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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05-22 21:17 | |
에스겔 14:21-2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면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볼 때에 그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무고히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이렇게 세상을 구분하는 버릇이 있어요. 좋은 것은 챙기고 나쁜 것은 그냥 던져버리는, 그래서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가지고 생활을 하루하루 이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친구 같으면 좋은 친구는 계속 만나고 나쁜 친구는 관계를 끊어버리는 식으로 해서 자기한테 유리한 인생이 되도록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가 나옵니다. 21절에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 우리 인간들 보기에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일으킨 일을 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다 필요한 거예요. 칼이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고 기근, 굶는 것이죠, 사나운 짐승, 온역(전염병), 이것이 우리한테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싶어서 버리고 외면하고 싶은 생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곱게 다루어서 기어이 하나님의 뜻은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데 잘 활용하십니다. 그렇다면 벌써 해답이 나왔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칼과 기근 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 우리가 원치 않는 일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하는 데는 꼭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 그 사람이 성도가 되겠습니다. 굉장히 간단하지요. 칼, 기근, 사나운 짐승과 온역, 이것들이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다, 손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있겠어요, 나의 것을 갉아먹는 거지요. 내 것이라고 여기고 내 것 안에서 행복을 느꼈던 그 행복을 불행으로 전환시키는데 동원되는 것이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이잖아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조건 안 맞으면 힘들어서 못살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편하고 행복하게 사는 조건을 어느 정도 아는 겁니다. 칼이 없고 기근이 없고 사나운 짐승이 없고 전염병이 퍼지지 않는 조건하에서 인간은 편하고 행복하다, 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인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이 너무나 현실에 대해서 작게 생각하고 짧게 생각한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놀이터에서 어린아이들이 노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그 모습 보고 참 예쁘게 보는 거지요. 애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이 예뻐서 할머니가 가서 말을 걸려고 한다면 애들은 도망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애들이 놀 때 어른 보기에는 별 재미가 없어요. 하지만 애들은 자기만의 아기자기한 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안에 낯선 사람이 쳐들어오게 되면 애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 자리를 피해버리지요. 그 애들이 깔깔거리면서 놀이터에서 놀 때 그것이 국제평화나 인류공영에 이바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저희들끼리 행복하고 즐거운 겁니다. 지금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애들의 부모의 회사가 부도나더라도 그 애들은 놀이터에서 그냥 놀 거예요. 애들 머릿속에 부도라는 개념이 없으니까요. 어른들이 볼 때 애들은 참 자기 밖에 모른다, 철없다,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자기밖에 모르고, 그렇게 상당히 낯설게 보지요. 마찬가지로 인간이 산다는 것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오랜 세월 살아도 자기가 생각한 그 안에서만 까불거리고 행복해하고 불행에서 멀어져서 행복하고 편하게 살면 그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겁니다. 꼭 놀이터의 어린애들 같아요. 전체를 볼 줄을 몰라요. 그래서 그런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천국에 간다면 그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들어놓은 행복한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가지고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안에서 물론 자기가 주인공 노릇을 하겠지요. 성경이란 펼쳐보면 우리가 깔깔거리고 어린애처럼 소박하게 그 안에서만 행복하면 그것이 전부다, 라는 식의 생각의 판을 뒤 엎어버립니다. 그 판을 뒤엎는 것은 오늘 본문 21절에 나온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만한 것이 없어요. 전염병이 일어나고 짐승이 달려들어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 죽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기후가 안 좋아서 농사지은 곡식들이 다 말라 죽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판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판을 엎을 때 사람들은 그동안 행복했다, 즐거웠다, 세상 살만하다고 그런 쪽으로 기대하고 희망을 가진 그 근거가 오직 자기 욕망에서뿐이지 사실 세상 전체의 내막을 알아서 그런 것을 추구한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구출된다, 구원된다는 의미는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동네에서 전체를 아는 하나님동네로의 탈출, 우리가 그것을 구원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구원받는 과정에 있어서 판을 엎어버려요. 우리는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불행을 느끼고 하나님 때문에 망했다는 탄식과 하나님에 대한 미움들이 막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하지요. 하나님이면 다인가, 왜 내 행복한 가정을 뒤집는가, 그런 식으로 불만을 터뜨리지요. 소꿉놀이 하는 인생, 코앞에 있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생. 우리는 그 자기 인생이 너무 만족스럽기에 탈출이니 구원이니 그런 말들이 더 이상 듣기기 싫은 거예요. 성경말씀 펼치기도 싫고 말씀 듣기도 싫어요. 왜, 나의 소꿉놀이가 너무 재미있기에, 아니 재미보다도 나의 소꿉놀이 외에 다른 것은 보고싶지 않기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려면 성경을 펼쳐야 되는데 성경을 펼치니까, 그동안 내가 소박하게나만 알던 세계를 가지고 성경을 펼치니까 성경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무슨 취지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모르게 되는 겁니다. 제가 그것을 알려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뒤집는 것은 그걸 하나님께서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싫어하는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 그것도 중한 벌을 내린다는 차원에서, 심판이죠, 심판이라는 그 행사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모아져야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뭐냐를 설명해 드릴 텐데 우선 22절 끝부분부터 먼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재앙, 벌써 엄청난 이야기고 부정적 개념이죠.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참 이상하지요? 재앙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왜 그게 위로가 되지요? 우리가 세상 적으로 위로받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서 받는 위로라는 것은 자기가 계획한 것이 깨졌거나 없어졌거나 무너졌을 경우에 그래서 통곡하고 싶을 때 그 깨어진 이상으로 내가 기대했던 것을 원상복귀해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위로라는 말을 합니다. 집에 도둑이 들어서 한 2천만 원을 날렸는데 누가 로또복권을 선물했는데 그게 당첨이 되어서 4천만 원이 들어왔다. 그럴 때 우리는 위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손해 본 것을 저쪽에서 넘치도록 보상받는 것을 위로라고 하거든요.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위로입니다. 우리가 위로라고 할 때는 항상 뭘 주시하느냐 하면, 주시할 때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 절대로 다쳐서는 안 되고 손해 봐서는 안 된다는 내 테두리가 있는데 그것이 커지고 잘되고 유명해질 때 우리가 위로를 받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내릴 때는 현재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그 위로가 아니고 그 재앙을 보면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새로운 인간형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나올 수 없는, 얼굴 맞대고 백 년 동안 해도 나올 수 없는 그 인간형이 뭐냐,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과 저주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 사람이 출현하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한 그 이상이죠. 뭘 상상해도 그 이상으로 하나님은 자기 뜻을 등장시킵니다. 재앙을 가지고 위로를 받는다는데 우리가 먼저 상상을 해 봅시다 우환이 있는데 위로를 받았다? 어떤 것일까요? 전에 제가 목회할 때 애가 몸이 아픈데 감사하다고 감사헌금을 강대상에 올리는 봉투를 여러 번 봤어요. 그럴 때 제가 그 봉투올린 사람의 속마음에 대해서 상당히 거북스러웠습니다. 왜 그런가, 꼭 불교 같아요. 불교라는 것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마음이 정화가 되니까 이렇게 정화되도록 어려운 사태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라는 것이죠. 이것이 깊은 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초월적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이 갖는 마음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비웠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감사한다, 그런 레벨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범상한 사람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놀라운 신앙적경지라고 내미는데 그것은 그냥 불교일 뿐이지 복음도 아니고 하나님 뜻도 아닙니다. 억지를 부리지 마세요. 몸 아픈데 안 아픈 척 하는 그것은 위선이고 가증스러운 것이지요. 그렇다면 뜸들일 것이 없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차원인가? 신약성경의 예를 가지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지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바다를 배타고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서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탄 배를 뒤집어놓을 판국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다급해서 예수님과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 안으로 들어오는 물을 퍼냅니다. 아무리 퍼내도 파도는 잔잔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이젠 죽었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아요. 그들이 애를 쓰다 잠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25절에 보면 “예수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태도는 참으로 솔직한 거예요. 지금 죽게 되었기에 죽게 된 거예요. “죽게 되었지만 이것도 주의 뜻이니 기도합시다.” 이런 것이 없어요. 그냥 죽게 되었고 다급하니 그래서 예수님을 깨운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라는 것은 우리가 미리 위로받을 만한 마음자세를 갖추었는데 위로가 오지는 않아요. 당황스럽고 다급하고 힘들고 어려운 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냥 인간이 인간답게 믿음 있다는 것? 어떤 환경이 닥치면 그 믿음 있다는 것도 다 깨집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이 일어나서 제자들보고 책망을 하지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무서워서 무섭지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배가 뒤집어지려고 하는데 안 무서워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천사지요. 그래서 무서워한 거예요. 그런 제자들을 보고 하는 말이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룰 때는 제자의 고상한 면, 훌륭한 면을 보고 축복을 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당황하고 허둥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 책망을 하시면서 “너희들은 이것밖에 안 돼.”라는 것을 솔직하게 다 까발리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겁니다. 그리고 책망을 주실 때 제자들은 그 책망을 가지고 주님에게 따질 마음이 없습니다. “무서워서 무서워했는데 왜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십니까?” 이렇게 할 맘이 없어요. 제자들은 책망이고 뭐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파도가 배에 넘치고 배가 뒤집어질 판입니다. 그런 책망은 신경 쓸 겨를도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세자로 이야기합니다. 심각함, 또는 다급함. 예수님이 이해되는 경우, 하나님이 이해되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심각함과 다급함 속에서 그동안 자기를 위장해 왔던 모든 믿음 소망 사랑이 다 껍데기에 불과함이 완전히 드러날 때 오늘 본문 21절에 나오는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라는 말씀이 실감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곱게 오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소꿉놀이판을 완전히 뒤집는 식으로 오시는구나, 그냥 우리하고 좋게 이야기하려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 버리지요. 그 뒤집는 속에서 우리는 살길이 막막하고. 명예고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다 사치에 불과하고 깨질 대로 다 깨졌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보시고 책망하시면서 그 다음에 바다를 향하여 외칩니다. 바다를 꾸짖으면서 “바다야, 잔잔해야지!” 꼭 사람에게 하듯이 “바다야, 파도야! 조용히 해.” 꼭 집의 강아지 다루듯 하지요. 그렇게 하니까 그 말씀에 바다가 그만 조용해 졌어요.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위로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그걸 보고 “야, 바다가 잔잔해졌다. 이젠 우린 살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저 분이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마태복음 8장 27절의 말씀입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방금 전까지의 다급함과 심각함, 이런 것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지고 뭐가 보이느냐, 예수님만 눈에 보입니다. “누구십니까? 대체 어떠한 분이기에 우리의 이해력을 벗어나 있습니까? 그러면 그동안 내가 예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안다. 이 모든 것이 다 아는 게 아는 게 아니라 오해를 하면서 마치 믿는 척이나 하면서 살아왔군요.” 라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누구시기에 믿음 없는 자에게, 믿음 없다고 책망을 받았으니 열두 제자는 다 믿음 없는 겁니다, 이 믿음 없는 자에게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믿음 좋은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가 아니라 소망 가득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이 다 위선이고 거짓인데도 불구하고 저분은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다 껍데기로 장착하고 있는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는가, 이걸 두 자로 ‘위로’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위로에요. 마음을 낮춰서 겸손하면 위로받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도록 매일같이 놀라는 거예요. 놀라는 그 와중에서 주님이 누구신가도 놀라지만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위선적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한 자신의 정체도 밝혀지는 그것에서도 또 놀라지요. 강도가 평생 동안 강도질 했다는 그것이 아쉬운 것이 아니고 주님이 평생 동안 강도질한 나를 오늘 밤에 천국으로 이끄시는가 말이지요. 그 점이 더 놀라운 점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주님이 하시는 일에 놀람이 없으면 우리는 자꾸 소꿉놀이를 만들어놓고 그 소꿉놀이의 자기 뜻을 가지고 마치 내 뜻이라고 우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거 다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여, 이것 지켜주세요. 이것은 하나님이라도 손대면 안 됩니다. 이것 없이는 나는 불행해집니다.” 맨 날 자기 생각에 몰두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천국 사람의 본 모습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베푸시는 것은 새로운 인간형을 출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난데없는 재앙을 하나님께서 앞장세워서 그들에게 쳐들어왔는데 모든 상식으로서는 거기에 대해서 울고불고 해야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22절 끝에 보면 “위로를 받는 너희”라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 위로라는 것은 뭐냐, ‘하하, 우리가 생각했던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이런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구나. 야, 우리는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통해서 우리는 찾으려도 해도 찾을 수 없었던, 아무리 노력해도 발견될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라는 기쁨으로 위로받는 집단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구원하고자 했던 남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아직 제가 이야기하지 않은 집단이 또 있어요. 오늘 본문 다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렸다는 이 대목이 나오지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이 재앙과 심판을 보고 도리어 위로를 받고 참 하나님이 누군가를 이제야 알았다, 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 두 개의 집단만 는 것이 아니에요. 직접 하나님의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받아서 아주 처참하게 망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그러나 그 가운데 면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러니까 이들은 칼과 짐승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서 된통 받아서 죽어야 되는데 안 죽고 그 죽음을 면한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 나머지 사람들은 혼이 났지요. 그걸 보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 겁니다. “아이고, 저 사람들이 자기들 딴엔 하나님 잘 믿는다고 하다가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한테 저렇게 된 통으로 얻어터지는구나. 안됐다만 저걸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전혀 다른 뜻이었구나.” 하는 것으로 위로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이 버릴 것이 없다니까요. 하나님에 의해서 어떻게 징벌을 받든, 아직까지 징벌을 안 받았든 진짜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이이여, 저는 저런 심판을 안 받았으니 천만다행입니다.”가 아니라 ……, 끝으로 진짜 중요한 대목에 왔습니다. “나는 이런 심판을 안 받으니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것이 아니라 심판을 당하는 자나 심판이 면제된 자나 심판을 보고 하나님을 아는 자나 그 어떤 자라도 모두가, 새로운 구원받은 사람 모두가 우리가 예상했던 그 뜻은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하나님 자체로만 늘 기쁨과 감사와 위로가 되는 인생, 그것이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입니다. 하나의 소박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대구시 변두리에 채소 많이 가꾸잖아요. 대구시민들도 먹고 그 채소가 서울 가락시장도 가지요. 자기 먹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농부가 비닐하우스에서 대파를 키운다 합시다. 농부가 그 대파를 도시 사람들에게 팝니다. “대파 한 단에 2천원입니다.” 혹은 요즘 상추 한 박스에 6천 원 한답니다. 뜯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6천원주면 한 박스 준대요. 그런데 대파를 파는 사람이 “제가 대파를 팔 테니 이 대파 가지고 다른데 쓰면 안 되고 전 지지는 데만 쓰세요.”라고 하면서 대파를 팝니까? 아니지요. 산 사람이 대파를 가지고 전을 지지든 간장 찍어먹든 라면에 넣어먹든 그것은 대파 산 사람 맘 대로에요. 그런데 대파 파는 사람이 ‘아이고, 저 대파가 내 자식 같은데 저게 팔려나가서 칼날에 썰리면 얼마나 아프겠나?’ 그것은 생각 안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파로 보는 거예요. 우리를 하나의 파나 상추로 봐서 전 지져먹든 삶아먹든 뭘 하던 간에 그것은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은 사람들을 비닐하우스에서 지배되는 하나의 대파로 보자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휴, 난 다행이다.’라고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그냥 대파를 가지고 전을 지지든 삶아먹든 칼로 썰어서 장을 찍어먹든지 그렇게 하시는 그 솜씨, 그렇게 하시는 그 분을 안다면 그것을 충분하고 그것을 감사하고 그것으로 위로를 받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열 두 제자가 바다에 빠질 뻔 했습니다. 그걸 계기로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을 새롭게 알았어요. 그렇다면 종전까지 식겁했던 그런 마음은 잊어도 괜찮은 거예요. 왜, 이제는 풍랑이 일고 뭐가 일어나도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았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할 분과 같이 동행한다는 것, 이것을 새롭게 알았으면 언제든지 감사하고 기뻐하고 위로가 될 수밖에 없는 생활, 그것이 곧 천국생활이에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서울에 영훈 국제중학교가 있어요. 합격생을 뽑는데 합격될 사람 미리 다 정해놓고 점수를 맘대로 조작했어요. 미리 정해놓지 않은 애가 점수가 높으면 깎아버리고 정해놓은 애가 점수가 낮으면 올려버리고, 이런 식으로 합격자를 다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서 점수를 조작해서 다 부정입학시켰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저것이 천국이다.’ 천국은 그렇게 해서 건져가는 겁니다. 이미 합격자 다 정해놓고 그 정한 기준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냐를 알면 돼요. “저 분이 어떤 분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예수님을 아는 순간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꼬이든 그 꼬인다는 말 할 자격도 우리는 안돼요. “주여, 우리 인생이 이렇게 꼬였습니다.” 그렇게 말할 자격도 우리한테는 없어요.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면 그것으로 평생 우리는 받을 위로를 이미 다 받은 겁니다. 합격자의 모습, 구원에 합격한 모습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 저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바로 그것이 모든 일에 감사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사람을 통해서, 바로 이런 성도를 통해서 세상 죄가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이며, 이런 현실이 비로소 이들의 입을 통해서 제공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하나의 대파처럼 사용하시되 주께서 원하는 대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지식으로는 알았지만 왠지 마음으로는 와 닿지 않았던 이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실한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살던 저렇게 살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행복한가, 얼마나 불행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날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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