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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05-15 21:03 | |
에스겔 14:12-20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가령 어느 나라가 불법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뢰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서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가령 내가 사나운 짐승으로 그 땅에 통행하여 적막케 하며 황무케 하여 사람으로 그 짐승을 인하여 능히 통행하지 못하게 한다 하자 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겠고 그 땅은 황무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가령 내가 칼로 그 땅에 임하게 하고 명하기를 칼아 이 땅에 통행하라 하여 사람과 짐승을 거기서 끊는다 하자 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가령 내가 그 땅에 온역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을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찌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성경은 구원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하나님의 방법은 심판의 장, 심판의 공간을 만들어놓고 거기서부터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지요. 그런데 정작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 자신은 어떤 경우를 먼저 싫어하느냐, 심판받는다는 것을 애써 거부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심판부터 들어가서 구원을 설명하는데, 심판이 없으면 구원이 설명이 안 되는데 우리는 심판을 안 거치고 구원받고자 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20절의 내용을 죽 같이 봤습니다만 이 내용에 매번 되풀이해서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 한다고 하자.” 이것이 심판인데 “가령 하나님이 이 땅에 이렇게 하나님이 심판을 내린다고 하자. 거기에 노아와 다니엘과 욥 세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의로만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또 그 다음에 “가령……” 또 그 다음에 “가령……” 이렇게 네 번이 연달아 나옵니다. 그러면 이 첫째에서 네 번째까지의 ‘가령’이 무엇을 예상해서 가령이라 하는가를 보니 첫 번째는 양식을 끊어서 기근을 내리고 두 번째는 사나운 짐승으로 그 땅을 적막케 하는 것, 세 번째는 그 땅에 칼이 있어서 아무도 거기에 살 수 없는 것, 네 번째는 그 땅에 전염병이 돌아서 아무도 살 수 없는 경우입니다. 양식이 끊어지는 기근, 사나운 짐승, 칼의 전쟁, 전염병, 이 네 가지를 다 합치면 하나님이 심판했다는 것을 의미하고요, 이런 심판가운데서 만약 욥과 다니엘과 노아가 구원받았다면 그들이 구원받은 성질과 은근히 구원을 기대하는 너희들과 같을 수가 있느냐, 같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노아와 다니엘과 욥 이 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들에게 물어보자는 거예요. 그들의 공통점이 뭐냐는 겁니다. 노아와 다니엘 욥의 공통점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ㄴ이렇습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이 땅에서 내가 살고자 하는 식으로 버틴다고 해서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이 세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양식을 끊어버렸다, 어떻게 삽니까? 전염병이 돈다, 어떻게 삽니까? 사나운 짐승, 전쟁, 여기서 못살지요. 하지만 이들은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노아 욥 다니엘을 자꾸 주님이 거론하는 이유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사람은 어떤 경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았다 하는 경우냐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살고자 양식 끌어 모으고 전쟁에서 협상하고 짐승을 잡고 전염병 대처하기 위해서 위생시설 갖추고 오래살기 위한 모든 시도들, 요새 말로 하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정책들이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대책,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 해도 다니엘과 노아와 욥이 얻은 생명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 좋아서 유명한 사람은 없어요. 어떤 사람이 유명하냐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권력 있어서 유명해지지요. 일반 직장의 보통사람들이 결혼하면 신문에 내주거나 세계적으로 떠들지 않습니다. 뉴욕타임즈에 기사 안 납니다. 그런데 청와대고위직이 허리를 한 번 툭 쳤다는데 유명해 졌거든요. 그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저 자리가 내 자리인데. 나도 저 저리를 가기 위해서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저 자리에 있어야 성공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데.’ 은근히 노리고 있는 그 자리를 누가 먼저 접수하고 점령해 있기에 그걸 바라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것도 다니엘이나 욥이나 노아가 부러워서 오는 것이 아니고 청와대 고위층에 자기 아는 사람 집어넣고 자기 딸이나 아들이나 남편 집어넣고 자기 부인이 그 자리에 취직했으면 내가 이 땅에서 성공한 사람이다, 이런 소리 듣고 싶어서 은근히 그걸 원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뎌 내거나 감당 못합니다.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런 것을 바로 기도한다는 것은 심판과 저주를 자초한다고 보면 됩니다. 교회에서 금요일마다 철야기도회를 하는데 그 시도자체가 저주와 심판과 지옥을 자초하고 재촉하는 일이라고 보시면 돼요. 노아 되려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다니엘 되려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욥 되려고 기도하지도 않아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론하시는 것은 생명은 바로 이들이 가진 것이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그 외에는 생명이 아닌 거예요. 생명이 아닌 것을 부러워한다, 이미 그 인간은 정신머리가 죽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사고방식이 완전히 죽어 있는 거예요. 노아, 다니엘, 욥의 공통점은 이 지상에서 지옥경험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 있느냐, 그들은 지옥경험 속에서 비로소 천국의 실마리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래, 세상 사람들은 다 저런 것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생명이기 때문에 저런 것을 좋아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은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세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은 그냥 맹탕으로 ‘이것이 생명이다.’ 이렇게 주시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 쪽으로 생명의 장치를 해놓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넓은 길입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가는 길을 찾는 사람은 드물어요. 거의 없어요. 거의 없다는데서 어떤 자부심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거의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 아까도 우리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오늘 사람이 와 이래 없노.” 늘 없었어요. 늘 없다는데서 어떤 자부심이 있어야 되고 감사해야 됩니다. 만약에 제가 이 수요일에 강단에 서있지 않고 개그맨이 서 있다고 합시다. 이 자리 비좁아 터집니다. 각 방송사 카메라 들이대겠지요. 요즘에 개그맨 보다 더 유명해진 사람 있지요. 윤 창중 씨가 여기 섰다면 여기 사람들 좁아터집니다. 동대구경찰서직원들 다 와서 경비서고 이곳 주변이 난리가 납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게요. 여기 이 자리에 만약 욥이 섰다. 아무도 안 옵니다. 노아가 여기 섰다, 아무도 안 옵니다. 다니엘이 여기 섰다, 아무도 안 옵니다. 그 세 사람은 왜 이 세상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가를 혹독하게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노아와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을 거론하면서, 이것은 우리 생각인데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겠는가라는 아이디어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요. ‘세상은 참 더럽다, 악하다, 지옥이다. 그렇지만 시대마다 노아가 있었고 다니엘이 있었고 욥이 있었다. 모든 인간이 다 더럽고 지옥 같지만 하나님이 주신 의로 그 시대마다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구원해 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요. 예를 들면 “노아 한 사람만 건지고 나머지는 다 물 심판으로 보내는 식으로 혹독하게 하나님이 일 하지 마시고 노아 한 사람을 통해서 노아 한 사람 보고 다른 사람들마저 용서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이런 생각이 누구나 떠오릅니다. 우리 가정의 식구가 열 명 인데 다 교회를 안 나와요. 그런데 착실한 막내 동생이 교회를 간다. 그러면 나머지 아홉은 교회는 가기 싫은데 죽어서 지옥 갈까 걱정은 되고, 은근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신이 계시다면 우리는 바빠서 교회 못나오고 성경도 잘 몰라서 교회 안가지만 하나님과 교회를 열심히 사랑하는 우리 식구에 속한 막내가 있으니까 그 막내 동생의 열심을 근거로 해서 한 식구라는 이름으로 나머지도 천국에 그냥 넣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는 생각을 다른 식구들이 하기 마련이지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익히 아시고서 의도적으로 그 생각을 차단하시는 방식으로 오늘 말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양식이 끊었다. 그 다음에 비록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기 의로만 생명 얻지 다른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언급하시는 이유는 믿음 좋은 사람이 믿음 없는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아뢰면 그 사람의 중보기도 덕분에 덩달아 우리가 덕분에 구원될 수 있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흔히들 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주께서는 익히 아시는 겁니다.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안 되는 이유를 제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지상에서는 하나의 개인을 근거로 해서 다수가 구원을 받는 쪽으로 방향이 나아가는 것은 차단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이 땅의 사람들, 아담에 속한 사람들은 묵시의 주인공이 아니고 역사의 주인공이에요. 역사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수용이 안돼요. 그래서 거부당합니다. 창세기 3장 끝부분에 보면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는 생명나무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차단당했어요. 그래서 누구 덕분에 간다는 이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는 인간의 역사자체를 죄악 된 역사로 보기에 그 역사를 만일 받아들이게 되면 이것이 뭘 뜻하게 되느냐하면 죄를 천국에 확장시키게 되는 것 밖에 안 되기에 천국은 그것을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역사에서 하늘 나라가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 노아와 다니엘과 욥 외의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을 길이 없단 말인가, 노아와 다니엘과 욥 그들도 자기만의 역사와 인생이 있는데 그들은 무슨 통뼈라고 생명을 얻느냐는 말이지요. 다 같은 인간인데요. 그것은 이렇습니다. 노아와 다니엘과 욥의 공통점은 착실하고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쓴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엇을 느꼈느냐, 하나님, 천국은 묵시세계이니까 그 묵시세계에서 이 인간역사를 심판하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것을 수용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는 것은 마땅히 심판할 만 해서 하신 것이라서 입이 열 개라도 반발을 못합니다. 잘한 조치십니다.”라고 수용한 경험을 그들은 갖게 됩니다. 노아 같은 경우에 노아가 혼자 의롭다고 해서 혼자 구원 받으면서 물 심판 보면서 박수나 치고 쌍안경 가지고 구경이나 하고 언덕에 올라가서 자기 식구들끼리 살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의인이라는 그 노아마저 심판 속에 같이 들어가야 돼요. 비록 노아에게는 방주가 있지만 그 방주의 천장에는 아주 무서운 소낙비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 홍수가 떨어졌습니다. 노아가 의인이라고 해서 “너는 빠져 있고 구경이나 해라. 열외!”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 무서운 심판을 노아는 살아 있으면서 된 통으로 다 받는 거예요. 그래서 노아 때 있었던 그 방주를 요새말로 하면 이 더러운 세상자체를 방주라 여기고 그대로 여기 사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모든 질곡과 어려움들을 다 당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봐주고 시원하게 살고 채찍 맞아도 간지럽고 맞아도 안 아프고, 그런 것이 없었어요. 오죽 했으면 쓴잔이라 했습니까? 하나님 아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일괄 내리는 심판에서 면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막 10:25)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어려운 것을 그렇게도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어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이것이 안 되는데 천국은 안가도 부자는 되고 싶다, 왜 이런 분위기가 교회뿐만이 아니고 온 천지에 다 퍼졌는지. 노아와 다니엘과 욥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부자 못되어서 환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찾아온 그 부자청년은 부자라는 이유로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서 주님을 따르는 척 하다가 결국 주님과 결별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개척교회 하실 것 같으면 어지간하면 부자 좀 포섭해서 헌금 좀 하도록 하면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이기지 못하면 아무리 포섭해도 그 사람이 결국 천국 못갈 것을 뻔히 아시니 그걸 포섭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어차피 천국 못갈 사람을 내가 알아주고 위로한다고 그 위로가 몇 년 가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살다가 죽고 나서는 지옥인데 그것은 위로가 아니고 다단계 사기 친 것이지요. 주님 입장에서는 사기 칠 수가 없는 거란 말이지요. 사도 입장에서는 남에게 사기를 칠 수가 없는 거예요. 돈 버는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의 영혼을 결정하는 문제인데 그것을 어떻게 사기를 칠 수 있겠어요, 못 치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어떻게 구원받느냐하면 이 세 사람은 자기 인생가운데서 하나님이 일괄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합당하고 당연히 일어나야 될 필연적인 현실이라고 수용한 겁니다. 그래서 세상부귀영화는 전혀 부럽지가 않아요. 왜, 쓰레기이기 때문에. 쓰레기장에 가서 쓰레기 보면서 ‘아, 부러워라. 나는 왜 저런 쓰레기가 없을까?’ 이렇게 그 쓰레기를 부러워하는 사람, 아마 그것은 미친 사람이지요. 똥 푸는 분뇨장에 가서 ‘아까워라.’ 그런 사람은 없잖아요. 사도바울은 세상 것은 배설물로 여겼다 했습니다. 노아와 다니엘과 욥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냥 저기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심판을 하기 위해서 세상을 꾸려나가고 있다, 세상 살림살이를 심판하기 위해서 그것도 일괄 심판하기 위해서, 심판을 감행하시는 그 하나님을 하나님이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고 믿은 겁니다.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영생을 얻었으면, 천국을 갔다면 그들은 천국을 어디서 발견했는가? 그냥 지상을 버리고 하늘나라만 찾아갔는가? 지상을 그냥 버리고 하늘나라 찾아가면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는 그 증거자체가 그 세 사람을 천국에 보내는 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당히 말이 어려워졌는데 무슨 말인가 하면, 이사야 45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제가 이 말씀 인용하는 것은 천국이 어디서 만들어지느냐 하는 겁니다. 천국은 하늘에서 만들어지는가, 아니면 땅에서 만들어지는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천국은 땅에서 만들어집니다. 이사야 45장 8절,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하늘에서 의의 씨앗을 뿌려서 열매는 어디서 자라느냐하면, 하늘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 완성품이 나와요. 하늘이 열리고 의가 비같이 쏟아지게 되면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지옥이라 여기는 이 땅에서, 이 지옥 속에서 비로소 천국이 나오는 거예요. 지옥 속에서 천국이 나오기에 천국은 저 위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다 지옥 보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저 위에 누가 계시는가,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위에 있다고 여기는 하나님은 인간들이 상상한 가짜 하나님이에요. 자기 이미지를 그냥 투영한 겁니다. 실제로 천국의 주인공이 이 땅에 오신 분은 누구냐 하면 사람 속에 섞여서 사람들의 미움을 옴팍 다 뒤집어 쓴 그 예수라는 분이 천국을 조성하시고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천국 가는 그 방식이 하나님방식과 인간들의 방식이 달라요. 노아, 다니엘, 욥, 이들은 한결같이 혹독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그 심판 속에서 사람들로부터 혹독한 미움을 받음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오는 그 미움이 바로 자기에게 영생을 주는 능력인 것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오늘 에스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금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데 그 구원하는 방식은 노아 다니엘 욥을 구원한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시려고 하는 겁니다. 그 방법이 뭐냐, 이스라엘이 구원받으려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멸망당해도 싸다, 라는 인식을 이스라엘이 가져야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 조상들에는 훌륭한 장학생들이 있다. 그게 노아고 다니엘은 우리의 선배고 욥도 우리의 든든한 조상님이다. 그 분들이 우리 속에 박혀 있으니 그 분들 덕 좀 보자. 그렇게 훌륭한 조상들과 같은 종족인 우리가 설마 지옥 갈 리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같은 역사속의 인물이 같은 역사속의 다른 인물을 집단적으로 건져낸다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겁니다. 이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방식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같은 인간 속에 섞여 있어도 너희들은 도리어 그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를 오해하고 곡해하고 도무지 믿고 싶어도 못 믿을 사람으로 사람 속에 섞여 버립니다. 자연적으로 사람들은 노아를 미워하고 다니엘을 미워하고 욥을 미워하듯이, 욥의 친구들이 욥을 미워하듯이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오실 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이 땅에서 의를 움돋게 하고 구원을 만들어내시는 그 주인공이 여기 와 계신 거예요. 뭐로, 사랑으로. 뭐로, 그냥 자비로. 뭐로, 죄인을 불러 의인되게 하시는 자신의 희생의 피로. 하나님보고 의논할 생각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꾸 상상해서 그 상상한 하나님과 자신이 자꾸 대화를 해서 그걸 정당화시키려고 합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말씀했고 다 보여줬는데요, 지금도 보여주시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하는데 어떻게 아버지를 일대일로 만나려고 시도를 하는가, 했지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은 너희들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안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이미 예수님이 나타나신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는 방식으로 생명을 얻고자 하는데 그 인간들이 아는 방식과 예수님의 말씀을 섞어보면 이게 소통이 안 되고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수십 년 동안 강의도 하고 설교도 해보지만 이것은 성경지식이 짧다는 일반교인들 뿐만이 아니고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 복음을 못 알아들어요. 복음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교회에 사람들이 오게 되면 그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에다가 단지 그들이 모르고 있는 예수님이 빠져 있으니까 그 예수님을 집어넣어주게 되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에다가 추가해서 예수님 십자가를 보태면 십자가로 구원받고 하나님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 천국에 가게 되면 나는 중간에서 양을 키우는 목사로서의 역할은 다한 것이다, 다 이렇게 생각하고 복음을 안다고 여겨요. 바로 그 방식이 예수님방식과 정반대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 방식은 목사가 뭘 하고 집사 뭘 하고 장로가 뭘 하는 이 모든 것이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자 하는 거예요. 하나님에다 인간의 일을 보태서 구원되는 법이 없어요. 모든 구원은 일방적으로 예수님만 하실 수 있지 다른 사람이 끼어들 자격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아무리 설교해도 사도바울이 한 명도 전도를 할 수가 없고 베드로도 한 명도 남을 구원할 수가 없어요. 그걸 베드로가 알고 있고 그것을 사도바울이 알고 있다고요. 왜, 본인은 이 세상에서 심판받아야 마땅한 그 일부로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변화 산에서 엘리야와 모세하고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를 건져주신 것은 오직 예수님의 별세만이, 죽으심만이 나를 건진다는 것을 사도들은 이 신약시대에서 고백합니다. 이것을 구약으로 옮겨버리면 구약시대에서는 방금 신약에 있는 그 원리원칙이 이렇게 달라져요. 하나의 인간의 의가 다수의 의로움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역사라는 것은 다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다 같이 멸망할 입장이기에 내 믿음 가져가서 너도 구원 받아라, 이런 식으로 믿음을 렌탈할 수는 없어요. 자동차나 정수기나 렌탈하지 믿음은 대여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따라오는 거예요. 욥 한 사람, 노아 한 사람, 그리고 다니엘 한 사람이 아니라 욥과 다니엘 이 한 사람 말고 묵시적인 한 분, 예수님 한 분만이 이 땅에서 남을 대속해서 남을 구원할 수 있는 권한이 그 분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구원할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노아 이름도 안 되고 다니엘 이름도 아니고 욥 이름도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목사라고 해서 목사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에요. 다 같은 입장이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우리가 접수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혹독하게 예수님이 거쳐 가면서 이미 지옥으로 증명이 된 이 세상에서 예수님 따라서 지옥경험을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거예요. 노아가 방주 탔을 때 그 방주위에서 쏟아지는 홍수의 무서운 심판의 빗방울 소리를 매일같이 우리는 받고 있어요. 윤 창중부터 해서 전부 다 온갖 소리들이 쏟아집니다. 은행 이자율은 낮아지고 경기는 침체하고 대리점주 하던 사람이 죽고 지진 나고 화산폭발하고 태풍불고, 하나님께서 그냥두지 않고 이 세상을 완전히 멸망시키려고 계속해서 해 왔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우리는 해석하면서 욥과 다니엘과 노아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오직 주님이 주신 의로만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은 이 지상에서 이미 맛본 사람은 천국가고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지옥갈 수밖에 없는 예비단계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래서 같이 멸망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영문인지 십자가의피만이 구원한다는 사실을, 그것만이 용서된다는 사실을, 죄에서 해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이 은혜가 천하보다 귀한 것을 고백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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