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7강-룻기 강해: 없음의 자식
나오미가 보아스에 대해서 철저하게 일거수일투족, 일상을, 하루일정을 전부 다 파악을 해가지고 틈을 노리고 있었어요. 그 틈을 노렸는데, 3장 3절에 보면 나오미가 룻으로 하여금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으라고 하죠. 근데 룻은 그냥 그 집에 가서 이삭을 줍고 노동을 하기 위해서 간 사람이죠. 노동하기 위해서 간 사람에게 굳이 기름을 바를 필요가 있습니까? 그리고 4절에 보면 자기 집에 잘 데가 없습니까? 보아스 집에 가서 자기는 왜 잡니까?
자, 여기서 나오미가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은 결혼을 할 때, 결혼도 율법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나오미는 지금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행위는 율법에 준해서 행하는 정도가 아니고 율법이 이끄는 대로 해야 돼요. 그 중의 하나가 결혼인데, 왜냐하면 이 결혼은 시원적입니다. 시원적이라는 말은 근원적이다. 율법이라는 긴 튜브를 통해서 어디에 당도하느냐 하면은 창세기 2장의 첫 번째 혼인에 당도합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첫 번째 혼인의 시작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결혼한 그 시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혼의 시작을 우리 집안부터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 시작하는 그 의미의 시작을 나오미 본인부터 시작해야 돼요. 내가 필요해서 며느리를 혼인시키자, 이렇게 돼버리면 율법의 긴 튜브하고 상관없이 그냥 자기 자신의 결핍된 것을 채우기 위해서 결혼하는 바가 돼요. 그러나 그 결혼은 시원적이고 근원적인 것, 원래적인 것과 같은 통로의, 같은 튜브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거예요. 결혼이라는 게.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결혼이라는 것을 이런 율법부터 생각하지 않고 마음 맞으면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아니, 혼인하는 것도 율법에 포함이 됩니까? 이런 질문을 스스럼없이 의아해하면서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오늘날 우리 분위기에요.
아니, 결혼하는 것도 율법 속에 있는 내용의 근원을 터치하기 위해서, 접선하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것이 동원되어야 하느냐? 라는 질문. 그 질문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하는 이유는 결혼 같은 것이 인간에게는 쾌快, 즐김 또는 만족도가 최상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혼인하게 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결혼식이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축제보다도 상당히 최상위를 차지하는 이유가 결혼한다는 것에 대해서 축하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누구를 위한 만족도냐? 누구를 기쁘게 하는 것이냐? 이것은 개인적인, 사적인 욕망에 대한 충족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결혼마저 율법에 포함이 됩니다. 결혼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결혼이라는 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처음 인간이 혼인했던 그 자리로 데려가서 우리와 이렇게 연결이 되어야 해요. 율법이라는 긴 튜브, 관을 통해서 여기에 당도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율법 밖에는 시간이 흐르지만 율법 안에는 하나의 시간, 하나의 시간으로 거기에 고정되는 겁니다. 하나의 시간으로. 그래서 이 시간 자체가 의미가 없이 어떤 시간대이든 첫 번째와 접촉되고 접선되어야 되는 거예요. 이 율법이라는 것이.
그래서 이렇게 아세요. 결혼은 시원적이다. 또는 시원을 찾아가는 것이다. 시원과 닿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그렇지 않고 지금 서두르고 있습니다. 저 유력한 남자를 놓칠까 싶어서 자기 며느리를 강제적으로 먼저 들이밀죠.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룻은 그냥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욕하고 기름 바르고 의복입고 그 사람 발치에 있다가 밑에서부터 서서히 이불 들어서 낮은 포복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3장 4절에 보면. ‘어떤 남자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여자가 설치는데 거부할 남자가 어디에 있겠느냐?’ 이거는 나오미 자기 생각이고.
그런데 3장 8절에, 보아스가 밤중에 보고서 깜짝 놀랐어요.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있었어요. 보니까 아는 사람이었다 이 말이죠.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보아스는 결혼 자체를 율법으로 봅니다. 율법으로 보기 때문에, 율법으로 본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이 결혼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인가를, 그걸 따지는 거예요. 어떻게 따지는가 하면은 “나와 당신과 결혼할 수도 있어. 하지만 율법에 보게 되면 후견자라고 할 때에 자기 말고 자기보다 먼저 권력을 가진 어떤 인물이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룻 당신과 굳이 결혼을 한다면 나라는 남자 말고 나보다 순번이 앞선 남자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율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혼인 속에서 율법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율법 따라서 혼인하겠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이유는 뭐냐, 개인적인 어떤 선택의 만족에,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당신과 결혼을 하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맘에 들었다, 내 스타일이다, 당신이 확 땡긴다, 당신은 이쁘다, 라는 그런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아무리 당신이 맘에 들든지 안 들든지 간에 율법에 의하면 당신과 먼저 혼인할 수 있는 권리는 다른 사람에게 따로 있다는 거예요.
자, 여기서 그러면 나오미와 보아스의 견해 차이를 한번 봅시다. 이쪽은 나오미, 이쪽은 보아스. 나오미의 특징은 뭐냐, 본인이 관찰해요. 본인이 관찰자고. 보아스는 한명의 고정된 여자를 두고서 남자 후보감이 둘이 생겼잖아요. 1에 대해서 2가 생겼어요. 두 명이. 그럼 하나의 여자는 고정된 겁니다. 그럼 남자는 두 명이니까 확정되지 않았어요. 그럼 관찰은 누가 해요? 이 여자가 관찰하게 하는 거예요. 그럼 보아스는 뭐냐, 관찰당하는 자예요. 관찰당하는 자. 결정권은 여자가 가졌다는 거예요.
두 번째는 나오미는 본인이 해석하는 자. ‘저 보아스 같으면 우리 집안이 살 수가 있다.’ 해석하는 자. 나오미는 그렇게 생각하고. 보아스는 뭐냐 하면은 룻에 의해서, 순번이 자기가 두 번째니까 한 명이 와서 그 남자가 룻이라는 여인보고 “저와 결혼해주겠습니까?”라고 하면 이 보아스는 간단하게 자기가 물러갈 용의가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그 룻에 의해서 해석당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오미는 보아스를 선택했어요. 나오미는 선택하는 자. 보아스는 자기가 룻한테 선택당하는 자.
바로 내가 관찰해서 결혼하고 내가 해석해서 결혼하고 내가 선택해서 결혼하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음란이라고 하는 거예요. 음란. 이게 음란이에요. 하나님의 창조하신 혼인과 접촉되지 않는 결혼. 인간의 욕망이 선행되는 결혼. 그 결혼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게 되면, 이렇게 따지게 되면 모든 결혼은 전부 다 음란한 결혼이에요. 하나님이 인정 안 하죠. 근데 사람은 뭐냐 하면 사람은 자기 즐거움만 생각하지 율법, 그 딴 것이 왜 내 결혼을 방해하고 간섭하느냐, 애초부터 율법 제켜놓고 자기들이 기분 좋아서 결혼했는데.
요한복음 8장 41절에 보면, 먼저 찾으신 분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먼저 찾았으니까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한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보고 “너희 아비는 죄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34절에도 보면 “너는 죄의 종이다.” 죄의 자식이라 이 말이죠. 이렇게 하니까, 우리는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서 지금까지 우리 유대민족을 지켜왔고 이끌어왔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브라함 자손, 그것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정말로 너희가 하나님에게 선택된 사람이라면 나,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봐야 될 게 아니냐? 라고 하는 겁니다. 나를 믿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나를 보냈으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내가 메시야인지 알아봐야, 그래야 너희들은 죄 바깥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죄냐, 죄 아니냐고 하는 것은 뭐 불의를, 나쁜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죄의 기준은, 하나님이 제시한 그 기준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해석을, 내가 예수님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해석 당함이 나의 인식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게 주의 백성입니다. 내가 보는 대로 판단하고 해석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관찰당한 그 모습이 나의 새로운 모습으로 교체가 되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보는 방식으로. 십자가에서 나를 대하는 방식이, 그 방식이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선택과 새로운 해석으로 교체가 될 때,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로 난 자, 하나님께로 난 자가 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복음은 신약이기 때문에 누적되어 있는 해석 층이 상당히 깊어요.
반면에 이렇게 룻기는 구약이기 때문에 신약보다는 깊지 않고 얕아요. 구약에서는 뭐냐, 후보감이 둘이죠. 고정되어 있는 여자는 하나인데 후보감 남자가 둘이라면 고르는 쪽은 여자죠. 여자가 고르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보아스가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당신이 먼저 대시했잖아요.”라고 해도, 만약에 율법에 의하면 선행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딱 보고 룻에게 반해가지고 “나랑 결혼합시다.”라고 딱 하면 보아스는 자기의 적극적인 대시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이거는 철저하게 내가 당신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당신이 선택했기에, 내가 선택되는 그런 남자이고 싶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여자의 후손에게 난 합당한 짝입니다. 여자의 후손에서 난 주도권은 여자에게 있고 남자는 선택당하는 거예요. 물론 여자가 개인적인 야망을 위한 여자라면 소용이 없고 율법에 의해서 예외, 초과적인 존재로 등장해서 선택하게 되면 여자 룻은 어떤 쪽에서 왔느냐 하면은 없음, 다른 말로 하면 율법에 대해서 관심이 없음. 율법 쪽이고 같은 말이 없음 쪽이고 같은 말이 죽음 쪽이고. 이래 되는 겁니다. 예외 쪽이고 초과 쪽이고. 다른 말로 하면 새로움이에요. 새로움에 의해서 선택된 남자. 그러면 주도권이 남자에게 가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가있습니까? 주도권이 룻에게 가있는 겁니다. 룻에게 주도권이 가있거든요. 문제는 나오미는 그냥 자기 이쁜 며느리를 들이밀면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보아스가 거기에 홀딱 넘어갈 줄 알았어요.
다시 룻기로 돌아가 봅시다. 3장 11절에,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절,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무를 자라는 것은 지난 시간에 했던 바로 후견자, 고엘이죠. 이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냥 무른다는 말이 모호해요. 이 무른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가문과 자기 자신의 후손을 포기하기까지 하면서, 자기가 책임질 가문을 위해서 자기가 돕는 자로 나서는 거예요. 그게 무를 자에요.
나오미한테 남편의 밭이 조금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밭을 살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보아스가 물어요. 기업 무를 자에게 “당신은 나오미의 가정에 엘리멜렉이 남긴 밭이 있는데 그 밭뙈기를 당신이 살 수 있습니까?” 뭐 그 정도는 살 수 있죠. 근데 살 수 있다는 말이 그 말이 아니에요. 4장 3절에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4절,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열 명의 장로들을 불렀어요. 증인들을 불러놓고 하는 말이 그것을 돈 주고 살 수 있느냐? 단지 돈 주고 밭만 산다면 살 수 있는데, 5절에 보면 밭만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밭을 사는 날에 그는 모압 여인 룻하고 결혼해서 거기서 낳은 자식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 자식이 아니고 그 집안의 자식으로 인수인계 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제안하는 거예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님을 형님이라고 부르지 못할 용의가 되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실제로 율법은 이렇게 냉혹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만약에 내가 낳은 자식이 남의 집의 자식으로 떡하니 이렇게 가있다면 그 집안을 지날 때마다 창문가에서 두 살 먹은 애가 붙들고 “삼촌!”이라고 부르면 가슴을 치면서 “삼촌이 아니야. 니 아버지야.” 그 동네에 몇 사람 되지 않는데 매일같이 자기 아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삼촌이라고 부름을 받을 때, 한평생 그런 한을 맺고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아무리 율법이지만 나의 쾌락을 다 빼앗아가잖아요. 무슨 이딴 법이 있느냐고 항의할만하잖아요. 따라서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항기를 유발시킵니다. “법이면 다냐? 율법이면 다야?”라고 하면서 우리가 율법을 대하는 순간 나의 조그마한 나의 행복과 기쁨마저 사그리 그것을 짓밟는 율법의 냉혹함에 대해서 우리는 치를 떨게 되어 있어요.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아예 안 보죠. 더 속편하게 성경 안 보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예를 들어서 과수원이 있는데, 과수원에 사과나무 열 그루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 중에 하나가 선악과나무인데 자, 골라서 먹으세요. 아홉 개는 먹어도 되는데 하나는 따먹으면 큰일 납니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열 개 다 따먹어버려요. 왜냐, 다 따먹었으니까 이제 나한테 지적할 게 아예 없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요. 의미가 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율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율법에 쫄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내가 만만하게 보이냐? 너희들 보기에 내가 만만하게 보여?”
우리는 자신이 위반자가 되는 그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원초적으로 그 거리를 두고 잘라버리죠. 내 자신이 어디에, 어디에 비해서 위반자가 맞잖아, 라고 우리한테 지적질 하는 그 근거 자체에서 단절시켜버립니다. 그래야 속이 편하니까. 그게 속이 편하거든요. ‘오늘도 보자.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성경을 읽어보자.’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 없어요. ‘오늘도 내가 안 보는 성경을 보니 주여, 저 얼마나 착합니까?’ 이런 마음으로. 혹시 잠이 안 올 때는 가끔 보지만, 대부분 이거는 아예 성경을 안 봅니다. 계속해서 잘난 존재로 지속시키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게 내 마음에 들어온 악마의 쾌락이니까. 나의 기쁨인 동시에 마귀가 기뻐하는 거예요. “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했어요.” 잘했어요! 잘했어요! 참 잘했어요! 도장 꽝꽝꽝꽝꽝 다섯 개. 참 잘했어요. 일기장에 도장 팍팍 찍는 거예요. 참 잘했어요. 중요한 것은 너야. 하나님보다 너가 더 중요해, 라는 그 본심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내가 편한 게 최고지. 뭐. 하나님 기쁘게 해서 뭐 할 건데. 하나님이 돈을 주나, 떡을 주나, 나 편하게 살면 그만이지. 이게 근원적으로 우리의 욕구의 자아 속에 이게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어요.
따라서 이 욕구는 근원적이고 욕망은 사회적이죠. 공동체적이고. 거기서 우리의 새로운, 더 큰 욕구를 만족할 뭔가가 있을까 싶어서 찾아다니는 하이에나처럼, 굶주린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처럼 매일같이 헤매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욕구의 달성을 위해서 그렇게 시도하죠. 이게 바로 나오미가 시도하려고 하는, 본인이 하이에나니까, 두 눈이 있잖아요. 찾아다니는 거예요. 계속해서 관찰해야 되고 해석해야 되고 선택해야 되고. 이런 의지로 그 다음에 공략, 공격해야 되고. 자기의 룻을 앞장세워서 보아스를 공격하죠. 공격하는데, 어! 웬걸? 그 공격을 율법으로 막아냅니다.
자, 율법이란 뭐라고 했습니까? 없음이죠. 그 당시의 사람들은 율법에 관심이 없으니까.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있으나마나하니까 없음이 돼요. 보아스한테는 이 없음으로 방어를 쳐버립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보아스 입장에서는 율법이 없다는 말은 나는 죽은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거든요. 그래서 후보감 2대 1이죠. 자, 후보감을 할 때 룻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선택하느냐 하면은, 율법을 룻한테 고정시켜놓고 룻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룻과 하는 결혼을 율법이 하는 결혼으로 보아스가 일치시켜버립니다.
그러니까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하고 결혼하는 거예요. 결혼해서 남편에게 아내가 콩나물을 끓여줬다면 그것은 아내가 끓여준 것이 아니고 말씀이 끓여준 거예요. 은혜롭지 않습니까? 물론 때로는 짜기도 하고 그런 게 있지만. 그건 말씀이 약간 아내를 정신 못 차리게 해가지고 오늘은 하다보니까 소금을 더 넣게 했어요. 여러분 식사기도 할 때, “오늘도 말씀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죠. 왜? 양식은 말씀이니까. 광야에서. 만나를 준 것은 만나가 아니라 말씀이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근데 하나님의 뜻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떡을 줘버려요. 떡이 떡으로 보인다면 니가 관찰할 것이고. 떡이 말씀으로 보인다면 새로운 주님의 해석에 의해서 내 해석을 포기한 것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떡이 아니야. 떡으로 보이지만 이거는 나의 착각이야. 이 자체는 만나가 아니고 말씀이야. 왜냐하면 나의 해석은 주님의 해석 앞에서 나는 포기했기 때문에. 그래서 결혼은 뭐냐,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욕망의 포기를 말하죠. 결혼이라는 것은 나의 욕망의 포기.
내 욕망을 포기했을 때 감사와 고맙소가 나오죠. 고맙소! 고맙소~ 이제껏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이 이렇게 살만한 것인 줄 몰랐다는 거예요. 나는 진심을 다했는데 그쪽에서 사기를 칠 줄을 이 나이를 먹도록 내가 몰랐다는 거예요. 그런데 진정한 사랑을 만나서 고맙소에요. 결혼은 상대에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게 포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상대에게서 성질이 나온다고 또 욕하고 신발 던지고 하지 마세요. 상대가 복음을 모르거든 항상 이혼할 준비를 하세요. 아, 이거 어디 가서 맞을 이야기인데. 제가 이렇게 해도 이혼 안 할 줄 알아요. 왜냐하면 사람은 돈 때문에 살기 때문에 돈이 있으면 참고 견디지, 돈이 있는데 이혼할 이유가 없어요.
이혼할 준비를 하라는 이 말은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같이 살아도 이것은 욕망의 정치적 협상에 의해서 그냥 동거생활 하는 것이지 결혼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부부사이는 하나님의 개입, 틈이라는 개입이 있어줘야 해요. 그 틈이 뭐냐 사랑입니다. “나는 당신 앞에 아무것도 아니요.” 그럼 그걸 받아서 상대방도 “나도 당신 앞에 아무것도 아니요.” 이게 매일같이 해서 지루하면 가락을 넣어주면 좋아요. “나는~ 당신 앞에~ 아무것도 아니요~” 그럼 저쪽에서 받아서 “나도~ 당신 앞에~ 아무것도 아니요~” 뭐 이렇게 하게 되면 이게 또 고정화되어서 우상화된다고요. 주의해야 됩니다. 했던 멘트를 똑같이 하게 되면 반복이 되니까. 분위기가 이상하게 살벌하게 되어서 제가 되게 미안한데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 이 모든 것이 개입되는 것, 이것은 바로 나의 있음을 없음 앞에 양보하는 거예요. 그래서 룻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도표를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지금 룻이 어떻게 끝나는가, 이렇게 끝나요. 현재 자식은 없습니다. 왜냐, 시아버지 죽었고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그 집에 자식은 없어요. 자식은 없는데 주님께서 공란, 빈칸, 빈칸을 준비해놓은 거예요. 프레임이죠. 액자 틀. 틀을 준비했습니다. 공란을 준비해야 해요. 왜냐하면 율법이 지속성, 연속성이 되니까. 분명히 현장에서는 자식이 없어요.
여자는 있지만 남자는 없기 때문에, 없는데 주님의 율법이 있잖아요. 자식은 없지만 율법이 있잖아요. 율법의 연속성, 결국은 자식의 연속성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무조건 없어요. 없다면 없음을 낳을 아버지도 여기에 없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도 없어요. 아버지와 혼인해서 자식을 낳을 여기에 어미도 없습니다. 율법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은 율법이 없는 이방 여인, 율법이 없는 이방 여인을 이 자리, 공란에다가 집어넣어요. 이 자리에다가 집어넣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시형제결혼법, 시가 쪽 형제와 혼인하는 시형제 혼인법에 대해서 말씀드렸죠. 시형제 혼인법에서 아들과 며느리 사이에 자식이 없으면, 뭐 아들이 죽었다든지 해서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여기에 며느리가 시아버지하고라도 혼인해서 자식을 낳게 하는 겁니다. 세상에 시아버지하고 며느리하고 동침해서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 세상에! 이런 선데이서울에나 나올 법한 이런 이야기가 다 있느냐 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창세기 38장에 보면 나옵니다. 유다가 가나안 여인, 가나안은 전에 말씀드렸지만 해변가 지역에 있어요. 가나안 여인 다말이라는 며느리와 동침을 해서 베레스와 세라라는 두 자식을 낳은 거예요.
왜 시아버지하고 며느리하고, 근데 이거는 그때뿐이에요. 계속 결혼해서 산 게 아닙니다. 유다와 다말이 동침해서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다고 하지만, 인간에게는 없는 없음의 언약 또는 율법의 원칙, 시형제 혼인법이, 율법이 스스로 움직여서 자식을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이 자식은 없었던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자식이에요. 이것은 무엇을 거부하느냐 하면은 있음에서 나온 자식을 비율법적인 자식으로 간주해버릴 수 있는 기준으로 등장한 거예요. 이래서 선로가 경부선, 호남선으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율법의 재편이 일어나는 겁니다. 율법이 인간을 만나서 스스로 율법이 계속해서 재편되는 거예요. 기존의 율법을 인간이 지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스스로 자기 완성을 위해서, 율법에 대해서 거부하고 있는 인간들과 만나서 새로운 율법을 제시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룻기가 율법에 의해서 등장하는 관계에요. 없음과 없음의 결합에서 없음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없음이라는 표시를 가득 담고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보아스가 등장하고 이쪽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룻이 등장했을 때에, 이 룻이나 보아스나 전부 다 소속이 뭐냐 하면은 육의 소속이 아니고 율법의 소속이 되는 거예요. 율법의 소속이. 율법대로 혼인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나온 자식이 등장한다면 이 자식은 인간의 자식이 아니고 율법이 알아서 낳게 만든 자식이 여기에 등장하는데, 이 자식의 이름이 뭐냐 하면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해서 오벳이 돼요.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이 되면서 바로 기존의 제의중심의 율법체제에서, 제의중심의 제사장, 레위 계통의 제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등장한 왕 체제 중심의 이스라엘이 벌써 사사시대에 그러한 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는 그것이 한계에 이르렀던 겁니다. 제사는 형식적으로 드렸지만 실제로 농사지을 때나 뭐 일상에 있어서나 율법이 전혀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인간으로서는 율법을 지킬 역량이 한계점에 이르는 겁니다. 그러면 왕이 있다는 말은 전에는 제사장과 만났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하나님이 내신 왕과 만나가지고, 하나님과 왕의 관계가 원활하게 되면 백성은 덤으로 태평하게 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고. 왕이 만약에 문제점이 있으면 아무 죄도 없는 백성들도 같이 왕과 함께 파멸에 이르는 그러한 구조와 함께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보기에는 여러분 개인이 법 지켜서 구원을 받을래요? 아니면 내 대신 초월적인 왕이 제대로 왕답게 해서 그 혜택을 입는 게 좋습니까? 우리 개인적으로 어느 게 좋습니까? 개인적으로 왕의 혜택을 입는 게 좋죠. 단 조건이 있어요. 우리가 왕의 백성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왕이 되면 안 됩니다. 내가 왕이 되면 내 왕 됨을 포기를 해줘야 돼요. 내 모든 권한을 왕 되신 분에게 드려줘야 돼요.
더 이상 내 이름 있다는 것이 무의미하도록 내가 그걸 인정해야 되는 겁니다. 내 이름, 내 가치가 있다는 것이, 이게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다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다는, 주님이 왕으로 있다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통하는 진짜 의미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줘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나의 주이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여전히 어려운 대목들이 있는데요. 룻기 4장 11절에 보게 되면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를 원하며” 여기에 갑자기 두 여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라헬과 레아가 나오죠. 또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룻과 보아스가 결혼해서 애기를 낳는 이 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떤 기적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은, 여기에 라헬과 레아 그리고 다말에게서 태어난 베레스, 세라 같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보기에는 애를 열두 명 낳았고, 베레스와 세라 두 아이를 낳았으니까, 그 여인의 태가 튼튼하구나. 건강한 여자니까 건강한 애를 순풍순풍 많이 낳았겠지, 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걸 기적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임한 여인에게서 자식이 나오는 거예요. 불임한 여성.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자식이 나온 걸로 보는 겁니다. 리브가를 영어로 뭐라고 했던가요? 레베카라고 하죠. 레베카. 이 리브가가 불임여성이에요. 애기를 못 낳습니다. 애기를 만약에 낳을 수 있어서 낳아버리면 이거는 육적인 자식이 돼요. 육적인 자식.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원,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가정의 만족도를 위해 주어지는, 자기 가정의 욕망을 채우고, 내 가정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자기의 기대를 채우는 그냥 육적인 자식이죠.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스마엘은 어떤 자식입니까? 이스마엘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분명히 이렇게 말해야 돼요. 아브라함의 자식이라고 말하면 안 되고 약속된 자식이 아니다. 약속된 자식이 아닌 자가 누구냐, 이스마엘이다. 그럼 대조되는 약속된 자식은 누굽니까? 이삭이죠. 그렇죠. 그럼 여러분 자식은 약속된 자식입니까? 약속된 자식이 아닙니까? 여러분 집에 계시는 애들, 뭐 세 명이고 두 명이고 한명이고 간에. 그건 어떤 자식이에요? “이 더러운 약속되지 않는 자식들!”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아들딸 자식들을 내칠 수가 있습니까?
자식을 두 명 낳았을 때까지는 그냥 낳았다고 칩시다. 여러분 세 명부터는 약간의 의도가 가미되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아들 보고 싶어서 아들 낳겠다고 했어요. 근데 딸, 딸, 딸, 세 명이 됐다. 갈등이 되죠. 마지막 네 번째로 아들을 낳고 말까? 근데 또 딸을 낳으면 다섯째를 낳을까? 말까? 또 그런 갈등도 있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거는 뭡니까? 자식이 두 명이 있고 세 명이 있다고 할 때에, 두 명보다 세 명이 나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세 명보다 네 명이 나의 만족도가 높아질 때는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세 명, 네 명을 낳고 마는 겁니다. 어떤 집안에는 애들이 열세명이나 있어요. 낳을 때마다 주의 뜻이 돼가지고 그 애들만 해도 주일학교 열세명이에요. 주일학교 애들이.
자식을 낳으면서 내가 만족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만족했어요? 이걸 한번 생각해보자 이 말이죠. 애 안 낳으려고, 안 낳으려고 그렇게 했는데 들어섰다고 보통 그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 애는 없는 애로 쳤는데 들어섰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묻죠. 혹시 수술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라고 물어요. 수술 안 했다는 거예요. 그럼 그거 무슨 심보에요? 수술을 해놓으면 간단한 것을 가지고 수술을 안 해놓고서, 주의 뜻인가? 아닌가? 쓸데없는 고민하고 있고. 수술하면 끝인데 무슨 그런 고민을 해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의 부인, 나의 포기가 짝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내 자식은 안 되는가? 내 자식은 있음의 노선이거든요. 있음의 노선. 있음의 노선이라고요. 구원은 있음의 노선이 아니고 없음의 노선이에요. 없고 오직 뭐만 있다? 약속만 있을 때에, 이 약속이 있음을 공략하면서, 공격하면서 있음의 부정과 더러움을 지적질 하면서 출현되는 것이 뭐냐, 약속의 자녀입니다. 약속의 자식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육의 자식은 이 세상에서 결국은 다 없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좀 어려운데요. 자식이 죽은 부모를 살려냅니다. 자식이. 이 빈칸에 오벳이라는 자식이 등장하게 되면, 이게 거꾸로 가요. 거꾸로 가서 죽었던 이 자리가 엘리멜렉, 죽었던 아버지의 자리가 새롭게 생겨요. 물론 여기서는 나오미가 대신하고 있지만. 그래야 후견자, 고엘이에요. 우리 인간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후손으로 오셔가지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진짜 아담,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죠. 두 번째 진짜 아담의 자리, 하나님의 아들 자리에서 우리를 거기서 회생시켜버려요. 아들과의 관련성, 연결성 때문에. 시간이 거꾸로 간다니까요.
여러분도 다 아시지만, 이삭으로 인하여 누가 살아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자식이 나를 살려요.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잖아요. 룻기 4장 17절,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 안에 내 아들이 있다. 아들 안에 내가 있다는 뜻이에요. 아들 안에 내가 있다. 죽었던 내가 아들이 있음으로서 내가 살았다 이 말이에요. 우리 죽은 가문이 산거예요. 상당히 어렵죠.
좀 더 세밀한 것은 10분 쉬고 하겠지마는. 지금 쉰다는 것이 아니고 좀 더 하고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마는. 율법이 벌이는 일에 대해서 항상 기존에 있는 있음이 율법의 입장에서는 이게 늘 우리의 속성상 우상이 돼버려요. 가문 자체가 우상이 되고, 이스라엘 자체가 우상이 되고, 기존의 교회가 우상이 되고. 기존의 우리에게 있던 하나님이 우상이 되고. 늘 그렇게 됩니다.
새로움으로 기존에, 어제에 있던 것을 쇄신시켜주고 이걸 바꾸어줘야 해요. 안 그러면 인간의 기억 때문에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로 계속해서 붙잡고 있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여성은 고정되어 있죠. 남성은 후보감이 되고. 고정된 이것이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이 아니면 약속의 후손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보아스의 자식이라고 되어야 될 자리가 이게 뭐냐 하면은 오벳, 나오미의 자식이 돼요. 이게.
보아스는 남성이고 나오미는 여성이잖아요. 그렇게 되어야 될 이유가 뭐냐, 그래줘야 이것이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가 돼요. 약속의 자녀. 율법이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자식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여러분 자식이 약속의 자녀입니까? 라고 물을 때에, “예. 그러합니다.”라고 할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자식을 통해서 나를 재조명, 재해석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자식을 내가 낳았다고 했는데, 이제는 주객이 바뀌어줘야 해요.
고정적인 것이 뭡니까? 율법이, 말씀이 고정적이죠. 하나님의 개입된, 고정된, 확정된 뜻에 의해서 제 몸을 통해서 자식이 나왔습니다. 이 자식의 행동과 태도, 이 모든 태도를 통해서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나는 내 욕망대로 버티고 있는가를. 나는 예수그리스도 있음 앞에서 나는 그야말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로서 작동될 때, 그 자식은 주님이 주신 귀한 자식이에요. 자식을 통해서 배우는 거예요. 자식이 뭘 알아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자식을 통해서, 자식과 나 사이의 빈칸, 주님의 개입을 느끼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저 놈의 자식이 없었으면 내가 인간되었을까? 너 때문에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자식의 개입을 주님의 개입의 흔적으로 보는 거예요. 나같이 잘나고 교만하고 건방지고 아쉬운 거 없고, 체격도 내가 제일 잘나가, 맨날 내가 제일 잘나간다고 하는 내가 너를 낳고 난 뒤에 나는 완전히 걸레 되었어. 나는 내 스타일이 망가졌어. 너 낳고 난 뒤에 나는 25킬로그램 쪘다. 너 때문에 내 인생 망가졌어. 나 어떡해. 어떡해.
그렇게 할 때 그 자식을 통해서 우리는 아직도 욕망과 야망의 산물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엄마뿐만 아니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에요. 자식이 없으면 사표 낼 건데 너 때문에 사표 못 내고 있다. 퇴직할 때까지 버틸 거야. 다 너 때문이야. 자식 없었으면 사표내고 유럽여행 다니고.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못가지만. 라라라라라~~ 하면서 지중해에서 놀 건데. 지금 너 학원비, 너 대학자금 때문에 내 청춘, 내 인생 다 날렸어.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는구나!
원래 안 됐었어요. 원래.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퇴직해서 좀 살만하면 자식이 또 와서 도장 빌려달라고 하고. 직장 때려치우고 또 사업한다고 나오고. 하여튼 평생에 도움이 안 돼. 이러면서도 우리는 자식을 통해서 나 자신의 원천은 창세기 3장의 죄인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