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포도나무의 가치(겔15;1-8)이근호130529

아빠와 함께 2013. 5. 30. 19:34

 

포도나무의 가치(에스겔 15:1-8)

음성       동영상

 이근호 13-05-29 21:20 

포도나무의 가치

2013년 5월 29일                        본문 말씀: 에스겔 15:1-8

(겔 15: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5:2, 개역)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겔 15:3, 개역)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겔 15:4, 개역)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겔 15:5, 개역)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겔 15:6, 개역)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수풀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지라』

(겔 15:7, 개역)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5:8, 개역) 『내가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을 두고 포도나무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 어떤 나무보다 더 고귀하게 보존해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포도나무에 불을 보내어 다 태워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포도나무의 가치가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신명기 29:29에 보면,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오묘한 일과 나타난 일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란 나타난 일에 해당됩니다.

이 나타난 일이란 곧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역사 속에 속한 자들이 역사를 읽어낸다는 것은 항상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역사를 끝장내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든 영원토록 이어보려고 하고 그 작업을 정당화해보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 읽기를 용납하지 않으려 하십니다. 끝장내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가 애초부터 ‘끝’을 말하기 위해서 지상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는 이러한 끝에 대해서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시작에서 출발한 그 여정 위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끝은 아니니 끝에 대해서는 그때 가봐야 한다는 식으로 자기 역사를 보존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조성되어 가는 이스라엘은 그런 일반 민족의 역사관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끝이 미리 삽입되어야 합니다. 즉 인간세상의 끝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이 끝의 개입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평면으로만 세상을 보던 그것이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모세 뒤를 일률적으로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모세 곁에 있다는 것이 같은 팔자, 같은 운명을 공유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유치원 선생님 뒤를 유치원 아이들이 함께 붙어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에 그 어떤 제자도 같이 구름타고 올라가지 못하고 그냥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아무리 붙어다니려고 해도 실패합니다. 이것은 곧 육은 영의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따라서 구약 때처럼 같이 붙어다닌 그 역사적 현실을 가지고 그것을 ‘오묘한 일’에 속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즉 불로서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그 역사가 오묘한 일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절망입니다. 그동안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시도한 모든 것이 다 무효로 돌아가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역사를 일구기 위해 애쓰는 것만큼이나 오늘날 우리들도 이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쏟아 붓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끝을 순순히 용납하지 않으려합니다. 내가 없어지면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삶의 조건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모여야 산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혼자서는 필요한 것들을 얻어낼 수도 없고 기본적으로 외롭습니다. 말할 상대가 있어야 하고 기쁨과 슬품도 같이 나누고 싶어합니다. 이런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것이 국가요 민족입니다. 따라서 나라와 민족이 깨어진다는 것은 곧 개인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다른 점은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끝의 세계를 맛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숨을 거두는 식의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저주가 무엇이며 영원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체험해야 하는 민족입니다. 즉 두 종류의 죽음을 다 경험하는 겁니다.

이러한 경험은 이스라엘에게서 자기 선택을 통해서 비로소 나타나는 위기로서 파악이 됩니다. 즉 사람은 뭔가를 판단하게 마련이고 선택하기 마련인데 무엇을 선택하던 거기에는 끝이 제공하는 위기가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이 지상에서 역사를 일구어나겠다는 그 강력한 의지 자체가 영적 세계와의 단절된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성도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 결과는 이 지상의 삶에 대해서 희망과 기대를 가져서는 아니된다는 교훈을 제공하게 됩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대해서 기대를 한다면 성도가 무엇을 결정하든지 간에 실망으로 이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주선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두 가지의 죽음에서 영생으로 통하는 쪽으로 이끌어주기 위함입니다. 

새의 양날개처럼 뚝 떨어진 두 극단으로 마감되는 최후가 인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넓은 길, 곧 멸망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좁은 길, 곧 생명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이 길을 두고서 사람들의 선택은 항상 넓은 쪽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포도나무의 취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조치와 더불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2:17-18에 보면,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의 모든 선택은 영적 세계로의 진입에 실패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조치하십니다. 이 택한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나무의 저주에 같이 뛰어들어와서 원래 포도나무가 지니게 될 축복을 완성시킬 분이 따로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즉 역사라는 이름의 ‘나타난 일’에 참여하신 ‘오묘한 분의 일’입니다.

이 분의 완성에 함께 참여하지 아니하면 누구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공하신 예수님의 피와 살이 포도나무의 절정이요 곧 끝의 실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끝은 예수님에 의해서 정리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만이 영원한 한쪽 끝인 천국에 들어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의 위기가 곧 사랑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2강-에스겔15장 1-8(포도나무의 가치)13052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5장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5:1-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수풀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찌라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봤습니다.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맺혀야 되고 열매 없는 포도나무는 잘리게 되어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포도나무를 심어놓은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이 어느 쪽으로 공격해서 들어가는가, 하나님의 불은 무엇을 태우는가, 하나님의 불의 태움을 당하는 것이 뭔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때 포도나무였는데 아무 쓸모 짝이 없다고 판정받아서 이제는 불이 계속 일어나서 불타야 되는 불쏘시개로 포도나무가 쓰였다는 거예요. 이것을 에스겔이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들 포도나무지?” “그럼요, 포도나무지요.” “다른 나라는?” “다른 나라는 포도나무가 아니에요. 우리는 포도나무에요.” 그런데 그 포도나무가 열매가 없다면 다른 나무보다 뛰어나다고 할 자랑이 될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불이 나오고 결국 하나님께서 최종정리하기를, 포도나무로 너희가 있었던 것은 불이 무엇을 향하여 공격하느냐의 그 명백한 이유를 보여줄 수 있는 근거로서 너희가 한때는 포도나무였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대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나은 점이 바로 그거예요.

자체적으로 포도나무가 열매가 있어서 좋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직접 다룬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쓰인다는 점에서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만큼은 진리에 노출된 현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그냥 우리끼리 모였다,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그 당시 이스라엘이 아니고 지금 현대에 와서는 우리끼리 모여서 살아가게 되면 그것이 곧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유대나라를 진리에 노출시키는 역사를 만드는데 그것은 곧 끝이라는 것, 양쪽 끝에서부터 태워서 전체를 다 불태워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뭐냐 하면, 마치 비행기 날개나 새의 날개처럼 모든 인간은 서로 확연하게 모양새가 다른 두 지점, 양쪽으로 다 몰리고 쏠려서 수렴되는 것으로 최종 정리가 되는 거예요. 이 이스라엘 유대나라가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끝이 있다는 겁니다. 그 끝을 하나님께서는 유대나라에 미리 보여줬다는 점, 그 끝이라는 것이 어떤 식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하게 되면 끝이 된다는 것을 말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서 확실하게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유대나라의 존재이유입니다.

사람은 끝에 가기까지는 끝이 아니라고 우기는 버릇이 있어요. 생각이 그것밖에 미치지 못합니다. “끝이 아닌데 네가 어떻게 끝을 알아?” 그런데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렸잖아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것은 끝이 아니고 끝으로 가는 중간 노정에서 한때 있었던 일이다.’ 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불 내린 사건을 되풀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해놓은 끝 지점에서 말씀이 날라 와서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말씀이 떨어진 이곳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끝이 들이닥칠 때 막상 유대나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끝을 어떤 식으로 파악할 수 있느냐, 그것은 그들이 선택을 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위기가 닥치게 되는 겁니다. ‘나는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이것을 선택했다.’ 무엇이든지간에 선택을 했을 때 거기서 위기를 초래하게 되어 있어요. ‘빨간 통과 파란 통이 있는데 어느 것을 선택하면 유리할까? 그래, 빨간 통을 열어야지.’ 그러면 빨간 통을 열었기 때문에 그 끝이 그들에게 들이닥치고 ‘전에는 빨간 것을 열었더니 망했어. 이제는 파란 것을 열어야지.’ 하고 파란 것을 열었더니 또 끝이 그들에게 들이닥치죠.

그러니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불사르게 되어 있는 포도나무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불사르게 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나름대로 이스라엘과 유대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들의 모든 지혜와 역량을 동원해서 역사를 이끌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어떤 선택적인 행위를 해도 그 선택 하나 하나 할 때마다 끝이 품어내는 위기를 자초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나라 뿐만이 아니고 오늘나라 우리 성도에게 마찬가지입니다. ‘나 이제 예수 믿었다. 남들 예수도 안 믿는데 나는 예수 믿었고 예수님이 보호하시니 이젠 이 땅에서 보란 듯이 잘 살아봐야지.’ 하고 세상에 나가게 되면 그 한발자국 한 발자국 디딜 때 마다 자기가 선택한 그 선택이 위기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예상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죠. “어쩌라고?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은 저보고 어쩌라는 말입니까?” 주님께서 “네 자체가 끝이다.” 네 자체가 끝임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을 알았으니 이제 슬슬 새롭게 한 번 시작해봐? 새 인생 한 번 꾸려볼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술고래가 술 끊었다고 해서 ‘이젠 술도 끊었으니 하나님이 나한테 좋은 날 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술 끊었다는 선택이 위기를 자초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에게 특수한 건데요, 그들이 결정하고 판정을 내리고 뭔가 이것이다, 한 것이 결국 끝을 접촉하는 체험의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 체험의 순간이 될 때 그 속에 들어가면 새의 양 날개처럼 끝 지점에서 비로소 구분되는 그 세계를 그들은 맛보게 되는 겁니다. 세상이 모두 끝났을 때 두 부류로 세상은 분류가 됩니다. 이쪽은 양이고 저쪽은 염소, 이쪽은 좋은 고기 저쪽은 나쁜 고기, 이쪽은 천국 갈 사람들이고 저쪽은 지옥 갈 사람들, 맨홀 뚜껑을 열어야 비로소 그 경험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에 의해서 그들은 남이 겪지 않은 어떤 종류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요, 그 체험이란 두 종류의 죽음을 한꺼번에 체험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지옥체험도 하게 되고 천국체험도 하고 두 개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지옥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다른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농담이고 장난이고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 바쁘면 안 지켜도 되고 여유 좀 되면 지키는 척 하면 되지만 정작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안 지키면 그것이 바로 지옥으로 집결된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거지요. 그러니 이것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목숨이 끊어지는, 숨 거두는 죽음이 아니고 양 끝, 새의 양 날개 끝 지점에 있는 진짜배기 죽음, 지옥 가는 죽음을 다른 민족과 달리 그들은 느끼게 되는 겁니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죽는다는 뜻이 아니고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죽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옥에 간다는 지옥체험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준비한 용서하는 장치,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그 은혜를 맛보게 되면 지옥에 가야 될 인간이 저쪽 끝 영생, 영원한 복락이 주어지는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없이 주어지는 행운이라서 그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헉,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떻게 저 깨끗한 천국에 내가 들어가서 산다는 말인가? 저 깨끗하고 완벽한 나라가 내 나라란 말인가?’ 놀라 자빠질 정도로 엄청나고 상상도 못할 정도의 큰 행운을 가져다주는 그 천국으로의 집결, 그것도 주님의 용서 속에서 체험케 되는 겁니다.

양 극단의 체험을 한꺼번에 다 맛보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특혜입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오늘날로 한다면 불신자에게는 이것이 없어요. 오직 신자에게만 양쪽 끝, 지옥이 무엇이며 천국이……, 천국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황송스러워요. 왜, 너무나 완벽하고 완전한 흠도 티도 없는 세계를 주께서 이 추잡하고 세상에서 온갖 짓거리를 다 했던 더러운 우리를, 그 완벽하고 깨끗한 나라에 무상으로 그냥 넣어준다는 것, 이것은 생각만 해도 황공무지로소이다, 생각만 해도 이 세상에서 불평한다는 것 자체가 철이 없어도 보통 철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 체험을 하게 될 때 죽어야 될 인간, 죽어야 될 인간이 어떻게 방향이 저쪽으로 바뀌었는지 저쪽으로 방향이 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앞에, 오늘 본문대로 하면 “포도나무야”라고 하는 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지시 앞에서 그들은 두 개의 죽음을 한꺼번에 다 경험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는데요, 에스겔당시에 포도나무야 너는 망한다, 이것은 누가 들어도 이스라엘 멸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 같으면 ‘멸망,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의 불에 탄다면 더 이상 하나님과는 볼일이 없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겠다는데 내가 하나님보고 살려달라고 할 필요도 없네.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버렸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버리면 그만이겠지.’라고 오기가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런데 신명기 29장 29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오묘한 것은 항상 숨겨져 있고 하나님께 속해 있어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뭐냐, 그 오묘한 것이 역사화 되어야 돼요. 오묘한 것이 이 지상에서 역사 화되기 위해서 친히 이스라엘 역사 만들기에 하나님이 주도 적으로 관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 역사 화하는 하나의 과정이 뭐냐, 이스라엘 멸망에요.

그러면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우리가 멸망한다고? 끝났네, 끝났어. 하나님이 멸망시킨다면 멸망당해야지 무슨 별 수가 있겠나. 그래 나도 이제는 하나님 별 볼일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그렇게 밖에 더 하겠나.” 할 것이 아니라 나타난 것이 오묘한 것은 아니니까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 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그것이 왜 오묘한 일에 속하는지를 알아야 돼요. 우리는 기껏 내가 망한다는데 망하는 나를 가지고 주께서 오묘한 일을 성사시키는 재료로 허락하시는 그 깊은 의미가 뭐냐는 겁니다.

제가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출애굽 할 때 홍해가 갈라졌잖아요.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모세 따라서 홍해바다 들어가서 나중에 그 바다를 건너왔잖아요. 꼭 유치원 애들이 선생님을 졸졸 따라서 가는 것처럼, 병아리가 엄마 닭을 따라가는 것처럼. “병아리 반 따라 하세요. ‘참새’ 하면 ‘짹짹’ 하는 거예요.” 그것처럼 모세가 참새! 하면 히브리인들은 그 뒤를 짹짹! 하면서 따라간 거예요. 출애굽 당시에는 그냥 사람들이 그냥 땅 위에서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졸졸 따라다닌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모든 것은 육이고 육에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볼 자가 없다고 했거든요. 구약의 홍해는 홍해바다를 건너왔으니 그들은 졸졸 모세 따라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 제자들이 졸졸 하늘로 따라서 은하철도 999처럼 막 올라갔습니까? 구약 때는 모세 옆에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때는 예수님이 가시고 난 뒤에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냥 사람들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고 주님 혼자 올라갔습니다. 따라 갈 수가 없어요. 이것이 오묘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나라가 있구나. 그런데 에스겔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망한다? 망하면 너는 어디 가서 살래?” “나는 이집트에 가서 살래.” “너는 어디에서 살래?” “나는 저 터키에 가서 살래.” “그래, 우린 이제 망했으니까 흩어지자.” 예루살렘이 망하면 포로 잡혀 가든지 도망을 치든지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든지 그 자리에서 흩어지면 어디에 가든 다 있게 되잖아요. “우리가 다시 70년 뒤에 모이자. 예레미야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70년 뒤에 우리가 돌아온단다.” “그래 그 때 다시 돌아오기로 하자. 우리가 늙어서 못 돌아오면 자손들이라도 돌아오게 하자.” 그렇게 해서 모이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역사적 시절은 이제는 끝나는 거예요. 그것은 나타난 거예요. 나타난 것은 역사로 마감되고 오묘한 것은 역사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에서 묵시가 단절되어 있어요.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나라는 이스라엘, 그런데 에스겔은 ‘이스라엘은 멸망한다.’ 멸망하면 어쩌지? 끝났구나.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 안 믿지.” 그러지 말라는 말이지요. 예수 믿는데 갑자기 암 걸렸다. “이제는 하나님이 날 죽이는구나. 그러면 죽지 뭐. 내가 살고 싶은데 죽이니 나도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지.” 이것은 역사라는 말이지요. 자기의 역사를 표면적으로 자기가 판정한 것밖에 안 된다는 말이지요.

김기림이라는 시인이 있어요. 1930년대 상징주의 계열에 속하는 시인인데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적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김기림, 나비와 바다> 다시 읽어볼게요.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적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무슨 말이냐, 흰 나비가 바다를 갈 때 동해바다의 깊이가 얼마인지 아무도 그 흰나비에게 알려주지를 않지요. 만약 사람 같으면 “그 바다 깊어서 가다가는 빠져죽어.” 이미 사람에게는 수심을 알려주니까, 수천 미터의 깊이를 알려주니까 한 번 빠지면 죽는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런데 흰 나비한테는 깊이가 필요 없다니까요? 햇빛에 반짝이는 그 포말만 보면 그만이에요. 그러니 바다가 무서운지를 모르는 거예요. 흰 나비가 날면서 ‘내가 바다에 빠지면 다시 빠져나올 수 있겠나? 대체 저 수심이 얼마일까?’ 이런 것을 걱정하는 흰 나비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김기림 시인이 하는 말은 “세상을 너무 깊게 보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사전에 다 깊이 알아버리면 어느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사전에 깊게 봐버리면 어느 것 하나 안 무서운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차라리 겉만 보는 흰 나비처럼 자유롭게 분방하게 살아보라는 말입니다.

너무 깊게 생각해서 자기 자유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 되지 말고 저 바다를 날라 가는 흰 나비처럼 혹은 갈매기처럼 그 까짓 거 수심 연구할 필요 없이 그냥 힘 빠지면 수심을 알 필요 없이 거기 그 바다에 그냥 빠져죽으면 그것이 인생의 진리가 아니냐, 라고 시인은 이야기 하는 겁니다. 시인은 그렇게 이야기해도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자기 나라가 있어야 돼요. 이 나라라 하는 것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혼자 못살아요. 양복집이 있어야 양복을 입고 이발사가 있어야 머리를 깎고 농사짓는 사람이 있어야 먹고 살고 누가 상추를 키워줘야 상추도 먹을 수가 있습니다.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분업이 되고 각자 필요한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겁니다. 안동의 간 고등어가 왜 있습니까? 안동이 바닷가도 아닌데요. 삼척에서 고등어에 소금 쳐서 상인들이 태백산맥 건너와서 안동장날에 교환하잖아요. 그게 세상이고 사회고 국가고 나라인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나라가 없다는 이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특수한 민족이라서 끝을 경험해야 돼요. 세상 모든 사람은 가족 없이는 못산다, 아버지 없이는 못산다, 특히 남편 없으면 못 산다, 아내 없이는……, 남편은 아내 없이도 잘 사는데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요, 그런데 여자는 또 혼자 살고.

TV보다 보면 옆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우울증 걸리기 일보직전이에요. 미우나 고우나 맨 날 싸우면서도, “집 나가! 너 같은 것 보기 싫어.” 해도 막상 집 나가 보면 본인이 괴로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말이 “있을 때 잘해.”라는 말입니다. 뭔가 더불어 사는 것이 사회고 그때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기쁨과 행복을 담아내는 삶을 살 수 있는데 지금 에스겔에 의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불타버려서 나라가 없어진다면 애초부터 이스라엘나라의 존재의미가 뭐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와 관계있다, 너를 구원하겠다, 내가 너를 복주겠다.” 이 모든 말은 다 빈말이고 거짓말이 되네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계시를 수용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오묘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나타난 것만을 자기 것으로 삼은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하나 나옵니다.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깨닫고 자기가 완벽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인간은 자기가 주어진 조건 밖으로 못 벗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주어진 조건을 이깁니까? 사람들이 열심히 살았네, 나는 착하네, 하지만 그것은 주어진 조건하에서 변명을 늘어놓는 거예요.

그 조건이 달라져 버리면 인간은 졸지에 변합니다. 여유 있는 집안에서 행복하고 사랑받는 가족들 가운데서 엄마에게 효도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달라지면, 그저 자기 앞에 놓인 밥벌이도 급하게 되면 자기의 아름다운 양심이란 지킬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오늘 뉴스를 보면서 좀 새로운 느낌을 받았어요. CJ 그룹의 아들이 일본에 부동산을 가지고 있더라. 그런데 그 부동산이 비자금을 가지고 산 정황이 있더라는 뉴스죠. 그런데 그 제일제당 일본지사장이 그저 남들 보기에는 대기업 임원이니 승진해서 일본 지사장이 되었구나, 하겠지만 그 임원은 일본 가서 무슨 짓을 해야 되느냐 하면 비자금을 조성해야 될 모집책인 겁니다.

만약 그 사람이 우리 친척이라면 “야, 공부 잘하더니 회사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구나. 대체 연봉이 얼마냐?” 하면서 내 아들이니 우리 삼촌이니 하겠지만 막상 그가 해야 되는 일은 비자금 끌어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같은 이야기인데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갈비 집에서 질 나쁜 갈비를 좋은 갈비라고 속이면서 따로 창고 만들어서 6년 동안 공급했다고 나왔어요. 그 갈비 손질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TV에 죽 나왔어요. 그럴 때 우리가 아는 어떤 친척이 서울에서 취직하겠다고 촌에서 올라가서 거기 갔을 때 거기가 범죄단체라면 그 애가 서울 가서 근근이 취직한 그 밥벌이 자리가 날라 가 버리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야, 네 아들 취직했다면서?” 하지만 본인들이 그 조직에서 하는 짓거리가 뭐냐 하면 돈을 벌기 위해서 양심을 팔아야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아무 일도 안하면서 돈 실컷 쟁여놓고 막 쓰면서 사는 것, 그겁니다. 돈을 단 몇 푼이라도 번다고 한다면 그 돈 버는 행위 자체가……, 제가 아까 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가 살기 위해서 한 모든 행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 위기로 들이닥치는 거예요. 엉터리갈비집의 말단 직원이 그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중국산 갈비도 한국산이라고 속여라, 해서 그저 그렇게 했을 뿐인데 만약에 그 애가 촌에서 교회 잘 다니고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그 애는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서울에 올라가서 겨우 취직해서 이제 사랑하는 애인도 있어서 곧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카메라가 들이닥쳐서 다 찍어버렸다면 도대체 왜 자꾸 하나님은 내가 선택한 일을 위기로 만듭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오늘 본문이에요. “불로서 세상을 싸질러버리겠다. 너는 거기에 포도나무다.” 남들은 몰라도 너는 끝을 알고 있어야 해요. 끝은 양 극단 두 개입니다. 지옥행이냐 아니면 천국행이냐, 신약 식으로 하면 넓은 길이냐, 아니면 영생의 좁은 길이냐? 날마다 우리는 그러한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는데 우리는 할 때 마다 넓은 쪽을 선택했고 멸망 쪽을 선택하는 그것을 가지고 주께서는 강제로 위기를 초래케 해서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길, 좁은 길이 보이는 식으로 그 모든 상황을 바꾸고 계신다는 그 고마움, 우리의 종교도 죄고 우리의 신앙도 죄라는 것을 성령께서 일깨워주면서 영생의 길이 보이게 하는 겁니다.

네가 어떤 선택을 했기에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나의 선택에 의해서 너는 구원받는다, 다시 말해서 너는 나에게 포도나무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포도나무의 끝 지점에서의 진술은 뭐냐, 누가복음 22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포도나무가 당해야 될 저주와 부활을 통해서 받아야 될 축복을 이 포도나무에 합류하는 사람에게만 같이 공유해서 체험되고 그 운명에 같이 잔을 마신, 지금 이 자리에서 새 언약의 잔을 마신 너희들의 운명이 된다고 주께서는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압시다. 뭘? 이 세상에 결국 끝이 난다는 것을. 무슨 끝인가? 세상이 지옥이라는 그 끝과 천국이라는 끝, 그 양 끝으로 갈라지는 그 날이 온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천국이 좋다고 해서 천국 골라잡는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옥 싫다고 해서 지옥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 우리로 하여금 나의 선택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주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그 혜택을 입는 그 사람이 이미 주님께서 구원시키신 포도나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돈 벌 때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더불어 협잡해서 나쁜 짓한 대가로 우리에게 푼돈이나마 떨어진다는 사실을 우린 더 이상 감추지 않게 해 주옵소서. 내가 맘 먹고 결정한 것이 늘 상 위기로 찾아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하는 사명자기 때문임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42강-에스겔15장 1-8(포도나무의 가치)130529-이 근호목사.hwp (64.0K), Dow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