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신령한 기도

아빠와 함께 2020. 11. 30. 12:36

신령한  기도

2020년 11월 29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9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신령한 것이 이 세상에 구할 수 없습니다.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인간들이 내뿜는 모든 것이 신령하지 않고 속물적이고 시시한 것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아와 관련된 소원 요청 뿐입니다. 즉 인간들로서는 기도 자체가 성립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지도 않을 것들을 모아서 그것을 ‘기도’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자아로부터 출발하는 것들을 기도라고 할 수 없을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곳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엉뚱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은 저주로 꽉채워진 곳입니다.

마귀가 통치하는 곳이고 지배하는 곳입니다. 마귀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는 곳입니다. 절대적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것들은 모조리 ‘나를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식의 내용을 뿐입니다. 즉 이미 자신들이 엉뚱한 곳, 잃어버린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 더 이상 나를 상실하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서 보면, 왜 인간들의 기도가 거부당하는지 잘 나와있습니다. 창세기 8: 20-21에 보면 “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하기에’ 주님께서는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다 태워짐의 연기’를 받아주시는 겁니다. 진정한 기도란 바로 이 ‘연기’입니다. 희생제물의 다 태워짐에서 나오는 연기입니다. 즉 기도란 오로지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제단 위에서만 성립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8:3-4에 보면,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으로부터 살해당한 자들입니다.

곧 자아가 산산조각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신령한 기도란,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워진 기도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뜻이 집결된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곧 버릴 것은 버리고 찾을 것은 찾으시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스럽다고 받으시는 것은 받으시고 그렇지 않는 것은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버리시느냐에 대해서 구약에서는 전쟁 사건들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이스라엘은 내부에 하나님의 제단이 있어 그 제단에서 난 효과로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번제된 희생제물의 연기에 만족하신다는 말입니다. “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13)

이러한 제단에서의 만족이 효과로 나타나는 것이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입니다. 사무엘하 5:20-21에 보면, 거기에 ‘바알브라심’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다윗의 전쟁은 우상숭배자들이 자신이 섬기는 우상을 버리게 만드는 전쟁이었습니다. 이사야 28:21에 보면, 이같은 전쟁을 장차 오실 메시야가 하실 기능이라는 겁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 공을 이루시리니 그 공이 기이할 것임이라”

바로 이 정신이 예수님이 십자가 피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아 너머에 뭐가 있는 줄을 모릅니다. 자아 너머에는 바알 브라심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진노의 심판의 현장입니다. 그동안 자아에 입각해서 각종 소원을 신에게 드렸던 모든 속물적 기도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됨을 알리는 공간이 그곳입니다.

즉 내가 여기 있고, 그 있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하늘을 향해 외치고 하소연했던 모든 것들이 “나 우상의 자리에서 살고 있는 우상입니다”라는 고백을 드러낸 짓에 불과했던 겁니다. 자아의 것을 지키고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은 악마의 심어서 본능이 발동한 겁니다. 본능은 자기 안녕을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신은 자신들의 대화 상대로 조작해 낸 가짜 신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의 기도는 구약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나타나나요? 역대하 20:21-26에 보면, 유다 나라가 모암과 암몬 나라와 싸우면서 이상한 전쟁을 하게 됩니다. 합창단을 군사 앞에 앞장 세워 전선에 내어보냈더니 졸지에 적군들이 전멸한 겁니다.

그곳 이름을 브라가 골짜기라고 합니다. 곧 송축의 골짜기입니다. 찬양의 골짜기입니다. 이는 인간의 자아 너머에는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벌려놓은 그 전쟁의 전리품으로 생산된 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특징은 자아가 나서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온전한 구원이 주어졌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곧 성도는 ‘흔적’입니다. 이 흔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대목입니다. 양 99마리를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목자에게서 ‘주님의 자아충족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찾아낸 너는 영원히 내 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처녀도, 동전 찾고 난 뒤에 막대한 돈을 들여서 친지와 친구들을 모아놓고 되찾음의 기쁨의 잔치를 벌립니다. 이는 잃어버린 이의 자아충족성을 주님의 자아충족성이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일찍 아버지의 재산을 타지에 가서 탕진한 둘째 아들은 더 이상 자아충족성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먼 발치에서 아들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시시한 이 세상에서의 선과 악이 아니라 과연 본인이 찾으신 백성들이 ‘잃어버림과 되찾음’의 흔적이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 4: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만든 가짜 하나님말고 나를 없애서 새로운 나를 만드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골 1장 9절(신령한기도)2011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9절까지입니다.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사도바울의 기도가 남다르겠지요. 그분은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기도를 하느냐 하면, 그 기도내용이 오늘 본문 1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이런 말은, 인간들이 이 땅에서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일체 협상이나 타협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는데 이것을 사도바울은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신령한 지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사도의 기도는 내용자체가 신령하기 때문에 어떤 기도냐 하면, 신령한 기도가 되는 겁니다. 초감각적으로 자기 몸을 흔들고 뜨겁게 하는 것이 신령한 기도가 아니라, 내용 자체가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가득 찼으면 그것은 신령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사람은 누구나 신령한 기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신령한 기도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새삼스럽게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구해야 된다는 말은, 평소에 이 땅 사람들이 신령하지 않은 기도를 해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그 당시 사람들, 헬라인이나 이방인들 모든 인간세계에 사도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의 신령함과 지혜가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없기 때문에 사도바울입장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십자가라는 사건, 이 복음을 중간에 딱 집어넣어버리면, 십자가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 이것은 신령한 것이고 십자가의 복음의 내용이 빠져버리면 이것은 신령한 내용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유대인들이나 사람들이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는 사도바울입장에서는 기도가 아니고 하나의 소원을 촉구하는 거예요. 소원을 달성하고자 비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신령한 기도를 위해서는 네가 소원하는 것에서 뭐로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신령한 기도로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소원이 있다는 말은 그 소원을 시작한 누가 있다는 말이냐 하면, 본인의 자아가 내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소원 앞에 뭐 글자 하나 붙이지요. ‘내’ 소원이지요.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청할 때 하나님이여, 내 소원……, 주님이여, 내 소원……, 할 때 그 소원자체를 주님께서 거절한다는 말은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을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당부하기를, “지금까지는 너희들이 너희 이름으로, 너희 자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기도를 했는데 이제부터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된다.” 갑자기 기도하는 자리를 출발점을 바꿔치기를 해버려요. 주님께서!

그렇게 바꾸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기도는 오직 예수님만 알 수 있고, 예수님만 하는 기도만 그게 고스란히 응답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뜻이 이루어져요. 오늘 본문도 그 뜻이 아닙니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가득 채우는 거예요. 모든 것이 인간의 뜻은 배제하고 아버지의 뜻만 가득 채우는데 그 아버지가 누구의 아버지냐 하면, 예수님만이 아는 아버지의 뜻이거든요.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무엇을 배척해버리느냐 하면,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하는 기도를 주님 입장에서는 철저하게 계속해서 밀어내는 겁니다. 거절하는 거예요. 인간의 기도, 흔히 말하는 기도, 인간의 그냥 상식적인 기도, 그게 어떤 기도냐? 속물의 기도지요.

그 속물적인 기도 그게 왜 하나님께 들어지지 않느냐 하면, 창세기 1장부터 보게 되면 그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너는 바로 네가 있을 곳이 아닌 곳에 살기 때문에 발생되는 그러한 속물적인 기도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에덴동산에 인간을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주님 보시기에 “너희들은 왜 있을 자리에 살지 않고 엉뚱한 곳에 살고 있느냐? 그 내막과 그 이유에 대해서 네가 알아야지.” 네가 원래 에덴동산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살지 않고 괴롭고 괴롭기 힘든, 아프기 짝이 없는, 저주가 충만한 이 세상에 살게 되었다면 네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좀 관심가지고 알아야 되지 않겠어?”

 “힘들다, 힘들다! 주여, 들어 주옵소서” 하지 말고 ‘왜 나는 이렇게 엉뚱한 자리에 와 있지? 그러면 내 원래자리는 뭘까? 원래 자리가 뭘까?’를 생각을 좀 해보라는 말이지요, 생각을. 머리 있는 것 그냥 놔두지 말고 좀 생각을 해보자. 이 자리 말고 원래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가 있을 텐데 그 자리에 가지 못하고 왜 내가 이 자리에서 고생하는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보라는 겁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자리는 어떤 자리냐? 잃어버린 자리에요. 원래 있던 자리가 따로 있는데 출생부터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출생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자리,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자리에 우리가 턱 하니 태어나서 돌잔치 좋다고 하고, 재롱잔치 하고, 여기서 평생 잘 먹고 잘살았다고 자랑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자체로 잃어버린 겁니다.

상실입니다. 상실된 거예요. 나름대로 뭘 채우려고 시도하지 마세요. 채우려고 시도해도 그것은 애초부터 상실된 겁니다. 채우려고 하는 그 마음도 사실은 필요 없는데 필요 없는 것을 구태여 자꾸 채우려고 한다는 자체가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추궁하시는 겁니다. 이 추궁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추궁하실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도바울은 놀랍게도 합격을 했어요. 주님의 원래 자리, 이게 예수 안이 되거든요. 성령 안, 십자가 안, 복음 안, 같은 뜻입니다. 그 영생 안, 그 안에 합격이 되었거든요.

합격이 되었으니까, 자기만 합격된 것이 아니고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도 같이 합격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합격되기를 바라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장 9절에서, 내가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 멈추지 않겠다, 네가 얼마나 부자가 되느냐, 건강하냐의 문제가 아니고 원래 잃어버린 그 자리에서 있던 너희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으로 꽉 차 있는 세계, 하나님의 뜻으로 꽉 차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지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도착을 이미 했기에 이제부터는 너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 그냥 지혜가 아니에요, 신령한, 영적이라는 지혜, 신령이라는 말을 붙이는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속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속물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시시하다, 시시~ 해도 너무 시시한 것, 그냥 농담 같은 것, 장난 같은 것, 시시한, 고민거리도 될 필요도 없는, 아무 문제꺼리도 안 되는 것, 이빨 일곱 개 빠져도 그거 뭐 아무 문제꺼리도 안돼요. 본인한테는 고통스럽지요. 하지만 신령한 것에 비하면 그것은 잃어버렸다는 증거, 상실되었다는 증거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찾아와서, 다른 말로 십자가의 사건을 가지고 찾아올 때는 뭐부터 지적질을 하고, 뭐부터 배제하느냐 하면, 우리의 속물적 기도, 그것은 우리의 소원이지요, 우리의 소원부터 철저하게 묵사발 냅니다.

다시 쉽게 말씀드립니다. 너희는 기도할 줄 모른다. 너희는 소원을 아뢸 줄 만 알았지 기도할 줄 모른다. 너희는 자아 챙길 줄만 알았지 아버지의 뜻은 모른다. 왜?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사건으로 저쪽 십자가 안에 있고, 우리의 모든 육신의 본능은 기도는 할 줄 모르고 우리의 아쉬운 소원이나 아쉬운 소리나 할 줄 아는, 예수님 십자가에 죽게 만드는 그러한 시시한 것들만 계속해서 평생토록 교회 와서, 새벽제단 차가운 바닥에 앉아서 그 기도만 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신령한 지혜와 신령한 총명이 들어오려면 먼저 뭐부터 정리정돈이 되어야 되고 뭐부터 우리가 알아야 되느냐 하면, 우리의 기도가 왜 속물이고 시시한 것들만 찾고 있는지 그것부터 먼저 알아야 됩니다. 그게 상실한, 우리의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 썩어가는 육신, 늙어가는 육신, 양초처럼 타들어가는 육신, 마냥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혼란시키는 이 육신이라는 현실을 우리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복음이 들어와도 막상 기도하라고 하면 다시 시시하고 속물적인 기도 외에는 나올 게 없을 정도에요. 그 점을 우리가 배제하고, 난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요. 기도할 줄 모릅니다. 그러면 기도는 어디 있느냐? 바로 속물을 묵사발 내고 박살내는 그 현장에서 십자가사건이 재현되면서 아하, 비로소 기도는 이 더러운 속물 같은 소원 속에서 제대로 기도가 나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도할 줄 모른다는 말은 사실은 우리한테 기도라는 것이 없는 셈이 되지요. 속물만 있으니까. 하지만 현재 있는 속물을 누가 와서 신령한 쪽에서 와서 깨뜨리고 그것을 묵사발 내고, 박살내고, 그것을 지적질하고, 그걸 추궁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속물적인 기도 안에서 진짜배기 기도의 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속물적인 기도가 많이 있습니다만 그중의 대표적인 기도가 이 한국 땅에 유행을 해서 참조하라고 하나 적어왔어요. 임 재범의 <고해>라는 가사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기도를 하는데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제가 이렇게 평이하게 읽으면 실감이 안나요. 절규하듯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이런 식으로 노래가 시작돼요.

“감히 제가 그녀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기도가 너무 간절하기 때문에, 이것이 일반교회 교인들 기도만큼 간절해요. “어디에 있나요”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는 거지요. 어디에 있기는? 자기 본인뿐인데 뭐가 어디에 있어요? “제 얘기 들리시나요?” 자기가 본인보고 하는 이야기인데 잘 들리지요.

이게 지금 쇼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임 재범의 노래 이 가사는 아주 절실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를 버려도 좋은데 제발 그녀만은 허락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프러포즈가 잘 안되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릅니다. 어찌 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하면서 제발 그녀만큼은 내게 허락해 달라. 간절히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응답이 확실하게 안 나오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디에 있나요~” 아, 이거 노래를 부르면 안 되는데. “어디에 있나요” 본인이, 이야기상대를 본인이 상상해서 지어내 놓고는 말이지요. 자기가 자기의 상대자를 신이라고 상정해놓고, 또 들은 것은 있어서, 간절한 기도는 응답된다는 그런 식의 이야기는 어디서 듣기는 들어가지고 모든 간절함의 용어는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죽을 판이라. 기도응답 안되면, 그녀 안주면 죽을 판이라. 그녀 마음이 안 열리면. “제 얘기 들리시나요? 잘 들리지요?” 자기가 자기보고 이야기하는데 안 들릴 리가 있어요? 이 이야기가 임재범의 이야기뿐이 아니고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고요. 새벽기도 하면서, 바닥을 치면서 제 이야기 정말 들리시나요, 하는 말을 여러분도 수백 번 해봤을 걸요? 잘 들리지요.

게다가 뭔가 또 첨가하는데 “피 흘리는 가엾은 제 사랑을 알고 계신가요?” 제가 피를 흘리기까지 기도한다는 겁니다. 이 본문은 열왕기상 18장 28절에 나와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기도하는데 어떻게 기도하느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피가 흐를 때까지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 이래도 내 소원, 기도도 아니지요, “내 소원 안 들어 줄거요, 주여!” 그게 뭐냐 하면, “피 흘리는 가여운 내 사랑 알고 계신가요?” 열왕기상 18장 28절, 세상에 성경구절이 여기 그대로 나오네요. “용서해주세요 벌하신다면 저 받을게요.” 뭐 잘못한 것도 모르고 “벌하면 벌 받을 테니 허나 제발 그녀 하나만 허락해” 달라는 겁니다. 참 절절한 기도, 우리나라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대표자의 기도에요.

왜 이게 기도가 되지 못하고 하나의 소원, 요청밖에 안되느냐 하면, 내가 마음통하는 대화가 되는 신을 따로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제조해서 만들었기에 그런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내 뒤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내가 내 뒤로 못 넘어갑니다.

자꾸 아무리 신을 따라가 봤자 나는 내 앞에 머물러 있는, 내가 만든 신에게만 자꾸 이야기를 걸고 또 들은 것은 있어 가지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백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뭐합니까? 내 안에 머물고 있을 뿐인데. 모든 기도를 하든, 소원을 하든, 뭘 하든, 항상 내 안에 머물고 내 밖, 나 넘어 바깥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십 년 동안 교회에서 새벽기도 해 온 겁니다.

그 기도 내용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자기 아쉬운 것을 드러내는 거예요, 아쉬운 것. 교육관이 필요합니다, 주여, 내 병이 낫기를 바랍니다, 주여, 제발 그녀만큼은, 다른 여자는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녀만큼은 허락해 주세요, 주여……,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시작된 자기의 소원풀이, 그거 해놓고 뒤에 예수이름 붙였다고 그걸 기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맴돌고 있어요. 동굴이지요. 백날 소리쳐봐야 자기소리만 증폭되어서 자기 귀에 들려올 뿐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이지요. 내가 나 밖에 나가면 뭐가 있을까, 그걸 생각 못하는 겁니다. 내가 나 밖에 나가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거기에 내가 살해당한 내가 있어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내가 살해당한 나, 내가 살해당한 순간 나의 소원도 같이 살해당했어요.

살해당할 때 그냥 살해당한 것이 아니고 죄를 규정받고 살해당했어요. 심판받고 살해당했거든요. 그러면 내 소원이라는 것, 제발 그녀만큼은 허락해 달라는 그것이 간절하기는 하지만 그게 죄라는 생각을 추호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죄라는 생각을

 신령함도 아닌데 가짜 신령함, 자기가 조작한 신령함이 그런 거예요. “뭐든지 할 테니 주여 제발 살려만 주옵소서. 뭐든지 할 테니까.” 그래놓고 ‘내가 지금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조작한 하나님보고 한 소리가 아닐까? 그러면 이캐요? 저캐요? 내가 내 몸을 한번 찔러볼까요? 주여, 살아계신다면, 교회에서는 주님이 부활해서 살아 있다는데 나는 그걸 못 느끼겠습니다. 따라서 내가 죽으려고 할 때 좀 살려주든지 해주세요.’ 라고 본인이 하나님을 요청하는 온갖 시도를 다 합니다. 그런데 상당히 익숙한 거예요. 이 세상에서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4장 7절에 보면, 광야에서 예수님이 악마와 만났을 때 예수님이 악마에게 지적한 게 있어요.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왜 하나님이 너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그 생각을 못 버리느냐, 자꾸 나를 위한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거예요. 진짜 나를 위한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내 쪽에서 어떤 변신의 행동을 함으로서 거기에 하나님이 호응하는지 안하는지에 따라서 그 다음조치에 나서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합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기도라는 게 인간에게는 없었습니다. 자기의 소원풀이밖에 없었어요.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신령한 지혜, 신령한 총명, 이것은 인간 세계에서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에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그런 기도는 사도바울이 많이 했었어요. 사도바울이 성령받기 전에, 주님 만나기 전에 엄청나게 했어요. 오직 그것만 했어요.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내가 증명하는 이러한 쇼, 쇼맨십에 불과한 겁니다. 장난이에요. 모든 게 게임이에요.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인간은 원래 자리가 잃어버린 자리에요. 그런데, 잃어버린 자리인데 애초부터 잃어버린 자리라면 잃어버리는 것이 지당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고, 간절하고, 왜 자꾸 부탁하고, 매달리고, 주여, 주여, 부르짖느냐 하면, 안 잃어버려야 되는데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이런 생떼가 어디 있습니까? 안 잃어버려야 되는데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간절하게 새벽기도 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금요철야, 커피 석잔 마셔가면서.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너는 잃어버렸어.” 그래서 잃어버리는 것이 지당한 거예요. 지갑 잃어버리고, 돈 잃어버리고, 나중에 나이 들면 60, 70이 되면 정신도 다 잃어버려요. 다 잃어버리는데, 마치 SF 영화에 보면 인간의 이미지가 있는데 이미지 조각들이 전부 다 떨어져서 다 날라 가는 거예요. 슬레이트 지붕이 태풍이 불면 다 뜯겨져 나가지요. 하루하루 살면 하루씩 다 뜯겨져 나가요. 나의 것이 가만있어도 다 뜯겨져 나가요.

퍼즐 판에 맞추면서 애들 노는 거 그 판 뒤집어보세요. 조각조각 나잖아요. 우리는 조각조각 나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서 다 날라 가 버립니다. 휘발성용액이 공중으로 풍선 붕붕 뜨듯이 그 모든 것이 다 발산되는 것처럼 나라는 것이 이쪽저쪽 동서남북으로 다 뜯겨져 나가요. 그걸 억지 부리면서 규합하려 하니까, 새벽기도 와서 발악하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으니까 그 발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려고 내가 교회 왔나, 이러려고 내가 하나님 믿었나,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진짜 하나님은 원래 네 자리가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자식도 잃어버리고, 내 재산도 잃어버리고, 원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새삼스럽게 간직할만한 가치가 애초부터 없었는데 뭘 잃어버림이 있습니까?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뭘 잃었고 뭘 늦었어요? “참 바보같이 살았군요~” “네가 원래 바보야.” 처음부터 바보였었어요.

기도라는 것은, 신약시대 오기 전까지는 기도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그냥 특별한 선지자에게만 기도가 있었고 나머지기는 기도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기도라 하는 것은 제물의 산화와 더불어 같이 발생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물이 제단에서 불에 태워지면서 연기가 되어서 올라갈 때 그 올라가는 것이 기도에요.

그것이 구약 이스라엘 이전에 이미 모든 인류에게 원칙으로 주어진 기도입니다. 창세기 8장 20절 21절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훅 들이쉬면서 흠향하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태어나면서도 계획하는 바가 악하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너는 몰랐는데, 너는 모르고 있었지만 너는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네가 악하다는 것, 그걸 달리 표현하면 너는 악이 되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했던 존재에요.

내가 악한 것이 아니고 악이 나를 통해서 악의 흔적과 징조와 징후를 발산시키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거예요. 이 땅에. 악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그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죄지은 것이 아닙니다. 죄가 나를 통해서 죄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어요. 매일같이.

그런데 고마운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통해서 하루 살면 하루치가 떨어져 나가요. 광주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 고왔던 얼굴이 이 못난 나를 만나서 늙었다는 거예요. 그 고왔던 얼굴이 이런 남편 만나서.

“내 품에 안기어 고이 잠든 그대여 어느새 그대 눈가에도 주름이 졌네. 내 아픔에 묻혀 꿈을 꾸는 그대여 야위어진 그대 바라보니 눈물이 솟네. 고왔던 여자의 순정을 이 못난 내게 바쳐두고 한마디 원망도 않은 채 긴 세월을 보냈지”(김 정수, 당신)

그런 남편 만나서 고왔던 얼굴이 날라 간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퍼즐 조각처럼 세월 지나면 다 뜯겨져 나가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찍어 발라도 소용없어요. 뜯어고쳐도 안돼요. 주사 놔봐야 선풍기 아줌마처럼 부풀기만 하지 아무 소용도 없어요. 우리 존재는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파멸로 지금 달려가고 질주하고 있습니다. 누가 말립니까?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아니에요 제대로 정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아니에요. 잃어버려야 돼요.

아예 나를 잃어버려야 돼요. 그리고 그 잃어버림 가운데서 나의 소원도 잃어버려야 돼요.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 보면 참 유명한 말씀 나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실컷 어찌합니까, 어디에 계시나요, 제 이야기 들리시나요, 해놓고는 결국은 모든 것이 주님 시험하고, 그녀만 허락한다면 벌받을 용의가 되어 있다 해놓고는 나중에 응답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 돌리도(돌려줘), 돌리도(돌려줘), 결국 실컷 이야기해놓고는 “내 기도한 기도 값 돌리도(돌려줘).”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 힘으로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이 제물구조로 오신 거예요. 왜냐하면 구약에서의 기도는 제단에서만 응답되는 기도가 향기가 되어서 올라가거든요. 연기가 되어서.

기도가 연기가 된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8장 4절에 있습니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온 우주에 가득 차 있고 그 성전에 향단이 있는데, 그 향단에 섞여서 올라가는 연기가 있는데 그 연기가 뭐냐? 성도의 기도라는 거예요.

그 성도의 기도에서 그 성도란 어떤 성도냐 하면,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지금 목이 달아난 죽게 된 성도입니다. 성도 본인이 죽은 거예요. 누구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죽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 자리를 상실했던, 그 자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확실한 조치를 했던지 “네가 잃어버려야 돼” 했던, 그 잃어버린 자리에서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산채로 생명을 소유해서 내 것 만들 수도 없고요, 나 같은 것은 잃어버려도 마땅해, 그런데 그 잃어버린 최종자리가 어디지, 라는 그 자리를 주님께서는 생명의 자리로 우리에게 제시해줬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이에요. 이 빈 무덤에 너희도 합세하라는 겁니다.

“제대로 잃어버려라. 이왕 잃어버릴 것 미리 앞당겨서 제대로 잃어버리자. 나와 함께 잃어버리게 해줄게. 너의 모든 소원과 너의 모든 뜻을 내가 알아서 박살내 줄게.” 그게 바로 아버지의 뜻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뜻입니다. 너는 자꾸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데, 이것 손해 봤습니다, 이거 날라 갔습니다, 되찾게 해 달라, 자꾸 하는데 인간에게는 되찾는다는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어요.

되찾으면 안돼요. 그것은 악마의 접촉제입니다. 그것은 집념이고 집착이에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안녕을 걱정하고 있거든요. 그게 얼마나 악마가, 자기가 자아한테 집착하게 만드는 거예요. 내게 그녀 하나만 허락해 달라는 이게 얼마나 자기집착이에요? 그러면, 내가 없다면 여자도 필요 없고, 장가 안가도 되지요. 꼭 가야 돼요?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버려야 될 죄인, 자기밖에 모르고, 기도 할 줄도 모르고, 오직 악마가 시키는 대로 자기 소원대로 해달라고 닦달내고, 데모하고, 주님에게 땡깡 부리는 인간에게 왜 찾아오시는가?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거기 하나님의 자아충족성이 나옵니다.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저쪽 저주받을 자리가 아니고 내 옆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누가복음 15장에 세 가지 비유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백 마리 양을 몰고 가다가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을 때에 99마리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잃어버린 양이 없으면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이 안돼요, 자기백성을 찾는 거예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자기백성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내 백성 하나도 없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기어이 자기백성을 찾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제키시고, 99마리 양을 놔두고 그 없는, 자기 곁에 없는 양을 찾아서 주님께서는 과감한 희생을 시도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십자가 카드를 내밀어서 양을 찾게 되면 그 잃어버린 양은 주님 곁에 돌아오면서 어떤 흔적이 있느냐 하면, 바로 나는 잃어버렸던 양이었는데 주님께서 희생으로 이렇게 지목했습니다, 하는 흔적으로서 예수님 옆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생산품입니다.

누구의 생산품이냐? 예수님의 기도의 생산품이에요. 예수님의 기도의 생산품. 예수님의 자기충족성이기 때문에 나의 충족성은 이미 물 건너 간 거예요. 내가 미흡한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선택된 겁니다.

찾음을 당한 거예요. 불러낸 거예요. 주께서 이미 아신 자를 불러내신 겁니다. “너는 내 옆에 있어야 돼. 내 옆의 자리가 네 자리야. 딴 데 가지 마, 이 양아!” 흔적을 지니고.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그게 바로 99마리 양과 한 마리 양을 의도적으로 대비시킨 겁니다.

또 하나는 뭐냐? 어떤 처자가 열 개의 동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어요. 그 동전 하나 잃어버려서 부지런히 찾았는데 찾고 난 뒤에 얼마나 기뻤던지 찾은 동전 비용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서 친구들 불러서 잔치 벌였어요. 동전은 5백 원짜리인데 잔치 비용은 5십 만원 나왔어요.

누가복음 15장 9절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잃은 동전 찾았노라.” 물론 그 당시는 동전이 아니고 금화쯤 되겠지만. 그런 금화를 찾았노라. “이 기쁨은 돈으로 측정하지 마. 돈으로 계산하지 마.”

우리 인생도 우리가 받은 영생, 주님을 돈으로 계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얼마를 헌금해야 됩니까?” 그런 것 물은 사람도 없지만. 그냥 헌금하지 마시고 여러분 몸을 주시기 바랍니다. 몸에 다, 옷에다 리본 달고요. 주님의 생산물이기 때문에.

누가복음 15장에 또 예가 나와요. 탕자. 탕자는 자기 충족성을 위해서 자기 아버지 재산을 뜯어다가 나의 행복이 나의 목적이다, 이렇게 하고 나갔는데 다 떨어 먹고 왔습니다. 다 떨어먹었다는 말은 더 이상 나의 충족성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더 이상 나는 주님 앞에, 아버지한테 뭘 달라는 소원할 수 있는 잽이 못 된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내 주제를 알아야지 뭘 주님한테 이것 다오, 저것 다오, 할 수가 있겠어요? 이방인들의 기도가 그렇다고 나오지요.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7절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이방인들의 기도가 이것 필요합니다, 저것 필요합니다, 맨 날 달라는 거예요.

너희는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에 있던 제단 위에서 하나님의 제물이 완전히 타들어가면서 나오는 그 연기, 그것만 흠향하시는 그 기도의 취지와 너무나 어긋납니다. 기도라는 것을 인간이 못하는 이유가, 본인이 살겠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을 전제로 깔기 때문에 기껏 소원만 나올 뿐이지 기도라는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탕자가 자기 충족성을 잃어버리고 주춤주춤 하고 있을 때 내가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아버지 집에 가니까 아버지는 아들 오기를, 집밖에 나가서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나님의 자기충족성이기 때문에.

저게 탕자인지, 재산을 기생하고 날렸는지, 그런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네가 어디 가서 얼마나 흉악한 죄를 지었느냐, 일체 묻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은 너는 잃어버린 자리고, 지금 이 자리는 내가 나서서 희생해서 새로 생긴 새로움의 자리라는 그 사실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덮어버립니다. 주님의 공로가 주님의 하신 일이 우리의 모든 자질구레한 모든 죄를 다 덮어버려요.

왜? 우리가 죄짓는 것도 시시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한 것도 시시하고, 그것도 속물이고 착한 것도 속물이고, 나쁜 짓 한 것도 속물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내가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우리가 지금 엉뚱한 자리에 와 있다는 사실, 악마가 가는 지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파악하는 것, 그것은 신령한 것이 주어질 때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7절에 보면 모든 좋은 것, 신령한 것, 각양 좋은 것은 다 위에서부터 온다고 했어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이 땅에서는 같은 인간들끼리 백날 해도 그것은 소용없습니다. 다 위로부터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구약에서의 주의 제단에서의 기도가 어떻게 구약자체 내에서 그게 현실화되는가? 그것은 역대하 20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여호사밧 때 유다나라가 모압 암몬 연합군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전쟁하는 방식이 아주 희한합니다. 21, 22절에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그러니까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그리고 24, 25절에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여호사밧과 그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취할쌔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는 고로 각기 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취하고……” 이렇게 많이 취했다는 이야기를 했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26절에 “제 사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브라가 골짜기가 바로 하나님을 송축했다는 것,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거예요. 제단에서의 이 기도가, 제단에서 응답되는 그 하나님의 희생제물의 기도가 현실에 어떻게 되느냐? 우리의 자아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전쟁에 승리자의 전리품으로, 승리자에 소속된 것으로 확인시켜 주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전쟁은 희생양 주님이 하시고 그 결과는 우리가 생산물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이게 예수님의 기도의 효과입니다. 우리는 그 흔적이고. 그 징후, 징조에요. 기도한 적도 없는 우리가 구원을 받은 거예요. 기도한 적도 없는 우리가. 그저 소원풀이만 하는, 이 더러운 짓만 했는데도 구원을 받았어요. 이게 ‘브라가’ 찬송하는 겁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바로 하나님의 제단에 누가 있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있었던 거예요. 주의 이름이 되려면 거기 희생 제물에 백성들의 죄를 안수하고, 그래서 그 제단은 인간의 이름들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이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희생이 되면, 그 희생제단에 다 태워진 희생제물의 주의 이름의 기도가 응답되면서 그 효과를 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의 승리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는 제단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의 기도를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주의 이름이 어디서 활동합니까, 를 물어야 되지요. 그 주의 이름은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을 때에 그 앉은뱅이의 자아가 있었잖아요.

그 잃어버린 것을, 오늘 설교에 그대로 적용시키면 자기자체의 잃어버린 것을 생각지 않고 내가 절름발이니까 빨리 남들처럼 다리가 멀쩡하게 회복하는 것을 간절히 기도한 겁니다. 회복도 하고 그 회복, 내가 너무 엄청난 것을 요청한다면 돈이라도 달라고 할 때에 4, 5절 “베드로와 요한이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네 자아가 원하는, 네 자아의 소원이 원하는 것을 내가 일체 거부 하겠다.


6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구약에서 인간이 원하는 이 자아, 이 자아성에 대해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미 인간의 자아가 우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구절이 있어요. 그것도 특별한 명칭이 있는데 이사야 28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 행하시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브라심산이 어떤 산이야 하면, 사무엘하 5장 21절에 보면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그 골짜기 이름이 뭐냐? 브라심 골짜기에요. 20절에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우상을 갖다 버린 골짜기,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을 버릴 수 있도록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사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이거든요. 그러면 다윗의 전쟁은 뭐냐? 우상을 믿는 자들에 대한 승리지요. 그러면 우상은 뭐냐? 우리 자아가 우상이거든요.

우리 자아가 있지 않을 곳에 있으니까, 마귀와 함께 있으니까, 자꾸 마귀가 우리자아의 소원을 가지고 뒤에서 부추긴 겁니다. 교회 와서 기도하라고, 네 소원 이루어진다고. 주께서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주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네가 간절히 기도하면 네가 기도하는 대로 들어준다고. 뒤에서 촉구를 한 거예요, 자꾸 시험해보라고. 하나님 살아 계신지를. 자신이 우상인 것을 몰라요.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전쟁은 우상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습니다. 내가 우상인 것을 모르니까 내 기도조차도 우상인 것을 몰라요. 내 소원도 우상인 줄을 몰라요. 다 나 잘되라고, 나를 안 잃어버리려고 하는데 우리는 애초부터 잃어버려야 돼요.

어차피 나이 들어 8십 되고 9십 되면 다 잃어버립니다. 살았던 인생도 돌아보면 언제 살았나 싶을 정도로 없어질 거예요. 산산조각 나니까. 휘발유의 모든 것은 휘발되어 버리니까. 증발해버리고 마니까. 날마다 증발해요. 나중에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꼭 타버린 양초 같아요. 촛불이 탄만큼 남아 있는 것이 얼마 남지를 않았어요.

지금 어떤 분 많이 남아있고 조금 남아 있는 사람도 있는데, 19세는 많이 남아 있어요. 어차피 많이 남아 있으나 조금 남아 있으나 계속 줄어들기는 마찬가지에요. 말릴 수도 없어요. 누가 이 방향을 역으로 돌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주께서 그냥 죽으라, 이 말이지요. 뒈져라, 그 말입니다. 그냥 얼마나 간단해요 사는 게. 그냥 잃어버리면 돼요.

그동안 안 잃어버리려고 스트레스 받아서 암 걸린 겁니다. 잃어버린 그것 찾겠다고 신경 쓰다 보니까 병 걸린 거예요. 다윗의 전쟁은 바알브라심, 우상을 갖다 버리게 만드는 전쟁, 이 바알브라심이 예수님의 피 안에 들어 있어요. 예수님의 피는, “네가 우상이냐? 나는 너를 적으로 삼고 싶어. 나는 너를 죽이고 싶어. 너를 잃어버리고 싶어. 잃어버리는 그것에 너의 생명이 있는 거야.” 너를 잃어버리게 하는 그것에 생명이 있어요. 어차피 아무리 호강해도 결국 잃어버립니다. 인간은.

레위기 1장 9절에 보면 제사장이 번제물을 다 태웁니다.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되어 있어요. 아주 간단해요.

다 태워놓고 흠, 아, 향기로운 냄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꼭 그거 같아요. 개미들이 우르르 나와서 시체 죽은 것 뜯어서 조각들 하나씩 등에 짊어지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것처럼 주의 천사들이 우르르 내려와 가지고 그걸 뜯어서 다시 주의 집으로 조립해 나가는 거예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가 없는 주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주께서 마련한 새로운 몸으로 조립시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봤던 꿈속에 사다리가 있었는데 그 사다리에 천사들이 개미처럼 되게 바빠요.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그게 뭐냐? 주의 이름이 하실 기능을 말합니다. 그게 요한복음 1장 5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자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리라 하지요.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내가 주의 이름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의 기능이 뭐냐? 나를 산산조각 해체해서 그걸 천국에 재조립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이름은 끝났어요. 나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나를 만드는 겁니다. 첫 번째 먼저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께 속한 우리고. 다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이름은 잊어주세요. 내 이름은 이제 없어요.

그래서 기도를 주의 이름으로 하라, 이 말이지요. 그 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능이 너에게 적용이 되어서 “나는 예수님의 흔적이 되게 하시는 이 작업에 기꺼이 내가 수긍하게 하시고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 이게 바로 신령한 기도입니다. “나를 해체하는 작업을 내가 용납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내 자아가 주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게 신령한 기도에요.

우리는 성전구조의 일부입니다. 나는 하나의 제물처럼 연기가 될 그러한 운명이고 처지입니다. 회사에서 사람 뽑을 때 많이 왔다고 안 좋아 하거든요. 뽑을 사람이 없어요. 많이는 왔는데, 5백대 1인데 뽑을 사람이 없어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많다고 천국 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뽑을 사람은 주께서 뽑아주십니다. 탕자처럼 잃어버린 것, 내 잃어버림의 흔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뽑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입장을 이해하는 기간, 이게 인생이에요. 주님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자꾸 잃어버리면서 이해를 하는 거예요.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금과 은, 네 자아가 원하는 것을 내가 주지 않겠다. 하지만 주의 이름으로 새사람이 되어라. 주의 이름으로 걸어라.” 그렇게 한 거예요. 사도행전 3장 6절에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주의 이름으로 새사람이 된다, 걷는다는 이것은 앉은뱅이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앉은뱅이의 자아의 입장, 자아의 경계선 안에서는 있지도 않은 그러한 생각이에요. 외부에서, 신령한 것으로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뭐냐 하면, 걸어가는 내 모습입니다.

이것은 내 솜씨, 내 구걸하는 구걸의 행함이 아니에요. 주님의 일방적인 조치가 걷게 된 새로운 내 모습, 이것은 예상 못한 내 모습이에요. 오늘날 앉은뱅이처럼 정신적인 장애자인 우리에게 주께서 주의 이름으로 주신 것은 새로운 겁니다. 내가 원하는, 내가 갈구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무의식적으로 나왔던 것은 다시 무의식적으로 다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생각도 못했는데 나간 것은 결국 생각도 못한 나로 돌아오는데 그 나가 뭐냐? 내가 생각도 못한 나에요. 예상 못한 나입니다. 내가 이렇게 영광스럽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한 나입니다.

맨 날 돈 없다고 짜증짜증 내다가 예수님의 성령 받고 난 뒤부터는 돈 없다고 짜증 낸 내가 이상할 정도로 전혀 돈 없는 것이 짜증이 안 나는 이상한 나로 돌변했어요. 미친 것 아니에요? 주위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보고 당신이 훌륭해서 그 사람을 낫게 했다, 하니까 아니요, 사도행전 3장 15절에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절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그 이름의 증인이라. 우리는 그 이름의 증인이고 그 이름, 주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그 사람을 낫게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믿음이라 하는 것은 송축, ‘브라가’처럼 항상 이미 이루어진 결과에 대해서 찬양하는 식으로 생산물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루어진 것, 이미 확정된 것에 대한 찬미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기도에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ad 35년경쯤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주고 난지 3년 뒤의 이야기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전에 있던 십자가가 지금 이어졌다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살 이유도 없고 내가 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그분이 내 안에 산다는 그 믿음으로, 그러니까 믿음으로 산다, 할 때 믿음은 일종의 찬양이지요. 신령한 겁니다. 신령한 것이 내 안에 확 들어왔습니다, 하는 것에 대한 자기의 흔적이 믿음입니다. 내가 기대한 것을 믿은 것이 아니고, 내가 기대치 아니한 것이 들어왔다는 그 고백, 그 고백이 바로 믿음이거든요.

그게 찬양이고 그게 바로 기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기도에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제가 예수님이 한 작업에 말려든 것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계속 일 하시옵소서. 주여, 저는 주께서 만드는 대로, 생산하시는 대로 생산 되겠습니다.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지요.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줄도 몰랐던 우리, 그러나 신령한 것이 들어왔을 때 주의 이름으로 하시는 활약상을 감히 우리 몸으로 증거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신분이고 축복인 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예상도 못한 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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