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예루살렘의 근본(겔16;1-5)이근호130605

아빠와 함께 2013. 6. 6. 20:42

 

예루살렘의 근본(에스겔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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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6-05 21:34 
예루살렘의 근본

2013년 6월 5일                           본문 말씀: 에스겔 16:1-5

(겔 16: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6:2, 개역)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겔 16:3, 개역)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겔 16:4, 개역)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겔 16:5, 개역) 『너를 돌아 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흔히들 이스라엘의 근본은 하늘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게 언약에 내려와서 세워진 나라가 이스라엘이며 이 사실로 인해 다른 민족와의 차이가 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예루살렘의 근본은 가나안이요 아비는 아모리요 어미는 헷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그 이스라엘은 진정 이스라엘의 근본이 아니었던 말입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가나안에서 처음 나타났다면 애굽에서 나온 그 이스라엘은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 아니다 는 말이 됩니다. 신은 비록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수입했지만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구성원은 가나안 땅, 고산지방에서 유목생활하는 가난한 잡족들이 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거론하는 구절이 바로 에스겔 16장 본문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의 근본은 가나안땅 맞습니까? 이점을 규명하기 위해서 이사야 61:4-5를 살펴 봅시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너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가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신랑은 하나님이 됩니다. 필히 세상 모든 자들로부터 버림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가 되지를 못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역사를 겪어야만 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목표를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목표는 하나님의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나름대로 약속의 땅에서 번영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신부’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담아 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부됨’은 하나님의 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생각하는 목표는 항상 자신을 좋게 보는 경향에서 구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목표가 무참하게 깨어질 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성취됩니다. 하나님 목적의 실체는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신부 만들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업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근본은 출애굽 당시가 아니라 가나안 땅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출애굽이 지향하는 목적이 가나안 땅에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겁니다. 결코 이스라엘이 나라로서 축복받아 부강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가 곧 출애굽의 목적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해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자신들의 행복을 맛보게 하는 기회의 땅으로 여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오산과 오해를 두고서 여타의 가나안 민족과 더불어 우상숭배하는 자들이라고 단정짓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이 우상숭배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1:19-20에 보면,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드라빔이란 가정용 수호신을 말하는 겁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있어 가정에서 귀한 것은 통장입니다. 그것은 통장없이는 못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대인에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은 신입니다. 이 신은 사적인 용도로 쓰여집니다. 그 용도란 다름아닌 세상사에서 억울하고 손해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원상 회복시켜주는 기능이 곧 가정 신이 담당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정사에 손실이 일어나는 것은 신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신으로부터 일어난 일은 신이 나서서 해결해주는 것이 고대인들에게는 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라반은 자신의 딸이 자기 곁을 떠나는 것보다 자신의 수호신을 잃어버린 것을 더 심각한 문제가 생각하는 겁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 있어 신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에게 미래란 곧 과거의 손실 본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이 보상성이 실질적으로 잘 이루어지게 되면 큰 나라,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에스겔 16장에 북쪽 나라 이스라엘과 남쪽 나라 유다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열심있는 창녀라고 간주받는 이유는, 그만큼 우상적 의식이 너무나 강렬해서 주위 민족들이 잘 사는 것을 흠모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이스라엘은 도무지 ‘정결한 신부’가 될 입장이 못된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신부가 되는 작업이 개시된다는 겁니다. 너무도 추잡하고 더럽기에 하나님의 신부에 적격인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마치 창기는 생식기가 거대한 남성을 보고 죽고 못사는 것처럼, 신으로부터 많은 보상을 얻어내어서 잘 사는 나라를 남편으로 삼고자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나라의 우상을 자기네 신으로 섬긴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부의 정결성이란 이스라엘 자체에서 발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에 보면,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되어 있고 요한계시록 21:9-11에 보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 영광성을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순간, 곧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피흘려지는 그 순간이 신부가 정결하게 달라지는 순간입니다. 너무나도 추잡은 창녀이기에 정결한 신부가 되는데 있어 모든 공로는 오직 신랑되시는 예수님에서만 나올 뿐입니다. 바로 이점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신부됨은 오직 신랑을 제대로 아는 자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3강-에스겔16장 1-5(예루살렘의 근본)13060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6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6: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서, 그 근본과 뿌리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근본, 뿌리에 대한 이야기에서 예루살렘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또는 유다사람들이 자신의 근본은 하늘에 있고 하나님이 자신의 근본이라고 생각을 해 왔거든요. 우리도 알다시피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은 이 땅에 없는 민족인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와서 언약이 커져서 나라가 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일을 그 당시 이스라엘이 모를 리가 없지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하늘과 연관 없이 그냥 땅에서 만들어져서 땅에서 지탱하는 나라라면 이스라엘 나라는 그 근본이 하늘에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관리하시고 주목하시고 키우시고 복 주시고 하나님의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이스라엘을 지키신다는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자긍심이었고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이 결혼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6절에 보면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키워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고 아모리와 헷사람이 원주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이 이렇게 만들어져놓고는 자기 부모한테 버림받아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이렇게 버림받으니까 하나님께서 거두어서 “내가 내 자식으로 키워야겠다.” 해서 하나님손에서 키워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근본은 하나님이 아닌데 키우는 것은 하나님이 키웠다는 식으로 에스겔 16장에 나오니까 이 대목을 두고서 원래 애굽에서 출애굽한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었던 말인가, 라는 의심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16장을 근거로 해서 이렇게 이야기한 학자들이 많아요. 그 학자들이 오늘날 신학교의 구약학교수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애굽에서 출애굽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인데 애굽에 살던 일단의 무리가 합비루라는 노예들인데 그들이 갈대바다라는 이름, 졸졸 흐르는 갈대시냇가를 건너온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건너올 때 모세가 믿었던 야웨,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는 거예요. 그들이 가나안땅에 들어왔는데 그동안 평지에 살다가 가진 자들한테 시달려서 산 위로 피신한 약자들, 억눌린 피지배계층들이 옛날에 누렸던 권한을 되찾기 위해서 모세가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전설을 믿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열 두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지금 신학교의 구약교수들이 다 그렇게들 알고 있어요. 보수고 진보고 관계없이. 그러면 출애굽은 뭐냐, 출애굽이란 것은 그들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조작한 거라고 봅니다. 그들이 믿던 하나님은 약한 사람들 눌린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어서 강한 사람의 권력을 전복시키는 하나님, 혁명을 일으키는 하나님, 나약한 사람들 편에서 가진 자에게 복수해주시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원래 그들이 산위에서 그냥 목축하던 사람들인데 그래서 그 때부터 여호와는 유목하는 자들의 신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 근거가 바로 에스겔 16장에 나오는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라고 한 대목에서 진짜 이스라엘의 족보의 뿌리는 처음부터 애굽은 구경도 못하고 가나안 땅에서 태어난 잡족들이고 억눌린 사람들이라는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앞에 있는 모든 출애굽이야기가 다 거짓말이고 있으나 마나한 이야기가 되고 엉터리이야기가 되어버리지요. 그렇다면 에스겔 16장에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고 하는 이 취지가 뭐냐?

에스겔 16장에 굉장히 긴데 이 전체내용이 뭐냐 하면, 누구도 돌보지 않고 버려진 여자아이를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키워냈다는 겁니다. 이걸 좀 어렵게 해서 목적과 목표를 구분해야 되는데요. 인간은 목적이라 하는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목표만 가지게 됩니다. 난 이렇게 되겠다는 목표지요. 그런데 목적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목표, 예를 들어서 법대에 들어갔는데 4학년 졸업 전에 나는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이렇게 목표를 정했어요. 그런데 4학년이 다 지나가도록 사법고시에 합격도 못하고 그냥 군에 갔다면 “넌 법대에 갔다면서 왜 사법고시에 합격도 못하고 일반 병으로 들어왔느냐?” 할 때 그 병사가 하는 말이 “다 주님의 목적하신 바가 있는 모양입니다.” 라고 되는 거예요.

목적이라 하는 것은 내 뜻은 아니지만 뭔가 하나님의 원대한 뜻이 있어서 그 뜻 따라 나는 수동적으로 목적된 대로 수용할 뿐이다, 하면 그게 목적이 되지요. 비록 사적으로 작은 계획이나 목표가 있더라도 원대한 목적 앞에서 목표라는 것은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그런 거예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뭔가 희망이 있고 목표, 계획을 세우잖아요. 그런데 그 목표가 뜻대로 되든 안되든 하나님의 목적에 포함이 된다, 그렇게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16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에스겔이 하는 것은 이사야 62장 4절에서 5절에 그 내막이 나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신랑은 하나님이고 신부가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이 대목을 제가 왜 언급하느냐하면, 이사야 62장 4절에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한다는 그 이야기는 바로 이 가나안땅 자체를 결혼한 여자로 지칭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출애굽에서 나왔던 애굽을 근본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은 목적적인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서 가나안땅에 도착시키는 것이 목적이거든요. 목적을 기준해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나안땅에서 뭔가 일을 일으키는데 그게 뭐냐 하면, 버리운 어떤 자를 나의 신부로 맞이하는 작전을 거기서부터 시작을 한 거예요. 그게 근본이에요. 알아듣기 쉽게 하면 하나님의 신부가 된다는 것이 그 전에 “나는 하나님의 신부가 되어야지.” 라는 이것은 이스라엘의 목표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은 목적이 아니고 목표입니다.

만약 나에게 목표가 있다면 나의 근본은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나의 목표가 있다면 나의 근본은 애굽에서 시작을 해야 돼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시작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되거든요. 복잡한 논리를 이야기하는데 차분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아브라함 때나 이삭 때나 야곱 때는 없어요. 이스라엘나라는 애굽이 성립되고 난 뒤에 애굽에서 마치 토네이도처럼 튀어나온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목적이 아닌 어떤 목표를 갖는다면 ‘내가 애굽에서 종되었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가서 나도 나라 하나 만들겠다.’라고 했다면 근본은 애굽이 근본이고 거기서 나와서 가나안땅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건설했다면 드디어 그 목표가 달성된 거예요.

그런데 처음부터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가나안사람이거든요. 작은 가족인데 그 가족에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져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애굽으로 보냈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에서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번창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은 역시 가나안땅인데 애굽에 갔다가 다시 오는 그 과정속에서 그들은 뭘 느껴야 되느냐, 버리운 자, 버림받았다는 것을 느껴야 돼요. 아무도,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건사하고 돌볼 사람은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의 신부가 되려면 인간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신부코스를 밟아서는 신부코스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조건이 있어요. 뭐냐, 모든 사람으로부터 다 버림받아야 된다는 조건이에요. 모든 사람, 모든 민족으로부터. 그렇다면 이스라엘사람들이 조상은 가나안이지만 애굽에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그 절차를 거쳐야 되는 이유는 그 절차 속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피투성이, 모든 민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갓난 여자아이의 입지로서 그들은 혹독한 경험을 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못하기에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한테 사랑을 받아버리면 더 이상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 사람한테 사랑받는데 왜 구태여 하나님한테 또 사랑받으려 하지요? 지금까지 제가 신학교 졸업하고 목회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신자들과 더불어 있으면서 오늘까지도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본인이 하나님이 아닌데도 그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고함을 질러야 되는데 그러면 시끄럽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닌데 그들은 자꾸 그걸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언급을 해요. 하나님이 달라요.

하나님조차 다른데 그걸 어떻게 납득을 시키고 설명을 합니까? 하나님 자체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이렇게 돌봐주십니다.” 저는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버림받게 만듭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 덕분에 이 사람이 도와주고 하나님 덕분에 가정이 화목하고 하나님 덕분에 취직도 잘 되고 하나님 덕분에 행복하고, 자기 잘되는 것을 전부 다 하나님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우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이 가나안 조상이지만 애굽을 경유해서 다시 큰 민족을 이루고 나라가 되어서 와야 될 체험을 해야 될 이유는 그 차이를 알라는 거예요. 보통 사람은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별난 존재가 아니거든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실은 조작된 거예요. 그것을 그들은 혹독하게 경험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그들이 머리가 좋아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그들도 다 똑같이 일반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하나님을 하나님인줄 알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앞장세워서 언약의 실체와 내막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 적사건을 집어넣으니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처음 봤다는 거지요. 세상에 내 백성 사랑한다면서 물도 안주고 양식도 안주는 그런 하나님을 봤습니까? 교회 나온 교인들의 물을 끊고 양식 끊어지게 하는데 그 하나님 믿고 교회 나오겠습니까? 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었던가요? 우리는 교회 나오면 복주고 교회 나오면 천국 보내주고 교회 나오면 사랑해주고 덤으로 행운을 주는 하나님을 기대했지 교회 나왔다고 해서 물 끊어버리고 전기 끊어버리고 양식 끊어버리고 죽으라고 내 팽개치는 하나님인줄을 우리가 교회 나오기 전에 상상이나 했단 말입니까?

몸 아프면 낫게 해주는 그런 하나님을 생각했잖아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저 이렇게 할 뿐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의 사주를 받아서 조작된 하나님입니다.” 그 때부터 대화 자체가 끊어져버려요. “너만 하나님 잘 믿느냐?” 하고 자기가 이야기한 것을 둘둘 말아서 돌아서버리지요. 십자가마을에 질문해놓고 답변 달아놓으면 자기 질문을 쏙 빼서 지워버리고 답변만 달랑 남아 있는 경유가 한 두 번이 아니지요. 여러분이 보다시피. 우리의 근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버림받은 자가 맞습니다. 왜냐, 우리는 마귀에게 속해있거든요.

하나님은 자기의 신부라는 그 실체, 하나님은 신랑이 된다는 것, 하나님이 신랑일 것 같으면 하나님 신랑에 부합되는 그 신부는 얼마나 아름다워야 되고 얼마나 찬란해야 되고 얼마나 영광스러워야 되고 얼마나 거룩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자체가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찬란하기 때문에. 따라서 찬란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랑에 합당한 신부는 자기 힘으로 거룩해지고 착해지는 이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를 하고 서울 청량리 근처의 사창가에서 창녀생활을 해줘야 돼요. 그 창녀 이야기가 에스겔 16장 전체 내용을 다 차지합니다.

언니가 창녀 질 하고 있는데 동생은 그것을 보면서도 언니보다 더 심한 창녀라고 합니다. 언니가 누구냐, 여기서 이스라엘의 동생인 유다라고 되어 있어요. 둘 다 합해서 창녀자매, 몸 파는 창녀자매로서 에스겔 16장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의 근본이라는 거예요. 너의 근본을 애굽에서 고생한 그것이라고 하지 말고 가나안 열 민족들이 우상을 섬길 때 그것을 남의 이야기로 보지 말라는 거예요. 너도 똑같이 그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원래 같은 족속이었다는 겁니다. 애굽에서 분류한 것이 아니고 가나안땅 같은 족속에서 분류했다고 보는 그것, 목표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그것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왜 섬기는가? 지금부터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1장 19절에 보면 야곱이 나오지요.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언약을 받은 사람이 언약이 없는 라반삼촌과 같이 21년을 지내면서 레아와 라헬 이 두 자매와 결혼을 해서 애를 열한 명(최종 12명) 낳습니다. 라반의 집을 나오게 되는데요. 그 때 라헬이 나오면서 드라빔을 숨겨 나옵니다. 그때 라반이 자기 재산을 조카가 가져가는 것도 아까웠겠지만 그것은 크게 신경 쓰거나 놀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집의 통장을 읽어버리면 가슴이 벌렁벌렁하지요.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통장이나 금고죠. 라반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드라빔이라는 가정용 수호신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창세기 31장 19절을 보면서 ‘이상하다. 염소하고 양하고 조카에게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별 상관 안하고 드라빔이라는 수호신을 빼앗겼다고 해서 그것을 찾는다고 맹추격을 하는가?’ 하겠지요. 야곱의 본처 라헬이 금덩이 같은 것은 놔두고 아버지의 수호신 드라빔을 자기가 깔고 앉은 낙타의 안장 밑에 숨겼는데 찾다가 찾다가 결국 못 찾으니까 “너 좀 낙타에서 내려와 봐라.” 했어요. “제가 지금 월경중이라 못 내려갑니다.” 이래서 겨우 위기를 모면했지요.

그걸 보고 누구라도 이야기할 거예요. “그깟 가정용수호신이 뭘 그렇게 대수라고.” 현대인들은 구약성경의 신개념을 이해를 못해서 그래요. 우리는 우상이라고 하면 기껏해야 부처상이나 조상숭배하고 제사지내는 정도로 알고 있는데 그 당시 그들의 신은 그냥 신이 아닙니다. 자신이 고생한 것을 보상해주는 신입니다. 우상이란 신인데 이 신은 사적인 신인데 개인이 알고 있는 원함을, 혹은 원통함을 미래에 갚아주는 신입니다. 미래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과거에 잘했던 것이 언젠가는 보상이 될 것이라는 데서 사람은 미래를 살아갑니다.

과거에 잘한 것에 대해서 보상 안 해주면 사람은 자살합니다. 자살하는 이유가 과거에 힘든 것이 보상받을 기회가 없다고 보기에 자살해 버립니다. 사람이 미래에 지금의 어려움을 보상해 줄 수 있다면 사람은 악착같이 안 죽고 살아남게 됩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나의 원통함을 갚아주는 신, 그게 바로 드라빔이고 가정용 수호신입니다. 이것은 가정용이기에 위층이나 옆집과 관계없어요. 윗집에서 시끄럽게 애들이 쿵쿵거린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렇게 새벽 두시에도 쿵쿵거리면서 떠들던 사람이 이사를 가다가 차가 뒤집어져서 죽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상이라면 그 라반의 드라빔, 우상은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다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의 근본은 아모리 족속, 가나안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우상이라 하는 것은 사적인 원함과 원통함과 복수를 대신 갚아줘서 내가 당한 만큼 몇 배나 보상해주는 하나님으로 여호와를 섬긴 거예요. 그들은 여호와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 인간자체가 우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그 우상 같은 인간을 신부로 여기고 신부로 만드는 작업에 나서는데 그 만드는 작업이 중요해요.

나를 위한 하나님, 남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한, 나의 원통함을 풀고자 하는 하나님이기를 원하는 나를 하나님께서는 창녀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오늘 16장 전체를 이 한 시간으로 끝낼 수가 있어요. 에스겔 16장에서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그 두 창녀들이 뭘 원했는가하면 발기된 남자의 생식기 큰 것을 찾아다니는 짓을 해요. 그게 뭐냐, 이웃나라는 그쪽 신으로부터 보상을 많이 받아서 번영하고 행복이 넘치는 큰 나라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부러워서 우리도 어떤 남자를 만나서 관계를 맺으면 그 나라처럼 부강해질까, 라는 인식으로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서 그동안 살아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합니다. 그것이 너의 사적인 목표이나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나는 것은 신약시대에 교회를 하나님의 신부라고 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늘의 예루살렘성이 위에서부터 내려오는데 이것은 정결하기 그지없어요. 그야말로 거룩해요. 에스겔 16장 4절을 보게 되면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들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지저분함과 추잡함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여기서 정결치 아니한 것이 나중에 요한계시록 21장의 정결한 신부가 되는 그 모든 손길은 다 누구 공로이며 누구 몫이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신부는 어림도 없고 신부 근처도 못가는, 그저 깨끗함과 아무 상관없는 창기 그자체인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깨끗한 신부로 만들어내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희생의 몫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써 한 차례 체험한 바 있었습니다. 그 어린양 피 바른다고 그들의 인간성 마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피가 주어지게 되면 자기가 미처 몰랐고 내면에 감추었던 창녀 같은 본성, 세상의 큰 것 좋아하고 세상의 번창을 하늘나라보다 더 좋아하는 근본적 인간성이 그냥 폭로될 뿐이지요.

오늘 낮에 천로역정에 대한 글을 써서 올렸습니다만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처럼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미련한 것이나 우리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정말 이것은 미련한 겁니다. 창녀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그저 세상 것만 찾는 창녀인데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가 될 수 있습니까? 천사도 흠모하는 그 신부자리, 깨끗한 천사조차 그 자리에 못 갔는데 이 추잡하고 더러운 창녀가 어떻게 그 신랑의 신부자리로 등극됩니까? 이 놀라운 기적 그 비밀은 오직 십자가의 피 흘림에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의 실체는 이스라엘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때문에 희생당하고 죽음을 당했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에게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의 본색이 예수님의 피 앞에서 날마다 들추어지는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43강-에스겔16장 1-6(예루살렘의 근본)130605-이 근호목사.hwp (27.0K), Down: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