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물
2020년 7월 19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3:8-9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람이 하나님을 언급한다는 것은 참으로 건방진 일입니다. 나름대로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여기고 하나님을 자신을 능가한 무한한 대상으로 여겨서 책망 받을 것은 미리 대비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보장받지를 못합니다. 요한복음에 의해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아들’ 관계로 나타나십니다.
즉 아들을 아들로서 인정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 ‘아들의 자리’에 합류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전에 사도는 ‘예수’가 빠진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그냥 추가적으로 ‘예수’를 집어넣으면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설물’로 여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사도가 되기 전에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자신을 파악했습니다. 내가 가진 의가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 나라까지 먹히겠느냐를 점검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안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의’ 외에는 일체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안목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 성령의 안목으로 사도는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만 자신이 ‘쓰레기’라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오물이 아니라 원래부터 모든 인간의 오물이요 쓰레기이요 배설물인 것이 드러난 겁니다. 마태복음 15:11에 보면,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럽기에 더러운 것들만 나오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끌어온 겁니다. 그 하나님을 자기에게 달라붙게 한 겁니다. 어느 위치에 하나님과 자신을 접목시켰을까요?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서 어느 지점을 통해서 자신과 하나님을 도킹시킬까요? 어떤 분의 소개인 인생사를 거론하겠습니다.
연세 많은 할머니께서 일기를 남겼습니다. 자신의 과거사를 소개하는데 거기에 옛날 가정 형편을 알립니다. 일제 때 이야기입니다. 자기 논이 없이 남의 논에 농사짓고 살았는데 힘 쓰시든 아버지께서 독립운동하다가 감옥소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연로한 노모까지 있는데 이 집안에 농사일 할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36세 된 어머니는 삯바느질 하시지만 그것으로 자식들을 키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머슴을 들어와서, ‘밥만 먹여주고 잠만 재워주면 농사 제가 짓겠습니다.’해서 그 남의 논을 농사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이신 이 할머니께서는 그 머슴에 먼저 반해서 혼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일기장에 적어놓으셨습니다.
이 할머니 일기에 있어 내용상 뭐가 문제입니까? 첫째는 이 할머니는 자신의 과거 살림살이 형편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난하고 초라하게 사는 것을 ‘부끄러워할 상황’이라고 여긴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인간은, 이미 하나님 안목에서 보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가시면서 ‘죽음을 통해서’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애초에 ‘죽음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없음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곧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지상에 유발해놓으신 이 ‘특이한 죽음’ 이외에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는 바가 됩니다. 예수님에게 떠밀려서 죽음 세계로 넘어가신 주님이, 그 자신이 속한 ‘죽음의 세계’를 품고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주님을 위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곧 ‘죽음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인간 죽음’을 보장합니다. 인간 세계는 하나님을 추방하고, 늘 자신들만의 세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인간들은 자기 처지를 자만한다든지 부끄러워합니다.
부끄러울 경우, 참되게 나만이 고유한 귀한 것을 따로 만들어 쥐려고 합니다. 세 번째, 그 ‘자기 것’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치성을 자신이 소유한 것을 증명해주리라고 희망을 삼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일생을 곧 ,‘내 것’을 만들고, ‘그것을 최종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나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타인들을 자기 곁에 두지 않습니다. 바로 이 방어의 자리에 하나님을 결부시킵니다. 이것이 곧 우상입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노력은, 인간이 땅에만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땅은 이로서 운명을 같이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 땅의 일부를 점유합니다.
이로서 인간은 땅과 친화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땅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고 멸망받은 대상으로 결과가 확정났습니다. 땅은 곧 ‘음부’라는 ‘죽은 자들의 저장고’를 땅 밑에 갖고 있습니다. 이곳이 음부, 곧 어두운 곳입니다. 이 구약적 개념은 신약에 와서 지옥이 됩니다. 지옥에 간 자들은 땅에서 하던 행세를 바꾸지 않습니다.
땅과 친화성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배설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복음이 오게 되면, 왜 이 세상 사람들이 지옥가느냐가 밝혀집니다. 에스겔 9:4-6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건져낼 자들을 소집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란 자기 의를 배설물로 여기는 자들의 집합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오로지 ‘피’만으로 자기 백성을 소집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천사 셋을 보내어 아브람을 소집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은 배설물 안에서 빛이 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에 대한 해석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2강-빌 3장 8-9절(배설물)2007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3장 8-9절입니다. 신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3:8-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기는 그 당시 환경 속에서, 현실 속에서 사도바울은 특이한 인물로, 특이점을 가진 인물로 등장합니다. 기존에 알고 있는 하나님을 그냥 나도 안다, 하면 아무 문제없는데 사도는 본인이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뭔가 빠트린 것이 있다는 겁니다. 무엇을 빠트렸느냐 하면, 그리스도를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살았던 시대에 먼저예수 믿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을 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는 그리스도는 없어도 된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자부해서 충분한 여호와 하나님 섬기는데 방해된다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다 없애려고 한 겁니다.
오늘날 지금 이 시대 정치하고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 믿는 사람은 내가 용서해줄게.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내가 제거하겠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만만해서 자기가 해석한 것이 옳다고 여기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찾아가는 도중에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 믿고 그리스도를 거기에 추가시키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내가 알았던 그 그리스도해석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게 특이점이에요. 사도바울의 말을 건방지게 제가 대신 말씀드린다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자체가 건방지다는 겁니다. 건방져요.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했다는 자체가 건방진 행동이에요.
어떻게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하고 상대를 하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해준다고 본인이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해석을 해왔던 겁니다. 그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만만했고 자기한테는 하자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여러분이 요한복음을 읽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여기서 요한복음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아들을 모르면 아버지하나님을 모른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8장에서. 18, 19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은 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를 닮은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는 자신을 드러낸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이에요. 아버지를 닮지 않은 아들은 이 땅에서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고, 아버지를 모르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없는 겁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상이지요.
예수 믿는다고 해서 그걸 공격표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자기가 알고 있던 하나님은 철석같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게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건방진 해석이라는 생각을 추호도 먹지를 못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아버지를 닮은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드러낸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아버지를 닮은 아들은 그 당시에 누구밖에 없었느냐 하면,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도바울의 본문이나 요한복음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아버지를 닮아야 돼요. 우리가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닮아야 된다고요. 아버지를 닮을 때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지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 해요. 그 전에는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아니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들 되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을 할 텐데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배설물이라는 말은 쓰레기 또는 오물, 갖다 내버려야 될 존재, 이게 쓰레기에요.
우리가 평소에 사물을 볼 때 그냥 보지 않고 숫자로 헤아리거든요. 그러나 쓰레기, 배설물은 숫자로 헤아릴 수가 없어요. 어떤 다양한 모습이라도 하나, 둘, 쓰레기1, 쓰레기2, 쓰레기3,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전체가 어떻게 해도 동질의 쓰레기에요. 쓰레기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데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부모가 자식 나무랄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돼. 그것은 나쁜 짓이야.”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사실 그 말은 자녀를 잘못되게 해석하는 겁니다. 뭐라고 해야 되느냐 하면, “네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보니까 너 자체가 더럽다.”고 이야기해줘야 돼요.
더럽지 아니하면 절대로 더러운 것이 안 나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꾸 헤아림으로서 식별하고 식별 다음에는 분류를 하려고 해요. 선악지식에 준해서 이것은 선한 것이고 이것은 악한 것이고, 이렇게 자꾸 분류를 하는데 그 분류하는 조차도 더러운 데서 나오는 분류법입니다. 식별법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알다가, 내가 아는 하나님은 엉터리였다, 망상이었다, 가짜였다, 진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되었다, 하는 순간 그냥 지식으로 아, 내가 기존에 알던 하나님에다가 아들 예수 하나 추가 밥, 밥 하나 추가하는 것처럼 그렇게 얹는 것이 아니고 뭘 갑자기 지칭하느냐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지식으로 하나 추가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왜 그동안 나는 배설물이었는가, 나는 쓰레기인 것을 왜 내가 나를 해석하지 못했는가, 그 자기 자신을 발견한 거예요.
나라에서 법을 이야기할 때 “너 법을 지키면 인간 대우받는다.” 하는 조로 나라에서 법을 이야기해요. 교회가 소규모로 모이거나 식사모임 가지면 각 교회별로 매기는 것이 아니고 1인당 3백만 원 벌금 물린다, 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교회 안 나오고 음식 안 먹으면 나 너 사람취급 해줄게. 이 나라에서는 우리 국민취급 해줄게.”라고 언급해서 그 법이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만 여기에 주눅이 드느냐 하면, 나를 괜찮은 인간으로 해석하는 사람한테는 이것은 ‘아, 이것은 피해야 되겠다.’라는 해석이 들어오지요. 그런데 ‘나는 원래부터 쓰레기야.’ 이런 사람에게는 그런 법이 협박 공갈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 오려고 하는데 아내가 “교회 갔다가 전염되면 나 너하고 같이 안 산다.” 해서 교회 못나온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자기 아내가 쓰레기인지를 본인도 모르는 거예요.
물론 본인도 쓰레기지만 집에서 예수 안 믿는 그 아내도 쓰레기라는 말이지요. 쓰레기정도면 제가 말을 안 합니다. 쓰레기정도가 아니고 이미 시체에요. 죽은 자에요. 예수님이 왔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이거든요, 유일하게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 왔을 때 인간들이 떠밀어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죽음 뒤에 있어요. 예수님이 죽음 뒤에 있다는 말은 인간세계 바깥에, 죽음 뒤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올 때에 죽음자체가 이 땅에 육신이 된 겁니다. 죽음 자체가. 없는 분이 육신이 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본 거예요. 있어도 없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산사람들끼리 있어도 그 분은 사람들에게 기어이 죽음으로 내몰리기 때문에 죽은 자가 산 사람에게 섞여서 죽은 세계의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못 알아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뭐냐? 우리가, 살아 있는 내가 그냥 산채로는 못가고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음의 세계에 가야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의 세계로 못 건너가지요. 그래서 ①예수님께서는 죽은 채로 사도바울에게 찾아온 거예요. 죽음 그 자체로, 죽음세계 그 자체로 찾아온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사도바울은,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②예수님세계의 안목을 공유하니까, 같은 생각을 가지니까 비로소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두자로 뭐라고 하느냐? 그걸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으면 구원받겠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제가 분명히 언급합니다.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 우리의 죽음을 보장해요. 기어이 죽어서라도, 숨져서라도 천당 가겠다는 그런 쓰잘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구원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죽을 이유가 없고 죽을 필요가 없어요. 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떤 법도, 3백만 원 7백만 원, 그 어떤 법도 협박공갈용이 될 수가 없지요. 아, 죽은 놈 목 조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미 죽어버렸는데. 어떤 사람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산 사람이 있었어요. 한 때. ‘내가 사라져야 내 본심을 여러분이 아시겠지.’ 그렇게 해서 자살한 사람이 많아요.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사람도 있고요. ‘내가 죽어보면 사람들이 내 진심을 알겠지.’
여러분, 진심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죽는다고 사람들이 진심을 아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전담해서 그걸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최종성이고, 율법의 완성이 된 십자가 앞에서 나의 진짜 모습, 나의 진심은 십자가가 나대신 다 말을 해주는 거예요. 너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심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네가 자꾸 살아 있다고 하니까 나라법이 자꾸 너를 협박 공갈하잖아. 자꾸 쓸데없는 법이, 가정법이 어떻고, 뭐가 또 어떻고, 남 눈치코치보고. 신종코로나가 너를 협박하고. 자기 사정을 남에게 하소연해서 내가 이런 지경에 있다. 그거요, 그거 잡담입니다. 율법 빼놓고 다 잡담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왜 자꾸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더 살아야 되겠다고 발악을 하느냐? 구원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자꾸 살았다고 여기고 ‘살았는데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죽고 난 뒤에는 지옥이냐 천당이냐 갈라질거니 그 때 천국가야지.’ 자꾸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아까도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자기 자신을 잘못 해석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율법이라는 것만이 실재성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완성이 실제로 현실 속에서 십자가로 나왔기 때문에. 십자가는 율법계통을 따라서 나왔거든요.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니에요. 빌립보서 3장 9절에 보면, 내가 가진 의는……, 그 다음에 나온 단어가 율법이에요.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인간들은 율법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마땅히 살아 있어야 되고, 나는 죽지 않아야 된다는 정당성을 율법을 통해서 뽑아내는 식으로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거예요. 여기 율법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세상법 모든 법을 다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그동안 역사와 전통으로 자기 몸을 둘둘 감고 온 거예요. 배설물이 뭐냐? 배설물이라 하는 것은 복음과 더불어 나타는 것이 배설물이에요. 이 말은, 복음은 배설물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알고 난 뒤에는 가차 없이 자기 자신을 배설물로 여겼던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의 ‘자기의’가 있어야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의(義)’(라는 말은 나는 아직도 살아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 뜻이거든요. 내가 살아야 될 가치가 있다. 이것을 위해서 계속해서 모든 것을 붙잡고 자기 공들인 것을 쥐는데 그렇게 되면 이 자기 의는 비교되는 의가 없어져요.
비교되는 의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로 주어진 의입니다. 그리스도로 주어진 의는 그 의가 나타남으로 그동안 그리스도의 말고 따로 챙겨놓은 내 의는 어떻게 그동안 구축했는가를 네가 한번 보라는 겁니다. ‘남하고 비교해서 저 사람보다 낫다. 저 사람보다 착하다 훌륭하다. 나는 윤리 도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다.’
제가 이야기 안 해도 벌써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나는 율법에 흠이 없는 자로다.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다. 사도바울의 입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의 사도바울은 해석할 수 있는, 곧 이런 의가 하늘나라와 연속된다고 본 거예요. 해석을 그렇게 한 거예요. 하나님을 그렇게 만만하게 본 겁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아버지를 닮은 아들로 나타났는데 그 아들로 나타날 때 그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에요. 인간의 행함으로 난 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차 없이 나 자신을 배설물로 그냥 설사해서 나를 뽑아내면 되는 거예요. 어렵습니까? 좀 어렵기는 하겠습니다. 이게 하나도 어렵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진짜 원하는 의, 천국에서 수용될 수 있는 의, 천국에서 배타시 하지 않고 받아주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에서 난 그 의뿐이거든요.
그러면 쓸데없는 것 왜 갖고 다닙니까? 쓸데없는 것 무겁지도 않아요? “정 세균 국무총리님! 보세요. 저는 교회 안 갔습니다.” 그거 그 사람에게 인정받아서 뭐할 건데? 여러분, 교회가 뭐냐 하면, 아, 참, 여러분이 아시지만 다시 한 번 기억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교회가 뭐냐 하면,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자기 피로 사신 교회에요.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피가 자기 백성을 소집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내 피 이야기를 할 테니 자기 살아온 모든 인생 포기한 사람 이리 나오세요.” 그게 교회에요. “내가 피를 흘렸으니까 이 피와 대체할만한 가치를 쥐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여기 모이세요.” 그게 교회에요.
나는 몰랐다, 하지 말고 사도행전 20장 28절입니다. 이공이팔이에요. 전화번호만 외우지 말고 이런 것 외워요. 그래서 교회가 뭐냐 하면, 바로 피만 이야기하는 거지요. 피만 주고받고, 또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괜히 교회 나왔다가는 코로나로 죽을까 싶어 안 나오려고 했는데 피 때문에 나왔다.” 이렇게 피만 나와야 돼요. 피!
“집에 있어도 죽은 것이고 교회 나와도 죽은 것인데 이제는 다시 한 번 피의 고마움을 알기 위해서 나왔다.” 이런 식으로 피만 나와야 되고 피만 주고받고 해야 돼요. 피만! 피만 주고받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이야기할 수가 있나요? 입 다물고 있어야지. 이 이야기가 여러분 듣기에는 안 들어도 되는 이야기처럼 들리십니까? 그러면 응용문제 나갑니다.
응용문제를 내야 ‘아, 십자가가 현실이구나.’ 하는 것을 아실 거예요. 제가 전에 여러분에게 그냥 무료로 나눠준 책이 있었지요. <할미꽃 엄마가 쓴 쪽지일기> 다 보셨을 줄 압니다. 너무 쉬워서. 73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이게 수능으로 치면 국어지문입니다. 지문이 먼저 나오고 응용문제는 나중에 낼 테니 풀어보세요.
〔나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아버지가 독립 운동한다고 농사도 지을 수가 없었다. 땅도 없었고. 그래서 36세 된 어머니가 길쌈(바느질)을 해서 자녀들을 키웠다. 아버지가 독립운동 하다가 걸려서 감옥에 갇히니 농사지을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어이, 그 땅 노는 데 비싼 값으로 팔라고 해서 어떤 아저씨가 왔을 때 고맙고 고마우신 그 논임자가 ‘내가 이 땅 다시 팔아버리면 독립운동 하다가 잡혀가서 가장도 없는 저 집은 굶어죽는다. 연로하신 어머니까지 있는데.’ 그래서 논의 임자가, 그 고마운 아저씨가 더 비싸게 준대도 그 땅을 안 팔고 ‘야, 너희가 이 땅 갈아먹어라.’ 해서 그 땅에서 농사짓도록 해줬다〕 하는 겁니다.
그 집의 자녀 중 한 분이 87세 된 할머니 바로 이 책 저자에요. 계속 되는 이야기가, 여자가 농사지으니 제대로 안되는데 어떤 신체 튼튼한 머슴이 와서 하는 말이 “밥이나 먹여주고 잠만 재워주시면 돈 안 받을게요.” 한 거예요. 옛날 그런 사람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 머슴이 그 넓은 논에서 농사를 지어줬다는 말이지요. 이 저자 할머니가 처녀 때 그 머슴총각이 자기 쪽에서는 말을 못하고 있으니까 먼저 여자 쪽에서 “당신 나하고 살림삽시다.” 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그 대목입니다.
이게 지문이고 이제 응용문제입니다. 자 이미 돌아가셨지만 이분이 자기 인생 이야기할 때 왜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해석이 잘못되었는가? 그 문제를 내는 거예요. 하늘나라 수능문제입니다. 이 할머니의 이야기가 뭐가 잘못 되었을까요? 십자가 앞에서. 첫째는 뭐냐 하면, 이 할머니가 뭔가 부끄러워한다는 거예요. 부끄러워한다는 것.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뭐냐? 비교할 대상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식별이고 분류입니다. ‘저 사람은 아버지 있고 좋은 전답 있어서 먹는 것 걱정 없이 사는데 왜 내 집안 꼴은 아버지 독립운동 한다고 붙잡혀가고 집안에 일할 남자 하나 제대로 없어가지고 이렇게 사는 게 지지리 궁상이냐?’라는 것이 밑에 깔려 있는 거예요.
첫 번째 부끄러워한다. 두 번째, 부끄러워하니까 그나마도 뭔가를 쥐고 싶은 거예요. ‘그나마 그렇게라도 그저 논 갈아서 먹을 것이 나왔고 그리고 머슴이지만 와서 일을 해주니 그것이나마 쥐고 우리는 이만큼이라도 살았다. 나는 내 역사를, 현재 내 존재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싶다.’
세 번째는,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방어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힘들게 살아온 것 이것을 탓하지 말라.’ 누가 탓하면 나는 방어에 나서는 거예요. 강력한 방어를 여기에 형성하는 겁니다. ‘누가 나보고 죄인이래? 나 이렇게 힘들게 살았어. 겸손하게 살았어. 나보고 탓하면 그 사람 나쁜 사람이야. 양심도 없는 사람이야.’ 그런 식으로 계속 자기를 방어하고 싶은 거예요.
네 번째, 진짜 중요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부끄러워하고, 그래서 그나마 뭔가를 쥐려고 하고 세 번째는, 쥔 것을 철저하게 지키고 방어하고 싶을 때 그 때 네 번째, 이분에게 하나님은 어느 대목에서, 어느 부분에서 달라붙는가? 바로 이 모든 것, 1번, 2번, 3번, “나 부끄럽기 싫어요. 나는 수치스럽기 싫어요. 나는 내 것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싶어요. 그리고 세 번째는, 그것을 나는 지키고 싶어요. 이런 것을 해주시는 하나님 같으면 제가 믿을 용의가 있어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응용문제입니다. 이게 단지 할머니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에요.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이 할머니처럼 반복해서 살아가요. 그리고는 피를 안다. 복음을 안다. 십자가를 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 말은 뭐냐? 지금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 못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어디를 봐서 쓰레기냐? 내가 어딜 봐서 더러운 냄새가 나는 오물이냐? 내가 어딜 봐서 배설물이냐?’ 이렇게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십자가 복음은 따로 와서 우리에게 추가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오물임을 드러내는 것과 결합해서 등장해요. 복음은 배설물로 통해서 나오는 겁니다. 함께 오는 거예요. 배설물 없이 복음이 오는 경우가 없어요. 그동안 교회 오십년 다니고, 복음 알고, 아, 이거 못 믿겠습니다. 믿지를 못하겠습니다.
나라에서 고함만 질러도, 지옥 갈 인간들이 법 만들어서 지옥가야 될 법을 만드는데 그 지옥 갈 법을 천국 갈 백성한테 협박용으로 사용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 게 말이 돼요? 모이기에 힘쓰라, 한 이 법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천국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닙니까? “모이지 말라. 모이면 1인당 3백만 원.” 이것은 어디서 옵니까? 쓰레기에서 온 거예요.
쓰레기가 뭐냐 하면, 옛날 내가 그 동네와 친하다, 그 친화성을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옛날에, 성령이 오기 전에 옛날에 그 쪽 동네하고 친하게 지낸 거예요. 그 쪽 말이 먹혀드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피로 자기백성 소집하는 겁니다. 소집할 때 무엇이 다 날라 가느냐 하면, 과거에 나쁜 일 한 것, 과거에 착한 일 한 것 다 제거되어 버립니다. 아예 보지도 않아요. 피! 끝! 피만 보고 건지는 거예요. 피만 보고 천국 가는 거예요.
왜? 피 안에 모든 율법의 완성이 담겨서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결국 인간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그분이 찾아오지 아니하면 계속 우리는 뭔가 남보다 밑지면 그것을 부끄러워하려고 하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뭔가 ‘내 것 있어. 나는 이 정도야.’ 하고 쥐려고 하고, 그 쥔 것을 끝까지 목숨 다해서 사수하려고 하고, 그게 안 지켜지면 마지막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사항은 자살입니다. 자살이에요.
여러분, 자살이 비현실입니까? 6층에서 살던 그 사람이 자살했잖아요. 현실이잖아요, 현실. 가룟유다의 자살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서울시청 건물 6층에서 살던 사람이 자살한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것만 현실이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왜 현실로 인정을 안 해줍니까? 정말 미치겠어요.
자기를 지킨다는 것, 자기를 지킬 때 얼마나 이게 지독한지요. 어제 내가 누구한테 이야기를 들었어요. 1992년도 이게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랍니다. 남편이 혈액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 옆에서 침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낮에 머리를 길게 하고 그리고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네가 와서 혈액암 치료중인 남편 침상으로 와서 막 달려들려고 했다는 겁니다. 밤도 아니고 낮이에요. 그래서 그 부인되시는 분이, 그 때는 젊었겠지요, 그 때가 1992년이니까 벌써 30여 년 전이잖아요,
그래서 그 때 그 여자의 머리카락을 휘감아 쥐고, 그 사람 말 그대로 표현한 거예요, 휘감아 쥐고 그 여자를 바닥에 메쳤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 머리긴 여자하고 싸운다고 자신도 병원복도에 쓰러져버리고 그 여자도 가버렸대요. 그 다음날 보니 그 여자가 바로 옆 병실, 같은 혈액암 걸린 30대 여자한테 들어갔더니만 그 다음날 되니 그 30대 여자가 죽어버렸답니다.
이게 뭐냐? 처녀귀신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방송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은 남편의 회복을 너무 신경 쓰다 보니 헛것을 봤습니다.” 하니까 팔십 넘은 그 할머니가 화를 내면서, 내가 실제로 복도에 쓰러지는 바람에 간호사가 와서 나를 일으켜줬는데 이래도 헛것 본거냐고 했어요.
중요한 것은 귀신이 있다 없다가 아니고요. 귀신이 나타나는 순간까지 그 여자는 자기남편을 지키려고 한 거예요. 왜 지키려고 하는가? 남편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자기에게 부끄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수치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냥 남편이기에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 남편이기 때문에 지키는 거예요. 옆에 있는 아줌마 남편, 그것은 안 지켜요. 내 남편에게 너 처녀귀신 오지 말라는 겁니다.
이 귀신이 여러분 속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그대로 행동으로 나오니까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거예요.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겁니다. 그게 뭐냐? 세자로 배설물. 네 자로 하면 똥, 덩, 어, 리. 이게 배설물이에요. 쓰레기 오물이라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그게 나올 때마다 “주여,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얼마나 감사를 했겠어요? 아까 기도하신 분의 기도내용에도 나왔지만 틀렸기 때문에 감사한 거예요. 매순간 틀렸기 때문에 감사하는 겁니다.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복음 믿는 나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따라서 세상 것으로 보충하려는 나,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그것 지키는데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하는 나, 그것이 배설물의 이름으로 똥덩어리의 이름으로 나올 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교회 몇 년 다녔다, 하는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오늘 처음 참석해도 아무 상관없어요. 주께서는 “네가 몇 년 다녔나?” 그거 안 물어요. 오직 피로 호출하니까. 그렇다면 그 배설물이란 도대체 어디서 유래되고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소나무를 옮길 때 맨 소나무를 발가벗은 듯이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나무가 원래의 현장에 있었던 흙을 새끼줄로 함께 동그랗게 묶어서 옮기지요. 인간이,‘내가 처음부터 나쁘다’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던 그곳이, 내가 살기 위해서 점유한 그 땅이 그 자체가 이미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더럽다고, 악하고 음란한 땅이라고 이미 규정이 된 상태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땅을 점유해야 되는데 내가 점유한 그 땅을 우리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내가 뿌리를 딛고 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땅이 예쁘다, 가 아니라 내가 예뻐서 그래요. 땅이 있어야 내가 사니까요. 만약에 그 땅 자체가 이미 물 건너간, 하나님 보시기에 심판과 저주의 대상의 땅이라면 여전히 그 땅을 끝까지 점유하겠습니까? 이것도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이야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그거거든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인간은 땅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성경적 해석에 의하면 인간은 땅에 사는데 그 땅은 인간에게 저주를 뿜어주는 땅이고, 인간은 그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땅의 요소, 땅의 일부에요. 그러다 보니까 그 땅하고 인간하고 운명을 같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는 곳이 어디냐? 땅의 일부에 가요. 그곳을 음부라고 합니다. 음부, 땅 속에 죽은 자들의 집합체가 있어요. 구약적용어로 하면. 그곳이 신약에 오면 지옥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살아서도 땅을 떠나지 않고 죽어서도 땅을 떠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땅이 저주받으면 함께 땅의 저주와 더불어서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겁니다.
그 땅의 일부가 바로 바다고, 그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이 사탄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는 지옥에 갔는데 지옥에 가면서 그 입에서 내뱉는 행세, 태도를 보게 되면 땅에서 살던 그 태도가 그대로 나와요 중도에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바뀌었다는 뜻이에요.
지난 낮 설교에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지옥으로 향하는 목숨이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교체해야 된다. 하늘의 생명으로 교체해야 된다. 그러면 생명이 뭐냐? 생명은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살에서 나와요. 요한복음 6장의 말씀처럼. 주님이 찾아오지 않은 사람, 성령이 찾아오지 않는 사람, 인간은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땅에서 자기를 키운다는 것이 뭐냐? 결국은 버려야 될 배설물의 중량만 더 키우는 거예요.
그 배설물의 중량을 키우기 위해서 맨 날 어떤 희망, 소망, 이것만 쫓아다니는 거예요. 희망, 소망. 20대 애들 보세요. 허황한 꿈에 잠겨가지고 맨 날 해외여행 가는데 요새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도 못가서 천만다행 이다만. 인간들은 기껏 해봐야 땅 관리하는 것이 무슨 이익을 위해서냐? 자기 몸 관리 하기위해서 땅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생태학이지요. 생물학에서 나오는 것.
배설물이라 하는 것은 땅과의 동질성, 땅의 저주를 그대로 자기의 마음까지 가져오는 겁니다. 땅에서 살기 위해서,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서 공통된 의미를 뽑아내서 법을 만들었어요. 그게 뭐냐? ‘자아법치주의’라 하는 겁니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법을 만들어요. 그런데 이것은 뭐와 같으냐?
댐 같아서 아무리 댐을 쌓아도 결국 하나님이 주신 땅에 대한 이미 확정된 심판과 저주는 그 댐 수위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넘쳐서 옵니다. 나는 물론 저주받는 것이 당연하고요, 내가 속한 옆, 평생 나를 힘들게 했던 비교되는 이웃도 같이 저주와 심판 속에 가두어집니다. 땅 자체가 지옥이니까. 지옥의 예고편이니까요. 땅에서 움직이는 이 모든 것이.
이 사실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9장 4절에 보면, 거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나와요. 유대나라 혹은 이스라엘나라. 그 이스라엘나라에서 에스겔이라는 선지자가 등장하는데 그 선지자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이스라엘이 저주받는다는 것, 그 이스라엘 속에 모든 인류의 운명이 다 포함이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에스겔 9장 3-6절에,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처음 출애굽 할 때는 어린양의 피가 발린 그 집안의 맏이는 살리고 나머지는 다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천사에게 보탠 통지고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줄 알아야, 이런 것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돼요. 그러고 난 뒤에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이스라엘자체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으니, 에스겔 말씀을 아직 받기 전이에요, 전이지만 미리, 성신 받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예언을 한 거예요.
예언을 하기를 “이 성읍에 대해서는 네가 포기해라. 이 땅을 점유해서 여기서 대대자자손손 살 것을 포기해라.”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적으로 봐서 부합되지 않고 부합되지 않으면 저주받는 거지요. 그래서 옆에 하나님이 조수 하나 데려다가 먹줄로 이마에 표시를 하는 거예요. 체크하는 거지요.
체크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세상에 멸망하는 것도 모르고 그냥 이 땅에서 자기몸 하나 건사하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눈으로 보면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마에 체크해라.” 먹줄로 인을 치라는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잉크 찾아서 다 뿌려버렸으면 좋겠어요.
‘이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 보니 지옥이 따로 없다. 우리가 이 지옥에서 태어나서 지옥에서 살고 있구나.’를 아는 사람에게만 전부 다 체크하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이 거기에 꽂혀서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은 빠찡코처럼 우당탕탕, 사는 것은 전부 다 사실은 배설물들이에요. 죽은 인형들이 서로 부딪히는 거예요. 모든 것이 마네킹들의 부딪힘에서 성공 했니, 출세 했니, 실패 했니, 죽어버릴까……, 이 모든 것이 마네킹이 마네킹들끼리 서로 자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말이지요.
자기가 자기 해석할 줄을 몰라요 지금 살아 있다고 우긴다고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우는 사람 체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천사에게 맡겨라.” 그냥 죽여 버린다는 겁니다. 원래 율법으로 먼저 심판부터 되고, 그 다음에 죽는다는 것은 별로 의미 없어요. 왜냐? 율법으로 “너는 죽어 마땅해.”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몇 년 더 살고, 오십년 더 살고, 그래서 백년을 살고, 해도 이미 주님보시기에 죽었으면 그 때부터 이미 죽은 거예요.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거예요. 그걸 가지고 사건에 등록되었다, 하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에, 시간이 멈춰진 그 사건에 우리가 등록된 거예요. 하나님의 인을 받으면서. 그게 성령께서 인치심이에요. “앞으로의 모든 미래는 네가 걱정하지 말라.” 죽은 놈이 무슨 미래가 있어요? 죽은 놈이 무슨 미래가 있습니까? 이미 죽은 것인데, 이미 배설물인데, 배설물에다가 또 배설물 역사 이야기할건가요?
예수님이 피는요, 모든 개성, 나다움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댐을 쌓아놓고 자기 지키기를 해도 그 댐은 기이한 국경입니다. 나 중심의 국경을 형성하고 있어요. “목사님, 어디가면 나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인 맞은 사람입니다. 마치 스스로 본인이 환자인줄 아는 사람은 “내가 어느 병원에 가면 내가 어떤 병인지를 들춰냅니까?” 하는 것처럼.
배설물들은 살아가는 모습들이 나름대로의 창의적으로 어떤 시도를 계속 해요. 오늘 설교가운데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했는데요. 마태복음 9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뒤에 당부한 말을 그들이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30절에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그리고 31절에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나 눈 떴다고 소문내 버렸어요. 이 대목을 보는 사람들이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아니, 예수님 선전하면 좋잖아요. 예수님 때문에 눈 떴다고 선전하면 좋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입 다물라. 나로 인하여 네가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없다는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 입을 다물라.” 그렇게 당부하신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악마와 싸우기 위함입니다.
인간과 싸우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꽉 잡고 있는 악마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눈뜨면 자기 소원풀이 다한 줄 알고 있어요. 그저 감겼던 눈만 뜨면. 눈감긴 마네킹이나 눈 뜬 마네킹이나 마네킹인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 부흥시키려고 자꾸 우리교회 오면 병 낫는다는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 그런 교회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것은 배나 지옥백성 만드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17장 13절에 나와요. 거기 보면 문둥병자가 또 이야기합니다.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문둥병자 열 명을 고쳐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잘못 이해했구나.’ 하고 돌아온 사람은 열 명 가운데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배설물임을 알아야지 예수님을 가지고 내가 이익 보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왜? ‘문둥병은 수치스럽다. 수치스러운 것은 감춰야 된다. 따라서 나는 딴 것은 못해도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 자비를 구하는 그것은 했다. 그런 나를 나는 지키고 싶다.’ 이래서는 이것은 자기 챙길 것 다 챙긴 거예요. 이래가지고는 예수를 몰라요.
구원은 외부에서 와야 돼요. 이제 두 가지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창세기 18장 2절에 보면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이 집에 있는데 사람 셋이 등장했습니다. 천사 세 명이 온 거예요. 아브라함 자체를 배설물로 만들기 위해서 천사가온 겁니다. ‘아브람’은 안돼요. ‘아브라함’이 되어야 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것은 본인이 죽은 자고, 이 죽은 자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해야 돼요. 이삭이 등장해야 됩니다. 약속의 아들이 등장해야 됩니다.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죽은데서 창조가 나온다니. 우리가 배설물인데 배설물 되는 이 과정 속에서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복음이 나오니까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은 쪽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배설물이기 때문에 복음이 가치 있게 나오는 거예요.
또 한 구절은 다니엘 5장 5, 6절의 벨사살왕 이야기입니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벨사살 왕이 바사의 왕이거든요. 베사살왕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할 때 성전에서 쓰던 그릇가지고 술 퍼마시고 있었습니다. “봐라, 우리가 믿는 신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까불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건방지지요. 신에 대해서 함부로 언급한 거지요. 건방지게.
그런데 다니엘 5장 5, 6절에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손가락만 그냥 날아온 것이 아니고 그 손가락이 벽에 글씨를 썼어요. 그럴 때 바사왕이 많은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저 글자를 해독하라.”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글자인 것은 분명히 맞는데.
왜 그러냐? 인간들이 기존에 땅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법들을 해석하던 그 법의 안목 가지고서는 인간의 땅 말고 하늘에 속한 그 글자를 해석을 못해요. 그 해석중 하나가 오늘 우리가 보았던 본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아는 모든 지식, 나를 지탱하는 모든 지식, 내가 아는 모든 것, 나는 쓰레기였다.”
이걸 성령 안 받으면 누가 해석하겠어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본색이 다 들통 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석하겠어요? 아무도 해석 못합니다. 왜 해석 못하는가? 벨사살왕 자신은 내가 망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기이해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세상의 과학과 철학, 이 모든 학문은 하나님 앞에 분노를 터트리는 분노의 학문입니다. 대드는 학문이에요. 신학을 포함해서. 신학은 교회 지키려는 학문이에요.
모든, 세상의 모든 인간의 학문은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나 괜찮아요. 그동안 내 의를 찾기 위해서 노력 많이 했는데 이 의를 하늘나라에서 너그럽게 좀 받아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 모든 것은 건방지게 하나님을 언급했다는 그 죄목으로, 우상숭배 했다는 그 죄목으로 지옥 가는 모양새를 살아생전에 여과 없이 드러낸 겁니다.
설교하다 보니 좀 걱정되는 것이 있어요. 그러면 이 할머니 지옥 갔습니까, 이렇게 나오는데요. 이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을 공개했다는 거예요. 이것을 공개할 때 어떤 사람은, “할머니도 고생했지만 우리는 더 고생했어요. 할머니는 어떻게 자기세상밖에 몰라요?” 이렇게 욕 얻어먹을 수가 있겠지요.
모든 욕을 얻어먹기 위해서, 물론 할머니 본인이 안했지만, 이렇게 책을 낸 거예요. “우리 할머니 신앙은 이것밖에 안 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적이에요. 내가 나 잘 지키기 위해서 붙었던 그 가짜 하나님사이에 자기가 이러한 우상숭배자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나는 처음부터 자식 키우고 믿음생활 했다는 이것이 바로 죽어 마땅한 것이고, 하나님이 받아주는 의는 나의 신앙생활로 축적된 의가 아니라, 그냥 피로 아브라함 소집하고, 다니엘 소집하는, 자기백성 소집하시는 아버지가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그 관계성, 그 관계성으로 인하여 오직 사도바울처럼 피로만 구원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 그분이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대가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요. 흉내나 내고 모방한다고 신앙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어떻게 살아왔나, 그것이 의미 없음을, 주님께서는 마귀하고 상대하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승리했음을 받아들이는 성령 있는 자들이 성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