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고 하는, 그런 야심과 같이 것이 있다는 겁니다.
* 먼저 곡소리가 나야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절치가 있다고 했는데, 그 앞에 겪어야 하는 과정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마태복음 26장 24절에 나오는데,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마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가롯유다에게 하신 말씀인데, 이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인데, 즉 "나는 네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다" 라는 겁니다. "내가 왜 인간으로 태어났던고?" 라고 하는, 그런 곡소리가 나게 해주겠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려고 하면, 그런 절차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잘남 맛에 살아가고 날마다 더 향상되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죽으라고 공부를 한다는 겁니다. 왜 저축을 합니까? 그것은 자기 미래를 위해서 잠시 지금의 자기를 억누르는 것이라는 말이죠. 자기의 욕망과 욕심을 감내하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은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지만, 내일이 되면 그것을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 나에게 주어질 것이다" 라고 하는 희망, 그런 미래의 자기 자신을 고대하면서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본성을 후원해줍니까? 그게 아니라 오히려 좌절을 시키는데, 즉 "네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차리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내가 이런 고생을 하려고 태어났나?" 라고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바로 이런 절차를 겪어야, 그 다음에 "예수님은 나의 주님입니다" 라는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산다는 것이 보람 된 것이 아니라, 후회하는 일이 되게 해버린다는 말이죠. 희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절망으로 바꾸어준다는 겁니다. 치욕스럽게, 비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죠.
이것을 알았다고 하면, 그러면 "내가 치욕스럽다, 비참하다, 한심스럽다, 지저분하다" 라고 하는 것을 당했을 경우에, 다음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여기에 해당하는지 맞추어보라는 겁니다. "나는 사는 것이 후회된다. 이런 것 같으면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차라리 자살하자" 라고 하는 게 어떤 경우냐는 말이죠.
* 다음 중에서 진짜로 망가진 인생은?
제가 친절하게도 두 개의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은 "돈이 바닥났다" 라는 겁니다. 혹은 "건강이 바닥났다"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죠.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면, 자기 아들이 그만 차를 몰래 몰고 나가서 교통사고를 내서 남의 식구를 다 죽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2번은 "내가 하나님을 싫어했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어느 것이 더 절망스럽느냐는 겁니다. 보통은 1번인데, 그러나 진짜 정답은 2번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 마음에 맞는,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선택했을 때,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선 결코 하지 말아야할 짓이란 겁니다. 어디 감히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를 자기의 시다바리로 여기느냐는 말이죠.
* 하나님은 나의 시다바리 !!
그러니 이렇게 고백할 때는, 돈이 많아도 괜찮고, 건강해도 괜찮고, 자식교육을 극성스럽게 잘 시켜도 괜찮다는 겁니다. 물론 남들은 모르는데,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자기가 알게 될 때,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네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줄게"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흔히들 말하는 1번이 아니라, 2번이 바로 진짜로 망가진 인생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남의 탓을 하는 것이 1번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는 돈이 없으니, "이 사기꾼들아 내 돈을 내놔라" 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더 근원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은 뭐하시노? 나를 도와주지 않고" 라는 것인데, 그러니 2번이라는 말이죠. 이게 진짜로 악하다는 겁니다. 바로 이 2번에 해당되는 자들이 누구인고 하니,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그리고 로마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라는 말이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이 1번이 아니라 2번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인데, 인기도 있고 명성도 있고,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또한 자기들을 따르는 추종자들도 많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들은 어디에 마음을 모았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는데 마음을 합쳤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얼마나 마귀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는 말이죠. "교회에 나오시면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고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라고 하는데, 절은 원래가 그런 곳이지만, 그런데 오늘날 교회도 이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감추는 것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자기가 잘나서 받았다고 여기는 그 모독적인 언사와 발언, 바로 그게 자기의 본성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 비참하고 치욕스럽게 여길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금 당장 죽어서 지옥에 가도 전혀 할 말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 사람이 아닌, 말씀을 만나야 !!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이것은 허풍이고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누구를 만나야 하는고 하니까,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치인다" 라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이 살면서 누구에게 치였습니까? 사람에게 치이는데, 자식에게 치이고 말이죠.
그렇게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치이는데, 그렇게 사람에게 치였다고 여기면 모두가 남의 탓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욕하고 하는데, 모두들 그렇게 남 탓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말씀을 만나게 되면 누구를 탓합니까? 자기가 너무나 교만하고 건방짐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 무엇을 해도 경쟁 !!
우리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비교게임을 하게 되는데, 즉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라는 식으로 항상 경쟁과 비교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참으로 피곤한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바로 이 경쟁 때문이라는 말이죠.
무엇을 해도 경쟁인데, 스트레스를 풀려고 낚시를 해도 옆 사람과 경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게임이 되고, 그래서 거기에서 승자가 되고 싶다는 말이죠. 그게 운전을 해도,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경쟁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사람 대 사람의 경우인데, 그렇게 사람에게 치인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이 아닌 말씀을 대하게 되면, 즉 말씀이 오게 되면 사람에게 치이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대하게 되면, 자기가 가장 나쁜 놈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을 팔아먹은 그 가롯유다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보다 좋으신 분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주위에 있는 분들은 모두 고마운 분들인데, 그러니 시골청년의 경우에, 하루에 8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을 일해도, 그 택배회사의 사장님에게 어떤 생각을 하는고 하니, "우리 사장님은 참 고마우신 분이다" 라고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가장 나쁜 놈이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가장 악한 놈이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에게 혜택을 주는 고마운 분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가장 나쁜 자리가 누구의 자리라는 겁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리, 즉 십자가의 자리라는 겁니다.
* 말씀만 오면 !!
그래서 말씀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고 하니, 십자가의 자리로 데라고 간다는 말이죠.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인데, 거기에는 자기 재산을 교회에 바치고 철야기도를 하고, 그런 것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저 낮은 곳에 가는 것에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하는 게 아니고, 오직 말씀만 오면 된다는 겁니다.
말씀이 곧 육신이 되었으니,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제일로 낮은 곳에 가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낮아지신 예수님이 우리 몸 속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제일 낮은 곳으로 친절하게 이끌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돈을 버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합니까?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합니까? 자식을 교육시키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합니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껍데기는 그 어떤 것이든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인데,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자기 한 달 수입이 10억이 넘고 아파트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 착한 일과 복수심 !!
남들에게 착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오히려 사람이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그 뒤에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죠. 즉 "내가 이런 착한 일을 했는데,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지?" 라고, 그게 착한 일을 하면 할수록 도사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자기의 힘으로서 축적이 된다는 것이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왜 착한 일을 하려고 합니까?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그것을 불교에서는 덕을 많이 세운다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에게 힘이 더 많이 생긴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고받는 장삿속인데, 즉 자기가 착한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것을 보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종의 거래고 흥정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했다고 하는 그것이 남에게 칼질을 하는 하나의 무기가 된다는 겁니다. "착한 일도 하지 않은 것이 어디서 까불어? 복도 받지 못한 것이, 까불지 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마음이 낮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교만해지고 만다는 것이죠.
예수님 당시에 가장 착한 일을 많이 한 자들이 누구인고 하니, 그들이 곧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고 서기관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주동적 역할을 한 자들, 그들이 그 시대에 있어서 착한 일을 가장 많이 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의 주특기 중의 하나가 구제라는 말이죠.
그러니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겁니까?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힘을 모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이 납득이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 본성이 그러하니 말이죠. 자기 잘 되게 위해서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잘 된다고 하면 얼마든지 착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자회를 열어서 구제사업을 하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 자식이 잘 될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말씀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남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하는 음흉한 속셈이라는 겁니다. 남에게 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죠.
* 인간의 본성, '지고는 살 수 없다' !!
그러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정리하고 넘어가겠는데, 인간의 본성은 "남에게 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만약에 졌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 처벌을 바로 자기에게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두 글자로 '자살'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어제 뭐라고 설교를 했습니까?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자기에게 미안해서 하는 것인데, 자기가 자기를 지켜주지 못해서, 자기에게 미안하다는 겁니다. 저 인간을 이겨야 하는데, 그런데 실력이 없어서 이기지를 못하니, 누구에게 미안하다는 겁니까? 자기에게 미안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살을 하게 되는데, 자기가 못났다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본성은 지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인데, 즉 이기는 재미로 산다는 말이죠. 그게 안 되면 자기에게 벌을 내린다는 겁니다. 말씀이 없으니, 다른 것으로 버티는데, 그게 자존심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개뿔도 없으면 폼을 잡는데, 또한 몸이 아파도 자존심은 멀쩡하다는 겁니다. 이 인간의 자존심은 아프지도 않다는 것이죠.
그리고 고개를 숙이는 법도 없는데, 그러니 이게 전부 대인관계라는 겁니다. 눈으로 본 것이 있다는 말이죠. 사람 대 사람의 관계, 이것말고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씀도 귀찮다는 것이죠. 다만 저 사람만 이기면 되는데, 그런 재미와 자부심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 악마가 예수를 이기기 위해서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의 본성은 지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악마가 신을 이기기 위해서 신의 지혜인 선악과를 빼돌렸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악마는 천상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최고지위의 천사였는데, 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이기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인간을 찾아와서는, 인간을 그만 자기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만든 인간을 자기편으로 빼돌리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리고는 그 인간을 앞장세우는데, 악마의 품성을 인간에게 집어서 말이죠. 즉 악마가 자기의 바이러스를 우리 인간 속에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본성은 모든 것이 한결같이 신에게 대드는 것인데, 즉 "나는 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심지어 그 대상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바로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것과 같은데,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 그게 곧 인간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이사야서에 나오는데, 즉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높은 자가 누가 있으랴?"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사장이나 회장이 되어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단 직원이라도 그 마음 속에는 자기보다 더 높은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생일 축하합니다 ♬" 라고 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품성이 그대로 자식에게 들어왔다는 것이죠.
바로 여기서 들어온 것이 '가짜 예수' 라는 것인데, 자기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예수, 그게 가짜 예수라는 겁니다. 그것이 교재 55페이지에 나오는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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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죽이고 그 흔적을 제거하는 것이 사도바울 당시의 로마의 성격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그 예수님을 가짜 예수로 대응하는 식으로 십자가와 무관한 예수로서 로마제국의 단일성에 기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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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 예수 !!
예수님 당시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죽였는데, 그런데 그 로마시대가 끝나고, 물론 그 성격은 지금도 동일하지만 말이죠. 지금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를 믿는 자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교회에 가짜 예수를 집어넣어 놓았다는 겁니다. 자기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을 집어넣었는데, 그래야 손님들이 온다는 것이죠.
그게 아니라 "당신이 후회하도록 만들어주겠습니다" 라고 하는 교회에 누가 오겠습니까? 그런 교회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데, 하지만 위대한 자로, 성공한 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면 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서 제일 낮은 곳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낮은 곳은, 인생을 조지고 집안을 말아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자기 자신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발견하는 곳, 그게 낮은 곳이란 말이죠.
물론 예수를 믿고 얼마든지 거지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기에는 멀쩡한데, 그런데 마음가짐이 어떠한고 하니까, "나는 나밖에 모르는구나. 나는 죄인 중의 괴수구나" 라고 하는, 즉 자기의 근원적인 죄를 발견하는 곳, 그게 낮은 곳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영이 임해야 가능하고, 그럴 때 예수님은 주가 되신다는 말이죠. 그럴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의 소원대로 다 해주는 예수님을 두고, "예수님은 나의 주님입니다" 라고 아무리 해봐야, 그것은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죠.
* 다시 요약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해보면, 평범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즉 평범한 우리 이야기, 세상사는 이야기, 달리 말하면 사람 대 사람으로 구성된 세상,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늘 보았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 속에 말씀이 끼어 들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은, 사람만 보이는 세상에 말씀이 와서 그 사람 속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전혀 어렵지 않은데, 그렇지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던 말씀이, 즉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말이죠. 버림받은 증거가 곧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의 마음에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물론 겉으로는 멀쩡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아하, 하나님을 버린 자가 바로 나였구나. 이런 인간이라면 이 땅에 살 자격이 전혀 없어. 내가 봐도 참으로 비참하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살면 살아갈 수록 더욱 더 끼게 되는데, 바로 그런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인간에게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보기는 드리겠는데, "(1)나, (2)예수님" 이라고 하면, 이 중에서 몇 번입니까? 그것은 2번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입니다" 라고 할 때, 그게 바로 성령을 받은 자의 모습이고, 그 특징이라는 말이죠.
* 사탄에게 내어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
이제 교재 5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디모데전서 1장 20절을 언급하는데, 그것이 무슨 내용인고 하니, 거기에 보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사탄에게 내어준 명단이 공개되는데, 성경에서 흔치 않은 경우인데, 그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말이죠.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은 예수님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말씀에서 예수님의 활동이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은데, 그러면 예수님의 그 활동과 그 결정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주님이니 말이죠. 이것은 예수님의 결정이라는 겁니다.
먼저 시작은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은 천국에 보내고, 또 어떤 사람은 지옥에 보낸다는 말이죠. 둘 중의 하나인데, 제3의 지역은 없다는 겁니다. 양이 아니면 염소, 혹은 좋은 물고기가 아니면 나쁜 물고기라는 것이죠. 그 결정을 누가 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그 결정을 하는 방법은 아까 말씀을 드렸는데, 즉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천국에 가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 예수님이 아닌 나로 출발하면 !!
그런데 이번에는 시작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기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끌어당긴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결정을 말이죠. 그럴 경우에 자기가 천국에 간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바로 그 이야기를 이 디모데전서 1장 20절을 통해서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는 천국에 간다는 보장이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을 자기로부터 했다는 말이죠. 천국은 예수님의 세계인데, 그러니 그 어르신으로 시작해야하는 일을 자기가 하게 되니, 즉 예수님의 결정을 아무리 도용해도 천국에 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후매네오이고 알렉산더라는 겁니다. 가짜를 색출해내는 것인데, 즉 "너는 아니야. 너는 시작이 천국에 갈 욕심부터 했어" 라고 하시면서 밀친다는 말이죠. 그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는데, 말씀이 들어온 게 아니라 아직 코앞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저 말씀을 지키면 장래에 천국에 갈 것이다" 라고 여기는데, 그렇게 자기로부터 시작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보면, 지금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후매네오와 또한 알렉산더의 경우를, 이들이 도중에 퇴출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들이대보자는 말이죠. 이게 성경에 나오는데, 그런데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면 곤란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나'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그러면 자기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다 동원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창세 전에 예정이 되었다. 나는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 나는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 라고, 그렇게 '나는' 이라고 시작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진짜로 천국에 도달할 수 있느냐고 했을 때, 그것은 틀렸다는 겁니다.
이게 첫 번째의 경우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이렇게 여기에 있는데, 자기 안에 말씀이 들어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들어오는 즉시 빼도박도 못하고 천국에 가야만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자기가 자기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어떻게 지휘를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나는 예정이 되었기에 구원을 받는다 !!
그러면 누가 주인입니까? 말씀이 주인인데, 즉 예수님이 주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을 받은 것인데, 그러면 그 주인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것이죠. 말씀을 말씀이 되도록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나는 예정이 되었기에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예정이 되도록 작용을 하셨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 가도록 주님이 나를 사용하신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려고 하면, "내가 원해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작용하는 이상 계속해서 그것은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논리에 맞도록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맞는 논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생을 살면서 체험하려고 하면, 이것이 그야말로 엄청나게 난감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주께서 일하심으로서 내 위주로 구원받는 것이 중간에 탈락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구원을 받는 정상적인 방식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한 대목인데, 여기에서 예를 들면 더 힘들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이죠(ㅋㅋ).
예를 들어서, "대구성경공부에 참석을 해야하는데, 귀찮아서 참석을 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면, 여기서 보기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1번,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참석을 해야하는가?", "2번, 꼭 참석해야 천국에 가는가?", "3번, 나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라는 겁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항상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면 여기서 그것은 몇 번에 해당이 됩니까? 3번인데, 3번은 자기가 성경공부에 참석을 하든 말든 주님이 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주님이 일하고 계시는데, 그런데 그것을 자기 변명으로 덮친다는 겁니다. "바빠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혹은 "몸이 아파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 배설물 !!
그런데 그것을 누가 물었습니까? 심지어 "나는 예수님이 싫습니다" 라고 해도 상관이 없는데, 그런 생각마저도 자기를 낮추시는 주님의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주님이 싫어.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 생각조차도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주님의 활동이고 그 결과물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그것을 '배설물'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배설물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먼저 자기에게서 빠져온다는 것인데, 온갖 더러운 것들이 말이죠. 여기서 말하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고 하는 것은 예수님 위주가 아닌 자기 위주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나의 정당성, 나의 의로움, 나의 변명거리, 그런 것들이 매일같이 나에게서 빠져나온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남들에게 욕들을 짓은 하지 않았어" 라고, 그렇게 그야말로 자기 위주로 살았던 모습들을 성령께서 바깥으로 배출케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공부에 참석하고 말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어떤 경우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사람이 집에 있든지 교회에 나오든지 간에, 그런 것에 상관없이 자기에서 더러운 것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변명과 같은 것들이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배설물이 나온다고 하면, 주님이 사람과 함께 해서 그 사람을 활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 지옥에 가는 것도 주님의 결정 !!
그러면 다시 디모데전서 1장 20절로 돌아와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하는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되지요? "아하, 주께서 가짜라고 하면서 내보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게 겁이 납니까? 나지 않습니까? "나는 20년을 믿었는데, 잘리면 끝이네" 라고 하면서, 그게 겁이 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기 행동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닌데, 주님의 결정으로만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 강의의 하이라이트인데, 지옥에 가는 것도 주님의 결정이 있어야 간다는 말이죠.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자기가 미안해하거나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 고맙소 !!
이제 교재 58페이지를 보면, 이것만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에 마태복음 10장 36절 말씀이 나오는데, 즉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쁩니까? 감사가 나옵니까? 감사가 되는데, 왜냐하면 집안식구들 중에서 가장 지저분하고 못된 인간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집안식구를 탓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데 누가 누구를 탓하고 말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냥 "고맙소!" 라고, 그 한마디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집안식구를 고맙게 여겨야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더럽고 치욕스러운 존재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동안 집안식구를 붙여주셨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집안식구가 원수이니 서로 헤어지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보시기에 "너도 원수지만 나도 원수다" 라고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화목한 집안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마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낮추는 것이란 말이죠.
* 그것은 믿음도 아니야 !!
그 다음에 여기에 교재에 보면 야고보서 2장 17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죽은 믿음'이 나오는데, 사실 이것 자체도 상당히 어려운 표현인데 말이죠. 쉽게 말해서 "믿음도 아니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말도 붙이지 말라" 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라는 것이죠.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은 "주님이 나를 데리고 일을 하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이죠. 우리 몸에 말씀이 들어오면, 즉 예수님이 들어오면 우리의 활동은 누구의 활동이 됩니까? 자기의 활동은 전혀 없는데,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미안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 성도는, 타인에게 미안해할 이유가 없어 !!
그것을 주일 낮 시간에 했는데, 성도의 삶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성도의 삶이란, 타인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남들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일인데, 그러니 무엇이 미안하냐는 것이죠. 자기가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사람이 착한 일을 하는 것도 남들에 대한 복수심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착한 일을 하고 나면, "내가 이런 착한 일을 했는데,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남보다 낫다" 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냥 바닥을 치면 되는데, 그러면 미안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미안한 짓을 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행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주님이 행하시면, 그게 믿음의 관계라는 겁니다. 즉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주님과의 그 관계를 두고 믿음이라고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이 내 안에 집어 넣어준 것으로 인해서, 즉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지저분해지는 것도 주님의 일의 일부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어떠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 그게 핵심이라는 말이죠.
* 이제 결론을 !!
이제 결론을 맺겠는데, 그 어떤 인간이라도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갈 수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주님이 보시기에 이미 비참한 존재인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겁니다. 그때 그 인간은 그야말로 비참한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모습도 드러내게 하시는데, 어디서 말인가요? 십자가에서 드러내셨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초라하고 비참한데, 그게 어느 정도였는고 하니, 모든 인간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모습이었다는 말이죠.
우리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집에 가면 더럽고 비참하다고 들어오지 말라고 아내가 자식이 문을 잠그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문이 잠겨서 들어가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은 아니지요? 그러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 잘난 줄 오해할 소지가 다분한데, 그래도 문을 열어줄 정도는 된다고 말이죠.
말씀이 들어와서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말씀이 아니라, 자기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결국 자기가 지치고 만다는 겁니다. "이제 그만 들을란다. 그동안 많이 들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동안 말씀을 왜 들었습니까? 그것은 자기 잘난 척을 하려고 들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라는 말이죠.
* 말씀으로 후벼파게 되면 !!
그러니 말씀이 와서 우리를 후벼 파내야 한다는 겁니다. 요즘은 호박죽을 많이 먹을 때인데, 그것을 끓일 때 어떻게 합니까? 호박을 다 후벼판다는 말이죠. 말씀이 와서 그렇게 우리의 구석구석을 후벼 파낸다는 겁니다. 자기가 미처 모르는 부분까지 주님의 작용으로 다 파서 드러낸다는 말이죠.
마치 로봇청소기가 온 집안 구석구석을 다 청소를 하듯이, 우리 몸 속에 구석구석 가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겁니다. 말씀이 율법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것으로 다 쑤시는데,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고, 죄가 아닌 것이 없게 만든다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는 자기가 자기에게 실망하게 되는데, "나는 이 정도밖애 되지 않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게 주님 일의 시작인데, 그것이 곧 주님이 만드신 십자가의 자리이고, 그 자리에 있을 때, "주님은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진정한 주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데, 즉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천국에 가도록 자기 운명을 결정지어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이 땅에 괜히 오신 것이 아닌 줄 압니다. 그리고 지금도 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재대로 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10,11 오후 6시에 마침.
여보, 당신에게 미안해하는 죄를 그만 짓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네. 미안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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