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흐름
2020년 11월 22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6-8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1: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1: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성령을 받은 자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의 차이는, 주님이 주신 선물이나 혜택이 나의 모든 가치를 월등하게 넘어선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한평생 본인의 노력으로 자기 인생을 일구어나가려는 자에게 있어 하나님의 주신 선물은 그 모든 나의 모든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따라서 성령받지 않는 자들은 성령받은 자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 반면에 성령받은 자는 성령받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너무 잘 압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최종 목표점으로 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육에서 육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막혀 있습니다.
영화에서 악당에게 쫓기는 주인공이 차를 터널 안으로 들어가니 악당들의 차들이 주인공의 차를 터널 벽쪽으로 밀어붙입니다. 차는 터널 벽을 긁고 지나가면서 불꽃이 튑니다. 이게 바로 인간들의 세상 살이입니다. 서로 살고자 밀고 밀어붙이는 것 가운데 우리네 인생은 육의 벽에 가로막혀서 아프게 됩니다.
달리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그 속에서 자신을 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같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한결 같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느니라”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막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을 ‘고체’라고 비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천국의 강둑에 도달하는 것은 이 고채와 액체나 기체로 변해야 하는 겁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거듭난 자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인간에 대해서 비유로만 말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육신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육신으로 오셨을 때에,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은 비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 예가 요한일서 5:6-8에 나옵니다.“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즉 고체로서 고체를 설명해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과 피라는 액체와 그리고 성령이라는 기체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과 피와 성령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성취와 관련 있습니다. 즉 참깨에서 참기름을 뽑아내듯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성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려고 하십니다.
달리 표현해서 ‘아담 안’이라는 강둑이 있다면 저 건너편에서 ‘마지막 아담’, 혹은 ‘새 아담’이라는 강둑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흐름과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의 자아를 말씀으로 갈아버립니다. 고체를 액체로 만들어버립니다. 에바브로가 끊임없이 활동한 것은 이미 주도권이 성령의 흐름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은 결코 인간의 소유가 되지 못하게 활동하십니다. 그것은 다시 ‘인간’이라는 실체에 주도권이 넘겨주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즉 아담이라는 실체에서 성령의 흐름으로, 성령의 흐름에서 예수님의 몸이라는 실체에 도달되게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자아성을 인정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고정시켜놓고 분석해서는 아니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워놔버리면 실체가 되고 실체가 되면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말씀만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성령께서는 인간이 “내가 누구냐, 나는 구원받았느냐?”에 신경 쓰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 작업을 위해 성령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반복해서 시작과 끝으로 방향이 바뀌는 정보의 흐름을 타게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전기공학에서 직류보다 교류적 작용과 같습니다. 교류는 반복해서 전류의 방향이 집과 발전소 사이를 왔다갔다는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는 자신이 죄인임과 이미 의인되었음을 반복해서 알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느냐가 중요하지 지금 내가 어느 정도인가를 중요하지가 않은 겁니다. 멈추어서 나 자신을 살피려는 순간, 예수님의 주도권은 날아가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실제적 활동성을 빼고 자신을 살피려는 시도밖에 안됩니다. 인간에게 있어 죄란 자신이 흐름에 불과한 것을 모르고 자기를 최종 목표점으로 삼는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령받은 예수님에 대해서 인간들은 분석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자기를 살피는 그 방식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살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를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그 허무성을 알려주십니다. “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1-24)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육적인 기준들은 다 무용하다는 말입니다. 비나 낙엽이나 파도나 바람이나 사막에 내리쬐는 땡볕이 인간의 직분이나 직업이나 나이나 성품을 고려해서 불어오든가요?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공평한 조건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인간은 결코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서 뭘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해 뭘하고 있는 겁니다. 직업이란 실은 ‘머뭇거림’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나중에 힘 빠지만 그만두어야 하고 결코 ‘나의 것’이 되지를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혜택과 선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특혜받은 자만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그만 놔주게 하시고 성령님이 내리시는 말씀의 지시에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골 1장 6-8절(성령의 흐름)2011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6-8절까지입니다.
골로새서 1:6-8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오늘 본문에 에바브라 나오지요. 에바브라,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성령 안에서”라고 해서 성령과 결합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령과 결합된 사람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혜택을 입은 사람이다. 혜택을 입었다는 말은, 다른 말로 선물을 받은 사람이다.
선물을 받고 혜택을 입어버리면 그 사람이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인생이 모든 것이 끊어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남는 게 있어요. 그게 바로 혜택이고 그것이 선물입니다. 따라서 혜택 받고 선물 받은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이미 얻을 것은 다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흔들릴 것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이라 할 때 여러분이 하나만 기억하면 돼요. 종말의 영, 세상이 끝장났다, 라고 주께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고 성령을 줌으로서 세상은 끝장났다, 라고 분명히 보여주는 그게 성령입니다. 노아 때 방주 같은 것이 성령이라고 보면 됩니다. 노아가 방주 뚝딱뚝딱 만들 때 ‘아, 세상 끝났다, 끝났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거 다 소용없이 다 끝났어.’
왜? 방주 안이냐 방주 밖이냐, 는 기준점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인자에 대해서 공격하고 거부하는 것 내가 참아줄게. 하지만 성령에 대해서 네가 모른다고 한다면 이 세대뿐만이 아니고 오는 세대에 영원히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혜택이 어디 있어요? 이런 놀라운 혜택이 어디 있습니까? 돈 주고 샀습니까? 그냥 선물이거든요. 하나님의 선물로 왔다 이 말이지요. 따라서 인간은 두 종류가 있는데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지 못한 사람 달랑 두 종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령 받음과 성령 받지 않음의 차이로 말미암아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을 이해 못하고,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 안 받은 사람을 너무나 이해를 잘해요. 이해를 해도 너무 잘해요.
왜냐? 옛날 자기의 과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도 저랬었었지, 나도 저 생각을 했었었지, 나는 저런 관점에서 세상을 봤었지, 전부다 과거완료이야기, 나도 한때 저게 옳은 줄 알았었었지, 할 수 있는 안목, 이거 노력 아니고, 이거 자기가 학원에서 배운 것이 아니고 선물입니다. 혜택입니다.
학원 다닌다고 다 공무원시험 합격하는 것 아니잖아요. 공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특혜를 받은 거지요. 혜택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오늘 본문의 에바브라에게 “너도 나와 똑같은 인간인데?” 이렇게 하면 에바브로가 이렇게 합니다. “네 눈에 내가 인간으로 보이냐?”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한 점인데요. 성령이 함께 있다는 것은 이미 주도권이 성령에게 넘어갔고, 성령은 우리 인간언어로 하면 기체에요. 바람 같다 했으니까 기체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뭐냐 하면, 근육질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고체가 되는 겁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에바브라에게 “너도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지 뭐.” 하면 “네 눈에 보기에는 내가 고체로 보이냐? 기체로 안보이지? 네 눈에 내가 기체로 안보이지?” 성령 받았다는 것은 내가 있는데 성령이 온 게 아니고 성령에 주도권이 넘어가버린 거예요
성령에 주도권이 넘어간 사람의 그 시발점, 최초의 사람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볼 때 자기하고 똑같은 인간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도권이 성령한테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도권이 성령한테 있기 때문에 내가 누구냐 할 때 안 믿는 사람들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너 누구냐고 물을 때 예수님이 답변은 뭐냐 하면, 비유로 이야기해야 되지요. 실체가 아니고 비유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비유가 되는 거예요. 비유라 하는 것은 실체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고 흐름을 설명하기 위함이고 과정을 설명하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이런 내용이 이미 세례요한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요. “너 누구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세례요한보고 “너 누구냐? 너 선지자냐, 뭐냐?” 물으니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그들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아니오, 로 대응합니다.
나는 선지자 아니오, 나는 제사장 아니오, 나는 랍비 아니오, 나는 소리다. 기체지요, 기체. 파동에너지지지요. “나는 소리다. 나는 소리다. 진정한 실체는 내 뒤에 오신다. 나는 소리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육신, 그분은 내 뒤에 오신다. 너희 육신은 이제 죽었어. 너희는 혜택입지 않으면, 선물 받지 않으면 죽었어.”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왔을 때에 니고데모가 자기의 고체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늘나라는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나라는 고체가 하늘나라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다시 태어나야 됩니까?” 했어요.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나라는 고체가 엄마라는 고체에 속해서 다시 고체로 태어나야 그래야 볼 수 있습니까?”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여기서 액체와 기체가 등장하지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볼 수 없다.” 평소에 이게 하나의 은유처럼, 비유처럼 설명이 된다는 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통했던 모든 언어들이 예수님과 그 이후에 등장하는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이게 해당사항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설명할 때 기존의 단어를 다시 적용시켜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방금 제가 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3장 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고체냐, 그렇다면 기체와 액체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가 없다고 이야기했을 때 이것은 성도한테 그런 변화가 있기 전부터 예수님에게 그런 변화가 먼저 주어진다는 겁니다.
고체인 예수님을 액체로, 기체로 바꿔주신 그 분이 그 다음에 성도,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되게 되면 그 사람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인간이라고 여겼던 그 인간의 부류에는 속하지 않는 특이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특이한 존재로 보십니까? 만약에 우리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나 자신을 성경을 통해서 다시 되비쳐 봐야 돼요. 그렇지 않고 옛날에 성령 받지 않은 그 모습으로 나를 보고 자꾸 질문을 해대버리면 그 ‘나’가 진실을 방해합니다. 내가 위험해요. 내가 주님한테 위험하고 내 구원에 위험한 게 나 자신의 선입감이 가장 위험한 요소로 작용하는 겁니다.
서울에 어떤 성도님이 계신데 그분이 자기담임목사한테 이렇게 질문했어요. 나이가 한 서른쯤 넘은 것 같은데 “목사님, 이것저것 하는데 나 이 세상에서 뭐 하면서, 무슨 직업 가지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답니다. 목사님이 좀 난감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인생을 책임질 수도 없는 입장인데 함부로 말 못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질문을 잘못했다고 했어요. 내가 이 땅에서 뭐하다 죽을까요, 라고 질문을 해야 돼요. 내가 뭐하다가 세상을 떠날까요, 라고 질문을 해야 돼요. 뭐하다 살까요, 라고 질문을 해버리면 이것은 성령받기 전에, 하나님의 혜택과 선물을 받기 전에 그 때 통했던 질문들이에요. 나라는 고체, 실체를 어떻게 내가 한번 살려볼까, 애쓰는 것은 그런 혜택과 선물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안살아도 돼, 이제는 망해도 괜찮아, 라는 수준급으로 주어진 것이 선물이고 혜택이거든요. 여러분, 혜택 입었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혜택을 입은 거예요. 이건 내가 노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대한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이 땅에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다루는 방식이 이제는 예수님에게 국한 되는 것이 아니고, 감히 우리 자신에게 선물로 혜택으로 줬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죽어도 하늘나라 간다는 이야기거든요.
이 혜택으로 인하여 성령받기 전에 내가 알았던 나에 대한 관점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6-8절인데 상당히 어려운 본문이지만 성경본문이기 때문에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모조리 비유지요. 모조리 은유입니다. 이런 문장 신문에 못내요. 이런 문장을 학교 수업시간에 답안으로 쓸 수가 없어요. 모조리 비유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냐에 대해서 예수님의 키가 몇 센티고, 직업이 뭐고, 그런 식으로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에바브라 그의 직업이 뭔지를 아십니까? 얼굴이 어떻게 생기고, 키가 몇 센티인지 아십니까? 직장이 어디인지를 아십니까?
그 딴 것 필요 없어요. 그가 성령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뿐이에요. 움직인다는 것, 흐름이에요. 어떤 성령의 흐름을 에바브라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성령이, 바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제가 젊을 때 광고문구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그 용각산 광고 멘트가 뭐냐? “이 소리도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나지 않습니다.”
지금 그걸 생각해 보니까 용각산 통 안의 입자가 고와요. 입자가 고와서 흔들어도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타나지 않아요. 곱게 갈아버린 거예요. 용각산 용기 안에 있는 것은 다 갈려 있는 겁니다. 따라서 에바브라의 직업이 무엇이며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뭐 이런 것 물을 필요 없어요. 에바브라의 자아를 성령이 갈아버렸어요. 다 갈아버린 겁니다. 자기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세례요한처럼 주님의 소리 나오지 내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에요. 성령의 소리입니다. 네가 말한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안의 성령이 이야기 하신다는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말씀을 에바브라가 그대로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는데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고 남 이야기하지 말고 본인보고 이야기하세요. 본인도 성령 받았으면 옆에 주변 사람들이 말합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아까 어느 집사님이 그런 고백을 해요. “나 이제 친구하고 정리할란다.” 잘하셨다 했습니다. 연세 이제 70이 넘었는데 친구하고 정리해도 괜찮아요. 개돼지한테 복음을 왜 전합니까? 개돼지인데. 같은 인간 아니거든요. 에바브라가 자기 계획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에바브라는 자기 목표물이 없어요. 에바브라는 주님의 목적만 있을 뿐이에요. 목적이 있지 자기 목표가 없어요. 주님의 목적만 있으면 충분해요. 그게 혜택이고 주님이 선물입니다.
왜 우리는 쓸데없이 걱정합니까? 마치 내 것이 있는 것처럼. 용각산 한번 되어 볼래요? 성령께서 우리의 자아를 매순간 갈아버립니다. 성령도 그렇게 하지만 이 세상 삶이 그래요. 유명한 첩보 스릴러 영화에 ‘본 시리즈’가 있거든요. 그 영화의 한 대목에 보게 되면, 악당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그 본이라는 사람이 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그 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갔을 때 주인공이 탄 그 차를 몰아붙입니다.
몰아붙이니까 주인공 차가 터널 벽에 불꽃을 튀겨가면서 막 긁혀나가는 거예요. 그 모습을 제가 보면서 뭘 느꼈느냐? 이 세상 육이 나라는 육을 터널 벽에 딱 붙이도록 계속 몰아넣는 거예요. 육에 갇힌 이 터널, 육에 갇힌 세상, 육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이 부대끼면서 서로를 마치 미식축구에서 태클 걸듯이 밀어붙이는 겁니다.
우리는 죽겠다고 난리에요. 자영업자들처럼. 이렇게 막 몰아붙입니다. 영의 세계로 튈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요. 애들하고 같이 밥 먹고 살아야 돼요. 그러나 세상은 몰아붙입니다. 불꽃이 튑니다. 온 몸은 피곤에 젖어 있습니다. 누구 말대로 아파요. 세상사는 것이 너무나 아파요. 세월은 왜 그래요? 세상은 왜 그런데요? 너무 아파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세상에 시달리고, 찌들고, 밀어붙이고.
그러면서도 한 가닥 희망이라 해서 20대 넘어가면 좀 낫겠지, 또 30대 넘어가면 좀 낫겠지, 40대가 되면 좀 낫겠지, 50대가 되면 60대는 좀 낫겠지, 그러다가 세월의 무게에 자기 의 몸은 갈수록 정신 나간 몸이 되어서 자기 몸 자기도 간수를 못해요. 터널에 갇힌 이 어두컴컴한 세상에 우리일생은 평생 시달리다 볼일 다 봅니다. 벽에 긁혀서.
남이 나를 치니까 나도 남을 칠 수밖에 없고, 나한테 치인 남은 나보고 악한 놈이라고 나에게 욕설을 하고, 나는 되게 억울하고, 남이 미니까 떠밀렸는데 너는 사기꾼이라고 나보고 욕하고, 너도 사기 쳐라, 이래가지고 또 떠밀고, 세상사는 것이 육과 육의 부딪힘, 그러면서도 놀라운 사실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사실, 이게 육의 한계입니다. 육의 전부에요.
그래서 빠져나가겠다고 어디가나? 교회 나가요. 죽어서는 좋은데 가겠다고. 그런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 고체야, 네가 액체와 기체가 되지 않으면 너는 하늘나라 갈 수가 없다.” 할 때 니고데모의 절망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혜택 없고는, 선물 받지 않고서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습니다.
오늘 에바브라가 뭐라고 하느냐? 6절에 보면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할 때 여기 중간에 복음이 골로새교회에 이르게 된 것은 에바브라가 성령에 의해서 설쳐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중요한 거니까 잘 들으세요. 인간은 자기를 고정시켜 놓고 보면 이것은 잘못된 관찰이에요. 인간은 고정시키지 말고, 인간은 용각산처럼 흔들어줘야 됩니다. 움직이는 거예요. 인간을 움직여 놓고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를 봐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궁금해서 자기 자신을 항상 스톱 시켜놓고 보는데 그 스톱하는 순간 그게 허상이 되고 환상이 되고 그게 우상화, 자기 자신이 우상화되어버려요. 나 어디까지 왔나, 하고 스톱하지 마세요. 성령에 의하면 인간은 늘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니까 인간의 자아가 해리되는 거예요. 낱낱이 다 찢어지는 거예요.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강둑이 이렇게 있는데 그 강둑이 아담 안, 육이에요. 강둑이 이렇게 있고 저쪽 편에 또 강둑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안’입니다. 마지막 아담, 예수 안이에요. 그러면 강둑 이쪽에서 강둑이라는,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가지고 이 세상에서 부대끼다가 하나님의 혜택과 선물을 받으면 이제는 저쪽 강둑으로 건너가면서 우리는 하나의 물결이 되고 흐름이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아담이라는 공평한 조건을 부여 받았어요. 여러분이 공평한 조건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비가 올 때, 비가 내릴 때 그 사람의 직업이라든지, 믿음 있음 없음, 그런 것 고려하지 않고 비가 오면 누구든지 다 맞게 되어 있어요. 낙엽도 마찬가지고.
잘난 사람에게는 낙엽이 떨어지고 아닌 사람은 낙엽 구경도 못하고 그런 것 없어요. 바람, 낙엽, 파도, 그리고 광야, 사막의 땡볕, 이것은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많고 적고, 직업이 무엇이냐, 성질이 고약 하냐 착하냐, 그런 것 고려 없이 그냥 공평하게 다 주어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세상 볼 때 그게 안 보이던가요?
바람과 낙엽과 파도, 이런 시간, 세월 앞에 그리고 땡볕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를 여러분은 못 느꼈습니까? 내가 이만큼 재산 가졌다, 이만큼 잘났다, 이만큼 배웠다, 공부 많이 했다, 이게 아무 쓸모 짝도 없이 가을은 오고 겨울은 오기 마련이고 바람은 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어디에 현혹되었습니까? 어디에 뭔가 속아 넘어간 거예요. 육은 죽음이라는 조건은 똑같아요. 아무리 잘나도 죽어요. 그러면 죽음이 우리에게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국백성 만들려면 그 죽음이라는 주도권을 우리에게서 벗겨내고 그 죽음 자리에 하나님의 혜택과 선물만 꽂아 넣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우리로 하여금 아담에 속한 이런 조건을, 이 죽음을 주께서는 찢어버려야 되지요. 그걸 먼저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올 때 인간 아담의 몸으로 왔고 아담 몸으로 온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나중에 어느 강둑, 새로운 아담, 부활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의 강둑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셨어요.
성공하셨기 때문에 저쪽에서 밧줄로 뭘 보내느냐 하면, 우리에게 성령을 보냅니다. 성령을 보내면서 성령이 어디 안에 있느냐? 우리 안에 들어와요. 우리 안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영이 있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가 돼요. 로마서 8장 10, 1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지금 그 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 성령께서 오실 때 우리의 반격도 만만치 않지요. 여기 실체가 있고요. 흐름이 있고, 저쪽 강둑에 또 실체, 아담이라는, 육이라는 사람이라는 실체, 그리고 흐름, 성령에 의해서 액체, 고체가 된 우리, 그 다음에 강둑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이라는 실체, 실체와 실체사이에 샌드위치처럼 흐름이 깔려져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담이라는 몸 이전에 뭐가 있어요. 그게 뭐냐? 말씀입니다. 그게 말씀이에요. 말씀이 있고, 실체가 있고, 흐름이 있고, 새로운 주님의 영광된 실체가 있고. 다시 달리 이야기하면 말씀이 있고, 아담이 있고, 그 다음에 성령의 흐름이 있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에 우리가 합류하고.
이게 하나의 과정이잖아요. 이게 주님의 지금 일하심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참깨를 짜버려요. 참깨 짜면 참기름 나오지요. 주님은 우리의 육을 말씀으로 짜버리면 우리 안에 성령이 나와요. 성령께서는 말씀 자체를 완료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산품이 참기름이지 참깨가 아닙니다. 참깨야 갖다 버리면 돼요.
우리의 육은, 껍데기는 버리고 그 안에서 내가 너 말씀대로 창조했고, 그 말씀에 대해서 성령께서 깊이 있게 주목하고, 그 말씀만 뽑아내는 것이 지금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성령은 어떤 기능이냐? 기체적 기능을 한다고 요한복음 3장 8절에 보면 나옵니다. 성령은 마치 바람과 같다고.
바람이라 하는 것은 소유대상이 되지 않는다. 소유대상이 되지 않으면 이것은 뭐냐? 성령은 흐름이다. 그러면 우리라는 이 실체는 성령이 와버리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사건이 되는 겁니다. 말씀이 우리보다 먼저 있었다는 이 사실은 마태복음 13장에 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거기에 씨 뿌리는 비유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뿌리게 되는데 말씀을 뿌리기 전까지는 이 세상은 동일한 인간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을 뿌리고 나니까 여기에 네 가지의 스펙트럼이 성립이 되지요. 네 가지의 밭이 등장합니다. 길가 밭, 바위 밭, 가시덤불 밭, 그리고 옥토라는 밭, 이 세상에 네 종류의 밭이 있다는 이것은 말씀이 오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서는 비유로 이야기한다. 비유로 이야기하는 특징은 뭐냐 하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함이라.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성령이 와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너는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성령이 꽂혀 버리면 주도권이 너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게 넘어가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자꾸 우리가 아는 체를 해요. 아는 체를 하니까 주도권이 자꾸 인간 실체인 나에게 머물러 있어야 된다고 고집들을 부려요. 그 고집이 아주 대단한 고집이지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말씀을 이야기하니까 자기 딴엔 안다고 나서는데 안다고 나서는 그 이유가 내 쪽에서 성령도 붙잡고 하나님도 붙잡고, 나 천당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내가 알아서 주도권을 내가 쥐고 내가 알아서 다 긁어모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은 그 반대거든요. 인간은 자꾸 저장을 하려고 해요. 그러면 아담의 몸에서 예수의 몸으로 갈 때 성령께서 이끄시는 그 과정을 맨 먼저 누가 그렇게 실시했느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일을 실시하셨고, 그 다음에 사도바울, 그리고 에바브라에게 이렇게 주어진 겁니다.
이 에바브라가 이렇게 많이 설쳤는데요.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본인의 직업이 뭐냐? 그런 것은 안 나오고 그런 것은 그 사람을 평하는 조건 속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다만 그가 복음을 듣고 진리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여기 주보 뒤에 에바브라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신실한 일꾼(골 1:7)이라고 소개한 에바브라를 통해 성도가 평소의 하게 되는 일들을 알 수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골 4:12)으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개종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한 적이 없음에도 사도 바울이 “함께 된 종 사랑하는 에바브라”(골 1:7)라고 부른 것은 에바브라가 자신으로 인해 개종하였다는 사실을 추후에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한 결과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봐서 에바브라가 에베소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들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즉 직접 사도를 만나지 않더라도 말씀 자체가 뿜어내는 힘이 사람들을 구원해내게 됩니다. 에바브라가 바로 이 복음의 말씀을 자기만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널리 알립니다. 골로새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 하였습니다. (골 4:12∼13). 에바브라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언급은 빌레몬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에바브라에 대해 ‘나와 함께 갇힌 자’(몬 1:23)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바브라가 나중에는 바울과 함께 다른 지역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다가 결국 바울과 함께 갇힌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뒤에도 그는 골로새 교회를 위해 항상 애써 기도하되,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기도했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주보에 다 나와 있습니다. “에바브라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언급은 빌레몬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에바브라에 대해 ‘나와 함께 갇힌 자’(몬 1:23)라고 소개합니다.” 이런 식으로 죽 나와 있지요. 에바브라가 갇혔다는 말은 그 당시 초창기에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 받지 않은 쪽으로부터 많은 욕을 당했어요. 예수님도 성령 받아서 사람들에게 많은 욕을 당했잖아요.
초창기에는 성령 받고 예수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굉장히 심한 배척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예수 믿는다, 복음 안다고 해서 옥에 갇힌다든지 사도바울처럼 고난 받는 일이 별로 안 생기는 것 같지요. 그것은 아마 우리가 제대로 복음을 안 전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세상사람 볼 때에 ‘성령 받은 거나 안 받은 나나 똑같네. 차이점 모르겠네. 저건 공격할 가치도 없어.’ 이렇게 뭔가 복음의 깊이를 제대로 못 전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복음도 모르고 예수도 몰라도 전혀 두려운 것이 없고 아쉬운 것이 없는 이유가 뭐냐? 우리 인생에서 예수님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을 갖다 버린 거예요. 교회 올 때 잠간 예수 찾고 그 외에는 예수님을 치워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차이점을 모르는 거예요.
에바브라는 탈 인간성을 보여줍니다. 그 탈 인간성이 진정한 인간성이지요. 에바브라와 그 당시 성령 받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점은, 모든 인간들은 자기가 멈춰서 자기를 바라보는 거예요. 에바브라는 멈춰서 자기가 누구냐, 자체를 본인은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를 규정할 그런 시간도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 그거 알아서 뭐하려고? 내가 누구냐를 알아서 뭐할 건데요? 나는 아담이지요. 아무것도 아니지요. 에바브라에게 있는 것은 이름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도 간당간당해요. 곧 죽음에 넘기 울 깜빡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이름이 있다. 직업을 가졌다. 직업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닙니다. 머뭇거림의 표현이에요. 이 땅에서 떠나지 않고 자꾸 머물고자 하고 자꾸 머뭇머뭇 일종의 머뭇거림이 직업입니다. 왜? 나이 60 넘으면 다 퇴직하니까. 한때 뭐 했다는 게 그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한때 이래서 돈벌었다, 가 그게 뭐가 중요해요? 본질이 뭐냐 입니다, 본질이. 본질이, 주도권이 네 육에게 있느냐, 성령에게 넘어갔느냐? 그게 더 중요한 겁니다.
이게 바로 혜택이고 그게 바로 선물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께서, 아담이라는 강둑에서 저쪽 마지막 강둑까지 넘어갈 때 오늘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표현하느냐? 에바브라부터 성령 받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하느냐?
이걸 적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게 뭐냐 하면, 전기 이야기에요. 전기에 보면 직류와 교류라는 것이 있습니다. 직류를 고집했던 것이 에디슨이에요. 테슬라는 교류를 고집했다고 하지요. 직류나 교류나 차이가 그게 그거지 무슨 차이가 나느냐, 하지만 직류라 하는 것은 발전소에서 전기를 만들어서 집까지 똑바로 보내는 그것이 직류에요.
직류의 단점은 뭐냐 하면, 전력의 누수가 많은 것이고 장점은 저장이 잘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건전지는 직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교류는 뭐냐? 송전탑을 세워서 전기의 방향을 한쪽 편으로만 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원천으로 다시 왔다가 갔다가 하는 거예요. 왔다 갔다 방향을 수시로 바꾸는 거예요.
진동수 1헤르츠라 하는 것은 초당 방향이 한번 바뀌는 것, 2헤르츠는 두 번 바뀌는 것, 1천 헤르츠는 1초에 천 번 바뀌는 거예요. 현재 우리나라는 60헤르츠라 해서 60번 바뀐다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오늘날 성도에게 있어서……, 그리고 제가 제일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목사님, 내가 성도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이에요.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하면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면 성령은 처음 스타트부터 끝까지 보내고, 끝에서 다시 우리 원천으로 보내는 식으로 계속 교류가 돼요. ‘나는 죄인이야.’ ‘어, 나는 이미 의인 되었는데? 나는 의인 되었어.’ ‘어? 나는 죄인이야.’ 이걸 교류로 번갈아가면서 하는 거예요.
이게 잘 안될 때는 송전탑에서 변압기를 올려요. 변압기라 하는 것은 자석의 코일 숫자에 비례한다고 했어요. 압력을 조절해서 압력을 낮춰야 전기가 위해서 아래로 흐르거든요. 물 흐르듯이. 그것이 전압, 볼트라는 것인데 전에는 100이었다가 지금은 220볼트로 바꿨잖아요. 이렇게 바꾸듯이 늘 우리는 어떤 흐름이 있어요.
흐름이 있는데 그러니까 발전소, 성경의 발전소는 뭐냐? 창세전이지요. 창세전의 하나님의 계획했던 것과 지금의 내 모습 사이로서 하나님께서 죄사함을 주시고, 주시고 그리고 또다시 나에게서 발생되는 이 육이라는 죄를 가지고 다시 죄인이라는 규정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또는 처음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담의 이야기에 다시 가게 하고, 처음과 끝을 번갈아가면서 교차해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이게 나다, 이게 아니라 계속 흐름을 보여주는 거예요. 주님의 강둑이 최종점인데 그 중에 내가 최종점이 되려고, 악마의 지시를 받고 내가 최종점이라고 우기는 그 죄를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속 발생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 가정이라 하는 것은 아빠 있고 엄마 있고 둘 사이에 결혼해서 아기 낳고, 아빠는 돈 벌어오고 엄마는 애 키우고, 그게 아주 간단한 가정의 정의잖아요.
그런데 나이 한 40되어서 내 아기가 갖고 싶어요. 개나 고양이는 많이 키워봤던 모양이지요. 내 아기가 갖고 싶다. 나 닮은 아기. 그래서 나 닮은 아기 갖는다고 사유리라는 일본 여자는 이름 모를 남자 정자를 구해서 임신해서 애를 낳았어요. 애를 낳으니까 그게 과연 가정이냐 하는 겁니다. 그게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과 다를 바가 뭐지?
다시 말해서 내 행복을 위해서 내 자식을 내 원대로 낳겠다는 거예요. 여기에 남편이 낄 자리는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애하고 나하고 이 둘이 가정이라면 이 가정은 순전히 나를 위한 가정이에요. 그 이야기를 딱 들어보니 중국 남서부에 모수오족이 있어요. 여기는 모계사회가 전 세계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겁니다.
모계사회가 뭐냐? 여자 애가 열 세 살쯤 되면 남자하고 연애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집니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입니다. 연애가 결혼하고 그냥 똑같은 거예요. 13세가 되면 여자 애는 그 동네 남자하고 자유연애가 되는데 조건이 뭐냐? 양다리 걸치는 것은 안 되고 한 남자하고만 연애하는데 애를 낳게 되면 그 애는 자기 집에서 엄마하고 외삼촌이 키워요.
이게 어떤 점에서 좋으냐 하면 남편 된 사람은 사랑은 자유롭게 하고 아빠에 대한 책임은 하나도 지지 않아도 돼요. 그런 좋은 점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남편 된 남자는 어떻게 사는가? 자기 엄마 집에서 살아요. 연애하던 그 남자가 싫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빗자루를 문 앞에 세워두면 더 이상 오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다른 남자 만나서 아기를 낳으면 또 역시 외삼촌과 엄마가 키우는 겁니다. 그리 되면 이혼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즐거움이 있어요. 이러한 현상이 결국은 인간의 죄가 뭐냐 하는 죄의 종류, 죄의 여러 형식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죄라는 것은 마지막 도착 지점이 나라는 실체가 된다는 것, 육에서부터 육으로 가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나라는 고체에서 시작해서 나라는 고체로 끝나는 게 죄에요. 그리고 성령 받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이 왜 사느냐? “애 키울 것 다 키우고 무탈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그 시작점이 뭐냐 하면, 태어났다는 거예요. 육, 태어나고 죽을 때도 내가 알아서 조용하게, 자는 잠에 죽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육에서부터 육이에요.
육이라는 것은 영의 세계는 상상도 못합니다. 말씀이 없거든요. 나 편하면 되고 나 즐기는 대로 즐기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사유리가 제대로 보여준 거예요. 조건은 뭐냐? 아기가 갖고 싶다. 그러나 남자는 싫다. 아기가 키우고 싶다. 그래서 여자 나이 더 늦기 전에 낳았다. 뭐 내 돈 주고 내 행복을 위해서 살았다. 끝. 누가 욕하는데? 아무도 욕할 사람 없거든요
아무도 욕하지 못하지요. 왜? 가정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결혼한 사람이나 결혼 안한 사람이나 전부 다 모든 목적과 모든 목표는 오직 내가 최종적이라는 이점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어요. 악마에 속한 아담에 속한 이 육은. 니고데모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어떻게 천국 갑니까, 천국을 이야기하고 뭘 이야기해도 최종적인 목적은 뭐냐? 나한테 오게 되면 끝났어요.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시도해보면 참 쉽습니다. “우리 밑에 지옥이 없고 우리 위에도 하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상상해 보세요.” <이매진> 이라는 존레온이 불렀던 가사에요. ‘종교라는 것이 없고 국가도 없다면 남는 것은 뭐냐? 당신 몸 하나만 남으니까 당신 몸 그냥 편하게 사세요.’ 이게 영국의 비틀즈 멤버 존 레논이 부른 이매진이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많은 단체에서 단합을 위한 지정된 중심노래가 되고 있어요. 육에서 생각나는 것을 끄집어내고 인문학강좌니 철학이나 과학이니 모든 것을 끄집어냈는데 끄집어내고 딱 펼쳐보니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상된 내 모습만 거기에 딱 담겨 있어요. 그건 뭐 멀리 세상공부 안 해도 여러분 가정을 한 번 보세요. 여러분 자녀들, 성령 받지 않은 여러분들 식구들을 한 번 보세요. 개나 고양이는 볼 필요 없고요. 뒤따라가니까요. 한번 보세요. 마지막 최종 종착점이 어디인지요? 주님께서는 어떻게 활동하는가?
누가복음 4장 42절에서 4장 44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많은 육적인 혜택을 주니까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딴 데 가지 마세요. 우리 동네에만 계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동네가 무슨 동네냐 하면, 자기가 최종적으로 살고 있는 그 동네에요. 내가 있는 동네. 인간의 모든 나오는 발언과 행동은 마지막 목표가 있는데 그게 뭐냐? 현재 있는 내가 안 깨지고, 안 부서지고, 안 망하고 그냥 멀쩡하게 내가 여기 있게만 해준다면 나는 좋겠습니다, 가 그게 전부에요.
따라서 항상 내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자기를 스톱시켜서 고정시켜서 관찰하는 거예요. 그러나 에바브라는 도대체 자기라는 것이 없어요. 복음에 주도권이 넘어가고 성령에 주도권이 넘어갔기 때문에 그 사람은 온 천지에, 골로새뿐만 아니고 온 아시아 동네에 복음 다 전했습니다.
골로새에는 사도바울이 간 적도 없고요. 에베소는 바닷가와 가까운 쪽이고 골로새는 바닷가와 먼 쪽 내륙 동네에요. 그 먼데까지 가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성령이 인도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늘 움직이고 있어요. 자기를 돌아볼 그런 여유는 전부 다 사치입니다. 생각 안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내가 누구냐,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면 되겠습니까, 나는 구원 받았어요, 혹은 구원 안 받았어요, 그런 질문 자체가 해당이 안 된다는 거지요. 주도권이 예수님한테 넘어갔기 때문에 이제 자기 몸이라는 실체는 잊어주세요. 내 몸이 어떻게 됩니까, 는 잊어주세요.
내가 가야 될 것은 내 몸이 없는 곳에 가거든요. 그리스도 몸이 기다리는 곳에 간다고요. 지금 강을 건너가고 있는 거예요. 이 자아가 다 액체화 되어서, 성령이라는 기체 속에 녹아져서 이제는 이쪽 강둑을 이미 떠나 버렸어요. 성령이 가만두지 않고 계속 떠나게 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21-24절에 보면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저쪽 강둑이지요,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쪽 아담과 저쪽 새 아담 사이에는 거기서 건너지 못하면 빠져 죽는다는 이야기에요. 유대인들은 맨 날 질문이 당신 누구야, 맨 날 질문이 나는 누군데, 라는 식으로 자기방식으로 거울 보면서 내가 누구냐를 계속 다짐하는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 방식을 그대로 예수님에게 적용시킵니다. 나는 이런데 너는 누구냐, 고 물으니까 주님께서는 나는 이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흐름으로, 일하심으로 이야기해요.
그렇다면 이러한 세상에 대해서 주님의 답변을, 오늘날 성령 받은 저와 여러분들도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답변해야 될 경우가 생긴다면 이런 식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어요.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냐, 내 키가 몇 센티며, 내 집에 돈이 얼마냐, 나는 어느 학교 나왔느냐, 그런 것 묻지 말고 네가 신앙생활 몇 년 했느냐, 그런 것 묻지 말고.
에바브라는 직분도 없어요. 직분이 뭐냐, 장로냐, 집사냐, 그것도 없어요. 내가 누구냐가 목적지가 아니거든요. 내 목표지점이 아니에요.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그냥 매일같이 주님에 의해서 계속 움직이고 있어요. 움직이고 있고 싸대고 있는 겁니다. 우리 집 애가 둘인데……, 그런 것 자체가 자꾸 멈춰서 보니까 평가 대상이 되고 측정 대상이 되는 겁니다.
너희 교회 몇 명이고, 헌금 얼마 나오고, 유-튜브 조회 수 얼마 나오고, 좋아요 얼마나 나오느냐? 이게 자꾸 멈추니까 그래요. 멈춰버리면 그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평소에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이 한 6십쯤 넘어버리면 “평생을 뒤돌아보니까……”
뭐한다고 뒤돌아봅니까? 뒤돌아보니까 애 이렇게 고생하면서 잘 키웠고……, 자기 스토리, 자기 이야기를 해요. 육적 이야기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터널 속에서 새로운 육적인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진짜로 혼납니다. 새로운 사태에 의해서.
애 다 키워놓고 노후대책이라고 상가 하나 사서 임대료 받아먹으면서 살까 하는데 둘째 애가 대출받은 것 때문에 터널에 빚쟁이가 와서 막 밀어붙이는 거예요. 돈 갚아라. 빠질 때가 없어서 막 불꽃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 인생 이렇게 끝나는가, 이렇게 망가지는구나, 내가 이것만 믿었는데, 내가 나의 목표물이었는데 나의 자존심은 어디서 찾아, 나의 가치와 체면은 어디서 찾아, 나 그만 자살해 버릴까…….
사람은요,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었어요. 이미 인간은 죽었다고. 죽어가는 게 아닙니다. 아, 진짜 답답해서. 이미 태어날 때 죽은 존재에요. 숨 쉬는 것 우리 맘대로 숨 쉬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해도 마찬가지에요. 자살 하나 안하나 이미 죽은 인간이 자살해도, 죽기 전에도 자살했는데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대선에 나오고, 죽은 사람이 대통령 하고, 죽은 사람이 법무부장관하고, 모든 인간은 그냥 죽은 인간이에요. 이미 죽은 것, 주도권은, 생명은 내가 아니라 성령한테 있습니다.
끝으로 로마서 8장 9-11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이미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계획 알리지 말고 주님의계획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엄청나게 큰 계획 속에 우리가 휘말려 있음을 우리가 감사하게 해주시고 내가 얼마나 수고하고 힘들게 살았는가 보다도 주께서 거저주신 선물이 무엇이며 거저주신 혜택이 무엇인가를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